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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팔정도(3)

(3)

욕망을 버리려는 의도


부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것이라 하셨다. 세상의 길은 욕구의 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깨닫지 못한 중생은 바깥 대상에서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그 대상을 좇아 행복을 갈구하며 욕구의 흐름에다 자신을 내맡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버림의 소식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길이다. 욕구의 유혹에 저항해야 하고 종국에는 욕구를 버려야 한다고 하신다. 욕구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이기보다는 고의 뿌리이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23). 따라서 갈애와 그 충동질을 외면해 버리는 이 놓음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가정생활을 떠나 절로 들어가도록 요구하지도 않으셨고 또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당장 포기하라고 이르지도 않으셨다. 무릇 버림을 실천함에 있어 어느 정도 버려야 할지는 각자의 성향과 처지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엄정한 수행 지침으로 분명한 것은 해탈을 증득하려면 갈애를 완전히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갈애는 극복하는 그만큼 공부의 진척은 촉진되기 마련이다. 물론 욕구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그 필요성은 엄존한다. 갈애가 고의 원인인 이상 고를 끝장내려면 갈애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음을 버림 쪽으로 향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집착을 놓아버리려 노력하는 바로 그때, 우리는 강력한 내적 저항에 부닥치게 된다. 마음은 집착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장악력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손에 넣고, 거머쥐고 있는 일에 젖어온 우리 마음이 단순한 의지작용 하나로 단숨에 이런 습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버림의 필요성이야 잘 알고 있고 집착을 버리기도 원하겠지만, 막상 그 필요성이 현실로 다가오면 마음은 뒤로 물러나 욕구의 손아귀 안에서 안주하고 계속 즐기려 든다.


그래서 욕구의 족쇄를 과연 어떻게 부숴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부처님이 억압적 방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시는 일은 결코 없다. 그래서 마음이 공포와 혐오로 가득 찬 채로 욕구를 몰아내려 덤비는 것과 같은 방법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보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제를 표면 아래로 가라앉힐 뿐이고 거기서 문제는 계속 뿌리를 뻗는다. 마음을 욕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부처님께서 일관되게 제시하시는 도구는 이해력이다. 진정한 버림은, 마음속으로 미련을 가진 채 억지로 욕구를 포기하도록 다그칠 일이 아니라 욕구가 더 이상 우리를 묶을 수 없도록 그것을 보는 눈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욕구의 성질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주의를 기울여 욕구의 성질을 면밀히 점검해 나가면 싸울 필요도 없이 욕구는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욕구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여 그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려면 욕구가 어김없이 고와 밀착돼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갈망하던 것이 이루어져 만족해하다가는 또다시 무엇을 갈망하게 되는, 모든 욕구의 순환 반복 현상은 결국 우리들이 사물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린 것이다. 우리가 욕구에 매인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욕구를 행복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욕구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면 그 힘은 줄어들 것이고 그 결과는 마침내 욕심 놓음 쪽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로운 숙고[如理作意 yoniso manasik?ra]’이다.


 인식이 생각에 영향을 미치듯 똑같이 생각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평소 우리들의 인식에는 ‘지혜롭지 못한 숙고(ayoniso manasik?ra)’가 섞여 있다. 보통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만 보거나 당장의 관심과 욕구에 이끌려 대충 훑어볼 뿐,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그 뿌리를 파 보거나 장기적으로 미칠 결과를 철저히 탐구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위의 기조를 이루는 어떤 숨어 있는 특정한 정신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것들이 가져올 결과를 탐구하고, 우리의 목표가 지니는 가치를 평가해 보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고려, 즉 ‘지혜로운 숙고’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점검할 때 우리들 관심은 무엇이 즐거운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참된 것이냐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우리는 편안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참된 것을 찾아나갈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안녕은 편안한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참된 쪽에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욕구에는 항상 고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고가 아픔이나 짜증 같이 위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불만이라는 끊임없는 중압감으로 깔려 있는 경우도 잦다. 어떻든 욕구와 고, 이 둘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서 욕구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그 전 과정을 살펴보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욕구가 처음 고개를 처들 때에는 부족감, 즉 결여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애를 쓴다. 만약 이런 노력이 실패하면 우리는 좌절과 실망, 때로는 절망마저 느끼게 된다. 성공의 즐거움 역시 이런 고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처럼 얻은 자리를 다시 잃게 될까봐 걱정한다. 우리의 지위를 확보하고 우리의 영역을 보호하고 더 많이 얻고, 더 높이 올라서고, 더 확고한 지배체제를 세우고 싶은 욕망에 쫓기게 되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이렇듯 욕구가 내세우는 수요는 끝없이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개개의 욕구는 그 대상이 영원하기를 갈구한다. 우리가 얻은 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욕구의 대상들이 사실은 영원하지 못한 것이다. 부(富)나 권력은 사라져버리고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 헤어짐의 고통은 집착의 강도에 비례한다. 강한 집착은 큰 고통을 가져오고 작은 집착은 적은 고통을 가져오며 집착이 없으면 고통도 아예 없다.24)


