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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바른 집중[正定 samm? sam?dhi]
팔정도의 여덟 번째 요소[支]는 ‘바른 집중’으로 빠알리어로는 ‘삼마 사마디(samm? sam?dhi)’이다. 여기서 집중이란 어떤 의식 상태에서도 빠짐없이 두루 존재하는 한 가지 특정 심적 요소를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요소란 ‘마음이 한 점을 겨냥하고 있음[one- pointedness of mind 心一境性 citt'ekaggat?]’이다. 이 요소는 다른 심적 요소들을 인식 작업에 통합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심일경성은 의식이 대상세계를 개별화시키는 역할을 책임지고 잘 수행해 내기 때문에 모든 찟따 또는 마음 활동으로 하여금 대상에 집중된 채 머물러 있도록 확실히 보장해 준다. 매 순간 마음은 무언가를, 그것이 보이는 것이든, 들리는 것이든, 냄새든, 맛이든, 촉감이든, 정신적 대상이든 간에 인식하고 있도록 되어 있다. ‘한 점에 모아짐’이라는 요소는 마음과 여타의 부수 요소들을 대상 인식작업에 동참시킨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인식행위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대상에다 집결시키는 기능도 수행한다. 마음이 한 점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준다. 즉 어떤 의식 활동에도 거기에는 집중되는 중심 초점이 있다는 점, 그리고 전(全) 객관적 사실이 그 중심점을, 그것의 외부 둘레로부터 내면의 핵에 이르기까지 겨냥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 점에 모아지고 있다 해서 모두 ‘사마디’일 수는 없다. ‘사마디’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종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앞에 둔 식도락가, 누군가를 죽이려 하고 있는 암살자, 전장에 임한 병사 등등, 모두가 집중된 마음으로 행동을 하지만, 이들의 정신집중을 ‘사마디’라 할 수는 없다. ‘사마디’는 오로지 선한 면에서의 한 점에 모음, 선한 마음상태에서의 집중이다. 그런 경우에도 그 폭은 더욱 좁아진다. 선한 집중이라 해서 어떤 형태이든 다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을 더 높은, 보다 더 순수한 알아차림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적인 시도의 결과로 생겨난 강화된 집중만을 의미한다.
주석서들은 ‘사마디’를, 마음과 심적 요소들이 한 대상에 똑바로, 그리고 고르게 집중된 것이라 규정한다. 선한 집중으로서의 ‘사마디’는 보통 때 같으면 흩어져 분산되어 흐르고 있게 마련인 마음상태를 내적 통일을 이루어내게끔 한 데 모은다. 집중된 마음의 두 가지 두드러진 특성은 대상을 향해 부단히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과 그 결과 정신적 기능들[諸根]이 편안[輕安]해진다는 점인데 이 두 특성은 집중된 마음과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집중 훈련이 되지 않은 마음은 분산된 채 요동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물에서 건져 올려 마른땅에 던져진 물고기가 이리 저리 팔딱거리는 것에 비유하셨다. 그런 마음은 한 곳에 붙박여 있지 못하고 이 관념에서 저 관념으로,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가눌 길 없이 내닫는다. 그처럼 흐트러진 마음은 또한 미혹된 마음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걱정과 관심에 휩싸여 항상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이런 마음은 사물을 제대로 온전한 상태로 보지 못하고 두서없는 생각의 잔물결에 일그러진 조각 상태로만 본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훈련이 된 마음은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흐트러짐 없이 머물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단 마음의 흐트러짐이 없어지고 더 나아가 유연함과 고요함이 생기게 되고 이로써 마음은 매우 효과적인 통찰 도구가 된다. 집중된 마음이야말로 미풍조차 없는 잔잔한 호수처럼 눈앞의 사물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신뢰할 수 있는 반사경이다.
집중의 계발
집중은 다음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에 의해 계발될 수 있다. 하나는 선(禪)의 경지에 해당하는 깊은 몰입 집중을 목표로 한 수행체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찰력을 일으킬 의도로 팔정도를 닦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앞의 방법은 적정의 계발(samatha-bh?van?), 뒤의 것은 통찰력의 계발(vipassan?-bh?van?)이라 한다.
하지만 이들 두 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예비적 필요조건을 공유하고 있다. 즉 계행(戒行)이 청정할 것, 각종 장애 요인들을 제거할 것, 명상수행에 임함에 있어 자신에 알맞은 가르침(가급적이면 스승으로부터 직접 받는 가르침)을 반드시 찾아낼 것, 그리고 수행에 도움이 되는 처소에 머물 것 등이다. 이런 예비조건들이 일단 갖추어지면, 적정을 닦는 명상자는 집중을 익히기 위해서 쓸 어떤 집중점, 다시 말해 명상대상을 결정해야 한다.74)
만약 명상자에게 자격 있는 스승이 있을 경우에는 그 스승이 그의 근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명상대상을 정해 줄 것이다. 스승이 없는 경우에는 스스로 대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몇 가지 실험을 통해 찾을 수도 있다. 명상 안내서들은 적정(寂靜)의 명상을 위한 주제를, 명상자가 명상작업을 하는 곳이라 하여 ‘업처(業處 kamma??h?na)’라 불리는 것 마흔 가지를 한 벌로 모으고 있다. 그 마흔 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열 가지 ‘까시나(dasa kasi??)’[十遍處]
열 가지 부정한 대상(dasa asubh?)[十不淨]
열 가지 상기(dasa anussatiyo)[十隨念]
네 가지 숭고한 상태(catt?ro brahmavih?r?)[四梵住處]
네 가지 비물질적 상태(catt?ro ?rupp?)[四無色界]
한 가지의 인식(ek? sann?)[一想]
한 가지의 분석(ek? vava??h?na)[一析].
‘까시나’는 본원적 성질이랄 수 있는 것들을 상징하는 고안물들이다. 그 중 네 가지는 지?수?화?풍 ‘까시나’로 사대(四大)를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네 가지는 청?황?적?백 ‘까시나’로 색깔을, 그리고 다른 두 가지는 빛과 공간을 나타내는 까시나이다. 각 ‘까시나’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어떤 보편적 성질을 대표하는 구체적 대상이다. 그래서 진흙을 다져 만든 둥근 판을 지(地) ‘까시나’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지 ‘까시나’로 집중을 계발하려는 명상자는 그 판을 앞에다 놓고 거기에다 시선을 고정하고 “지, 지…” 하면서 관한다. 다른 ‘까시나’의 경우에도 그에 맞도록 적절하게 조정해서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된다.
