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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가

제Ⅰ부 마음의 고향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가



- 불교는 왜 어려운가


불교는 왜 그리 어려운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불교가 눈에 보이는 세계, 이른바 형이하학적이고 형식적인 세계만 가지고 말씀했으면 상식적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인 눈에 안 보이는 세계, 즉 영생불멸하는 정신세계까지를 아울러서 다 포함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어차피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눈에 안 보이는 세계, 이른바 신비부사의한 세계까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실 일반 분들이 아시기가 좀 어렵습니다. 일반 엘리트들도 전문적으로 철학을 공부 안 했거나 종교를 공부 안 한 분들에게 그런 문제는 더 어려운 것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것은 어렵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나의 본래생명은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주란 것은 장차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과거 전생은 어떠한 것이며, 과연 영혼세계는 있는 것인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굉장히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인하면 그만이지요. 또 없다고 생각하면 이른바 유물론자처럼 모두가 다 물질인 것이고, 우리 사고활동도 결국은 뇌의 반사작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자기 고민도 해결이 안 되고 항상 불안 속에서 헤맬 것이며, 가정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또는 국제적으로 보나 그러한 형식적인 문제만 가지고 생각할 때는 도저히 문제의 해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가장 심오하고 성실하게 사신 분들, 예컨대 공자나 석가,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노자 같은 분들이 결국은 인생을 가장 성실하게 인생의 바닥까지를 훤히 알고 사신 분들인데 그분들의 말씀은 똑같습니다. 그때그때 시대상황에 따라서 또는 중생 근기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있게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그분들도 천지우주의 근본자리를 항시 생각하고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안주시켰으며 동시에 본래가 그 하나의 자리, 그 차원에서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했습니다.


<마태복음> 어느 구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가서 "주님, 주님께서 가장 중요시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생명의 근본자리인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서 오로지 믿어야 할 것이고, 그 다음은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기독교 가르침의 전부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근본자리, 근본생명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항시 풀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붕붕 떠서 삽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상식적인 세계만 보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그러한 형식적인 허망 무상한 세계를 다 간파하고 이 현상세계의 근본본질을 깨달은 분이란 말입니다. 본질을 깨달아 보니 내 생명뿌리나 그대 생명뿌리나 미운 사람이나 또는 나쁜 사람이나 다른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 다 근본뿌리가 동일한 생명체였던 것입니다.


- 진정한 생명의 진리를 찾아라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우주생명체입니다. 그리고 생명이라는 것은 크다 작다 대립적으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면 그때는 크다 작다, 많다 적다, 여러 가지로 분별시비가 되겠지만 생명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바늘귀만한 데 들어 있는 생명이나 태산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나 똑같습니다. 즉 다시 말씀드리면 생명은 우주에 충만해 있고 우주는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기라는 것도 역시 대류권 내에서는 산소와 수소가 있고 질소가 있지만 성층권에 올라가면 그것이 파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 위에 자기권이고, 더 올라가면 거기에는 전자도 없습니다. 수소만 있단 말입니다. 더 올라가면 아무것도 없는 순 진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나 부처님은 진공이 됐든 어디가 됐든 충만해 있습니다.


충만해 있다는 것은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우주란 것은 모두가 하느님이나 부처님 생명뿐이란 말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연기법(緣起法),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됐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됐든지 간에 부처님 도리이고 우주의 본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바로 진리니까 진여라 하는 것이고, 생명이니까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아니면 부처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소박하게 생각하여 소승적 견지에서 부처님은 석가모니만 부처님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질 때는 그렇게도 됩니다만, 그것은 일반 중생들의 소승적 견해일 뿐입니다. 참다운 부처님은 석가모니가 나오고 안 나오고에 상관없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항시 존재하는 생명 자체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내 생명, 이 몸뚱이야 죽든지 말든지, 석가모니가 나왔든지 안 나왔든지 상관없이 영생불멸한 진리는 항시 그대로 있단 말입니다.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둬야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그 자리는 변동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제아무리 믿고 의지한다 하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지는 것이고 부모도 가는 것이며 자식도 아프다가 죽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서로 믿어야 되겠지만 인간이라는 것은 성자가 아닌 바에 어느 때 가서는 배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본질에다가 안주시켜 놓고 살지 않으면 자기 지탱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동반자살도 하고 엉뚱한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실체


