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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바른 마음챙김[正念 samm? sati]
사물에 관한 궁극적 진실인 법은 직접 볼 수 있고, 시간을 초월하며, 와서 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법은 언제나 우리에게 손 가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법이 현실로 실현되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라는 것도 말씀하신다.57) 궁극적 진실인 법은 무언가 신비롭고 먼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스스로 경험할 수 있는 진실이다. 그 진실에 도달하려면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는 길, 경험을 곧바로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길 뿐이다. 이 진실이 능히 해탈을 가져다주는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매개물의 개입도 없이 직접 알아야 한다. 단순히 신심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책이나 스승의 권위 때문에 그것을 믿거나, 또는 연역이나 추리의 방식으로 깊이 생각해서 결론을 짓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직관에 의해 알아야 하는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앎, ‘중간개재가 없이 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앎에 의해서 파악되고 흡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경험의 영역[觸處]을 초점에 갖다 대고 그래서 용이하게 직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빠알리어로 ‘사띠(sati),’ 영어권에서는 보통 ‘mindfulness’라 옮기는 정신적 기능이다. [이하 ‘마음챙김’으로 옮김] ‘마음챙김’은 ‘지금 여기에 마음 둠(presence of mind)’58), ‘주의 깊음(attentiveness)’ 또는 ‘알아차림(awareness)’이다.
하지만 마음챙김과 관련된 알아차림은 우리들의 일상적 양태의 의식에서 작용하는 종류의 알아차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모든 의식은 대상에 대한 앎이나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알아차림을 내포한다. 그러나 마음챙김 수행에서의 알아차림은 어떤 특별한 눈높이에서 쓰이고 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안에서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초연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이른바 ‘맨 주의(bare attention)’의 수준에 이 마음을 의도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을 닦을 때는 마음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금 이 자리에서, 열린, 고요한 그리고 또렷한 상태에서 관하도록 훈련시킨다. 모든 판단과 해석은 중지되어야 하며, 만약 중지되지 않고 일어날 경우에는 단지 등록59)만 시킨 다음 떨쳐내야 한다. 이 일은 마치 파도타기 선수가 바다에서 파도를 탈 때 취하는 방식처럼 사태의 변화를 타고 있으면서 어떤 일이 닥치든 그 일이 일어나는 대로 그저 주목하기만 하면 된다. 그 모든 과정은 단지 산만한 생각들의 파도에 휩쓸려 나가지 않고 현재로 돌아오기 위한,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고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방식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현재를 잘 알아차리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착각이다. 마음챙김 수련이 요구하는 대로 정확하게 현재를 알아차리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일상적 의식에서 우리 마음은 현 순간에 접수한 심상과 더불어 인지과정을 시작하게 되지만 그 각인된 것과 더불어 머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음은 그 직접적 심상을 심적 구조물들의 더미들을 짓기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아버린다. 물론 그 구조물들은 직접적인 심상이 더 이상 원자료로서의 진솔한 사실성을 펼 수 없게끔 만들어 버린다.
인지과정은 일반적으로 해석 과정이다. 마음이 그 대상을 개념화과정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각하는 것은 잠시 동안 뿐이고 마음은 초기 각인을 붙잡자마자 즉시 관념화 과정으로 들어가서 그 대상을 해석하려 든다. 즉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범주와 가설의 견지에서 알기 쉽게 만들려드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해내기 위해 마음은 먼저 개념들을 설정하고 다시 그 개념들을 결합시켜 구조물들 ? 서로 뒷받쳐 주는 개념들의 세트 ? 로 만든 다음 이들을 모아서 복합적인 해석체계로 엮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애당초의 직접적 경험은 관념화 과정에 뒤덮여 눈앞의 대상이 마치 구름층에 가려진 달처럼 관념과 견해의 두터운 덮개에 가려서 흐릿하게 보이게 된다.