열 가지 ‘부정한 대상’은 부패 단계별로 본 시체들이다.75) 이 주제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에서 몸의 부패에 대해 관하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옛날에는 화장터가 이 두 가지 수련을 위해서 가장 적합한 장소로 권장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그 강조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 마음챙김의 경우에는 성찰적 생각의 적용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부패해 가는 시체의 광경이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닥치고 말 죽음과 붕괴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까시나’의 경우, 그와 같은 성찰적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한다. 대신 한 점에 모아진 마음이 대상에 고정될 것을 강조하며, 생각은 적을수록 더 좋다.
열 가지 상기(想起)는 여러 가지로 구성된 혼성체다. 처음 세 가지는 불?법?승 삼보의 성질에 관한 경건한 명상으로, 경전에 나오는 정형구가 그 기초가 된다. 그 다음 세 가지 상기도 역시 옛날의 문구에 의존하는 것인데, 지계, 보시,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천신과 같은 자질에 대한 명상이다. 그 다음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몸의 부정함을 관하는 일[不淨觀], 호흡에 관한 마음챙김이고, 끝으로 평화의 상기는 열반에 대한 추리적 명상이다.
네 가지 숭고한 상태 또는 ‘거룩한 거처’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말하는데, 이들은 밖을 향한 사회적 태도로서 점차 범위를 확장시켜 나가 마침내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生有]을 다 포용하는 보편적 방사로 발전된다.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의 네 가지 비물질적 상태는 특정한 심층 몰입을 위한 객관적 기초이다. 이들은 이미 정신집중에 숙달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다. ‘한 가지 인식’은 음식의 역겨움에 대한 인식으로, 미각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줄이기 위한 추리적 주제다. ‘한 가지 분석’은 몸을, 이미 바른 마음챙김에서 논의한 대로, 네 가지 기본 요소[四大]의 견지에서 관하는 것이다.
이처럼 명상주제가 다양하게 제시될 경우, 향상심은 강하지만 의지할 스승이 없는 경우에는 이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여러 지침서들은 이 마흔 가지 주제를 인격 유형에 따라 적합하게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몸속에 있는 혐오스러운 대상과 몸의 각 부분에 관한 명상은 관능적 유형에게, 자비관은 남을 잘 미워하는 유형에게, 삼보의 특성에 관한 명상은 헌신적 유형의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수행을 할 때 초심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추론적 사유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단순한 주제로부터 시작하도록 권하고 있다. 들뜨고 생각이 산만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성격 유형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직면하는 공통된 문제이다. 따라서 사유과정을 늦추고 조용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명상주제가 기질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수행자에게 이롭다 할 수 있다.
방황하는 생각들을 마음에서 쓸어내는 데 효과가 있다고 일반적으로 추천하는 것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초심자에게는 물론, 깊은 명상에 들고자 하는 고참에게도 가장 적합한 주제로 제시되고 있다. 일단 마음이 가라앉아 자신의 사고성향을 관찰하기가 쉬워지면 그 때에는 어떤 특별한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다른 주제들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성냄과 악의를 꺾기 위해서는 자비관을, 관능적 욕망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신체의 각 부분에 대한 마음챙김을, 신심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부처님 상기하기를, 긴박감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을 택할 수 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알맞은 명상주제를 택하는 데에는 숙련이 필요하지만 이런 숙련 역시 실제 수행을 통해, 때로는 간단한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될 수 있다.
집중의 단계들
집중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발전한다. 집중의 모든 단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적정 명상의 모든 과정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밟고 있는 수행자의 경우와, 이런 보통 수행자들보다 훨씬 더 빠른 진전을 보이게 될 사람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스승으로부터 명상 주제를 받거나, 아니면 자기 스스로 주제를 택한 후, 수행자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난다. 거기서 그는 올바른 명상 자세를 취한다. 다리는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고, 상체는 똑바로 꼿꼿이 세우고, 양손은 포개어 배꼽 아래에 놓고, 머리는 바로 세우고, 입은 다물고 눈은 감고(까시나나 다른 시각대상을 사용할 경우를 제외하고), 호흡은 콧구멍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규칙적으로 한다.
그 다음 그는 마음을 대상에 집중한 후 거기에 계속 고정시킨 채 깨어있도록 노력한다. 마음이 빗나가면 이내 알아차리고 그것을 붙들어서 부드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대상으로 되돌려 놓기를 거듭거듭 한다. 이 초기 단계를 ‘예비적 집중(parikkammasam?dhi)’이라 하고 그 대상을 ‘예비적 표상(parikkammanimitta)’이라 한다.
초기의 흥분 상태가 가라앉고 마음이 정진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다섯 가지 장애가 깊은 곳에 숨었다가 부글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욕구, 분노, 후회, 혼침, 들뜸, 의심들이 때로는 생각으로, 때로는 심상(心像)으로, 때로는 강박감정으로 나타난다. 이 장애들은 무서운 장벽처럼 나타나지만, 인내심과 지속적인 노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해낼 수 있다. 그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기민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특정 장애가 강력해지면, 주된 명상 주제를 제쳐 두고 그 장애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다른 주제를 들어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계속 장애에 부딪치면서도 원래의 주제를 견지하여 마음을 그 주제로 되돌려 놓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집중이라는 외길을 따라 계속 분투 계발해 나가노라면 마침내 이러한 노력이 ‘다섯 가지 심적 요소들[五禪支]’을 활성화시켜 우군이 되게끔 만든다. 이 요소들은 평상시의 이렇다 할 목적이 없는 의식에서도 간헐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때는 이 요소들이 결속력이 없기 때문에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명상 공부에 의해 활성화되면 이 다섯 요소들은 조금씩 조금씩 힘이 오르면서 서로가 연동되기 시작하여 마음을 ‘사마디’쪽으로 이끌어 드디어는 자기들이 선지(禪支 jh?na?ga)가 되어 그 사마디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보통 언급되는 순서대로 들자면 이 다섯은 ‘시초의 마음 기울임[尋 vitakka]’, ‘지속적 마음 기울임[伺 vic?ra]’, 희열[喜 p?ti], 즐거움[樂 sukha], 그리고 ‘한 점을 겨냥하고 있음[一境性 ekaggat?]’이다.
