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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삼종사선


삼종사선



- 일대사인연, 부처님과의 인연


우리는 지금 가장 큰일을 위해서 모였습니다. 불교말로 하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이 세상만사 중대한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일대사인연입니다. 이 말은 생사해탈의 공부가 가장 중요한 일대사(一大事)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초상을 당한다든지 기타 관혼상제가 있으면 그런 일을 큰일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세간적인 큰일인 것이고 정작 큰일은 생사해탈의 문제입니다. 비단 금생뿐 아니라 영생불멸하는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윤회를 벗어나는 문제, 우리 인간이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고 그리하여 뱅뱅 도는 그런 지겨운 윤회를 떠나서 해탈의 길로 가는 이 일이야말로 누구한테나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인 것입니다.


그럼 대사를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가? 일대사인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간단명료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열 개(開)자, 부처님 법문을 열어서 보인다는 말입니다. 불경이나 조사 어록들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에게 열어서 보이신 것입니다. 개시(開示)는 진리를 열어서 보이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오입(悟入)이라, 깨달을 오(悟)자 들 입(入)자로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성이 무엇인가?' '우리 자아문제는 또 무엇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자아상실이라는 말들을 합니다마는, 사실 성자 이외에는 모두가 다 자아를 상실해 있습니다. 성자만이 우주의 도리인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대사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들에게 생사해탈을 열어서 보이고 동시에 깨달아서 그 속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깨달아서 우리 스스로 증명을 한단 말이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철저합니다. 그냥 교리적인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이해도 알아야 되고 그와 아울러서 꼭 증명해 들어가야 생사해탈이라는 불교의 구경(究竟)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할 때도 역시 꼭 그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진리에 어긋나지 않게 가르쳐야 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깨달아서 자기 스스로 증명하도록 해야 합니다.


- 참선이란 무엇인가


법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참선입니다. 선(禪)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갖는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나 다 참선을 해야 합니다. 자기를 찾는 공부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 참선인데, 모르면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알았다면 다음에는 꼭 참선을 해야 합니다. '참선'이라고 하면 아주 고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세간적인 사람은 엄두도 못 내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참선이 왜 제일 쉬운가? 참선은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에도 제일 편한 자세가 바로 가부좌한 자세입니다. 반듯하게 가부좌한 자세가 소화도 제일 잘 되고 피도 가장 맑게 하는 것입니다.


용수보살의《지도론(智度論)》에도 보면, '시가부좌좌 최안온불피급(是跏趺坐坐 最安穩不疲及)'이라, 가부좌한 자세가 가장 편안하고 피로를 없앤다는 말입니다. 자세가 좋은 사람들은 건강도 좋습니다. 어디 앉더라도 삐뚤게 앉는 사람들은 대체로 소화도 잘 안 되고 병도 오기 쉽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고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상도 건전하고 건강도 좋은 것입니다. 어떤 형태구도 중에서도 정삼각형같이 안정된 모습이 없지 않습니까? 피라미드를 보십시오. 이집트의 피라미드 역시 심심미묘한 기하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삼각주의 중심에다가 무엇을 두면 썩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바로 가부좌한 모습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습 가운데 가장 안정된 모습인 동시에, 제2석가라고 불리는 용수보살 말씀에 '마왕견기 기심수포(魔王見其 其心愁怖)'라, 마왕들이 모습만 봐도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사상이 확실하고 자세가 단정할 때는 그 어떤 삿된 기운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비스듬히 드러눕거나 엎드리는 자세 가운데에서 망상이 생기는 것이지 우리가 바른 사색을 하고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자세를 취한다고 할 때는 나쁜 기운이 근접을 못하는 것입니다.


- 가부좌와 마음의 문제


대화를 할 때도 똑바로 단정하게 앉아서 정식으로 하면 그 사람은 권위가 섭니다. 절대로 남이 섣불리 하지 못합니다.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뜻에 따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떤 면에서나 가장 좋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니, 가부좌한 모습 자체가 그와 같이 훌륭한 것입니다. 참선할 때는 가부좌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리 마음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설사 모양은 태산같이 든든하게 앉아 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고 욕심내서는 참선이 못 됩니다.


참선은 꼭 가부좌만 틀고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역시 마음인지라《육조단경》에 보면 '내 법은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자의 법이란 어느 때나 본체를 떠나지 않습니다. 본체란 것은 근본성품을 떠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절대적인 근본 본체를 떠나서 자기 배운 대로 느끼고 현상만 보고 상식적으로 따집니다.


우리 상식이란 것은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배운 그건 정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 갑은 갑대로 느끼고 을은 을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상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겠지요. 배운 대로, 느낀 대로 따지기 때문에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서로 뜻이 안 맞아 충돌합니다. 노동자나 사용자도 역시 자기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주장하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본체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다 동일합니다.


불교의 위대한 점은 하나의 진리로 귀결시키는 데 있습니다. 마음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성자들께서 가르치신 내용의 특징입니다. 설사 우리가 어느 공장에 가서 일을 한다 하더라도 할일이 생기면 마땅히 해야겠지요. 부처님 법은 절대로 인연을 소홀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하고 남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상황에 임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기술문명을 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사상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네들은 불교가 아주 체질화되어 있어요. 고베의 대지진 때, 그 고도(古都)의 사람들이 굉장히 침착하고 질서 있게, 남보다 앞서 구출되려고 서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미국 사람들이 아주 찬탄을 하고 박수를 보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불교가 몸에 배어 있어서 남이 보나 안 보나 매사에 성심을 다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이라 하는 진리의 실체를 그들이 여의지 않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 21세기를 위한 지도원리, 부처님의 가르침


