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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삼계와 해탈

삼계와 해탈



- 삼계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우리가 보통 '삼계를 떠난다' 또는 '삼계에 머물러 있다'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만, 삼계(三界)는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경계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삼계를 벗어나야 하고, 삼계를 벗어나는 것은 이른바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 전생의 선근에 따라 비약적으로 빨리 벗어나는 분도 있기는 하나, 보통은 공부와 경전에 따라서 점차 닦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선정에 들어가는 초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등은 모두가 다 각 천인(天人)의 선근 정도에 상응되는 것입니다. 가령, 초선천(初禪天)에 나기 위해서는 초선정(初禪定)을 닦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초선천에 있지 않더라도 마음 정도가 초선정에 들어갔다면 벌써 초선천에 있는 존재, 그런 천인들과 정도가 같다는 말입니다. 또 이선정(二禪定)에 들어가면 이선천에 있는 천인들과 똑같은 능력과 선근이 되는 것입니다.


ㆍ삼계- 무색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三界  無色界  무소유처無所有處

                식무변처識無邊處

                공무변처空無邊處


        색계 -- 정범지淨梵地------------ 대자재천大自在天

        色界                                화음천和音天

                                            색구경천色究竟天

                                            선견천善見天

                                            선현천善現天

                                            무열천無熱天

                                            무번천無煩天


                사선천四禪天------------ 광과천廣果天

                                            복생천福生天

                                            무운천無雲天


                선천三禪天-------------- 변정천遍淨天

                                            무량정천無量淨天

                                            소정천少淨天


                이선천二禪天------------ 광음천光音天

                                            무량광천無量光天

                                            소광천少光天



                초선천初禪天------------ 대범천大梵天

                                            범보천梵輔天

                                            범중천梵衆天



        욕계 -- 공거천空居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欲界                                화락천化樂天

                                            도솔천兜率天

                                            수야마천須夜摩天

                지거천地居天------------ 도리천忉利天

                                   사대왕천四大王天 -- 동지국천

                                      남증장천

                                      서광목천

                                      북다문천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합니다. 욕계는 육욕천(六欲天)으로 되어 있는데, 우선 지거천(地居天)과 공거천(空居天)으로 나뉩니다. 지거천은 소위 각 원소의 단계인 지진(地塵), 곧 지구나 토성이나 다른 별들이나 질료(質料)를 의지해 사는 중생들이 사는 곳입니다. 공거천은 업장이 좀 가벼워서 지거천을 떠나 허공 가운데 사는 중생입니다. 이런 천인들은 몸뚱이가 우리 몸뚱이 같지 않기 때문에 허공에서 마음대로 공간을 집으로 알고 산다는 것입니다.


지거천에는 사대왕천(四大王天, 사왕천)과 도리천(忉利天)과 수야마천(須夜摩天, 야마천)의 셋이 있고, 사대왕천 밑에는 다시 동쪽에 지국천(持國天), 남쪽에 증장천(增長天), 서쪽에 광목천(廣目天), 북쪽에 다문천(多聞天)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곳은 욕계의 사왕천 가운데 남쪽 증장천에 딸린 남섬부주(南贍浮洲), 곧 염부제(閻浮提)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재가ㆍ출가를 불문하고 사실은 벌써 그 업장이 상당한 정도로 정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욕계에 있다 할지라도 얼마만큼 욕심, 번뇌를 떠나 있는가에 따라서 그에 상응한 높은 경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거천은 도솔천(兜率天)ㆍ화락천(化樂千)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셋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 천상이니까 천상 나름대로의 통력(通力)도 있습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 같은 원래 법성에 갖추어져 있는 통력은 못하더라도 그대로 그 업력에 따른 보통(報通)이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摩耶)부인은 세연(世緣)을 마치고 도리천에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가 청정하였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세존(世尊)을 낳았겠지요. 흔히 세간에서 알기로는, 불교는 자기 부모도 모르고 윤리를 무시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님을 위해서 도리천에 올라가 3개월 동안 어머님과 도리천의 천상인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셨습니다. 아들을 낳고 7일 만에 돌아가신 그 어머니 역시 아들에 대해 두고두고 안쓰러운 마음이 남아 있었겠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도리천에 올라가 세상은 허망하고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법문을 하셨을 것입니다.


