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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참선의 기초

제Ⅲ부 정통선의 향훈


참선의 기초



- 참선은 인류문화의 정수


우리 인간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는 한에는 완전무결한 모든 지혜를 다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또한 인생고(人生苦)를 떠나서 완벽한 행복을 바라는 욕망도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의 행동이나 말이 모두가 다 합법적(合法的)인, 즉 도덕률(道德律)에 맞는 윤리행동을 취하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진리적인[眞] 면이나 선(善)으로 보나 아름답다[美]고 하는 우리 정서(情緖)적인 면으로 보나, 어떤 면에서든 완전무결한 행복을 취하려는 욕구는 누구한테나 있습니다. 이것이 생각하는 동물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서 최고의 문화유산, 문화형태가 바로 선(禪)입니다. 또 이러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가르침이 역시 선입니다. 그래서 선을 문제시하는 셈입니다만, 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알고 보면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복잡한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 각 종파는 종파마다 선을 다르게 말하고 또 같은 종파에 속해 있는 스님네들도 자기들 개인 의견에 따라 각기 다른 선을 말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우선 암증선(暗證禪)은 선의 잘못된 형태입니다. 어두운 가운데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을 하면 소득이 전혀 없습니다. 달마(達磨)스님께서도 인용했습니다만, 마치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드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이익이 전혀 없습니다. 자칫하면 맹선(盲禪)이 된다는 말입니다. 자칫하면 또 야호선(野狐禪)이 됩니다. 자기가 도인도 아니면서 도인인 척합니다. 이러면 결국은 큰 탈입니다.


톨스토이의 말과 같이 알고서 남을 지도하면 그것은 병이 안 되고 인류의 복지가 되며, 모르고서 모르는 척하는 것도 별로 해(害)는 안 되지만,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남을 지도하는 것은 사회에 굉장히 큰 피해를 끼칩니다. 따라서 암증선은 그야말로 자칫하면 없는 것만 못한, 없어야 할, 그러한 해독을 끼칩니다.


- 선의 뜻


선(禪)은 인도말인 범어(梵語)로 드하나(Dhyana)라 하고, 일본 사람들은 '젠나'의 '나'를 생략하여 그냥 '젠'이라고 합니다. 선에 관한 책도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스님네뿐만 아니라 스님네 아닌 분들도 선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선을 지도하는 분도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 사부대중들도 곧 한 발 더 나아가서 선에 대해 말씀이 되면 또 여러 가지로 구구한 말이 나옵니다. 그런 것에 대해 혼미(混迷)를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가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선을 뜻으로 풀이하면 기악(棄惡)이라, 악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선을 행하면 악을 버리고 나쁜 짓을 자연적으로 안 한다는 뜻입니다.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몸도 마음도 정화되어서 나쁜 짓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총(叢)은 떨기 총으로,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뜻이지요. 공덕이 부지기수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공덕이 하나 둘이 아니라 마치 숲 모양으로 한도 끝도 없이 많은 것이 공덕총림입니다. 곧 선을 닦으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된다는 말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알게 되고, 자기 번뇌를 끊어버리는 신통(神通)도 얻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도 얻고, 우주만유의 모든 음성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청각도 얻고,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도 얻습니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덕총림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지금 우리 같은 수행자들이 그런 신통을 못하는 것은 선을 많이 못 닦아서입니다. 많이 닦으면 삼명육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그 뒤에 위대한 조사(祖師)스님들이나 정평 있는 도인들은 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선은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수풀같이 많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사유수(思惟修)라, 생각해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일념(一念)으로 모아서 닦는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은 정려(靜慮)라, 고요히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선을 닦을 때는 반드시 한거정처(閑居靜處)라, 고요한 곳에서 고요한 분위기를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특히 부엌에서 공양을 지으시는 분들은 입선(入禪)시간만은 벙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도 공부가 되고 또한 선방(禪房)에서도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삼매(三昧)라고도 합니다. 삼매와 선을 달리 풀이한 분도 있고 또 같이 풀이한 분도 있습니다만, 별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선은 우리 지혜나 덕성(德性), 정서를 모두 조화롭게 성취하는 우리 인격완성의 가장 최고도의 방법인데, 풀이한다면 위와 같이 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생리(生理)나 심리(心理)가 정화(淨化)되어서 악을 범(犯)할 수 없습니다. 참선을 많이 했다고 하는 분들이 음식도 함부로 먹고, 계행을 함부로 파계(破戒)하는 것은 참선을 많이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참선을 많이 했으면 응당 계행은 지켜야 하고 그때는 또 저절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우리 인간의 인격완성을 위해서 뛰어넘을 단계가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인데, 참선을 많이 했다 하면 이런 삼계(三界)를 다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월하는 과정에서 제일 하단계(下段階), 곧 제일 밑이 욕계인데, 욕계란 무엇인가? 음식욕[食慾], 이성욕(異性慾), 잠욕[睡眠慾] 등 욕심의 세계지요. 그런데 참선하는 분들이 욕계 번뇌를 미처 못 떼었다 하면 말이 안 되지요. 참선할 때는 응당 우리 생리나 심리가 정화됩니다. 따라서 파계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무량공덕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성도하실 때나 열반에 드실 때나 선에 들었고, 그 뒤의 어떤 도인도 이러한 선 없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한 분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인격을 완성하고 자기 마음의 고향을 찾아 번뇌를 여의고서 최상의 영생행복을 얻으려면 꼭 선을 거쳐야 합니다.


