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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팔정도(4)

(4)


바른 행위[定業 samm? kammanta]


바른 행위는, 몸을 표현의 자연스러운 수단으로 삼아 일어나는 불선한 행위를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팔정도의 ‘바른 행위’라는 항목의 핵심은 물론 ‘그만 둠[節制]’이라는 심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 절제가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른 행위’라 부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른 행위를 구성하는 세 가지 행위, 즉 생명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성적 불륜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를 순서대로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살생 멀리하기(p???tip?t?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 몽둥이도 칼도 버리고 안으로는 도덕에서 벗어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밖으로는 동정심으로 가득 차서, 모든 유정들의 안녕을 염원한다.35)


‘생명을 해치는 것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타인을 살상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 이상으로 그 적용 범위가 훨씬 넓다. 이 계율은 그 어떤 유정물(有情物)도 살상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유정물(p???, satta)’이란 마음 또는 의식을 지닌 생물로서 실제로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곤충을 의미한다. 식물의 경우, 그들도 어느 정도의 감수성을 나타내 보이기는 하지만 유정물 여부를 규정짓는 기준인, 의식을 제대로 갖춘다는 기본 속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생명을 해치는 일’은 의도적인 살상, 즉 의식 있는 존재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다. 이러한 행위를 피해야 한다는 원칙의 밑바닥에는 모든 존재는 살고 싶어 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점,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는 점에 대한 고려가 깔려 있다. 이 계율의 위반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은,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로 귀착되는 살생 의욕의 유무이다. 자살도 일반적으로 불살생 계율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생명을 앗으려는 의도가 없는 우발적 살상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계율은 일차적인 것과 이차적인 것 이 두 가지 모두에 적용된다. 일차적인 행위는 실제로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고 이차적인 것은 죽이지는 않지만 다른 존재를 의도적으로 해치고 괴롭히는 행위다.


해치지 말라는 것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인 데 비해서 후대 주석가들은 이 계율에 대해 세밀한 분석을 가하고 있다. 태국의 어느 박학한 원로는 이전의 방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바 있는데 여기서 그 내용을 요약해보기로 한다.36) 이 글에서는, 살생은 도덕적 비중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각기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도덕적 비중을 결정하는 세 가지 주요 변수는 대상, 동기, 그리고 살생에 쏟은 노력이다. 대상과 관련해서 보면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동물을 죽이는 것 사이에는 심각성에 있어 차이가 나는데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무거운 악업을 짓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동물에 비해 훨씬 더 발달된 도덕적 의식과 더 큰 정신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가운데서도 살해당한 사람의 자질에 따라서, 또 살해자와의 관계에 따라서 업의 무게가 다르다. 따라서 부모나 스승과 같이 은혜를 베푼 사람이나 정신적으로 수승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특별히 무거운 업을 짓는 행위가 된다.


살생의 동기 역시 도덕적 무게에 영향을 미친다. 살생행위는 욕심, 미움, 미망 중 어떤 것에 의해서 추동되는 것이다. 이 셋 중에서 미움 때문에 죽이는 것이 가장 심각한 것이고 또 사전에 어느 정도로 생각을 했느냐에 따라 그 무게도 비례해서 증대된다. 마지막으로 그 행위에 기울인 노력의 강도 역시 중요하다. 어느 정도로 그 마음의 때가 강한 힘과 강제력을 가졌느냐에 정비례하여 업의 불선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살생을 피하기 위한 적극적 대처방법은 부처님이 지적하셨듯이 다른 존재에 대해 자비심을 키우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는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피할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안녕을 염려하는 연민심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고 남들의 안녕을 위해 마음 쓰는 것은 이미 팔정도의 두 번째 항목인 바른 의도[正思]를 선의와 무해의 형태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 된다.


(2) 주어지지 않은 것 취하기를 멀리하기(adinn?d?n?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위를 피하고 이를 떠난다. 마을이나 숲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훔치려는 의도로 가져가지 않는다.37)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정당한 소유물을 훔치려는 의도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권이 주장되지 않은 돌이나 나무, 심지어 땅에서 채취한 귀한 보석까지도 소유주가 없는 경우에는 비록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 해도 이를 취하는 것이 계율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남에게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인데도 이를 주지 않고 버티는 것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계율을 어긴 것으로 간주된다.


주석서들은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위가 범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흔한 것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절도 : 남에게 속한 물건을 가택 침입, 소매치기 등과 같은 방법으로 주인 몰래 취하는 것.

2) 강도 : 남에게 속한 물건을 강제로 또는 협박을 가해서 빼앗는 것.

3) 날치기 : 남에게 속한 물건을 반항할 틈 없이 갑자기 낚아채는 것.

