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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사성제(1)

열 다섯

불교의 초석


사성제           출처: 고요한 소리 http://www.calmvoice.org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

재연스님  옮김


FOUNDATIONS OF BUDDHISM

The Four Noble Truths

FRANCIS STORY

The Anagarika Sugatananda

The Wheel Publication No. 34/35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1982     Sri Lanka


차례

불교의 초석  사성제(四聖諦)

성스러운 고의 진리[苦聖諦]

성스러운 고 발생의 진리[集聖諦]

성스러운 고 소멸의 진리[滅聖諦]

성스러운 고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道聖諦]


저자 소개


걷고 걸어도 그대 세상 끝에 이를 수 없느니

그대 거기 이를 수 없기에 고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

그러나

지혜가 깊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이

진실로 그 끝을 보도다

고결한 삶을 살아온 그는

청정한 마음으로


윤회의 끝남을 알게 되어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가려들지 않으리

                            [『상응부』제2상응 3장 제6경]


불교의  초석  

사성제(四聖諦)


  존재란 무엇인가? 인류는 이 수수께끼 같은 문제의 해답을 찾아 오랜 세월동안 숙고와 논쟁을 거듭해왔다.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이 일에 몰두해왔던가. 만약 이 문제가 지성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인류는 이미 수세기 전에 모든 의혹과 억측을 떨어내고 우리 존재의 정확한 밑그림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냈을 것이다. 우주에 관한 선사시대의 신화적 해석에 이성적 요소가 끼어 들기 시작한 이래로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과연 목적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등등의 의문이 인간의 머리 속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 답에 접하지 못하고 있다. 존재의 유일성과 영원 불변성에 대해 사색한 고대 엘레아 학파로부터, 의식은 대뇌활동에 부수되는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부수 현상설에 이르기까지 이성은 독창적인 해답을 폭넓게 제시해 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에 못지 않게 이성적인 반론에 봉착할 뿐이었다. 이성만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안이 됨직한 초자연적 계시 역시 자가당착이고 요령부득해서 더더욱 아무런 답도 얻어내지 못했다. 초자연적 계시가 인간사에 끼친 영향이 재앙적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은 계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신비주의자들이 사사로이 경험하는 계시는 그 배타적이고 주관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신비 체험을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되게 마련이다. 이런 불안정한 믿음이야말로 광신주의의 씨앗이다.


  수십 세기에 걸친 인류의 사변적 사유의 기록은 광막한 사막에 남아있는 혼돈스러운 발자취들을 방불케 한다. 이 발자취들을 특성에 따라 분류하면 종교의 자취, 철학의 자취, 그리고 이 자취들을 거의 지워버리는 신판 과학의 자취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종교의 자취들은 대부분 원을 그리며 맴돈다. 처음에는 신화로 시작하여 신화로 지속되는 듯 하다가 어느덧 교의(敎義)로 굳어지고, 그런 식으로 제자리를 끊임없이 돌고 돈다. 이와는 다른 발자취들이 눈에 띄는데, 이들은 지향없이 내닫는 발걸음들이 남긴 자국과 같은 것이다. 새 이론, 새 발견, 새 만남에 따라 마치 바람처럼 이리저리 진로를 바꾸고 있다. 이들은 바로 철학적 자취요, 인간의 안절부절못하며 호기심 많은 마음이 남긴 자국들이다. 용기와 모험심은 가상하지만, 이 호기심 많은 마음이 천착하는 자료라는 게 예의 낡은 소재들뿐이다. 과학 발전 이전의 사유는 거의 낡은 소재를 재탕 삼탕 하기 일쑤여서 관념들을 순열․조합으로 계속 바꿔봄으로써 조화될 수 없는 사상들을 조화시키려고 이리 저리 꿰어 맞추다가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언제나 실패하고 마는 처량한 몰골이다. 그리고 그 위에 과학적 사유의 흔적들이 새로이 등장한다. 이들은 철학의 발자취와 포개져 있는데, 갈수록 점점 철학의 영역을 넓게 침범하고 있다. 다만 철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학은 궁극적 문제, 다시 말해 가치나 목적의 문제 따위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관심을 불필요한 것으로 내쳐버리는 경향까지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선혈로 물들여진 모래벌판을 보게 되는데, 이는 지난날 철학과 종교가 판치던 시절, 이들이 서로 맞닥트리게 되면 얼마나 격렬한 난투가 벌어졌던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인 것이다.


  추상적 사유를 할 수 있는 동물로 등장한 이래 인간이 걸어온 자취가 줄곧 이와 같았다. 이제 과학적 지식 앞에 초자연주의가 거의 완벽하게 굴복해버렸으며 그래서 문제에 대한 접근도 무언가 달라지게 된 그런 국면에 새롭게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고 과학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더 다가가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사유의 발자취들은 애매모호한 채여서 신비로 시작해서 물음표로 끝나는 형국이다. 인류가 우주나 생명 유기체의 구성에 관해 확인된 지식을 크게 축적함에 따라 철학자들에게 사유하지 않으면 안될 새 자료들을 엄청나게 많이 제공해주었지만, 현재 철학자의 사유하는 마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은 것을 안겨준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그림을 명확하게 해주기는커녕 온통 화폭만 어지럽게 만든 셈이다. 다양하게 전문화된 지식분야를 서로 연관지으려는 것 자체도 극히 어려운 일일뿐더러 각 분야에서 풀지 못한 불확실한 부분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비전문가로서는 과학분야에서 어디부터가 이론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확인된 사실인지 분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런 문제는 유전학, 생화학과 같이 생명과정을 밝히는 일과 관련된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이런 분야일수록 존재에 관한 의문은 한층 더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한편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들은 가끔 모순되는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듯한 경우도 있다. 물리학 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기초한 기술 분야는 아직도 제대로 정의되지도 않고 따라서 완전히 이해되지도 않은 요소들을 허다하게 끌어안은 채 굴러가고 있는 형편이다. 예를 들어 우주의 근본구조를 형성하는 어떤 방사선은 파장으로도 나타나고 입자로도 나타난다. 논리적으로는 이 둘은 ‘같은’ 시간에 있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어떤 사건도 동시의 일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이 우주에서 도대체 ‘같은 시간에’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물며 수천광년도 더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별의 형상이 실제로는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소멸해버린 별의 도깨비불 이상 아무것도 아닌 이 우주에서랴. 날로 늘어나는 지식으로 인하여 우리는 여태껏 안주해오던 감각적 경험의 확실성에 대해서조차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생각이란 게 무엇인지 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관련자료를 전자두뇌에 입력시킴으로써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을 괴롭혀온 의문들에 대해 최종적인 해답을 곧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두 가지 무리한 가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첫째로 언젠가는 필요한 자료를 ‘모두’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 둘째로는 인간이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가장 발전된 컴퓨터라도 계산분야에서조차 인간두뇌를 뛰어넘을 수 없다. 세제곱근을 계산기와 같은 속도로 정확히 계산해낼 수 있는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좀 더 빨리 할 수 있을 뿐이지 뭐 하나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는 못한다. 우리가 새로운, 근본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필요로 한다면 전자기계에 기댈 일이 아니라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문제에 관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은 알 길이 없다는 말인가? 현재 과학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과학 이전의 옛 신념들에 관해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더 이상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면서도 대안을 제시하거나 긍정적인 추론을 이끌어내도록 도와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과학은 진리 탐구에 있어서 사실을 제공해주는 것보다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훨씬 더 가치 있는 기여를 해주고 있다. 즉 새로운 탐구 방법이 그것인데, 확보된 사실들을 질서 있게 다루는 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방법은, 문득 떠오르는 발상에 의지해서 이론을 추구하던 종래의 방식보다 더 생산적이다. 아무리 한정된 경험 자료일지라도 그것을 살려내어 미지의 영역을 향한 출발점으로 삼고 마는, 그래서 소수의 관찰된 사실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보편 법칙을 도출해 낼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과학의 방법론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은 관찰한 현상과 배치되면 기존 이론이 아무리 중요하고 또 우리가 믿어마지 않던 것일지라도 서슴없이 내던져버리는 자세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인습타파 기능이 과학으로 하여금 종교나 철학에 비해 더 높은 중요성을 지니도록 만들어 주었다. 다시 말해 실제의 탐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들을 수집하고 일람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실들을 상호간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며, 또 경험의 핵심 즉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 성격의 경험만 남기고 그 밖의 일체 기성관념들을 벗어 던져버리는 일이다. 과학은 분명 이론에 입각해서 전개․발전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발견과 상치되고 모순되는 것으로 드러나 무너져 내릴 때에는 그 이론을 언제든 내버릴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취사선택한 자료를 가지고 우주의 틀을 짜 맞추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이 과학적 방법 덕분에 물리적 세계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꽤나 많은 것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우리의 이해를 이와 같은 직접적인 감각적 지각의 세계를 넘어서까지 넓혀 나가고자 할 때도 역시 이 방법이 유일하게 이로운 길이 될 것이다. 심리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이미 그런 쪽으로 가닥을 잡고 그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즉 외부 형상세계가 인간의 전체경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일부분에 불과하며 더구나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진실에 눈뜨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주의 객관적 외양에 대한 정밀한 조사 못지 않게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 즉 우리의 심리적 반응과 동기의 내면적 과정, 그리고 직관적 차원의 심리작용에 대해서도 연구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비로소 과학자들이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정신 작용과정을 진지하게 연구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텔레파시, 투시, 전생기억 등 기존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소위 초정상(超正常)적 마음상태의 여러 양상에 대해서도 똑같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경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존재의 문제에 관해 전혀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접근이라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서양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뿐이다. 정작 정신과학이나 철학에서 새롭다고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앞에서 우리가 더듬던 사막의 발자취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인도에서는 이미 기원전 600년경에 사변적 사유가 극도로 복잡한 단계에 이르렀던 사실을 볼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낯익은 신비주의 대(對) 합리주의의 논쟁, 경험주의, 실용주의, 논리실증주의의 여러 주장들, 그리고 영구 존속론과 단멸론의 대립적 관점, 그 밖의 갖가지 절충적 교의들을 볼 수 있고, 후세의 철학자들이 내어놓은 주장들은 예전의 것들에서 한 두 가지를 재탕하거나 개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결코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처님 시대에 유행했고 그래서 「범망경」(『장부(長部)』1경)에 소개되어 있는, 소위 생명과 우주의 본질에 관한 62가지 견해나 이론들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플로티누스에서 키에르케골에 이르는 서양 철학사에 나타난 모든 관념들의 원형, 즉 후대 사상들의 모든 씨앗들을 거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시기 훨씬 전에 기성학파의 교의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처님의 구도 경위를 서술한 대목에서 밝혀지고 있다. 세속을 등진 왕자, 고행자 싯닷타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이미 구경(究竟)의 지식을 얻었다고 주장한 수많은 학파 중에서 두 학파의 스승 문하였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라는 스승 둘 다 논리주의자는 아니고 전형적인 요가 수행자들이었다. 요가수행자로서 자기네 철학이 있었지만 이러한 철학의 정당성에 대한 최종적 입증은 주관적 영역에서 구해야 할 일이었다. 형식논리의 영역을 벗어난 일종의 고강도의 인식이랄까 그런 것을 통해 그들은 실제로 선(禪), 즉 정신적 몰입을 행함으로써 의식을 고양시켜 더 높은 능력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들 두 이름난 요기들의 성취가 대단한 경지의 것이긴 했지만 그들의 체계에서는 고행자 고타마가 구하고 있던 완전한 깨달음은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고타마는 다시 극단의 고행으로 방향을 바꾸어 노력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봉착한, 관념적 사유와 고양된 의식이 뒤엉켜 헝클어져 있는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접근 방식이 아니고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통적 요가수행의 방법으로 형상의 세계[色界]를 넘어설 수는 있었으나 관념의 세계랄까 단순한 관념 정지(停止) 혹은 관념 현수(懸垂)의 세계[無色界]를 넘어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 방법이 이끌어주는 수준으로는 절대 지혜와 해탈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힘을 믿을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진 이상 그는 기존 지침에 매달리는 대신 자기 내면에서 새 길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애당초 문제의식의 불을 지펴주었던 계기가 무엇이었던가 하고 생각을 더듬어 나아갔다. 그 최초의 발단은 의미심장하게도 어떤 직관적 성질의 경험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기억이 미치는 한 가장 초기의 경험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날 어린 왕자였던 그는 아버지 왕이 봄갈이 의식의 행사를 치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파헤쳐진 고랑을 따라 새떼들이 몰려드는 모습에 눈이 멎자 이를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그 새떼들은 새로 드러난 고랑을 따라 열심히 벌레를 찾아 헤집고 있었다. 산 것이라면 피할 수 없는 배고픔, 불가항력인 배고픔에 쫓긴 온갖 새들이 산 먹이를 보고 기가 나서 부리와 발톱으로 쪼고 할퀴며 서로 앞 다투어 싸우고 있었다. 날개를 단 몸뚱이들이 무리를 지어 연출하고 있는 그 소란스럽고 사나운 모습이라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도 없는 지극히 예사로운 이런 광경이 어린 싯닷타에게는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사랑을 주된 자질로 하는 창조주의 권능을 믿는 사람에게도 그런 광경은 역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 대자연의 소산 가운데 가장 연약하고 아름다운 새, 인간이 영적인 존재를 상상할 때면 으레 거기 새들의 날개와 즐거운 아침 노래를 떠올렸던 것처럼 그렇게 가볍고 천상의 생명체 같던 새, 시인의 영감이며 자연 애호가의 기쁨이던 바로 그 새가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 여느 흉포한 동물들과 다름없이 저보다 작은 생물에게, 심지어는 제 종족들에게조차 탐욕스럽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동물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처럼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도 날개 달린 천사가 곧바로 날개 달린 호랑이로 둔갑해 버리지 않는가.


