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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불교 - 과학시대의 종교(1)

불교 - 과학시대의 종교

                               고요한 소리 http://www.calmvoice.org

Buddhism and the Age of Science

Buddhism -

the Religion of the Age of Science


Thadu Maha Thray Sithu

U Chan Htoon

Formerly Judge of the Supreme Court

of the Union of Burma


우 찬 툰 지음

    남기심 옮김

(The Wheel Publication No.36/37  1962)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빠알리성전협회       (PTS)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경임.

* 주요 술어는 빠알리어 음을 취했으며 빠알리어는 이탤릭    체로 표기함.

* 모든 주는 역주(譯註)임.


▶ 차  례


소개의 글 ………………………………… 6

불교-과학시대의 종교 ………………… 10


소개의 글


이 책 『불교 -- 과학시대의 종교』는 미국에 본부를 둔 〈과학시대의 종교연구소(IRAS:Institute for Religion in an Age of Science)〉가 주최한 1958년 8월의 제5차 여름학술대회에서, 태국에 본부를 둔 세계불교도우의회(世界佛敎徒友誼會 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의 당시 회장이던 우 찬 툰 거사가 불교계의 대표로 초청되어 발표한 글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이 회의에는 미국, 캐나다 각지에서 파견한 약 200여명의 대표자들이 모였는데, 저명한 과학자와 종교계 지도자들이 기조 발표를 하였다. 이 회의의 주제는 “과학시대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였는데, 토론이 주제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 학술회의를 기획한 주최자 측에서 발표자들이 다루어야 할 문제를 질문 형식으로 미리 제시하였다.


이 질문들은 현대와 같은 과학시대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뚜렷이 적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오래된 전통적인 종교들이 이 과학시대의 시대적 도전에 대응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작성한 것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 찬 툰 거사는 불교가 현대 첨단 과학 지식과 하나도 모순되지 않으면서 오늘의 삶에도 과학이 줄 수 없는 빛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발표문은 우선 불교적 세계관을 요점적으로 정리해 보이고, 다음에 주어진 질문 하나하나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발표문은 50여년 전에 나온 것이지만 지금에도 그 내용의 참됨에 변함이 없고 불교적 가르침의 정수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우 찬 툰 거사가 1958년 당시에 회장으로 있던 세계불교도우의회(WFB)는 1950년에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2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어 태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단체로, 불교의 모든 종파가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 불교 단체이다. 미국,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등의 35개국에 지부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1963년에 지부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학술회의를 주최한〈과학시대의 종교 연구소(IRAS)〉는 1954년부터 종교와 과학 사이의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비영리 단체이다. 1954년 “과학시대의 종교”라는 주제로 시작한 이래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해오고 있으며 2008년에는 “생명의 발생 : 자연의 창조양식-인간의 경우”라는 주제로 54회째의 학술회의를 기획하였다.


우 찬 툰 거사는 이 회의에 앞서, 그보다 약 열흘 전에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열린 국제종교자유연합회(IARF: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Religious Freedom)의 제16차 회의에서 역시 불교계 대표로 강연을 한 바 있다. 이 회의에는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 5대 종교의 지도자들과 전 세계에서 파견한 천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오늘의 세계가 안고 있는 윤리적, 정신적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이 문제에 대한 각 종교의 상호 동의와 협력이 가능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우 찬 툰 거사는 과학적 사고와 기존 종교의 신앙이 충돌하는 갈등 국면에서 불교만이 할 수 있는 불교 고유의 역할이 있다는 내용의 강연을 한 바 있다.



옮긴이


불교-과학시대의 종교


이 자리에 발표자로서 초청을 받고서 저는 이 학술회의를 기획한 분들이 오늘 논의의 주제가 될 질문들을 얼마나 신중하게, 또 얼마나 사려 깊게 정하셨는지 참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적시(摘示)하기 위한  이 질문들은 인류 역사 속의 바로 이 시점에 꼭 짚어보지 않으면 안 될,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중요한, 날카로운 질문들입니다. 이들 질문 속에는 오늘의 물질문명 속에 정신적 가치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점증하는 자각이 들어 있고, 오랜 종교적 확신에 대한 신뢰가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깊이 있게 파헤쳐보고자 하는 정직하고도 현실적인 고뇌가 깃들어 있습니다.