이상과 같은 심적 짜 맞추기 과정을 부처님은 ‘빠빤짜[papanca 戱論]’라고 부르시는데 ‘다듬기’, ‘꾸미기’, 또는 ‘개념의 증식’이란 뜻이다. ‘다듬기’는 현상제시의 현장성을 차단하게 된다. 다시 말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오직 ‘거리를 두고서야’ 알 수 있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듬기는 인식을 가리는 데 그치지 않고 주관을 대상에 투사하는 바탕이 된다. 무지로 뒤덮인 미혹된 마음은 자기 자신이 만든 심적 개념구조들을 오히려 그 대상의 것이기라도 한 듯 밖으로 투사하여 내보낸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 인식 대상인 줄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의 가치?계획?행위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 그것이 기실은 원래의 그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조각조각 기워 만든 창작물일 뿐이다. 물론 이 창작품이 전적으로 허상이거나 순전히 환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직접적 경험이 준 것을 기초로 하고 원료로 삼고 있긴 하지만 그와 더불어 다른 그 무엇, 마음이 가공해낸 다른 꾸밈들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공과정을 작동시키는 태엽은 눈에 띄지 않는 숨은 번뇌들이다. 이 번뇌라는 때[垢]는 꾸밈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꾸밈을 밖으로 투사해서는 번뇌가 표면으로 뛰쳐나오는 데 쓸 갈고리로 삼고, 그래서 일단 표면에 나오게 되면 번뇌는 더 심한 왜곡을 일으킨다.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는 일은 지혜의 몫이다. 그런데 지혜가 자기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개념적으로 다듬는 것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에 곧바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올바른 마음챙김이 할 일은 인식의 장(場)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경험을 그 순수한 현장성 그대로 조명의 빛 앞에 가져다 댄다. 그것은 대상이 개념이란 도료로 칠해지고 해석으로 덧칠되기 이전 원래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마음챙김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생각하지 않기, 판단하지 않기, 연상하지 않기, 계획하지 않기, 상상하지 않기, 바라지 않기 등이다. 이 모든, 우리의 ‘행함(doings)’들은 실은 간섭의 갖가지 모습들인 것이며, 마음이 경험을 조작하고 그것의 주도권을 쥐려는 노력인 것이다.
마음챙김은 단지 ‘주시할 뿐임’으로서 이러한 ‘행함’들의 엉킴과 매듭을 풀어 원상으로 되돌려 놓는다. 주시 이외의 다른 일은 일절 하지 않고, 다만 경험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것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이렇게 지켜보는 데에는 집착할 여지도, 사물에다 욕구라는 안장을 얹고 싶은 충동도 자리 잡을 수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적나라한 현장성 그대로의 경험을 주의 깊게, 정확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계속 지켜봄이 있을 뿐이다.
마음챙김은 마음을 어떤 대상에 굳건히 자리잡게 해준다. 마음챙김이 마음의 닻을 현재에 단단히 내리게 해주기 때문에 잘 챙겨진 마음은 기억?후회?두려움?희망 등에 떠밀려 과거나 미래로 표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챙김이 되어있지 않은 마음은 조롱박에 비유되고 마음챙김이 확립된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60) 연못에 조롱박을 놓으면 물위에서 이리저리 떠다닌다. 그러나 돌은 그렇지 않다. 바로 물속으로 잠겨 바닥에 가라앉는다. 이처럼 마음챙김이 강력할 때에는 마음은 떠돌면서 표면만 스치지 않고 대상과 같이 머물고 그 특성들을 깊이 꿰뚫어본다.
마음챙김은 고요함과 통찰력 둘 다 용이하게 얻도록 해준다. 마음챙김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에 따라 깊은 집중으로 이끌거나 또는 지혜로 이끌거나 할 수 있다. 내면적 고요함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선(禪)이라는 몰입의 제 단계에까지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대신에 미망을 걷어내어 예민한 통찰지에 이를 것인가, 이 두 갈래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마음챙김을 적용하는 방식의 근소한 변이에 따라 좌우된다. 고요함 쪽으로 나아가려면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어떤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이 마음챙김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이 경우 마음챙김은, 마음이 대상을 벗어나서 지향없이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들 속에 빠져서 길을 잃어버리고 있지나 않은지 확인하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챙김은 마음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요소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위장하고 숨어드는 장애들[五蓋]이 있으면 이들이 해를 끼치기 전에 붙잡아내어 축출하기도 한다.