  그것은 어쩔 도리도 없는 일이고 어린 싯닷타도 이를 알고 있었다. 새들도 살아남으려는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을 수 없고 먹이를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잡아먹고 서로 싸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일은 자연에 미만(彌滿)한 현상이며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도무지 예외를 찾기 힘든 일이다. 자연은 도대체가 잔인성과 고통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자연은 실로 모든 생물에게 생존의 조건으로 그리고 그 대가로 잔인성과 고통을 부과한다. 괴롭히거나, 괴로움을 당하거나, 또는 괴롭히면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 이것이 삶의 법칙이다.


  어린 시절 특유의 직관은 가끔은 기이할 정도로 분명하고 깊이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후 성인이 되면서 거듭 세속의 비정한 삶에 시달리다 보면 대부분의 경우 이런 직관력은 사라지게 된다. 지식을 쌓아 가면 직관능력은 퇴보한다. 우리는 사실에 대해 지식을 얻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사실의 참된 속뜻과는 멀어져 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자연이 도덕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은 간과해버리고 자연의 법칙과 선(善)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 ― 그것을 신이라 부르든 어떻게 부르든 간에 ― 조화될 수 있다는 안이한 믿음에서 윤리체계를 세우고 또 이를 기어코 지속시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고 있는 한 그들은 윤리를 조롱하는 야유소리가 메아리치는 심연 위를 외줄 타기 하는 광대나 다를 것이 없다. 깊고 깜깜한 심연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에서 자애로 충만한 전지전능한 우주의 지배자를 찾아내려 애쓰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딱한 노릇인가. 만일 그가 그 비슷한 어떤 것을 거기서 본다면 그것은 다만 그의 상상력의 소산이며 전승을 통해 그에게 주입된 관념의 반영일 뿐이다. 만일 그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그는 몸의 균형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심연에서 전지자의 얼굴을 못 봐도 끄떡없을 만큼 배짱이 세지 못하면 차라리 다른 어떤 지점, 자기의 활동범위 내의 어떤 뚜렷한 곳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리고는 자기내부의 평형기구인 귓속 달팽이관만을 믿는 쪽이 더 나을 것이다. 마음에 원래부터 있는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감각을 그의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 감각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것은 못되지만 그래도 오늘날 대다수 지적인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뿐인걸 어쩌랴. 그리고 신학자들을 위해 한마디하자면, 새들과 계속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자 할진댄 그 새들의 사생활은 접어두고 관례적으로 이상화시킨 모습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천사들에게 날개는 달아주되 부디 부리와 발톱만은 빼라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제 신학과 ‘실재’를 중재할 엄두 같은 것은 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직시할 만큼 용기 있기는커녕 실존주의자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사람조차 그다지 많지 않다.


  “우주는 부조리하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거나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들의 거처로 쓰기 위해 우주를 창조한 신이 존재하지 않기에 ― 또 그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특별히 이행해야 할 역할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향점도 없고 특권적 지위도 없으며 심지어 이 모든 피조물의 보편적 부조리로부터 자신을 구해낼 자생적 의식마저도 지니고 있지 않다.”1)


  이런 ‘불온한 지식’이 사람들 마음 한구석에 마치 암처럼 번지면서 쉬쉬하는 사이에 계속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믿음 전반에 그야말로 독소를 불어넣고 있다. 인류가 영적 생활을 상실하게 되면서 그 대안으로 창안해낸 합리주의, 인도주의 그 밖의 모든 대용품들도 인간의 소외감에서 오는 극도의 무력감․허무감 앞에서는 본질적으로 무의미할 뿐이다. 옛 이집트인들은 죽은 신도 스스럼없이 숭배할 수 있었지만 현대인들은 오직 삶을 숭배할 수 있을 뿐이다.


  싯닷타가 구도의 길에서 가장 중대한 고비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온갖 기존의 수행길을 그 극한까지 가보아도 평범한 진리들[諸法]을 모두 넘어서는 구경진리[諦]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릴 적 경험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때 겪었던 내용을 상기해냈다. 또 그것을 계기로 경험하게 되었던 것, 즉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의식이 나타났던 것도 역시 기억해냈다. 그때 그는 문제의 해답을 찾아 자신이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바닥층까지 파고들었던 것이다. 바로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자연의 그 모습이 실은 남의 일이 아니고 자기 자신도 살아서 감각을 지닌 유기체로서 그들과 꼭 같이 끊임없이 갈등 투쟁을 겪도록 운명지어졌음을 똑바로 비춰주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우리는 각자 제 운명을 지니고 홀로 서 있지만 한편으로는 일체의 타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이라는 신비에 대한 해답이 어디에선가 찾아져야 한다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자연물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도 깊이 있는 이해말고 달리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나아갈 길을 지시해 주었던 어릴 적의 그 사건, 기성관념이나 가치관에 사로잡히기 이전 그가 한때 섬광처럼 누렸던 특수한 지적 경험으로 마음속에 떠올렸다. 이 일을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이루신 후 다음과 같이 술회하셨다.