문제의 중요성에 비추어 저는 여기서 제기된 문제 하나하나를 실수행을 하는 불자의 관점에서 곧바로 짚어나가고자 합니다. 그에 앞서 불교적 세계관의 요강, 불교 사상의 배경, 삶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불교적 개념을 먼저 간략히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차차 밝혀지겠지만 불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른 종교와는 그 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논의를 전개해 나가다보면 이들 문제에 대한 불교의 해답은 서양 종교의 해답과는 아주 다르고, 불교 관점에서 보면 이들이 대부분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고따마 붓다는 인도의 왕자로서 통치자의 삶을 버리고 자기절제와 명상의 생활을 하며 정신적 완성의 길을 걷는 고행자가 된 분입니다. 싯닷타 왕자였던 그분은 그 어떤 영성이나 영감, 또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궁극적 깨달음을 이루어 정등각자인 현세의 부처님이 된 다음에야 권위라면 권위를 가지고 비로소 정신적인 문제에 관해 설하였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이른 것 역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취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룬 깨달음과 정신적 해방에 관한 법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는 오늘날에도 그분이 가르친 법의 원리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오라, 와서 누구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나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고, 비판하고, 따져보라. 내가 펴 보일, 해탈에 이르는 방법을 실행하라. 나는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 방법을 충분히 익히면 누구든지 나처럼 진리를 직접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과 그 수행 방법으로서의 팔정도는 부처님 재세시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전 또는 기록으로 온전하게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천 수백 년에 걸쳐 대를 이은 아라한들, 곧 청정한 수행으로 해탈을 증득한 불제자들이 법의 참됨, 그리고 그 수행법의 효험을 계속 입증해 왔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윤리학, 심리학, 종교는 물론, 모든 형태의 삶을 조화로운 도덕적 질서 속에 다 포괄하는 완벽한 우주적 철학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과연 최근의 과학이 밝힌 여러 원리에 부합한다는 의미에서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판단하도록 남겨 놓겠습니다. 어떻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 본성의 이성적 측면과 감성적 측면 양쪽에 다 호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류가 이루어야 할 가장 높은 정신적 열망이 무엇인지를 부처님 가르침 속에 제시되고 있는 궁극의 목표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결국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불교 체계 속에는 창조주로서의 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창조주의 자리에 법[Dhamma]적 원칙과 법적 질서가 있고 이들이 가장 상위의 원리입니다. 이 원칙이 삼라만상에 두루 통하는 인과법칙의 정신적 양상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우주론은 상대성, 곧 모든 현상은 상호 연관되어 복합적인 사물의 기본성격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세계 질서 혹은 우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지마는 거기에는 최초의 창조행위라든가 최초의 원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시간, 그리고 사물의 상대성은 시작점이 없는 하나의 순환 고리입니다. 이 개념에 상응하는 현상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물리적 세계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지평선을 보고 거기가 바로 땅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평선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것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서는 우리가 이 땅 위의 어느 지점에 있든지 항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간을 비롯하여, 모든 현상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시작점이라는 경계가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간이니 영원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에 시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평선이 땅 끝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재라는 것은 우리가 서 있는 시간 속의 한 점이며, 영원이라는 것은 그러한 시점이 멈춰 있지 않고 끝없이 뒤로 물러서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구 위의 어느 한 지점이 지면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삼라만상이 있게 된 원인들을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그 시작이 되는 시간상의 한 점은 없습니다. 자연과학의 최근 이론에 따르면 전 우주가 바로 이와 같은 물리적 원칙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리고 우주의 본질이 우리의 이해 범위 밖에 있다는 사실이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과학의 새로운 개념인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은 불교철학에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것의 삶, 정신적-육체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연속하여 이루어지는,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법[Dhamma]적 질서가 일관되게 작용합니다. 그것 역시 시작이 없는, 원인-결과 관계의 끊임없는 흐름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시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겠지마는 그 시작이란 것은 일련의 연속 속의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 앞선 원인은 그 이전에, 지난 겁의 세상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세상이 자연적인 진행의 과정 속에서 끝이 나면 그것을 지속시켰던 힘이 원자 요소로 분해되지만 그러한 붕괴 후의 무한히 긴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재결합하여 또 다른 세상이 형성됩니다.