- 선의 종류


선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지금 '선' '젠' 이것은 비단 불교에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요가법에서도 선(禪)을 말했습니다. 또한 불교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역시 말은 좀 달리한다 하더라도 선을 말했습니다.



명상법(瞑想法)이나, 도교(道敎)에서 쓰는 태식법(胎息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선이라는 것을 이름은 달리한다 하더라도 거의 비슷비슷한 형태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종류를 알아야만 선 가운데서 가장 최선의 선인 부처님 정통선(正統禪)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외도선(外道禪)이라, 외도(外道)가 닦는 선이라는 말입니다. 불도(佛道), 즉 부처님 가르침 외에 다른 가르침이 외도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외도와 정도(正道)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정도는 일체 만법(萬法)을 다 자기 마음의 소조(所造)로 봅니다. 일체 만법을 다 자기 마음 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나 극락이나 천체우주 전부를 다 자기 마음 안으로 봅니다. 반대로 외도는 자기 마음 밖에 법(法)을 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체를 이원적(二元的)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과 물질이 별도로 있다'라고 하는 것은 역시 외도입니다. 마음 밖에 물질이 있다면 벌써 외도입니다. 마음 밖에 태양이 있다는 것도, 내 마음 밖에 네가 있다는 것도 외도입니다. 불법은 오직 한마음이요, 한마음 속에 천지우주를 다 넣어버려야 정도입니다.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면 외도고 일체를 마음 안에서 구하면 정도입니다. 이런 것은 꼭 명심해야 합니다.


一. 외도선 : 인과를 불신하고 유루공덕을 위하여 닦음

외도선(外道禪)은 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善)을 행하면 반드시 선의 과보로 낙(樂)의 보(報)가 있고, 악(惡)을 행하면 악의 과보로 나쁜 고(苦)가 있고, 또 도업(道業)을 닦으면 그 과보로 성불(成佛)이 있다고 하는 인과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유루공덕(有漏功德)이라, 루(漏)는 샐 루로 번뇌나 때라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따라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가 있다는 것이지요. 번뇌가 있는 그런 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입니다. 가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다' '남한테 대우를 받고 싶다' '무슨 재주를 부리고 싶다' '오행을 통해서 무슨 술법을 하고 싶다' 등등이 유루공덕입니다.


자기라는 개성의 망아(妄我), 즉 망령된 나를 버리고 해탈하고자 구하지 않고, 무엇인가 자기 이익만을 구하는 공덕, 그것이 바로 유루공덕입니다. 가사, 우리가 불공을 모신다 하더라도 불공 모시면서 자기 집안의 여러 가지 운수도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를 바라지만 성불을 바라는 마음이 꼭 깃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루공덕이 안 됩니다. 인과를 믿지 않고 그러한 때 묻은 공덕을 구해서 닦는 것이 외도선입니다.


二. 범부선 : 인과를 믿고 유위공덕을 위하여 닦음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凡夫)란 성인(聖人)과 상대해서 하는 말 아닙니까? 우리가 모두 성인이 못 되었으면 범부 아닙니까? 인과(因果)를 믿고 불법을 믿는 가운데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범부입니다. 범부는 불법을 안 믿는 사람은 제외합니다. 불법을 믿는 가운데서 아직 성도(成道),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못해서 성자가 못 되었을 때가 범부입니다.


범부선은 무엇인고 하면, 인과는 믿지만 역시 유위공덕(有爲功德)이라, 다만 번뇌가 유루에 비해서 약간 적은 그런 음영(陰影), 소위 말하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겠지요. 인과를 믿지만 아직은 번뇌를 못 떼어버린 공덕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번뇌를 못 떼어버린 범부니까, 재수 바라고 운수 바라고, 시험에 합격도 바라고 그런 것을 희구하겠지요. 이런 것은 아직 범부선으로 범부가 하는 공부에 불과합니다.


三. 소승선 : 아공을 믿고 해탈을 위하여 닦음

소승선(小乘禪)이라, 도인도 역시 지위가 있는 것입니다. 범부를 넘어서 도인 지위에는 올라갔지만, 거기에도 대승과 소승이 있는 것입니다. 소승선은 아공(我空)을 신(信)하고, 즉 '나'라는 것이 비었다는 것을 믿고, 해탈(解脫)을 위해서 닦는 선입니다.


