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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실상염불ㆍ참선ㆍ삼매

실상염불ㆍ참선ㆍ삼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의 지나온 과정을 회고해 보면 참 복잡했습니다. 어떻게, 뭘 스승으로 할 것인가? 행법(行法)에 있어서 큰스님들을 만나 뵈면 만나 뵌 분마다 같은 말씀을 안 합니다. 물론 똑같은 말씀도 있겠지마는,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옛날이나 현대나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데서 참다운 법, 참다운 성자가 말한 정통법(正統法)을 선택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부처님 법문에 팔정도(八正道), 칠각지(七覺支)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앞으로 부처님의 기본교리는 외우셔야 합니다. 가사 삼보(三寶), 사제법문(四諦法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蜜), 팔정도 또는 칠각지 등의 기본적인 법문은 별로 많지도 않으므로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중요한 지침이 되고 인간성을 탐구하는 데 참으로 중요한 지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행법을 찾아야


칠각지 법문에서 맨 처음에 택법(擇法)이라 하는 것은 자기에게 알맞는 행법을 가리는 것입니다.


사리불(舍利弗)존자가 목건련(目犍連)존자한테 놀러 갔습니다. 그때 마침 목건련의 제자 두 분이 목건련 앞에 와서 호소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도저히 공부가 안 됩니다. 벌써 출가한 지 오래 되었는데도 도저히 공부가 익지 않습니다."


그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출가하기 전에 성냥간(대장간)에서 풀무질하는 일을 했었고, 또 한 사람은 세탁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건련이 그들의 근기를 잘 몰라서, 곧 그 사람의 개성을 잘 몰라서 풀무질했던 사람에게 부정관을 시키고 세탁업을 했던 사람에게는 수식관을 시켰던 것입니다.

부정관(不淨觀)이란 '내 몸도 부정(不淨)하고 천지우주 모두 다 더럽고 부정하다' 하는 관법(觀法)으로, 우리 욕심을 제거하는 법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의 욕망을 제거하는 문제가 가장 어렵지 않습니까?


수행법도 여러 가지로 많이 있지만, 맨 처음에 어려운 수행법을 시킨다면 업장이 많은 사람은 잘 안 나아갑니다.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 탐심이 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내 몸은 피나 고름이나 오줌이나 똥 같은 부정한 것으로 충만해 있고, 또 죽으면 썩어서 냄새가 고약하고 문드러져서 부정한 것이다' 하는 부정관법으로 탐욕심을 제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란심(散亂心)이 많은 사람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이라, 내쉬고 들이쉬는 호흡을 헤아리는 관법으로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건련은 도(道)는 약간 좀 통해서 어렴풋이는 안다 하더라도 별로 지혜가 없어놔서 잘 분간을 못했겠지요. 그러나 사리불은 목건련의 도반(道伴)이지만 지혜가 수승해서 그냥 척 알았단 말입니다.


'아, 잘못됐구나! 풀무질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마치 호흡 모양으로 하는 것이니까, 풀무질을 했던 사람에게는 마땅히 수식관을 시켜야 하는 것이고, 또 빨래 세탁하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은 더러운 것을 자꾸만 빠는 것이니까 그 사람에게는 부정관을 시켜야 할 텐데..."


그래서 사리불이 목건련에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잘못되었네. 마땅히 풀무질하다 온 사람에게는 수식관을 시켜야 하는 것이고, 또 빨래하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에게는 부정관을 시켜야 될 것인데, 잘못되었어." 그 말을 들은 목건련이 그들의 적성에 맞춰서 다시 행법을 제시하니까 이윽고 얼마 안 가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자기 적성에 맞는 행법, 또는 부처님의 정법에 맞는 행법이라는 것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 행해상응, 교리풀이와 행함이 함께 나아가야