모자(母子)의 정이라는 게 그렇게 두터운 것입니다. 우리가 출가할 때 '은애불능단(恩愛不能斷;은혜와 사랑을 끊기가 어렵다)이지만, 기은입무위(棄恩入無爲;은혜와 사랑을 버리고 相을 여읜 무위법에 들어가다)면 진실보은자(眞實報恩者;진정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다)니라'라는 게송을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어머니 마야 부인이 내려와 비감(悲感)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관을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불현듯 관문이 열리고 세존께서 가부좌한 채로 어머니에게 마지막 설법을 하셨습니다.


"어머니시여! 제행무상이니 회자정리(會者定離)요, 시생멸법(是生滅法)입니다. 세상일은 다 무상하여 만나면 꼭 헤어지는 것이요, 낳는 것은 필시 죽게 마련이니, 슬퍼하지 마시고 이별과 생사를 초월한 부처님 법을 생각하소서."


그러자 어머니께서 그제야 슬픔을 진정하고 안위(安慰)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도리천도 중생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훌륭한 곳입니다. 도리천에만 가도 음식을 먹고 싶으면 저절로 음식이 나온다고 합니다. 천상들은 분단식(分段食)을 먹는 것이 아니고 향기만 맡는답니다. 따라서 야마천은 말할 것도 없고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이렇게 올라갈수록 받는 안락이나 능력이 더욱더 수승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화락천은 문자 그대로, 가령 괴로운 경계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시켜서 기쁘고 즐거운 경계로 만든다는 곳입니다.


타화자재천은 욕계천의 가장 위층인데 마왕(魔王)과 파순(波旬)이 여기에 삽니다. 따라서 마왕은 보통 밑에 있는 천상보다도 능력을 훨씬 더 잘 부립니다. 우리가 앉아 있으면 더러는 이상한 모양을 내어 나투기도 하고 또 꿈에 현몽하여 우리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마왕은 하여튼 우리가 욕계를 벗어날세라 친구 모습으로 오기도 하고 이성의 모양으로 오기도 해서 가지가지로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 초선천의 세계


초선천은 삼매를 닦아서 욕계 번뇌를 떠나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정(入定)이라, 선정에 든다는 것은 욕계 번뇌를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욕계 번뇌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식욕(食慾), 잠욕[睡眠慾], 음욕(淫慾)입니다.


욕계에서도 식욕과 잠욕과 음욕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가사, 음욕에 있어서도 사대왕천과 도리천까지는 남녀 이성의 결합이 있는 셈이지만, 야마천에 올라가면 이성 결합 없이 단순히 서로 포옹하는 정도이고, 도솔천은 악수만 하는 정도이고, 화락천은 서로 바라보고 미소만 띄우는 정도이며, 마지막 타화자재천에 오르면 그 음욕이 눈으로만 웃음 짓는 정도라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참으로 미묘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그와 같이 욕심을 다 떠나면 초선정에 들어 천상으로는 초선천에 납니다. 중생들이 정진하여 공부가 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점검해서 욕심이 남아 있다면 아직 욕계정(欲界定)이라, 욕계에서의 정신통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른바 명상법이나 닦아서 조금 더 맑아진 것이지 선정(禪定)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자기 점검에 엄격해야 합니다.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대범천(大梵天)이 초선천의 세 하늘입니다. 이것은 역시 점차로 번뇌가 희박해져 가는 정도에 따라서 층별(層別) 차이가 있습니다.


- 광명이 훤히 빛나는 이선천


이선천에 들어가서는 온전히, 그야말로 광명히 훤히 빛나서 광명뿐입니다. 본래가 광명인데 삼독(三毒) 오욕심(五欲心)에 가려 있다가 선정이 깊어짐에 따라 차근차근 빛나는 것입니다. 처음 소광천(少光天)에서는 조금 덜 빛나고, 그 다음 무량광천(無量光天)이라, 훤히 한량없이 빛난다는 것입니다. 광음천(光音天)에서는 광명으로 해서 조금도 막힘없이,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도 마음만 먹으면 광명으로 서로 상통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영통이 된다고 합니다.