한편, 통찰지라든가 그 밖의 여러 가지 지혜의 완성에 이르려면 좀 더 특수한 방식으로 마음챙김을 수행해야 한다. 이 단계의 수행에 있어서 마음챙김이 해야 할 일은 법의 근본적 특성이 드러날 때까지 철저히 정밀하게 그 법을 관찰하고 유념하고 판별하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은 ‘마음챙김의 네 가지 토대(catt?ro satipa??h?n?)’, 즉 몸[身], 느낌[受], 마음[心], 현상[法]의 네 가지 대상 영역에 대한 주의 깊은 수관(隨觀)이라 불리는 수행을 통해 계발된다.61) 부처님은 이렇게 설하신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이 문에서 제자는 몸에서 몸을 열심히, 분명히 알고, 마음챙겨 수관하면서 지낸다. 그런 가운데 세상과 관련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 채 머문다.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 마음에서 마음을 (…), 법에서 법을 열심히, 분명히 알고, 마음챙겨 수관하면서, 세상과 관련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 채 머문다.62)
부처님은 마음챙김의 네 토대는, “청정을 이루도록,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도록, 고통과 근심을 끝내도록, 바른 길(팔정도)로 들어서도록, 그래서 열반을 실현시키도록 이끄는 유일한 길”63)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네 토대를 ‘유일한 길(ek?yano maggo)’이라고 부르는 것은 편협한 독단주의적 주장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해탈은 바른 마음챙김을 수행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경험의 장(場)에 대한 통찰적 수관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마음챙김의 네 가지 적용 중에서 몸에 대한 관은 존재의 물질적 측면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세 가지는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주로 마음의 측면과 관련된 것이다. 수행을 완성하려면 이 네 가지 수행 모두를 필요로 한다. 수행해 나아가는 데 꼭 정해진 순서는 없지만, 대체로 몸을 수관의 기본 영역으로 먼저 다루게 되며, 다른 것들은 마음챙김이 힘과 명료함을 얻은 연후에야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이 네 가지 토대에 관해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각각을 간략하게만 살펴보기로 한다.
(1) 몸을 관하기(K?y?nupassan?)
부처님이 몸에 대해 설하실 때에는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n?p?nasati)’이라는 관법의 설명에서부터 시작하신다. 명상의 시작점이 반드시 이것이어야만 된다는 법은 없지만 실제수행에 있어서는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이 일반적으로 ‘근본 명상주제(m?lakamma??h?na),’ 다시 말해 전체 수관과정의 토대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제를 오직 초심자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은 그것만으로도 수행 길의 모든 단계에 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최고의 깨달음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 실제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날 밤에 택하신 것도 바로 이 명상주제였다. 부처님은 그 후로도 계속 홀로 머무시는 동안에는 이 명상주제로 되돌아오셨고, 비구들에게도 항상 이것을 “불선하고 불건전한 생각들이 일어나는 즉시 추방해 버리는, 평화롭고 고귀하며 순수 지복의 주처(住處)(『상응부』5권 321쪽)”라고 높이 평가하시면서 이를 권장하여 마지 않으셨던 것이다.
호흡챙김은 명상주제로서 매우 효율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호흡과정은 우리가 언제든지 이용 가능한 생체 리듬이기 때문이다. 이 호흡과정을 명상의 기반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호흡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호흡과정을 알아차림의 영역 안에 가져다 놓는 일이다. 명상은 특별히 정교한 지적(知的) 작업을 요하지 않으며 단지 호흡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공기가 들어오고 나갈 때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콧구멍이나 윗입술의 접촉지점에서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저 자연스럽게 콧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으면 된다. 이때 호흡을 통제하거나 자기가 예정해 놓은 리듬 속으로 끌어들이려 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게 들이쉬고 내쉬고 있는 과정을 그저 주의해서 관(觀)하기만 해야 한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는 산만한 생각의 타래를 잘라내고, 헛된 상상의 미궁 속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현시점에 확고하게 서게 된다. 왜냐하면 호흡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그것을 진실로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과거나 미래에서가 아니라 현시점에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호흡에 관한 마음챙김을 네 가지 기본 단계로 설하신다. 처음 두 단계는 길게 들이쉬는 숨이나 길게 내쉬는 숨을 일어나는 그대로 주의해서 바라보고, 짧게 들이쉬는 숨이나 짧게 내쉬는 숨을 일어나는 그대로 주의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들숨과 날숨 중 어느 쪽을 먼저 해도 상관없다. 호흡이 들고나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되 가능한 한 면밀히 관찰하여 지금의 이 호흡이 긴지 짧은지를 주목하고 있도록 한다. 마음챙김이 점점 더 예민해지면 들숨의 시작에서부터 중간과정을 거쳐 끝날 때까지, 그리고 바로 이어서 날숨의 시작에서부터 중간과정을 거쳐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호흡운동의 온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이 세 번째 단계를 ‘호흡의 온몸[全(呼吸)身]을 분명히 느껴 알기’라고 부른다.