욕구에 내재해 있는 고에 대해 관(觀)하는 것은 마음을 버림 쪽으로 돌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버림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곧바로 관하는 것이다. 욕구에서 버림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혹자는 행복으로부터 슬픔으로, 풍요로부터 빈곤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상상할지도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칠고 뒤엉킨 쾌락에서 고양된 행복과 평화로, 노예 상태로부터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주인의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욕구는 궁극적으로 공포와 슬픔을 낳지만 욕심 놓음은 ‘두려울 것이 없음’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에 더해서 버림은 계?정?혜 삼학(三學)이 제각기 단계적 임무를 완수하도록 촉진시켜준다. 다시 말해 계는 정을 위한 기초가 되고, 정은 혜를 위한 기초가 되며, 또 혜는 더 높은 수준의 계를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버림은 행위를 순화하고 집중력을 도우며 지혜의 씨를 키운다. 사실 수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전 과정은 놓음이 발전해가는 과정이며, 놓음의 궁극 단계인 열반, 즉 ‘존재의 모든 기반을 놓아버림[棄捨](sabb'?padhi-

pa?inissagga)’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렇듯 욕구의 위험과 버림의 이로움을 체계적으로 관하게 되면 점차로 우리 마음을 욕구의 지배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집착은 늦가을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떨어져나간다. 이런 변화가 갑자기 오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수행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오기 마련이다. 거듭거듭 관하고 있는 동안에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쫓아내고 버림의 의도가 욕구에 찬 의도를 제거하게 된다.


선의를 베풀려는 의도


선의의 의도는 악의의 의도, 노여움과 성냄에 지배되는 생각과 대치한다. 욕구의 경우처럼 악의를 다루는 데도 두 가지 적절치 못한 방식이 있다. 한 가지는 행동이나 말로 분노나 혐오를 표현함으로써 악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 접근방식은 긴장을 당장 해소하고 분노를 자신의 몸 밖으로 뱉어버리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위험을 불러온다. 이런 접근 방식은 남의 원한을 사고 보복을 불러오며 적을 만들고 인간관계를 악화시키고 불선업을 생기게 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악의가 몸 밖으로 떠나기는커녕 몸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계속 망가뜨리게 된다. 다른 한 가지 접근 방식은 악의를 억압하는 것인데 이 또한 악의의 파괴적인 힘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이 방식은 다만 악의의 힘을 돌려서 안으로 밀어 넣는 꼴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이 힘은 자기비하, 만성우울증, 이성을 잃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향 등의 이상한 형태로 변하게 된다.


악의에 대응하는 처방으로,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부처님께서 권하신 처방이 빠알리어로 ‘멧따(mett?)’라고 하는 자비심이다. 이 말은 ‘친구(mitta)’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일상적인 우정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는 차라리 이 말을 ‘사랑어린 친절[loving kindness 慈愛]’이란 복합어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이 복합어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짙은 사랑의 느낌을 그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진심어린 관심으로 외사(外射)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가장 잘 살려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애’는 단순한 감상적 선의도 아니고 도덕적 의무감이나 신의 뜻에 양심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의무감과도 무관해야 하며 자발적인 따뜻함을 특성으로 하는 깊은 내면적 느낌이어야 한다. ‘자애’의 염이 절정에 달하면 범천이 거주하는 저 높은 세계[Brahmavih?ra]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그곳은 일체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는 염력을 사방으로 방사(放射)하는 염(念) 중심의 거룩한 세계이다.


‘자애’가 뜻하는 사랑은 감각적 사랑과 구별되어야 하며 물론 특수한 개인적 관계에 담긴 사랑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감각적 사랑은 일종의 갈애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개인적 관계에 얽힌 사랑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집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쾌락이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이나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자아상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애정의 느낌이 자기와 관련된 요소를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범위는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애정은 특정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 성원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는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애’가 담고 있는 사랑은 몇몇 개인들에 대한 특정한 관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자기와의 사적 관련성이 전혀 없다. 우리는 남들을 향한 자애의 염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 자애의 마음이 완전한 것이 되려면 아무런 제한이나 유보 없이 일체 중생에게 퍼져나가는 보편적 마음상태로 계발되어야 한다. 자애에 이런 우주적 차원의 보편성을 주입하는 길이 바로 명상 훈련을 통해 자애를 계발하는 방식이다.