고집이 세고 강강한 천인(天人)이 허물을 범할 때 옆에서 충고해도 듣지 않으면 범단(梵壇)지법이라 하여 아예 상대하지 않는 벌을 주는데, 이는 서로 말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는 묵빈대치법(默擯對治法)입니다. 좁게 보면 초선천만 범천(梵天)이고, 넓게 보면 초선천ㆍ이선천ㆍ삼선천ㆍ사선천이 모두 범천입니다. 브라만(Brahman)이 범천에 소속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범천에 있는 중생들은 아직도 중생인지라 서로 그릇된 짓도 하는데, 그 가운데 말을 안 들으면 그 벌로 상대를 안 해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려 할 때 아난존자가 "차익(車匿)비구와 같이 고집 센 강강한 비구는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쭸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범단지법으로 대처하라"고 하셨습니다. 충고를 하여 들으면 좋은데 안 들으면 우리 출가사문이 서로 싸울 수는 없으니, 말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는 묵빈대치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 구석구석 맑은 삼선천과 번뇌의 그림자가 없는 사선천


삼선천의 소정천(少淨天)은 청정하기는 하나 아직은 번뇌의 때가 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차차 훨씬 더 맑아져서 한량없이 맑은 경계를 얻음은 무량정천(無量淨天)이고, 그 다음은 변정천(遍淨天)이라, 끝도 가도 없이 삼천대천세계 구석구석까지 맑은 경계입니다. 부처님 나라는 한 삼천대천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무량으로 있는 것입니다. 사선천은 번뇌의 그림자가 없는 무운천(無雲天), 번뇌의 구름이 없기 때문에 복이 저절로 오는 복생천(福生天), 그리고 넓이가 삼천대천세계와 같이 광대무변한 광과천(廣果天)으로 되어 있습니다.


- 성자만 가는 정범지


사선천을 의지해서 정범지(淨梵地)가 있는데, 보통 사선천의 광과천까지는 일반 외도나 천중들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정범지는 청정한 곳이므로 성자만 갈 수 있습니다. 정범지에 있는 무번천(無煩天)은 번뇌가 없는 천상경계요, 무열천(無熱天)은 번뇌가 없으니 항시 청량미를 맛보는 경계요, 선현천(善現天)은 모두가 다 좋게만 광명으로 보이는 경계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기분이 좀 나쁘면 다 나쁘게 보이고 밉게 보이겠지만 여기서는 벌써 애증(愛憎)을 떠난 경계라는 말입니다. 선견천(善見天)은 모두가 좋게만 보이니 우리의 견해도 응당 선량하게 되는 경계요, 색구경천(色究竟天)은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 즉 모든 광명의 본질로서 가장 청정한 광명을 음미하고 생활하는 하늘의 경계입니다.


화음천(和音天)은 신묘한 음률(音律)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경계입니다.《금강경》에 색(色)이나 소리로는 여래(如來)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色은 별것이 아니고 광명이 별것인가? 극락세계나 영원의 세계는 소리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는 세간의 때가 묻은 색이나 소리를 초월한 영원한 묘색(妙色)과 묘음(妙音)이 충만해 있는 곳입니다. 또 정확한 수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고 잘못 살면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광명은 태양빛같이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적광(淸淨寂光), 즉 정광(淨光)입니다. 그런 광명은 영생으로 항시 상주부동한 것입니다. 또 음향이나 하나의 리듬도 화명애아(和明哀雅)라고 하여《법화경》이나《화엄경》을 보면 천상의 음률을 표현하고 있는데, 보통 우리가 느끼는 명곡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청정합니다.


무상한 오욕(五欲) 경계를 떠나버린 청정하고 평온하며 신묘한 음악인 것입니다. 그런 묘음이 우주에는 항시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 광명진언(光明眞言)이나 모든 진언이란 우주에 있는 신묘한 리듬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풀이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주에는 그와 같이 신묘한 리듬이 항시 있습니다. 우리가 명곡을 들으면 좋아하는 것도, 가장 신묘한 리듬이 우리 불성 가운데 원래 존재하기 때문에 명곡을 들으면 그만큼 우리 마음도 맑아지는 것입니다.