네 번째 단계인 ‘몸의 기능[身行]을 가라앉히기’는 호흡과 이에 관련된 신체 기능들을 극도로 가늘고 섬세해질 때까지 점차로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기본적 단계 너머에는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을 깊은 집중과 통찰로 이끄는 좀 더 높은 수준의 수행들이 있다.64)
몸을 관하는 공부 중 또 다른 수련방법은 자세에 관한 마음챙김이다. 이는 앉아서 하는 한 가지 고정된 자세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명상을 밖으로 확장하는 수행법이다. 몸은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 기본자세와, 어떤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로 변화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다양한 다른 몸가짐들을 취하게 된다. 자세에 대한 마음챙김은 몸이 어떤 몸가짐을 취하고 있든 그 몸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걸을 때는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세를 바꿀 때에는 자세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몸가짐에 대한 이와 같은 수관 공부는 몸의 무아(無我)성을 분명히 밝혀준다. 즉 몸이 자아가 아니며 자아에 속한 것도 아니며, 단지 의욕이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는, 살아있는 물질의 배열상(配列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다음 수련은 마음챙김의 외연(外延)을 한 걸음 더 확장시키는 것이다. ‘마음챙김과 분명한 파지(把知) [satisampajanna, 正念正知]’라 부르는 이 수련은 ‘맨 알아차림’에 이해라는 요소를 더하는 수련이다. 무슨 행위를 하든 그 행위를 철저히 알아차리거나 분명히 파악하면서 그 행위를 하는 것이다. 갈 때, 올 때, 앞을 볼 때, 옆을 볼 때, 몸을 굽힐 때, 펼 때, 옷을 입을 때, 먹을 때, 마실 때, 소변 볼 때, 대변 볼 때, 잠들 때, 잠 깰 때, 말할 때, 침묵할 때, 그 모두가 분명한 파지 속에서 수행의 발전을 위한 계기가 된다.
주석서에서 ‘분명한 파지[正知]’를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행위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s?tthasampajanna), 즉 행위의 목적을 알고 그것이 법에 부합되는지를 판단하는 것, (2) 적합성을 이해하는 것(sapp?yosampajanna), 즉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아는 것, (3) 자신의 명상의 범위를 이해하는 것(gocarasampajanna), 즉 행위를 하고 있을 때도 마음을 항상 명상의 틀 속에 유지시키는 것, (4) 미혹됨이 없이 이해하는 것(asammoha-
sampajanna), 즉 행위를 보기를, 통어하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는 무주적(無主的) 운동과정으로 보는 것.65) 이 네 번째 설명은 지혜의 계발을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 더 자세히 검토하게 될 것이다.
몸에 관한 마음챙김에 대하여 다음 두 항은 몸의 진정한 성질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분석적인 관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른 노력[正精進]을 논할 때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몸의 비매력적인 성질에 대한 명상[不淨觀]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네 가지 기본 요소[四大]로 분석하는 것이다.
먼저 매력적이지 못함에 대한 명상66)은 몸에 홀려 있는 상태, 특히 성적 욕구의 형태로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적 충동이 갈애의 한 표현이며, 따라서 고를 종식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반드시 약화시키고 근절시켜야만 하는 고의 원인이라고 가르치신다. 이 명상은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인식적 토대, 즉 몸을 관능적 유혹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자체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성적 욕구를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관능적 욕구는 이 인식과 더불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한다. 우리가 몸을 매력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관능적 욕구가 생겨난다. 아름답다는 것에 대한 이런 인식이 사라지면 관능적 욕구도 시든다. 마음에 드는 인상만 골라잡는 식으로 파악하여 몸을 피상적으로 보는 한, 신체적 매력에 대한 인식은 계속 지탱된다. 그러한 인식을 저지하려면 우리는 마음에 드는 인상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냉철한 탐구적 자세를 가지고 몸을 더 깊은 차원에서 점검해 나가야 한다.
