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경안각지 (輕安覺支 passaddhi)
잔잔함 또는 고요함, 즉 경안(輕安 passaddhi)譯19)이 깨달음의 다섯 번째 요소이다. 경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까야 빳삿디(身輕安 kāya passaddhi)’는 몸의 고요함이다. 여기서 ‘까야’는 육체적인 몸이라기보다는 모든 정신적 영역(cetasika)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의 고요함이다. ‘찌따 빳삿디(心輕安 citta passaddhi)’는 마음의 고요함, 즉 식온(識蘊)의 고요함을 말한다.
‘빳삿디’는 길 가다 지친 사람이 나무 그늘아래 앉을 때나, 뜨거운 대지에 비가 내려 시원해질 때 경험하는 행복에 비유되기도 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기는 어렵다. 마음은 흔들리고, 불안정하며, 지키기도 자제하기도 어렵다. 마치 물에서 건져 마른 땅에 내던진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 마음은 제멋대로 방황한다.23) 이처럼 마음의 성질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사람이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진정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은 체계적인 사념(yoniso mana- sikāra)이다. 마음의 고요를 닦지 않고서는 집중[定]을 성공적으로 계발할 수 없다. 고요해진 마음은 온갖 피상적이고 무익한 것들을 몰아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곧 방종인 줄 알고 또 자기를 제어하는 일이 자기개발을 가로막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아주 다르다. 자신이 진실로 바람직한 상태로 되려면 올바른 선에서 제어되고 길들여져야 한다. 자신을 완벽하게 길들이셨기에 조어장부(調御丈夫)란 이름을 누리시는 세존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법을 가르치신 것이다.24)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리고 정연한 향상의 길을 바르게 나아가고 있을 때에만 그 마음은 그것을 지닌 이를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유익한 것이 된다. 어지러운 마음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부담이 될 뿐이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불선한 행위들은 정신적 고요, 균형, 안정을 얻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짓이다. 고요하다고 해서 약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고요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그는 교양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주위의 모든 여건이 순조로울 때 마음이 고요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순조롭지 못한 여건에서 마음의 안정을 지니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 얻기 어려운 자질을 증득하는 것이야말로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어력을 통해서 우리는 인격적 역량을 쌓아 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현혹시키는 일은 목소리 큰 사람들이 자기만 강하다고 여기거나, 쓸데없는 일에 야단스럽게 바빠하며 자기들만 능력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음의 고요함을 닦는 사람은 세간 특유의 여덟 가지 어려움[八難, 八世法]譯20)을 겪게 되어도 당황하거나 혼란에 빠지거나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로지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사물들이 어떻게 생겨났다가 없어지는지를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침내 그는 걱정과 불안에서 헤어나 부서지는 것들을 부서지는 성질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왜 슬퍼하지도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지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본생담』에 나온다.
“그 아이는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가라고 해서 간 것도 아닙니다. 왔듯이 그렇게 가버린 것인데 한탄하고, 울고, 통곡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25)
고요해진 마음이 주는 이득은 이와 같다. 그런 마음은 잃어도 얻어도, 욕먹어도 칭찬 들어도 동요됨이 없고, 역경에 처해서도 평정을 유지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감각의 세계를 적절한 원근법적 시각으로 조망함譯21)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렇듯이 고요함 즉 경안(passaddhi)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고로부터의 해탈로 이끌어준다.
VI. 정각지 (定覺支 samādhi)
여섯 번째의 깨달음 인자는 집중[定 samādhi]이다. 고요해진 마음만이 명상주제에 쉽게 집중할 수 있다.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집중통일된 마음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 nīvaranāni]를 정복해낸다.
정(定)은 마음의 안정이 강화된 상태로, 비유하자면 바람 없는 장소에 놓인 등잔의 불꽃이 전혀 깜박거리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을 올바로 고정시켜 동요나 교란됨이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정(定)인 것이다. 올바른 정 수행은 마치 꼼짝 않고 저울대의 균형점을 잡고 있는 손과 같아서 마음과 그에 부수하는 정신작용들을 균형 잡힌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정정(正定)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번뇌를 몰아내고 마음의 청정과 온화함을 가져다준다. 집중된 마음은 감각대상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는다. 가장 높은 경지의 집중은 아무리 불리한 조건 아래에서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정(定)을 제대로 닦기를 진실로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계(戒)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부터 키워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생활에 자양분을 공급하여 그것을 한결같고 고요하고 균등하며 풍요한 만족감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계이기 때문이다. 반면, 제어되지 않은 마음은 보잘 것 없는 사소한 활동으로 자신을 소진시켜버리고 만다.