4) 사취(詐取) :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자기 것이라 거짓으로 주장하여 취하는 것.

5) 속임수 : 엉터리 저울이나 자로 고객을 속이는 것.38)


이런 행위에 가해지는 도덕적 무게는 훔친 물건의 가치, 피해자의 자질, 도둑의 심리상태 등 세 가지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로, 도덕적 비중은 훔친 물건의 가치에 비례한다. 둘째로, 도덕적 비중은 피해자의 도덕적 품격에 따라 달라진다. 셋째로, 도둑행위는 탐심이나 미움이 그 동기가 될 수 있는데 대체로 탐심이 가장 흔한 동기이다. 미움이 그 동기가 되는 것은 물건이 탐이 나서라기보다는 소유주를 해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할 경우다. 이 두 가지 중, 미움 때문에 도둑질하는 것이 단순한 탐심에 의한 것보다 더 무거운 악업을 짓는 것이 된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기 위한 적극적 대처방법은 정직성으로서,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소유권과 소유물을 그들 뜻대로 사용할 권리를 존중해주는 것도 포함한다. 여기에 관련되는 또 다른 덕목은 지족(知足)으로,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부를 증식시키고자 하지 않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다. 훔치고자 하는 마음에 대처하는 가장 빼어난 덕목은 보시행인 바, 자기의 부와 소유물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다.


(3) 부정한 성 행위 멀리하기(k?mesu micch?c?r? verama??)


이 문에서 수행자는 성적 불륜행위를 피하고 이를 떠난다. 부모 형제, 친척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지 않고 결혼한 사람, 여자 죄수, 그리고 남과 약혼한 여자들과도 관계를 갖지 않는다.39)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계율이 지향하는 목적은 결혼관계를 외부적 방해로부터 보호하고 결혼 당사자들 간의 신의와 정절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정신적 향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계율은 성적 욕구가 확대되는 경향에 제동을 걸어, 이욕(離慾)의 방향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마침내는 출가수행자가 독신생활[梵行]을 준수하는 데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재가 불자의 경우 이 계율은 부적절한 대상과의 성적 관계를 금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이 계율을 전적으로 어긴다 함은 완전한 성관계를 갖는 경우이지만 완전한 성관계에 이르지 않는 갖가지 성적 관계들도 다소나마 이 계율을 어기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계율에서 제기되는 주된 문제는 누구를 부적절한 대상으로 간주하느냐에 있다. 부처님 말씀에서는 남자의 입장에서 부적절한 대상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후 논서들에서는 이 문제를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입장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40)


남자에게는 세 종류의 여자들이 부적절한 상대로 간주된다.


1.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여자 : 여기에는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여자 이외에 한 남자의 합법적인 처가 아니면서도 그와 함께 살거나 그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기타 그의 짝으로 간주되어 일반적으로 그와 같이 사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는 여자도 포함한다. 이런 여자들은 모두 그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는 부적절한 대상이다. 이 범주에는 다른 남자와 약혼한 여자도 포함된다. 그러나 과부나 이혼녀들은 별도의 사유가 없는 한 부적절한 관계로 간주되지 않는다.


2. 아직 보호받고 있는 여자 : 부모, 친척, 기타 합법적 보호자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녀나 여인들을 말한다. 이 규정은 보호자의 뜻을 어기고 애인과 함께 도망간 여자나 비밀결혼을 한 여자는 제외한다. (이 조항은 보호자의 허락 없는 가출이나 비밀결혼을 막기 위한 것이다.)


3. 관습에 의해 금지된 여자 : 사회적 전통이 짝으로 금하는 근친, 독신을 맹세한 비구니나 그 외의 여자, 그리고 국법에 의해 상대자로 삼지 못하도록 금하는 여자들이 포함된다.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두 종류의 남자들이 부적절한 상대로 간주된다.


1. 결혼한 여자에게는 자기 남편이 아닌 남자들은 모두 부적절한 상대이다. 따라서 결혼한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한 정절 서약을 깨는 것은 곧 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나 이혼한 여자는 다시 결혼할 수 있다.


2. 가까운 친척이나 독신을 맹세한 남자 등, 관습이 금하는 남자는 어떤 여자에게도 부적절한 상대다.