바로 그러한 목적을 수행해 내는 것이 부정관으로, 이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육욕을 물리치는 한 방법으로서 인식의 차원에서 그것의 버팀목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초심자들의 경우, 다른 사람의 몸, 특히 이성의 몸을 수행주제로 삼게 되면,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관 수행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삼는다. 생각으로 몸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방법을 보조수단으로 써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몸을 구성 요소별로 해부한 후, 그 하나하나를 검사하여 그것들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밝혀 나가는 것이다. 경전은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횡격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내용물?똥?뇌?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피부의)기름기?콧물?침?관절 활액?오줌의 서른두 가지67)부분을 열거하고 있다. 그 부분들이 혐오스러우면, 전체인 몸도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세히 살펴 본 몸은 정말 비매력적이며,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신기루 같은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 명상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그 목적은 혐오감이나 역겨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애착을 끊는 것, 육욕의 불을 끄기 위해서 그 연료를 제거하자는 것일 뿐이다.68)
그 다음의 분석적 관법 수행은 몸을 또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요소별 분석(dh?tuvavatth?na)’이라 부르는 이 수행은, 몸이 본질적으로 무주(無主)적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이 몸뚱이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내재적 성향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수행이 택하는 방법은, 그 이름이 나타내는 대로, 마음속으로 몸을 네 가지 요소[四大]로 분해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요소란 옛날 용어로는 지?수?화?풍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견고성, 유동성, 열기, 운동성 등 물질의 네 가지 주요 행태(行態)적 양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견고성은 몸의 장기?근육?뼈 등에서처럼 몸의 견고한 부분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고, 유동성은 몸속의 액체에서, 열기는 체온에서, 운동성은 호흡과정에서 볼 수 있다. 몸을 이렇게 그 구성요소별로 분석하고 나면 몸을 이루는 이 네 가지 기본 요소가, 우리 몸과 끊임없이 주고받기를 계속하고 있는 몸 밖의 다른 물체의 기본적 구성 요소와 근원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폭이 넓어진 시야로 우리 몸을 보게 되면 이 몸을 두고 ‘나’나 ‘나의 자아’로 동일시하던 관성을 멈추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이렇게 명상하기를 계속 밀고 나가면 마침내 제법무아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되면서 몸을 자아와 동일하다고 여기기를 그치게 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도 그치게 된다. 우리는 이 몸이 변화무쌍한 심리적 전개의 흐름을 지탱해주고 있는, 그 역시 변화무쌍한 물질적 전개과정 중에 어떤 특수한 배열형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게 된다. 여기에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몸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인식을 받쳐줄 실질적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도 없다.69)
몸에 관한 마음챙김의 마지막 수련방법은 죽은 후 몸이 해체되는 것을 관하는, 일련의 ‘묘지 명상법’이다. 이 명상은 상상으로 하거나 실제로 시체를 마주해서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며, 전자의 경우 그림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중 어느 쪽을 택하든 썩고 분해되어 가는 몸의 형상을 마음속에 선명히 떠올린 후, 그러한 과정을 자신의 몸에 적용시키면서 생각한다. “이 몸도 지금은 생명력으로 차 있지만 저와 같은 성질을 가졌고 저와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붕괴를 막을 수도 없으며 결국은 죽어서 썩고 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이 명상의 목적 또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명상의 목적은 죽음이나 시체에 대해 병적 환상에 빠져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우리의 자아론적 집착을 부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관법수행을 통해 그 집착을 분리하고 절단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우리의 존재가 영속되거나 영원하다는 따위의 억설, 즉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맹목적으로 견지하는 한, 존재에 대한 집착 역시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체를 관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도 모호한 구석이 없이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諸行無常]’고 단언하시는 스승의 가르침을 생생히 떠올리게 된다.
(2) 느낌을 관하기(Vedan?nupassan?)
다음 염처는 느낌(vedan?)이다. 여기서 ‘느낌’이란 단어는 마음챙김의 세 번째 토대인 ‘마음’이나 네 번째 토대인 ‘법’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한 복합적 현상으로서의 ‘감성’과는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여기서 ‘느낌’은 보다 좁은 의미에서 경험의 정서적 색깔, 또는 ‘쾌락적 측면’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 주요한 형태가 있다. 모든 앎의 작용에는 어느 정도의 정서적 색깔이 배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느낌을 의식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라고 가르치셨다. 따라서 느낌은 경험의 어떤 순간에나 존재한다. 강할 수도, 약할 수도, 또 분명할 수도, 불분명할 수도 있지만, 느낌은 어떤 지각에든 반드시 함께 하기 마련이다.
