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인간론(人間論)이고 또한 바로 행복론(幸福論)입니다. 본래적인 인간(人間)의 참다운 자기(自己)를 아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가장 최상(最上)의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맛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번뇌(煩惱)에 구속(拘束)되어서 해탈(解脫)을 못하면 참다운 자유(自由)와 참다운 행복(幸福)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나를 위해서 나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은 자기한테, 자기한테 싫은 것은 남한테 떠넘기는 것이 중생(衆生)의 본(本) 근성(根性)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공(空)이라는 그런 공 도리(空道理)를 모르면 우리 중생심의 차원(次元)에서 약간 좋은 짓을 한다고 해도 사실은 위선(僞善)을 면치 못합니다. 내가 분명히 있으니 기왕이면 좋은 음식, 자기가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자기가 입고 싶고, 좋은 집에서 자기가 살고 싶을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 도덕(道德)을 부린다 하더라도 이런 제법공(諸法空)의 도리(道理)를 모르는 차원에서 위선(僞善)은 절대로 면치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성자(聖者) 외에는 위선가(僞善家)의 범주(範疇)를 못 벗어납니다.
성자(聖者)는 우주(宇宙)의 참다운 실상(實相)을 깨달은 분입니다. 내 마음의 본체(本體)가 무엇인가. 우주의 참다운 본 모습이 무엇인가. 참다운 실체(實體)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을 깨달은 분이 성자입니다. 우리가 남의 글을 본다 하더라도 깨달은 분상에서 쓰인 글은 조금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분들은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면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시비(是非)를 미쳐 못 떠납니다. 이와 같이 2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이 보는 이것은 다 비어 있다고 반야사상(般若思想)을 말씀했던 것인데, 그냥 비었다고 하면 우리 중생은 잘 납득(納得)을 못합니다.
어째서 비어있는 것인가?
무든 것은 인연생(因緣生)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결합(結合)되어 있는 것이 순간(瞬間), 찰나(刹那)도 머물지 않고 변화(變化)해 마지않습니다.인연생(因緣生)이고 연기법(緣起法)이기 때문에 다 비어있단 말입니다. 시간적(時間的)으로 보면 항상(恒常)이 없으니까 무상(無常)이요,
공간적(空間的)으로 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까 공(空)이요,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은 다행히도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이 다 증명하였습니다. 물리학이라 하는 것은 물질(物質)의 도리(道理)를 체계(體系)있게 공부해서 밝힌 것으로 바로 과학(科學)입니다. 그런 물리학이 모든 것은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비어 있다는 도리를 증명(證明)했습니다. 즉 말하자면 모든 것은 제로(zero)로,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증명을 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같이 철저히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모든 것이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하다는 반야사상(般若思想)의 도리를 과학자(科學者)도 다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기에서 그치지가 않습니다. 만약 이것도 저것도 다 비어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으며, 그야말로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 비어 있거니 무슨 행복(幸福)이 있으며 선악(善惡)은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그 공(空)에 그치지 않고, 모두는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며, 인연(因緣) 따라 모아져도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하기 때문에 바로 무상(無常)이요, 따라서 공간적(空間的)으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공(空)이요. 이런 것에 대해서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입니다. 그러나 그 참다운 실상(實相)은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것 같이 있는 것만도 아니고, 또는 반야사상에서 말하는 그런 비어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본 것이 비어 있는 것이지,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충만(充滿)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初期) 불교(佛敎)에서 있다, 없다, 좋다, 궂다와 같은 차원만 공부한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全部)를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산은 저런 푸른 산이고, 물은 저런 영롱(玲瓏)한 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근래(近來)에 와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그런 도리를 그렇게만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 중생의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있는 범부심(凡夫心)에서 보는 것이지 청정(淸淨)한 불안(佛眼)이나 혜안(慧眼)으로 보는 안목(眼目)이 아닙니다. 독심(毒心)을 다 떠나버리고 번뇌(煩惱)를 다 여의어버린 부처님 눈, 성자(聖者)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사실(事實)을 사실대로 봅니다.
따라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시는 그런 안목에서는 산은 그냥 산이 아니고, 법성(法性)의 산 법계성품(法界性品) 그대로 산이란 말입니다.
물도 그냥 물이 아니고 법성(法性) 수(水)입니다.
법성(法性) 산(山)이요, 법성(法性) 수(水)요.
실상(實相) 산(山)이요, 실상(實相) 수(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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