여러분들이 들어서 잘 아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씀을 두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성철(性徹) 큰스님이 지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무엇이나 우리가 근거를 알아야 엉뚱한 소리를 안 합니다. 이 말은 성철스님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성철스님이 만들고,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보조스님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상적으로 수박 겉핥기식의 싸움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깊은 뜻도 있겠지만 쉽고 소박하게 말하면, 돈오돈수란 것은 성철스님이 맨 처음 말한 것이 아니고《육조단경》에 벌써 명문으로 나와 있는 말입니다. 돈오점수도 보조국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전반적인 흐름이 다 돈오점수입니다. 그러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다른가? 다른 것이 아니라 돈오돈수라는 것은 우리 중생이 너무 높낮이를 따지고, 계급을 따지고, 이것저것 따지니까 단박 따지지 말고, 앞뒤ㆍ고하를 가리지 않고, 마음에 부처님자리만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이 돈오돈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돈오점수는 우리 중생이 본래 부처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즉 먹는 것이나 무엇이나 이것저것을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너무 본질만 따지고서 형식을 무시하고 차서(次序)를 무시하는 사람한테는 돈오점수를 얘기해서 점차 닦아 올라가는 것을 말해야 하겠지요. 도인들은 그야말로 선(善)ㆍ교(敎) 방편이라, 기가 막히게 그 사람의 정도에 맞게 말한 것을 우리 후대인들은 모르고 돈오돈수는 옳고 돈오점수는 그르다, 또는 그 반대로 말을 합니다.


성자의 말을 가지고 범부들이 싸우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법문이나 예수님 말씀이나 성자의 말이란 것은 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 또는 시대에 따라서 거기에 걸맞은 중생제도의 자비심에서 우러나온 말씀입니다. 이것이 삼반견해(三般見解), 즉 세 가지 견해입니다.


    山是山 水是水                  산시산 수시수

    老僧三十年前 未參禪時          노승삼십년전 미참선시

    見山是山 見水是水              견산시산 견수시수

    乃至後來親見知識 有入處        내지후래친견지식 유입처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견산불시산 견수불시수

    而今得箇休歇處                 이금득개휴헐처

    依前見山祇是山 見水祇是水      의전견산지시산 견수지시수

    大衆這三般見解是同是別         대중저삼반견해시동시별

    有人緇素得出 許與親見老僧      유인치소득출 허여친견노승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23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도(智度) 또는 도피안(到彼岸)의 지혜, 곧 실상(實相)을 깨달은 지혜로써 생사의 차안(此岸)을 건너 해탈(열반)의 피안에 이르는 배나 뗏목 같으므로 도피안이라 합니다. 그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은 벌써 중국 송나라 때 불교 내에서도 그와 유사한 것이 있었으나, 정식으로 쓰인 것은 송나라 때 청원 유신(靑原惟信) 선사 때부터입니다.


이분도 위대한 분입니다. 헌데 범부 소견인 우리 마음이 정화되지 않을 때는 산은 산이고, 물은 그냥 물 아니겠습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그 말씀을 내놓고 그것에 관해 해설을 안 해놓으니까 사람들은 그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 이렇게만 생각해 버린단 말입니다.


애초에 나온 것은 그런 뜻이 아닌데, 그래서 청원선사가, 내가 공부를 안 하고 범부일 때는 산을 보면 그냥 산이고, 물을 보면 그냥 물이고, 쇠는 쇠고, 다이아몬드는 좋으니까 패물로도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자기가 선지식을 만나서 공부를 하고 보니까 산도 산같이 안 보이고 다이아몬드 같은 것도 별것 아니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승공견(二乘空見)'이라, 이승이란 공부를 한 성문승(聲聞乘)이나 연각승(緣覺乘)이 이승입니다. 성문승이나 연각승들은 성자는 성자인데 공도리(空道理)에만 치우친 분들입니다. 진여불성이 무엇인가 하는 데까지는 미처 모르는 분들입니다. '그냥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그림자 같고 꿈같아서 조금도 의지할 게 없다'라는 생각에 치우친 성자가 바로 성문승이나 연각승 같은 분들이지요.