느낌은 촉(觸, phassa)이라 부르는 심적 사건을 의지해서 일어난다. 의식이 감각기능을 통해 대상과 어울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촉인 셈이다. 바로 이 촉이라는 요소로 인해서 의식이 감각기관을 통해 마음에 스스로를 드러내며 대상을 ‘접촉’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섯 가지 감각기능에 상응해서 촉도 안촉, 이촉, 비촉, 설촉, 신촉, 의촉의 여섯 종류가 있게 되며, 다시 느낌도 어느 촉에서 비롯되는 것이냐에 따라 여섯 가지로 나뉜다.
느낌은 흔히 잠재상태의 번뇌를 활동상태로 유발시키기 때문에 관 수행의 대상으로서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느낌들은 의식에 분명하게 등재되지 않더라도 미묘한 방식으로 심적 경향을 불선한 상태 쪽으로 부추기고 북돋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우리는 탐욕이라는 번뇌의 영향을 받게 되어 집착한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에는 불쾌, 미움, 두려움 등으로 반응하는데 이들은 모두 혐오가 표출된 것들이다. 그리고 모호한 느낌이 일어날 때에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주목하지 않거나 아니면 이런 느낌이 우리를 속여서 거짓된 안정감에 빠뜨리도록 방치한다. 이것이 바로 치암(癡暗)에 지배당한 마음상태이다. 이와 같이 근본 번뇌들이 각각 특수한 종류의 느낌, 즉 탐욕은 즐거운 느낌, 진심은 괴로운 느낌, 치암은 모호한 느낌 등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느낌이 번뇌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느낌이 예외 없이 탐욕으로, 괴로운 느낌이 혐오감으로, 모호한 느낌이 치암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끊어질 수도 있는데 그것들이 끊어지려면 마음챙김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느낌은, 주시하지 않고 있을 때에만, 즉 관찰의 대상이 아닌 탐닉의 대상이 되고 있을 때에만 번뇌를 자극해서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느낌을 관찰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마음챙김은 그 느낌에서 신관(信管)을 뽑아버릴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느낌은 불선한 반응을 자극·촉발시킬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애착·혐오·무관심 등을 통해 습관적으로 느낌과 관련을 맺는 대신, 수관을 통해 관련을 맺음으로써 그 느낌을 오히려 경험의 성질을 이해하는 도약대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초기 단계의 느낌에 대한 관법공부에는 이미 일어난 느낌을 두고 그것이 즐거운 성질의 것인지 괴로운 성질의 것인지, 모호한 성질의 것인지 그 특성을 주시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 느낌을 자기와 동일화하지 않고, 즉 ‘나’ 또는 ‘나의’ 또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주시한다. 이때 알아차림은 덧칠됨이 없이 그냥 ‘맨 주의’의 수준을 견지한다. 그는 매번 느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느낌으로, 일체의 주관적 고려나, 모든 자아 지향성을 벗겨낸, 장식되지 않은 한낱 심적 사건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단지 느낌의 질감이랄까 색조랄까, 즉 즐거운 감, 고통스런 감, 또는 모호한 감만 주목할 따름이다.
그러나 정진이 진척되면서, 다시 말해 느낌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놓아주고 그리고 그 다음 번 것을 주시하기를 계속해 나가면 자연히 주시의 초점은 느낌의 성질을 살피는 것에서 느낌 그 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옮겨진다. 그 과정을 잘 살펴보고 있으면 느낌이라는 것이 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남과 사라짐이 서로 승계해 이어져 나가고 있는 하나의 끊임없는 흐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흐름의 내부에는 영속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느낌이라는 것 그 자체가 기껏해야 한낱 사건들의 흐름, 다시 말해 순간순간 생겨났다가는 그 즉시 사라져 버리는 섬광같은 찰나지간의 존재가 실현되는 기회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상에 대한 통찰이 시작되고 그것이 발전되어 나가면서, 탐·진·치라는 세 가지 불선의 뿌리는 파 뒤집혀지기에 이른다. 거기에서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도, 괴로운 느낌에 대한 혐오도, 모호한 느낌에 군림하는 미망도 없다. 일체가 그저 쏜살같이 빨리 지나가는 허망한 사건들, 진정 즐길 것도 관여할 여지도 없는 사건들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3) 마음상태를 관하기(Citt?nupassan?)