자기 재수나 운수를 생각하는 정도는 넘어버려서 벌써 내가 비었다 하고 아상(我相)을 넘으니까 그때는 섣부른, 어중된 어떤 것은 바라지 않겠지요. 그러나 아공, 내가 비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불교가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정작 목적을 이루기는 참으로 어렵고 오랜 길입니다. 그러나 참선(參禪)만 바로 닦으면 그때는 비약적으로 쉬운 길입니다.


왜 내가 비었는가? 우리 몸뚱이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사대(四大)가 임시간 모아진 세포에 불과합니다. 다시 현대적으로 말하면, 산소ㆍ수소ㆍ탄소ㆍ질소 등 여러 원소가 그때그때 우리 업(業)에 따라서, 업의 에너지 기운에 따라서, 이렇게 임시간 모여 있습니다. 즉 불교에서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라,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흩어지고 맙니다.


텅 빈들 가운데다 집을 하나 짓는다고 하면, 집을 짓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집을 지었다가 필요 없어 뜯어버리면 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가 부모님이 계시기 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내가 생겨나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모습은 절대로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가 무수한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런 몸이 되었습니다. 마치 들 가운데다 집 한 채 지었다가 다시 뜯어버리면 아무것도 없듯이 그와 똑같습니다. 나라는 존재, 이런 모양은 다시없습니다. 죽어지면 또 다른 모양으로 태어나겠지요. 10년 뒤에 지금 이런 모양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공(我空)을 신(信)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만, 꼭 그래야만 공부가 됩니다. 나[我]란 사실은 비어[空]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무엇인가? 내 마음은 불교말로 해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우리가 감수(感受)하고, 상상(想像)하고, 의욕(意慾)하고, 분별(分別)하는 이런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습니다.


물론 마음의 본체는 부처지만, 우선 내가 쓰는 이 마음은 본체인 부처마음에다가 금생에 나와서 감수하고, 상상하고, 의욕하고, 또는 분별 시비하는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떠나서 내 마음은 없습니다. 내 몸도 각 세포가 잠시간 모여 있고 내 마음도 역시 감수, 상상, 의욕, 분별 시비하는 것이 모여 있기 때문에 이것을 떠나서는 내 몸이나 마음이 없습니다. 불교말로 하면 인연가화합고(因緣假和合故)로 즉공(卽空)이라, 인연으로 잠시간 화합하였기 때문에 즉시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인연이 잠시간 화합되어서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갑니다.


이 몸은 1초 전과 1초 후가 똑같지 않습니다. 그냥 변화되어 갑니다. 내 마음도 역시 조금 전의 마음과 지금 마음이 똑같지 않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은 도인이 되어야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변치 않는 영생에 안주하여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라는 것이 허망한 것이니까, 내가 공하다는 것을 믿고 해탈을 위해 닦는 것이 소승선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벌써 도인의 지위입니다. 내가 없음을 깨달으면, 우리 번뇌의 종자는 못 끊었다 하더라도 내가 없음을 느끼면 그때는 벌써 도인입니다. 그냥 느낌이 아니라 체험으로 느껴 깨친다는 말입니다.


四. 대승선 : 아공 및 법공을 믿고 해탈을 위하여 닦음

대승선(大乘禪)이라, 이것은 아공(我空) 및 법공(法空)을 믿는 것입니다. 내 몸이나 마음을 구성하는 것도 공(空)이지만, 일체 만법, 산이나 들이나 또는 태양이나 별이나 천체나, 남이나 나나 일체 법이 다 비었다는 법공을 믿는 것입니다.


소승들은 내가 비어 있는 것을 느낀다 하더라도 일체 만법이 비었다는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대승은 일체 만법이 비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가 현각(永嘉玄覺)스님도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깨달은 뒤에는 삼천대천세계가 다 텅 비어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아(我)도 공(空)이요, 일체 만법도 空이라는 것을 말씀한 법문입니다.《금강경(金剛經)》또한 나도 空이요, 일체 만법이 空인 것을 해설한 경전입니다. 불교공부는 내가 원래 비어 있고 우주 전부가 비었다는 것을 모르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참선 역시 우리가 화두를 드나 염불을 하나 이와 같이 아공, 법공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망상(妄想)이 잘 끊어집니다.


망상은 무엇인가? 좋다, 궂다 하는 그런 망상은 어디서 연원(淵源)되는고 하면, 그런 것은 모두가 '네가 있다, 내가 있다, 만법이 있다'라고 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없고, 네가 없어 보십시오. 또 천지만물이 텅 비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망상이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번뇌를 녹일 때는 반드시 이와 같이 空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반야심경》을 외우는 것이 그런 소이(所以) 아닙니까?