- 마음만 있는 중생이 사는 세계, 무색계


무색계는 색을 떠나버린 하나의 심식(心識), 곧 마음만 있는 중생이 사는 세계입니다.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공이 끝도 가도 없는 무량무변의 세계를 다 수용할 수 있는 경계입니다. 또 식무변처(識無邊處)는 일체가 유심조(一切唯心造)요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 모든 것이 마음으로 통찰해 보이는 경계입니다. 처음에는 텅텅 비어 보였지만 업장이 더 녹아지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 곧 의식인 생명이 충만히 있음을 깨닫는 경계인 것입니다.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식(識)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엇이라 이름 지을 수도 없는, 이름과 상(相)을 여읜 경계입니다. 또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번뇌가 거의 다 스러져서 번뇌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번뇌가 있는 것을 지각(知覺)하지 못할 정도로 청정한 경계이며 삼계 가운데 최상의 천상입니다.


- 부처님 밟으신 길을 따라


부처님께서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성도하시기 전 6년 고행 때에도 육사외도(六師外道)한테 가서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삼외도한테 배웠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공부와 관계가 있고 우리에게도 아주 훌륭한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 고행외도(苦行外道)인 발가바선인한테 가서 가지가지의 심각한 고행을 하셨습니다. 어떤 기록에서는 발가바 외도한테 배운 고행은 별것이 아니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그 당시 싯다르타 태자가 부처님 같은 분을 만났으면,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고행을 별로 않고서도 깨달음을 성취했겠지요. 그러나 고행으로써 미처 해탈을 못했다 할지라도, 욕계 번뇌는 초월하여 범천(梵天)에 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삼아승지겁을 닦아온 부처님인지라 고행을 해도 느낌과 얻음이 다르겠지요.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고행을 하면 그것에만 집착해서 고행을 하려고 하지만, 선량하고 총명한 사람은 고행을 해도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부처님께서 물었을 때 "범천에 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나는 것은 영생(永生)을 하고 인생고를 다 벗어나는 것인가?"라고 부처님께서 되물으니까 "범천에 난다 하더라도 역시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 복이 다하면 다시 타락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지, 그런 하늘에 태어나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고 발가바선인을 버리고서 다시 스승을 찾아갔는데, 그가 바로 알라라칼라마입니다.


알라라칼라마는 이른바 수정주의자(修定主義者)로, 선정(禪定)에 드는 공부를 하는 외도의 스승이었습니다. 부처님이 그에게 "대체 어떤 공부를 하느냐?"고 묻자 "무색계의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닦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소유처는 무색계의 셋째 하늘이니 상당히 높은 경계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 인도에는 벌써 선정에 깊이 들어간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을 가리켜 신선, 바라문선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벌써 욕심을 떠난 단계이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스승과 같은 정도인 무소유처까지 들어가는 삼매(三昧)를 발득(發得)했습니다.


무소유처에 들어가 보니 재미있고 쾌락도 있으며 분별망상은 거의 가셨으나 아직은 삼계 내이기 때문에 해탈의 법락(法樂)은 못 되어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 정도면 되겠다 싶어 멈추어 버리겠지요. 수승한 근기와 수승하지 않은 근기와의 차이는 이런 데 있는 것입니다. 수승한 근기는 보통 웬만한 것에 절대로 머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알라라칼라마한테 "무소유처까지 들어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까 "무소유처정을 닦는 것은 모든 괴로움을 떠나 안락하고 오신통(五神通)을 얻으며, 사후에는 무소유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이 "그러면 생로병사를 해탈하고 영생을 합니까?"라고 다시 물으니 "영생은 하지 못하고 다만 오백대겁(五百大劫)까지는 살고 그 뒤에는 다시 떨어지게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내가 바라는 것은 영생해탈이 목적"이라며 떠나려 하자, 자기 아들로서 자기보다 공부가 한 차원 높은 우다카를 찾아가라고 하여 그에게 갔습니다.


