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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92

92. 가사 일상관(日想觀)이라, 일상관은 서산(西山)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보고서 공부하는 그런 관법입니다.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자꾸만 생각하고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따라서 마음이 모아지고 정말로 그때는 해와 같은 광명(光明)이 보인단 말입니다. 광명(光明)이 원래 없으면 보이겠습니까만 사실은 원래 빛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우리 중생이 보는 눈부신 그런 빛이 아닌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빛이 항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하나의 생명(生命)의 빛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던지 공부가 사무쳐서 정말로 마음이 딱 모아져서 망상(妄想)이 줄어들면 그때는 그에 따라서 차근차근 빛이 비춰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할 때도 역시 내가 공부해 나가면 아주 그 행복(幸福)스러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빛이 비추어 오는구나. 이렇게 기대하고 하는 공부는 손해가 없습니다. 우리가 없는 허상(虛想)을 생각하면 모르겠지만 실지로 빛이 있는지라 빛을 미리 생각하고 하는 것은 공부에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명관(光明觀)이라 또는 일상관(日想觀)이라는 관법(灌法)이 있습니다. 또는 법계관(法界觀)이라. 법계관은 화엄경(華嚴經) 식인데 법계관은 우주(宇宙)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순수(純粹)한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光明)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하는 것도 이제 공부에 손해가 없는 것인지라 다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은 근본(根本) 믿음이 '내가 지금 한치 앞의 진여불성 자리를 못 본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가 어김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믿고서 화두(話頭)를 하나 주문(呪文)을 하나 염불(念佛)을 하나 관법(灌法)을 하나 그때는 어떤 공부도 무방한 것입니다. 다만 자기 스스로 마음이 혼침(昏沈)이 올 때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화두나 염불이나 관법을 애쓰고 하는 것이고, 또는 마음이 좀 들뜨면 가만히 놓아 버리고서 그냥 호흡(呼吸)만 해도 무방하고, 따라서 마음이 혼침이 올 때 일으키는 요령 또는 마음이 들뜰 때 마음을 가라앉히는 요령 그런 것은 자기 스스로 해보시면 짐작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이른바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됩니다. 우리 진여불성 자리는 원래 지혜(智慧)와 선정(禪定)이 같이 온전히 다 원만히 갖추고 있어 놓아서 우리 공부하는 방법도 역시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지혜와 선정의 공부가 같이 되어가야 그래야 이제 진여불성(眞如佛性)하고 빨리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항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해서 모두가 다 허망(虛妄)한 것이고 있는 것은 결국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비추어 보는 반야(般若)의 지혜(智慧),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산란스럽게 않고 진여불성을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마음을 이렇게 이어간단 말입니다. 그 마음을 지속시키는 그것이 이른바 참다운 삼매(三昧)로 우리 마음을 유도(誘導)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이른바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됩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의 대요가 돈오점수(頓悟漸修)라, 먼저 문득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서 그 다음에 차근차근 거기에 입각해서 닦아라 하는 것입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나 돈오돈수(頓悟頓修)나 원래 똑 같은 뜻입니다. 해석상의 차이 뿐인 것이지. 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도서(都序)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보조국사(普照國師) 어록(語錄)이나 모두가 다 대요(大要)가 무엇인가 하면은 돈오점수(頓悟漸修)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입니다. 우리가 문득 자기(自己)나 일체존재(一切存在)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부처다.


이렇게 문득 깨달아 놓고서 아직 증명(證明)은 범부(凡夫)이므로 못했겠지요. 그래 놓고서 우리가 힘 따라서 그 자리를 닦아 나아간단 말입니다. 닦아 나가되 정혜쌍수(定慧雙修)라, 모두가 부처라는 그런 반야의 지혜를 놓치지 않고서 그 지혜를 간직하면서 정(定)이라. 정은 선정(禪定)이라는 정(定) 자입니다. 반야의 지혜를 지속시키는 것 보고 정(定) 그럽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제 지관균등(止觀均等)이라, 지(止)와 관(觀)과 어우러지는 것이고 정(定)과 혜(慧)가 같이 어울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되어야 마치 부처님 경전(經典)이나 논장(論藏)에 그런 비유가 '새가 양쪽 날갯죽지가 있어야 잘 날고, 달구지의 바퀴가 양쪽이 있어야 잘 달리듯이 우리 공부도 역시 본래 달구지에 양쪽 바퀴가 있고 새도 본래로 날갯죽지가 두 개 있듯이 우리도 역시 본래불성(本來佛性) 가운데는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와 선정(禪定)이 온전히 갖추어 있어 놓아서 그렇게 거기에 맞게끔 공부를 해야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과 계합(契合)이 잘 된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