《반야심경》은 어떤 불사(佛事)에나 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체 만법이 원래 비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또 번뇌를 녹이기 위해서는 그와 같이 빈 마음으로 다 놓아버려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조주(趙州)스님한테 엄양(嚴陽)스님이란 분이 가서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참선에서는 한 물건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물질적인 물건보다도 우리 마음으로 시(是)야 비(非)야, 좋다 궂다, 이쁘다 밉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주스님께서 "놔버려라, 방하착(放下着)하라" 하니까 엄양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놓을 것입니까?" 가지고 있어야 놓을 것인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새삼스럽게 놓을 것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주스님께서 "그러면 지고 가거라" 하셨습니다.

선문답(禪問答)은 이와 같이 그야말로 절실하고 직절(直截)한 것입니다. 세상에 한 물건도 없는데 말입니다. 조주스님한테 묻는 그 사람은 한 물건도 없다는 거기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있고 없는 자리를 떠나기 위해서 이런 법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 있다는 소식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 아무것도 없지는 않지만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가짜고, 변계소집성(遍界所執性)이라, 중생의 망념으로 보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괴로워하는 것은 자기가 잘못 본 자기의 망념 때문입니다. 나쁘고 좋은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범부의 지위에서 자기가 잘못 봐서, 잘못 본 것을 가지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五. 최상승선 : 여래선과 조사선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이것은 가장 높고 수승한 참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할 것은 바로 이 최상승선입니다. 우리가 아직은 저급하고, 또 비록 대승ㆍ소승의 성자라 하더라도 아직은 부족합니다. 따라서 역시 가장 최고의 선, 최상승선을 문제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최상승선을 갖고 씨름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을 말합니다. 분별하기 좋아하는 분들은 여래선은 밑에 있고 조사선은 위에 있다고 합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법문으로 미루어 보나, 그 뒤의 정통 도인 말씀으로 보나, 이것은 둘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인 것입니다. 단지 그런 가운데서 지적(知的)인 면은 여래선에 해당하고, 리적(理的)인 면, 본체적(本體的)인 면은 조사선에 해당한다고 비유해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가장 높은 선은 본래 부처로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 즉 번뇌가 없는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음을 확실히 믿고 닦는 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번뇌(煩惱)에 결박되어 있습니다만, 부처의 안목에서 본다면 번뇌에 결박된 그대로 부처입니다. 최상승선을 닦는 분들은 그것을 잘 느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못나고, 못생기고, 남도 미워하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번뇌에 묶여 있는 채로 바라보면 범부라 하더라도 , 부처의 청정한 눈으로 보면 똑같은 부처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때는 일부러 중생의 근(根)을 빌려 씁니다. 그러나 빌리지 않고 부처의 안목 그대로 보면 다 부처뿐입니다. 그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번뇌가 구족한, 번뇌가 있는 그대로가 모두 부처입니다. '내가 지금은 구박(具縛)되어 번뇌에 묶여 있지만 본래 부처니까, 나한테는 석가모니나 어떤 부처님이나 도인들이나 그분들과 똑같이 일체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도인이 된 셈치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최상승선인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무슨 허물이 있다, 내가 잘못했다, 참회해야겠다' 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하지만, 그것은 아직 높은 단계는 못 됩니다.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오직 나한테 갖춰져 있는 불심만 문제로 해서 '내가 본래 부처인데' 하고 아만(我慢)을 부리면 안 됩니다만, 부처가 된 셈치고 닦아야 최상승선인 것입니다. 나도 비고, 천지도 비었으니까 부처와 내가 역시 둘이 아닙니다. 여기에 있는 아공, 법공으로 해서 다 비었지만 부처와 똑같이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 선의 방법


  一. 공안선(公案禪)ㆍ화두선(話頭禪) : 참구적(參究的)

  二. 묵조선(默照禪) : 의지적(意志的)

  三. 염불선(念佛禪) : 지(知)ㆍ정(情)ㆍ의(意)의 조화(調和)


선(禪)에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선의 방법으로 공안선(公案禪)이라, 공안은 화두(話頭)와 같은 뜻입니다. 공안선은 지금 우리가 드는 '무자(無字)'라는 화두나 '판때기 이빨에서 털 나온다[板齒生毛]'라는 화두나 '뜰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라는 화두나 또는 '이뭐꼬(是甚麽)' 즉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日]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항시 내가 움직이는 가운데 있으되 거두어 얻지 못하는 이것이 무엇인고(有一物 明如日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收不得者 是甚麽)' 하는 나의 본질을 구하는 화두, 그러한 문제를 우리가 의심하면서 닦는 선법이라는 말입니다.