이 수념처(受念處) 공부를 해나가노라면 마침내 우리는 느낌이라고 하는 한 특정한 심적 요소로부터 이 요소가 속하고 있는 전반적 마음상태에 대한 공부로 접어들게 된다. 이 단계의 공부가 가져오게 될 결과가 어떤 것이 될지 이해하려면 불교가 마음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보통 우리는 마음을, 연속적으로 경험을 겪어나가면서도 그 자체는 늘 변함없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어떤 지속적 기능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변화를 경험하면서도 변화하는 경험을 겪고 있는 그 마음은 변함없이 존재하는, 어떤 식으로 수정은 될지언정 그 동일성은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변함없이 영속하는 심적 기관이라는 개념은 용납될 수 없다. 마음을 생각, 느낌, 의욕의 지속적 주체로 보지 않고, 각기 별개로 분리된, 순간적 의식이 이어지는 움직임들의 연속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그들 간의 결합관계도 실체들 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연기적 관계성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활동의 연속 중 한 낱개의 식(識)의 활동을 ‘찟따(citta)’라 부르는데, 우리는 이를 ‘마음의 어떤 한 상태’로 번역할 것이다. 개개의 ‘찟따’는 여러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 우두머리가 식 그 자체, 즉 대상에 대한 기본적 경험이다. 이때의 식(識)도 또한 ‘찟따’라 부르는데 이것은 찟따를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주요한 요소인 식을 그 전체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식(識)과 더불어 각각의 찟따는 ‘쩨따시카’라는 정신적 요인들을 한 세트의 부수물로 포함하고 있다. 이 ‘쩨따시카’에는 느낌, 지각, 의욕, 감정 등등, 간단히 말해 대상을 일차적으로 아는 ‘찟따’ 즉 식을 제외한 모든 심적 기능들이 포함된다.70)
식은 본래 대상에 대한 맨 경험일 뿐이므로 그 자체의 성질만으로는 구분될 수 없고 단지 연관되는 요인들 즉 쩨따시카에 의해서만이 그 구분이 가능해진다. ‘쩨따시카’가 ‘찟따’에 색을 입혀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성격을 띠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찟따’를 관 수행의 대상으로 꼭 집어 겨냥하려 할 때에는 ‘쩨따시카’를 지표로 삼는 수밖에 없다. 마음상태를 관하는 수행을 설하시면서, 부처님은 ‘쩨따시카’를 기준으로 열여섯 가지 마음을 주시 대상으로 언급하셨다. 즉 욕망이 수반된 마음과 욕망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싫음이 수반된 마음과 싫음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미혹이 수반된 마음과 미혹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갇힌 마음과 흩어진 마음, 계발된 마음과 계발되지 못한 마음, 능가할 여지가 있는 마음[有上心]과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마음[無上心], 정정을 이룬 마음과 정정에 들지 못한 마음, 해탈한 마음과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 그 열여섯 가지 마음이다.
71) 실천적 목적에서 보면 시작 단계에서는 이들 열여섯 가지 마음 중 탐·진·치가 있거나 없거나 하는 첫 여섯 가지 마음상태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마음이 불선한 뿌리와 관련되어 있는지, 아니면 이로부터 자유로운지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중 어떤 ‘찟따’ 상태가 있을 때 이를 단지 그런 ‘찟따’, 그런 마음상태로만 관한다. 그것을 ‘나’ 또는 ‘내 것’ 하는 식으로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아나 자아에 속한 어떤 것으로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순수한 마음상태이든 때 묻은 상태이든, 고상한 상태이든, 천박한 상태이든 그 때문에 의기양양하거나 의기소침해짐이 없이 단지 그 상태에 대한 분명한 인식만 있어야 한다. 그 상태는 그저 주시되고, 그리고는 바람직하다고 집착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거부함이 없이, 그냥 지나가도록 놔두는 것이다.
관 수행이 깊어지면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은 점점 더 순화된다. 난무하던 생각, 상상, 감정들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챙김은 더 분명해지고, 마음은 그 자체의 변화 추이를 주시하면서 또렷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때때로 이런 변화 과정의 배후에 지속적인 관찰자가 존재하는 양 나타나 보일 수도 있지만, 수행을 계속하면 이 분명해 보이던 관찰자까지도 사라진다. 굳건하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마음 그 자체도 순간순간 명멸하면서, 오는 데도 없고 가는 데도 없는 채 그러면서도 중단 없이 연이어 지속되면서 하염없는 ‘찟따’의 한 흐름으로 녹아든다.