  “나는 회상했다. 전에 아버지 숫도다나 왕께서 밭 갈기 의식을 하시는 동안, 내가 잠부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욕망들과 깨끗하지 못한 마음상태를 떨쳐 내고, 초연함에서 생겨난 축복감 속에서 인지하고 숙고하는 가운데 어떻게 첫 선정에 들었던가를.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자 명료한 의식이 나에게 생겨났다. ‘그렇다, 진실로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 제일선정은 들숨 날숨을 관하는 수행방법에 의해서 이룰 수 있는 마음의 정화와 적정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다. 이 적정 상태에는 기쁨과 희열이 수반한다. 이 선정에는 순화되고 고요한 상태의 생각 일으킴[尋]과 지속적 생각[伺]이 아직 있기는 하지만 이 심과 사는 여러 가지 잡다한 대상에 더 이상 끄달리지 않고 명상주제에만 전념한다. 이 선정에서 나오면 마음은 고요하고 집중되어 있을 것이며, 보다 활발하게 일어나는 욕망들2)로 인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어떤 요소[法]들이 이 경험을 구성하는가를 침착하게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새롭게 더 명료한 지각을 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이는 마치 지금까지 잔물결로 일렁거리던 연못의 수면이 거울처럼 고요해진 것과 같은데 이렇게 되면 두 가지 공능(功能)이 따른다. 한편으로는 밖으로 사물들을 정확하게 비추고 또 한편으로는 안으로 바닥 깊이까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이는 계속 진전되는 선의식(禪意識)의 첫 단계일 뿐이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뒤따르게 되는 제 이선 삼선 사선에서 의식은 점점 더 순화되는데, 기쁜 느낌들, 몸을 통한 느낌의 인식들, 대경(對境)에 대하여 일으키는 인식[有對想 paṭigha-saññā], 그 외 자아의식의 나머지 구성 요소들이 하나씩 차례로 떨어져 나가면서 그만큼 순화되고 정치(精緻)해진다. 사문 싯닷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옛날의 첫 선정 경험을 상기하게 되자 즉시 그 경험을 재현하기 위해 초선부터 유도해내는 시도를 했고 힘들이지 않고 무난히 초선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는 고요를 이루어서 그만큼 더 나아가서 이 정신적 집중력을 자기 자신의 내부세계 곧 몸, 마음, 그리고 법들의 분석적 검토에 기울여 나갔다. 마음을 고요히 다잡는 기법은 사마타[止]라 하는데 이는 위빠사나[觀]라 하는 직관의 계발을 위한 서막이다. 마음이 마침내 사성제를 꿰뚫어 알고, 그래서 진리의 세계인 실재와, 상식의 세계인 환상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이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서이다. 그때에야 구극의 진리[四聖諦]가 마주보듯 바로 보이게 된다. 단지 지성에 의해 파악되는 서술적 진리에 불과했던 사성제를 비로소 새로운 차원의 깨달음에 입각하여 확연한 사실로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진리는 필설로는 형용할 길 없는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인데, 이는 마치 우리가 자신의 몸, 생각, 감성의 내면에서 느낌을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지만, 이런 따위들보다 훨씬 더 힘있고 실감나게 경험하게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른 방법들로는 다 실패했던 싯닷타가 이 직관적 통찰에 의해서 드디어 대각을 성취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자아라는 허구를 중심으로 삼는 의식의 한계성을 초탈해 있었고, 시공의 영역을 넘어 삼계를 꿰뚫을 뿐 아니라 그 너머까지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힘들여 열심을 다했으나 아무런 보람이 없었던 6년간의 고행 뒤에 드디어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이 법은 심오하고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평화롭고 숭고하며 사유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며 미묘하고 현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중부』 26경)


  그분이 통찰한 진리는 네 가지로 나눈 지혜로서 지견(ñāṇadassana)이라는 용어가 포괄하는 모든 것의 기반이 된다. 사성제라는 이름의 이 진리는 부처님 가르침의 첫머리에 나오며, 뒤따르는 모든 가르침을 요약하고 있다. 이 사성제를 최초로 선포한 초전법륜에 대해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정각자 여래는 녹야원에서 이 사성제를 선포하고, 지시하고, 드러내고, 세우고, 설명하고 분명히 함으로써 그 누구도, 어떤 사문도, 브라흐만도, 천인도, 악마도, 이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진리의 최고 왕국을 건립하였도다!”


  “그럼 이 사성제는 무엇인가? 고의 진리[苦], 고의 원인의 진리[集], 고의 멸의 진리[滅], 고의 멸에 이르는 성스러운 길의 진리[道]이다.”


  그런데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이 진리들은 여느 종교의 신앙적 기초들과는 매우 다르다. 사실 너무나 달라서 불교가 도대체 종교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조차 한다. 불교를 철학으로 보아야 할지 윤리 장전으로 보아야 할지 종교라 해야 할지 과학이라 해야 할지 논의가 분분했다. 사실은 이렇다. 불교는 이 모두를 포함하고 그리고 이들을 넘어선다. 최상의 의미로 심학(心學)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불교의, 또 부처님의 독특성을 구현한 결정체가 사성제이다. 부처님께서도 이런 점을 스스로 밝히신다.


  “비구들이여, 이들 사성제에 관해 절대적으로 바른 지식과 통찰이 명명백백해지지 않는 한 나는 모든 세계를 넘어서는 저 지고의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 그러나 이들 사성제에 관해 절대적으로 바른 지식과 통찰이 완벽하게 분명해지자 즉시 나의 내면에서, 저 최상의, 누구도 넘어서지 못한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확신이 생겨났다.”


성스러운 고의 진리[苦聖諦 Dukkha Ariya Sacca]


  부처님께서는 이 첫 번째 진리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정형화하신 바, 이는 모든 불전에서 반복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고(苦)의 진리란 무엇인가? 태어남은 고다. 노쇠함은 고다. 죽음은 고다. 슬픔․후회․고통․비애․절망이 고다. 기꺼운 것과 헤어짐이 고요, 달갑지 않은 것과 만나는 것이 고다. 요컨대 집착과 관계가 있는 이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이 모두 고다.”


  이 구절을 놓고 흔히 불교의 인생관이 기본적으로 염세적이요, 심지어 절망적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쇼펜하우어가 동양사상을 그의 철학에 원용할 때 보여 준 모습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서양의 활기차고 생을 긍정하는 태도와 정반대 되는 것으로 동양을 보려드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첫 번째 진리[苦聖諦]로 끝난다면 위와 같은 부정적 해석도 근거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또 불교가 비관주의나 낙관주의, 생의 부정 아니면 긍정의 범주에 어쩔 수 없이 끼워 맞춰져야 한다면 이 진리 하나만을 놓고 볼 때 어디에 들어가야 할지는 자명하다. 그러나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상을 놓고 한쪽 극단을 취하고 다른 쪽 극단은 배척해야 할 이유가 없다. 불교에서는 생에 대한 관점이 어디까지나 객관적이어야 하며 편견에 입각하지 않고 사실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점이 요구될 뿐이다.


  첫 번째 진리는 인간의 처지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일체의 유정물들의 삶 전반에 대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성의를 다한 검토 결과 어쩔 수 없이 내려진 결론이다. 이 결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상적 견해를 시정하고 재조정한다는 뜻도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여태껏 만성 질환이라는 이유로 당연한 듯 등한시해버리고 있던, 널리 퍼진 한가지 증상인 고(苦)를 새삼 인식하게 되는 셈이 된다. 불교가 이 고의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진단과 처방을 위한 필수 예비단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은 지금 병에 걸려있다고 말해주는 단계에 해당된다.


  그렇다고 해서 고를 명확히 못 박는 이 첫 번째 진리가 기쁨이나 웃음을 아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직시하고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생의 어두운 쪽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매우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경험들을 견뎌내며 삶의 의지를 견지해 나가게끔 만드는 심리적 기제, 즉 달갑지 않은 것은 무시해버리고 기꺼운 쪽만 간직하려드는 자연적 성향이라는 그 기제를 중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고성제이다. 이렇게 고를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어쩌다 소위 행복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누리고 있는 그 특정 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유정물들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불행을 너무 쉽게 망각해버리기 때문에 이런 상기 장치는 계속 필요한 것이다. 행복이란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자면, 삶에서 고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많은 반면, 혼자 힘으로 참되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는 사실을 기억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쾌락은 사람들이 현실로부터 도피해 숨는 유일한 피신처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즐거움과 고통을 그 극치에 이르도록 두루 다 맛보았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인생이 구제할 길 없는 비참 뿐이라면 누구라도 계속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고, 또 불행이라곤 한오라기도 섞이지 않은 순전한 행복뿐이라면 종교가 들어 치유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 아닌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사람들이 꿈꾸어온 갖가지 유토피아 가설 중 하나인 이상적인 행복과 안전이 확보된 세계에서라면 무슨 일이든 노력하려는 동기부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유토피아도 천태만상이라 그 중 단 두 가지도 동일한 모습이 아닐 것이다. 유토피아를 그리는 사람이 어디에 역점을 두는가도 또 완전성 그 자체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처럼 서로 상충하는 조건들이 산재해 있는 곳, 선과 악이, 미덕과 사특함이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 곳에서만이 인간 특유의 가장 숭고한 노력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양면성들이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세계이기에 그 같은 노력도 역시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유토피아를 그리라고 하면 온갖 욕망과 성향, 취향을 그 속에 다 담고 싶어하는 족속인데, 획일화될 수밖에 없는 어떤 특정 이상사회가, 제각기 유토피아를 다르게 그리는 그 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행복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린애 같은 짓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날 신경증이 현대 도시 문명의 한 특성이라고 흔히 말들하고 있고, 실제로 그런 예를 자주 목격할 수 있는데, 이 역시 다른 측면에서 음미해 볼 여지가 있다. 인간성이라는 것이 원시와 문명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상태도 때로는 원시적으로 때로는 문명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 소위 풍요하다는 사회가 그 징후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하고 있듯이 불안으로부터 과도하게 해방되는 것은 인간성에 걸맞지 않는다. 범죄, 특히 청소년 범죄가 늘고, 인종박해 행위가 범람하며, 기존질서에 대한 반항 등이 심해지는 것은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사회가 풍요로워져서 여가를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여가를 주고, 기질적으로 모험과 자극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안전을 배려하고, 자기를 폭력으로밖에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질서를 요구하는 것에도 원인이 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다. 떼를 지어 불량배짓을 하고, 고속도로를 경주장으로 만들고, 자동차나 기차로 담력시합을 일삼는 십대들의 모습은 바로 위험에 부딪쳐보고 그 위험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하는 원시적 충동의 발로인 것이다. 문명사회의 과보호 구조가 금하는 갈등과 모험, 그것이 주는 스릴을 십대들이 소리높이 요구하는 것은 그들 나름의 자존심의 발로라 봐야 할 것이다.


  여러 면에서 인간은 아직도 원시적인 호전적 동물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은 오래 전에 저절로 사라졌을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사람은 평화를 원한다. 다만 제각기 자기식대로 원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만 옳은 것 같다. 모든 사람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그 평화가 또 다른 전쟁이 되기를 원한다. 이 측면은 국제회의나 지식인들의 인도주의적 모임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세계평화 담론의 이면에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아무도 인정하려하지 않는 엄연한 사실이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 투쟁이 가져다 줄 승리와 고통을 동시에 갈구하고 있다.


