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리뿟따
상수제자
부처님께서는 「대보시경(『장부』 14)」에서 아흔 한 겁 전의 위빳시 부처로부터 시작되는 여섯 과거불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이분들이 누구며 이 세상에 나왔던 때는 언제며 어느 부족, 어느 계급 태생이고 얼마나 오래 살면서 교화하였는지 밝히신다. 그분들이 거느렸던 두 상수제자들이 각각 누구였는지도 말씀하시면서 매번 '한 쌍의 상수제자, 뛰어난 한 쌍'이라고 하신다. 『상응부』(47:14)에서는 당신께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거느렸듯이 모든 과거불도 다 한 쌍의 상수제자를 거느렸으며 모든 미래불도 한 쌍의 제자를 거느릴 것이라고 하신다. 이로써 상수제자라는 직위가 부처님 승단체제의 필수 요건임을 알 수 있다. 우리 고따마 부처님께서 두 비구를 상수제자로 삼으신 것도 그분 자의로 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정해져 있는 어떤 틀에 따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정등각자가 따랐고 미래의 모든 계승자들이 따르게 되어있는 그러한 틀이다.
승단체제 안에서 상수제자의 기본적 역할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불법이 굳건히 뿌리내려 인간과 천상의 많은 존재에게 정신적 변화를 가져오고 해탈의 수레가 될 수 있도록 세존을 도와 드리는 것이 그 첫째이다. 둘째는 다른 비구들의 수행을 지도하면서 진실로 본받을만한 모범이 되는 일이다. 셋째는 승가의 운영을 돕는 일이다. 특히 세존께서 독거(獨居)에 드시거나 긴요한 일로 홀로 길을 떠나시면 승가를 돌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승단체제의 수장으로 언제고 지고의 권위를 지니시기에, 상수제자를 지명한다는 것이 오늘날 민주사회의 권력이양과 같은 것은 아니다. 모든 가르침은 유일한 원천, 세존으로부터 나온다. 그분만이 길을 보여주실 수 있고 그분만이 '사람을 가장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시다. 임금이 나라 일을 보는 데 재상이 필요하듯이 법의 왕이신 부처님께서도 여러 제자를 그 재능에 따라 수행의 각 방면에 책임 맡기신 것이다. 맡은 일을 누구보다 탁월하게 해낼 수 있는 두 상수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상수제자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나 특혜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상수제자가 되는 것은 승단체제 전반에 걸쳐 참으로 중차대한 책임을 맡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자비행을 거들어드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부처님을 도와 정법이 '성공적으로 번성, 확산하여 널리 호응을 받는 가운데 천상과 인간세계에 잘 선양되게끔'(『장부』16; 『상응부』 51:10) 다지는 작업이다.
모든 부처님이 하필이면 한 쌍으로 상수제자를 지명하는 이유는 각기 다른 책임 영역과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자질간의 바람직한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몸소 모든 바라밀을 완성해낸 분이시며 '모든 면에서 완성에 이른 성자[正遍知]'이시다. 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중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깨달은 아라한이라 할지라도 각기 성품과 재능이 달라서, 알맞은 소임이 차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부처는 예외 없이 맡은 바 책임 영역을 나누어 잘 살필 수 있도록 좌우에 두 상수제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 둘 중에 오른쪽이 부처님과 제일 가깝다고 여겨지는 지혜제일의 제자인데, 고따마 부처님의 경우에는 사리뿟따 존자였다. 승단 체제에 있어서 그가 특별히 맡은 소임은 불법을 체계화하고 그 내용을 상세히 분석하는 것이다. 진리를 궁극에까지 꿰뚫는 깊은 통찰력과 천양만태의 현상계에 대한 날카로운 식별력으로 법의 미묘한 함축적 의미를 드러내고 그 의미를 아주 세밀하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의 책임이다. 이런 일은 승단체제의 수장이신 부처님께서 몸소 하실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왼쪽에 서있는 또 한 분의 상수제자는 신통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데 뛰어난 분이다. 고따마 부처님의 승가에서는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신통력은 완전하게 무아의 깨달음을 이룬 뒤에 얻어지는 것으로서 남을 지배하거나 자기를 과시하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신통력은 정(定)수행을 통달하는 데서 나온다. 정 수행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 마음과 물질[名色], 그리고 그 양자의 미묘한 상호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힘을 깊이 이해하도록 해준다. 불법 특유의 자비정신을 지침으로 삼는 이 신통력은, 승단체제가 이 사바세계에 뿌리내리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또 점잖은 설법만으로는 감화하기 힘든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방편으로 쓰인다.
상수제자로서 사리뿟따가 해야 할 가장 주요한 임무는 불법을 체계화하는 일인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법륜을 굴리는 이'로서의 그의 역할을 살펴볼 때에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여기서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함께 상수제자로서 어떻게 비구들의 모범이 되고 교사로서의 역할을 해냈는지, 그리고 어떻게 승가 운영을 보좌했는지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부처님께서는 승가의 여러 비구들에게 두 상수제자를 본보기로 따르라고 훈계하신 적이 있다. "비구들이여, 신심 깊은 비구는 이와 같은 올바른 서원을 품어야 할 것이다. '아, 이 몸도 사리뿟따나 목갈라나처럼 되어지이다!' 이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나의 비구 제자들에게 모범이자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증지부』 2:131). 계·정·혜 삼학을 통달함으로써 이 두 사람은 수행하는 비구들이 터득해 갖추어야 할 자질을 이미 체현하고 있었다. 또한 탁월한 분석력과 언어구사력을 갖고 있었던 그들은 젊은 비구들에게 교훈과 지침을 줄 수 있는 이상적인 스승이었다.