참선한다는 것은 별로 많은 말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참선은 원래 불립문자(不立文字)라 문자를 안 넣고,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오직 사람 마음을 딱 집어서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말도 많이 안 하고, 말 대신에 그냥 버럭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방(棒)으로 후려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요즘처럼 이렇게 복잡한 때는 역시 택법이라, 여러 가지 복잡한 가운데서 법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 사부대중이 참고로 해야 할 것은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실천하는 행(行)과 풀이하는 해(解)가 같이 상응(相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행과 해를 같이 아울러서 행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교리도 많이 아는 분들이 계시지만 더러는 치우친 분도 있습니다. 가사, 책도 많이 보고 연구도 많이 했지만 닦음은 별로 없는 분들은 체험이 부족해서 바르게 느끼지 못합니다. 또 불교라는 것이 마음 닦는 공부라서 교리를 많이 알아도 분간을 못합니다. 불교말로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이라, 마음이 탁 틔어서 개운하면 바로 볼 수가 있지만, 통달보리심에 이르지 못하면 경(經)을 보아도 이것 보면 이것이 옳고, 저것 보면 저것이 옳고, 분간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교공부는 교리풀이와 행이 같이 아우러져야 하는 것입니다.


행만 많이 하고 닦기도 많이 했지만 교리는 별로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부지런히 닦아서 그냥 부처님 지위에 뛰어 올라가면 모르지만, 부처님 지위에 올라가려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약간 닦았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심수오묘(深邃奧妙)한 교리를 어느 정도 연구하지 않으면 바른 길을 모르고 바른 닦음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교리를 바로 알고 바로 닦기 위해서는 행해상응이라, 닦아서 가는 행과 교리를 풀이하는 해가 나란히 가야만이 바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 구구한 말들 가운데 바른 길을 찾으려면 교리를 알아야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지금 나이가 구십이 넘었고 옛날에 불교대학도 나온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한테 몇 번 가서 말씀을 듣고 가만히 보니까, 자기 스스로는 염주를 돌리고 관음주력을 하면서 참선 말만 나오면 그때는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 역설을 하십니다. 그렇게 모순적인 말씀을 하시는 분이 한두 분이 아닙니다. 또 설령 염불을 하더라도 '염불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참 구구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염불종(念佛宗)이라는 한 종파만 있는데, 일본에는 같은 염불을 하는데도 염불종이 세 파나 있고, 또 그 세 파 모두 각각 한 종파가 우리나라 불교 전체보다도 더 많습니다. 그 가운데 일본의 진종(眞宗)은 절 수가 만 개가 넘고 불교대학도 몇 개가 되는 종파로, 이 종파 사람들은 염불을 할 때도 그냥 부처님 이름만 계속 부릅니다. 부처님 상호를 생각하는 것을 배격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민족성이 배타적인 면이 굉장히 강해서인지, 같은 염불을 하는데도 꼭 이름만 불러야 하며 이름 부르는 이외는 그냥 배격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시종(時宗)이라, 염불을 하더라도 때를 골라서 해야 한다는 종파입니다. 나머지 한 가지는 융통염불종(融通念佛宗)이라, 염불을 하더라도 계행(戒行) 또는 참선, 모두를 원융무애하게 하라는 종파입니다. 이와 같이 일본에는 염불종에도 세 파나 있습니다. 또 일련종(日蓮宗) 같은 종파는 일련(日蓮)대사를 부처님 다음가는 분으로 보지 않습니까? 그 종파도 수가 굉장히 많습니다.