이것 역시 최상승선, 가장 높은 선에 속합니다. 이것도 성불에 가까운 길이지요.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이것은 최고선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느 훌륭한 스님한테 자기 근기에 맞는 화두를 탄다고 합니다. "나한테는 무슨 화두가 좋습니까?" 해서 화두를 탑니다. 그런데 화두를 주시는 분이 그 사람 근기를 잘 아시는 분 같으면 좋은데, 모르시는 분이 엉뚱한 화두를 주시면 곤란하겠지요.


부처님 법이란 무엇이나 궁극은 모두 불법이요, 종단(終端)에는 다 불법에 가는지라, 무슨 법이나 안 쉬고 가면 다 갈 수가 있습니다. 산(山)으로 가는 길은 많아서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조금 험준한 길이 있다 하더라도 안 쉬고 가면 산봉우리로 올라가듯이, 부처님 법도 무슨 법이나 안 쉬고 가면 다 성불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자기 근기에 안 맞으면 그때는 조금 터덕거립니다. 우리가 화두를 받을 때는 자기 근기를 알 수 있는 분한테 꼭 알맞은 법을 받아야만 자기 인생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공안선ㆍ화두선에서 의심하는 것은 오직 근본문제, 우주 근원문제, 내 본질문제, 내 자성문제겠지만 의심하는 것은 꽤 괴로운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활동 가운데서 믿는 마음은 편하고 의심하는 마음은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그 의심도 한두 번 하고 하루 이틀 하면 모르지만, 한 달이나 몇 년 동안 한다고 하면 상당히 괴롭습니다. 특히 우리같이 출가한 사람들은 또 모르거니와, 재가불자로서 집안에 계신 분들이나 사업도 하고 여러 가지 가정적인 일을 돌보시는 분들이 의심하는 버릇만 자꾸 붙으면 자칫 남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란 것은 항시 안 쉬고 해야 할 것인데 의심만 자꾸 하면 자기 사업하기도 곤란스럽습니다. 그런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의심하는 이것은 역시 최상승선으로 가장 좋은 선의 한 방법은 되겠지만, 선방에서 오로지 하시는 분들은 하기 좋아도, 일상적인 생활불교로서는 불편합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수행법을 취하면 우리가 부처님한테 오로지 바치는 마음이 조금 감소됩니다.

지적(知的)인 분들은 참구하는 화두가 무방하다 하더라도, 부처님한테 모두를 의지하는, 오로지 신앙적인 분들은 마음에 조금 저항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우리 정서가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다음은 묵조선(默照禪)이라, 화두 없이 그냥 앉아서 자기 마음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도 설정하지 않습니다. 묵조선을 하는 분들은 대체로 단전주(丹田住)라, 아랫배에 힘을 두고서 공부를 합니다. 원불교에 가서 보면, 저도 거기에서 한 철을 공부했습니다만, 아무 문제없이 아랫배 단전에다 힘을 주고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 원래 부처인지라 결국은 부처가 될 거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각 도인들이 한 선법입니다. 화두선도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나왔으나 묵조하는 선도 역시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무튼 안 쉬고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성불의 길이 그냥 쉽게 몰록 된다면 좋겠지만 며칠이나 몇 달에 안 되고, 또 몇 년에 안 되는 경우에는 싫증을 냅니다. 우리가 부처까지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먼 길입니다. "파딱하면 되어버린다, 당하(當下)에 개오(開悟)라, 말 한마디에 그냥 다 깨달아 버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근기가 상근기가 되는 분들은 말 한마디로 깨달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다 오랜 시일과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아무 문제없이 가만히 앉아서 닦는 선은 공부가 잘 안 됩니다. 물론 호흡법도 하고 잘 되어 가지고 정화되면 좋겠습니다만, 묵조선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는 상당히 좋은 선법이지만, 일반적으로 누구나가 하기는 어렵고 싫증을 내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염불선(念佛禪)이라, 우리는 염불선과 그냥 염불을 구분해야 합니다. 구분을 잘못하면 이것도 혼동되어 버립니다. 어느 큰스님들도 "염불은 그저 하근기 중생이 한다. 염불은 근기 낮은 분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들은 분들은 '염불이 무슨 선이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염불과 염불선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처럼 이야기되는 보통 염불은 부처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또 극락세계를 자기 밖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성(自性), 자기 마음의 본질이 부처고 우주가 바로 부처요, 극락세계입니다. 우리 마음이 미혹(迷惑)되면 천지우주가 바로 고생이 충만한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만, 우리 마음을 깨달으면 사바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누런 안경을 쓰고 보면 다 누렇게 보이듯이 미혹된 범부중생의 눈으로 보면 사바세계요, 극락을 볼 수 있는 부처의 안목으로 본다면 그때는 다 극락세계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라 하는 업장이 가린, 탐(貪)ㆍ진(瞋)ㆍ치(癡) 삼독심(三毒心)에 가린 안목으로 보니까 극락으로 안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고, 극락을 자기 마음 밖의 저만치 십만 억 국토 밖에서 구하는 염불은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염불은 방편염불입니다. 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는 달리 참다운 염불이 바로 염불선인데, 이것은 '자기 마음의 본바탕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요, 동시에 우주가 바로 부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염불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참선이 무엇인가? 참선은 바로 내 부처를 구함입니다. 천지우주 만유가 바로 부처인 것을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면서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을 선(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염불은 바로 선에 해당합니다. 방편적으로 자기 마음 밖에서 부처와 극락을 구하는 식이 아니고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다'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라고 느끼는 염불은 염불선입니다.