이 외에 폭력이 개입되거나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적 결합은 계율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위반행위는 가해자에게만 해당되고 강제로 당한 쪽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성적 불륜 행위에 관한 금기에 상응하는 적극적인 덕목은 재가자의 경우 결혼의 정절을 지키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성실해야 하고 헌신적이어야 하며 부부관계로 만족해야 하고 다른 상대를 넘봄으로써 결혼관계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성적 관계를 반드시 결혼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아니고 사회적 관습 여하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규범의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성적 관계를 예방하려는 것이다. 독립적 개체로서의 성인 남녀가 비록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로운 합의를 통해서 성적 관계를 맺을 때는 이로 인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가 미치지 않는 한 계율을 어기는 것이 되지 않는다.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 그리고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팔계를 받아 지키는 재가 남녀는 금욕생활을 지켜야 한다. 이들은 성적 불륜을 피해야 함은 물론이고 적어도 그들이 서원을 세운 기간 동안에는 성과 관련된 일체 행위는 금해야 한다. 가장 높은 경지의 성스러운 생활은 생각, 말, 행동에 있어서 완전한 청정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성적 욕구를 잠재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른 생계[正命 samm? ?j?va]


바른 생계라는 항목은 우리가 생계를 올바른 방법으로 꾸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부처님은 재가 불자들에게 부를 축적함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기준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재물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얻어야지 불법적으로 얻어서는 안 되고 평화적으로 얻어야지 강제나 폭력을 써서는 안 되고, 정직하게 얻어야지 사기나 속임수로 얻어서는 안 되며,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해나 고통을 끼치지 않는 방법으로만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해를 주게 되는 것으로는 다음 다섯 가지 생계수단을 구체적으로 들고 이를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41) 1) 무기 거래, 2) 생명체의 거래(도살을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 노예매매, 매춘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3) 육류 생산 및 도살업, 4) 독약 거래, 5) 술이나 마약 거래(『증지부』5법집 177경). 또 부정직하게 부를 획득하는, 사기, 배신, 점술, 속임수, 고리대금업 등을 잘못된 생계수단으로 열거하셨다.(『중부』117경) 바른 말과 바른 행위를 어기게 만드는 직업이라면 무엇이건 다 잘못된 생계수단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술·마약 거래 같은 직업은 이런 계율을 어기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역시 나쁜 것이 된다.


앞서 인용한 태국 왕자의 글은 바른 생계를 실제적 면에서 논하면서 편의상 행위와 관련하여 올바른 것, 사람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 그리고 대상물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42) ‘행위와 관련하여 올바른 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를 들어 일꾼들이 근무시간을 허송하거나 근무시간을 늘여서 보고하거나, 회사의 물건들을 제 호주머니에 넣거나 하는 일 없이 부지런히, 양심적으로 자기가 맡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이라 함은 고용주, 고용인, 동료, 고객들에게 응분의 존경과 배려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주는 고용인들에게 일을 맡길 때 그 사람의 역량에 알맞게 주도록 해야 하고, 적절한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승진을 해야 할 때 승진 시켜주어야 하고, 때때로 휴가와 상여금을 주어야 한다. 동료들끼리는 서로 경쟁하는 대신 협동해야 하며, 상인들은 고객과의 거래에서 공정해야 한다. ‘대상물에 관련하여 올바른 것’이란 사업상 거래나 판매를 할 때 거래 품목을 정직하게 제공해야 함을 의미한다. 허위광고, 양이나 질에 대한 거짓표시, 부정직한 술책 등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V. 바른 노력[正精進 samm? v?y?ma]



앞의 세 항목, 즉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로 청정한 행위가 확립되면 이는 팔정도의 그 다음의 정 부분[定蘊 sam?dhikkhandha]을 위한 기반이 된다. 도덕적 자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적인 정신훈련에 들어가는 이 단계의 수행은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의 세 항목으로 이루어진다. 이 부분을 정온(定蘊)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부분이 추구하는 목표가 지속적 집중력이기 때문이고, 집중 그 자체는 통찰지를 위한 토대로 꼭 필요하기 때문이며, 다시 그 통찰지는 해탈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로부터 나오는 꿰뚫어 보는 능력은 먼저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모아져야만 비로소 열릴 수 있는 것이다. 바른 집중은 적당한 대상에 부동의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통일함으로써 마음이 지혜를 이루는 데 필요불가결한 적정(寂靜)을 갖추도록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바른 집중의 항목은 바른 노력과 바른 마음챙김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른 노력은 이 과업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게 되고, 바른 마음챙김은 주시할 때마다 확고한 초점들을 제공한다.