‘최초의 마음 기울임’은 마음을 대상으로 돌리는 일을 한다. 이것은 마음을 붙잡고, 이를 들어올리고, 그리고 나무토막에 못을 박듯이 마음을 대상에 박는다. 이것이 되면 ‘계속 마음 기울임’이 특유의 검토 기능을 통해 마음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함으로써 마음을 대상에 붙들어둔다. 이 두 가지 요소 간의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최초의 마음 기울임’은 종을 치는 것에 비유하고 ‘계속 마음 기울임’은 종의 반향음에 비유한다. 세 번째 요소인 ‘희열’은 대상에 대한 호의적 관심과 함께 나타나는 기쁨과 반가움인데 반해 네 번째 요소인 ‘즐거움’은 성공적인 집중과 함께 나타나는 유쾌한 느낌이다. 희열과 즐거움은 유사한 성질을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 혼동이 되기 쉽지만, 이 두 가지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희열’은 사막을 가다 지친 여행자가 멀리 오아시스를 보고 반기는 것에 비유하고, ‘즐거움’은 못에서 물을 마시고 그늘에서 쉬는 만족감에 비유함으로써 그들 간의 차이를 설명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선지인 ‘한 점에 모음’은 대상에 온 마음을 통일시키는 결정적 기능을 한다.76)
집중이 발전되면 이 다섯 요소[禪支]가 생겨나서 다섯 장애들에 대처한다. 각 선지가 특정한 장애 하나씩을 떠맡는 것이다. ‘시초의 마음 기울임’은 마음을 대상 쪽으로 들어 올리는 일을 통해 ‘혼침’을 약화시킨다. ‘지속적 마음 기울임’은 마음을 대상에 정박시킴으로써 ‘의심’을 몰아낸다. ‘희열’은 ‘악의’를 가로막고, ‘즐거움’은 ‘들뜸과 근심’을 배제한다. ‘한 점을 겨냥하고 있음’은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가장 큰 유혹인 ‘감각적 욕구’에 반격을 가한다. 이처럼 선지들이 강화되면 다섯 장애는 힘을 잃고 누그러진다. 그렇지만 장애들이 아직 근절된 것은 아니다. 근절되려면 팔정도의 세 번째 부류인 지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장애들이 숙지근해져서 집중의 전진을 교란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안에서는 선지들이 장애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과 동시에 대상 쪽에서도 역시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집중의 초기 단계 대상인 예비적 표상은 순전히 물리적 대상이다. 까시나의 경우에는 그 대상이 어떤 선택된 요소나 색깔을 나타내는 둥근 판이고, 호흡챙김의 경우에는 숨결의 접촉 감각이다. 그러나 집중이 강화되면 원래의 대상은 ‘습득상[取相 uggaha-nimitta]’이라고 하는 또 다른 대상을 발생시킨다. 까시나의 경우, 대상은 마치 눈으로 원래의 대상을 보는 것처럼 마음속에 분명히 보이는 원반형상의 심적 영상으로 나타날 것이고, 호흡의 경우에는, 콧구멍 근처에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과의 접촉 감각에서 생겨난 반사 영상일 것이다.
습득상이 나타나면, 수행자는 예비표상을 떠나 주의력을 대상에다 고정시킨다. 머지않아 다시 습득상에서 새로운 대상이 나타난다. ‘유사상[似相 pa?ibh?ganimitta]’이라 부르는 이 대상은 습득상보다 몇 배나 더 밝고 분명한 순화된 심적 영상이다. 습득상을 구름에 가린 달에 비유한다면 유사상은 구름에서 벗어난 달에 비유한다. 유사상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다섯 선지들은 다섯 장애를 진압해 버린다. 그리고 ‘근접삼매(upac?ra-sam?dhi)’라는 집중단계에 들어간다. 바로 이 근접 삼매단계에서 마음은 몰입상태에 가까워진다. 이제 마음이 몰입의 ‘이웃(그런대로 up?cara의 의미를 살릴 것 같아서 써보는 것인데))’이 되긴 했지만 마음이 대상에 충분히 몰두하려면 공부가 더 필요하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한 ‘몰입’이라 말할 수가 없다.
수련이 더 진전되면 집중의 요소들이 힘을 얻어, 마음을 몰입[本三昧 appan?-sam?dhi]으로 이끈다. 근접삼매의 경우처럼, 몰입도 유사상을 대상으로 삼는다. 집중의 이 두 단계는 장애의 유무나 대상의 서로 다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양쪽에 공통된다. 이 두 단계의 차이는 선지의 강도에 있다. 근접삼매에서는 선지가 있지만 힘과 견실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단계의 마음은 걸음마를 갓 배운 어린이에 비유된다. 몇 발자국 걷다가는 넘어지고 일어나서 또 몇 걸음 걷다가 넘어진다. 그러나 몰입에 든 마음은 걷고자 하는 어른과 같다.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마음대로 일어나서 앞으로 똑바로 걸어간다.
몰입 상태의 집중은 여덟 가지 수준으로 나누어지며 각 수준은 그 전 수준보다 깊이와 순수성, 미묘성이 더 크다는 특징이 있다. 처음 네 수준은 네 가지 쟈나(jh?na 禪)라 부른다. ‘쟈나’라는 말은 대충 ‘명상 몰입’이라 옮길 수도 있겠지만 딱 맞는 말이 없어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상책이겠다.77) 나머지 네 가지 수준도 한 벌을 이루는데 이를 사무색계(四無色界 ?rupp?)라 한다. 이 여덟 가지는 각기 앞의 것에 통달해야 뒤의 것이 성취되기 때문에 순차로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들이다.
경전에서는 보통 바른 집중을 정의하여 네 가지 선(禪)이라 부른다.78)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럼 비구들이여, 무엇이 바른 집중인가? 이 문에서는 감각적 즐거움에서 멀어지고, 불선한 상태[不善法]에서도 멀어져 비구는 시초의, 그리고 지속되는 마음 기울임을 동반하고, 멀어짐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으로 충만한 초선에 들어서 머문다.
다음에는, 시초의 마음 기울임[尋]과 지속되는 마음 기울임[伺]이 잦아드는 것과 더불어, 내면적 확신과 정신통일을 얻게 되면서 그는 이선에 들어서 머문다. 여기서는 시초의, 그리고 지속되는 마음기울임이 그치고 이번에는 집중에서 생겨난 희열과 행복으로 충만하다.