묵조선은 주로 의지적(意志的)이라, 단전주할 때는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못합니다. 따라서 의지가 강한 쪽으로 수승한 선이고, 화두선은 지적(知的)으로 참구하기 좋아하는 분들에게 적합한, 지적으로 수승한 선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하나의 원리나 이치가 아니라 일체 공덕을 다 갖춘 생명, 인격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하나의 생명으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원한 님도 구하고 또는 사랑도 구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사랑 가운데 사랑이요, 님 가운데 님입니다. 일체 만유의 님이요, 평생 우리가 닦다가 종국에는 돌아가야 할 필경의 의지처, 이것이 부처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참다운 님의 님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지(知)나 의(意)에 그치지 않고 우리 인간심리의 모두인 지와 정(情)과 의를 모두 조화적(調和的)으로 구하는 선법이 염불선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만족을 못 취하고, 안심이 못 되면 공부를 오래 못합니다. 싫증나서 말입니다. 부처님을 자기 님으로 구하는 선법, 이것은 벌써 우리 감성이 만족한지라 구하면 구할수록 더 그립단 말입니다.


우리 사부대중께서 하는 이런저런 선법은 다 좋습니다. 해보면 그만큼 거기에 따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도인들이 제시한 법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이렇게 불안스러운 때, 가정생활로 인해서 여러 가지 액난이 많은 때, 어느 때나 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염불선은 매우 좋습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인지라, 사람을 봐도 부처요, 개를 봐도 부처입니다. 어느 때나 부처로 생각해도 손해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생각, 가장 좋은 행동, 가장 좋은 말이 부처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손님을 부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상이 좋아져서 그냥 장사가 흥왕합니다. 부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가장 옳은 생각이므로, 옳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장사나 무엇이나 어떤 분야든지 성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선은 어떤 때나 할 수가 있고 누구나 하기 쉬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 경전 가운데 2백 부 이상에서 염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어느 선법으로 하든지 이미 힘을 얻은 분들은 좋지요. 그러나 아직 그런 선으로 해서 힘을 얻지 못한 분들은 이런 것을 느껴서 염불선을 하시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또 어떤 염불을 할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내 자성인 동시에 우주의 본체인 부처님의 대명사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에 귀의한다고 할 때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아미타불이 우리 중생을 구제하는 면에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다 똑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부처님인데, 다만 중생을 교화하는 공덕면에서 이름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면에서 중생을 자비로 제도하는 면에서 관세음보살이고, 또 지혜로운 면에서 문수보살ㆍ대세지보살입니다. 우리 영혼을 천도하는 면에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고 말입니다. 모두 다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은 주문을 외우나 화두를 하나 나름대로 공부가 되면 재미를 느낍니다. 따라서 자기가 하는 공부법만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재미를 봤으니까 고집을 부린단 말입니다. 그 공부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득력(得力)을 좀 해놔서 그러는 것이지만, 그것만이 제일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벌써 한고비를 넘어 버리면 하나인지라 상관이 없지만 고비를 넘기까지는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면 희락(喜樂)이라, 희락은 기쁨을 맛보는 것이지요. 우리 중생의 삿된 고통을 떠나서 영생에서 오는 희락을 맛본 뒤에는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를 때가 어려운 것인데, 여러 가지 행법 가운데 희락에 이르기까지 제일 쉬운 것이 곧 염불선입니다.


- 선의 자세


 ㆍ일상삼매(一相三昧) : 여묘포서(如猫捕鼠)

 ㆍ일행삼매(一行三昧) : 여계포란(如鷄抱卵)


참선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참선은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로 해야 합니다. 일상삼매는 무엇인가? 비유하면 여묘포서(如猫捕鼠)라, 마치 고양이가 한눈팔지 않고 쥐를 노려보듯, 우리 마음이 '내가 부처요, 천지가 바로 부처'라는 그 마음을 잠시도 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이 오로지 거기에다 마음을 안주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삼매입니다.