  단조롭고 지루할 뿐인 영원한 천국의 행복이 지금 같은 인간체질에는 맞을 리가 없다. 고통이 없으면 기어코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 성품의 기본적 사실을 바로 알기 때문에 천국의 사정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인성(人性)이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한 영원한 행복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불행이 없다면 행복 역시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복지국가를 완성하려 애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내부 붕괴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전체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옛날 서구에서 사람들이 그나마 자기완성에 힘쓴 것은 하늘 나라에 가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접어버리고 이 지상에다 완전한 인간사회를 이루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후로 사태는 점점 고약해져서 자유를 억압․말살하던 종교재판의 폐해를 능가하는 심각한 국면이 벌어지고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어찌 완전한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설령 완전한 사회가 이루어진다손 쳐도 지금의 인간으로서는 거기에 맞을 리가 없다. 이러한 사정을 역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선동가들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크다.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정치적 상업적 요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인이 자기 구원을 모색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어져버렸다. 오늘날 자기개발이란 것은 고작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보습득과정 뿐이지 않은가.


  불교의 고성제는 팔고(八苦)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태어남(불교식 정의에 따르면 끊임없는 생성과정)이 고이며, 정신적 육체적 노쇠, 그리고 그 종말인 죽음이 피할 길 없는 불행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만 꼭 불행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인생은 매 시절마다 이 팔고에 대한 생각으로 사뭇 어둡게 그늘져 있지 않은가. 질병, 사고, 사별, 기타 크고 작은 불행에 대한 공포가 언제 그칠 날이 있던가. 마음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런 일들을 놓고 아무리 태연한 척 가장해도 그것은 가냘픈 눈가림일 뿐, 또 언제 벅찬 혼란 속에 생각을 가누지 못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영고성쇠는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도 이것들을 굳이 무시하려든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현실 도피자이다. 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면 무엇보다도 바로 이 생노사의 고를 우리들의 세계관에 흡수할 채비부터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실재론적 철학자들이 비관주의로 흐르게 된 데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의 기계론적 우주관에는 인간적 가치나 개인적 성취에 대한 희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들도 불교의 고성제에서 제시한 것처럼 생에 대해 환상이 없는 솔직한 관점을 취하긴 하지만 그 치유책은 전혀 모른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더 높은 진리도 있을 수 없고 그렇다고 인간과 인간의 열망에 대해 명백히 적대적이거나 기껏해야 무관심할 뿐인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조여드는 이 현실로부터의 구원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절망을 영웅적으로 감내하는 데서 오는 어떤 자만심이 그들을 지탱해주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이성보다 신앙심을 선택하면서, 믿어지지 않는 종교를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믿는다는 키에르케골과 같은 사람을 그들은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교가 그리는 우주의 그림이 과학자들의 그림이나 마찬가지로 편안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불교의 가르침[佛法]은 더 높은 진리와 그 진리를 실현하는 방법을 핵심으로 하며 그것을 지혜의 눈만 뜨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실재론적 우주관을 희망찬 세계관이 되도록 고양시켜주는 것은 바로 이 불법이다. 불교와 과학적 사조간의 대화는 이제 겨우 시작단계에 있지만 그 진전에 따라서는 여러 면으로 새롭고 중대한 우주그림 해석방법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전통적 종교체제에 대한 신념 상실은 정신적 공백을 남겨주었고 이 공백을 메우려 사람들은 물질적 발전에 열중할 수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다. 아니면 이런저런 대의명분을 찾는 끝없는 투쟁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이런 투쟁을 하다보면 올바르고 정의롭다는 것이 어느새 불의로 꼬이기 항 다반사이며 그 수단들도 목적에 어울리지 않게 변해버린다. 그렇다고 이런 위험을 너무 경계하다보면 그 사람은 세상이 떠맡기는 대로 감수해 나가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가치를 전적으로 배제한 삶을 살수는 없다. 순리 속에 가치를 찾지 못하면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런 현상은 과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코난트가 그의 책 『현대과학과 현대인』에서 지적했듯이 과학에서도 가치판단이 도처에 개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가치판단을 삶 그 자체에 적용시켜보면 삶의 전체적 구도는 분명히 궁극적 목적이나 도덕적 의무와 무관할 뿐 아니라 삶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고통과 불행 역시 이렇다할 목적도 없을 텐데 인간의 전체 경험에서 이런 불쾌한 양상들이 왜 판을 쳐야 되는 건지 당혹스럽기만 할 따름이다. 19세기 말엽을 풍미하던 낙관주의 철학은 오늘날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행여 실용주의적 측면에서라도 건설적인 것들에 기대를 걸어보려 해도 자연 정복에 승리를 거듭하면 할수록 인간성이 점점 더 표류하게 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는 형편에서는 그러한 가능성 역시 더 희미해져가고 있다. 핵 정치에 사로잡히고 달을 소유권의 대상으로 만들어 가는 판에 사람들은 진보라는 단어의 진정한 뜻 따위는 묻지 않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현대 철학과 마찬가지로 문학과 예술도 음울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황무지』이후에 T. S. 엘리어트의 관심이 종교 쪽으로 기울었고 A. 헉슬리의 예리하고 박식한 기지가 혼합적 신비주의로 흘러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한번 울린 가락은 그들의 그 이후 작품이나 다른 이들의 작품에서 계속 메아리쳤다. 그 후 종교에서 답을 구하고자하는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일군의 작가들이 정치적 몸짓을 통해 그 대안을 찾아보려 애써서 한때 활력을 갖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깊이가 있거나 가치가 있는 그 무엇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체로 문학이 현재로서는 인생의 괴로움을 그려 보이기만 할 뿐 그것을 경감․완화시키는 구실은 못하고 있다. 이전에는 기쁨이 슬픔으로 돌변하는 식의 시인들의 상투적 탄식이나 16세기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들이 보였던 영혼의 어두운 면에 대한 관심들이 그래도 참을만 했던 것은 거기에는 최종적 절망의 조짐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햄릿은 죽음을, 한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그리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독백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방금 본 아버지의 망령이 실은 거기서 돌아온 것이 아니었던가. 고전 비극에는 이처럼 슬픔과 엄청난 공포도 있었지만 오늘날 허무주의가 안겨주는 것 같은, 심장까지 떨리는 오싹함이나 삶의 철저한 무의미에서 오는 20세기적 전율은 없었다. 괴로움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때 겪은 고통은 오히려 최상의 문학과 예술을 위해 풍부한 기초적 자료를 마련해주었고 깊이와 의미를 부여하는 진실성을 제공했다. 우리가 인간의 실존을, 전체 인류적 상황과의 유대를, 고통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과의 동일화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비극 속에서이다.


  “세 가지 고가 있느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세 가지인가? 마음과 몸에 본유(本有)한 고(dukkha-dukkhatā 苦苦性), 온(蘊)에 인한 고(sañkhāra-dukkhatā 行苦性), 변이(變異)로 인한 고(vipariṇāma-dukkhatā 壞苦性)가 그들이니라.”(『장부』 33경)


  이 말씀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 겪는 경험적 고의 형태를 넘어서 우주적 필연성으로서의 고에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육체적 고는 가장 분명한 형태로 알 수 있는 고이니 더 설명이 필요 없고, ‘온의 고’란 찰나적으로 명멸하는 존재 그 자체에 본유하는 불편, 불안, 불안정한 상태로서 항상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변이의 고’는 행복의 무상한 성질에서 오는 것이다.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 때문에 행복은 그 안에 고통이 잠재해 있으며 그것이 언제든 드러날 수 있다는 양면을 모두 담고 있다 하겠다.


  이 세 가지 면의 고 중에서 특별히 불교세계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잘 알 수 없는 것은 두 번째 ‘온의 고’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온은 색․수․상․행․식인 오온인 바 살아있는 유정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색온(色蘊)은 보이고 만져지는 형태물로서 물질적 온이다. 수온(受蘊)은 안․이․비․설․신․의 여섯 감각에서 벌어지는 감각들의 쌓임이다. 상온(想蘊)은 이들 감관이 그 대상 즉 색․성․향․미․촉․법과 접하는 데서 생기는 지각 인식들이다. 행온(行蘊)은 사유작용, 상상작용, 기억 그리고 의지의 작용이다. 마지막으로 식온(識蘊)은 특정 찰나에 작용하고 있는 의식의 내용 전부이다. 이 온들은 모두 복합적이고, 조건에 의해 만들어졌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변화상태에 있으므로, 다시 말해 생멸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찾아도 그들 속에 견고하고 지속하는 실재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이처럼 오온은 조건들이 흐름을 이루며 흐르고 있는 것 이상 그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인격 같은 것이 있을 여지가 없다. 즉 의식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 사실은 시공을 통해 흐르고 있는 인과의 연속체이며, 어쩌다 문득 의식의 대상으로서 알아차리게 되는 실존성도 그 순간에서 끊어본 영원한 흐름의 한 단면인 것이다. 존재완성을 이행해 내지 못하고 언제나 어떤 존재로 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할 뿐인 그들의 무상성 바로 거기에 온고(蘊苦)가 본유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 속의 동일체’라는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일체를 원인과 결과의 상관 관계체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동물인지 식물인지 구별하기조차 모호한 원생동물이 겪는 일련의 탈바꿈에서도 고도로 복잡한 유형의 개별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과연 개별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살아가는 과정 중 어느 단계에 있는 원생동물 개체 하나를 두고 그것이 그 앞 단계에 존재했던 것과 ‘동일’한 것인지, 그 다음 단계의 그것과 동일한 것인지 누구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원생동물군은 독자적으로 여타 조건들과 무관하게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각 단계의 탈바꿈은 그 앞에 일어났던 탈바꿈 과정들의 후속결과이며, 각 단계는 또한 외부조건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생의 기본구조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와 같은 원리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역시 오온 이외에 어떠한 정신적․물질적 구성요소를 달리 더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실체’라 부를 그 어떤 것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자아는 한낱 조건에 의해 규제된 주관적 현상일 뿐이며, 영적 생활이란 것도 일련의 정신적 사건의 연속일 뿐이다. 한 인간을 이루기 위해 간여하는 모든 것을 일체 현상의 ‘세 표상[三法印]’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무상․고․무아가 그것이다. 무아[anattā, 산스크리트어로는 an-ātman, 영혼이 공함]는 존재를 이루는 영속 불변의 어떤 정수(精髓)가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온(蘊)들이 정신과 육체 양면에서 선행 조건, 그리고 동시 발생하는 조건3)에 의해 생겨나서 생에 대한 집착의 원인을 만들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들은 생의 충동을 지속시키고 끊임없이 재보충하는 기능 때문에 취온(取蘊)이라고도 불린다. 이 취온은 존재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고에 단단히 붙들어 매는 갈고리 역할을 한다.