아무런 훈련 없이 저절로 생기는 선의의 감정은 진심(瞋心)에 대한 치유책으로 삼기에는 너무 산발적이고 범위도 제한되어 있다. 사랑을 의도적으로 계발한다는 발상은 억지스럽고 기계적이며 계산적인 것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자연발생적인 것일 때, 일부러 불러일으키거나 노력해서 생겨난 것이 아닐 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자발적 사랑이 우러나오게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불교에서 문제 삼고 있을 뿐이다. 자발적으로 사랑하라고 마음에다 대고 명령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것을 계발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실천을 요청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이 방법은 시작 단계에서는 다소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행을 해나가는 동안 사랑의 느낌이 마음속에 차츰차츰 깊이 배어들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성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자애의 계발 방법이 ‘자애에 대한 명상(mett?-bh?van?)’으로 불교 명상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행은 자기 자신을 향한 자애의 계발부터 시작한다.25) 자애의 첫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삼는 이유는 진정한 자애는 자기 자신에게 참다운 사랑을 느끼는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는 분노나 적개심의 대부분이 기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부정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애가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방향을 돌리면 이 자애가 우리의 부정적 태도가 만들어 놓은 두꺼운 껍질을 녹아내리게 해서 친절과 동정이 밖으로 흘러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자기를 향해서 자애의 감정을 키워가는 데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는 이를 다른 사람들을 향해 펴는 일이다. 자애의 확장은 남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전이(轉移)과정, ‘나’를 개아 속에 가두어두지 않고 그 영역을 넓히며, 나를 남과 동일시하는 과정이다. 이런 전이(轉移)는 방법론상 순전히 심리적인 것으로서 모든 존재에 보편적 자아가 내재해 있다는 신학적 내지는 형이상학적 주장들과는 전연 무관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이는 자기 내면 반조과정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이 전이는 나 아닌 남의 주관을 공유하여 상상으로나마 남의 내면적 관점에서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단순하고도 단도직입적인 투사 과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남들의 주관을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이 세상을 적어도 상상력에 의해서나마 자기 자신의 내면적 시각에서 경험하게 된다. 이 절차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 존재의 기본적 욕망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우리 자신 속에서 이런 욕구를 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모든 중생들이 이 같은 근본 욕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누구나 행복하고 안정된 가운데 잘 지내고 싶어 한다. 남들을 향해 자애(mett?)를 키우려면 먼저 행복을 바라는 그들의 내심을 상상력을 통해 공유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향한 나 자신의 욕구를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 나의 이 욕구를 남들도 매한가지로 가지고 있다는 점을 마음속에 되새겨서 체득하도록 한다. 그러고는 우리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와서 그들에게 자애를 뻗쳐 보내며 그들의 궁극적 목적이 성취되기를, 그들이 잘 살기를, 행복하기를 바라는 원력을 펴는 것이다.


자애를 방사(放射)해내는 방법은 처음에는 특정 범주에 속하는 개인들에게 자애의 염(念)을 보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 범주는 자기와 가까운 쪽에서부터 점차적으로 멀리 떨어진 순서로 나아간다. 처음에는 부모 중 어느 분이나, 아니면 스승과 같이 소중한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에는 어느 한 친구로, 다음에는 자기와 별 관계도 없는 어떤 사람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이런 범주의 유형은 나와 그들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긴 하지만 여기서 계발해야 할 사랑은 그런 관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욕구에 바탕을 두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각자에게 그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고 “그가 잘 있기를! 그가 행복하기를! 그가 평화롭기를!”하고 바라는 생각을 방사한다.26) 그 사람에게 선의와 친절의 따뜻한 느낌을 일으켜내는 데 성공한 다음, 다른 사람에게로 자애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개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더 큰 단위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모든 친근한 사람들을 향해, 모든 무관한 사람들을 향해, 모든 적대적인 사람들을 향해, 자애를 계발하려 노력한다. 그 다음에는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위, 아래 등 여러 방향으로 펴나가는, 방향에 따른 펼침에 의해 자애가 넓어질 수 있고, 그러고는 아무런 구별 없이 모든 존재에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마지막에는 온 세상을 ‘방대하고, 숭고하고, 한량없고, 적의가 없고, 성냄이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채운다.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는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난폭한 생각에 반하여 일어난, 연민(karu??)에 이끌리는 생각이다. 연민은 자애를 보완해준다. 자애는 남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특성을 갖는 데 비해서 연민은 남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특성을 가지며 이 기원 역시 일체 중생에게로 한량없이 뻗어나가야 할 성질의 것이다. 남들의 주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내면세계를 깊이, 그리고 총체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가 우리들 자신이나 마찬가지로 고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통과 두려움, 슬픔, 그 밖의 여러 가지 형태의 고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연민이 생겨난다.