주석가들은 정(定) 단계의 이 세 항목들이 어떻게 서로 돕고 있는지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세 소년이 공원에 놀러 간다. 공원을 거닐다가 그들은 어떤 나무 꼭대기에 핀 꽃을 발견하고 그 꽃을 따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 꽃은 그 중 가장 키가 큰 소년도 딸 수 없는 높이에 있다. 그때 한 친구가 몸을 굽히며 자기 등에 올라서라고 한다. 키 큰 소년이 올라서지만 등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꽃을 향해 손을 마음껏 뻗지 못한다. 이에 세 번째 소년이 자기 어깨에 기대라고 한다. 첫 번째 소년은 두 번째 소년의 등에 올라선 채 세 번째 소년의 어깨에 기대고는 손을 뻗어 마침내 꽃을 따 모은다.43)


이 비유에서 꽃을 따는 키 큰 소년은 마음을 통일시키는 기능을 하는 집중을 나타낸다. 그러나 집중이 마음을 통일시키려면 이를 받쳐주는 도움이 필요하다. 등을 대준 소년과 같은 도움이 필요한데 바른 노력이 제공하는 에너지가 그 역할을 한다. 집중은 또 마음챙김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안정된 알아차림을 필요로 하는데, 어깨를 대준 소년의 역할 같은 것이다. 바른 집중이 이 마음챙김의 밑받침을 받게 되면, 마침내 바른 노력에 의해 힘이 강화되고 바른 마음챙김에 의해 균형이 잡혀서 흐트러진 생각의 가닥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을 확고하게 목표에다  고정시킬 수 있게 된다.


바른 노력을 뒷받침해 주는 심적 요소인 에너지[viriya]는 건전한 쪽으로도 불건전한 쪽으로도 다 나타날 수 있다. 같은 요소라도 한편으로는 욕구, 공격, 폭력, 야심 등에 연료를 공급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아량, 자제, 친절, 집중, 이해 등에 공급하기도 한다. 바른 노력이 포함하고 있는 분발심이 바로 건전한 형태의 에너지이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좀 더 특수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고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된 건전한 의식상태가 갖는 힘이다. 여기서 ‘고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이라는 수식구는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익한 에너지가 팔정도에 기여하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바른 이해와 바른 의도의 안내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팔정도의 여타 항목들과 유기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건전한 마음상태의 에너지가 대개 그렇듯이, 생사의 윤회 속에서 그치고 마는 단순한 공덕 쌓기에 불과할 뿐,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노력의 필요성을, 부지런함?분발?해이해짐이 없는 불굴의 인내의 필요성을 거듭거듭 역설하셨다. 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각자 스스로 자신의 해탈을 이루어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신 것으로 당신이 하실 일은 다 하신 것이다. 나머지는 우리 각자가 언제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가느냐 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힘을 필요로 하는 과업이기 때문에 마음을 계발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마음의 계발이야말로 전체 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출발점은 괴롭고 미혹되고 오염된 마음이고, 종착점은 청정하고 지혜로 밝아진 해탈한 마음이다. 그 사이를 메우는 것이 오염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바꾸어 가는 꾸준한 노력이다. 자기 계발이라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고, 또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부처님 당신과 그리고 큰 공부를 해 마친 그분의 제자들이야말로 이 과업이 우리가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산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그 분들은 우리들에게 장담까지 하신다.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 같은 목표 지점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노력 없이는 안 된다. “나는 대장부다운 꿋꿋함과 활력과 분투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을 다 이루어내기 전에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44) 이런 결심으로 계속 이어가는 실천 공부가 없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


정정진이 어디까지나 심적 과정이기 때문에 이는 네 가지 ‘위대한 노력[四正勤]’으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2) 이미 일어난 불선한 상태를 버리기,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어나게 하기,

(4) 이미 일어난 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완전하게 만들기.


불선한 상태(akusal? dhamm?)란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거나 아니면 안에 갇힌 채 여전히 살아 있는 번뇌들, 그리고 생각과 감정들, 또 거기서 비롯된 의도들이다. 선한 상태(kusal? dhamm?)란 번뇌로 오염되지 않은 마음상태들, 특히 해탈에 도움이 되는 마음상태들이다. 이 두 가지 마음상태에는 각각 두 가지씩 할 일이 있다. 불선한 상태의 경우, 아직 잠재해 있는 번뇌들이 표출되지 않도록 막고, 그리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활동적 번뇌를 쫓아내버리는 일이다. 이로운 면의 경우, 아직 계발되지 못한 해탈의 요소들을 일단 생겨나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충분히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그 요소들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바른 노력으로 분류한 이 네 가지 부분들[四正勤]이 가장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명상을 통한 마음의 계발’이라는 텃밭에서 어떻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나씩 살펴 나가기로 한다.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이 문에서 제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하고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지를 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45)


정정진의 첫 번째 면은 번뇌로 때 묻은 마음상태 즉 불선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定)을 방해하는 측면을 중심으로 살필 때는 이 번뇌들을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ncan?vara??]’46)라는 한 묶음으로 거론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섯 가지 장애란 감각적 욕구, 악의, 나태함과 졸음[昏沈], 들뜸과 걱정[掉悔], 의심이다.47) 이들이 ‘장애’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해탈로 가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자라나서 향상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고요함[止 samatha]과 통찰[觀 vipassan?]이라는 주된 두 수단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