공부를 좀 하다 보면 그때는 텅 비어 온단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공부를 해보면 아시겠지만, 자기 몸도 조금씩 가벼워지다가 나중에는 이 몸뚱이가 공중에 붕 떠서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꼬집어 봐도 아프지 않고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은 그런 이상한 경계가 옵니다.


따라서 그런 때는 산을 봐도 평소 상식적으로 볼 때와 견해가 같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달리 보입니다. 사실 우리가 꽃송이 하나를 보더라도 기분 따라서 달리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보통사람들이 그런 것이고 공부를 약간 해서 모두가 다 비었다는 것을 알 때에는 정말로 방 안에 있어도 저 벽 밖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이와 같이 무시무시한 힘이 있습니다.


- 그 마음을 쉬고 보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공부를 좀 해보니 그때는 '견산불시산(見山不是山)'이라, 산을 봐도 그냥 산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은 산을 보면 다만 산이요, 물을 보면 그냥 물인데, 공부를 하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견해가 납득이 되니까 산을 봐도 산이 아니게 보이는 것입니다. '견수불시수(見水不是水)'라, 물을 봐도 물이 아니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부가 더 깊어져서 불교말로 '휴흘처(休汔處)'라, 마음이 다 쉰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마음을 못 쉬고 있습니다. 좋다는 생각, 무슨무슨 생각 등....... 우리 마음은 지금 잔뜩 짐을 지고 있습니다. 성자가 되어야 온전히 마음을 쉽니다. 성자는 집착이 없으니까 돈을 못 벌어도 무방하고 남이 나를 배신하거나 내 집이 불타버려도 무방합니다. 성자들은 본래 그런 것들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목숨도 별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자만이 오로지 마음을 쉽니다. 이것을 불교말로 휴흘처라, 쉴 휴(休), 쉴 흘(汔)자입니다. 번뇌가 다 녹아 마음이 개운하면 그런 단계가 우주의 본바탕을 훤히 보는 단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가 다 부처님뿐이다,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란 말입니다. 번뇌가 있을 때는 그렇게 안 보이지만 번뇌가 온전히 녹아버려서 나쁜 습기들이 다 녹은 다음에는 훤히 비어서 좋은 사람을 보나 궂은 사람을 보나 다 부처같이 보이고 삼천대천세계가 다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모든 것을 가장 바르게 보는 견해가 중도실상입니다. 조금도 치우침 없이 참답게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참답게 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도 바른 견해가 못 됩니다. 참말로 아들을 바르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들은 아들인데 진여연기로 해서 진여불성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내 아들로 태어났다'고 봐야 아들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항상 근본에서 비춰본다는 말입니다.


스피노자를 그야말로 신에 도취한 성자라고들 하는데, 그분은 기독교나 불교를 굉장히 많이 공부한 철인(哲人)입니다. 그런 스피노자가 한 말 가운데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현실 하나하나가 영원에 참여한다'라는 말입니다. 자기 아내를 봐도 영원한 진리에서 잠시간 몸을 나툰 아내가 아닌가, 남편도 영원의 차원에서 인연 따라 잠시간 나에게 나툰 남편이 아닌가, 누구를 보나 그렇게 생각해야 비로소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의 동요가 안 일어납니다. 또 그렇게 보는 것이 연기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법의 좋은 점은 그와 같이 모두를 다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합해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것은 상대성원리밖에 안 됩니다. 그걸로 해서는 인간문제 해결이 못 됩니다. 우리가 진실로 깨달아서 우리 마음의 번뇌가 다 쉬어서 중도실상의 성자의 지혜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산을 보면 바로 참다운 산이란 말입니다. 중생의 기분이 사나울 때 보면 기분대로 산이 보이는 것이고, 기분 좋을 때 보면 별스럽지 않은 산도 이상하게 좋게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무엇을 보나 바로, 제대로 못 봅니다.