연민을 명상 수련의 한 방식으로 삼으려면 실제로 고통 받고 있는 그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연민의 정이란 실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고통을 직접 목격한대로, 아니면 상상력을 써서 그려보는 식으로 깊이 숙고한다. 그러고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고’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내 마음에 비추어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면서, 가슴 속에서 강한 연민의 정이 솟아오르게 될 때까지 깊은 숙고를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 감정을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개인들에게도 돌려가며 적용시켜 그들이 각각 어떻게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지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따뜻한 연민의 정을 방사한다. 연민의 폭과 밀도를 더 높이려면 유정들이 접하는 가지가지 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연민을 이렇게 키우기 위해서는 고의 여러 가지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가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있다. 늙음을 피할 수 없는 이 존재를, 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을 비켜갈 수 없는, 그리고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 등등에 지배당하게 되어 있는 일체의 존재성을 관한다.


연민을 일으키는 공부를 함에 있어서 먼저 직접 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관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성공을 이룩한 후에 우리는 다시 부도덕한 수단을 통해 얻은 행복을 눈앞에서 즐기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복을 누리는 듯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문제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비록 그들이 내면적 고민의 흔적을 표출하지는 않지만 결국 악행의 쓰디쓴 과보를 거두게 될 것이고 그 과보가 심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결국 이렇게 해서 우리는 관법의 적용범위를 일체 살아있는 유정들을 포함하게끔 넓힐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일체 유정이 자신의 탐진치에 떠밀려 생사를 돌고 돌면서 윤회의 보편고에 매여 있는 모습을 우리는 관하게 된다. 전연 낯선 존재들에 대해 연민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을 경우에는 ‘시작이 없는 저 윤회의 길고 긴 과정에서 한 때 나의 부모형제 자식이 된 적이 없었던 사람을 찾기는 어려우리라’는 부처님 말씀을 상기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버림, 선의, 무해의 세 가지 올바른 의도는 욕구, 악의, 해악의 세 가지 그릇된 의도를 저지한다. 이런 올바른 생각들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성찰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성찰법은 단순히 이론적 섭렵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발되어야 할 실다운 방법으로 교수되어 왔다. 버림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고와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선의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얼마나 행복을 바라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무해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얼마나 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불선한 생각은 마음속에 박혀 있는 썩은 나무못과 같고 선한 생각은 이것을 대체하기에 알맞은 새 못과 같다. 실제적 성찰행위는 새 못을 대고 두들겨 박아 낡은 못을 쳐낼 때의 망치치기에 해당한다. 새 못을 박는 일이 곧 수행인 바 성공을 거두기까지 이러한 수행을 꾸준히 거듭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성공을 보증하셨다. 무엇이든 우리가 자주 마음을 쓰면 그것이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음란하거나 적의가 담겼거나 위해를 가하려는 생각을 자주 품으면 욕구, 악의, 해악이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고, 그 반대쪽으로 마음을 자주 쓰면 버림, 선의, 무해가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중부』19경)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는 방향은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 와서 인생의 매 순간순간에 일으키게 되는 의도에 반영된다.


Ⅳ. 바른 말[正語 samm? v?c?], 바른 행위[正業, samm? kammanta], 바른 생계[正命 samm? ?jiva]