창가학회(創價學會) 같은 종파는 한 종파에서 공명당이라는 정당도 내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세력이 강하고 신도도 5백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종파에서도 자기들이 하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일본말로 '나무묘호렌게교' 하는《법화경(法華經)》이름을 외는 것 이외에는 다 나쁘다고 비방합니다. 자기들 하는 것만이 성불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같은 불교도 이런데 다른 종교야 오죽이나 서로를 비판하고 비방하겠습니까? 따라서 좀 어렵더라도 불교를 믿는 분들은 교리를 어느 정도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길을 분간한다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청화'라는 한 개인의 개성에 제한됩니다. 절대가 아닌 것입니다. 저는 공평하려고 애씁니다만 저라는 하나의 개인에 제한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그저 참고로 하시고 스스로 고르셔야 합니다. 저는 다만, 부처님이나 부처님 뒤의 정통 조사(祖師) 스님들의 말씀을 소개할 뿐입니다. 같은 법문도 정평이 있는 도인이 아니라 그렁저렁한 도인, 도인인가 아닌가 잘 모르는 사람들의 말은 별로 참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부처님 뒤의 정통 조사 스님의 말씀을 참고로 해야만 혼동을 피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 뒤에 나오신 달마(菩提達磨)대사라든가 용수(龍樹)ㆍ마명(馬鳴)보살 또는 6조 혜능(慧能)스님, 우리나라로 말하면 원효(元曉)ㆍ의상(義湘)대사, 보조(普照)ㆍ태고(太古)국사, 무학(無學)대사, 진묵(震默)스님, 서산(西山)대사, 사명당(四溟堂), 이런 분들 말씀은 다 옳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 네 가지 종류의 염불


염불도 칭명염불(稱名念佛), 관상염불(觀像念佛), 관상염불(觀想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 이렇게 네 가지 종류로 말합니다.


一. 칭명염불(稱名念佛) :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외우는 염불

二. 관상염불(觀像念佛) : 부처님의 원만한 덕상(德像)을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

三. 관상염불(觀想念佛) :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상념(想念)하면서 하는 염불

四. 실상염불(實相念佛) : 실상(實相), 곧 진리를 관조하는 염불


맨 처음 칭명염불이라, 부처님 이름 즉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외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이름은 명호라고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의 이름은 명호라 하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나 이런 이름은 명호가 되겠지요. 이러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외우는 염불이 칭명염불입니다. 일본 사람들 염불은 이처럼 명호만 부르는 염불이 제일 많습니다.


'명호만 불러서 무슨 덕이 있으랴'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겠지요. 부처님에 대해서 주로 말씀한 경전이 많이 있으나《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는 특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에 관해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대무량수경》에 보면 아미타불이 중생을 제도하려고 과거에 원력(願力)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원력이 끝도 가도 없이 많지만 그 원력을 간추려서 48대원(四十八大願)이라, 마흔여덟 가지 원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다 '중생을 어떻게 하면 빨리 극락세계로 인도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무상대도(無上大道)로 인도할 것인가?' 이런 것을 염원(念願)해서 세운 원력입니다. 그 원력 가운데서 제18원 곧 열여덟 번째 원이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태어난다' 이렇게 보장한 서원이 있습니다.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이라, 성불하는 것이나 극락세계에 가서 나는 것을 왕생이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 이름만 외우며 염불하는 종파들은 그것만 내세워서 '부처님이 보장했으니 틀림없다'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입니다. 비록 관찰도 참구도 않고 이름만 외운다 하더라도 꼭 성불이 됩니다. 부처님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없는 동시에 생각해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하여 그런고 하면, 원래 부처인지라, 또는 부처님의 이름은 사람 이름과 달라서 부처의 공덕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 사람 이름을 자꾸만 부르면 그 사람 영상이 떠오르는데, 하물며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의 공덕을 거기에 다 간직한 이름이요, 우리가 본래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기에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이름 자체가 부사의라는 말입니다. 우리 같은 김아무개, 박아무개라는 이름은 부사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중생이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지만,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께서 친히 무량공덕을 갊아있게[藏], 담게시리 만든 진리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만 불러도 우리의 업장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본래 부처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자꾸만 외우면 외울수록 우리 마음에 부처의 종자가 더 심어지고, 업장의 종자는 차근차근 감소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은 최대로 더욱 강해지고, 드디어 우리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만 남으면 그때는 성불하게 되겠지요. 원래 부처니까 말입니다. 염불만 해도 성불한다는 말씀이 조금도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이름만 외워서는 어쩐지 좀 무미합니다. 우리 공부가 상당히 올라가 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염불이 되는 것이지만, 처음 어느 단계까지 올라가려면 역시 이름만 외워서는 좀 미심쩍습니다. '내가 이름만 외워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고 말입니다.