누구를 보나 다 자기 번뇌를 섞어서 봅니다. 번뇌의 여과 없이 번뇌에 때 묻지 않고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가 되어야 바로 봅니다. 어느 것이나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성자가 보는 산이라야 비로소 참다운 산이란 말입니다. 참다운 산이란 무엇인고 하면 그야말로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진 산이란 말입니다. 물을 보더라도 성자가 볼 때는 물 역시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진 물입니다. 이른바 진여연기의 물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공식만 알면 참으로 쉬운 것입니다. 중생 차원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때 묻어 보이는 것이고, 성자의 바른 견해로 볼 때는 모두가 다 바른 것입니다. 지금 종교인들의 할 일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가 단박에 성자가 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닦아서 번뇌를 녹여야 하겠지요. 성자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자의 견해를 우리 견해로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가사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 또는 '무소유'라 원래 내 소유는 없다, 이런 것을 말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행할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자가 바라보면 분명히 내가 없고 내 소유도 없으니까 그것이 옳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옳은 견해를 우리가 긍정해야 합니다. 긍정하고서 그에 가까워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종교인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당장에 성자가 되기는 어려우니까, 이론적인 체계만은 바르게 세우는 것이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먼저 이치를 알고 닦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더라도 길목을 알고 가야지 모르면서 덮어놓고 가면 되겠습니까? 믿는 것도 덮어놓고 믿으면 우리의 소중한 힘을 낭비합니다. 분명히 성자의 길을 따라서 알고 믿어야 생명의 낭비 없이 보다 빨리 성자가 지시한 극락세계, 영원불변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그 말로만 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새기고 곱새기고 해서 차원이 좀 높아져서 성문이나 연각이나 그런 이승(二乘)에서 볼 때는 모두가 다 텅텅 비어 보인단 말입니다. 산을 봐도 산이 아니고 물을 봐도 물이 아니고 모두가 다 텅 비어 보인단 말입니다.


이른바 허무주의적인 경계가 되겠지요. 이승(성문ㆍ연각)이란 것은 결국 허무주의와 비슷합니다. 성자가 되어야 허무를 극복한 것이고, 일반 범부들은 허무인 줄도 모릅니다. 허망한 것을 허망한 줄 모르는 게 우리 일반 중생들이고, 성문ㆍ연각 이승들은 일반 중생보다는 좀 앞서 있지만 또 허무에만 치우쳐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다 필요 없다고 하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 같은 사람이 되기 쉽겠지요.


- 마음으로 봐야 제대로 보인다


고형곤 박사라는 분은 참 훌륭한 학자입니다. 아들도 장관과 서울시장을 지낸 분 아닙니까? 팔십이 넘은 분으로 저술을 많이 했는데《선의 세계》라는 저서가 있어요. 그 책에 보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책 한 권을 다 다루었는데, 이런 문제는 심오하고 또 굉장히 난해합니다만, 풀이해 보면 내내야 그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보는 것이고 상식이란 것은 오류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가사 다이아몬드 하나를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다이아몬드는 겉으로 빛이 나니 좋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물리학자가 전자현미경으로 보는 다이아몬드란 결국 탄소가 결합되어서 빙빙 움직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미인도 우리들의 흐린 눈으로 보니까 미인으로 보이는 것이지, 현미경으로 그 얼굴을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렸단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상식적으로 보면 그와 같이 별로 똑똑히 제대로 못 봅니다. 물리학자가 과학적으로 봐도 온전히는 못 봅니다. 현미경으로 보는 것도 물리적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성자가 봐야 영생불멸하는 중도실상을 봅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바와 같이 영생의 차원에서 봐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바로 봐야 예쁘고 미운 게 아니라 부처님 차원에서 다 부처님같이 훌륭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른바 대긍정이 될 수 있겠지요. 상식적으로 보는 견해와 모두를 부정해 버리는 부정적 견해, 또는 성자처럼 대긍정하는 견해가 세 가지 견해, 즉 '삼반견해'인데, 우리 중생은 긍정도 하고 부정도 하지만 긍정한 것이나 부정한 그것은 사실 바르지 못합니다. 우리 기분이 그곳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분이란 것은 번뇌에 가려져 있으므로,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원죄가 들어 있단 말입니다. 원죄에 가려져서 바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좋다고 보는 것이 꼭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쁘다고 보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허무주의적으로 모두를 부정해서 보는 것은 좋은 것도 궂은 것도 모두 다 부정해 버린단 말입니다. '모든 것은 다 꿈이고 허깨비이고 뜬구름이다'라고 보는 것이 모두를 다 부정해 버리는 견해입니다. 따라서 허무주의적인 것은 옳지 못하고 성자만이 가장 바르게 봅니다.