이러한 순환 고리의 원인은 업(Kamma), 곧 매순간 이어지며 생성되는 의식의 총체적 힘입니다. 사람의 자유 의지는 심리 과정에 뿌리를 둔, 스스로의 과거 행위가 조성한 시간과 공간의 복합체 속에서 작용합니다. 이러한 과거 행위를 업(Kamma)이라 하며, 그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를 불교에서는 과보(Vipāka)라고 합니다. 과거의 업이 현재라는 조건들을 만들어낸 것이며 오늘 짓는 업은 앞으로 있을 조건들을 만듭니다. 불교 문헌에서는, 새롭게 순환하는 세계는 지나간 세계에 살았던 모든 존재가 지은 업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환생, 혹은 우리에게 더 익숙한 말일지도 모를 재생에 관한 개념은 오늘날의 서구인들에게는 과거처럼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재생이 꼭 있어야 할 법[Damma]적 필요성은 아마도 보통의 판단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만이, 이 우주에 도덕적 정의가 있다고 믿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불공평한 듯한 사례들 ― 불치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시각적, 청각적, 지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사람의 힘으로나 어떤 신령한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게 일찍 죽어갈 운명을 타고나는 어린아이들, 세상이 공정하다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수많은 고통의 사례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모든 불운은 전에 지은 악업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가 병을 고쳐주고 나서 자기가 병을 고쳐 준 사람에게 “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대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라고 한 것이, 불행을 안고 태어나는 갓난아이한테도 그것이 금생에서 지은 죄로 인해 받는 죄값이라고 하는 말이 될 수 있을까요? 만약 예수의 이러한 말이 보편적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불행은 ‘지금, 여기서’ 선업을 쌓음으로써 피할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지금의 처지는, 단언할 수는 없지만 현세에 고쳐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것은 그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미래를 행복한 것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운명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만들어갈 뿐입니다. 개인의 운명은 끊임없는 방향 수정에 달려있습니다. 부처님은 오늘의 불행을 바로잡기 위한 방법으로, 긍정적인 사고와 자비심으로 생명있는 모든 것에 대해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을 닦을 것, 보시를 할 것, 성적 자제를 할 것, 자기 통제수련과 정신수양을 할 것 등의 바른 처신을 위한 원칙을 세웠습니다. 미래의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반드시 오늘의 잘못이 없어야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이와 같은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과학의 힘만으로는 인간의 삶에서 질병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결코 완전하게 근절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의 업이 서로 달라서 그에 따라 타고난 성격, 지능, 소질의 개인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똑같이 평등한 사회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자연법칙은 인간의 삶에 그릇된 가치를 부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업의 원리는 숙명론이나 예정론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처지는 과거에 지은 행위의 결과인 한편, 우리의 미래는 오늘의 행위에 의해 조성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옳은 방향으로 노력함으로써 세속적 지위를 개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신적 발전에 있어서도 그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불교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가르침으로써 재생 과정 속에 불변하는 항구적 요소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상으로 나타난 개인의 성품은 순간순간의 의식의 연속체로서, 어떤 한 순간의 의식은 바로 그 앞 순간의 의식을 조건으로 하되,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자유의지는 개인의 성품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성격을 고치면 그와 함께 운명도 바뀝니다.