일행삼매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어미닭이 계란을 품듯이 하는 것입니다. 어미닭이 계란을 품으면서 파뜩파뜩 함부로 경망하면 계란이 부화되어 닭이 되겠습니까? 어미닭이 계란을 품을 때는 오랫동안 참고 품어야만 닭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천지우주를 부처라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직 진짜 부처는 다 못 된지라, 진짜 부처가 되려면 '내가 부처요, 천지우주가 부처인 것'을 항시 느껴야 합니다.


항시 느끼고 있으면 그때는 우리 마음 가운데 번뇌가 녹아서 자연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은 마치 닭이 계란을 품듯이 오랫동안 염불하고 염불하고, 화두들고 화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여러분은 기왕 선(禪)을 시작하신 것이니까 선 가운데 최상승선을 하되, 그 가운데 공안ㆍ화두를 드는 선도 있고 묵조하는 선도 있고 염불하는 선도 있으니, 그 중에서 간택(簡擇)하면 됩니다. 화두를 드는 선은 참구적으로 좋고, 묵조는 의지 쪽으로 좋고, 염불하는 선은 지ㆍ정ㆍ의가 다 조화된 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골라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 선정의 십종공덕


 ①안주의식(安住儀式) ②행자경계(行慈境界) ③무번뇌(無煩惱) ④수호제근(守護諸根) ⑤무식희락(無食喜樂) ⑥원리애욕(遠離愛慾) ⑦수선불공(修禪不空) ⑧해탈마견(解脫魔羂) ⑨안주불경(安住佛境) ⑩해탈성숙(解脫成熟)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7권


선(禪)이 자기 성취의 최상의 길입니다만, 구체화시켜서 선의 공덕(功德)을 대강 알아야만 선이 좋다는 것을 더욱더 역설할 수가 있겠습니다. 선정(禪定)의 십종공덕(十種功德)은 선정을 닦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공덕을 열 가지로 말한 것입니다. 선정에는 무량공덕이 있고 종당에는 다 성불이 되겠지마는, 우선 이와 같이 공덕을 나누어서 간추린 것입니다.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우리가 참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몸이 정화되고 마음이 안정되어서 우리 행동이 얌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주 안온한 행동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선정을 닦으면 자비심이 많아집니다. 우리 행동이 거칠면 자비심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만, 선을 닦으면 우리 생리가 정화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관계상 저절로 자비심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자비심을 스스로 내는 경계가 행자경계입니다.


무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은 우리 생리나 마음이 정화가 안 되어서 발동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하면 저절로 탐심이나 진심, 치심이 발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번뇌입니다. 번뇌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참선하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6근(六根)인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뜻을 보호해서 우리의 시각ㆍ청각ㆍ후각ㆍ미각ㆍ촉각 등의 감각들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말입니다.


부설(浮雪)거사 게송(偈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이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분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소견(所見)으로 보지 않아 분별이 없고, '이청무성절시비(耳聽無聲切是非)라', 우리 귀로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소리에 대한 시비를 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시비나 어떤 분별은 내기가 싫은 것입니다. 또 저절로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가니 무슨 시비를 내겠습니까? 눈에는 보이는 소견에 따른 분별이 없고, 또 우리 귀는 무슨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좋다 궂다 하는 시비를 안 낸다는 말입니다.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하고', 분별이나 시비를 다 놓아버리고서 '단간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라', 다만 자기 부처한테 귀의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은 이래야 합니다. 눈으로 보아도 분별을 안 내고, 귀로 들어도 시비를 못 느끼고, 다 놓아버리고서 오직 부처한테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성불을 합니다. 그런 경계가 수호제근입니다. 우리 6근을 다 청정한 쪽으로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안 먹어도 희락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가 생각할 때, 사람의 행복은 잘 먹고 잘 입어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런 것은 욕계 번뇌가 끼여 있을 때의 말입니다. 번뇌가 떨어졌을 때는 음식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하면 경안(輕安)이라, 자기 몸도 가뿐하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자기 몸과 마음에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선(禪)에서 조금 힘을 얻었다고 득력(得力)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런 경계가 지나가면 그때는 희락지(喜樂地)라,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한없는 환희심을 느낍니다. 그때는 그냥 감사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나올 정도로 환희심을 느낍니다. 이런 경안을 얻어 몸도 마음도 가뿐하여 아무 부담 없이 상쾌하고, 그와 동시에 희락을 느끼면 음식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이성, 음식 또는 지위에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 먹어도 희락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이성(異性)간의 사랑이나 모든 애욕을 다 떠나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조금 무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은 무미하지가 않습니다. 선을 닦아 얻는 행복은 어디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비록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느끼고 우리가 공(空)을 닦아서 공관(空觀)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공관에 사무치고 참선에 사무치면 다만 공에 머물지 않고 참다운 진공묘유(眞空妙有). 영원적인 불성을 우리가 본다는 말입니다. 공(空)을 말로만, 추상적으로 말할 때는 공에 치우칩니다만, 닦아서 얻은 공은 공에 안 치우칩니다. 바로 진공묘유, 불성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닦으면 수선불공이라, 우리가 공에 안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해탈마견(解脫魔羂)이라, 마구니의 그물을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좋다 궂다 또는 없다 있다고 하는 여러 가지 우리의 욕망, 이런저런 번뇌의 얽힘이 마견(魔羂)인데, 그런 마견을 다 벗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마구니의 걸림을 우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문다는 말입니다. 번뇌가 없으니 응당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물겠지요. 다음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차근차근 해탈되어서 우리 마음에 있는 마지막 번뇌의 씨까지 다 뽑아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성불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참선공덕으로 오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우선 참선하고 있으면 혈액순환이 좋아져서 독소 같은 것도 차근차근 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원래 불성이란, 무한의 힘이 있고 무한의 공덕이 있는지라, 참선 닦으면 닦을수록 자기가 모르는 영원적인 무한의 힘이 자기한테 오는 것입니다.