그런 때 관상염불(觀像念佛)이라, 자비롭고 만덕을 갖춘 부처님의 원만상호(圓滿相好)를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을 우러러보면서, 앙모(仰慕)하면서 염불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염불이 더 잘 되겠지요. 그냥 이름만 외우는 게 너무 무미할 때는 이와 같이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생각하고 덕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이름을 외우고 염불을 하면 부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다음은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 부처님은 그야말로 자비나 지혜나 여러 가지 재주가 한량없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부처님의 무량한 공능(功能)과 공덕(功德)을 상상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이 역시 부처님을 그냥 이름으로만 외우는 것보다 내용이 좀 더 충실하겠지요. 그러나 일반 대중은 하기가 좀 어려울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분들, 또는 이것저것 헤아리기 싫어하는 분들은 이름만 외워도 분명히 성불할 수 있습니다.


네 번 째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 곧 진리를 관조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실상이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영생상주(永生常住)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명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진여(眞如), 여래(如來), 불(佛), 열반(涅槃), 도(道), 실제(實際), 보리(菩提), 주인공(主人公), 일물(一物), 본래면목(本來面目),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하지요.


이 말들은 모두 똑같은 뜻입니다. 어떤 경(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어떤 경에서는 저렇게 말하고, 경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 나게 말했으나 내용은 똑같습니다. 실상염불은 우리가 진리를 미처 모르고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부처님께서 밝히신 대로 진리를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망상(妄想)이고 가상(假相)입니다. 우리는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가상이요, 부처님은 실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상을 떠나 실상을 생각하면서 염불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아직 실상을 못 봤습니다. 실상을 못 본 중생이 어떻게 실상을 보면서 염불을 할 것인가? 이것이 또 큰 문제가 되겠습니다. 아직은 못 봤지만, 부처님이나 도인들 말씀에 의지해서 실상이 어떻게 생겼는가 생각해 봅시다. 실상은 불생불멸하여 원래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즉 원래 생(生)함도 없고 멸(滅)함도 없습니다. 또 불구부정하여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고, 영생상주하여 항시 죽지 않고 머물러 있습니다.


사람이나 기타 현상계에 있는 모든 것은 항시 머물러 있지 못하고 그때그때 소멸됩니다. 사람도 잠시간 머물러 있고, 우주만유도 잠시간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영생으로 항시 머물러 있습니다. 현상은 변화하지만, 진리인 실상은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말하자면 '실상은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고, 영생으로 항시 머물러 있는 진공묘유라, 다만 텅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허공 가운데 가득 차 있는 묘한 그 무엇'이라는 말입니다.


실상은 끝도 없이 허공 가운데 가득 차 있는 그 무엇으로, 구태여 이름 붙인다면 부처요, 도요, 보리요, 진여요, 여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것은 우리 중생이 볼 수 없지만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가 겨우 헤아려 본다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항시 영생으로 머물러 있는, 모든 공덕을 갖춘, 허공 가운데 가득 차 있는 그 무엇이 실상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은 어렵기는 제일 어려우나 부처님의 이름에 가장 합당한 이름이고 염불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하면 이름과 실상과는 거의 계합(契合)하고 거의 합당합니다. 아미타불의 풀이가 무량광불(無量光佛)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입니다. 무량광불이란 말은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말이고, 무량수불이란 영생한다는 말입니다. 또 청정광불(淸淨光佛)이요 무대광불(無對光佛)이라, 청정하고 상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이름은 실상에 걸맞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을 천지우주로 해방시켜서 그 가운데 가득 차 있는 그 무엇, 찬란한 그 광명,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 실상염불인 것입니다. 이 염불이 실은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실상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라야 비로소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입니다. 그저 이름만 외우고 상호만 관찰하여 부처님의 어느 몇 가지 공덕만 생각하는 그런 염불로는 아직 염불선이 못 됩니다.