팔정도의 다음 세 항목인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는 팔정도를 계?정?혜로 나눌 때 그 첫 번째인 계온(戒蘊, s?lakkhandha)에 해당하며 따라서 계로서의 공통된 성격을 살리는 의미에서 이들을 한꺼번에 다루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록 이 원칙들이 비도덕적 행위를 억제하고 선행을 증진하는 것이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윤리적이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항목들은 단순히 행위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순화를 돕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다운 삶을 재는 척도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윤리의 문제는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특유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팔정도라는 특수한 문맥에서는 윤리적 원칙은 고로부터의 해탈이라는 팔정도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에 비추어 보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수련[戒]이 팔정도에 어울리는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처음 두 항목인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의 바탕 위에서 다루어져야 하고, 다시 집중[定]과 지혜[慧] 수련으로 나아가는 길잡이 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도덕적 수행이 계?정?혜 삼학 중에서 맨 처음 것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계행은 다른 수행의 성공을 위해서 필수적이며 모든 팔정도 수행의 기반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위험을 보라”(『우다나』4장. 1) 하시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킬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셨다. 한 수행승이 부처님을 찾아가서 ‘수행에 대한 말씀을 간략하게 해주십사’ 청하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선법(善法)의 시작인 청정한 계행과 바른 견해를 확립하라. 너의 계행이 청정해지고 견해가 곧아지면 다음으로 사념처를 닦아야 할 것이다.”(『상응부』47상응 3경)


우리가 ‘계’라고 번역하는 빠알리어 ‘실라(s?la)’는 경전에서 중첩되는 여러 의미들로 나오고 있는데 모두 바른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맥락에서는 이 말이 도덕적 원칙에 부합되는 행위를, 또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원칙 그 자체를, 또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원칙을 준수한 결과로 생기게 되는 성격 면에서의 덕스러운 자질을 의미한다. 교훈이나 원칙이라는 의미에서의 ‘실라’는 윤리적 수련의 형식적 측면을 나타내고, 덕성으로서의 ‘실라’는 활기찬 정신을, 바른 행위로서의 ‘실라’는 현실상황으로 드러나는 덕성을 의미한다.


‘실라’는 ‘불선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그만 두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런 정의는 외형적 행동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피상적인 것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러나 다른 설명들도 있어서 이런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뿐 아니라 이 말이 처음 언뜻 이해한 것보다 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예컨대, 아비담마에서는 ‘실라’를 심적 요소로서의 ‘그만 둠(viratiyo)’, 즉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와 대등한 것으로 보는데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도덕 지침인 계의 준수를 통해 실제로 계발되는 것이 결국은 마음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게 된다. 따라서 ‘실라’의 수련은 사회적으로 해로운 행위를 금하는 ‘공적인’ 이익도 가져오지만 정신적 순화라는 개인적 이익도 수반하여 번뇌가 우리에게 이런저런 행동노선을 따르라고 명령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영어의 ‘morality(도덕)’라는 말과 그 파생어들은 불교의 ‘실라’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의무와 구속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함축적인 의미는 아마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서양 윤리학 특유의 산물일 것이다. 불교는 비신학적 구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윤리는 ‘복종’이 아닌 ‘조화’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주석서들을 보면 ‘실라’를 ‘사마다나(sam?dh?na)’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은 ‘조화’ 또는 ‘동위화(同位化)’를 의미한다.


계를 준수하면 사회적 차원, 심리적 차원, 업(業)의 차원, 선정의 차원에서 조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계의 원칙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를 맺도록 도와준다. 제각각 여러 갈래로 서로 다른 개인적 이해와 목표를 가지고 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군중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사회질서 속으로 융화시키며, 개인들 간의 갈등도 비록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감소시킬 수 있는 효과는 있다. 심리적 차원에서는, 계의 준수가 마음에 조화를 가져다주고, 도덕적 비행으로 인한 죄의식과 자책 때문에 생기는 심적 갈등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업의 차원에서는, 계의 준수가 업의 보편적 법칙과 조화를 이루고 그리하여 장차 윤회과정에서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 마지막으로 선정의 차원에서 보면, 계는 마음의 예비적 순화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이렇게 이루어진 마음의 순화는 더욱 심도 있게, 더욱 철저하게 적정(寂靜)과 통찰력을 체계적으로 계발해 나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계(戒) 수련의 항목들은 간단히 정의할 때에는 대개 무엇을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적 언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에는 잘못을 삼가는 것 이상의 뜻이 있다. 계에 포함된 각 원칙들은, 곧 보겠지만, 실제로 두 가지 측면을 갖추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수행 전반에 필수적인 것이다. 첫째는 불선을 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피함(v?ritta)’이라 하고 뒤의 것은 ‘실행(c?ritta)’이라 한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수련의 시작 단계에서는 피하는 쪽을 강조하신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불선을 삼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수행의 단계를 순서대로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법구경』의 유명한 게송에서 “모든 악행을 멀리 하는 것, 선을 계발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183 게)”라고 하여 이들 단계가 시간적이기 보다는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적시되어 있다. 다른 두 가지 단계, 즉 선을 계발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단계도 물론 충분한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여러 단계를 밟아 계의 수련에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선을 피하겠다는 결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결의가 없이 선한 자질부터 계발하려고 서둘다가는 결과적으로 그 자질은 뒤틀리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계의 수련은 밖으로 행동이 드러나는 두 가지 주요 통로인 말과 몸뿐 아니라 생계를 영위하는 방식이라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관심 영역을 관장한다. 그래서 이 수련에는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이제 팔정도를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순서에 따라 이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기로 하자.