- 성자의 눈과 우주의 본질


성자는 우주의 도리로 보기 때문에 오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번뇌에 가려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의 견해를 우리 견해로 알고 살아야 바로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단박에 비약적으로 성자가 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세월 동안 많은 성자들이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말한 가르침들, 성자들의 말은 다 우주의 도리에 맞고 원 줄거리는 똑같습니다. 성자의 말을 우리 견해로 보고 살아야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우주란 것은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 만법이란 것은 우주만유 모두를 말합니다. 제법(諸法)이나 만법이나 같은 말입니다. 모든 존재, 나까지 포함해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눈에 보이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나 모두를 다 포함해서 제법 또는 만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법이 유식이라고 생각할 때는 물질은 물질이고 정신은 정신이 아닌가?'라는 견해는 평범한 상식 아닙니까? 그러나 부처님 차원에서 성자가 볼 때는 물질이란 것은 우리 중생이 잘 몰라서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고, 현대 물리학자들도 '물질은 에너지일 뿐이다'라고 본단 말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이 에너지가 진동해서 물질같이 보이는 것이지 참말로 있는 것은 결국 에너지뿐인 것입니다. 우주에너지가 그때그때 어떻게 진동하고 얼마만큼 움직이는가에 따라서 전파가 되고 음파가 되는 것이지 본래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전파나 음파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본래 에너지는 우주의 정기(精氣)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며 우리 몸의 세포를 이룹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물 자체, 칸트가 말한 물질의 근본은 무엇인가? 물 자체는 내내야 마음이고, 부처이고, 하느님이고, 또 태극이고, 도(道)란 말입니다.


우주의 근본정기인 순수에너지 그 자리가 진동 상황에 따라서 마이너스(-)가 되고 플러스(+)가 됩니다. 음ㆍ양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음은 마이너스고 양은 플러스 아닙니까?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진동하는가에 따라서 마이너스가 되고 플러스가 됩니다. 그것이 모이면 또 오행(五行)이 되지요.


그런데 이와 같이 움직이기 전에 참다운 실상, 우주의 에너지, 우주의 정기, 즉 말하자면 이것이 알 식(識)자 또는 마음 심(心)자, 즉 식이고 심이란 말입니다. 본래로 돌아가면 다 공(空)이 되어 버려서 물질은 없습니다. 결국 우주의 정기, 에너지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헤아리고 사고할 때 알 식(識)자를 씁니다. 식이나 마음이나 본래 같은 뜻인데, 우주의 본체인 마음을 부처님 또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종교에서 그 마음을 헤아리고 사고할 때 식이라 쓰고 이것을 열 가지 차원으로 구분합니다.


- 열 가지 마음의 눈, 식識


맨 처음 안식(眼識)이라, 시각 눈으로 보아서 알음알이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식(耳識)이라, 청각 귀로 들어서 알음알이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비식(鼻識)이라, 후각 냄새로 알음알이 하는 것이고, 다음은 설식(舌識)이라, 미각 맛으로 알음알이 하는 것이고, 다음이 신식(身識)이라, 촉각 몸으로 알음알이 하는 것이며, 다음은 의식(意識)이라, 생각으로 알음알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 육식(六識)만 갖고 씁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또 몸으로 느끼고, 뜻을 헤아립니다. 우리 범부중생은 상식으로 이 육식 차원만을 갖고 씁니다.