깨달음을 열심히 추구하는 수행자(yogī)에게 닥치는 장애가 물론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집중적 사고譯22) 곧 ‘사마디[定]’를 방해하고 해탈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들이 있다. 그것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 nīvaraṇa]譯23)라 부른다. 빠알리어로 ‘니와라나’는 정신적 발전[修行 bhāvanā]을 방해하거나 막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철저히 가두고 가로막고 방해하기 때문에 장애라 불리는 것이다. 이들은 해탈로 가는 문을 닫아버린다. 다섯 가지 장애는 다음과 같다.
1. 관능적 욕망 (kāmacchanda)
2. 염오 또는 악의 (vyāpāda)
3. 마음과 그 부수적 정신작용들의 혼미 또는 완미 (頑迷) (thīnamiddha)
4. 들뜸과 회한 또는 동요와 걱정 (uddhaccakukkucca)
5. 의심 또는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관능적 욕망(kāmacchanda), 다시 말해 원초적인 욕망의 충족이나 소유를 향한 강한 갈증은 사람을 끝없는 윤회에 묶는 첫 번째 사슬이자 궁극의 해탈로 가는 문을 닫는 무서운 장애이다.
관능적 욕망이란 무엇인가? 이 갈애(taṇhā)는 어디서 생겨나고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 것인가? 「염처경」(Satipaṭṭhāna Sutta)에 따르면 “기쁘고 즐거운 것이 있는 거기에 이 갈애는 생겨나고 뿌리내린다.” 형태[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관념[法]은 기쁘고 즐겁다. 거기에서 이 갈애가 생겨나고 뿌리를 내린다. 갈애가 어떤 연유로든 방해를 받으면 욕구불만과 분노로 바뀐다.
『법구경』을 보자.
갈애에서 슬픔이 생기고
갈애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갈애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슬픔도 두려움도 없도다.26)
두 번째 장애는 염오, 증오, 악의라고 옮길 수 있는 ‘위야빠다(vyāpāda)’이다. 사람은 즐겁지 않은 것과 불쾌한 것에 대해 자연히 반감을 갖게 되고 또 그것들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게 되면 괴롭고, 미워하는 이와 함께 있게 되어도 마찬가지로 괴롭다. 먹고 마실 것이 입에 맞지 않거나 맘에 안들 때, 보기 싫은 행실을 접했을 때 등 수많은 사소한 것들까지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잘못된 생각, 체계적이지 못한 사고가 증오심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증오는 증오를 낳고 시야를 가린다. 그것은 마음과 그에 부수하는 정신적 작용들을 온통 왜곡시켜서 진리에 눈뜨는 것을 방해하고 자유를 향한 길을 막는다. 우리가 짓는 그 모든 전도몽상의 으뜸가는 원인은 무명이다. 이 무명에 근원하는 탐욕과 진심(瞋心)이 바로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사이에 투쟁과 불화를 야기하는 원인인 것이다.
세 번째 장애는 한 쌍의 불선, 즉 티나(thīna)와 밋다(middha)로 이루어진다. 티나는 마음이 깨나른하거나(lassitude) 음울한(morbid) 상태이고, 밋다는 부수적 정신 작용들의 음울한 상태이다. (이하 이 둘을 한역에 따라 혼침(昏沈)이라 부르기로 한다 - 역자) 이 혼침을 어떤 이들은 육신의 나태함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쌍을 이룬 불선에서 자유로운 아라한들, 저 완벽한 분들도 육체적 피로는 역시 겪기 때문이다. 이 혼침은 정신적 발전을 지체시킨다. 그것이 영향을 끼치면 마음은 너무 굳어서 바를 수 없는 버터나 숟가락에 들어붙는 당밀처럼 굼떠진다.