바른 말[正語 samm? v?c?]


부처님은 바른 말을, 거짓말[妄語] 멀리하기, 말전주[兩舌] 멀리하기, 거친 말[惡口] 멀리하기, 쓸데없는 말[綺語] 멀리하기의 네 가지로 나누셨다. 말이 미치는 효과는 신체적 행위의 효과만큼 당장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중요성과 잠재력을 가벼이 보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말이나 그 방계격인 글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사실 동물과 같이 언어 능력이 없는 존재의 경우에는 몸짓이 중요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어로 의사를 소통하는 인간에게는 말이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말로 인해 인생을 망칠 수도 있고 적을 만들 수도 있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반면, 지혜를 줄 수도 있고 분열을 화해시킬 수도 있고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특히 현대사회에 와서는 의사소통의 수단, 속도, 범위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 확대됨에 따라 말의 긍정, 부정 양면의 효과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말이든 글이든 언어로 의사 표시를 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특성이다. 이 점에서 보더라도 이 독특한 능력을 인간의 장점을 더 높이는 쪽으로 잘 사용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귀한 능력이 인성후퇴의 징표로 쓰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다.


(1) 거짓말 멀리하기(mus?v?d? verama??)


이 문[佛門]에서 수행자는 거짓된 말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 그는 진실을 말하며 진실에 헌신하며 신뢰할 수 있고 믿음이 가며 사람들을 속이지 않는다. 모임에 가서든 또는 대중들 사이에서든, 또는 친척들이 있는 곳에 가서든, 조합 또는 왕궁에 가서든 증인으로 불려 아는 바를 증언하도록 요구받으면 그는 대답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또 아는 경우에는 “나는 안다”라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보았으면 “나는 보았다”라고. 이렇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도, 또는 어떤 이익을 위해서도 결코 고의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27)


부처님의 이 말씀은 계율의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 두 면을 다 드러내고 있다.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 측면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적극적 측면이다. 이 계율을 어기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요소는 남을 속이려는 의도이다. 어떤 사실을 정말 그렇다고 믿으면서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경우는 속이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에는 속이려는 의도가 공통적으로 들어있지만, 그것은 동기가 탐욕인지 미움인지 미혹인지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탐욕이 주된 동기인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 물질적 부나 지위, 존경심이나 칭찬 등의 사적인 이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 속임수를 쓰게 된다. 미움이 주된 동기인 경우에는 악의적인 거짓말, 다시 말해 남을 해치거나 손상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짓말의 형태를 띤다. 미혹이 주된 동기인 경우에는 비합리적인 거짓말, 충동적인 거짓말, 재미있는 과장, 농담으로 하는 거짓말 등으로 그 결과가 비교적 덜 해로운 것이 된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이토록 나쁜 것으로 말씀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거짓말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응집력을 해친다.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살려면 상호신뢰의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들이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된다.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불신을 조장할 경우, 거짓말이 만연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사회적 결속은 해이해지고 무너져 내려 사회생활은 혼돈상태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회구성원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개인적 면에서도 거짓말이 초래하는 결과가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이에 못지않게 파괴적이다. 거짓말은 그 성질상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거짓말을 하고 자기가 한 말을 믿지 않는 눈치가 보이면 자신의 신뢰도를 방어하기 위해 사태를 앞뒤가 맞도록 꾸미려들고 그래서 부득이 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반복 진행되다 보면 거짓말들이 서로 아귀를 맞추기 위해 가지를 쳐서 점점 더 뻗어가게 된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좀체 헤어날 수 없는 거짓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런 양태를 보면 거짓말은, 자아라는 주관적 환상이 빚어지는 과정, 즉 유신견(有身見 sakk?yadi??hi)이라는 착각을 둘러싼 전 과정을 축소시켜 놓은 전형적 예인 셈이다. 양쪽 경우 모두 자신만만한 거짓말 창조자가 자신의 속임수에 휘말려들어 결국은 속임수의 희생물이 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부처님께서, 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신의 어린 아들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해주신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라훌라에게로 오셔서 물이 약간 담긴 대야를 가리키며 물으셨다.