  모든 생물은 자극의 원리에 의해 유기적으로 진화하고 있으므로 인간 역시 자극에 반응하도록 조건지어져 있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고는 인간이 오히려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거나 고와 낙이 자극의 형태로 서로 겹쳐 있어 어떤 때는 고인지 낙인지도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육체적 흥분도 과도하게 되면 즐거움에서 고통으로 바뀌어 버린다. 심미적 자극도 마찬가지로 기쁨과 슬픔의 경계를 넘나든다. 낙조의 아름다움은 마음을 심란하게 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그런 이유로 그 아름다움을 피하려 들지는 않는다. 자학증을 두고 비정상적이라 간주하지만 실은 완벽하게 ‘정상적’이다. 사람들은 끔찍한 비극을 통해 연민과 공포를 맛보려 일부러 극장에 간다. 이런 일들은 제쳐놓더라도 즐거움은 본질적으로 고통의 원천이다. 쾌감은 지속되는 동안에는 혼란이자 동요인데 막상 끝나고 나면 아쉬워지고 더 계속되거나 반복되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즐거움의 이런 보편적 속성 외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대할 때 보이는 반응에도 어느 정도의 고가 포함되어 있으며, 또 즐거움을 추구하다 보면 부닥칠 수밖에 없는 위험에도 역시 고는 포함되어 있다. 사치나 감각적 쾌락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 때 괴로워하며 또 그런 것을 즐기면서 절제를 행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굴레 벗은 방종의 결과는 자제에 따르는 고통보다 훨씬 더 괴롭고, 또 오래가는 고통을 안겨주기 십상이다. 이런 사실은 거친 육체적 쾌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극도로 세련된 지적, 심미적 즐거움 역시 강박증이 될 수 있고, 이런 강박증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다 보면 일종의 정신적 난장판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그 결과 심리적 파탄을 초래하게 된다. 어느 모로 봐도 즐거움은 그 기능의 일부로서 고통이라는 자극을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자극의 결과로서 고를 초래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궁극적 의미에서 모든 느낌을 자극이라고 볼 때 그것은 고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람직한가의 여부는 순전히 주관적인 분별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고를 다시 네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드러나지 않은 고, 드러난 고, 간접적인 고, 직접적인 고가 그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고는 성냄이나 열정, 갈망에 수반하는 간난심(艱難心)에서처럼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심리적 고통이나 그 고통의 원인을 말한다. 또한 두통처럼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육체적 고통의 형태가 될 수도 있다. 드러난 고는 고문을 당할 때의 고통처럼 고통과 그 원인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간접적인 고는 감각적 즐거움처럼 그 뒤에 겪을 고통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직접적 고는 당장 고통을 겪을 때의 고이다.


  인간이 알아차리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고는 우주론적 면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는 삼법인의 하나로 모든 현상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 치고 생멸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상․고․무아의 세 표지는 물질과 비 물질을 막론하고 모든 복합체[諸行]에서 볼 수 있다.


  물질은 사대(四大 : 地․ 水․ 火․ 風)로 만들어지며, 이 사대는 물질이 물질인 소이연(所以然)을 범주별로 나타내는 것이다. 편의상 이 소이연을 고형[地], 점착[水], 온도[火], 운동[風]의 ‘각 요소’로 규정한다. 때로는 공간을 제 5요소로 추가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분류는 물질의 원자 단위들의 기능과 그 다양한 변화를 그리려는 철학적 목적에 매우 적절한 것이다. 이들 원자들과 그 구성 요소들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상태에 있고, 이 변화 과정 속에서 에너지는 감지할 수 있는 고형적 물질체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 물질체가 한낱 ‘외관’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은 B. 러셀의 다음 말에서 지적되고 있듯이 현대 물리학에서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다.


  “가공이 아닌 실제라 취급될 수 있는 그 무엇을 추구하여 물리학자들은 일반 물질을 분자로, 분자를 원자로, 원자를 전자와 양자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제 전자와 양자도 하이젠베르크에 의해서는 방사선계로 그리고 슈뢰딩거에 의해서는 파장계로 귀착되고 있다. 이 두 이론은 수학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내용이 된다. 그리고 이런 결론들은 조잡한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니고 대다수 전문가들에게 받아들여진 냉철한 수학적 계산이다.”


  방사능으로 존재하든, 파동으로 존재하든 간에 물질이 에너지로 귀결된 이상 모든 현상은 정적(靜的)인 실체로 볼 것이 아니라 공간․시간의 연속체 속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용이하게 이해하려면 온갖 종류의 에너지가 한결같이 지니고 있는 특성, 다시 말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환하는 특성을 지닌 전개과정으로 파악하면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개체의 문제가 제기된다. 원생동물처럼 원자 역시 격렬하게 동요하는 존재인 이상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계속 이어지는 동일체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우주 그 자체의 기본 구조가 에너지라고 할 때 이 말은 바로 쉼 없는 불안과 동요가 우주의 기본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개인 존재를 구성하는 오온을 분석할 때에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나 그 밖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크게 나누면 사대(四大)로 이루어진다는 점부터 분석하기 시작하여 그 요소들이 내재하는가 외재하는가 즉 자신의 몸 안에 있는가 외부 세계에 있는가에 따라서 분류 열거하신다. 이렇다면, 견고성[地 paṭhavī]은, 그것이 자기 몸의 것이든, 바깥 대상물의 것이든, 모두 같은 종류이고 동일 범주의 현상에 속하고, 또 어디에서 발견되든 그것은 생멸(生滅)이라는 동일 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점착[水]․온도[火]․움직임[風]의 요소들도 안과 밖에 모두 있기는 견고성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지․수․화․풍의 분류에 따라 매 항목을 끝맺을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언명하셨다.


  “자, 안에 있는 요소든 밖에 있는 요소든, 그 성질은 동일하다.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참 지혜로 알아야 하느니, 이 요소는 나에게 속하지 않고, ‘나’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란 것을.”


  몸의 일부이건 다른 물체를 구성하는 것이건 간에 물질적 실체는 기본구조에 있어 사실 한 종류의 것이다. 물질을 고체․액체․기체의 세 가지로 분류하는 대신 불교의 우주분석에 있어서는 경부성(輕浮性 lahutā) 유연성(muditā) 활동성(kammaññatā)의 세가지 집단 특성으로 규정한다. 물리학에서 볼 때 절대적으로 고체적이거나 기체적이거나 액체적인 것은 없고 오히려 각각은 어느 정도는 나머지 두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상 고체․기체․액체의 분류는 정확한 것이 못되고, 사대에 경부성, 유연성, 활동성의 세가지를 모두 적용시키는 분류방식이 불교의 철학적 목적에 훨씬 잘 어울린다. 이렇게 분류하는 불교적 지혜를 특히 육체에 적용하는[身隨觀] 목적은, 또 일체의 물질을 포용하는 보편적 원칙을 세우려는 목적은, ‘마음’으로 하여금 인간의 몸은 다른 물질적 대상과는 구별되는 영적 유기체라는 식의 믿음에서 깨어나도록, 또 몸을 ‘자아’ 또는 자아에 불가결한 구성요소로 더 이상 보지 않도록 만드는 데 있다.


  부처님께서는 네가지 비물질적 또는 정신적 온(蘊)들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신다. 감각[受], 지각[想], 의도적 활동[行], 의식[識]은 모두 인과적으로 조건지어진 요소들이다. 이들의 ‘수명’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생멸하는 심찰나들로 이루어진다. 어떤 존재가 의식[識]의 면에서 실존하는 실제 기간은 이들 의식의 점(点)순간의 존속 기간보다 길지 않은데, 이런 순간들이 인과의 실에 꿰어있기 때문에 자기 동일성이 지속된다는 환상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신다.


  “모든 온(蘊)들은 덧없다. 모든 온들은 고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것들은 실체가 없다. 몸은 덧없다, 느낌은 덧없다, 지각은 덧없다, 정신적 온들[諸行]은 덧없다, 의식은 덧없다. 그리고 덧없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에 휩싸이게 되며, 고와 변화에 휩싸여 있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에게 속한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을 수 없다. 따라서 육체적 형태를, 감각을, 지각을, 정신적 온들을 또는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건 간에, 거창하든 미세하든, 고양된 것이든 저급한 것이든, 멀든 가깝든, 있는 그대로 참 지혜로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고(苦)라는 말은, 가벼운 불만에서 절망에 이르기까지, 가벼운 실험에서 뼈저린 고뇌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정신적 물질적 편치 않음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빠짐없이 완벽하게 천착해야 한다. 색온 즉 살아있는 유기체는 구석구석이 무상하지 않은 부분이 없기에 이들을 지배하는 고의 형태는 불안정하고 계속 바뀌고 있는 성질에 본유한 고이며 이러한 고는 진실된 존재의 상태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 채 무엇인가로 계속 되어가고 있는 과정일 뿐인 데서 오는 고이다. 다음 제온(諸溫) 중 정신적 온들의 경우에는 불안정이라는 특징이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성마름, 좌절, 분노, 걱정, 갈등하는 욕구와 정서들, 일체의 고민에 찬 상태들, 이들이야말로 고로 이해해 마땅한 것들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행복이라 알고 있는 것마저도 흥분이라는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행복’도 그 반대 개념, 즉 우리가 ‘슬픔’이라 부르는 불안에 대조될 때에만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즐거움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은 짝을 이루는 상대적인 것으로 그 대칭이 없이는 경험해 볼 길도 없는 그런 것들이다. 불교는 식(識)이 이끄는 삶이라는 조건이 전제되는 한,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순수한 행복이 있을 여지는 없다고 단정한다. 왜 이런 단정을 하는지, 그 이유는 다음의, 고의 원천과 발생을 다루는 제이성제(第二聖諦)를 검토하는 장에서 더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성스러운 고 발생의 진리[集聖諦 Dukkha Samudaya Ariya Sacca]