처음의 두 장애인 감각적 욕구와 악의는 그 다섯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들인바 탐욕과 진에라는 불선의 뿌리들을 각기 대표하는 이들은 선정의 발전에 가장 무서운 장벽 노릇을 한다. 나머지 세 가지 장애들은 앞의 것들에 비하면 독성은 덜하지만 역시 방해가 되는 것들로 치암의 곁가지들인 이들은 보통 마음의 다른 때와 결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감각적 욕구’는 두 길로 해석된다. 때로는 좁은 의미에서, 마음에 드는 볼거리, 소리, 냄새, 맛, 접촉 등 ‘다섯 가닥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때로는 감각적 쾌락, 부, 권력, 지위, 명예 등 애착이 붙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포함되는, 모든 형태의 갈애를 포괄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두 번째 장애인‘악의’는 혐오감과 동의어이다. 악의는 다른 사람을 향하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거나 또는 대상물에 대해서거나 상황에 대해서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형태의 불만, 미움, 노여움, 원망, 반감 등을 포함한다.


세 번째 장애인 ‘나태함과 졸음’은 움직이기 힘듦이라는 공통된 특성에 의해 연결된 두 요소가 합해진 것으로서 그 중 하나는 마음의 굼뜸으로 나타나는 나태함(th?na)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까라짐, 마음의 무거움, 지나친 졸림 등에서 볼 수 있는 졸음[沈  middha]이다.


이와 정반대가 네 번째 장애인 ‘들뜸과 걱정’이다. 이것 역시 마음의 동요[不穩]를 공통적 특성으로 하는 두 요소의 합성물이다. 들뜸(uddhacca)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빠르고 격하게 오가는 교란되고 흥분된 마음이고, 걱정(kukkucca)은 과거의 실수에 대한 후회와 이런 실수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에 대해 불안해하는 마음이다.


다섯 번째 장애인 ‘의심’은 고질적인 우유부단함과 과단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권장하신,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지성과는 전혀 다른 의심하는 태도, 즉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 부처님의 길에 대하여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탓으로 좀체 마음공부의 길로 뛰어들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뜻한다.


장애와 관련해서 해야 할 첫 번째 노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일이다. 이는 제어 또는 방호하려는 노력(sa?varappadh?na)이라고 한다. 장애를 제어하려는 노력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나 수행을 발전시켜가는 과정에서나 내내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장애가 일어나면 주의를 분산시키고 알아차림의 눈을 흐리게 해서 고요함과 투명함을 해치기 때문이다. 장애는 마음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생긴다. 장애는 마음­연속체 깊은 곳에 항상 잠재해 있으면서 표면으로 드러날 기회를 노리고 있는 특정 경향성이 활성화되어 표출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애가 활성화되도록 촉발시키는 것은 감각적 경험이 제공하는 정보 입력(入力)이다. 몸이라는 유기체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어서 그 각 기관에 해당하는 특정 자료, 즉 눈은 형상을,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접촉을 받아들인다. 감각 대상들은 계속해서 감각기관들에 와서 부딪치는데, 이때 감각기관들은 받은 정보를 마음으로 중계해 보낸다. 마음에서 그 정보는 처리되고 평가되어 적절한 반응으로 형성된다. 그런가 하면 마음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감각인상들을 초장에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처리한다. 마음이, 입력되는 자료에 대해 ‘지혜롭지 못한 고려(ayoniso manasik?ra)’로 부주의하게 맞이하게 되면 그 감각 대상은 불선법을 부추기게 된다. 감각 대상이 직접적 충격으로 작용하여 반응을 즉각 촉발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간접적으로 기억 흔적으로 저장되었다가 후에 오염된 생각, 이미지, 환상 등등의 대상으로 떠올라 오기도 한다. 통례로 미루어 보건대, 대상은 보통 그에 상응하는 번뇌를 일으킨다. 마음을 끄는 대상은 욕구를 일으키고, 마뜩찮은 대상은 악의를 일으키고, 이도저도 아닌 대상은 치암과 연계된 번뇌를 일으킨다.


감관에 들어오는 감각적 입력에 대해 제어되지 않은 반응을 할 경우 잠재해 있는 번뇌를 자극하여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이들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감관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장애를 제어하는 수련방법으로 ‘감각기능 방호[根律儀 indriya-sa?vara]’라 불리는 공부를 가르치신다.