“라훌라야, 이 대야에 조금 남은 물이 보이느냐?”


“네, 보입니다.”라고 라훌라는 대답했다.


“라훌라야,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문의 정신적 성취(s?manna)도 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이 되느니라.”


이어서 부처님은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대야를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라훌라야, 물이 버려진 것이 보이느냐?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자는 자신이 쌓은 정신적 성취를 이처럼 쏟아 내버리고 있는 것이니라.”


부처님은 다시 물으셨다.


“너는 이 대야가 이제 비어 있는 게 보이느냐? 거짓말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의 정신적 성취도 이와 똑같이 비어 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그 대야를 뒤집어 놓으시고 말씀하셨다.


“라훌라야, 이 대야가 뒤집어져 있는 것이 보이느냐? 이와 똑같이 고의로 거짓말하는 자는 자신의 정신적 성취를 뒤집어놓기 때문에 향상을 할 수 없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농담으로라도 고의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부처님은 말씀을 맺으셨다.28)


많은 생에 걸쳐 깨달음을 추구해 가는 긴 수행과정에서 보살[깨닫기 이전의 부처님]은 온갖 계율을 다 어기는 한이 있어도 진실을 말하겠다는 맹세만은 결코 어기는 일이 없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연유는 대단히 심오하다. 진실을 지킨다는 것이, 윤리의 영역은 물론 심지어는 정신적 순화[定]의 영역마저도 넘어서 우리를 지혜와 진리의 영역에까지 데려가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된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영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개인적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지혜가 차지하는 비중과 맞먹는다. 진실된 말과 지혜, 이 두 가지는 각각 참된 것을 지키려는 동일한 노력이 내적·외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지혜는 진실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진실(sacca)은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물 그 자체이다. 진실을 실현하려면 혼신을 기울여 우리 전 존재가 사실, 즉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부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 의사소통을 할 때에도 진실만을 말함으로써 사물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끔 되어야 한다. 진실된 말은 우리 내면의 실재와 현상의 참 성질 사이에 일치성을 확립시켜서, 지혜가 생겨나도록, 그래서 현상의 참 성질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 진실된 말을 지켜내는 것은 계율의 한 조목의 테두리를 훨씬 넘어, 우리가 환상이 아닌 실상에, 욕구가 빚어낸 공상이 아니라 지혜로 파악한 진실에 발을 딛고 서게 되는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2) 말전주 멀리하기(pisu??ya v?c?ya verama??)


이 문[佛門]에서 수행자는 말전주를 피하고 이를 떠난다. 여기서 들은 말을 저기 가서 옮기거나 저기서 들은 말을 여기다 옮겨서 불화를 조성하지 않는다. 서로 틀어진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사람들의 화합을 북돋운다. 화합은 그를 기껍게 해주고, 그는 화합을 기뻐하고 즐긴다. 이와 같이 그가 말로써 널리 퍼뜨리는 것은 바로 화합이다.29)


말전주란 의도적으로 적개심과 분열을 조장하는 말, 개인이나 집단을 남들과 소원해지도록 만드는 말을 일컫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동기는 보통 진심(瞋心)인데, 경쟁자의 성공이나 덕성을 미워하는 용심, 남을 헐뜯고 모욕을 가하려는 의도 등이 그 뒤에 숨어 있다. 여기에 다른 동기가 끼어드는 수도 있다.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잔인한 의도, 환심을 사려는 비열한 욕구, 친구들의 틀어진 모습을 보는 것을 재미로 삼는 뒤틀린 마음씨 등이다.


말전주야말로 가장 심각한 도덕적 일탈행위 중 하나다. 그 뿌리가 되는 증오만 해도 벌써 충분히 무거운 불선업이다. 그런데 이 행동은 보통 궁리 끝에 나오기 때문에 사전계획이 갖는 무게가 거기에 첨가되어 그만큼 부정적인 힘이 더 강해진다. 더구나 이렇게 이간질하는 말의 내용이 거짓일 경우, 거짓말과 말전주 이 두 가지 잘못이 결합해서 매우 강력한 불선업을 낳는다. 경전에는 무고한 사람을 중상한 탓으로 바로 악도에 떨어지게 되는 사례들이 여러 군데 실려 있다.