부처님은 「진리의 분별경[諸分別經]」에서 남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두 상수제자의 역할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말씀하고 계시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가까이하고 그들을 따르라. 두 사람 다 현명한 비구이고, 동료 비구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들이다. 사리뿟따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따는 제자들을 가르쳐 예류과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중부』 141).
이 구절을 『중부』의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리뿟따는 자신이 수계를 주었든 남이 주었든 관계없이 일단 제자로 받아들이면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베풀었다. 병들면 돌보아주고, 명상주제를 주고, 마침내 그들이 예류과에 들어서 인간계에 들지 못할 위험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게 되면 '이제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더 높은 성스러운 도에 이를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떠나보냈다. 이렇게 그들의 앞날에 관한 염려에서 벗어나면 그는 새로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목갈라나는 같은 방법으로 수행시키더라도 그들이 아라한과를 성취할 때까지는 염려를 놓지 않았다. 세존께서 '아주 작은 똥에서도 악취는 난다. 그처럼 '탁'하고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보다 짧더라도 일단 존재를 받으면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씀하신 바를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리뿟따는 제자를 가르칠 때에도 한량없는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이 예류과를 성취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일깨우고 가르치곤 했다. 그런 다음에라야 그는 새 제자를 받아들였다.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부』 주석서에서는 보통 사리뿟따가 제자를 예류과까지만 이끌었다고 하지만, 몇몇 비구에게는 더 높은 경지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감흥어』 주석서를 보면 "그때에 이미 높은 수행과정에 있던 비구들이 다음 더 높은 세 단계의 경지를 성취하기 위해 명상주제를 받으러 사리뿟따를 찾아가곤 했다."고 쓰여 있다. 그때까지 예류과였던 라꾼띠까 밧디야 장로6)도 사리뿟따의 가르침을 받은 후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감흥어』 7-1).
세존께서는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당신이 안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다. 「짜뚜마 숫따(『중부』 67)」를 보면 부처님께서 사리뿟따 존자가 자기 책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꾸짖으시며 이 점을 분명히 하신 일이 있다. 한번은 새로 수계를 받은 비구들 여럿이 처음으로 부처님께 경배하러 왔다. 주석서에는 이들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서 수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짜뚜마에 도착해 숙소를 분배받고 난 그들은 거기에 있던 비구들과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부처님께서는 먼저 있던 비구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으시고, 새로 온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소란스러웠음을 아시게 되었다. 새로 온 비구들까지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주석서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물러가거라 비구들이여, 여래는 너희들을 만나지 않겠노라. 너희들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새로 수계를 받은 비구들은 말씀에 따라 그곳을 떠났으나 재가불자 몇 사람이 간청을 드려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뿟따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사리뿟따여, 여래가 비구들을 물러가게 하였을 때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
사리뿟따가 아뢰었다. "세존께서 평온[捨, upekkha]에 드시어 '지금 여기'의 지복상태에 머물고자 하시니 저희들도 평온에 들어 '지금 여기'의 지복상태에 머물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니라, 사리뿟따여! 다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목갈라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시자 그는 "세존께서 비구들을 물러가라고 하셨을 때에 저는 '세존께서는 평온에 드시어 지금 여기의 지복상태에 머물고자 하시니 사리뿟따와 나는 승가를 돌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옳도다! 목갈라나여, 바로 말하였다! 승가는 여래가 아니면 그대나 사리뿟따가 돌보아야 하느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 승가 계율을 정해주십사고 최초로 간청한 사람도 또한 사리뿟따 존자였다. 어떤 과거불의 교법은 오래 지속된 반면, 다른 과거불 교법은 그렇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를 그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법을 많이 설하지 않으셨거나, 제자들을 위해 규칙을 제정하지 않으셨거나, 계본의 낭송을 제도화하지 않으셨던 부처님들의 경우에는 교법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신 부처님의 교법은 오래 지속되었다."라고 하셨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일어나 세존께 경배하고 이렇게 말씀 드렸다. "지금 바로 규율을 선포하시고 계본을 제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고귀한 삶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냥 두어라, 사리뿟따여. 언제 해야 할 지 여래는 아느니라. 승가에 타락의 징후가 드러나지 않는 한 제자들에게 규율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계본도 일러주지 않을 것이다."(『율장』 3:9-10).
교법이 가능한 한 오래 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사리뿟따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생각이라면, 계율은 반드시 필요한 시기가 되기까지는 제정하지 않으려는 것, 그것 또한 부처님 특유의 생각이었다. 당시 승가에서 가장 향상이 더딘 비구마저도 예류과에 도달했기에(이 점을 사리뿟따는 간과한 듯함) 아직은 비구생활의 계율을 정할 필요가 없다고 부처님께서는 설명하셨다.