우다카에게 가서 "스승님은 대체로 어떤 공부를 하십니까?"라고 물으니 "나는 무소유처를 지나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증득(證得)하는 공부를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존께서는 그곳에서 순식간에 비상비비상처정을 증득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비상비비상처를 닦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서 오랜 세월 동안 천상묘락을 누리기 위함이라" 하니 "그러면 그곳에서는 영생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우다카는 "영생을 할 수는 없고 팔만대겁을 살다가 선정의 복이 다하면 떨어진다"라고 답했습니다.


팔만대겁은 그야말로 삼천갑자 동방삭보다도 훨씬 더 긴 세월이겠습니다마는, 다시 또 떨어져서 잘못하면 지옥에도 간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생로병사를 해탈함인데, 여기도 머물 데가 아니구나. 이제는 스스로 혼자 닦아나가야겠구나' 생각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세 선인(仙人)들은 그 당시 인도의 위대한 스승이었지만 그들의 법은 삼계를 벗어나는 생사해탈의 법은 못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신명을 걸고 좌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교(顯敎)에는 없으나 밀교(密敎)에 있는 법문에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공부할 때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경각(警覺)을 시켰다고 말합니다. 이런 밀교도 공부하다 보면 참고할 대목이 많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우리 자성불(自性佛)의 기운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서로 화합되어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자성이 부처가 아니라면 제아무리 두드리고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자기는 몰라도 자성불은 부처가 되고자 몸부림치는 것을, 우리 중생들이 욕심과 진심과 치심으로써 억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 애써 차근차근 거둔다면 자생적으로 본래 자성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성불은 내 몸뚱이의 어디에 갇혀 있는 것인가? 자성불은 바로 무장무애한 우주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침투가 안 된 곳이 없습니다. 자성불은 자기 몸이 되고 우주만유가 다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스승이 없다 하더라도 정말로 바르게만 닦는다면 꼭 자성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계행을 지키고 한사코 공부하려고 정진해 보십시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바른 스승이 생기고 공부할 처소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지신명은 심심미묘한 것입니다. 한탄할 것은 자기 번뇌요, 다른 것에 책임을 전가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이제 다른 이에 의지하지 않고 내 스스로 깨달아야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할 때, 선정도 벌써 삼계 내의 가장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니 정말로 신묘한 지혜가 발동했을 것이며, 삼세제불이 감응(感應)하게 된 것입니다.


- 삼계에서 어떻게 해탈할 것인가


ㆍ구해탈(俱解脫) -- 혜해탈(慧解脫) : 일체 법이 본래 청정하고 평등일미하여 일체공덕을            구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함

                --  정해탈(定解脫) : 선정해탈(禪定解脫)



우리가 '삼계에서 어떻게 해탈을 할 것인가?' 이것이 이제 우리의 지상명제가 되는 셈 아니겠습니까? 해탈(解脫)에는 지혜해탈[慧解脫]과 선정해탈[定解脫]이 있는데, 이 두 가지 해탈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합하여 구해탈(俱解脫)이라 합니다.


참다운 성자는 지혜에 걸림이 있는, 즉 견혹(見惑)을 타파하고, 우리가 선정에 들어서 사혹(思惑) 또는 수혹(修惑), 즉 일체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번뇌를 여의는 정해탈을 성취해야만 합니다.


사혹, 즉 수혹은 참선이든 기도든 선정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 어떻게 여읠래야 여읠 길이 없습니다. 지혜로써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번연히 깨달아서 '본래 내가 부처구나' 하는 확신이 오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만사에 자재(自在)하는 해탈의 경계에 달하려고 할 때는 꼭 선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선정에 들어가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야 사혹, 즉 수혹을 여의고 우리의 심리와 더불어 생리가 맑아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환골탈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혜해탈은 일체 제법이 본래 청정하고 평등일미하여 일체 공덕을 구족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탈이 못 되면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을 닦지 못해서 습기가 녹지 않으면 참다운 선정해탈이 못 됩니다.


정해탈이 되려면 꼭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하는 출가사문들은 한사코 혜해탈의 근거 위에서 정해탈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옮기는 정도지, 자기 스스로 우러나와서 부처님의 무량법문과 자재신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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