말전주에 반대되는 말은 부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친목과 화합을 증진시키는 말이다. 이런 말은 자애와 연민, 즉 자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말은 남들의 신뢰와 애정을 사게 된다. 이 사람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후에 그것을 악용해서 자기를 해코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기 때문이다. 친목과 화합을 증진시키는 말은 금생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 가서도 그 선업의 결과로 남들의 말전주에 놀아나지 않는 충실한 벗들을 얻게 된다는 점30)도 지적되고 있다.


(3) 거친 말 멀리하기(pharus?ya v?c?ya verama??)


이 문[佛門]에서 수행자는 거친 말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 그는 점잖고 듣는 이를 편하게 하며 애정이 깃든 말, 가슴에 가 닿을만하며,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말을 한다.31)


거친 말은 화가 나서 내뱉는 말로써 듣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는데 그 중 세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는 ‘독설’이다. 즉, 화가 나서 사나운 말로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욕하거나 질책하거나 하는 말이다. 둘째는 ‘남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다. 즉 상대방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어떤 불쾌한 성질을 덮어씌움으로써 그를 해치는 말이다. 셋째는 ‘빈정대는 말’이다. 즉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 하지만 그 억양이나 말투로 보아 빈정대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그런 방식으로 남을 괴롭히는 말이다.


거친 말은 그 주된 뿌리가 진심(瞋心)으로서 화를 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잘못은 깊은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비방의 경우보다는 덜 무겁고 일반적으로 그 업보도 덜 심하다. 그러나 거친 말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지금 당장 뿐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불선한 행위이기에 마땅히 자제해야 한다. 최선의 대응책은 참는 것이다. 남이 가해오는 비난과 비판을 참고 듣기, 그들의 모자람을 이해하기, 나와 다른 견해를 존중하기, 앙갚음하겠다는 생각 없이 욕설을 참아내기 등의 마음가짐을 익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참아내라고 하셨다.


비구들이여, 강도나 살인자가 비록 팔과 다리나 뼈마디를 톱으로 자른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화를 내고 만다면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않고 여일할 것이다.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운 채, 어떤 숨어있는 원한도 없는 채로, 미움과 증오에서 벗어난 넓고 깊고 한량없는 사랑으로 넘쳐나서 저 사람을 감화시키고 말리라.”32)


(4) 쓸데없는 말 멀리하기(samphappal?p? verama??)


이 문[佛門]에서 수행자는 쓸데없는 말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 그는 때에 맞게 말하고, 사실에 부합되게 말하고, 유용한 말을 하고, 법과 계율을 말한다. 적절한 때에, 절도를 잃는 일 없이 온유하면서도 사리에 꼭 맞게 하는 그의 말은 보석과도 같다.33)


쓸데없는 말은 목적도 깊이도 없는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말은 아무 가치도 없는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과 남들의 마음에 번뇌만 일으킨다. 부처님은 쓸데없는 말을 억제해야 하며, 말은 가능한 한 아주 중요한 일에만 한정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방금 인용한 문구에서처럼, 수행승의 경우 말을 가려서 해야 하고 주로 법에 관한 말만 해야 한다. 재가자는 출가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 친구나 가족끼리의 도타운 사소한 이야기, 친지와의 정중한 대화, 생업과 관련된 이야기 등을 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화를 할 경우에도 그들은 대화가 빗나가서, 무언가 달콤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헤매고 있는 들뜬 마음에 오염될 기회만 실컷 제공하고 마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잘 챙기고 있어야 할 것이다.


쓸데없는 말을 조심하라는 가르침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스스로 그런 말을 멀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옛 주석가들의 세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시대의 특이한 현상들을 보고 있으면 이 가르침에 또 하나의 해석을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속된 잡지 류, 영화 등등 현대기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통신매체가 쏟아내는 저 쓸데없는 수다 앞에 우리를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해석을 새롭게 덧붙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34)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신종 통신기기의 위력 넘치는 포열이 쏟아 붓는 쓸모없는 정보와, 정신을 산란케 하는 흥밋거리 기사들이 우리를 갈수록 피동적이고 공허하고 황량하게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진하게도 ‘진보’로 받아들이는 이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우리들의 심미적, 정신적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고 수행이라는 한층 더 높은 삶이 부르는 소리에 귀머거리가 되게 만들고 있다. 해탈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열성적 구도자는 어떤 언어적 환경에 귀 기울여야 할지를 판별하는 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오락물이나 불필요한 정보도 쓸데없는 말의 범주에 넣어 이를 피하려 노력하면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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