정신적 발전을 가로막는 해로운 요소가 바로 이 해이함이다. 해이함은 점점 더 심해지다가 끝내는 무감각한 무관심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 무기력한 성격은 도덕적 올바름과 자유로움을 치명적으로 가로막는다. 이 짝을 이루는 불선을 극복하려면 정신적 노력, 즉 ‘위리야(viriya)’를 통해야 한다.
네 번째 장애 역시 ‘웃다짜(uddhacca)’와 ‘꾹꾸짜(kukkucca)’란 두 결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들뜸과 회한 또는 동요와 걱정으로 옮길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흥분되어 있고 들떠 있다. 죄를 범하거나 참을성 없는 사람들이 이 장애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다. 들뜨고 불안정한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뒤흔들린 벌통 속에서 정신 못 차리는 벌떼와 같다. 이런 정신적 뒤흔들림은 수행을 방해하고 향상의 길을 막는다. 속태움 역시 해롭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범한 나쁜 행위에 대해 계속 후회만 한다. 이런 일은 부처님께서 잘한다 하시지 않을 일이다. 우유를 엎지르고 나서 아무리 한탄해야 소용없는 일이니까. 그런 실수를 계속 후회만 하고 있느니 차라리 그런 불선한 행위를 반복하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좋은 일을 빠뜨리고 못했다거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해서 계속 상심한다. 이 또한 쓸데없는 일이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건널 생각은 안하고 저 건너편 강둑 보고 이리로 오라는 것만큼이나 헛되다.譯24) 선행을 미처 못 한 것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느니 오히려 선한 행위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뒤숭숭함 역시 정신적 향상을 방해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장애는 ‘위찌끼차(vicikicchā)’, 곧 의심이다. 접두어 ‘위(vi)’가 ‘찌끼차’에 붙어서 이루어진 빠알리어 ‘위찌끼차’는 문자 그대로 ‘고칠 약이 없음’을 의미한다. 어쩔 줄 몰라서 곤혹을 겪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것이며 그 의심을 떨쳐내기 전에는 계속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이런 정신적 가려움증에 걸려 있을 동안은 내내 냉소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이는 향상에 가장 해로운 일이다. 주석가들은 이 장애를 ‘분명하게 결심하지 못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장애에는 선정(jhāna)에 들 수 있는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의심도 포함된다. 여기서 특히 우리는 불법이나 승가와 전혀 무관한 비불자나 요가 수행자들까지도 의심이라는 장애를 억누르고 선정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부언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선정을 성취하는 수행자는 다섯 가지 선지[五禪支- 선정의 요소, 특성]로 그 다섯 장애를 모두 제쳐낸다. 즉 관능적 욕망은 마음을 한 곳에 모음[心一傾性 ekaggatā]으로써, 염오는 기쁨(pīti)으로써, 혼침은 생각을 어떤 대상에 향하게 함[尋 vitakka]으로써, 들뜸과 회한은 즐거움[樂 sukha]으로써, 의심은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로써 젖혀 버린다. 그러나 선정을 성취하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선정은 직관적 통찰(vipassanā)로 이어져야 한다. 수행자가 잠재적 번뇌(anusaya kilesa)를 뿌리 뽑고 완전한 청정을 얻게 되는 것은 이 통찰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더러움이랄까 번뇌의 때(kilesa)가 잠재하여 있는 한 그 사람에게 악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통찰력을 얻는 것이 목적인 선정 수행자는 장애들을 제쳐냈기에 악행을 범하지는 않겠지만 그의 기질 속에 마음의 때가 잠재해 있어서 아직까지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분, 아라한은 잠재하는 마음의 때와 그 조그마한 얼룩까지도 모두 씻어냄으로써 윤회를 정지시킨다. 그 분은 자신의 윤회를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하게 끝내신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스러운 삶을 완성하였고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니까. 이제 그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다.27)
열심히 공부하는 진지한 학생은 감각적 유혹을 끊고 적절한 환경 속으로 물러나 공부에 전념한다. 그렇게 해서 온갖 방해하는 요소들을 헤쳐 나가 성공적으로 시험을 통과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광란적인 군중들의 야비한 다툼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외진 토굴이나 수행하기 알맞은 곳에 앉아서 마음을 수행의 주제[業處 kammaṭṭhāna]에 고정시키고, 분투와 지속적 노력으로 다섯 가지 장애를 제쳐내고 마음의 흐름[遷流]이 빚어내는 때를 씻어내어 감으로써 그는 순차적으로 초선(初禪), 이선, 삼선, 그리고 사선에 이른다. 그러고선 이렇게 얻은 정[삼매]의 힘, 즉 집중적 사고의 힘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최고의 의미에서의 실재[열반]를 이해하는 데로 돌린다.