- 염불의 십종이익


①명중호지익(冥衆護持益) ②지덕구족익(至德具足益) ③전악성선익(轉惡成善益) ④제불호념익(諸佛護念益) ⑤제불칭찬익(諸佛稱讚益) ⑥심광조호익(心光照護益) ⑦심다환희익(心多歡喜益)  ⑧지구보덕익(知具報德益)  ⑨상행대비익(常行大悲益)  ⑩입정정취익(入正定聚益)

                                                                  -《정토론(淨土論)》


우리가 닦는 데 따라서 얻어지는 이익이 화두나 묵조나 다른 공부에도 있습니다만, 특히 염불하는 이익을 말한 것에 염불십종이익(念佛十種利益)이라, 염불하는 분들은 이런 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명중호지익(冥衆護持益)이라, 명중(冥衆)은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귀신이나 신장(神將), 용(龍), 야차(夜叉) 같은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용이나 천상인간이나 귀신같은 신장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염불을 하면 이런 분들이 좋아서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신장 등의 명중이 우리를 지키는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지덕구족익(至德具足益)이라, 염불하면 우리가 부처 이름을 자꾸 외우고 생각하는지라, 우리가 걸음걸음 부처 이름을 외우면 걸음걸음 부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내가 부처님을 믿고 부처 이름을 외우는데 어찌 부처가 안 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염불하고 있으면 부처한테 갖추어 있는 무량공덕을 우리가 스스로 갖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을 많이 한 분들은 후덕(厚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전악성선익(轉惡成善益)이라, 염불하면 우리 심신이 정화되어서 모든 악을 능히 끊어버리게 됩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외우면 오역(五逆), 십악(十惡) 등 모든 죄의 업장을 없애고 말할 수 없이 큰 선근(善根)을 성취하는 이익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불호념익(諸佛護念益)이라, 부처님은 생명으로 보아야 합니다. '부처를 불러도 부처는 모른다. 그냥 내 마음만 맑아진다' 이런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일체 공덕을 갖춘 천지우주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르면 부른 만큼 다 아시고, 우리가 하는 일들을 다 아시고, 우리가 부르면 부를수록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제불(諸佛), 일체 부처가 다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제불칭찬익(諸佛稱讚益)이라, 모든 부처가 동시에 우리를 칭찬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이요, 제일 높은 이름인 부처 이름을 외우는데 칭찬을 안 하시겠습니까?


심광조호익(心光照護益)이라, 부처님은 광명입니다. 부처님의 생명이 광명이라 우리가 부르고 외우면 그 광명이 우리한테 와서 우리를 비추고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심다환희익(心多歡喜益)이라, 외우면 외울수록 정화되어서 우리 마음이 환희심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지구보덕익(知具報德益)이라, 그때는 그냥 너무 고마워서 일체 중생에게 덕을 베풀고 부처님 은혜를 보답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자기 환희심을 느끼고 자기 행복감에 겨워서 이런 공덕을 남한테 돌리고 부처님한테 그 은덕을 갚는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행대비익(常行大悲益)이라, 항시 대비(大悲)의 자비심을 내고 자비스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입정정취익(入正定聚益)이라, 이런 분들은 결단코 성불하고 극락세계에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극락에 가고 못 가는 구분으로 삼정취(三定聚)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업장이 아주 무거운 사람은 극락에 못 가게 되는데, 이것이 사정취(邪定聚)입니다. 그러나 업장이 별로 안 무거운 사람들, 어정쩡한 그런 분들은 부정취(不定聚)라, 어떤 때는 극락에 가기도 하고 못 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극락에 가고 못 가는 기로(岐路)에 있다는 말입니다.

업장이 가볍고 염불이나 화두를 많이 들어서 정화된 분들은 반드시 극락에 가고 성불합니다. 그분들은 정정취(正定聚)에 해당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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