- 실상염불을 통해서라야 염불선에 닿을 수 있어


원래 선(禪)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실상에 안주해서 실상인 진리에 머물러 한시도 진리를 안 떠나는 공부입니다. 이것이 참선입니다. 따라서 염불도 역시 그와 똑같이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되 우리 마음이 부처님의 진리를 떠나지 않아야만 실상염불이 되는 것이고, 염불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여러 종단에서 염불을 합니다만, 어떤 분들은 실상염불이나 염불선은 아주 어려워서 못한다고 배격합니다. 실상염불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염불선이 되려면 그와 같이 자기가 부처님의 실상 곧 진리를 상상하면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공부할 때는 항시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선 관념상 '내 본바탕도 역시 부처고, 우주가 모두 다 부처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냥 이름만 불러도 그때는 실상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이름만 그냥 불러도 성불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이름과 그 실체, 곧 이름과 내용이 딱 알맞으면 성불이 더 쉽겠지요.


철학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면 너무 어려워지니까, 그냥 쉽게 '내 몸의 본질도 역시 부처고, 산이나 내[川]나 천지우주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부처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면 이것이 실상염불이 되는 것이요, 동시에 염불선이 됩니다.


《정토경전(淨土經典)》에서는 '염불행자(念佛行者) 인중분다리화(人中分陀利華)'라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 가운데서 염불하는 수행자는 분다리화(分陀利華, 白蓮華), 즉 가장 향기로운 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관음세지(觀音勢至) 기위승우(己爲勝友)'라, 염불하는 분들은 그 벗[友] 되는 사람들이 그냥 보통사람이 아니라, 관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좋은 벗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염불하고 있으면, 벌써 보살들이 굽어보고 우리의 벗이 되어 우리 주변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念佛三昧) 총섭일체불법(總攝一切佛法)'이라, 우리 불법에 수행법이 많이 있는데 염불삼매는 일체 불법을 다 거두었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하도 넓고 넓어서 일정한 문이 있는 것이 아닌지라, 어떤 행법으로나 불법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즉, 화두드는 것이나 무엇이나 다 성불하는 법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행법은 역시 염불하는 법입니다.


염불하는 법을 기본으로 화두나 묵조나 그런 다른 행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 염불에 대한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고, 또 정통 도인들도 다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심리(心理)는 보통 지(知)와 정(情)과 의(意)로 구분하는 하나의 속성인데, 같은 공부도 역시 심리의 속성 따라서 거기에 맞추어서 하면 더 빠릅니다. 그래야 빨리 합치(合致)되지 않겠습니까? 염불하는 공부는 우리의 지혜, 우리의 감성, 우리의 의지를 조화롭게 하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에 비해 싫증도 훨씬 덜 나고 또 빨리 성불하는 법입니다.


- 삼매란 무엇인가: 네 가지 삼매


   一. 상좌삼매(常坐三昧)

   二. 상행삼매(常行三昧) : 반주삼매(般舟三昧)

   三.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

   四.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


선(禪)이라는 말과 삼매(三昧)라는 말을 우리는 꼭 외워 두어야 합니다. 불교를 말할 때는 삼매와 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삼매라는 말은 인도의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씁니다. 삼매는 사마디(Samadhi)라고 하는데, 보통 삼마제(三摩提)라고 한문 음을 붙여서 말하고 간추려서 삼매라고 합니다.


삼매는 풀어서 말하면 정(定)이라, 선정(禪定)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이 한곳에 딱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잡념 없이 하나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하여 산란스러운 마음이 없게 하는 것이 삼매입니다. 좀 더 확실히 말하면 우리 마음을 정법(正法), 즉 바른 법에 머물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삼매입니다. 참선할 때의 선이나 삼매나 거의 같은 뜻입니다. 분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누어서 이런저런 말을 합니다만 거의 같은 뜻입니다.


다음은 정수(正受)라, 모든 사물을 바르게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바로 감수를 못합니다. 자기 업장에 따라, 업에 여과(濾過)되어서, 즉 업에 걸려서 감수합니다. 따라서 판단을 바르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맑으면 만상(萬象)을 바로 다 비추어 볼 것인데, 마음이 맑지 못하고 흐리니 만상을 바로 비추어 보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을 왜곡시켜서 만상을 수용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수용하는 것이 정수입니다.