기독교를 잘 믿는 분들도 역시 하느님을 항시 여의지 않고 삽니다. 하느님이 바로 우주의 실체 아닙니까? 우리가 불교도라고 해서 하느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어디에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능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진리인 동시에 우주의 실상입니다. 따라서 우선 그 개념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신이라,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 나오고에 관계없이 진리 자체인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으로서 진리를 깨달았을 뿐입니다. 예수도 사람으로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주의 도리를 깨달으면 곧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그때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나 무엇이라고 부르나 상관없겠지요. 지금은 세계화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경제는 벌써 세계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국적기업 같은 것처럼, 우리가 싫으나 좋으나 세계화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 사상적으로 교류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적으로 교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다종교ㆍ다민족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은 사상의 혼란기입니다. 사상이 혼란스러우면 도덕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서는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원리가 필요합니다. 그 지도 원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21세기의 지도 원리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그 원리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고 이끌어 간다고 할 때는 그것에 맞는 철학이 우리 불교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느끼면서 참선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우주의 참다운 진리를 순간도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는 게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란 것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저 마음의 도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기차가 레일을 바로 따라가기만 하면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전복되지 않듯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진리란 것은 우주의 궤도입니다. 우리가 성자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주의 길에서 탈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우리도 역시 우주의 도리에 따라야만 살기가 편한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의 자연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우주의 도리란 무엇인가? 우주는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동일체입니다. 천지우주는 나와 더불어서 한 뿌리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우리들도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에 따르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중생의 그릇에 따라 하신 방편법문도 있지만 참선만큼은 직설(直說)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일체종지(一切宗旨)의 근본성품이 부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여러 가지 사설을 다 배제하고 직통으로 우주의 핵심진리로 들어가는 것이 참선공부입니다.


- 생활불교와 참선


가사 외도인들이 참선하는 모양은 가부좌도 하고 그럴 듯하지만, 그들은 인과도 믿지 않고 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합니다.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힘도 나고 건강에도 좋다고 하는 정도로, 즉 하나의 유위공덕,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계산부터 하는 그런 선(禪)은 진정한 참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선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한테 복이 온다거나 재물이 온다는 것은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일념(一念), 부처가 되면 그 어떤 복락도 그것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생각할 때는 '지금은 현대화 시대니까 생활불교를 해야 할 것인데, 생활은 어떻게 하고 참선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참선을 하는 것이 생활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근본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근본도리에 따라 살면 남하고도 틀릴 일이 없고, 집안도 화목하게 되며, 국가나 민족 간에도 화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동일한 생명이라,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공부를 한다면 자기 몸이 어디에 있으나,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건 간에 모두가 다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증도가(證道歌)>에 보면 그냥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 참선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라, 앉으나 서나 모두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그렇게 됩니다. 가사 우리가 밤에 잘 때도 삿된 생각이나 하고 텔레비전 같은 것에 정신이 팔린 채 잠이 들면 잠자는 동안에 별별 꿈을 다 꾸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엔 오랜 시간을 자도 몸만 피곤하고 휴식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는 순간에 마음을 정리하고 우리 생명의 고향이요, 일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을 생각하고 잠든다면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부처님 쪽으로 지향을 합니다.


마치 시골들에서 논에다가 물꼬를 내는 대로 물이 흘러가듯이, 우리가 잠자는 그 순간에도 마음의 흐름을 부처님한테로 고정시키고 잔다면 우리 의식은 잠들어도 잠재의식은 부처님 쪽으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꿈도 꾸지 않고 몸도 개운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법은 모든 면에서 다 편안한 것입니다. 이 참선공부도 동양권의 대승불교(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하는 참선법이 최상승선법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은 석가모니만이 천상천하에 제일 높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느님인 것입니다. 다만 자기가 번뇌에 가려져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게 느끼고 공부를 해야 이른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가장 높은 최고의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삼종사선(三種邪禪)이라, 삿될 사(邪)자 고요할 선(禪)자입니다. 참선을 하는 데는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 장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또 어떤 것이 나쁜 방법인가?


참선은 선방에 앉아서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 마음이 진리의 고향인 부처님한테 가 있을 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선방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부질없는 망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꼭 부처님만 부르고 '이뭐꼬' 화두만 든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생명의 실상이요, 우주만유의 본체인 진여불성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하느님을 부르나, '이뭐꼬'를 하나,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나 다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훌훌 털어버리는 넓은 의미입니다. 참선은 부처에도 착(着)하지 않고 조사에도 착(着)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에 따를 뿐입니다.


- 삼종사선이란 무엇인가


삼종사선(三種邪禪)이란 세 가지 삿된 참선을 말하는 것인데, 그 하나가 암증선(暗證禪)입니다. 다음은 문자선(文字禪)이라, 오직 문자나 이론적인 개념으로만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란 놈은 재주와 꾀가 있어서 자기가 필요할 때는 구멍을 세 개 판다고 합니다. 구멍을 한 개만 파놓으면 적들이 침범해서 바로 잡히니까 세 개를 파놓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피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여우 모양으로 잔꾀를 부려 미처 못 통하고도 통했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주가 있고 위풍도 좀 갖추고 큰소리치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도인처럼 보이기도 하겠지요. 못 통했으면서 통했다고 하고 증명하지 못했으면서 증명했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야호선, 즉 여우같이 삿되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암증선(暗證禪)이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이나 조사 스님들 가르침은 참선하는 방법과 진여불성 자리를 증명하는 과정을 우리들에게 극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게으른 사람들은 책도 보기 싫어하고 더구나 불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지라 보기 어려우니까 그저 화두만 들고 다른 것은 다 무시해 버립니다.


우선 선방에서도 경을 전혀 못 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정진할 때 경을 보면 방해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소중한 생명의 글입니다. 다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금과옥조 같은 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서나 훌륭한 선지식들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덮어놓고 하는 참선을 암증선이라 합니다. 그렇게 암증선을 하면 자기 공부가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 놓으면 섣부른 걸 가지고 다 되었다고 교만심을 부리기도 하겠지요.