수행자가 위빠싸나(vipassanā)라고 하는 직관적 통찰력을 계발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단계에서이다. 이 위빠싸나를 통해 그는 모든 조건 지어진 것들과 모든 구성 성분들의 참된 성질을 알게 된다. 위빠싸나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고 현상계의 온갖 음색은 삶 전반을 관통하여 울리는 단 한 줄의 현,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ā)로 엮여 만들어진 그 한 줄 현의 울림의 여러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자신이 그토록 오랜 세월 집착해온 세상이라는 것의 진정한 성질을 통찰하게 된다. 그는 무지라는 달걀껍질을 깨고 광대무변한 초월의 세계로 뛰쳐나온다. 그 마지막 순화로서 그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고요, 즉 부동의 심해탈(akuppā cetovimutti)28)인 열반의 광명이 동트는 곳에 도달한다. 이제 세상사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법구경』게송 373을 보자.
한적한 곳에 머물며,
마음이 고요해지고,
제 법을 명확하게 식별하는 비구,
그에게 인간의 기쁨을 넘어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온다.
Ⅶ. 사각지 (捨覺支 upekkhā)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깨달음의 요소는 ‘우뻬카(upekkhā)’, 즉 평온함[捨]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우뻬카의 뜻을 ‘따뜨라맛잣따따(tatramajjhattatā)’, 즉 중립성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적 평온함을 가리키지 쾌락주의에서의 무관심과 같은 뜻은 아니다. 평온함은 고요하고 집중된 마음의 산물이다. 삶의 우여곡절에 부딪히면서 평정을 유지해내기란 진정 어려운 일이지만, 평온이라는 이 어려운 자질을 기른 사람은 결코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이득과 손실,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 칭찬과 비난, 고통과 행복이라는 세간 특유의 여덟 가지 어려움[八世法 aṭṭha lokadhammā]들을 혼란스럽게 겪으면서도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단단한 바위처럼 견고하다. 이것이 아라한다운 태도임은 물론이다. 아라한에 대해서 이런 게송이 있다.
“선한 분들은 진실로 모든 것에 대해서 욕구를 버린다.
선한 분들은 갈망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행복이 오건 고통이 오건
현자들은 우쭐대지도 소침해지지도 않는다.”29)
현자는 취하게 하는 것을 멀리 하고, 매사에 조심하고, 인욕과 청정을 견지하며 마음을 단련한다. 그러한 단련을 통해서 마음이 고요해진다. 우리들도 그런 마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호더 경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고요?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성자들은 왜 성자일까요?’라고. 그러자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분들은 쾌활하기 어려울 때도 쾌활했고, 참기 힘들 때에 참았습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 주기를 바랄 때에도 그분들은 앞으로 밀고 나갔고, 사람들이 말해 주기를 바랄 때에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그렇지만 매우 어렵습니다. 정신건강상의 문제이지요.……’”譯25)
시인은 읊는다.
삶이 감미로운 노래처럼 흘러갈 때
즐거워하기란 참 쉬운 일이지.
그러나 모든 일이 온통 잘못되어 갈 때
그때에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참 훌륭하다네.
네 가지 잘못된 길[四邪道 cattāro agati]에 관해서는 여러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탐욕(chanda)의 길, 성냄(dosa)의 길, 두려움(bhaya)의 길, 어리석음(moha)의 길이 그들이다. 사람들이 악을 범하게 되는 것은 이들 잘못된 길 중의 하나 또는 몇 개에 유혹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온함을 계발해서 완벽한 중도(中道)에 이른 사람은 이런 잘못된 길을 가는 일이 결코 없다. 그의 청정한 중도가 모든 존재들을 치우침 없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평온을 기필코 닦겠다면 업과, 업이 작용하는 원리, 그리고 업의 과보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것이 긴요하다. 업으로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일체 유정물에 대해서, 아니 무정물에 대해서마저도 얽매이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평온에 대해서 가까운 원인[近因]이 되는 것은 모든 존재란 스스로 지은 업의 결과라고 아는 것이다.