 불교는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라는 경구(警句)가 그대로 깊은 심리적 진실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이고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은 자기의 본성을, 그리고 자기의 존재 양식을 만들어내는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금생에서 자기의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세에서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상의 목표는 가장 높은 천상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조건 지어진 존재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든 존재는 결국 무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주처(住處)는 모두 서른 한 곳이 있는데 그 중에는 인간계보다 낮은 차원의 곳도 있고, 인간계보다 품격이 높은, 정신적 존재들의 주처도 있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영생은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사후에 그들의 정신적 향상의 정도에 따라 천상계, 인간계 또는 하위의 악도에 태어나지만 그들이 지은 업의 과보가 지속되는 동안만 그 주처에 머뭅니다. 그 과보가 소진하면 그 주처를 떠나 다른 업이 이끄는 곳에 다시 태어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아 있는 동안, 만약 이들 존재 상태를 우리 의식이 작용하는 각기 다른 정신적 차원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정신적 우주의 비교적 정확한 그림을 그린 셈이 됩니다. 사람이 탐욕, 육욕, 증오나 난폭함에 사로잡혀 있다면, 스스로를 낮은 정신적 차원에 머물게 하는 것이며, 만약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 이런 차원의 것이면 그는 그에 적합한 인간계 이하의 악도에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만약 그와 반대로 보편적 사랑, 자애심, 이타심, 이욕(離慾) 등의 더 높은 차원의 속성을 길러낸다면 이런 속성들이 죽음의 순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그에 상응하는 더 높은 주처로 그를 이끌 것입니다. 이러한 담마적 과정[Moral law]은 기계처럼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속여넘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법칙을 이용하여 정신적 향상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윤회를 하는 과정 속에 거듭 태어나는 영속적인 ‘영혼’이라든가 ‘자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모든 존재를 연속해서 있게 하는 인과율이, 개별적 인과의 길을 따라 빚어내는 생명의 연속체가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이 원리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안에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조건 지어진 모든 존재가 다시 태어나 늙어서 죽는 것을 포함한 생명 과정은 어느 주처에서나 고(苦)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모든 유정물은 덧없음[無常], 불만족[苦], 실재적이고 지속적인 자아와 같은 존재가 없음[無我]의 세 가지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윤회는 갈애(渴愛)에서 비롯합니다. 갈애란 가장 저급한 동물적 탐닉으로부터 가장 품위 있는 정신적 즐거움에 이르기까지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증(渴症)입니다. 모든 욕망은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것을 새롭게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이며, 살고자 하는 정신적인 의지를 돋우는 것이 바로 이 갈애입니다. 따라서 갈애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생성하는 원천입니다. 이 갈애의 힘은 ‘실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無明]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갈애와 그로 인해 생기는 재생의 과정을 끝낼 수 있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때 갈애와 무지는 완전히 없어지게 되며 그와 동시에 집착과 애착의 마음도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미혹에 지나지 않는 생명 과정이 끝나는 것을 열정이라는 불길의 꺼짐, 곧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고의 끝이며 변함없는 유일한 실재입니다.


이 마지막 완성에 이르는 길이 바로 정신적 계발을 위한 여덟 가지의 바른 길[八正道], 곧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定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이 여덟 가지 하나하나는 대단히 엄밀한 윤리적, 심리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들은 단순히 막연하고 체계가 없는 규범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몸가짐을 해야 하는지를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처방한 사고 양식과 실천 방식입니다. 이들 모두는 함께 정신적 계발의 세 가지 필수 요소인 계(戒), 정(定), 혜(慧)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의 종식으로 가는 길입니다.


“사람으로서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불교는 불변하거나 고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심리-물질적 과정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업과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생기고 또 그에 의해 지탱되는 상호 의존적 관계의 흐름입니다. 사람은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고 나머지 넷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색(色, 물질적인 육신), 수(受, 감관적 느낌), 상(想, 지각), 행(行, 심리적 형성), 식(識, 의식)의 다섯이 그것입니다. 이 다섯 중에 ‘행(Saṅkhāra)’을 정의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서양 사상에는 비슷하게라도 이에 해당하는 개념이 없고, 이것이 뜻하는 모든 의미를 다 포괄하는 한 마디로 된 영어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넓게 말해서, 이것은 과거의 업에 의해서 작동되고 있는 어떤 경향 혹은 특성을 의미하는데 의지적 기능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신적 기능을 포괄하는 뜻이 있습니다.