선지식들의 말씀도 곧이듣지 않고 남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할 때는 틀림없이 아만심(我慢心)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앞서 간 선배들, 선지식들, 부처님 경전들을 충분히 참고해야 합니다. 그 말씀들은 모든 중생들이 성불에까지 이르는 길을 명료하고 소상하게 밝혀 놓은 길잡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게으름 부리고 업장이 많으면 더디게 갈 것이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업장이 가벼우면 훌쩍 뛰어 빨리 갈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그런 길을 무시하고 외면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암증선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경전도 많이 보시고 특히 참선에 관한 여러 가지 책들도 보고 선배들에게 묻기도 하면서, 암중모색하는, 모르면서 헤매는 암증선을 피해야 합니다. 다음은 문자선(文字禪)이라, 참선은 마음을 닦아야 하는 것인데 경만 많이 보고 이론적인 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실제로는 참선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아무리 바빠도 조석으로 한 30분 정도는 참선을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갈 때는 자기 몸뚱이마저 버리고 가지만 오직 생전에 닦은 법력만은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우리한테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젊은 스님들은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잡니다. 재가불자들도 하루 다섯 시간 정도 자면 충분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들은 안자고 몇 달이고 몇 년도 배길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한테 갖춰져 있는 진여불성,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의지를 가진다면 능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의 한 분인 바구라존자는 140세를 사신 분입니다. 장수제일(長壽第一) 바구라라, 그분은 자기 평생에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장좌불와(長坐不臥)라, 항시 앉아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요새 장좌불와하는 사람들을 보면 벽에 기대기도 합니다마는 그분은 한 번도 벽에 기대지도 않고 오로지 앉아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장수제일의 바구라존자는 음식도 하루 한 끼만 먹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또 무병제일(無病第一)이라, 승려가 되어서 140세까지 살면서 한 번도 앓아누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는 '그렇게 무리를 하면 몸이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신경통도 생기고 영양실조로 쇠약해져서 쓰러지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병제일ㆍ장수제일의 바구라존자, 그분은 그와 같이 평생을 앉아서 하루 한 끼만 먹고도 무병하게 장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한테 들어 있는 부처님 기운, 우주의 정기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원자력 같은 것은 광파(光波)의 속도로 초속이 30만 킬로미터나 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고성능의 기운이 우리에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성에 들어 있는 그 기운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대승신앙은 우리한테 들어 있는 무한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불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들어 있는 그 무한공덕을 믿으면 바로 '즉시입필정(卽時入必定)'이라, 그 믿음으로 바로 선정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주 의심을 하고 믿질 못합니다. 나한테 있는 무한력을 믿으면 즉시 삼매에 들어간다는데도 못 믿으니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성자의 말씀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문자도 많이 배우고, 불경도 많이 봐야 되겠지만 참선을 해서 우리 마음을 자꾸 맑게 해야 합니다. 《반야심경》한 편을 보더라도 참선 한 철 하고 볼 때와 두 철 하고 볼 때와는 해석이 다릅니다. 똑같은 법문이지만 성자의 법문은 우주의 본질을 말한 법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화된 만큼 해석을 달리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하고서 경을 보면 '그렇구나' 하고, 평소에 풀리지 않았던 까다로운 문제가 자면서 꿈속에서도 문득 풀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일구월심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이 원래 뿌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풀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도륜스님이라는 도반하고 어디를 가는데 아주 장엄한 궁전이 나왔어요. 그런데 그 궁전 앞에서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서서 자기가 묻는 말에 답을 못하면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보라고 하니까, 저한테 먼저 묻기를 "지옥이 어디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더라면, 그때 당시는 삼십대도 채 안 된 나이라 선명한 답을 못했겠지요. 그런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니 '혜안관시 지옥공(慧眼觀是地獄空)'이란 대답이 나온단 말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질문에 그 대답이 나오기가 어려웠을 텐데 꿈에서는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투철히 혜안으로 본다면 지옥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혜안관시 지옥공'이라, 지옥이라는 것이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 봐야 있는 것이지 정말로 맑고 투철한 마음으로 보면 지옥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무던하게 부처님을 생각하고 정진하다 보면 이렇게 신기하게 꿈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분도 고도의 수학문제 같은 것을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면 꿈에서 그 문제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정신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의 힘이 있는데도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쓰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세포가 백억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결국은 십분의 일도 못 쓰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사상은 뇌세포 문제가 아니라 무한의 능력을 내포한 것이고, 꼭 인간의 뇌에만 그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정기는 우주에 충만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자들은 꼭 뇌 속에 들어 있는 뇌세포만 가지고 이래저래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너지를 그대로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허상(虛相)과 법상(法相)이 나옵니다. 허상, 이것은 부질없는 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하고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허상과 법상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법상은 차근차근 챙기고 허상은 그냥 부정을 해버리면 되는데, 구분을 못하면 이래저래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이나 선지식들 말씀을 참고해서 암중모색하는 선은 피해야 합니다. 또 문자만 따지고 실수(實修)하지 않는 문자선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는 적어도 그 경을 보기 전에 다만 몇 분이라도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고 참선을 하고 봐야 그 뜻과 내용의 갈래가 잡히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경장(經藏)과 논장(論藏)을 다 외운다 해도 그것이 갈래가 안 잡히고 통일이 안 되면 자기 것이 안 됩니다. 이른바 문리(文理)를 알아야 하는 것인데 문리를 모르면 가닥을 못 잡습니다. 참선과 더불어서 해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하나 가닥이 잡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야호선(野狐禪)이라, 여우같이 교만한 짓은 정말로 우리가 피해야 됩니다. 기독교 사회나 불교 사회나 여우같은 무리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칩니다. 한 소경이 무수한 소경을 인도하다가 수렁으로 몰아넣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불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이라,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데려다가 같은 함정에 빠져 죽는다는 얘기지요. 잘못된 스승이 남을 지도하고 이끈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두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잘못 지도한 사람을 불교말로 병도사(病導師)라 그럽니다. 우리 중생을 병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여실하게 말하고 증명하지 않고 꼭 자기 의견을 보태서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지도할 때 병도사를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을 말할 때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꼭 그대로 옮겨주고 자기가 정리한 것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 선의 삼종병과 팔재환