희열이 식어듦과 더불어 그는 마음챙겨 그리고 분명히 파악하면서, 평온에 머문다. 그는 고귀한 분들이 “평온하고 마음챙긴 그는 행복하게 산다”고 말한 그대로의 더없는 행복을 본인 자신이 몸으로 경험한다. ― 이렇게 그는 삼선에 들어 머문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림과 더불어, 그리고 기쁨과 슬픔이 먼저 사라짐과 더불어 그는 사선에 들어 머문다. 그것은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님[不苦不樂]과 평온에 기인하는 마음챙김의 청정함을 지니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집중이다.79)
선의 이러한 단계는 그 구성 요소에 의해 구별된다. 초선은 원래의 다섯 몰입요소를 한 벌로 해서 이루어진다. 즉 시초의 마음 기울임, 지속되는 마음 기울임, 희열, 행복, 그리고 한 점을 겨냥하고 있음이다. 초선을 성취한 후에는 명상자는 그것에 통달하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 이루어 낸 바에 대해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래서 수행을 계속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한편, 과신한 나머지 그 다음 선을 얻는 데 급급하지 말아야 한다. 선에 정통하려면 명상자는 그 선에 들고 거기에 머물고, 거기서 나오고, 그것을 되돌아보며 점검하기를 아무 문제도 어려움도 없이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거기에 들기를 되풀이하여 선의 기량을 완성시켜야 한다.
초선에 숙달한 다음에 명상자는 자신이 성취한 바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흠에 대해 반성해 보게 된다. 비록 초선이 보통의 감각 의식보다 월등하며 더 평화롭고 행복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은 여전히 감각 의식에 가까운 것이고 장애들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 요소들 중 시초의 마음 기울임[尋]과 지속되는 마음 기울임[伺]의 두 요소는 머지않아 다른 요소들만큼 정제되지 못한, 오히려 조악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명상자는 시초의 마음 기울임과 지속되는 마음 기울임을 넘어서기 위해 집중 수행을 계속한다. 그의 기능들이 숙달될 때 이 두 요소가 잦아들면서 그는 이선에 든다. 이선의 구성요소는 희열, 행복, 그리고 한 점을 겨냥하고 있음, 이 세 가지로 줄어든다. 이선에는 이 세 가지 외에도 수많은 다른 구성요인들이 포함되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확신이다.
이선에서 마음은 더 평안해지고 더 철저히 통일된다. 그러나 숙달되면 이런 선의 상태마저도 조악해 보인다. 마음을 돋우어 흥분으로 기울게 만드는 요소인 희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상자는 이번에는 희열을 극복하겠다는 결의로 수련 과정에 다시 임한다. 희열이 사라지게 되면 삼선에 든다. 여기서는 행복과 한 점을 겨냥하고 있음의 두 몰입 요소만 남는 반면, 몇 가지 다른 보조적 상태들이 대두되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마음챙김과 분명한 파악, 그리고 평온이다. 그러나 아직도 명상자는 이 성취마저도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행복한 느낌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는 중립적 느낌에 비해 조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삼선의 고귀한 행복마저도 넘어서기 위해 힘쓰게 된다. 이에 성공하면 그는 사선에 들게 되는데 사선은 한 점을 겨냥하고 있음과 중립적인 느낌의 두 요소로 규정되고, 고도의 평온에 기인하는 특별히 청정한 마음챙김을 지니고 있는 선이다.
이 네 가지 선 너머에는 네 가지의 비물질적 상태[四無色界]가 있는데 이 몰입의 경지에서는 마음이, 네 가지 선에서는 아직도 가끔씩 나타나곤 하는 시각화된 영상들에 대한 미세한 지각마저도 초월하게 된다. 이 비물질적 상태들은 선(禪)처럼 심적 요소들을 순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순화시킴으로써, 비교적 조악한 대상을 더 미세한 대상으로 대치함으로써 얻어진다. 이 네 가지 성취는 각기의 대상에 따라 공무변처(空無邊處 ?k?s?nanc?yatana), 식무변처(識無邊處 vinn??anc?yatana), 무소유처(無所有處 ?kincann?yatana),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nn?-n?sann?yatana)로 이름이 붙여진다. 이 상태들은 너무나 미묘하고 아득해서 말로 분명히 설명할 길이 없는 수준의 집중 상태들이다. 그 넷 중 마지막 것은 정신 집중의 정점으로서 의식이 다다를 수 있는 통일 상태 중에 절대, 극한의 경지다. 그러나 이들 적정명상의 길을 따라 이르는 몰입들이 한껏 고양된 것이긴 하지만 아직도 통찰의 지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해탈에 이르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못하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집중들은 마음을 단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으로서 다른 대상들을 얼마나 배제해 내느냐 여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그러한 성질의 집중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알아차림의 범위를 제한하는 데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집중이 또 있다. 이것을 찰나 집중(kha?ika-sam?dhi)이라 한다. 찰나 집중을 계발하기 위해서 명상자는 다양한 현상을 그의 관심영역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그는 몸과 마음이 변하고 있는 상태에다 단순히 마음챙김을 향하게 하여 거기서 나타나는 현상은 그것이 무엇이 되든 가리지 않고 주시한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지각의 영역 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대해 일체 집착함이 없이 알아차리기만을 견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시하기를 계속해 나가노라면 집중력은 순간순간 강화되고 마침내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사건의 흐름을 탄 채로 한 점에 모아진 경지에 들 수 있게 된다. 대상이 아무리 변화해도 정신통일은 굳건히 유지되어 조만간에 근접삼매에서와 같은 정도로 장애를 누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처럼 융통성 있는 유동적 집중은 통찰의 길을 따라 사념처를 수행함으로써 발전된다. 이 집중이 충분히 강력해지면 드디어 지혜가 생기는 도의 마지막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Ⅷ. 지혜의 계발
바른 집중이 성스러운 팔정도의 요소들 중에서 마지막 위치를 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른 집중 그 자체가 도의 최종적 절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定)을 성취했다는 것은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되었으며, 마음에 따라붙는 여러 부수적인 현상들[心所]을 통일시키고, 행복해지고 평온해지며, 힘차게 될 전망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고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데에, 가장 높은 완성에 도달하는 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고를 종식시키기에 이르려면 팔정도가 발견의 도구로 변해야 할 필요가, 다시 말해 사물의 궁극적 진실을 밝혀내는 통찰력을 낳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여덟 요소 모두가 협동적으로 기여해야 하며 그러려면 정견과 정사의 두 요소가 새로운 차원에서 재가동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태까지는 이 첫머리의 두 요소가 예비적 기능만 수행한 셈이다. 이제 그들을 다시 취하여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여태까지는 현상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는 데서 그쳤던 정견이 현상의 참 성질을 곧바로 꿰뚫어보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 정사(正思)는 번뇌를 놓되, 깊은 이해에서 우러난 진정한 놓음이 되어야 한다.
