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공(空)만 알아 버리면 사실은 불교는 참 다웁게 대승(大乘)으로 입문(入門)이 되는 것입니다. 공을 모르면 대승이 못되는 것입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대승이 되고 못되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지혜가 있어야 대승이 됩니다. 대승이 되어야 참다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는 부처님 법문입니다. 즉 방편설(方便設)을 떠난 진실(眞實)한 법문이 됩니다. 따라서 어렵더라도 과학적(科學的)으로 또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것저것 모두를 거기에다 유추해서 인용하고 원용해 가지고서 공 도리(空道理)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토굴(土窟) 생활을 무던히 했습니다. 한번은 백장암(百丈菴) 저 위쪽 1000미터 이상 되는 고지(高地)에다 조그마한 토굴을 마련해서 한 철을 지냈습니다. 삼동이 임박해서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겨우 들어갔습니다. 방은 사방 일곱 자, 협소한 방인데도 추운 겨울에 따습게 하려면 장작이 하루에 여남은 개비는 들어가야 따스워지는데 나무 준비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장작을 절약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 개비씩 땠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음을 못 통하면 방에서 죽도록 까지 나오지 않으려고 지붕도 천년만년 간다는 굴피참나무 껍질로 이었습니다. 참나무 껍질도 부족해서 촘촘히 올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해 비가 억수로 쏟아져 그 사이로 빗물이 세어 들어와도 우산이 없어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 방바닥에는 물이 벙벙하고, 할 수 없이 나무토막을 놓고서 그 위에 앉아서 그 물을 퍼내면서..., 그 빗물을 비웠습니다. 그때는 생식(生食)을 했습니다. 지리산 쪽이기 때문에 이곳보다 훨씬 추운 지방이라 계곡 물이 전부 얼어 붙어버렸습니다. 생식을 하므로 따스운 물은 필요 없으나, 그러나 찬물마저 얼어붙어서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음을 깨고서 양재기에다 얼음을 넣고 불을 때서 녹여서 물을 좀 마셨습니다. 생식도 콩가루나 깻가루를 섞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쌀만 담그어 그냥 먹었습니다. 찬 물에다 쌀만 담그어서 먹었으니 소화가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도 하고 여간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무아(無我)라 하는,"내가 없다"하는 소식이 잘 실감이 안 간단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도 미운 사람 밉고, 고운사람 곱단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한 사람은 분명히 보고도 싶고, 나한테 짓궂게 군사람들은 또 밉단 말입니다. 내가 보란 듯이 무얼 좀 해야 하겠구나. 그런 관념(觀念)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이 목숨 다 바치겠다는 그런 각오로 들어갔지만은 그런 속에서도 나라는 관념을 떨치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두가 비었다'는 금강경(金剛經)도 수 백 번 읽기도 했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이사 중 되어서 12년 되었으니 몇 천 번은 읽었겠지요. 그래도 제법공(諸法空) 도리가 와 닿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보시면 짐작이 되십니다만 가사 우리가 업장(業障)이 많아 그 욕심(慾心)이 많고 자기밖에는 몰라도 백일(百日)이나 몇 백일이나 애쓰고 기도(祈禱)를 모셔보면 차근차근 자기라는 아(我)가 떨어집니다. 차근차근 자기라는 모서리가 무디어 집니다. 그래서 공부가 순숙되면 그 때는 아(我)라는 것이 몽땅 빠져버립니다. 부처님께서 12년 동안이나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소식을 말씀을 하셨고, 열 두해동안 우리 중생 마음을 훈련시킨 다음에 이만큼 되면 공 도리를 말하면 알아듣겠구나. 업장(業障)이 가벼워지므로 알아듣습니다. 같은 법문도 업장이 무거운 때 듣는 것과 기도나 참선을 해서 업장이 가벼운 때 듣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참선도 한 철 공부 할 때, 두 철 공부할 때 다르고, 같은 반야심경 풀이도 똑 같은 사람이 하더라도 다릅니다. 12년 지난 다음에 반야경(般若經) 공(空)도리를 22년 동안-부처님 설법 가운데 가장 고구정녕(苦口煗娡)하게 22년 동안-반야 공 도리를 말씀 하셨습니다. 모두가 공이다. 사실 이 몸뚱이 이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여러분들 12인연법(十二因緣法)도 다 배우셨지요. 과거 전생(前生)의 무명(無明)으로 해서, 무명 그것은 지금 무슨 자취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은 우리 의식(意識)에 있는 번뇌(煩惱)입니다. 무명은 사물을 바르게 못 보는 것입니다.