부처님께서는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컨대 부처님의 사촌인 야심만만한 데와닷따가 젊은 비구들 한 무리를 외도로 유인해가자 두 제자를 보내어 다시 데려오도록 하신 적이 있다. 데와닷따는 승단을 별도로 이끌겠다고 선언하며 승가를 양분하고 난 후, 5백 명의 젊은 비구를 부추겨 영취산으로 데리고 갔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 데려오도록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영취산으로 보내셨다. 데와닷따는 두 장로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들이 부처님을 버리고 자기 무리에 동참하려고 결심한 줄 알았다. 그는 두 사람을 따뜻이 맞이하고 마치 그들이 자기 상수제자나 되는 듯 대했다. 그날 저녁 데와닷따가 쉬고 있을 때 두 장로는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여 예류과로 이끈 후, 그들을 세존께로 돌아오도록 설득했다(『율장』 2:199-200).
또 다른 예로는, 깃타기리에 살고 있던 뿌납바수와 앗사지(앞에 나온 장로 앗사지와는 다른 사람)가 이끌던 한 무리의 비구들이 비행을 저질렀을 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함께 승가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일이다. 그 비구들은 저녁에도 음식을 먹었고, 마을의 젊은 처녀들과 노래하고 춤을 주었으며, 속인들과 어울리는 등 승가의 위엄을 욕되게 하였다. 여러 차례 꾸짖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실을 고치려 하지 않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 계율 따르기를 거부한 그들에게 파문의 벌을 선언하셨다(『율장』 2:12; 3:182-83).
도움을 주는 이
많은 비구 중에서도 사리뿟따는 남을 돕는 일에 탁월하였다. 「데와다하경(『상응부』 22:2)」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현명하고 다른 비구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다."라고 당신의 훌륭한 제자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 주석서에서는 이 말씀을 설명하면서 남을 돕는 방식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의 한 예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사리뿟따는 물질적인 도움과 법을 통한 도움, 두 길로 도움을 주는 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는지는 주석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다른 비구들이 이른 아침에 탁발하러 갈 때에도 사리뿟따는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모두가 떠난 후에 도량을 구석구석 돌며 비질이 안된 곳은 쓸어내고 쓰레기가 남아있으면 치웠다. 침상이나 의자나 그릇이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가지런히 놓았다. 불자가 아닌 수행자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무질서한 것을 보게 되면 비구들을 욕하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그 다음, 그는 간병실로 가서 환자들을 위로해주고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었다. 그리고나서 필요한 것과 약품을 구하기 위해 늘 탁발을 다니던 곳이나 아니면 다른 적당한 곳으로 어린 사미들을 데리고 갔다. 약을 구하면 사미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병든 이 돌보는 것을 세존께서는 칭찬하셨네. 이제들 가보게나. 선한 이여, 조심하시게!" 사미들을 간병실로 돌려보낸 후에야 그는 탁발을 가거나 공양을 올리겠다고 한 집으로 가거나 하였다.
수행처에 머무를 때 사리뿟따의 일과는 늘 이와 같았다. 세존을 모시고 길을 떠날 때에도 그는 상수제자임을 의식해 신을 갖추어 신거나 햇빛가리개를 들지 않았으며 앞장서서 걸어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린 사미에게 자신의 발우와 가사를 맡겨 일행을 따라가게 한 다음, 노약자나 어린 사람들을 돌보고 상처난 사람에게는 약을 발라주고 나서 같은 날 늦게나 다음 날 그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이었다.
한번은 사람들을 보살피다가 앞서 간 일행이 쉬고 있는 곳에 아주 늦게 도착했다. 사리뿟따는 마땅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가사로 이슬을 가리고 앉은 채 밤을 지새야 했다. 그것을 보신 세존께서는 다음날 비구들을 모이게 하신 후 「자고새 전생담」(37)을 설하셨다. 그 이야기는 코끼리와 원숭이와 자고새가 누가 가장 연장자인가를 확실히 하고 나서 그분에게 존경을 표하며 함께 살았다는 내용이다. 그런 다음 부처님께서는 "숙소는 연장자 순으로 배정해야 한다."(『율장』 2:160-61)는 계율을 정하셨다.
사리뿟따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동시에 그 못지 않게 법의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요양실에서 나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미띠굿따라는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오온이 지속되는 한 모든 느낌이 바로 고(苦)라오. 오온이 멸해야 고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의 관찰[念受]이라는 명상주제를 주고 나서 떠났다. 사미띠굿따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통찰력을 증진시켰고 아라한이 되어 육신통을 증득하였다(『장로게』 81게와 주석서).
또 다른 예로 사리뿟따가 부처님의 대시주자인 아나타삔디까에게 들려준 병상법문이 「예류도상응」에 있다(『상응부』 55:26). 머리가 으스러질 듯한 격심한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는 아나타삔디까에게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은 법문으로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이 재가신자를 위로하고 있다. 그가 예류도에 들었으니 이제 비참한 고통 속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끄는 나쁜 습성으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또한 그가 불법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성자에게 걸맞는 계행이라는 네 가지 예류지를 이미 갖추고 있다는 점도 상기시켜 주었다. 아울러 그는 팔정도를 확고히 닦았고 그리하여 도과와 깨달음과 해탈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자 아나타삔디까는 고통이 가라앉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병이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그는 감사의 표시로 자기를 위해 마련된 음식을 사리뿟따에게 공양했다.