지혜의 계발로 돌아가기 전에, 왜 집중만으로는 구경해탈을 성취하는데 충분하지 못한지 그 이유를 검토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집중이 해탈을 가져오기에 족하지 못한 이유는 집중이 번뇌를 건드리면서도 그 근본 기층(基層)을 허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번뇌가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치신다. 잠재적 성향의 단계, 명시(明示) 단계, 도를 넘어서는 범함의 단계 셋이다. 가장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잠재적 성향(anusaya)’의 수준으로서 여기서는 번뇌가 아무런 활동상도 보이지 않고 다만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수준인 ‘명시(pariyu??h?na)’ 단계에서는 번뇌가 여러 자극의 영향을 받아서 갑자기 강해져서 생각, 감정, 의욕 등의 형태로 떠오른다. 그리고 세 번째 수준인 ‘범함(v?tikkama)’의 단계에서는 번뇌가 심적 명시에만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불선한 몸의 업이나 말의 업을 유발하기에 이른다.
번뇌의 이와 같은 세 층에 대응하여 그 각각을 적절히 저지하기 위해서 팔정도를 세 부분[三學]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계율 수련은 불선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제어함으로써 번뇌가 범함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 다음의 집중 수련은 명시 단계에 대비한 방위 수단을 제공한다. 집중은 이미 명시적으로 모양새를 드러내는 번뇌들을 지우고, 계속 몰려드는 번뇌들로부터 마음을 지켜낸다. 그러나 완전 몰입의 깊이까지 집중을 추구해 들어가도 심적 연속 속에 잠복하고 있는 잠재적 성향이라는 고통의 근본적 원천까지는 건드리지 못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집중도 속수무책이다. 이 뿌리들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마음의 고요함 이상의 그 무엇이 요구된다. 통일된 마음의 평정과 고요함을 넘어 요구되는 것이 지혜(pann?), 즉 현상을 근본적 존재양식 수준에서 꿰뚫어보는 눈이다.
오로지 지혜만이 잠재적 성향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번뇌를 구성하는 일습 중 가장 기본적 요소이자 다른 요소들을 키우고 자리잡아주는 것이 바로 무지[無明]인 바, 지혜가 바로 그 무지를 치유하는 약이기 때문이다. 무지란 단어가 ‘없을 무(無)’자를 앞세워 부정어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소극적인 것, 단순히 바른 지혜가 결핍되어 있다는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무지는 오히려 우리 내면생활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방심할 수 없는 들뜬 심적 요소다. 그것은 인식을 왜곡하고, 의욕을 지배하며, 우리들 존재의 전체 색조를 좌우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무지야말로 우리를 고에 메이게 하는 참으로 강력한 요소다.”(『상응부』14상응 13경)
무지는 가장 기초적 작용 영역인 인지의 수준에서 우리의 지각, 사고, 관점에 침투해 들어와서 우리의 경험에다가 여러 겹의 미혹을 덮씌워 그 경험을 엉뚱하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이런 미혹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셋 있다. 무상을 놓고 항상하다고 보려드는 미혹(Anicce niccavipall?sa), 고를 두고 낙이라 보려드는 미혹(dukkhe sukhavipall?sa), 무아를 두고 자아라고 보려드는 미혹(anattani attavipall?sa)이다.(『증지부』4법집 49경)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하고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세계가 견고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지속하는 실체인 양 여긴다. 또 그처럼 고통, 실망, 좌절을 거듭거듭 겪으면서도 우리는 즐거움을 누릴 천부의 권리라도 있는 양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마냥 기대에 부푼 채 어떻게든 즐길 거리를 늘리고 즐김의 강도를 높이고자 애를 쓰고 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만들어내는 각종 관념과 상(像)들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인 양 집착하면서, 우리 자신을 일체가 구족된 자아로 인식한다.
무명이 사물의 참 성질을 덮어 감추는 데에 반해, 지혜는 우리가 직접적인 지각 특유의 생기 넘침[活發發]을 지니고 현상을 기본적 존재방식 차원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끔 해줌으로써 왜곡의 덮개를 벗겨낸다. 지혜 수련은 통찰력의 계발[관법수행 vipassan?-bh?van?]에 집중된다. 여기서 통찰력이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유일한 영역, 즉 자신의 경험세계 안에서의 존재 그것의 진실성을 재는 가늠하는, 존재본성에 대한 깊고 포괄적인 들여다봄인 것이다. 보통 우리는 자신의 경험 속에 잠겨 있다. 완벽하게 경험과 동일화되어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경험을 떠나 살 수 없으면서도 경험의 성질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맹목성 때문에 경험은 잘못 해석될 뿐 아니라 영속성, 즐거움, 자아와 같은 미혹들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적 왜곡 가운데 가장 깊게 자리 잡고 있고 또 가장 집요한 것이 자아라는 미망이다. 즉 우리 존재의 중심에 진실로 확정된 ‘나'가 실존하며, 그것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관념이다. 부처님은 이 자아 개념이 그릇된 것이며, 실체가 없는 단순한 가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단순한 가정에 불과한 이 자아라는 관념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 가정된 자아라는 것이야말로 가히 재난이 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아라는 견해를 조망점으로 삼아 그것으로부터 세상을 내다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을 ’나[我]’와 ‘나 아님[非我]’, ‘내 것인 것’과 ‘내 것 아닌 것’으로 양분하게 된다. 그리고는 이런 양분법에 사로잡혀서 이 양분법이 낳는 번뇌들, 즉 붙잡거나 파괴하려는 충동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에는 그 결과로 피할 길 없는 고의 희생이 되고 만다.