선(禪)의 삼종병(三種病)이라, 禪에는 세 가지 병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미도주작(未到走作)이라, 미처 이루지 못하고 이럴까 저럴까 방황하고 헤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력을 다하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하루빨리 부처가 되어야겠다는 분신(奮迅)은 좋습니다만, 공부는 별로 않고 기분만 앞서서 빨리 도인 행세하고, 남 앞에 나서고 싶어서 서둘러 가는 것을 미도주작이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만 바쁩니다. 참선할 때 마음이 차분해야 호흡도 조용해집니다.



호흡과 참선은 중요한 상관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호흡법도 중요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초기에는 중생을 제도할 때 부정관(不淨觀)이라 '우리 몸뚱이는 모두가 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죽으면 썩어서 문드러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더러운 것뿐이다. 우리가 죄업을 짓는 원인은 대체로 자기 몸뚱이를 금쪽같이 아끼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이렇게 부정하고 더러운 몸뚱이를 아끼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부정관입니다.



또 한 가지는 호흡관(呼吸觀)이라, 호흡수를 헤아리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그렇게 해가면서 기도를 하는 것인데, 이 호흡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도의 요가 같은 것은 주로 호흡법으로 하는 수행방법입니다. 결국 참선하는 자세를 올곧게 만드는 행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마음이 산란스러워서 참선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참선하기 전에 다만 얼마 동안이라도 호흡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되도록 숨을 느리게 쉬고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서 가급적이면 들숨보다 날숨을 길게 쉬어야 합니다.


또는 유식(遊息)이라고 해서 호흡을 오래 멈추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호흡이 저 아래 단전까지 쑥 들어가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참선이 깊어지면 자기가 숨을 쉬고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단계가 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호흡이 딱 끊어져 버립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자기 호흡이 끊어질 정도로 숨결의 고요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지식(止息)이라, 지식이 되어야 참다운 삼매에 들어갑니다. 그와 같이 호흡은 우리 마음의 상황 따라서 그것에 상응된 문제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 법은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呪文)이나 자기 인연 따라서 해야 되지만, 잘 안 되는 경우는 처음 몇 분 동안 자기 호흡을 다스리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너무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은 이도주착(已到住着)이라, 공부에 재미가 붙는다는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오고 지적인 면에서도 그 전보다 훨씬 명석해지면 그 만족감에 이만하면 됐다 싶어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린단 말입니다. 그것이 도인의 경지가 아닌데 몸과 마음이 좀 개운해지면 그만 그 자리에 집착을 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공부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도주착이라 합니다. 이미 어느 경계에 이르러 그것에 머물러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투탈무의(透脫無依)라, 아무것에도 의지할 바 없이 모두가 허망무상하고 텅텅 비어 있다 해서 공(空)사상에 너무 젖어 空에만 치우치고 다른 것에는 조금도 의지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 가지 참선병을 치유하셔야 합니다.


또 참선에 있어서 팔재환(八災患)이라는 여덟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참선하다 보면 쑥쑥 잘 나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도 좋고 신심도 있고 또 방법도 잘 알지만 그렇다고 그냥 잘 나가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전생에 지은 번뇌도 있고 금생에 잘못 보고 배운 습들도 있어서 그런 것들이 장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때는 '이것이 바로 장애구나' 하고 바로 알고 극복을 하셔야 됩니다.


팔재환은 먼저 우(憂)라, 우리는 지금 닥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공연히 지어 근심을 합니다. 가까운 인연이 죽지나 않을까, 사업이 망하지 않을까, 내 자식들이 잘못 되지 않을까 등등으로 필요 없는 걱정을 자꾸 많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자체가 그러한 분별시비를 끊임없이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활동을 하다 보면 자연히 부질없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남이 나를 칭찬할 것인가, 큰 상을 받을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합니다. 이것은 기쁠 희(喜)자 희(喜)입니다. 그 다음은 고(苦)라, 여러 환경적인 요소가 춥고 덥고, 또 너무 편해도 혼침(昏沈)이 와서 괴롭고, 따뜻하고 안락하면 혼침이 더 빨리 옵니다. 추우면 추워서 따뜻한 것을 바라는 망상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이 다 苦에 해당됩니다.