한번은 부처님께서 가르침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사리뿟따를 은근히 나무라신 적이 있다. 브라만 다난자니의 임종의 자리에 사리뿟따 존자가 방문했다. 브라만들은 범천을 동경하고 있다고 생각한 존자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범천에 이르도록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설하였다. 하지만 해탈의 길은 가르쳐주지 않은 채 그의 설법을 마쳤던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가 돌아왔을 때 세존께서 물으셨다. "사리뿟따여, 브라만 다난자니에게 가르쳐 줄 것이 더 있었는데 왜 그의 생각을 열등한 범천세계에 머물게 두고 그 곁을 떠나왔느냐?" 이에 사리뿟따는 대답했다. "저는 '브라만들은 범천을 동경하니 브라만 다난자니를 범천의 브라만들과 합류하도록 안내해 주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브라만 다난자니가 죽어서 다시 범천에 태어나지 않았느냐, 사리뿟따야."
「다난자니경(『중부』 97)」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윤회를 끝낼 수도 있는 사람이 열등한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한 예로서 주목할만하다. 때로는 「삼명경(Tevijja Sutta)」에서처럼 부처님께서도 범천까지만 이끌어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다난자니의 경우, 그가 더 높은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부처님께서는 아셨던 반면, 사리뿟따는 중생의 근기를 알아보는 부처님의 혜안을 갖지 못해서 그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다난자니는 범천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고 해탈을 이루려면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야만 했을 것이다.
찬나 장로가 앓아누워 심하게 고통받고 있을 때에 사리뿟따 존자가 마하쭌다 장로와 함께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사리뿟따는 필요한 약과 음식을 찾아 나서겠다고 했으나 찬나는 이미 죽을 결심을 했으니 그만 두라고 했다. 그런 결심을 거두라고 그에게 간청해 보았으나 아무 소용없었고, 그들이 떠나고 난 뒤 찬나는 칼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일을 두고 찬나 장로는 잘못이 없노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죽어가는 동안 아라한과를 이루어 구경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찬노와다:찬나 훈계경(『중부』 144)」에 나온다.
아나타삔디까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께 자비심을 베풀어 자기를 찾아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즉시 아난다와 함께 찾아온 사리뿟따는 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염리(厭離)에 대하여 감동적인 법문을 설해주었다(『중부』143). 조건지어진 세계의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하고 육근, 육경, 육식, 육촉, 육수(六受),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문이었다. 이 심오한 설법에 감동되어 아나타삔디까는 눈물을 흘리며 이에 견줄만한 법문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노라고 했다.
이 법문을 듣고 얼마 후 아나타삔디까는 죽어서 도솔천에 다시 태어났다. 온 세상이 잠들어 있는 어느날 밤 새로 천신이 된 아나타삔디까가 천신의 모습으로 기원정사를 방문하여 세존 앞에서 상수제자 사리뿟따를 칭송하는 게송을 읊었다.
지혜와 계행과 마음의 평화를
진정 사리뿟따는 갖추었도다.
아무리 빼어난 비구라도
그를 능가할 수 없으리.
다음날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이 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방문객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러자 아난다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 천신은 틀림없이 아나타삔디까일 것입니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에 대한 믿음이 돈독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의 추측이 맞다고 하셨다.
법으로 도움을 베풀 때에도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듯 감동적이었다. 그는 훌륭한 인도자이며 정신적으로도 탁월한 조언자였다. 사람을 이끄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예리하고 깊이 있게 이해했으며 그들에게 따뜻하고 동정어린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크게 고무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리뿟따는 자신이 지도하고 있는 비구들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보살펴주며 다정한 훈계로 자제심을 길러주었다. 또 비구들이 정진을 잘 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고 격려해 주는 것을 보아도 그가 스승으로서 완벽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도반의 자질 또한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작게든 크게든 어떻게든 늘 도움을 베풀곤 했다. 스스로 성스러운 삶의 계행을 구족하고 있기에 남들의 계행이 구족되어 있는지도 바로 알 수 있었고, 덕성이 잠재해 있는 경우 그 성품을 계발하는데 능숙했으며, 계행이 완성된 경우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칭찬해 주었다. 정녕 그의 완벽한 성품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섬세하고도 다정다감한 자질이 고양된 정신 속으로 넉넉하게 녹아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냄이 없는 이
『법구경』 주석서(389-90)에는 이 상수제자의 또 다른 탁월한 성품이라 할 참을성과 너그러움을 잘 드러내주는 일화가 있다. 부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기원정사 근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존자께서는 참을성이 많으셔서 누가 모욕하고 때리더라도 도무지 화낼 줄을 모르신다." 하면서 사리뿟따의 훌륭한 성품을 칭송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떤 브라만이 불쑥 끼여들었다.
"그렇게 화낼 줄 모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바로 우리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그야 아무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가 않습니다, 브라만이여."