  만약 우리가  생애만을 금생 한 살 뿐이고 한번 죽음으로써 모든 기쁨과 슬픔이 끝나는 것이라면 고(苦)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고를 줄일 수 있을 것인가만이 문제가 될 것이다. 또한 우연하게, 아무 의미도 없이 생겨났다가 스러지는 사건들 속에 역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끝나고 마는 그런 인생행로라면 그 안에 도덕적 가치가 들어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때 그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잣대는 선과 악, 정(正)과 사(邪)의 추상적 개념을 언제든 밀어내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비심조차도 인간의 가치척도에서 그다지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며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라도 자신의 괴로움을 가장 잘 피한 사람이 가장 성공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인류가 이런 가치관을 받아들였던 적은 없었다. 자연의 제반 조건들이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우주에 이렇다할 도덕 질서를 상정할 근거는 제공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인간은 마치 챙겨야 할 어떤 절대 가치가 있기나 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온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이 실재한다는 생래적 확신을 갖고 있어서 심지어 법을 어길 때조차도 어겼음을 시인하는 정도이다. 도덕질서에 대한 이런 본능적 신념 때문에 우리는 유정물 세계를 괴롭히는 몹쓸 것들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탐구하려 들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의관념에 일치되는 이유를 찾으려 들게 되는 것이다.


  불교 역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도덕률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체계에서는 생명과정의 지속이라는 것이 절대 불가결의 전제가 된다. 이 지속 현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식으로, 즉 의도적 행위인 깜마[業]가 원인이 되고, 이들에 뒤따라오는 즐거운, 즐겁지 못한, 무덤덤한 경험들을 과(果)로 삼는 그러한 지속이다. 도덕적으로 건전한 생각․말․행동에서 좋은 결과가 산출되고, 도덕적으로 불건전한 생각․말․행동에서 나쁜 결과가 산출되는 식의, 사람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저절로 진행되는 이러한 원리 작용에 의해 도덕적 균형이 유지된다. 재생 또는 불교 용어로 윤회가 뜻하는 이 생명의 계속성은 영혼체의 환생과는 다르다. 그것은 인과(因果)의 연속체 속에 전개되는 “저것이 있었기에 이것이 있게 된다”고 표현되는 관계성의 개별적 흐름이다.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동일성이란 오로지 이와 같은 인과 관계에서 유래된 것일 뿐으로 마치 어린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80대 노인이 되는 인생 노정에서 볼 수 있는 동일성과 같다. 다시 비유컨대 우유가 응유가 되고 응유가 치즈로 변하는 것과 같다. 이는 순전히 인습적인 의미에서 ‘동일성’일 뿐으로 원생 동물이나 하나의 원자가 각기 다른 단계에서 보여주는 관계와 같은 것이다.


  사후에도 연속상태가 일련의 재생의 형식으로 있다는 가르침은 불교에서만 펴는 것이 아니고 가장 오래된 동서의 여러 종교적 전통들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점은 불교가 인격체를 하나의 현상으로 다룬다는 점이며, 이는 존재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즉 불교에서는 오온 중 어느 한 요소도 살아남아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원인이 있었으면 반드시 거기서 한 결과가 뒤따라 나온다는 우주적 규칙에 부합하여 모든 온들이 부단히 재생된다고 가르치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불교의 윤회론은 두 가지 근거에서 자주 비판을 받는다. 첫째 윤회는 무아설과 모순된다는 것, 둘째 불교가 독단적이 아님을 표명하면서 근저에 독단을 깔고 있다는 비판이다. 첫 번째 반대이론에 대해서는, 생물학, 심리학 심지어 순수물리학의 전개과정에 나타나듯 동일성을 인과적 연관에 의해 제대로 이해하면 불교에서 인격을 역동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진실하다는 점, 그리고 보통 ‘자아’라는 말을 쓸 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의 ‘동일성’4)은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번째 비판 역시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 개체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주관적 인식의 어떤 부분, 즉 개체화된 인식 경험은 사후에도 남아 있을 것이라는 직관적 느낌은 접어두자. 더 중요한 사항으로 이 우주에 정말 정의나 도덕적 질서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금생 이후까지 연장되는 도덕적 응보 법칙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점도 잠시 접어두자. 그러나 윤회가 사실이라는 것, 예컨대 최면상태와 같은 상황에서는 전생을 기억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또 계속 늘어나고 있다. 윤회설은 입증되지 못한 가설이 결코 아니다. 불교 교의에 부합하는 목적론에 입각해서 그 필연성을 사유하든가 또는 남들이 제시하는 증거나 개인적 체험을 통해 직접 접근하든가 이 두 가지 길로 우리가 얼마든지 다가갈 수 있는 진리이다. 기억이란 워낙 한계가 있는 것이고 또 기억은 여러 주변환경에 의해 방해를 받기 때문에, 단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전생은 없다고 하는 상식 선에서 주장하는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전학이나 기타 속(屬)에 관한 연구를 검토해 볼 때 불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재생과 상반되는 점은 전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런 연구는 정신적 에너지가 무기물로부터 유기적 생명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종의 정체성을 유지해내는 과정에 대해 꼭 필요한 부분을 보충해 준다. 화학적 성질만으로 된 물질을 통해서 유전형질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그 구체적 방식은 생물학에서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데 이런 문제점들이 해명되려면 어떤 추가 요인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편의상 ‘본능적’이라고 부르는 동물들의 행태 ― 어느 정도는 인간에도 적용되는 ― 와 같은 한 속(屬)을 이루는 현상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형질의 지속에 대해서 생물학은 적절한 설명을 못하고 있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연속체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훨씬 알기 쉬워진다. 물질적, 정신적 두 길로 진행되는 인과(因果) 질서의 산물이 생명이며 유전적 특성이 전달되는 유전형질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업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정신적 에너지의 물질적 매개수단이다.5)


  부처님께서 고의 원인을 금생뿐만 아니라 존재체의 이전 상태[前生]에서도 찾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존재의 지속에 관한 지혜의 눈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분께서는 원초적 충동, 유정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에서 그것을 발견해 내셨다.


  “무엇이 성스러운 고의 원인의 진리인가? 진실로 갈애가 바로 그것이니, 재생을 일어나도록 만들고 즐김(nandi)과 욕심(rāga)과 결합하여 때로는 여기서 때로는 저기서 만족을 찾는 것이 바로 갈애이다. 이 갈애에 세 종류가 있으니 감관적 갈애[欲愛], 존재하고픈 갈애[有愛], 자아 멸절을 구하는 갈애[無有愛]이다.”(『장부』22경)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감관적 갈애에는 마음에 드는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정신적 인상에 대한 갈애의 여섯 가지가 있다. 이때의 여섯 감각기관을 육처(六處:여섯 지각처)라 한다. 존재하고픈 갈애는 세 가지 형태를 취하는 바, 생이 구현되는 영역에 따라 욕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 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 무색계 또는 정신적 세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가 그 셋이다. 더러 얘기되는 자아 멸절을 구하는 갈애란 것은 사람이라는 현상적 존재체의 제온들이 바로 영혼의 구성체이며 이 영혼은 죽음으로 멸절한다는 잘못된 견해에 수반하는 독특한 부류의 욕구이다.6)


  또 다른 분류에 의하면 갈애는 재생의 근저가 되는 근본적 갈애(vaṭṭa-mūla-bhūtā-purima-taṇhā)와 행위로 드러나는 갈애(Samudācāra-taṇhā)의 두 가지 항목으로 나뉜다. 첫 번째 갈애는 연기법에 나타나는 것처럼 존재의 윤회를 진전․유지시킨다. 즉 “무명(無明: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이 조건이 되어 행(行)7)이 일어나고, 행이 조건이 되어 식(識: 여기서는 특히 윤회 연결 의식; 정신적 충동으로 마치 전기의 방전불꽃처럼 한 생명연속체와 다른 생명연속체를 잇는 교량역을 하는 의식)이 일어나고 식이 조건이 되어 명색(名色: 새로운 생명연속의 마음과 몸)이 일어나고 명색이 조건이 되어 육처(六處: 감각적 지각의 여섯 분야)가 일어나고, 육처가 조건이 되어 촉(觸: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간의 접촉)이 일어나고, 촉이 조건이 되어 수(受:느낌)가 일어나고, 수가 조건이 되어 애[渴愛]가 일어나고, 애가 조건이 되어 취(取: 굳어져 습관화된 갈애)가 일어나고, 취가 조건이 되어 유(有: 생명 추진력)가 일어나고, 유가 조건이 되어 또 다시 생이 일어나고, 생으로부터 노사가 와서” 윤회의 고리가 매듭지어진다. 십이연기는 이런 방식으로 갈애를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걸친 생의 인과 관계를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요약 정리하고 있다.


  “아난다여, 갈애가 느낌으로 인해 있게 된다는 것은 이러해서이다.”(『대인연경 (大因緣經)』) 그러나 느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몸[名色]이 먼저 있어야 하며 마음과 몸은 그 이전의 갈애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고리는 과거로 무한히 소급된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이 제시하는 개념이다. 연기법은 시간적 연속관계의 체계라기보다는 서로 맞물려 있는 조건들이 이루는 체계로서 사실상 인과의 두 가지 양식인 순차적 인과와 동시적 인과를 다 지지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란 어디를 기점으로 구분해야 하는가. 그것은 두 곳에서 구분할 수 있는데, 십이연기 중 새 생이 일어나는 ‘명색(名色)’이나 ‘태어남[生]’ 둘 중 어디를 잡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뒤에서 보겠지만 연기의 고리를 끊는 것은 ‘갈애’와 ‘무명’에서만 가능한데 이들은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를 지탱해 주고 있는 지배적인 두 심리적 요인이다.