산띠데와는 『입보리행론』에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군가 나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데도 칭찬 좀 들었다고 좋아할 수 있을까.
누군가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데도 나는 비난의 목소리에만
끄달리고 있어야 하는 걸까.
누구든 진정 자신의 주인이라면
언제나 미소 짓는다네.
찌푸린 얼굴일랑 걷어치우고
누굴 만나도 먼저 인사하고
가진 것은 몽땅 나눈다네.
온 세상의 친구인 그를 진리가 왕관 씌워주리.30)
무상정등각을 이루신 부처님께서 2500년도 더 넘는 오래전에, 완전한 깨달음과 완벽한 지혜를, 열반을, 불사를 얻으라고 우리들에게 일러주신 칠각지를 일별이나마 해 보고자 나는 나름대로 시도해 보았다. 이 완전한 지혜의 길, 깨달음의 인자들을 갈고 닦을 것인가 아니면 외면해 버릴 것인가는 우리 각자가 결정할 일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고의 원인을 밝혀내고 부수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 덕분에 갖추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해탈을 성취해 내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삶을 있는 그대로 아는 길을 가르쳐 주셨고 각각 혼자의 힘으로 그런 탐구를 해나갈 수 있도록 구체적 지시도 해 주셨다. 이제 인생의 진실이 어떤 것인지 밝혀내고 또 그것을 최대한 선용하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길을 몰라 나아가지 못한다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모호한 구석이 없다. 필요한 조치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게 취해져 있다. 눈 있어 볼 수 있고, 마음 있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불교는 시종일관 활짝 열려 있다.
“그분의 가르침은 참으로 명백해서 잘못 이해될 부분이 하나도 없다.”31)
따라서 우리가 진리를 깨닫기 위해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 그 분의 가르침을 각자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능력껏 공부하고 실생활에 적용해 보겠다는 확고한 결의, 노력, 성실성뿐이다. 담마[佛法]는 고에 지친 방랑자에게 손짓하고 있다. 열반의 안식처, 안전지대로 오라고. 그런데, 어찌 우리 칠각지를 닦는 데 열심히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나아가지 않겠는가.
지난날의 성자들을 기억하면서
그 분들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상기하면서,
오늘날 비록 그 분들은 가신 뒤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감로의 길을
달성할 수 있으리.32)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역주(譯註)
1) 『상응부』5권, 72쪽.
2) 『상응부』5권, 63쪽.
3) ‘담마’는 다양한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서는 정신과 물질[名色]을 의미한다. ‘담마위짜야(dhammavicaya)’는 이 마음과 몸의 집합에 대한, 뿐만 아니라 일체의 조건 지어진 것들과 구성 부분들에 대한 조사 또는 분석을 뜻한다.
4) 『상응부』 5권, 79-80쪽.
5) 『상응부』 5권, 81쪽.
6) 올더스 헉슬리, 『목적과 수단』(런던, 1946) 259쪽.
7) 「삼모하 위노다니(Sammoha-vinodanī)」(『분별론』의 주석서).
8)『중부』 10「염처경」, 『장부』 22「대염처경」,『The foundations of mindfulness』The Wheel 19(BPS 간행) 참조.
9)『장부』16「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 Sutta)」.
10) 『중부』10「염처경」의 주석서.
11) appamādo mahato atthāya saṁvattati『증지부』 1법집(法集), 16쪽.
12) 『법구경』 게송 32.
13) 『증지부』 8법집, Ⅳ권, 229쪽.
14) 『중부』 38경, 265쪽.
15) 『자나사라 - 사무짜야(Jhānasāra-Samuccaya :선의 본질 모음)』 31쪽.
16) 『법구경』게송 374.
17) āraddhaviriyassāyaṁ dhammo nāyaṁ dhammo kusītassa. 『증지부』8법집, Ⅳ권, 234쪽.