"그렇다면 내가 그에게 시비를 걸어 화를 내게 해보겠소."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오!"
"내게 맡겨보시오. 다 하는 수가 있지."
사리뿟따 존자가 탁발을 하러 그곳을 지날 때 그 브라만은 뒤로 다가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등을 내리쳤다. "이게 뭐지" 하면서도 사리뿟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 브라만은 온통 죄책감에 사로잡혀 장로의 발아래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리뿟따 장로는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의 참을성을 시험해 보려고 제가 당신 등을 때렸습니다." 브라만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랬나요? 뭐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존자시여, 용서하시는 뜻으로 저희 집에 오셔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사리뿟따가 이를 말없이 받아들이자 브라만은 그의 발우를 받아들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공양을 올렸다.
그러나 사리뿟따를 때리는 광경을 보았던 사람들은 몹시 흥분했다. 그들은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그 브라만을 죽이기라도 할 듯이 그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사리뿟따가 발우를 든 브라만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이 소리쳤다.
"존자시여, 저 브라만을 우리 손에 넘겨 주십시오."
"왜들 그러십니까?"
"저자가 존자님을 때리지 않았습니까. 혼을 내주려고 합니다!"
"혼을 내다니요? 저 사람이 여러분을 때렸습니까, 나를 때렸습니까?"
"물론 존자님이지요."
"그 일에 대해서라면 저 사람은 벌써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니 가서 일들 보시지요."
이렇게 사람들을 흩어보내고 그 브라만도 집으로 보낸 후에 사리뿟따 존자는 조용히 사원으로 돌아갔다.
사리뿟따 존자는 참을성도 대단했지만 겸손하기로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 어떤 지적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손히 받아들이곤 했다. 「수시마경(『상응부』 2:29)」 주석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존자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속옷 한 자락이 밖으로 조금 삐져 나왔는데 일곱 살짜리 사미가 그것을 보고 존자에게 말씀드리자, 존자는 잠시 비켜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사미에게 합장을 하고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고쳐 입었습니다, 스승이시여!"7)
이 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밀린다왕문경』에도 나오는데, 사리뿟따가 다음 게송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일곱 살 어린이라 해도
나보다 나아 가르침을 준다면 머리 숙여 받아들이리.
그 앞에 나는 정성과 존경을 표하노니,
언제나 스승의 자리에 모셔도 좋으리.
― 『밀린다왕문경』, 397 ―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게 해주었던 앗사지 존자에 대해 그가 평생 존경심을 지녔던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와 숫따(『숫따니빠따』 주석서)와 『법구경』(392) 주석서를 보면, 사리뿟따는 앗사지 존자와 같은 사원에 머무르게 될 때면 언제나 부처님께 경배를 드리고 난 다음 곧바로 앗사지 존자에게 경배를 드리러 가곤 했다. "이 분이 나의 첫 번째 스승이시다. 내가 부처님의 교법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분을 통해서였다." 앗사지 장로가 다른 사원에 있을 때에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하여 오체투지를 하고 두 손을 합장하며 예를 올렸다.
그런데 이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사리뿟따의 이런 행동을 보고 다른 비구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상수제자가 되고 나서도 천상계에 경배를 올리다니! 아직도 브라만의 견해를 버리지 못했구나." 이런 험담을 들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렇지 않다. 사리뿟따는 천상계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법을 접하게 해 준 분을 스승으로 받들어 예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사리뿟따는 스승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이니라."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나와 숫따8)」를 설하신 것이 바로 그때였다.
천신들이 인드라를 경배하듯
사람은 법의 길로 이끌어준 분을
경배해야 하느니라.
은혜를 소중히 하는 사리뿟따 존자의 성품에 관한 일화가 라다 장로의 이야기에도 나온다. 『법구경』(76) 주석서를 보면 라다는 사왓티에 있는 기원정사에 머물고 있던 가난한 브라만이었다. 그는 잡초를 뽑거나 청소를 하는 등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하던 불목하니였다. 그런데 그가 계를 받도록 이끄는 비구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세존께서 혜안으로 세상을 널리 살피시다가 이 브라만이 장차 아라한이 될만한 그릇임을 보셨다. 세존께서는 모여있는 비구들에게 그에 대해 알아보시며 그들 중 누군가가 이 가난한 브라만으로부터 도움 받은 적이 없는지 물으셨다. 사리뿟따는 언젠가 라자가하에서 탁발하러 가던 자신에게 이 가난한 브라만이 구걸해 온 음식을 한 국자 가득 준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이 사람에게 계를 주라 하셨고 사리뿟따는 세존의 말씀에 따라 그렇게 했다. 그리고나서 사리뿟따는 수계자로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해 그에게 몇 번이고 가르쳐 주었다. 라다는 항상 그의 가르침을 기쁜 마음으로 공손히 받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이 일을 본 비구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리뿟따의 마음을 칭송하면서, 남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도 그러한 상좌를 두게 되는 법이라고 말들을 했다. 이에 대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뿟따는 그때뿐만 아니라 그전에도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잊지 않고 감사를 표시했다고 하셨다. 이와 관련해서 세존께서는 「알리나찟따 전생담(본생경 156)」을 설하셨다. 여기에서는 사리뿟따가 코끼리였는데, 그의 상처를 치료해 준 목수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일이 있다.