(4) 현상[法]을 관하기(Dhamm?nupassan?)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담마(dhamm?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복수를 쓴다)’라는 말은, 마음챙김의 네 번째 토대로 쓰일 때에는 경전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상호 연결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는 앞서 마음에 대한 관법 공부 때에 보았듯이 마음상태에 색을 입히는 역할과는 완전히 별도로 이제는 그 자체로서 주목해야 할 심적 요소들(‘쩨따시까들’)을 뜻한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부처님의 교법 속에 조직화되어 있듯이 경험을 구성하는 근본적 요소 즉 현존하는 사실로서의 요인들이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담마’를 더 좋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현상들(phenomena)’이라 옮기겠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해서 이를 현상 뒤에 어떤 본체 또는 물자체(物自體 noumenon)가 따로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부처님이 무아를 가르치신 취지는 현존하는 사실계를 구성하는 기본적 성분은, 어떤 본체의 뒷받침 없이 그냥 일어나고 있을 뿐인 맨 현상들(suddha-dhamm?)이라는 것이다.
경에서 현상의 수관에 관한 부분은 다섯 가지 작은 항목으로 나뉘어서 각기 다른 현상들을 다루고 있다. 다섯 가지 장애(이하 오개(五蓋)로 지칭), 오온(五蘊), 각각 여섯 가지의 안팎 감각기반(이하 6내외처(六內外處) 또는 6처로 지칭)과 일곱 가지 깨달음의 인자들(이하 칠각지(七覺支)로 지칭)과 사성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다섯 가지 장애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인자들은 심적 요소를 뜻하는 좁은 의미의 ‘담마’이고, 다른 것들은 사실세계의 구성성분이라는 넓은 의미의 ‘담마’이다. 그러나 세 번째 묶음인 감각 기반에 관한 부분에는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족쇄들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이들도 또한 ‘심적 요소들’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이 장에서는 ‘심적 요소’라는 의미에서의 ‘담마’로 간주될 수 있는 두 묶음, 즉 오개와 칠각지만을 간단히 다루어 보기로 한다. 이 두 묶음 모두 제 5장에서 바른 노력과 관련시켜 이미 언급한 일이 있지만, 여기서는 바른 마음챙김 수행과 관계되는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오온, 육처 등 다른 유형의 ‘담마’들은 마지막 장에서 지혜의 계발과 관련지어 논의하기로 한다.
오개와 칠각지는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왜냐하면 해탈을 이루는 데 있어서 전자는 주된 장애가 되고 후자는 주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구, 악의, 나태와 나른함[昏沈], 들뜸과 불안[掉懷], 의심의 다섯 가지 장애는 일반적으로 공부의 초기단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작할 때의 큰 기대감과 혼란에 가까운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미묘한 잠재성향들이 표면에 떠오를 기회가 열린 직후에 그러하다. 이들 장애 중 어느 하나라도 불쑥 튀어나오면 그 존재를 유의해야 하고 그런 다음 그것이 차차 희미해져 갈 때에는 그것의 사라짐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 이런 장애들을 계속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이해력이라는 한 특질이 필요하다. 즉 이런 장애들이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제거될 수 있고, 또 앞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72)
이런 형태의 관(觀)은 마음챙김[念], 현상의 검토[擇法], 정진력[精進], 희열[喜], 편안함[輕安], 집중[定], 평온[捨]의 깨달음의 일곱 요소들[七覺支]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인자들 중 어느 것이든 일어나면 그것의 존재를 주시해야 한다. 그것의 존재를 주시한 후에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하면 충분히 발달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탐구해야 한다.73) 이들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힘이 약하지만, 지속적으로 계발해나가면 그들은 점점 힘을 쌓게 된다.
마음챙김은 관(觀)의 과정이 시작되도록 한다. 관의 과정이 제대로 잘 정착되면 그것은 다시 지적 능력이 지니는 검토 기능인 조사[擇法]를 일으킨다. 조사는 다시 정진력을 끌어내고 정진력은 희열을 낳고, 희열은 편안함에 이르게 하고, 편안함은 한 점에 모아진 집중에, 다시 집중은 평온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전체 진전과정은 마음챙김과 더불어 시작되고, 마음챙김은 마음이 맑고 깨어있고 균형 잡혀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통제력으로서 시종일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