수행자가 눈으로 형상을, 귀로 소리를,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촉감을, 마음으로 대상을 지각할 때, 그는 바깥대상의 전체상(全體相)이나 세부상(細部相)을 붙잡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감각기능을 미처 단속하지 못해 일어나게 될 불선한 법, 탐애와 근심이 생겨날 연(緣)을 물리치기 위해 진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관기능을 단속하고 억제한다.48)


감각기능들을 방호한다고 해서 감각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는, 감각기능의 전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설사 가능하다 해도 진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왜냐하면 번뇌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기능 통어의 열쇠는 “전체상이나 세부상을 붙잡지 않는다”는 말에 담겨 있다. ‘전체상(相 nimitta)’이란 대상의 대체적인 겉모습인데, 그 중에서도 이 겉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때묻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는 바탕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세부상(anubyanjana)’은 대상의 덜 두드러진 특징이다. 만약 감각기능을 통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마음은 감각의 영역들[六外處]을 거침없이 쏘다니게 된다. 먼저 ‘전체상’을 붙들 것이고 그러면 번뇌가 발동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세부상’들을 탐색함으로써 번뇌가 늘어나 무성해지도록 만든다.


감관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감관이 감각 영역들과 조우할 때 마음챙김과 분명한 이해[正念正知]가 개입될 필요가 있다. 감각의식은 각기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는 순간적 인지 활동들이 연속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이 순차적 계기의 시발 단계는 자동적 기능들의 형태로 일어난다. 처음에는 마음이 대상 쪽을 향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포착한다. 그 다음에는 지각이 들어서는 것을 허용해서 대상을 검토하고 그 대상을 식별한다. 이 식별에 곧바로 이어 한 공간이 열리고 그 안에서 대상에 대한 자유 평가가 이루어져서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 선택하게 된다.


이때 마음챙김을 확고히 하고 있지 못하면 표출될 기회를 찾아 부풀어 있던 여러 잠재적 번뇌들이 밀고 나와서 그릇된 고려를 유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대상의 겉모습을 붙잡을 것이고, 다시 그 대상의 중요치 않은 특징을 탐색할 것이고, 마침내는 번뇌에 기회를 내주게 될 것이다. 탐욕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드는 대상에 정신이 팔리게 될 것이고, 싫은 마음 때문에 마뜩찮은 대상은 뿌리칠 것이다.


그러나 마음챙김을 감각이 이루어지는[觸] 현장에 들이댈 경우에는 잠자고 있는 번뇌가 인지과정에 의해 자극되어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진전되기 전에 그 싹을 잘라버릴 수 있다. 마음챙김은 감각되는 단계에 마음을 동결시켜버림으로써 장애를 저지한다. 마음챙김을 통해 특정 대상에 알아차림을 쏟아 부음으로써 마음이 입력된 자료를 탐?진?치에서 생기는 관념들로 윤색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렇게 되면 이 명료한 알아차림을 길잡이로 삼아서 마음은 옆길로 흐르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에 이를 수 있다.


(2) 이미 일어난 불선한 상태를 버리기


이 문에서 제자는 이미 일어난 악하고 불선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의지를 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49)


감각통어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뇌는 여전히 떠오를 것이다. 번뇌는 마음-연속체의 밑바닥으로부터, 과거 축적물의 매립층으로부터 부풀어 올라 불선한 생각과 감정으로 응고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새로운 종류의 노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일어난 불선한 상태를 저버리려는 노력인바, 줄여서 ‘버리려는 노력(pah?nappadh?na)’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는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 악의, 또는 해악심의 생각들, 또는 그 외의 어떤 나쁘고 불선한 법들도 간직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생각들을 버리고, 그런 생각들을 추방하고, 그런 생각들을 파괴하고, 그런 생각들을 사라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50)


마치, 유능한 의사가 갖가지 병에 알맞게 여러 약을 쓰듯 부처님은 갖가지 장애에 대해 여러 가지 대응수단을 마련해 두셨는데 그 중 어떤 것은 두루 쓰이는 것이고 어떤 것은 특정 장애에 특히 잘 듣는다. 한 중요한 경에서 부처님은 산만한 생각을 쫓아내는 다섯 가지 기법을 설명하신다.51) 그 첫 번째가 번뇌로 더럽혀진 생각을 그와 정반대되는 건전한 생각으로 몰아내는 방식인데 마치 목수가 썩은 나무못을 뽑아내기 위해 새 못을 그 위에 처박는 것과 유사하다. 구체적으로는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하여 각각 특수처방을 써서 각 장애를 약화시켜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해 특별히 강구된 일련의 명상법이 그것이다. 이 요법은 어떤 장애가 솟아올라 명상주제에 대한 집중을 중단시킬 때마다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장애가 반복해서 자신의 수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일 때 그 장애에 대처하기 위한 명상 주제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장애가 맹위를 떨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채택한 교정수단일지라도 그것이 나름대로 효율적인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짧은 기간만이라도 그 방편주제를 근본주제로 삼아서 어느 정도 친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욕구’에 대처하는 요법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무상에 대한 명상이다. 집착대상을 고정불변한 것이라 믿는 맹목적 가정이야말로 집착을 떠받치고 있는 지주인데, 이 명상은 그런 가정을 쳐서 떨어낸다. 관능적 욕망이라는 특정형태의 욕구에 대해서는 가장 효력 있는 해독제가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몸의 비매력적 측면[不淨觀]에 대한 숙고이다.