검으면 검다고 보고, 희면 희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못 보는 이것이 무명입니다. 성자(聖者)만이 무명이 없습니다. 성자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봅니다. 이른바 실상(實相)을 봅니다. 우리 중생은 가상(假相)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 무명 때문에 행(行)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무명 때문에 음욕(淫慾)의 행이 있었기에, 그리고 부동(浮動)하는 그런 영(靈)도 그런 식(識)도 역시 무명식(無明識)이기 때문에 부모님의 연(緣) 따라서 거기에 끌려갑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태(胎)속에 안착해서 커 나왔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몸뚱이입니다만 과거 전생에 이와 똑같은 몸뚱이는 없었지 않습니까. 과거 전생에는 없었습니다. 한동안 살다가 교통사고 만나서 죽든 또는 80세에 죽든 어떻게 죽든 결국은 죽는 것인데 죽은 다음에는 이런 몸뚱이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금생(今生)에 몇 십 년 동안 모양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그러면 모양 그것은 실존(實存)인가. 잠시간 금생에 존재하는 모양 이것도 실존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관념(觀念)이, 우리 중생 인간 차원으로 보기 때문에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생겼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일초의 몇 억분의 일도 역시 같은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리학적으로 보더라도 일초의 몇 억분의 일도 역시 그 찰나(刹那) 한순간도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10년간이나 20년간이나 있다가 만나면 젊은 사람이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보통 매일 매일 만나서는 잘 모릅니다. 분명히 변화하는 것인데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일초 전과 일초후의 우리 몸뚱이가 같지 않습니다.
신진대사(新陳代謝)로 보더라도 일초 전과 일초 후의 우리 몸이 같지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자기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일초전의 자기와 일초후의 자기, 또 일초의 몇 억분지 일의 전(前)의 자기와 후(後)의 자기가 같지 않은데 우리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하게 과학적입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무아(無我)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무아(無我)이지만 나를 구성하는 산소가 있고 수소가 있지 않은가?
또는 산소나 수소를 구성한 양자나 전자나 중성자가 있지 않는가? 그런 것은 또 가장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로 쪼개지지만 그러나 그것도 역시 종당(終當)에 가서는 염파(念波)라, 마음의 파동(波動)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간(宇宙間)에 있는 어떠한 존재 물질도 태양계(太陽系)나 은하계(銀河系)나 그러한 존재도 모두가 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마음의 파동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마음의 파동은 좋아(貪)하고, 싫어(嗔)하는 그 마음(痴)에서 무명심(無明心)에서 일어납니다. 무명(無明)으로 해서, 무명이란 우리가 사태(事態)를 잘 못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일심진여(一心眞如)인데, 오직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뿐인 것인데 우리가 잘못 보므로 거기에서 이제 아(我)가 생기는 것이고, 아(我)가 생기면 나한테 좋으면 탐심(貪心), 나한테 싫으면 진심(嗔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무명심(無明心),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이 파동을 일으켜서 그 파동이 전자(電子) 되고 양성자(陽性子)가가 되고 중성자(中性子)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기(電氣)가 되고 자기(磁氣)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보면 모두가 본래는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파동을 일으켜서 전자(電子)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마음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금(金)으로 안경테를 만드나 금으로 시계 줄을 만드나 금의 순수도(純粹度)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일심진여(一心眞如)의 그 마음자리가 이렇게 변동하고 저렇게 변동해서 사람 같은 모양이 되나 별 같은 모양이 되나 또는 금 같은 모양이 되나 '일심진여'라는 그 마음의 순수도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나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주(宇宙)는 한 말로 말씀드리면 모두가 다 어제도 오늘도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반야(般若)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다들 비어 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한 권만 가지고도, 반야심경 한편만 가지고도 성불(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있지 않습니까.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우리가 생각하는 꿈같은 견해, 우리가 지금 잠꼬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 무주선원 겨울식량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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