사리뿟따 존자의 참을성과 겸손함은 그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원정사에 머물 때 일이었다. 우안거가 끝나자 존자는 세존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많은 비구들이 사리뿟따에게 하직인사를 드렸다. 사리뿟따는 하나하나 성과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을 떠나보냈다. 그 중에는 존자가 성도 이름도 모르는 비구가 한 명 있었다. 그 비구는 작별하면서 상수제자가 자기 성과 이름을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대중 가운데 자기만 그런 배려를 받지 못하자 그는 몹시 섭섭했다. '나한테는 다른 비구들에게 하듯이 자상하게 인사해 주시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사리뿟따에 대해 악의를 품게 되었다.
마침 그때 우연히 존자의 옷자락이 자기 귀를 스치게 되자 불만은 더욱 커졌다. 그는 부처님께 다가가 이렇게 모함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는 분명히 '나는 상수제자다'라고 으스대며 귀가 먹을 정도로 저를 쳤습니다. 그래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세존께서는 사리뿟따를 부르셨다. 그러는 사이에 마하목갈라나와 아난다는 이 중상모략을 알고 대중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스님네들, 이리 오십시오!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을 친견하게 되면 사자후를 터뜨릴 것입니다."
세존께서 존자에게 물으시자 그는 혐의를 부정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몸을 관하는 마음챙김이 확고히 서있지 못한 사람은 도반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용서를 빌지 않은 채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리뿟따의 사자후가 이어졌다. 그는 분노와 증오에 매이지 않는 자신의 자유로움을 깨끗하건 더럽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대지의 참을성에 비유했다. 또 자기 마음의 평온을 뿔 잘린 황소에, 버림받은 천민 출신 젊은이에, 물에, 불에, 바람에, 그리고 염오의 제거에 비유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염오(厭惡)를 뱀이나 시체에서 느끼는 혐오감에 비유했으며 자기 육신이 유지되는 것을 기름진 혹덩어리가 유지되는 것에 비유했다. 그가 이 아홉 가지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참마음을 드러내자 대지는 아홉 번 진동하여 이 진리의 말씀에 화답하였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장엄한 사자후에 감동되었다.
사리뿟따가 자신의 참마음을 밝히자 부당하게 그를 모함했던 비구는 회한에 사로잡혔다. 그는 곧바로 세존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가 모함한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쳤다.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이 미망에 빠진 자를 용서해주어라. 그러지 않으면 그의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져버릴 것이다." 사리뿟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스님을 기꺼이 용서합니다." 그리고 합장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라도 이 스님을 편치 않게 했다면 이분도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비구들은 탄복을 하였다. "우리 장로님 참으로 훌륭하시군요! 자신을 거짓으로 비방하는 사람에게조차 아무 노여움도 미움도 품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사람 앞에 정중히 몸을 숙여 합장하고 용서를 구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 같은 사람이 노여움이나 미움을 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리뿟따의 마음은 대지와 같고, 일주문 기둥처럼 든든하고, 깊고 잔잔한 연못물과도 같다." 그리고 나서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인욕은 대지와 같이 흔들림 없고
뜻은 일주문 기둥처럼 든든하며
마음은 깊고 잔잔한 연못처럼 맑으니
이런 이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도다.
― 『법구경』 95 ―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함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기에 불행한 결말을 맺고 만다. 한번은 꼬깔리까라는 비구가 부처님께 두 상수제자를 모함한 적이 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못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악한 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꼬깔리까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자애와 믿음으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대하여라! 그 두 사람은 모든 행동이 훌륭하고 칭찬할만하다!"
하지만 미혹에 빠져있던 꼬깔리까에게는 부처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근거없는 모함을 계속했고 이내 온몸이 종기로 뒤덮였다. 결국 그 병이 심해져 죽자 지옥에 떨어졌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상응부』(6:10), 『숫따니빠따』 대품(10), 『증지부』(10:89),「딱까리야 전생담(『본생경』 481)」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일화를 보면 '참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사리뿟따나 목갈라나는 꼬깔리까의 모함에 아무런 나쁜 마음이 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사 꼬깔리까가 용서를 빌었다 해도 이 두 상수제자의 태도는 여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꼬깔리까 자신은 참회를 했더라면 스스로에게 참으로 이로운 일이 되어 악업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에게 악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거두기 마련이다. 꼬깔리까도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스스로 과보를 받은 것이다.
친구와 친척들
사리뿟따 존자는 감사하는 마음과 친절, 남을 돕는 마음과 참을성 같은 훌륭한 성품 덕분에 출가자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깊은 교우관계를 많이 맺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목갈라나와는 젊었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리뿟따가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하고싱가경」(『중부』 32)의 주석서를 보면 사리뿟따가 아난다와도 깊은 우의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리뿟따로서는 '스승님을 시봉하는 일은 나의 의무인데도 아난다가 애쓰고 있구나'하며 고마워했고, 아난다로서는 부처님께서 사리뿟따를 상수제자로 삼으셨기에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 아난다는 자신이 사미계를 주었던 어린 제자들을 나중에 사리뿟따에게 보내어 구족계를 받도록 하는 일이 많았다. 사리뿟따 또한 아난다에게 그렇게 했고, 그리하여 이 두 사람에게는 5백 명의 공동제자가 있었다.