‘악의’에 대한 적절한 치유책은 모든 존재의 안녕과 행복을 빌면서 애타적 기원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 방사함으로써 미움과 노여움의 모든 흔적을 씻어버리는 이른바 자비(mett?)에 대한 명상[慈悲觀]이다.


‘나태함과 혼침’을 쫓기 위해서는 힘을 북돋우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몇 가지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밝은 빛 덩어리를 심상(心像)으로 떠올리거나, 일어서서 한동안 활기차게 행선을 하거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 것 등이다.


‘들뜸과 자책’의 경우에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월한 대상으로 마음을 돌림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추천되는 방법이, 들고 나는 호흡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호흡관이다. ‘회의적 의심’의 경우 특별한 처방은, 상세한 검토이다. 즉 의문을 일으키고 문제점을 제기하고, 모호한 점들이 분명해질 때까지 가르침을 연구하는 것이다.52).


산만한 생각을 쫓아내는 다섯 가지 기법 중 이 첫 번째 것은 각각의 장애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책을 두어 일대일로 대처하는 데 비해 다음 네 가지 기법은 모든 장애에 대해 두루 효력을 발하는 치료법이다.


두 번째로 거론되는 기법은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버리기 위해 잘못을 부끄러워함[hiri, 慙]과 도덕적 두려움[ottappa, 愧]이라는 군세(軍勢)를 동원하는 것이다. 즉 그 생각이 수치스럽고 저열한 것이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또는 그 생각이 가져올 달갑지 않은 결과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여 마음속에서 혐오감이 일어나 그 생각을 몰아내게 될 때까지 계속한다.


세 번째 기법은 의도적으로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다. 불선한 생각이 일어나 끈질기게 주의를 끌면, 거기 빠지지 말고, 마치 보기 싫은 장면으로부터 눈을 돌려 눈길을 피하거나 눈을 감아버리는 것처럼,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그 생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네 번째 기법은 이와 반대되는 접근방식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나의 관찰 대상으로 삼아 바로 마주하여 그 성질을 검토하고, 그 원인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생각은 가라앉고 결국은 사라진다. 불선한 생각은 마치 도둑과 같아서 그의 행동을 모른 체 하면 문제를 일으키지만, 잘 살피고 있으면 활동을 그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기법은 억누르는 것인데 이는 최후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마치 강자가 약자를 땅에 쓰러뜨린 후, 내리 눌러서 꼼짝 못하게 하는 것처럼, 불선한 생각을 의지력으로 철저히 제압함으로써 다스리는 방법이다.


이 다섯 가지 기법을 능숙하고 분별력 있게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생각의 모든 통로를 지배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마음의 노예가 아니라 마음의 주인인 것이다. 그 어떤 것이든 하고 싶은 생각은 하게 된 것이다. 그 어떤 것이든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은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어쩌다 불선한 생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즉시 몰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벌겋게 단 냄비가 우연히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을 순식간에 증발시켜버리듯이.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어나게 하기


이 문에서 제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어나게 하기 위해 의지를 일으킨다.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53)


바른 노력은 번뇌의 제거와 동시에 선한 마음상태의 개발이라는 과업도 수행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일이 포함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어나게 하는 것과, 이미 일어난 선한 상태를 성숙시키는 일이다.


이 둘 중 첫 번째 것은 계발하려는 노력(bh?van?ppadh?-


na)이라고도 한다. 계발해야 할 법은 적정[止]과 직관[觀], 사념처, 팔정도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부처님은 그 중에서도 마음챙김[念覺支], 현상의 검토[擇法覺支], 정진력[精進覺支], 희열[喜覺支], 편안함[輕安覺支], 집중[定覺支], 평온[捨覺支]으로 구성된 ‘깨달음의 일곱 인자[七覺支 satta bojjha?g?]’라 불리는 이 한 벌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홀로 있음[遠離 viveka], 욕망을 멀리 함[離欲 viraga], 그침[滅 nirodha]을 바탕으로 삼고 놓음[解脫 vossagga]으로 끝나는 깨달음의 인자들을 계발하나니 즉 마음챙김?현상의 검토?정진력?희열?편안함?집중?평온으로 구성되는 깨달음의 인자들이다.54)