그 다음은 찾을 심(尋)자, 심(尋)은 거친 분별을 말합니다. 다음은 살필 사(伺), 이것은 조금 더 미세한 분별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자가 되어서 우주를 통관하는 하나의 진리, 그 자리를 보기 전에는 항시 망상이 나옵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을 견성해 버려야 망상이 끝나지, 그 전에는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항시 다소간의 망상이 나옵니다. 거친 분별인 尋은 바로 근래에 당한 분별이고, 미세한 분별인 伺는 과거 어렸을 때 또는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이 자꾸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평소에는 잊고 있었던 것들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연기처럼 망상이 피어납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세속적인 탁류에 휩싸여 같이 흘러 버리면 모르는데 세속적인 버릇들과 대항해서 성불(成佛)의 길로 가려고 생각할 때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걸리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분별시비가 걸리고 몸이 피로하면 또 혼침이 오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 나중에 참선을 오래 하시게 되면 가급적으로 활동도 좀 줄이고 말도 줄여서 에너지 소모를 막아야 합니다. 에너지를 너무 소모하면 머리도 흐릿해지고 잠도 더 빨리 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할 때는 될수록 불교 전문술어로 말하면 신구의 삼함(身口意三緘)이라, 될수록 활동을 적게 하고 말도 적게 하고 뜻으로 헤아리지 않고 이 셋(신구의)을 닫아버리면 참선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못하면 어렵습니다. 저도 옛날에 혼자 공부하다가 장작을 패보기도 하고 지게 지고 나무도 해보고 그러다가 너무 과로해서 도리어 공부에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와 같이 너무 피로하게 일을 해도 참선공부에는 방해가 되니까 참선할 때는 모든 생활을 너무 긴장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긴장하면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니까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조절해야 됩니다.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사급취완(捨急取緩)이라, 하나하나의 행동을 느긋하게 해야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분별시비를 여의고, 그 다음에는 입식(入息)이라,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입니다. 또 출식(出息)은 내쉬는 숨입니다. 참선을 오래 하신 분들은 짐작하시겠습니다만 호흡이 장애가 됩니다. 호흡이 잘 안 되어서 공부가 잘 못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던하게 오래 하다 보면 어느 때인가는 자기 호흡을 스스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요해지는 경계가 옵니다. 목과 머리가 툭 틔어서 온몸이 어느 한 곳 막힘없이 시원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초기에는 숨 쉬는 호흡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방이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코가 막히고 추우면 또 감기 같은 질환이 공부를 방해합니다. 축농증이 있는 사람들은 치유한 다음에 참선을 해야지 그냥 버티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따라서 호흡, 즉 들숨 날숨이 자기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되어야 합니다. 사선정에서는 호흡이 끊어집니다. 그때는 통신호흡(通身呼吸)이라, 우리의 생명파장이 법계로 들어가서 우주의 순수에너지와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자의 경지로 들어갑니다. 호흡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거칠고 번뇌가 적으면 적을수록 호흡이 고요해서, 공부도 그것에 정비례해 가다가 나중에는 딱 정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복식호흡, 아랫배 단전으로 하는 호흡에서 더 나아가 통신호흡이라, 스스로는 느낄 수 없으나 몸 전체가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주호흡, 법계호흡이라, 그때는 우주의 파장과 맞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몸에 대해서 조금도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단계가 되면 삼매에 들어 신통자재할 수가 있겠지요.


《요가수트라》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시간 동안 호흡을 멈추고 있다면 손가락 하나 위에다가도 자기 몸을 세울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훈련하기에 따라서 아주 기기묘묘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서커스 같은 것도 보십시오. 훈련에 의해서 그런 고난도의 재주를 다 부리는데, 하물며 성자의 길에서 우리 마음을 수련시켜 무한의 공덕이 있는 불성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할 때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부질없이 근심하고 지나치게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참선하다가도 큰 소리로 웃기도 합니다만, 참선이 깊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참선 기운이 도망가고 맙니다. 될수록 고요한 기운이 새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을 해야 우리 공부가 차근차근 익어집니다.


- 선정 십종공덕


선정 십종공덕(禪定十種功德)이라, 경에 보면 참선을 하면 많은 공덕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무량공덕이 있으나 간추려서 열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 번째는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이것은 우리가 참선을 하면 항상 점잖은 행동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거친 말과 행동이 가라앉고 남에게 나쁜 말도 하지 않게 되며 오직 우주의 도리,  즉 참다운 진여불성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그것에 가까워지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몸도 마음도 안정이 취해지고 부당한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생활을 위해서 장사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남을 위해서 유익한 것인가?' 생각해서, 설사 돈을 많이 번다하더라도 자기와 남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당한 행동을 취하게 되는 이것이 안주의식입니다.


두 번째는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자비심이 절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비심을 안 내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나와 남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본래 한 생명에서 나온 한 몸이요, 우주는 결국 동일률(同一律)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해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비심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자비스러우며 용서도 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무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번뇌 아닙니까? 진리에 입각해서 항상 진리만 생각하고, 진리에 따라서 정화가 되는 사람들은 번뇌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공덕을 무번뇌라 합니다.


네 번째는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눈ㆍ귀ㆍ코ㆍ입,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 등이 온전하게 보호된다는 말입니다. 이것들은 몸에 문제가 생기면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물론 병적인 것도 있겠지만 참선을 하면 이런 것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눈이 나쁜 사람들도 참선을 많이 하면 시각이 밝아집니다. 따라서 나이가 칠팔십이 되도록 끝끝내 참선한 사람들은 늙어도 몸은 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스님들은 중생제도 때문에 항상 무리를 많이 합니다. 힘든 데를 가시기도 하고, 묵언(默言)하고 싶어도 말을 해야 하고, 할 수 없이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다 보니 무리가 되어 몸이 상하게 되지요. 그렇지 않고 선방에서 공부만 하고 지낼 수 있다면 항상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먹지 않아도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일반인들이야 만반진숙에 맛있는 음식으로 기쁨을 느끼겠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선에서 느끼는 맛은 음식에서 느끼는 맛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과 마음도 개운하고 평소에 몰랐던 것도 모두 깨닫고 항상 컨디션이 가볍고 좋은데 무슨 음식에 마음이 가겠습니까? 많이 먹으면 먹은 만큼 부담스럽고 몸도 무거운 것입니다.


음식은 적게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부처님 식으로 먹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삼세제불일종(三世諸佛一種)이라, 하루 한 끼만 자시는 것입니다. 원래 선방에서도《백장청규》에서 이른 대로 아침에 죽 조금 먹고 낮에 한 끼 먹고 오후에는 불식(不食)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변하고 환경도 너무 오염되어서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우니까 조금씩 먹는 것은 무방하겠습니다만, 가급적이면 적게 먹는 것이 우선 비만증을 방지하고, 소화도 잘 되고, 피도 맑아지며, 머리도 훨씬 더 총명해집니다.