그런데 개나 소나 돼지는 여섯 번째 식 없이 오직 오식과 오감만 씁니다. 개나 소나 돼지 등 동물은 여섯 번째 식이 완전히 잠재해 버려서 식이 안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모두가 다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의 꽃이나 나무나 흙이나 별이나 모두가 다 본래불성이어서 식이 다 갖춰져 있단 말입니다. 다만 발로가 안 되어 있을 뿐이지 그런 것들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즉 동물들은 오감, 오식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좀 더 진화가 되어서 육식을 쓰는 것인데 육식의 뿌리는 무엇인가? 제칠 말나식(末那識)이라, 이것이 육식의 뿌리입니다. 말나식은 모든 망령된 미망과 무명의 근본이 되는 식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결국은 원죄라는 죄의 씨앗을 말합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만심도 있고 욕심도 있는 근본 원죄, 불교말로 하면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는 말입니다. 무명이라는 말은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밝지 못하니 결국은 무지란 말입니다. 무지나 무명이나 같은 뜻입니다. 근본무명, 이것이 제칠 식입니다.


근본무명 때문에 의식으로 활동할 때에도 한없이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남한테 베풀 때도 '내가 저 사람한테 베풀면 저 사람이 좋아하겠구나, 언제 나를 도와 주겠구나' 이와 같이 항시 계산이 들어 있단 말입니다. 일반 범부중생은 순수하게 뭘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중생이라는 것은 항시 위선이 들어 있습니다. 성자가 되어야 비로소 위선을 떠납니다. 성자는 천연적으로 행동해도 위선이 없지만 우리 중생들은 상당히 마음을 먹고 해야 조금씩 나아지는 것입니다.


말나식이라는 것은 모든 어리석고 미망된 마음의 근본인데, 우리 마음이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순자(筍子)의 성악설(性惡說)처럼 인간성을 본래 나쁜 것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지금 학자들을 보면 인간성은 본래 나쁜 것이기 때문에 교육을 해서 도야(陶冶)를 시켜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나식이 전부가 아닙니다. 말나식의 뿌리는 제팔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아뢰야식은 선ㆍ악을 떠나서 모든 종자가 다 들어 있습니다. 나쁜 종자, 좋은 종자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마음은 사라져 버려도, 그 종자가 여기에 다 남아 있게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종자가 들어 있다가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 깊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더 미워지는 것이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죽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우리가 생각을 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에 항시 저장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자식이라, 선ㆍ악의 종자가 여기에 들어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연이 닿으면 종자가 다시 싹이 터져 나옵니다.


- 아홉번째와 열번째 마음


그러면 이것이 마음의 근원인가? 이것도 근원이 아니라, 다행히도 보다 더 큰 근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청정식(淸淨識)이라고도 합니다. 저 근본에서 볼 때는 좋은 것이나 궂은 것이나 모두가 다 청정하단 말입니다. 여기에 바닷물이 있다고 할 때 바닷물 표면에 비가 와서 흙탕물이 들어가면 표면은 오염이 되겠지요. 그러나 몇 십 미터 수면 밑은 오염이 안 됩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마음이란 것은 아뢰야식이 근본 바탕이 아닙니다.


보다 더 깊은 바탕이 암마라식인데, 이곳은 나쁜 종자가 들어오든 좋은 종자가 들어오든 상관없이 항시 청정하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정식(白淨識)이라, 그야말로 순결하고 청정하단 말입니다. 암마라식은 백정식으로 풀이가 됩니다. '암마라'라는 말은 인도말로 불식(佛識)이라는 뜻인데, 즉 부처님, 진여불성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못난 우리 마음도 근본은 부처라는 것을 짐작하시겠지요? 우리가 좋다 궂다 하는 것은 말나식 차원인지,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면 내내야 다 부처가 나옵니다. 개의 마음이나 소의 마음이나 끄트머리에 가서는 다 부처의 마음인 것입니다.