이 일곱 가지 상태[法]는 깨달음으로 이끌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어지게 하기 때문에 ‘깨달음의 인자들’로서 한 벌을 이룬다. 팔정도의 예비 단계에서는 그들은 실현을 위해 길을 준비하고 끝에 이르면 깨달음의 구성인자로 남는다. 깨달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완벽한 통찰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일곱 가지 인자들이 모든 속박을 끊어내고 고로부터의 최종적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깨달음의 길은 마음챙김[念覺支]으로 시작한다. 마음챙김은, 모든 주관적 해석, 해설 및 주관투영을 벗겨내 버리고, 지금 이 순간에 현상들을 밝게 조명함으로써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위한 정지작업을 한다. 마음챙김이 발가벗은 현상들을 초점 앞에 가져다 놓으면 검토의 인자[擇法覺支]가 들어서서 그것들의 특성과 조건, 그리고 진행방향을 조사한다. 마음챙김이 기본적으로 수용적인 데 비해서 검토는 현상의 기본 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현상을 과감하게 탐사, 분석, 해부하는 능동적 인자이다.


조사 작업은 정진력[精進覺支]을 요한다. 깨달음의 세 번째 인자인 이 정진력은 세 단계로 발전하는데, 첫 번째 시초단계의 정진력은 무기력을 떨쳐내고 초기 열정을 일으킨다. 관하는 공부가 진전되면서 정진력은 관성을 받아 두 번째 꾸준함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는 해이해지는 일이 없는 가운데 수행을 진척시킨다. 끝으로 정점에 이르면 정진력은 제 삼 단계인 불굴의 단계에 도달한다. 이 단계에서 정진력은 장애들이 손을 쓸 여지가 없도록 무력화시켜 놓으면서 관 공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정진력이 증장되어 갈수록 깨달음의 네 번째 인자인 희열[喜覺支]이 촉진된다. 대상을 즐거워하는 감흥인 이 희열이 점차로 증가되어 마침내 황홀경에까지 고조된다. 극도의 행복감이 온 몸에 퍼지고 마음은 기쁨으로 달아오르며, 열성과 확신이 한층 더 강해진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은 힘을 북돋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한 가지 흠을 가지고 있다. 들뜸에 가까운 흥분상태를 빚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더욱 밀고 나가면, 희열은 잦아들고, 고요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편안함이라는 다섯 번째 인자[輕安覺支]가 일어남을 알 수 있게 된다. 희열은 남아있긴 하지만 이젠 숨이 죽어 얌전해지고 관 공부는 냉정한 침착성을 지니고 진전된다.


경안이 무르익으면 여섯 번째 인자인 정[定覺支], 즉 마음이 한 점에 모여 통일을 이루는 상태가 된다. 집중[定]이 깊어지면 다음에는 마지막 깨달음의 인자가 우위를 이어받는다. 그것은 평온[捨覺支]으로, 흥분과 무기력[遲鈍]이라는 두 가지 결함에서 벗어난 내적 안정과 균형이다. 무기력이 우세할 때는 정진력을 일으켜야 하고, 흥분이 우세할 때는 제어력을 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결함을 극복하고 나면 수행은 별달리 신경을 안 써도 평탄하게 전개될 수 있다. 평온한 마음은, 마치 말들이 일정한 속도로 가고 있기 때문에 더 재촉하거나 늦출 필요가 없이 그저 마차에 편안히 앉아서 스쳐가는 경치를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는 마부에 비유할 수가 있다. 평온에는 이와 같이 ‘방관(傍觀)’의 성질도 있다. 다른 인자들이 균형을 유지하면 마음은 현상들의 놀음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태연히 있을 수 있다.


(4) 이미 일어난 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완전하게 만들기


이 문에서는 제자는 이미 일어난 선한 법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사라져 버리도록 방치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키우고 성숙시키고 최대한 완벽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의지를 돋운다. 그래서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55)


네 가지 올바른 노력 중 이 마지막 것은 이미 일어난 건전한 요소들을 유지해서 성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지하려는 노력(anurakkha?appadh?na)’이라 불리는 이것은 ‘이미 일어난 유익한 집중대상을 마음속에 확고하게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설명된다.56) 이렇듯 대상을 방호하는 공부는 깨달음의 일곱 가지 인자로 하여금 안정을 얻게 하고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 나가서 종국에는 해탈을 실현시키는 깨달음으로 끝난다. 이것은 바른 노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수 없는 생에 걸친 그 개인의 정진 업이 마침내 실현단계에 이르러 맛보는 목표의 달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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