아난다는 아주 좋은 가사나 공양물을 받게되면 사리뿟따에게 갖다주었고 사리뿟따 역시 특별한 공양물을 받으면 아난다에게 주곤 했다. 한번은 아난다가 어떤 브라만에게서 아주 값진 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세존의 허락을 받고 사리뿟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열흘 동안이나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석서를 해설한 복주(復註)에서 이러한 관계에 대해 훗날 논사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난다는 아직 아라한과를 이루지 못했으니 그런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되지만 번뇌를 다 끊은 아라한이었던 사리뿟따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이에 대해 '사리뿟따가 보이는 정은 세속적 애착이 아니라 아난다의 공덕을 아끼는 마음이었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이렇게 물으신 적이 있었다. "너도 사리뿟따를 귀하게 여기느냐?" 아난다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미숙하고 타락하고 우매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사리뿟따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리뿟따는 현자입니다. 사리뿟따는 위대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드넓은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빛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민첩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예리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통찰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는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해 합니다. 그는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어울려 다니기를 내켜하지 않습니다. 그는 불굴의 정진력이 있고, 그의 말은 심금을 울립니다. 그는 남의 말에 기꺼이 귀기울이고, 사악한 것을 경책하는 훈도자(薰陶者,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시키는 분)입니다." (『상응부』 2:29)
『장로게』(1034 이하)에서 아난다는 사리뿟따가 죽었을 때 "고귀한 도반인 사리뿟따가 떠나니 세상이 온통 캄캄하구나."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도반이 떠나고 세존께서도 열반에 드신 후, 자신에게 남은 벗이란 몸에 대한 마음챙김밖에는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사리뿟따의 죽음을 전해들은 아난다의 슬픔이 어떠했는지는 「쭌다경」에도 아주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사리뿟따는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친구였다. 그는 남의 장점을 어떻게 계발해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참다운 친구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처럼, 그는 때로 직언과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아누룻다 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마지막 관문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이 사리뿟따 존자의 솔직한 비판이었다고 『증지부』(3: 128)에 나와 있다.
어느 날 아누룻다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갔다. 예를 갖추어 인사를 나눈 후 앉아서 사리뿟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벗이여, 나는 인간의 육안을 초월하여 청정해진 천안으로 일천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정진력은 굳건하여 흔들림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챙김은 늘 오롯하여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나의 육신은 경안(輕安)하여 고요합니다. 나의 마음은 삼매에 들어 한 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대답하였다.
"벗이여, 당신의 천안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자만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정진력이 굳건하고, 당신의 마음챙김이 오롯하고, 당신의 육신이 고요하고, 당신의 마음이 삼매에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들떠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에게 근심이 있다는 뜻입니다.9) 당신이 자만과 들뜸과 근심의 세 가지 마음상태를 버려서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불사의 경지에 뜻을 모은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일입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사리뿟따의 충고를 받아들인 후 오래지 않아 번뇌의 소멸을 이루었다.
사리뿟따에게 조언을 구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을 보면, 도반들에게 그가 늘 힘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마하고싱가경(『중부』 32)」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기질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그 말씀과 인품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어느 날 저녁 마하목갈라나, 마하깟사빠, 아누룻다, 레와따, 아난다 이렇게 다섯 분이 사리뿟따에게 법문을 들으러 갔다. 사리뿟따가 그들을 반기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고싱가 사라수 숲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달빛은 환하고 사라수 나무는 꽃이 만발하였으니 천상의 향기가 감돌고 있는 듯합니다. 아난다여, 이런 고싱가 사라수 숲을 더욱 빛나게 할 스님은 어떤 분일까요?"
다른 네 분의 스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각자 기질에 따라 대답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사리뿟따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기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아침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낮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저녁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왕이나 재상의 옷장이 색색의 의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왕이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 어떤 옷을 입고 싶으면 그때그때 그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여 자신의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 스님과 같습니다.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목갈라나여, 이런 스님이 이 고싱가 사라수 숲을 빛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부처님께로 가서 자신들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모두 수긍하신 다음 당신의 말씀을 해주셨다.