불교의 심리 분석의 세부적인 내용을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방대한 과제이며, 만약 능력 있는 서양의 심리학자가 체계적으로 연구하려 한다면 마음의 본질에 관한 현대적 개념을 몽땅 다 바꿔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주제입니다. 여기서는, 불교가 살아있는 존재를 실체가 아닌 과정으로, 즉 연기적으로 이어진 사건의 연속으로 본다는 것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연기적(緣起的) 연속성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으며 사건이 있다는 개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루어진 업의 보이지 않는 힘이 우주의 여러 물리적 과정을 통해 작용해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데, 그 하나하나는 복합적 생성물입니다.


 마치 자동차가 엔진과 그 부속품들, 차대, 바퀴, 내부 장식물 등의 복합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가 이 중의 어느 한 가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여러 부품들이 작업대에서 한 데 조합되어 비로소 완성품이 되듯이 생명체도 마음과 육체의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중의 어느 한 가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한 현상적 생산물이지 영속적이거나 자립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이것이 ‘무아(Anattā)’라는 불교의 원리가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에서 오는 환상이며,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자기가 있다’고 믿는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합니다. 불교의 윤리와 수행은 모두 이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답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질문 자체가 사람의 제한된 이해력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간의 본질을 알고 상대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시작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통상적인 답변은 모두 기본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지적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위해서 그 이전에 그것을 만든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면 논리적으로 그 창조자도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가 또 있어야만 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창조자가 또 다른 창조자가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면 이 논리는 송두리째 무너져버립니다. 창조주-유일신을 전제로 하는 이론은 어떤 문제도 풀지 못 합니다. 이미 제기된 문제들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만 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생명은 물론 온 우주를 하나의 과정, 곧 상호 의존적 인과 관계의 복합체로 봅니다. 이 복합관계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기 위해서는 통찰적 지혜를 계발해야 합니다. 이 일은 계행을 닦음으로써 이룰 수 있는데 이들 계행은 모두 ‘자아가 있다’는 의식과 이에 직결된, 집착하려는 본능을 줄여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청정성[戒]의 계발과 함께 일반적으로 명상이라고 알려진 선정 수행[定]을 닦아야 합니다. 불교의 명상은 무의식 속의 신비감이 빚어내는 환상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체계화된 정신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다 보면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과 같은 신통력이 생기지만 이것이 명상의 목적은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형태의 집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명상의 진정한 목적은 해탈입니다. 정정[正定]을 계발함으로써 우리를 미혹으로 둘러싸고 있는 무명의 벽을 뚫고, 제트 추진 항공기가 음속의 벽을 돌파하듯이 시간과 상대성을 깨뜨려낼 수가 있습니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불제자는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낸 무명과 환상의 문제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궁극적 진리, 곧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은 대지혜자이실 뿐 아니라 대자비자이십니다. 진리를 찾아 깨달으신 것도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분별심 없이 모든 존재를 두루 포용하는 자애심을 키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무량심(無量心)이라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마음에는 자(慈, Mettā), 비(悲, Karunā), 희(喜, Muditā), 사(捨, Upekkhā)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사무량심은 인류에 대한, 나아가 모든 생명에 대한 우리 불자가 가져야 할 이상적인 마음가짐입니다. 금생에서 이 목표를 이룬 사람은 이미 순수한 정신만으로 존재하는 무색계, 곧 가장 높은 천상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천국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오직 이 길뿐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천국이며, 외적인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입니다. 금생에서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은 설사 그가 가장 궁극적인 열반에는 이르지 못한다 해도 사후에 그 성취도에 합당한 천상계(정신세계)에 다시 태어납니다.


이제 이 학술회의의 논의 주제인, 오늘과 같은 과학시대의 종교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제가 불자로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세계관에 입각하여 해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삶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줄 어떤 신앙이 필요한가?