우리가 모든 번뇌와 고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자아의 환상을 무아의 깨달음으로 폭파하고 축출해버려야 한다. 바로 이 일이 지혜의 계발이 담당해야 할 과업이다. 이 계발의 도정을 나아가는 첫 번째 걸음은 분석하는 것이다. 자아라는 견해를 뿌리 뽑으려면 경험 세계를 여러 벌의 요소들로 구획한 다음 다시 이 여러 벌 중 그 어느 쪽도 단독으로나 합쳐서나 자아로 간주될 것이 없다는 점이 확인될 때까지 조리정연하게 점검해 나아가야 한다. 다른 심리학들보다 더 높고 심오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이 갖는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경험’에 대한 이러한 분석적 태도는 우리들의 경험이 마치 시계나 자동차가 그 부속품들로 분해될 수 있는 것처럼 분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험은 하위 단위로의 분해가 불가능한 단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단일성은 실체적인 것이기보다는 기능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단일성의 성격 때문에 끊임없이 변천하는 흐름 속에서 불변의 상수로서의 동일성을 견지하는, 구성 요소들과는 별도인 어떤 통합적 자아를 굳이 가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가장 자주 원용되는 분석법은 ‘나’라는 존재를 물질적 형태[色], 느낌[受], 지각[想], 심적 형성물들[行], 그리고 의식[識], 이렇게 다섯 가지 집착의 덩어리[五取蘊]들로 보는 것이다.80) 물질적 형태는 존재의 물질적 측면을 구성하는 것으로 감각기능들과 함께 하는 신체 조직과 바깥의 인식 대상들이다. 다른 네 가지 집합체들은 마음의 측면을 구성한다. 느낌은 정서적 색조를 제공하고, 지각은 주목하고 확인하는 요소이며, 심적 형성물들은 의욕적·감정적인 요소들이며, 식은 모든 경험에 불가결한 기본적 알아차림이다. 오온의 방식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발견할 수도 없는 ‘자아’를 맹목적으로 들먹이게 되는 일없이 경험을 오로지 그 구성 요소면에서만 보려는 시도가 가능해진다. 이런 안목을 얻으려면 강한 마음챙김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바로 마음챙김을 네 번째 염처에다 적용하는 것, 즉 존재의 요소들에 관한 수관(dhamm?nupassan?)을 닦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면 비로소 불제자는 오온을, 그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수관하며 머무르게 될 것이다.
불제자는 현상[法], 즉 오취온에 대해 수관[dhamme dhamm?nupass?]하며 머문다. 그는 색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수가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행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81)
또는 불제자는 위의 방법 대신, 감각 경험의 여섯 안팎의 영역, 즉 여섯 감각 기능들과 그에 상응하는 여섯 대상들을 수관할 수도 있고 또한 그들 간의 감각적 접촉으로부터 생겨나는 족쇄, 다른 말로 번뇌들을 주시하면서 지낼 수도 있다.
불제자는 현상[法], 즉 여섯 가지 안?밖 감각기반[六內處·六外處]을 수관하며 머문다. 그는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닿음,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들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족쇄도 안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버리며, 버린 족쇄가 장차 어떻게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는지를 안다.82)
자아의 견해는 존재의 요소들을 분석적 방법보다 그것들 간의 관계 구조면에서 검토할 때 더욱 현저히 약화된다. 검토해 보면, 온(蘊)들이 조건들에 의지해서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드러난다. 열두 가지 연기요소의 세트 중에 가상의 ‘나’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존재의 절대적 자기 충족을 누리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심신 복합체내의 요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볼수록 그들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 자체를 넘어 밖으로 뻗쳐나가는 광대한 사건들의 그물망에 매인 채, 연기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발견된다. 예컨대, 우리 몸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생긴 것이고 음식, 물, 공기에 의존해서 지탱된다. 느낌, 지각, 심적 형성물들[行]은 몸과 감각들에 의지해서 생겨난다.
그들은 대상과 그에 상응하는 의식, 그리고 감각 기능을 매체로 대상과 의식의 접촉을 필요로 한다. 다시 의식은 의식대로 감각력이 있는 기관과 그리고 함께 일어난 심적 요소들의 전체 집합에 의존한다. 다시 이 모든 생성과정은 다름 아닌 존재 사슬[輪廻] 속의 전생(前生)들에 이어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이전 존재들이 쌓아 놓은 모든 업을 상속받고 있다. 이래서 그 어떤 것도 자족적 존재 양태를 향유하지 못한다.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들은 다른 것들에 부수하고 의지해서 상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요소 분석과 관계성에 대한 명료한 이해의 두 단계는 자아라는 관념에 대한 지적 점착(粘着)을 끊는 것을 돕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는 잘못된 지각에 의해 지탱되는 자아에의 뿌리 깊은 집착을 모두 파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미묘한 형태의 자아집착을 뿌리까지 뽑아버리기 위해서는 반작용지각, 즉 핵심이 빈, 공(空)한 현상[法]의 성질에 대한 직관이 필요하다.
이러한 통찰은 존재 요소를 무상(aniccat?), 만족스럽지 않음(dukkhat?), 자아가 없음(anatt?)이라는 세 가지 보편적 표준에 따라 수관함으로써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이 세 가지 표준 중 우리가 맨 먼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 무상이다. 통찰의 수준에서는 무상이 단순히 모든 것이 결국에는 종말에 이르고 만다는 것을 뜻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깊고 더 편만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즉 조건에 매인 일체 현상[諸行]은 끊임없는 변천 과정 속에 있다는 것, 거의 생기자마자 바로 부서지고 없어져 버리는 덧없는 사건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감각에 떠오르는 일견 안정되어 보이는 저 대상들이 실제로는 찰나적 형성들(sa?kh?r?)이 이어진 한 가닥의 끈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상식이 설정한 인간존재 역시 물질적 사건들의 흐름 즉 색온과 여타의 네 가지 온들로 구성된 정신적 사건들의 흐름, 이 두 가닥이 서로 꼬여 이어진 흐름이 빚어내는 하나의 유동현상으로 귀결된다.