18) 『장부』16「대반열반경」, Ⅱ권, 100쪽.
19)『증지부』4법집, Ⅱ권, 15쪽.
20) 실라짜라,『고따마 붓다의 말씀들』에서 번안함. 해당 경의 영어 번역은 The Wheel No. 21(BPS)로 출판되었음.
21) 『법구경』게송 280.
22) 『법구경』 게송 200.
23) 『법구경』「마음의 품(品)」게송 34.
24) danto so Bhagavā damatāya dhammaṁ deseti. 『장부』 25, Ⅲ권, 54쪽.
25) 「뱀에 관한 본생담」 354.
26) 『법구경』 게송 216.
27) 『중부』 27, I권, 184쪽
28) 『중부』 30, I권, 205쪽.
29) 『법구경』게송 83.
30) 깟사빠 장로의 영역(英譯)본에서 인용. (『입보리행론』: 산띠데와(인도, 7-8세기)가 썼다고 알려진 논서. - 역자)
31) 필딩 홀,『어느 민족의 넋』.
32) 『장로게(長老偈)』게송 947.
譯1) 인자 : aṅga. 한역(漢譯)에서는 지(支) 또는 분(分)으로 번역하고 저자는 factor라 옮겼는데, 이를 요소라고 옮기지 않고 인자(因子)라 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1. 요소는 직접 어떤 부분을 구성하는 부분이라는 뜻이 강한 데에 반해서 인자는 어떤 결과에 대해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뜻이 강하다. 일곱 각지가 깨달음의 직접적인 구성 부분을 이룬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 같고 뒤의 본문에서 보듯이 깨달음을 이끌어 주는 성격이 강하다고 이해하여 인자를 취했다.
2. 다투(dhātu)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다투는 영어로는 보통 element라 옮기는데 앙가(aṅga)와 다투를 구별하는 것이 유용할 것 같아서, 더 이상 간단하게 분석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요소’는 다투에, ‘인자’는 앙가에 쓰기로 했다. 그러나 다투나 앙가 모두 실제 쓰이는 뜻은 어떤 한가지 역어로 고정시킬 수 없으리만큼 다양하다.
앙가의 경우 요소, 요인, 인자(因子), 인자(引子), 인인(引因), 가지, 부분, 팔다리[四肢], 몸의 각 부분 등의 함의로 쓰이고 있는 만큼 각기 문맥에 따라 적절한 용어를 찾아야 할 것이다.
譯2) 완전한 깨달음 : 저자는 특이한 관점에서 full realization이라 사용했지만, 빠알리 원어는 abhiññā이고 한역(漢譯) 전통에서는 증지(證智)로 옮겨 왔다.
譯3) 완벽한 지혜 : 저자는 perfect wisdom으로 표현하고 있고, 빠알리 원어는 sambodhi, 한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등각(等覺)으로 옮겨 왔다.
譯4) 무지 : non-perception. 불법을 듣지 못한 데에 기인하는 무지.
譯5) ‘vaya-dhammā san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a’.
아빠마다(appamāda) : 한역은 불방일(不放逸). 저자는 heedfulness 또는 mindfulness로 옮기면서 특히 정념과 동일한 개념임을 강조하고 있다.
譯6) ‘sampādetha appamādena esā me anusāsanā’.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sampādetha appamādena’라는 말은 부처님의 유훈과 같은데 저자가, 전자는 ‘work out your deliverance with heedfulness’, 후자는 ‘strive on with heedfulness’로 옮겼을 뿐이다.
譯7)『증지부』1법집(法集), 16쪽.
譯8)『증지부』3법집, Ⅰ권, 189쪽. 법륜 둘 『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경』(고요한소리, 2000년 판) 13쪽 참조
譯9)『중부』 38경, 265쪽에 나오는 “Nanu bhikkhave yad-eva tumhākaṁ sāmaṁ ñātaṁ sāmaṁ diṭṭhaṁ sāmaṁ viditaṁ tad-eva tumhe vadethāti.”를 저자는 “That which you affirm, disciples, is it not only that which you yourselves have recognized, seen and grasped?”로 번역하고 있다.
譯10)『중부』56「우빠알리 경」Ⅰ권, 379쪽.