지난번에 신문을 보니까 올해 64세가 된 텍사스 주립대학의 한국인 교수는 노화방지위원장을 지내며 하루 한 끼만 먹는다고 했어요. 오후 두 시에 한 끼만 먹는데도 몇 십 년을 한 번도 아파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장수의 비결은 결국 소식(小食)이라, 적게 먹는 데 장수의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정확한 실험과 데이터를 낸 것이니까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그런 것은 참고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이 많은 분들도 억지로 배고프게 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가급적 미식을 하지 마십시오. 고기나 기름기 많은 음식들은 문명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현대 병리학자들이 다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여섯 번째는 원리애욕(遠離愛慾)입니다. 이성간의 욕심이 애욕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이 가장 깨기 어려운 것이 역시 이성간의 애욕입니다. 우리 스님이라 해서 애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애욕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합니다. 따라서 주의하고 조심해 가며 공부를 해야 이루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고 어떤 상황을 함부로 취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걸려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아래서 성불하실 적에 마지막 순간까지 삼천녀(三天女)가 나와서 방해를 했다고 합니다. 삼천녀는 결국 우리 마음 속 애욕의 상징이 되겠지요. 그와 같이 욕계중생은 몸을 받은 이상 그런 욕심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성간의 욕심, 음식 욕심, 잠 욕심, 이것이 욕계의 세 가지 큰 욕심이고, 그 나머지의 부수적인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이성욕(異性慾)ㆍ수면욕(睡眠慾)ㆍ식욕(食慾)입니다. 그러나 다른 천상에는 이런 욕심이 없습니다. 우리 욕계에만 있는 것입니다. 욕계를 떠나 버리면 그런 욕심은 없어집니다. 색계(色界)라, 눈에 보이는 세계만 따지는 분들은 색계나 무색계를 다 무시합니다. '그런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디 실제로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우리 인간도 '제법공도리(諸法空道理)'에서 보면 인간세상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지금 가상(假相)으로 꿈같이 존재하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공을 모실 때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 수월 즉 물 속에 있는 달은 실재가 아니라 달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듯, 우리가 불공을 모시는 절이나 모든 도량이 물속의 달그림자처럼 사실로 있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인간도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같이 또는 허깨비같이 가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르고서 곧이곧대로 참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인간은 실존이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도 훌륭한 실존주의 철학자이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말을 많이 했습니다. "참다운 실존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영원의 차원에서 참다운 실존이 있는 것이지, 다른 모든 것들은 항상 무상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물속에 비친 달그림자와 마찬가지고, 또 색계나 무색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있기는 있습니다. 결코 허무는 아닙니다. 우리 인간도 허망(虛妄)한 것이지만 이와 같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 죽을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한시도 멈춤 없이 변화무쌍하고 허망하지만 인간이 존재하듯이 색계도 존재합니다. 색계에 올라가면 남녀 이성은 없습니다. 중생만이 남녀가 결합을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한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부나 수녀, 비구나 비구니처럼 독신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오로지 본래의 자기, 신성한 본래의 생명을 찾는다고 할 때는 가정을 가지면 분명히 장애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자기의 아들이나 딸도 참다운 종교를 만나고 친척이나 가까운 인연들도 참된 종교생활을 하고 열심히 일해서 좋은 일도 많이 하면 공덕이 되겠지요.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참선을 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츰차츰 애욕이 희박해집니다. 그러다가 불성광명(佛性光明)의 참다운 진리를 체험한 뒤에는 완전히 애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일곱 번째는 수선불공(修禪不空)입니다. 우리가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물질도 空이고 모두가 空이다' 이렇게 空도리를 말로 너무 많이 들어놓으면 마음이 허무해져서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참선을 해보면 마음은 비어 가지만, 그냥 빈 空이 아니라 그 속에는 무량공덕으로 환희심이 충만해 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심신이 텅 비어 오면 거기에 정비례해서 환희심이 더욱더 증가됩니다.


따라서 수선불공, 참선을 닦으면 허무주의적인 空은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환희심과 공덕이 충만하기 때문이지요. 이론적으로 空을 느끼면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지만 참선을 한 사람들은 허무주의적인 空에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해탈마견(解脫魔羂)이라, 살다 보면 남한테 원인이 될 일을 하기도 합니다. 과거 전생에 남을 핍박한 일도 있었을 것이고, 금생에도 어쩌다 더러 섭섭하게 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우리 운명에 장애가 됩니다. 금생에 자기는 무던히 잘하고 사는데도 어려움을 당하고 더러는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는 경우는 과거 전생에 우리가 지은 업장이 장애가 되어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참선을 하면 그 원인들을 차근차근 풀어갈 수 있겠지요.


업장을 많이 지어 놓으면 정업불멸(定業不滅)이라, 그 업을 참선으로 다 풀어버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웬만한 것은 다 풀 수가 있습니다. 참선하는 그 마음은 바로 생명의 실상인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자기를 정화시키고 우주를 정화시키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때문이지요. 가사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데 참회는커녕 더 욕심을 부리고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나를 더욱더 미워하고 원망이 깊어지겠지요. 그러나 내가 정말로 인간적으로 충실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행동을 취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한다면, 그 훈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그 사람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더욱더 치성해지고, 욕심을 부리면 우리 몸에 있는 수소는 더욱 치열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하나하나가 다 물질로 화(化)하는 것입니다. 에너지라는 것이 결국은 물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남을 지독하게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것이 쌓이고 쌓여 암이 되고 병이 됩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에이즈균이 되고 천재지변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에이즈균 같은 것은 정말 무서운 것 아닙니까? 물론 앞으로 백신을 발명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불확실한 것이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로 사는 것입니다.