무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다른 두 가지 표준에 대한 통찰력도 곧 뒤따라온다. 온(蘊) 즉 쌓임들이 항상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 만족을 구하려는 희망을 거기에 걸 수가 없다. 그들에게 무슨 기대를 걸든 피할 수 없는 그들의 변화 때문에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게끔 되어 있다. 따라서 통찰력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둑카(dukkha)’, 즉 가장 깊은 뜻에서의 ‘고’일 수밖에 없다. 다시 온들이 무상하고 만족스럽지 못하기에 그들을 자아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온들이 자아라면, 혹은 자아에 속한 것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그들을 우리 뜻대로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어야 하고 영구적 지복의 원천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이야말로 고통과 실망의 바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에게는 어떤 지배력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임에도 자아가 아니며 자아에 속한 것들도 아닌 것(anatt?), 단지 조건들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공(空)한, 주인 없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관법 수행 과정에 들어서면 팔정도의 여덟 요소들은 이전과는 다른 강도를 띠게 된다. 그들은 우선 힘이 강해진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단일의 응집력 강한 하나의 길[道]로 융합된다. 이 관법 수행에서는 여덟 요소와 세 수련[三學] 모두가 더불어 존립한다. 그 하나하나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받쳐주고 있다. 그 개개가 공부에 자기 특유의 기여를 해낸다. 도덕적 훈련의 요소들[戒]은 탈선성향들을 강력한 주의력을 기울여 계속 감시하고 있어 비윤리적 행위를 범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 집중을 이루는 요소들[定]은 마음으로 하여금 잘 잊어버리고 산만해지기 쉬운 경향에서 벗어나서 확고하게 현상들의 흐름에 고정되게끔 만들어,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건 다 흠잡을 데 없는 정밀성으로 수관하게 한다. 올바른 견해는 이제 관의 혜[觀慧]가 되어 끊임없이 더 날카로워지고 깊어진다. 또 올바른 의도 역시 초연함과 목표의 불변함을 통해 전체 수관과정에 미동도 없는 안정을 가져다줌으로써 자신의 면모를 드러낸다.
통찰명상[觀修行]은 오온으로 구성되는 ‘조건 지어진 형성물들[諸行 sa?kh?r?]’을 그 대상영역으로 삼는다. 그것이 하는 일은 제행의 본질적 특성들 즉 무상?고?무아의 세 표준[三法印]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벗겨내는 일이다. 아직은 이것이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들의 세계[有爲法界]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통찰 단계의 팔정도를 세간의 길(lokiyamagga)이라고 한다. 이 명칭이 세간의 길이라 해서 통찰의 도정 목표가 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 길이 이르는 곳이 윤회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 역시 초월을 희구하며 우리를 열반으로 안내한다. 다만 그것이 수관하는 대상계가 아직 조건에 매인 세계 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에 매인 것에 대한 세간적 수관은 어디까지나 조건에 매이지 않은 상태, 즉 초세간에 도달하는 수레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통찰명상이 그 정점에 도달할 때, 형성된 모든 것들이 무상?고?무아임을 완벽하게 파악할 때, 마음은 조건에 매인 상태를 돌파하여 조건에 매이지 않은 상태, 열반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직시의 눈으로 열반을 보며, 열반은 즉각적 깨달음의 대상이 된다.
조건에 매이지 않은 상태로의 돌파는 출세간도(出世間道 lokuttaramagga)라 부르는 심적 사건 또는 어떤 형태의 식(識)에 의해 이루어진다. 출세간도는 네 단계 즉 네 ‘출세간도’로 나타난다. 다음 단계로 나아감에 따라 더 깊은 수준의 깨달음을 나타내고 완전한 해탈에 더 다가가게 되는데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완전한 해탈로 끝난다. 이 네 가지 도는 서로가 아주 근접한 가운데서 달성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비상하게 예리한 기능[利根]을 갖춘 사람은 앉은 그 자리에서 이 모두를 이루어내기도 하지만 그러나 보다 전형적으로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고 심지어는 여러 생에 걸쳐지기도 한다.83) 이들 네 출세간도는 모두 사성제에 대한 통찰력을 공유한다. 이들 네 출세간도는 사성제를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이 네 출세간도는 사성제를 시각을 통해 포착한다. 자증(自證)의 확실성으로 사성제가 존재에 관한 불변의 진리임을 보는 것이다. 이 출세간도가 제공하는 사성제의 상은 사고력을 이해수단으로 쓰는 성찰의 단계에서처럼 네 가지 진리가 순차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완성된다. 그들은 한꺼번에 보인다. 팔정도를 통해 사성제 중 하나인 도성제를 본다는 것은 곧 사성제 모두를 보는 것이 된다.
도가 사성제를 꿰뚫게 되면 마음은 이 네 가지의 진리를 각기 하나씩 떠맡는 네 가지 기능을 동시적으로 수행한다. 마음은 모든 조건에 매인 존재들이 불만족이란 도장으로 날인되어 있는 것을 봄으로써 고성제를 완전히 파악한다. 이와 동시에 마음은 갈애를 버리고 고를 반복적으로 생성하는 이기심과 욕구의 덩어리를 잘라낸다. 다시 마음은, 이제는 내면의 눈앞에 현전해 있는 소멸[滅], 즉 불사의 요소인 열반을 실현한다. 그리고 네 번째로 마음은 성스러운 팔정도를 진전시킨다.
팔정도의 여덟 요소들은 엄청난 힘을 받은 데다 출세간에 이르도록 키도 충분히 자랐기 때문에 이제 마음껏 활짝 피어난다. 정견은 열반을 곧바로 보는 것으로, 정사는 열반에 마음 기울임으로, 정어 정업 정명의 세 윤리적 요소들은 도덕적 탈선에 대한 제어로, 정정진은 출세간도의 식[道-識]상태의 에너지로, 정념은 알아차림의 요소로, 그리고 정정은 마음이 한 점에 모아진 초점으로 제각기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동시에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양초가 동시에 심지를 태우고, 밀납(蜜蠟)을 소모하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주는 것에 비유된다.84)
이 출세간도들은 번뇌를 근절하는 특별한 과업을 띠고 있다. 이 길들을 증득하기 전인 집중의 단계에서는, 그리고 심지어는 관법 수행의 단계에서도 번뇌는 잘려나가지 않은 채 더 높은 정신적 기능들을 닦고 있는 기운에 눌려서 단지 약화되고 저지되고 억압되고 있을 뿐이었다. 의식의 깊숙한 밑바닥에서는 번뇌가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잠재적 성향의 형태로 계속 꿈틀대고 있다. 그러나 출세간의 길에 도달하면 번뇌를 근절하는 공부가 본격화된다.
