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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94

94.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더불어 나와 조금도 본 성품은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내 앞에 있는 독사(毒蛇)같이 징그러운 것도 역시 본 성품은 석가모니와 더불어 조금도 호리불차(豪釐不差)의 차이가 없습니다. 상(相)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차이가 없습니다. 남을 죽인 강도(强盜)도 역시 겉만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강도짓을 한 것이지 그 사람도 우리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한테 가서 "상대편이 잘못할 경우 일곱 번 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 이렇게 질문했단 말입니다. 그 때 예수 말씀이 "일곱 번씩 일곱 번도 더 용서해라" 반야(般若)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 못합니다. 반야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번 미운 사람은 절대로 밉다고만 생각합니다. 우리의 번뇌(煩惱)가 멸(滅)해서 실상을 바로 보면 분명히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누구나 빛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흐리멍덩한 눈으로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미운 사람 밉게 보이고 좋은 사람 좋게 보입니다. 따라서 죄(罪)는 어디가 있는가? 죄는 밉게 보는 '나'한테가 있습니다. 왜 남을 용서 못합니까?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우리가 말은 다 하지 않습니까. 동체대비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동체(同體)라는 말은 본질에서는 모두가 다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 성품에서는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 성품에서는 다 부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대비(大悲)라 합니다. 그냥 약삭빠른 인정이 아닙니다.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은 방금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주(宇宙)의 모두가 두두물물(頭頭物物) 자타시비(自他是非)없이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라, 이렇게 생각하는 견해에서 말한다고 생각할 때에 남 듣기 싫은 말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베풀어라, 말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하라, 우리가 정견만 굳건히 갖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약명요심(若明了心)하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약 그대가 자기 마음의 본체(本體)를 깨닫는 다고 생각할 때는 만덕(萬德)이 다 갖추어 온단 말입니다.


고기 잡는 그물코가 천 코 만 코 있다 하더라도 양쪽 걸이를 쭉 잡아당기면 모두 코가 따라 오듯이 우리가 내 마음이 무엇인가, 우주(宇宙)라는 것은 모두가 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절로 모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思想) 밑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주문(呪文)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화두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참선(參禪) 그러면 화두만 의심(疑心)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까. 달마(達磨)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까?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이것은 중국(中國)에서도 저 북송(北宋)때에 임제(臨濟) 일파(一派)에서 한 것이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이조(李朝) 오백년 동안 불교가 중국에서 청신(淸新)한 그런 기풍이 못 들어 올 때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오히려 화두 의심하면 참선인 것이고, 화두 의심 안하면 참선이 아니다. 이런 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법집(法執)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부처님 법문(法門)은 주문으로 가는 문이나, 염불로 가는 문이나, 경(經)을 보는 문이나, 복숭아 꽃 보고 깨닫고, 길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곤 합니다. 그런데 염불이 참선이 아니고 경론(經論)이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 마음이 상대 유한적인 상에 걸리지 않고서 앞서 말씀과 같이 정견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한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하나님 부르나, 알라신을 부르나 다 참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는 앞으로 틀림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眞理)가 하나인데 종교가 하나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 성경이나, 알라신의 코란이나 여러분들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으로 보시면, 다시 바꿔서 말씀 드리면 불교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조명(照明)한다고 생각할 때에 모두가 다 진리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재가불자(在家佛子)나 출가불자(出家佛子)나 마음을 열 때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상(我相), '나'라는 상, 인상(人相), '너'라는 상, 수자상(壽者相), 시간이 짧고 길고 내 생명(生命)이 짧고 길고, 또 중생상(衆生相),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개다, 저것은 풀이다, 저것은 자연이다, 이와 같이 구분하는 이런 상(相)이 없어야 합니다. 상(相)을 떠나면 자연히 공해(公害)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 한 방울도 우리가 오염(汚染)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땅도 살아 있고, 돌멩이 하나도 모두가 다 살아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법계(法界)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충만(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생명(生命)입니다. 요즈음 한마음 운동(運動), 한 몸 운동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가톨릭에서 한마음 운동을 합니다만 그네들은 아직 한마음을 모릅니다. 오랫동안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 불교인들이 제도(濟度)를 해야 한마음을 알 것입니다. 한 몸, 한 마음은 불교의 대승(大乘)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진소위(眞所謂), 참말로 한 몸 운동, 한마음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네들은 기껏해야 사람과 사람끼리만 한 몸으로 압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 우주가 한 몸이란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하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하므로 쉽습니다. 부처님의 본원(本願)이라, 우주(宇宙)는 우주 자체에 목적(目的)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인가 하면은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원(願)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외우지 않습니까?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무량법문(無量法門)을 다 알게 하소서! 그런 것이 우주의 뜻입니다. 우주의 목적입니다. 그것 보고 부처님의 본원이라 합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본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