불경을 보십시오. 전생의 자기 아버지가 지금 자기가 키우는 개로 환생한 사연도 많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지은 바에 따라서 윤회합니다. 뱅뱅 돕니다. 죽어서 개도 되고, 소도 되는 것입니다. 시기심을 많이 내고 질투를 많이 한 사람들은 대체로 죽으면 구렁이나 뱀이 됩니다. 지금은 사람의 허울을 쓰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기 번뇌, 자기 업에 걸맞은 허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에 올라가면 천상 허울을 쓰고 그러다가 부처가 되면 그때는 온전한 생명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본래 고향이 부처인데 이 자리가 바로 적멸(寂滅)이라, 번뇌가 다 없어져 버려서 청정하고, 번뇌의 동요가 조금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 다음이 불성(佛性)이라, 나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면 어디 윤회를 하겠습니까? 예수나 석가나 공자 같은 분들은 다 번뇌에 묶여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높은 극락이나 천상에 계시다가 우리 중생이 불쌍하니까 자비로, 사랑으로, 중생의 구제를 위해서 짐짓 몸 받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분들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본래는 우리 모두가 다 부처님 아들이요 하느님의 아들인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러분도 그냥 업 따라 나오신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높은 데 계시다가 금생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나오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가 부처인데 이것이 본마음입니다. 따라서 남을 미워하고 해코지하는 마음은 본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악마와 천사가 같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악마와 천사 정도가 아니라 바로 악마와 하느님이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악마와 하느님, 악마와 부처님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이고 하느님인데 우리가 잘못 살아서 나쁜 버릇 때문에 엉뚱한 짓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쁜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를 하고 진심으로 타이르면 그 순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도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님, 제 이웃이 저에게 잘못했을 때, 일곱 번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예수께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을 더 용서해라"라고 말씀하셨으니 무조건 다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는 남을 용서 못합니다. 성자는 모두를 다 부처님같이 하느님같이 보며 용서하는데, 자신은 위선도 하고 별짓 다 하는 사람들이 남은 용서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비판을 준엄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분상에서는 남을 용서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의식만 가지고서도 금덩어리나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부처 아닙니까? 그런데 영원히 죽지 않고 빛나는 하느님, 부처님이 우리 본심이란 말입니다. 가장 소중한 보배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소중한 보배를 캐내려고 하지는 않고, 우선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서 아귀다툼하고 죽이고 전쟁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자업자득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번뇌에 묶여서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의 본 마음자리를 캐기 위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본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 깨우침은 언제 오는가


사람 마음도 부처지만 동물도 부처고 또 공기나 물 역시 본래는 다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의 정기(精氣)입니다. 따라서 염불이나 오체투지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그 자리에 가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 못 알아들으니까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하느님은 천상에 계신다고 하는 것이지, 성자의 길에는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안 계시는 데가 없고, 어디든 다 계시는 것입니다.


내 눈 속에나 내 몸 속에나 머리카락 속에까지 다 부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염불을 하고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는 부처님, 우주의 참다운 보배 같은 생명,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는 것이 참다운 공부입니다.


항시 빛나고 있는 것을, 성자가 볼 때는 천지가 환하게 보이는 것을, 우리 중생은 어두워서 못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꼭 보이듯이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해야 달을 보고도 활짝 깨치게 됩니다.


중국 당나라 때 동산 양개(洞山良价) 선사는 자기 스승에게 법을 들을 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업장에 가리워져 있으니까 어려운 법문을 못 알아들었겠지요. 그래도 여태까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부처가 무엇인가?' '도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보니 그만큼 마음이 정화되었지요.


깨달을 때는 어느 순간 어떤 계기가 필요합니다. 스승으로부터 고도의 법문을 들었지만 뜻을 못 알아듣고 '나 같은 놈은 차라리 죽어서 몸을 바꿔볼 것이다' 생각하고 걸어오다가 맑은 시냇물을 보고 퍼뜩 깨달아 버렸단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느님,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 때 고도한 법문을 못 알아들어도 어느 순간에 시절 인연이 와서 깨달을 시기가 되면 그때는 퍼뜩 깨달아 버리는 것입니다. 밥을 먹다가도 깨닫고, 세수를 하다가도 깨닫습니다.