  불교의 윤회관이나 우주관에는 조물주에 관한 문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서로 관련 있는 조건들의 복합체로 보게 되면 최초의 원인을 놓고 이런 저런 이론을 내세우는 일들이 모두 부질없는 짓거리로 되고 만다. 인과의 논리 속에서는 그 어떤 원인도 그 이전 원인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절대적 시초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신 자신도 그를 창조한 또 다른 창조주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선행자가 없다면 인과율 상 창조주의 존재 근거가 무너진다. 궁극적 의미의 시초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일부 현대 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 이해력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청정도론』이 서술하고 있는 경지를 알아차릴 단계에 이른 셈이다.


    “여기에는 윤회의 창조주가 될 어떤 신도 브라흐마도 없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공(空)한 현상들이 흘러갈 뿐.”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베르그송 류의 창조적 진화설에서 말하듯 창조행위는 매 순간 순간 실현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주의 기본적 에너지로 볼 수 있는 것이 ‘갈망하고 있는 충동’이라면 이것이 바로 최초의 원동력이 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의 이 우주에 시작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이 우주도 자연법칙(niyāma)을 좇아서 존재하게 된 것이지만 결코 무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최초의 우주도 아니고 유일한 우주도 아니며, 시초가 있을 수 없는 무한순환의 연속물 중 한 편에 불과하다. 한 우주 체계가 끝나면 또 다른 우주가 들어서는 것이다.


  현재의 우주체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과학에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팽창우주론과 정상(定常)우주론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약 50억년 전으로 잡고 있다는데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불교우주관은 이 우주의 시작형태야 대 폭발이든 다른 방식이든 간에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이나 에너지는 이전 우주의 구성 요소에서 유래한다고 보며, 또 이 우주를 활동시키는 힘도 이전 우주에 속한 존재들의 업력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세상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은 유정물의 생명이 밟는 진화 및 퇴화의 과정과 유사하다. 한 우주 체계가 종말에 이르면 이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은 붕괴하고, 극미 단위들은 분산되거나 압축되어 모양이나 밀도가 똑같아 어떤 차이도 없이 일정한 분포 상태로 되는데 이것이 곧 공(空)의 상태이다. 우주는 여러 겁 동안 이런 잠자는 상태로 있다가 때가 되면 휴지상태의 에너지가 다시 활동상태로 접어들고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의 물리법칙이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질의 엉김이 형상화되기 시작하고[色의 형성], 이로부터 고립된 우주들이 나타나 모양새를 취한다. 시간이 훨씬 더 경과하면 유기적 진화가 시작되고 진화과정이 진행되다가 순환의 끝에 다다르면 우주 구조는 다시 붕괴되며 이런 모든 과정[成住壞空]이 되풀이된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진화와 퇴화는 서로 꼬리를 물고 끝없이 반복하여 돌고 돌지만 이 과정들은 언제나 생명체에서 야기된 업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모든 의지적 행위는 욕망에서 유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듭 되풀이하고 또 지속시키는 힘이 다름 아닌 갈애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갈애의 생성유래에 관해서 『아비담마타상가하[攝阿毘達磨義論]』8)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명으로 인해 중생은 무상․무아라는 존재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중생은 세상 사물이 실재하며 지속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즐긴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한 갈애를 만들어낸다. 갈애로 인해 중생은 어떤 것은 얻으려 하고 또 어떤 것은 피하려 든다. 이러다 보면 생명과정의 지속, 즉 생존 투쟁의 염세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중생의 갈애와 집착은 육체가 허물어져도 끝나지 않고 다른 생에서 생존 투쟁을 계속한다.


  한 생 동안 지은 선행과 악행은 다음 생에 육도(六道) 중 어디에 태어날지, 어떤 심적 성향을 타고날지 그리고 그가 타고나는 업식(선업 악업의 결과로 생긴 식) 일체를 결정한다. 이 업식은 그 자체의 성질에 상응하는 정신적 육체적 온들[五蘊]을 새 생명에서 일으킨다. 이 정신적 육체적 온들을 연(緣)하여 여섯 감각의 인지영역(six fields of sense-cognition)을 획득한다. 다시 여섯 감각의 인지영역을 연하여 감각 대상과의 접촉[觸]을 얻는다. 이 접촉은 느낌을 낳고, 느낌은 갈애를 일으키고, 갈애는 집착을 일으킨다. 집착은 생명과정을 지속시킨다. 집착은 존재가 죽어도 끝나지 않고 다음 생으로 계속 숨을 뿜는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생이 다시 시작되고 온갖 슬픔과 비탄, 괴로움과 근심, 절망을 겪으며 늙고 죽는다. 무명의 굴레에 묶여있는 한, 중생은 끊임없이 나고 죽는 윤회를 거듭한다. ”(『아비담마타상가하』 Ⅷ. 1)


  중생은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근본 무지[無明]탓이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유를 개념적으로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명은 갈애와 이어져 있기 때문에 갈애에 기인한 정신적 번뇌가 늘어나면 무명도 깊어지고, 번뇌가 줄면 무명도 엷어진다. 하나의 주어진 결과를 산출해 내기 위해서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요소들이 거들어야 한다는 것은 불교의 인과 관계 체계에서는 불변의 법칙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한 생명체가 탄생되려면 전생에 이루어진 정신적 에너지가 유정물을 형성하는 방향에서 생물의 물리적 전개 과정과 결합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탄생도 과거 존재들의 의업(意業)의 총체가 새로운 진화의 순환을 불러오는 쪽으로 우주의 물질 요소를 활성화시킨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과정은 양면성을 갖는다. 순전히 물리적 법칙에 의거하는 한, 부분적으로 기계론적 과정이 되며, 한편 정신적 원인들과 의지의 개입에 의존함으로써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변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의지의 개입이란 욕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욕구는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다. 만일 욕구가 전혀 없다면 자연의 자동적 전개과정이 지배적이 되어 우주는 한낱 생명 없는 기계로서 시종(始終)하고 말 것이다.


  연기(緣起)에서 각 요소[支]들이 배열되어 있는 순서를 보면 상호의존의 형태가 항상 일정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는 과거의 원인들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요소들과 의지의 작용에 의해 수정 변경될 수 있는 요소들이 서로 번갈아 있다. 이리하여 과거의 원인들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무명이 의도적 사유와 행위[行]를 일으키는 바 여기서 무명은 사유와 행위에 끼치는 지속적인 영향력이 된다. 다시 죽을 때에는 한 심찰나[心刹那]가 일어나서 재생 연결식을 구성하며, 이 식(識)의 성격은 그것에 선행하는 의도적 사유와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하여 과거의 업은 미래의 추세를 모양짓고, 재생 연결 심찰나는 이 추세를 새 생명에다 옮겨준다. 마치 종자 씨앗이 화학작용을 통해 식물의 미래 형태를 이어 나르고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이 형태는 후속되는 상황에 따라 어떤 세목에서는 바뀔 수도 있다. 새 존재에 밀어 넣어진 마음과 몸은 자연법칙에 따라 감각기관과 그에 상응하는 감각적 지각 영역을 갖추게 된다. 여기서 외부세계와의 접촉, 그리고 이 접촉에 부수하는 느낌이 나오게 된다. 여기까지는 과거의 인과질서에 속하는 두 가지 요소인 무명과 의도적․정신적 형성력[行]과 그리고 그들의 결과물인 재생 연결식[識]에서 느낌[受]에 이르는 다섯 요소들과의 관련성을 설명하였다. 이 후자의 다섯 요소들은 과거의 업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이 느낌[受]의 시점에 이르러 바로 자유의지의 요소가 작용하기 시작한다. 느낌은 그 성질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데 반해 그 느낌에 대한 심적 반응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즐거운 대상에 대해 욕구하는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고, 이는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촉진시키겠지만, 만약 도덕적 감각이 우리에게 그 행동은 나쁜 것이라고 일러줄 경우, 의지는 그 행동을 막을 수 있다. 심지어 욕구 자체도 의지활동이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데에 따라 줄이거나 억제될 수도 있다. 따라서 연기의 다음 단계 즉, 갈애[愛], 집착[取], 생성[有] 등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곧 인간이 각자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측면을 반영한다.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불교의 업설을 숙명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업설을 숙명론으로 보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불교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그 무엇보다도 더 강조한다. 의지가 개입되는 단계인 애․취․유가 다시 원인으로 작용하여 초래하는 미래의 결과가 연기고리의 마지막 부분인 생․노사에 집약되어 있음을 우리는 본다.


  시간적 순서의 관점에서 보면 연기(緣起)는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에 해당하는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들 세 부분은 다시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즉, 능동적으로 인(因)을 짓는 생성[有]의 단계(kammavaṭṭa)와 그 인(因)들의 결과[果]로 나타나는 피동적인 단계(vipākavaṭṭa) 두 가지이다. 무명과 행은 능동적인 단계이고 태어남[生]과 늙고 죽음[老死]은 피동적인 단계이다. 현세에 해당하는 중간 부분은 피동적인 단계와 능동적인 단계 둘 다 포함한다. 식(識)으로부터 수(受)로 이어지는 다섯 단계는 피동적 단계이고, 애, 취, 유는 능동적․창조적인 단계를 의미한다.