과학은 물리적 세계를 살피면서 그것이 운행(運行)되는 법칙을 발견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명 속에서의 과학의 기능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술적 수단의 개발, 질병의 퇴치, 그리고 더 크게는 인간이 처한 자연 환경을 정복함으로써 인류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왜,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앞서 언급한 그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질과 근원을 밝히는 데 희망을 주는 특정한 원리들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학은 기존의 유신(有神)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믿어왔던 관념을 크게 뒤흔들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갈릴레오가 발견한 때로부터 생물 진화에 관한 다윈의 첫 논문이 나오기까지 서양의 종교는 끊임없이 사상적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성과 지식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이는 바로 사람들에게, 자기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줄 가설,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 대한 믿음과 이 지상에서의 단순히 안락하기만 한 삶 이상의 어떤 더 높은 목표가 있으리라는 본능적 믿음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설, 그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하튼 오늘날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거의 누구나, 그 경이로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결코 지상에 천국을 창조해 낼 수 없다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질병이 극복될 때쯤이면 또 다른 질병이 생겨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과학이 통제할 수 있게 된 박테리아는 스스로를 변형시켜 불과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동일한 방법으로는 잡을 수 없게 면역이 된 변종을 낳는 까닭에 과학은 새 기술을 찾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결코  과학의 성과를 폄하(貶下)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생활의 편의를 위해 과학이 가져온 이득이 크기는 해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초래한 위험이 오히려 더 큰 까닭에, 제가 보기에, 이러한 임시방편으로서의 과학보다는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과학이 우리에게 더 필요할 듯합니다. 질병, 노쇠 그리고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며, 사정이 그러할진대 인간의 삶은 언제까지나 불완전할 것이요, 슬픔과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항상 어둡게 드리워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교는 사람들을 실망시켜 왔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반드시 종교가 있어야 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거나 알려져 있지 않거나 간에 인간이 수긍해야만 할 그 모든 신적 권능에 관한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야 한다면 이에 대한 전통적인 종교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이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입니다. 전통적인 종교는 인류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과, 미래에 갖출 수 있는 지식의 한도 안에서만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조적 교리를 통해서는 이제 더는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전통적인 종교가 그 기본적인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과학이 밝힌 새로운 사실들과 사물의 실재현상에 대해 지금까지 몰랐던 여러 가지 양상을 수용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이 받아들여야만 할, “알려져 있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적 권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면서 인류에 계속 도움을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가, 절대로 오류가 없는 신의 계시[天啓]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나면 이러한 조정은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계시로 믿고 있던 가르침이 하나라도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면 그 체계 전체가 흔들려 버리고 맙니다. 이런 일은 한 번이 아니라 수천 번 있어왔고, 믿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한계는 이미 분명해졌으며, ‘신의 계시’에 대한 믿음은 수천만 년 전에 멸종한 뇌룡이나 한 가지로 죽은 지 벌써 오랩니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불교는 ‘신의 계시’를 따르는 종교가 아니며, 입증할 수 없는 교리를 가진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삶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곧 아무런 선입견 없이, 자신의 의식을 정밀하게 살피는 방법으로써 정각(正覺)에 이른 분이 얻은, 삶에 관한 궁극적 진리입니다. 자연과학자가 외부세계를 관찰하듯이 붓다는 마음 혹은 정신이라는 내부세계를 관찰하였습니다. 그 분이 가르치신 것은 모두, 그분의 자기 정화의 방법을 따르기만 한다면 누구나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적 측면에 있어서 불교가 과학과 모순을 일으킬 일은 하나도 없으며, 그런 일은 결코 있을 듯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이 이 질문이나 다음의 질문에서 제기하는 것과 같은 기능을 계속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실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회 안에서 전통적 종교가 이 기능, 곧 신적 권능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기능을 어느 범위까지 수행할 수 있는가?