깨닫는 순간은 일정한 때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자나 깨나 밥을 먹으나 일을 하나, 어느 때나 하느님 생각, 부처님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본심이고 우주의 본질인 것이며, 그러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고 한 번 외우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만큼 우리 업장이 녹습니다.


《몽수경》을 보셨죠? 쉽지 않습니까? 조념관세음 모념관세음(朝念觀世音 暮念觀世音)이란, 아침이나 저녁이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위에서 신(神)들이 못 떠납니다. 신들이란 우리보다 훨씬 더 영식(靈識)이 맑습니다. 영식이 맑으니까 우리보다 더 하느님, 부처님을 숭배하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신장들이 환희심을 내기 때문에 어디로 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부처님 이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이란, 우주의 진리고 생명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이름은 우리 사람 이름같이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니라 바로 영원한 생명에 걸맞은 이름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면 영원한 진리가 거기에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번 외우면 외운 만큼 우리 마음도 정화가 되고 우리 업도 녹는 것입니다. 천라신 지라신이라, 하늘에 있는 신이나 땅에 있는 신이나 우리를 못 떠난단 말입니다. 못 떠나니까 일체 재앙이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 행복으로 가는 가장 쉬운 길


우리가 행복을 창조하기란 사실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너무 자기 주관적으로 쥐꼬리만 한 지식으로만 따지니까 참다운 행복을 못 받습니다. 성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십시오. 성자의 말은 거짓이 없습니다.《금강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부처님 말씀은 모두가 다 알맹이 있는 실다운 말씀인데, 우리 범부들이 잘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무지를 알아야 됩니다. 철학의 아버지라는 소크라테스가 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범부가 금생에서 박사가 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진리를 안 것은 아닙니다.


분별지혜라, 일반 세간적인 것들은 중생지혜일 뿐입니다. 박사나 교수가 되었더라도 아직 영원의 차원에서는 무지하단 말입니다. 누구나 다 참회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외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모두가 회개하시오!" 일반 중생들은 잘났으나 못났으나, 지위가 있으나 없으나 다 회개해야 합니다. 본래가 부처이고 하느님인데 아직은 성자가 못 된 사람들이 참회할 수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동물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느끼는 오감ㆍ오식밖에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 인간은 진화법칙에 의해 보다 더 진화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육식까지 씁니다. 다행히도 철인이나 성자 같은 분들은 본래 우리 마음의 근본은 부처라는 것을 알아버렸지요. 금생에 태어나서 육식까지밖에 모르고 죽어버린 사람도 있고, 또는 순자처럼 인간의 마음을 본래 악하다고 보았던 사람이나, 제칠 말나식까지 알고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과거 전생에 많이 닦아가지고 왔기 때문에 금생에 부처라는 것을 알고 환희심을 낸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 뿌리가 부처다, 이것을 안다는 것이 우리 공덕 가운데 가장 소중합니다. 이것을 알면 다른 것은 모두 시원찮은 것입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 '내 마음은 만능을 갖춘 부처다'라고 생각하면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만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조금만 넘어져도 노이로제에 걸립니다. 우리 마음의 무한한 가능성, 즉 우주를 다 알 수 있는 모든 지혜를 우리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일체종지(一切種智)입니다. 예수나 석가모니가 과학을 배웠겠습니까?《정감록》을 쓴 이가 과학을 배웠겠습니까? 그런데 몇 백 년 뒤의 일까지 다 알아맞혔단 말입니다. 성자의 지혜는 모든 것을 다 압니다. '내 머리에는, 내 마음에는, 원래 그런 지혜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내가 지금 배우는 것만 머리에 들어가고, 안 배운 것은 안 들어간다'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하는 것에는 천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은 천지에 두루해 있습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이 아닌 것은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두루하는 것입니다. 은하계도 태양계도 자기 마음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정기로 해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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