조직정(調直定)이라, 우리 마음을 조화시키고 구부러진 마음을 곧게 하는 공부가 삼매입니다. 정심행처(正心行處)라, 우리 마음을 바른 정법에 딱 머물게 한다는 말입니다. 식려응심(息慮凝心)이라, 잡다한 생각을 쉬고서 우리 마음을 한군데 엉기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삼매의 뜻풀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매에는 무엇이 있는가?


상좌삼매(常坐三昧)라, 항상 앉아서 하는 삼매입니다. 우리가 선방에서 하는 것이 주로 상좌삼매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삼매는 앉아서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습이나 습관이 다르고 개성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앉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걷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부처님 이름 외우기를 좋아합니다. 이처럼 차이가 많으니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이고 많이 하는 것은 역시 앉아서 하는 삼매입니다.


그 다음은 상행삼매(常行三昧)라, 항상 서서 하는 삼매로, 도량이나 부처님 주위를 뱅뱅 돌면서 하는 삼매입니다. 우리는 절에 가면 탑돌이 같은 것을 합니다. 또 법당에서도 이따금 부처님 주위를 뱅뱅 돌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상행삼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앉기만 하면 다리도 아플 것이고 또 앉는 버릇을 못 붙인 분은 잘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은 산책하면서 합장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워도 무방합니다. 상행삼매를 다른 이름으로 반주삼매(般舟三昧)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또 불립삼매(佛立三昧)라, 부처가 앞에 서서 나타나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 법을 어떻게 하는고 하면, 이레 동안 기간을 정해 두고서 옷도 하루에 한 번 이상 갈아입고, 목욕도 하루에 한 번 이상 하고, 누구하고 말도 전혀 안 하고, 음식도 하루에 오전에 한 번만 먹고, 간식도 안 먹고, 자지 않고, 눕지 않고, 부처님 주위나 도량 주위를 쉬지 않고 돌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찰나의 틈도 없이 이렇게 하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레 만에 반드시 부처님이 척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이시는 것은 사람 모양을 한 모습으로만은 아니겠지요.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때에는 '보보성성념념(步步聲聲念念) 유재아미타불(唯在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에 오직 아미타불이요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입니다. 걸음 걸을 때 한 걸음도 놓치지 않고서 염불하는 마음, 소리마다 염불하는 소리, 한순간도 다른 생각 없이 염불하는 생각, 이와 같이 오직 아미타불만 왼다는 말입니다. 아미타불 대신 관세음보살도 무방합니다. 공부하려면 적어도 한 번씩은 이렇게 해봐야 합니다. 중국의 선도(善導)스님은 승려가 된 뒤에 평생 동안을 한 달에 이레씩 꼭 이렇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평소에도 극락세계가 훤히 보였다고 합니다.


참선공부를 하려면 꼭 이와 같은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이나 한다는 것이 어렵겠지만,《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의거해서 우리도 한번 해본다는 의미로 이와 같이 용맹정진하는 것입니다. 우리 근기가 약하니까 관용해서 여러 가지로 합니다만, 원칙은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 허망합니다. 허망한 인간인 우리가 기왕 성불하려면 이처럼 힘든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합니다.


이렇게 항상 앉고, 항상 걷기가 어려운 사람은 또 그 나름의 근기에 맞추어서 반행반좌(半行半坐)라, 반쯤은 걷기도 하고 반쯤은 앉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려운 사람은 자기 마음 따라서 더러는 걷기도 하고 더러는 앉기도 하는 비행비좌(非行非坐)라, 걷는 것도 아니고 앉는 것도 아니면서 삼매공부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꼭 어느 것이 옳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화두하는 참선이나, 묵조선이나, 일행삼매나 모두가 다 어떤 하나만이 옳다고 고집하면 벌써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불법은 모든 것을, 모두를 다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불법은 이슬람식이나 또는 기독교식이나 다 포함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한테 맞는 것을 골라서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골라서 하되 반주삼매 또는 불립삼매라, 부처가 눈앞에 나타나는 정도의 삼매를 한번 용맹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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