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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9

79. 지혜(智慧)는 무엇인가. 불교의 지혜는 바로 반야(般若)의 지혜입니다. 또한 반야지혜는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비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변화(變化)해서 마지않는 변화의 과정(過程)에 불과합니다.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은 실존적(實存的)인 고유(固有)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비어있는 것인가.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차근차근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도 머물지 않고 또 어느 순간도 공간성(空間性)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空)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철저히 과학적(科學的)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져서 그 합해진 그것이 조금도 머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벨그송'의 말에도 "우리는 한 시냇물에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가 없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한 시냇물에 우리가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가 있겠습니까.


현상계(現象界)는 모두가 일과성(一過性)입니다. 한번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번 지나가는 무상한 인생입니다. 누구 미워하고 누구 지독하게 탐착(貪着)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제아무리 미워한 사람도 이윽고 얼마 안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반야(般若)는 모두가 비었다는, 내 몸도 비어 있고, 원수의 몸도, 내 권속(眷屬)의 몸도 다 비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못 봐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잠시간 합해져서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그런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듯이 우리 몸의 세포 역시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新陳代謝)를 해서 변동해 마지않습니다. 고유한 자기 몸뚱이가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諸法空)입니다. 그래서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처님 지혜의 법문이기 때문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인데 다만 공(但空)이라는 소식으로만 안다면 그때는 불교가 허무주의(虛無主義)가 되고 맙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그 자리만 공인 것이지 영원의 생명(生命), 즉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영원(永遠)한 생명의 자리는 항상 존재한단 말입니다.

'아인슈타인' 다음 가는 위대한 물리학자인 '호킹'박사도 역시 우주가 파괴되면 하나의 광명(光明)의 구멍, '블랙홀'이라는 광명의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어 나온다. 이렇게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보다 깊은 소식은 모르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법은 천지우주가 다 파괴(破壞)가 되어서 우리 인간이 광음천(光音天) 이상으로 다 올라가 버려서 물질은 조금도 없어진 때라고 할지라도 역시 부처님 법은 조금도 변함이 없고 조금도 감축(減縮)이 없습니다.


모양이 있는 현상계(現象界)는 다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주가 이루어질 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우리 중생의 업력(業力)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原子)가 되고 분자(分子)가 되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질(物質)과 중생(衆生)의 업력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염파(念波)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두가 상념파(想念波)란 말입니다. 상념파. 우리의 상념파가 금생에 이 몸을 만들었습니다. 엄마 태(胎) 속에 들어갈 때에는 우리의 식(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념파인 식 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식(識)들이 부모의 영양(營養)을 취하고 그 영양 밑에서 이렇게 태어났단 말입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질은 없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광명(光明) 뿐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마음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반야(般若)라는 것은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 뿐이다.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느껴야 불교의 지혜입니다.

불경을 많이 외이고 다른 공부를 많이 하는 이런 것은 하나의 분별(分別) 공부인 것이고, 가장 핵심(核心)은 반야(般若)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은 모든 상(相)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무상(虛妄無常)해서 다 공(空)이고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내(我)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아(無我), 무아 말씀들은 이렇게 잘 합니다. 그러나 무아 소식을 좀 더 깊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아 소식을 안다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명예(名譽)를 구하고, 무엇 때문에 재산을 구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 하면서 우리 마음의 상태만은 역시 진리에 입각(立脚)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반야지혜(般若智慧)와 더불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베풀어야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가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무자화두(無字話頭)를 하더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인다고 할지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천지우주는 조금도 흠도 없고 간격(間隔)도 없고 모두가 다 부처님의 진여 광명(光明) 뿐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 석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