자연 현상에 관한 해석을 하는 것이 과학이 하는 일인데, 사람들은 자연 현상에 관한 정보를 감관을 통해서 얻으며 이에 근거해서 외부세계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고 있는 외부세계의 모습은 물리학이 제시하는 모습과는 딴판으로 다르기 때문에 과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외부세계에 관한 해석을 가지고서 사람들로 하여금 궁극적 실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할 수 있을 것인지 극히 의심스럽다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자연 현상의 본질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부인할 수 없는 한,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 이론과 같은 확립된 과학적 사실들을 포함하여 그 전반적인 모습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는 현대 생물학이나 유전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은 진화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설법 중의 하나인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 Sutta)1)에서 세계의 순환 과정 중에 진화와 퇴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묘사가 있으며, 그 말씀은 오늘날의 지식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조주로서의 신의 개념을 종교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놀랄 사실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설사 과학이, 시험관에서 생명이 있는 유기체를 생성하거나 사람과 똑같은, 지각 있는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불교의 진리는 추호도 그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든지, 다시 말해서 자연스러운 탄생 과정을 통해서 태어나든지, 아니면 어떤 인공적 방식을 통해서 생겨나든지 간에 그것은 생명의 흐름의 원인인 과거 업의 결과이며, 생명이 있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 합성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이러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성취가 아무리 혁신적이라 해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금이라도 모순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기능에 과학 자체가 기여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앞서 언급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불교의 경우에서와 같이 과학이 종교의 가르침을 확인해 줄 수 있을 때, 과학은 종교적인 믿음의 파괴자가 아니라 오히려 동반자, 또는 가장 소중한 친구로서의 역할로 바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역할을 사실의 규명에만 한정하고 있는 과학에 신화나 종교적 교리의 요구에 맞추어 사실들을 해석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과학은 결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서양 사회에서는 종교와 과학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꺾이는 쪽은 항상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지식을 증진시키고 있는 과학을 환영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류가 더 높은 정신적 진리를 깨닫고자 할 때 꼭 필요한 발상의 전환을 현대 과학이 가져올 것으로 확신하고 기대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궁극적 진리에 과학적으로 접근한 유일한 종교적 스승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전통적인 종교적 신조들 중에서 어떤 것들이 아직도 효력을 유지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오직, 자기의 신앙을 천명하는 각 종교 단체 대표의 견해와 경험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불교로 말하면 그 교리의 근거가 모두 확실하며, 그런 까닭에 계속 효력이 있습니다.


종교적 신앙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양립할 수 없는, 피차 상충하는 주장들이 서로 수용 가능한 공통분모로 조정 내지 맞줄임됨으로써 우리가 이성적으로 수긍할 수 있게 되는 길이 있을까?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신앙 체계를 조화시켜 보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어 왔으나 그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조화시켜 보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으나 불과 두어 세대도 지나지 않아 시크교도들은 인도에서 이슬람교의 가장 큰 반대 세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적 통합은 때로 인간의 사상적 폭을 넓혀 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혼란과 실패로 끝막음하고 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컨대, 신지학과 같은 이런 방향의 현대적 시도가 있었으나 많은 추종자를 끌어 모으지 못했습니다.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생각을 조화시키려고 한 것이 오히려 본래의 교리보다도 이성적으로 더 수용하기 힘든 결과를 빚었기 때문입니다. 


신앙 체계의 통합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지극히 명백합니다. 유신론적 종교는 제각기 자기네 교리를 초월적인 존재인 신의 계시(啓示)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계시들’은 ‘창조’에 관한 설명이 다르고, ‘초월적 존재’의 성격과 의도에 대한 해석이 다르며, 신과 인간과의 관계, 사후의 운명에 대한 견해가 다릅니다. 이렇게 서로 일치할 수 없는 교리로 인해 피차의 정사(正邪)에 관한 체계 사이에 상당히 폭넓은 차이가 생겨납니다. ‘신의 계시’는 — 신의 새로운 계시가 있다면 모를까 — 결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므로  서로 다른 교리는 종교적 통합을 이루는 데 극복할 수 없는 장애로 남습니다. 기독교 안의 교파들조차 다 같이 똑같은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면서도 상호간에 뿌리 깊은 적대감이 있습니다.