아홉 번째는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부처님의 경계, 천지우주가 하나라는 영생불멸한 공덕 가운데에서 항상 편안하게 머문다는 말입니다.


열 번째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이렇게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가니까 모든 걸림으로부터 차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성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자유를 부르짖는 민주주의 역시 우리의 정신적인 수양과 더불어서 해야지, 도덕은 제쳐두고서 제도적인 자유만을 위해 싸운다면 그야말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문제는 항시 도덕이 앞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참선공덕을 항상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더욱더 참선이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우선 내 행동이 점잖고 품위가 있게 되고, 평소에 독한 사람도 악심이 없어지고 부드러워져서 유연선심(柔軟善心)이 되고, 또 번뇌가 줄고 귀도 눈도 밝아지는데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우리가 고기 안 먹고 술 마시지 않아도 항상 기쁩니다. 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 스님네가 고기를 먹으면 입이 다 부르틉니다.


우리 불자님들, 재가불자님들도 되도록 고기를 드시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한테 별로 이익 될 것이 없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돼지나 소 같은 축생들은 사람보다 훨씬 더 업장이 무거운 것인데, 그 세포가 사람한테 들어오면 그만큼 우리가 오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비심을 손상시킵니다. 우리는 몰라도 귀신들은 다 봅니다. 선신들은 고기 많이 먹는 사람을 무서워해서 피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그것은 사람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닙니다. 개와 나도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그네들의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 안 먹어도 우리가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그전에 우리가 자랄 때는 일 년 내내 가야 돼지나 쇠고기를 한 번이나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촌에서도 한 달에 몇 번씩 먹는다고 해요. 그렇게 외국에서 수입하면서까지 외화를 낭비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육식한다고 더 건강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다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육식을 하게 되면 우리 자비심을 손상시키고, 또 악신(惡神)은 그 냄새 맡고 가까이 붙고, 훌륭한 선신들은 냄새 맡고 도망가고, 우리 마음 닦는 공부도 잘 안 되고, 죽어서는 악귀에 떨어지기 쉽다고 불경에 명문으로 나와 있습니다.


금생에 깨끗이 한세상 지내다가 가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내외간에 화목하고, 하루 세 끼 먹을 것을 한 끼 먹는 이웃과 나누면 살기가 참 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노사분쟁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겠지요. 이것이 도리에 따르는 것이고, 참다운 자연법입니다.


- 삼명육통이란 무엇인가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제가 삼명육통이란 말을 자주 하는 편인데, 더러는 '삼명육통은 외도꾼들이 하는 것인데...' 하며 뒤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신통을 하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는 없지만, 부처님 말씀에 공부가 되면 저절로 신통이 나온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무시할 것입니까? 실제로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을 했고, 지금 종교인들이 불신 받는 세상에 삼명육통을 하는 도인이 있다고 생각을 해본다면 집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컴퓨터 문화가 기기묘묘한 재주를 다 냅니다만, 우리 불성은 그런 류가 아닌 것입니다. 컴퓨터는 인간이 입력을 시켜야 나오지만 그보다 훨씬 더 무한한 성능이 우리 불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성을 계발하면 그런 컴퓨터는 문제도 안 됩니다. 그 무한능력 중 하나가 삼명육통입니다. 삼명(三明; 숙명통ㆍ천안통ㆍ누진통)은 무엇인가? 우선 과거의 통달무애라, 과거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더러 점쟁이한테 점을 쳐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구경해 본 기억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귀신들도 과거를 조금은 봅니다. 더러는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지요.


사람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본래의 영명함이 많이 가려집니다. 살면서 세속적인 여러 가지를 배우다 보면 분별시비가 잔뜩 쌓여서 영명한 본래생명이 흐려집니다. 그러나 어린 사람들을 보면 더러는 이상하리만큼 영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천재적인 꼬마들이 간혹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분별시비와 삼독심(三毒心)을 다 떠난 도인들은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우리 마음을 가장 중독 시키는 것이 삼독심입니다. 탐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이 삼독심 아닙니까? 그것이 제일 무서운 독입니다. 자기도 오염시키고 남도 독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모든 병이 전생부터 묻어온 업병도 있지만, 금생에는 이 삼독심 때문에 우리 몸과 마음이 중독을 일으킨다고 봅니다. 삼독심만 떠나버리면 그때는 설사 독을 마신다고 해도 그 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를 죽이려고 광통법사 같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독을 드려도 그 독이 몸에 받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달마대사께서 인연이 다한 고로 스스로 가셨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청정한 사람들은 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심으로 오염되어 우리 내장이 청정하지 못한 고로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가 그만큼 오염돼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주의하고 육식과 과식을 피한다면 그만큼 침해를 덜 받습니다. 그것은 생리학자나 병리학자들이 다 증명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삼명, 이것은 과거에 막힘이 없고, 미래에도 막힘이 없으며, 또 우주를 모두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지혜를 가리킬 때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합니다. 그 말은 작은 것, 큰 것 할 것 없이 우주의 모두를 다 안다는 말입니다. 그냥 본질적인 것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 다 안다는 말입니다.


가령《정감록》의 비기(秘記)들을 보십시오. 물론 비기에도 틀리는 것이 있지만 더러는 아주 신통하게 맞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계발하면 할수록 그렇게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 내다보고 미래를 보고 우주를 본단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한테 본래 있습니다. 《정감록》에만 있고 도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다 있는 것인데 우리가 계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발하는 작업이 바로 참선이고 그 참선법이 가장 훌륭하고 지름길로 가는 방법입니다.