윤회에다 우리를 묶는 측면에서 번뇌를 파악하여 분류하면, (1)개아실존의 견해[有身見], (2)의심[疑], (3)규준과 의식(儀式)에 대한 집착[戒禁取], (4)감각적 욕구[欲貪], (5)혐오[瞋], (6)색계존재에 대한 욕구[色貪], (7)무색계존재에 대한 욕구[無色貪], (8)자만[慢], (9)들뜸[掉擧], (10)무지[無明], 이렇게 열 가지로 이루어진 일습의 ‘족쇄(sa?yojana)’들이 된다. 네 가지 출세간의 도들은 각기 특정 번뇌의 켜를 근절한다. 첫 번째의 ‘흐름에 듦의 도[豫流道 sot?patti-magga]’는 이 일습 중 가장 조악한 처음 세 가지 족쇄를 끊어내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근절해 버린다. 오온에서 진실로 실존하는 자아를 찾는 개아실존의 견해(sakk?ya-di??hi)는 일체 법의 무자성(無自性)을 본 이상 끊어질 수밖에 없다. 의심 또한 부처님이 천명하신 진리를 파악했기에, 스스로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근절되고, 다시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퇴행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해탈이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뿐, 엄격한 도덕률이나 의식 준수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규준과 종교 의식에의 집착도 제거된다.
이 도(道)에는 ‘과(果 phala)’라는 또 다른 출세간의 의식[出世間識] 상태가 곧바로 따라오는 바, 이 과 자체는 도가 행한 번뇌 제거 작업에서 온 결과물이다. 각 도에는 그것 자체의 과가 뒤따르는데, 이 과에서 마음은 세간의식의 수준으로 다시 내려가기 전에 잠시 몇 순간 동안 열반의 더없는 지복의 평화를 누린다. 첫 번째는 ‘흐름에 듦’의 과로서 이 과를 경험한 사람은 ‘흐름에 든 사람(sot?panna)’이 된다. 그는 최종의 해탈로 실어다주는 법의 흐름에 들어선 것이다. 이제 그에게 해탈은 기약된 것이고 깨닫지 못한 세속범부의 삶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 그에게는 아직 그의 마음 됨됨이 속에 어떤 번뇌들이 남아 있고, 그 때문에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일곱 생까지 걸릴 수도 있겠지만 이미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핵심적 깨달음을 얻어 놓았기 때문에 퇴전하는 일은 결코 없다.
이근(利根)을 갖춘 열성적인 수행자라면 예류과에 도달한 후에도 노력을 늦추지 않고 되도록 빨리 모든 도를 마치기 위해 힘을 쏟는다. 그는 다시 통찰력 수관의 실천을 계속해서 통찰지의 오르막 단계를 통과하여 조만간에 두 번째 도인 ‘한 번 더 돌아오는 자의 도[一來道 sakad?g?mi-magga]’에 도달한다. 이 출세간의 도는 족쇄 중 어떤 것을 완전히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의 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도를 따라가면 수행자는 그것의 과를 경험하게 되고 그때에는 완전한 해탈을 얻기 전에 많아야 한 번만 더 이 세간으로 되돌아올 뿐인 ‘한 번만 더 돌아오는 이’가 된다.
그러나 이 수행자는 여전히 수관의 과업에 몰두한다. 그 다음의 출세간 실현단계에서 그는 세 번째 도, ‘돌아오지 않는 자의 도[不還道 an?g?mi-magga]’에 도달하게 되고 거기서 감각적 욕구와 악의라는 족쇄를 끊어낸다. 이 시점 이후로는 어떤 경우에도 그는 다시 감각적 쾌락을 탐하는 욕구의 손아귀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 있을 수 없고, 또한 어떤 자극에 대해서도 분노, 혐오, 그리고 불만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어떤 미래세에도 사람이란 존재 상태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금생에 마지막 도인 아라한의 도에 들지 않으면 죽은 후에 색계(r?paloka) 중 상천[五淨居天]에 재생하여 거기서 바로 해탈에 들게 된다.
그러나 이 수행자는 다시금 발분 노력해서 통찰력을 발전시켜 마침내 그 절정에서 네 번째의 길, 아라한의 도(arahatta-magga)에 든다. 여기서 드디어 그는 나머지 다섯 족쇄들 ― 색계존재에 대한 욕구, 무색계존재에 대한 욕구, 자만, 들뜸, 무명을 끊어낸다. 첫 번째 것은 네 가지 선에 의해서 접근할 수 있게 된, 보통 ‘브라흐마 세계[梵天]’라는 이름 아래 포괄되는 천상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이다. 둘째 것은 사무색정의 성취에 의해 접근할 수 있게 된, 사무색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이다. 다음으로 거론되는 자만(m?na)은 자신의 덕성과 재능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곧잘 빠지게 되는, 조악한 유형의 자존심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명료한 자아관이 근절된 후에도 지속되는 에고 관념의 미세한 잔재이다. 이런 유형의 자만을 경전에서는 ‘내가 있다는 만(asmim?na)’이라 한다. 다음의 들뜸[掉擧 uddhacca]은 미처 완전히 깨닫지 못한 마음에는 어디에나 있는 미세한 흥분이고, 그리고 마지막의 무지(avijj?)는 사성제의 완전한 이해를 막는 근본적인 인식상의 모호함이다. 보다 더 조야한 등급의 무지는 앞의 세 도에서 지혜의 기능[慧根]에 의해 마음에서 닦아내 버렸지만, 아주 엷은 무명의 덮개는 심지어 ‘돌아오지 않는 이’에게서도 진리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한의 도는 이 마지막 무지의 덮개마저 벗겨내고, 그럼으로써 나머지의 모든 심적 번뇌들도 벗겨낸다. 이 도는 사성제의 완벽한 파악에서 끝난다. 완벽한 이해는 첫째, 고의 진리의 깊이를 완전하게 잰다. 둘째, 고가 솟아나는 원천인 갈애를 근절한다. 셋째, 고의 멸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건에 매이지 않은 요소, 열반을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끝으로 팔정도 여덟 가지 요소들의 발전을 완성시킴으로써 열반을 실현해 보인다.
네 번째 도(道)와 과(果)에 도달함으로써 수행자는 바로 이생에서 모든 결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 즉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은 팔정도를 그 끝까지 걸었고, 빠알리 경전에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그처럼 자주 언급되고 있는 궁극적 경지를 실제로 구현하는 삶을 살게 된다. “태어남[生]은 깨어졌다. 성스러운 삶이 영위되었다. 해야 할 일은 해 마쳤다. 이제 어떤 상태의 존재로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라한은 더 이상 도를 닦는 자가 아니라 도의 살아 있는 구현자, 곧 무학(無學)이다. 도의 여덟 가지 요소를 완성의 경지까지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제 해방된 자[解脫人]는 그 요소들의 결실인 깨달음과 구경의 해탈을 누리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