 유신론적 종교는 자기네가 믿는 신이 유일한 신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며, 다른 종교의 신앙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매도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셈족 계통의 종교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들의 갈등은 이미 성서시대에 각기 다른 신을 모시는 종족들 간의 논쟁으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들 종교가 통합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종교들에 관한 한 혹시라도 다른 쪽의 견해를 수용할 정도로 너그러워지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종교에 대해 무관심해 질 때일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종교적인 견해에 대해서 관대할 것을, 반드시 지녀야 할 미덕으로서 권장하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누구를 막론하고 어쩌다가 불교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벌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도 생전에 덕을 쌓았으면 사후에 천계(天界)에 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괴로움이나 행복은 업의 결과이지 어느 특정한 신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불교에는 ‘믿음에 의한 구원’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불교의 ‘자애(Mettā)’라는 것은 신앙, 종족 또는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절대적 믿음과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와 실재를 찾아가는 체계이며 그런 까닭에 이성적 비판과 객관적 분석을 권유합니다. 불교는, 어떤 종교이든지 간에 더불어 사는 것이 불가능한 광신자들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항상 그들과 평화롭게 이웃해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역사가 입증하고 있으며 지난 수백 년 동안 내내 그 누구에게도 개종을 요구하지 않는 관용을 보여 왔습니다.


아니면, 그 여러 종교 중 어느 하나만이 옳은 것인가? 그렇다 해도 어떻게 그 타당성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입증될 수가 있는가?


만약 어떤 종교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옳은 종교라는 개인적인 확신이 없다면 아무도 그 종교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기를 가리켜 불가지론자라느니, 합리주의자라느니, 또는 유물론자라느니 할 것입니다.


어느 한 종교의 교리가 타당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판단은 엄격한 검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즉, 그 교리가 이성적 판단과 경험적 사실 그리고 우주와 생명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모순되지 않는지 검증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어떤 반론에도 그 종교가 주장하는 바를 우리가 개별적으로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이른바 ‘창조주’로서의 그 어느 신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성격의 계시를 인류에게 내린 적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계시’라고 하는 것들은 끝없는 논쟁과 빈번한 종교적 박해를 불러왔을 뿐입니다.


불교는 그 가르침의 타당성 여부의 검증이나 입증에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불교 철학은 이성적 판단, 그리고 경험적 사실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것은 과학이 밝힌 우주의 기본적 모습과도 일치하며, 자연의 정상적인 질서 밖의 어느 것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또한, 불교는 궁극적으로 위빠사나(vipassanā) 즉 직관적 통찰에 이르는 과학적이라 할 만큼 체계적인 정신 수양과 명상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이것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의 예수는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2)라고 하였습니다. 불교에서의 성자, 즉 아라한은 그들의 정신적, 도덕적 면모를 보고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인류 전체가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높은 단계에 이르러 있다면 이처럼 완벽하게 설명된 진리를 수용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에 따라 과거의 업이 달라서 그 결과로 지적, 정신적 수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함께 진리를 똑같이 명석하게,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셨을 때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사람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하였습니다. 그 진리는 당시의 통념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명의 때가 ‘그저 엷게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인’ 사람들이 적으나마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보고 그들을 위하여 법을 펼 작정을 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지식계층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비합리적인 교리와 모든 교파적 소속을 떠나서 정신적 진리의 진수를 확신하는 지식인이 웬만큼 있다면 위대한 종교적 부활과 윤리적 가치의 회복을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 ‘진리’라는 종교를 자기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따르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그도 아니면, 종교에 대해서 사람들은 합리적일 수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정직한 답을 하자면 무례할 만큼 솔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가 합리적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종교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아직까지도 불합리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그 믿음이 비합리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믿으려고 했을 때 이를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불합리밖에 없습니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대해서 합리주의자들이 혐오감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과학적 유물론의 모습을 띤 비합리적인 종교에 대한 반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적 종교에서 불합리한 부분을 빼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종교가 서반구 세계에서 실패한 원인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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