참선이야말로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무한공덕을 길러내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행동을 주의해서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우리 마음을 항시 본체인 부처님한테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남과 얘기를 하거나 책을 볼 때나 일을 할 때나 항상 그곳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차근차근 그것에 접근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에 통달하고 동시에 자기 번뇌를 완전히 녹여버립니다.


불교말로 하면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이라, 과거에 통달무애하는 것이 숙명통이고, 미래에 통달무애하고 우주를 모두 내다보는 것이 천안통입니다. 누진통은 번뇌를 다 떼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다 떼어버리면 성인이 되겠지요. 과거에는 미개한 때라서 특수한 사람들만 성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직관적으로 성인이 나올 때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굉장히 영리하니까, 사상적으로도 그 많은 전쟁과 반목을 통해 많은 경험을 다 했지 않습니까?


그런 전쟁과 반목은 다 성자의 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전쟁을 방지하고 사람으로 인한 인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길을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정보화 시대에서 정보가 교환되면 될수록 성자의 길은 더욱더 빛날 것입니다. 그 길밖에 다른 길은 없으니까요. 그 다음은 육통(六通; 六神通이라고도 하며, 천안통ㆍ천이통ㆍ타심통ㆍ숙명통ㆍ신여의통ㆍ누진통)이라, 이 육신통은 위에서 언급한 삼통에 다 같이 거두어져 있습니다. 천안통은 우주를 다 내다보는 것이고, 천이통(天耳通)은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다는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재주가 없어서 영어도 잘 못하고 영어 하는 사람들 말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마는, 만약 천이통을 했다면 영어를 안 배워도 다 알아듣는 것입니다. 천이통이란 그와 같이 개가 짖으면 축생의 말도 알아듣는 것입니다.


타심통(他心通)이라,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들은 타심통을 다는 못해도 척 보면 대강 그 사람을 짐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격도 있으니 함부로 지적은 하지 않습니다.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아는 지혜고, 다섯 번째는 신여의통(身如意通), 즉 신족통(神足通)이라, 이것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기적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정통법을 받은 분이 마하가섭존자이고, 그 다음 분이 아난존자인데 아난존자가 열반 드실 때의 그 열반상은 우리에게 굉장한 신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분은 신통을 여실하게 증명했습니다. 부처님의 금관을 역사(力士)들이 횃불로 불을 붙였지만 붙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름을 부어도 안 붙으니까 부처님께서 자비심으로 화광삼매(火光三昧)라, 직접 자기 몸에 불을 내어 스스로 금관을 태우고 몸을 태워 사리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 불성 가운데는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란 정말 기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즉 우리 불성을 가리켜서 마니보주(摩尼寶珠)라, 여의주(如意珠)라, 온갖 것이 다 나오는 보물구슬이라고 합니다.


그런 위대한 마음을 두고서도 모르니까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금을 가지고서 얻어먹는 거지'라고 그럽니다. 그런 값진 보배를 가지고도 가진 줄을 모르고 하찮은 일에 생명을 낭비한단 말입니다. 금을 잔뜩 곳집에 넣어 놓고 거지행세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무한공덕장인 우리 마음을 캐내는 작업을 하면서 사업도 하고 사회 일도 하면 훨씬 잘될 것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는 물과 불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만 생각하면 불이 되고, 물만 생각하면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삼명육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예수한테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고 하느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게을러서 그렇지 못할 뿐입니다. 《아함경》에 전하는 부처님 말씀 중에 "영생불멸하는 그 길은 분명히 있는데 우리 중생이 가고 안 가고 하느니라." 영생의 길은 분명히 있는데 중생이 게을러서 가고 안 가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신여의통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불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힘을 내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무한한 성능이 불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짐작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음에 누진통, 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번뇌를 마저 다 떼어버리는 그런 신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탈(解脫)이라, 우리는 한사코 해탈을 해야 됩니다. 해탈을 해야만이 우리 삶은 완성이 됩니다. 우리 삶의 보람은 우리 스스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가짜입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어느 때 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병들어 죽을지, 사고를 당할지, 천재지변으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급박한 것이 무엇인가?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찾는 일'입니다. 참다운 자기는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지상과업인 것입니다. 모든 번뇌의 구속을 다 끊어버리고 해탈의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속을 받고 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때문에 얼마나 구속을 많이 받았습니까? 또 김일성주의 때문에 우리 북녘 동포들이 얼마나 처절한 속박 속에서 고생을 합니까?


불교는 그런 구속을 다 푸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구속, 제도적인 구속을 다 풀어서 성불하기 좋은 제도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하기 제일 좋은 제도가 바로 승가의 법인데, 진정한 승가의 법은 감투나 놓고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라, 해탈에는 지혜해탈(智慧解脫)과 선정해탈(禪定解脫)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치로 해서 먼저 부처님의 경전 말씀과 선지식들이나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기본적인 길을 알고 가야 합니다. 불교공부는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지혜해탈은 이론적으로 막히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보통 이론적인 체계만 서면 공부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에서 보면 그것은 지혜해탈에도 미처 못 간 것이니, 참다운 해탈은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참다운 해탈은 선정이라, 참선을 해서 우리 생리와 심리가 아울러 맑아지고 이른바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우리 몸뚱이 역시 정화가 되어서 나쁜 짓을 할래야 할 수 없게 되어야 합니다.


공자가 칠십이 되어서 말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이런 정도가 되어야 선정해탈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우주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정도가 되려면 평소에 우리 행동을 도덕적으로 훈련시켜야 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이 우주의 근본진리인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본질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참선공부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주의 본바탕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저 하늘 어디에 따로 있고,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고 생각하면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나 밖에나, 어디에나 다 존재하는 하느님, 부처님, 이렇게 생각할 때만이 참다운 참선공부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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