  다시, 시작 부분인 무명과 행은 과거에 이루어진, 적극적이고 원인이 되는 과정을 요약하는 것이고 끝부분인 노․사는 미래로 이어질 피동적 결과의 연속을 요약한 것이다. 이처럼 순환고리는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유지해 나가는 인과(因果)복합체로서 자기 종결적이며, 이 인과의 연결은 시간적 순서일 경우도 있고 상호 지탱해주는 요인의 형태로 동시존재적 관계일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확하게 알고 보면, 연기과정은 절대원인결정론도 아니고 절대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제 조건들의 상호관계인 바 이 관계는 궁극적으로 개인이 선행과 악행의 두 길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에 좌우되는 것이다. 바로 이 선택에 의해 우리 각자는 스스로 자기 재생의 성격을 결정한다.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모든 존재는 이 선택 때문에 생에서 고를 부여받게 된다. 즉, 자기가 다시 타고날 생의 성질을 각자가 홀로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결단의 고뇌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이 고뇌야말로 일종의 고인 것이다. 인간의 조건보다 나은 상태(천상)에 태어날 것인지 아니면 보다 하열한 세계에 태어날 것인지, 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면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전적으로 바로 지금 여기서 행하고 있는 신(身)․구(口)․의(意) 삼업에 달려있다. 간단히 말해 갈애를 어느 정도 다스려내는가에 따라 재생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곧 알게 되겠지만 불교는 갈애를 남김없이 없애는 방법, 연기과정을 완전히 끝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9)


  다음 세 번째 장(章)인 멸(滅)의 단계에서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룰 것인데 그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갈애의 또 다른 역할, 즉 갈애가 유기체의 진화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적 해석이 아니더라도 삶이 윤리적 가치나 목적 면에서 공허해진다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런데도 어찌 보면 유기체 구조의 진화 양식은 어떤 강력한 방향성을 내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연은 지극히 간단한 단세포로부터 정교한 감각장치와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두뇌를 갖춘 고도로 복잡한 형태를 진화시켜 내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진화 과정은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로 가득 찬 긴 세월 끝에 겨우 이루어졌고, 거기에 채택된 방법들은 낭비적이든 생산적이든 둘 다가 극도로 고통스러운 것들이어서 좀 더 잘 짜여진 계획이 있었더라면 훨씬 고통이 덜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진화과정을 전반적으로 개관해 볼 때 어떻게 보면 방향이 서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작정도 없고 부조리해 보이기도 한다. 신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리만큼 질서정연한가 하면 친절하고 전능한 지혜였으면 훨씬 모양새 있게 해냈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과학은 목적론을 은근히 싫어하여 자연계의 현상들이 어떤 방식으로 산출되는가를 해명하는 일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자연도태설처럼 유전학, 생화학 등의 분야에서 관찰된 사실들로 뒷받침되는 몇 가지 가설을 갖게 되었지만 이들은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에 치중하고 있을 뿐 진화과정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시사해주지 못한다. 진화과정을 뒤에서 밀거나 그 안에서 작동하는 힘이 무엇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것을 그 누군가의 계획으로 보고 싶어하는 일부의 태도는 생물학적 결과만 두고 보면 그럴듯하지만 계획치고는 집행과정이 너무 졸렬할 뿐 아니라 도대체 그 계획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진화를 위한 진화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때는 더 이상 붙들고 있을 흥미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뇌파전위기록장치에 나타나는 두뇌의 전기작용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 진화의 문제는 아주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이들 연구에 의해서 신경자극과 인지과정이 전기자극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두뇌가 전기, 또는 전기와 같은 방식으로 활동하는 어떤 다른 형태의 에너지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전적으로 뇌 세포 속에서 생성되는 충격만으로 뇌파전위기록 장치가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정신 활동은 마치 전파가 퍼져나가는 것과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그 진원에서 퍼져 나가는 것이라고 추론할 강력한 논거가 마련된다. 정신 활동은 감지가 가능한 빛이나 소리와 같은 것 또는 감지할 수 없는 우주 방사선과 같은 것과 맞먹는 파장 에너지이다. 이 사실이 최면술이나 정신 감응을 비롯한 초감각적 지각과 같은 각종 현상들을 한꺼번에 설명해 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설을 생물의 진화에 적용한다면 훨씬 더 많은 일들이 밝혀질 것이고 이 가설을 다시 불교에서 말하는 갈애, 즉 마음에 의해서 생성되고 우주의 물리적 실체를 작동시키고 또 그를 통해 작용할 수 있는 실제적 힘이란 개념에서의 갈애에 결부시키면 그 가능성은 더더욱 분명해진다.10)


  행동주의 심리학은 분석 가능한 정신적 반응을 보이는 모든 형태의 생명에서 기본적 동기 유발력은 욕망이며 이것이 ‘살려는 의지’로 드러난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이 욕망은 본능적 행태로 나타나서 그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고 또 그 자체를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욕망이 표층 의식 아래에 자리잡고 있을 때에는 프로이트가 ‘이드’, 융이 ‘리비도’라 부른, 모든 본능에 반드시 숨어있는 그 에너지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원초적 생의 충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름이야 어떻든 실제로는 갈구의 힘이며 정확하게는 부처님께서 재생의 근본 원인이라고 천명하신 갈애(Taṇhā)다.


  모든 의도적 행위 뒤에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생각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마음이 무명으로 뒤덮여 있는 한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 생의 마지막 순간의 식[死識]에서 방출되어 다른 ‘명색’이라는 유기체를 일으키고 그래서 새로운 생명연속체내에서 인과의 연속을 재개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생각 충격력’(thought-impulse)이다. 창조적 진화의 전 과정에 걸쳐 이렇듯 지속적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는 강력한 힘은, ‘때로는 여기서, 때로는 저기서’ 만족을 찾아 의식[識]차원의 삶을 경험하려드는 바로 그 욕망이다.


  진화의 첫 단계에서는, 개별화는 되었으나 아직 개성은 없는, 이전 겁(劫)에 발생된 갈애의 흐름이 우주의 물리적 질료에 작용하여 무기물로부터 최초의 단세포 원생동물을 탄생시킨다. 일단 이 단계에 들어서면 생명에너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행착오의 방법에 의해 점점 더 복잡하고 특수한 형태들을 만들고 정교하게 다듬어간다. 이때 생명에너지를 이루는 ‘갈애 충격력’은 ‘윤회’의 흐름과 유전법칙이 서로 병행하고 보완적으로 전개됨으로써 전달되는 것이다. 어디서든 생명에 필요한 화학적 구성요소들이 적절한 조건과 만나면 어떤 형태로든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불교가 언제나 가르쳐 왔듯이 이 원리는 우주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무수한 세계의 어디서나 두루 행해진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자료를 근거로 하여 목적론적으로도 부합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도 일치하는 그림을 그려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생명의 초보적 형태가 고등동물이나 인간처럼 복잡한 구조로 진화한 것은 갈애라고 하는 추진력의 지배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감각적 경험을 갈구하는 무의식적 욕구를 충족시키자니 더 많고 더 성능 좋은 감각기관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생명의 추진력이 생물학적 진화과정을 통해 그러한 제작 작업을 해냈다. 생명이란, 의식을 가진 창조주가 충분히 구상하여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눈멀고 더듬거리는 힘, 윤회의 길을 따라 한 생명으로부터 다른 생명으로 전달된 그 힘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진화의 과정에는 내팽개쳐진 ‘실패작’들이 무수하게 널려있다. 가령 지나치게 특화해 버렸거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환경에 맞지 않게 되어 사멸해버린 동물들처럼.


  과학은, 진화에 있어서 목적이 되는 요인을 설명해 줄 타당한 이론을 아직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새들이나 동물들이 배우지 않고도 둥지를 튼다든가 철따라 이동한다든가 하는 등등의 꽤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본능적 행동유형이 어떻게 지속되는지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전학에서 분분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문제, 즉 습득된 성질이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것인지 여부도 결론짓지 못하고 있다. 관찰을 통해 증거가 뒷받침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유전학자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싶은 심정에 끌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왜 이런 식의 전달과정을 밟아야 하는지를 해명해 줄 생물학적 얼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궁색한 이유를 든다. 이것도 역시 불교교의가 해결해준다. 본능적 행동과 습득된 성질 모두가 같은 종(種), 같은 인종 내지 문화집단, 심지어 같은 집안에 재생, 즉 같은 성질의 흐름이 거듭됨으로써 전달된다는 것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한 생에서 획득․배양된 경향성은 그 다음 생에서도 반드시 표출되게 마련이고 이는 어떤 새로운 업력이 삶의 흐름을 새로운 주파수로 바꾸어주지 않는 한 계속된다.


  불교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적 삶과 동물적 삶이 서로 다른 것은 종류가 달라서가 아니라 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별종의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다. 이 지구라는 유성에서 유기적 생명이 도달한 최고봉의 일례일 뿐이다. 인간만이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동물들은 탐․진․치가 지배한 과거 활동의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기만 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동물들은 과거의 나쁜 업의 소산인 것이다. 그들 개개의 생명 흐름은 그들을 있게 한 그 특정 정신적 경향성이 밟아야 할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는 저급한 수준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악업의 과보가 모두 소멸하면 이전에 사람의 몸으로 살았을 때 지었던 선업의 잔재, 즉 모든 존재가 잠재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가능성이 드러나서 생의 흐름은 다시 한번 더 높은 차원에서 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행과정을 이해하려면 영혼이라 하든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개인의 자아실체라는 관념을 버리고 대신 불교에서 재생을 연속시키는 전부라고 주장하는 유[有: becoming]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길밖에 없다. 인간세계와 동물세계 사이의 간격을 메워 주는 불교의 윤회와 업의 교의는 과학적 사고가 요구하는 바 유기적 통일성을 생명체에 부여한다. 동시에 이 우주가 일견 아무런 목적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도덕적․영적 법칙의 현현이라는 것도 보여준다.


  불교심리학에서는 갈애의 흐름을 서른여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 중 열여덟 가지는 ‘나’라는 주관적 개념에 의존하는 내적인 것이고 다른 열여덟 가지는 ‘나․너’라는 주․객 관계와 연관된 외적인 것이다.11) 그러나 그 종류가 무엇이든 정도가 어떠하든 모든 갈애는 생명체를 윤회의 바퀴에 얽어매는 집착[取]의 핵심을 이룬다. 탐․진․치와 같은 불선한 정신적 부수물[心所]과 연결된 저급한 형태의 갈애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증지부』(III품 33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존재가 어디에서건 생을 받게 되면 거기서 짓는 그들의 행위는 그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것이 금생이 되든 다음 생이 되든 또는 미래의 어느 생이 되든.”

  『상응부』에 이런 장중한 말씀이 나온다.


  “언젠가는 대양이 메말라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날이 오고 이 거대한 대지도 불에 타 사그라져 흔적이 없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무명의 족쇄에 묶이고 갈애의 덫에 잡혀서 윤회를 서두르고 재촉하는 존재들의 고(苦)에는 끝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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