이 이야기를 보면 사리뿟따가 뛰어난 지성을 지녔고 승가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독단적인 성향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자연에서 우러나는 사색의 분위기를 도반들에게 몸소 표현해 보임으로써 그들도 직접 자기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고무해줄 수 있었다. 그는 감성이 섬세하여 스스로 자연 경관에 감응을 잘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반들로부터도 그러한 감응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사리뿟따는 다른 많은 스님들과도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목갈라나, 아난다, 아누룻다뿐만 아니라, 마하꼬티따, 우빠와나, 사밋디, 사윗타, 부미자 등이 그들이다. 또 사리뿟따는 깨달음을 얻은 분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특히 세존께서 칭찬하셨던 분들은 꼭 만났다.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도 그 중 한 분이었는데, 부처님이 대중 앞에서 그를 칭찬하시기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뿐나가 그 지방에 왔다는 것을 알고 사리뿟따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에게로 찾아가 청정에 이르는 여러 단계와 열반의 관계에 대하여 심오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가 뿐나에게 했던 질문에서 저 유명한 「라타위니따경(『중부』 24; 역마차 비유경)」이 유래하게 되었다. 이 경에 제시되어 있는 불교의 여러 수행단계들은 후대 아짜리야 붓다고사(佛音尊者)가 쓴 기념비적 논서인 『청정도론(Visuddhimagga)』의 근간이 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사리뿟따에게 하신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경전에 나오는 많은 부처님의 말씀이 "법장"으로 불린 사리뿟따에게 설하셨던 것이었음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한번은 사리뿟따가 부처님께 다가가 이전에 세존께서 아난다에게 하셨던 말씀을 되풀이하였다. "고귀한 교우관계, 고귀한 도반관계, 고귀한 인간관계. 이것이 청정한 삶의 전부입니다."(『상응부』 45:2) 이 상수제자의 생애가 바로 이런 가르침을 가장 잘 구현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사리뿟따는 라자가하 근처에 있는 우빠띠사 마을의 어느 브라만 가문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와간따이고, 어머니는 루빠사리였다. 사리뿟따가 그의 아버지와 같이 지낸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죽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남자 형제로 쭌다, 우빠세나, 레와따 셋이 있었고, 누이로는 짤라, 우빠짤라, 시수빠짤라 셋이 있었다. 이 여섯 남매가 모두 승단에 들어 계를 받고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쭌다는 비구가 된 후에도 승가에서 사미를 뜻하는 사마눗데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마하쭌다 장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사리뿟따의 임종시에 그를 시봉한 것이 쭌다였고, 상수제자의 유물을 가지고 부처님께 가서 그의 죽음을 알린 것도 그였다. 이것은 「쭌다경」에 있는 이야기로서 내용은 이 책의 후반부에 나와있다.
사리의 아들이 사리뿟따이듯이 우빠세나는 와간따의 아들을 뜻하는 와간따뿟따로도 알려져 있다. 우빠세나의 몸가짐은 누구보다도 훌륭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육처상응경(『상응부』 35:69)」에 의하면 그는 뱀에 물려 죽었다. 레와따는 형제들 중에 막내였다. 어머니는 막내가 계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결혼식 날 그는 늙어서 추해진 120살이나 된 신부의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세속적인 삶에 역겨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핑계를 대고 결혼식 도중에 빠져 나와 사원으로 도망쳐 가서 계를 받았다. 훗날 부처님을 뵈러 가는 도중에 어느 아카시아 숲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기를 지내는 동안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후에 그는 아카시아 숲의 레와따라는 뜻의 레와따 카디라와니야로 알려지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숲 속 수행자들 중의 으뜸으로 치셨다.
오빠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짤라, 우빠짤라, 시수빠짤라 세 자매는 결혼한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들은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씩 두었는데, 각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짤라 혹은 짤리, 우빠짤라, 시수빠짤라로 불리웠다. 이들 세 자매의 아들 셋도 외삼촌인 레와따 카디라와니야의 사미가 되어 계를 받았으며, 『장로게』(42)의 주석서에 의하면 사리뿟따가 그들의 선행을 칭찬한 바 있다. 세 자매가 비구니가 되었을 때에 마라가 나타나 그들을 조롱하고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훌륭히 대처했는지는 「비구니상응경」에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사리뿟따의 어머니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 내내 증오심을 품어왔던 고집 센 브라만이었다. 『법구경』(400)의 주석서에 보면 사리뿟따 존자가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고향 마을에 와있을 때 탁발하는 길에 어머니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음식을 주면서도 "남이 먹던 찌꺼기나 얻어먹는 것아!"라고 욕설을 내뱉었다. "쉰 쌀겨죽 찌꺼기도 못 얻어먹는 날이면,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주걱에 묻은 찌꺼기나 핥아먹어라. 80 크로어나 되는 재산을 버리고 중이 된 것이 겨우 이 꼴 보자고 한 짓이었니! 네가 내 신세도 망쳤다. 자, 어서 먹어라!"
사리뿟따를 따라온 다른 스님들에게 음식을 주면서도 "흥! 당신들이 바로 내 아들을 종으로 부리는 작자들이로구나! 그래 어서 드시오!"
이렇게 그녀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으나 사리뿟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리뿟따는 음식을 받아서 먹고는 소리 없이 사원으로 돌아왔다. 부처님께서는 그때 사리뿟따와 함께 있었던 아들 라훌라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비구들은 사리뿟따가 어떻게 그 일을 다 견뎌냈을까 놀라워했으며, 부처님께서는 회중 앞에서 다음의 게송을 읊으시며 그를 칭찬하셨다.
그는 성내지 않고, 수행에 근실하고,
계행에 덕이 높고, 욕망에서 벗어났으며,
감관을 잘 다스려, 태어남이 마지막이 되었다.
나는 그를 브라만이라 부른다. (『법구경』 400)
사리뿟따는 자기가 죽을 즈음에 이르러서야 어머니를 귀의시킬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거니와 위의 일화는 사리뿟따 장로가 얼마나 겸손하고 너그럽고 참을성이 있었던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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