譯11) 맨 세력들의 집적 : 영문 ‘conglomeration of bare forces’의 축어역. 빠알리 원문은 ‘suddha saṅkhāra puñja’이다.
譯12) (빠알리 원문) Yato yato sammasati, khandhānaṁ udayabbayaṁ labhati pīti pāmojjaṁ, amataṁ taṁ vijānataṁ
(영역문) Whenever he reflects on the rise and fall of the aggregates, he experiences unalloyed joy and happiness. To the discerning one that(reflection) is deathless, Nibbāna.
저자는 여기서 taṁ(that)을 reflection(정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붓다락키따(Buddharakkhita) 같은 현존 학자들은 이 문맥에서 온의 생멸이 불사의 반영이라고 옮기고 있다.
譯13) 행복 : 저자는 blessing으로 쓰고 있는데, 빠알리 원문은 hita로서 존재들에게 유익하다는 뜻이다.
譯14) mā nivatta abhikkhama.. 『불종성경(Buddhavaṁsa)』Ⅱ. 게송 107.
譯15)『중부』70경, I권, 481쪽 참조.
譯16) 로버트 버언즈, 「탬 오샨터(Tam O'Shanter)」1790.
譯17)『장부』22경, 298쪽 참조.
譯18)『장부』1경 3-27, I권 2-12쪽; 『중부』27경, 179-180쪽『중부』 51경, 345쪽 참조.
譯19) 경안 : 輕安 또는 除로 한역되듯 ‘빳삿디’에는 가뿐함, 제거함의 뜻이 있다.
譯20) 세간 특유의 여덟 가지 어려움[八難, 八世法] : 이득과 손실,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 칭찬과 비난, 고통과 행복. 『장부』Ⅲ권 260쪽.
譯21) 서양 미술에서 3차원의 공간을 평면위에 표현해 내는 방법으로 여기에서는 사물을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전체 속에서 상대적 부분으로 파악하는 태도를 말하며, 그것은 불교의 연기의 맥락에 의해 사물을 바라보는 눈과 비슷함으로 ‘법으로 본다’는 불교개념의 서구적 표현으로 간주된다.
譯22) 여기서 저자는 집중적 사고(concentrative thought) 또는 집중된 사고 내지 집중상태에서의 사고(concentrated thought) 등을 써서 일반적 역어인 집중(concentration)에 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譯23)『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고요한소리 간행, 법륜 아홉) 참조.
譯24)『장부』13「떼윗자경」Ⅰ권, 244쪽.
譯25) 영국왕립미술협회의 트루만 우드 강좌에서 호더가 행한 연설「고요한 마음이라는 건강위생법」(1938) 중에서.
저자에 관하여
삐야닷시 큰스님(1914~1998)은 스리랑카 태생으로 출가 전에 날란다 대학과 스리랑카 대학에서 수학했다. 20세에 득도, 스리랑카의 저명한 고승인 와지라냐나 상가 나야까(Vajirañāṇa Saṅgha Nāyaka) 스님 밑에서 불법을 닦았다.
스리랑카 지도급 승려로서 힘있는 설법과 라디오 전파를 통한 포교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서양을 널리 여행하면서 불법의 메시지를 전하는 한편, 여러 국제 종교회의와 문화적인 모임에 남방불교 대표자로 참여했다.
또한 스리랑카 불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 BPS) 간행시리즈의 싱할리어 본(本) 출판물 「Damsak」의 편집자이기도 하였다. 저작 중에서 고요한소리에서 출간된 책으로는 법륜 하나『부처님, 그분 - 생애와 가르침』(정원 스님 옮김)이 있다.
저서안내
The Book of Protection : Parittā Recitals in English Translation (BPS)
The Buddha - A short study of his life and teaching (Wh. 5)
Dependent Origination (Wh. 15)
The Psychological Aspect of Buddhism (Wh. 179)
Buddhism : A Living Message (BPS)
Four Sacred Shrines (BL. B 8)
The Threefold Division of the Noble Eightfold Path (BL. B 32)
Buddhist Observance and Practices (BL. B 48)
The Story of Mahinda, Saṇghamitta and Sri Maha Bodhi (BL. B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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