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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여나는가(4)

15장  질문과 대답


지금까지 재생이라는 주제를 여러 측면에서 검토해 보았으니 이제는 이 주제를 이해하려고 할 경우 으레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다음 문항들은 재생을 주제로 행한 여러 차례의 강연에서 저자에게 제기되었던 질문들이다.


질문  1

당신은 과거생을 자동적으로 기억재생해낸 이런 사건 중 일부가 일부러 꾸며낸 조작극으로, 끌어모은 정보를 천진한 어린이에게 주입시켜 누가 물으면 그 정보를 앵무새처럼 말하도록 시켰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대답

순전히 이론상으로만 말하라면 "그러한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대답해야 겠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꾸며낸 전생의 이야기를 어린아이에게 주입 훈련시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선 첫째로, 어린이는 의심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조사관들의 능란한 교차 검사에 쉽사리 걸려 넘어갑니다. 더 나아가, 가짜 전생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는 이 사기극의 하수꾼들이 어딘가에서 실제로 죽었던 사람의 생애에 관해 다량의 정보를 자세히 알아내야 합니다. 이 조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던 시절에 했던 활동과 관계있는 사건들이나 환경을 폭넓게 망라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죽은 장소가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이라면, 그와 관련된 수많은 세부사항을 모은다는 일은,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치더라도 극히 어려워집니다. 그 다음에 이 방대하게 축적된 정보를 고스란히 어린아이의 마음에 넣어주어야 하며, 더 어려운 것은, 반드시 이들 구체적인 내용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시대 순으로 잘 간직되도록 해두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기극을 꾸미는 사람들이 아이의 부모들이라면, 아이의 과거 생에 관하여 알고 있던가 아니면 아는 것으로 꾸며낸 하인이나 이웃, 친척, 어린아이의 친구 같은 여러 사람들을 조작 과정에 합세시켜야 합니다. 교차 검사의 범위는 넓고 방대하여 거짓 이야기를 조작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게 될 모든 종류의 질문을 미리 다 알고 있을 수는 없으며, 이 경우 또 모든 증인의 말이 서로 일치하고 모순도 없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거짓 이야기의 조작자는 이 어려운 연극의 입증증거들을 한 점의 결함도 없이 완벽하게 연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훈련된 조사관은 한 번의 조사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여러 사람의 협조가 우선해야 하고 엄청난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중대한 모의사건인 것입니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이들 어린이를 팔아 약간의 명성을 맛보려고 그러는 것이라 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기억해둘 일은 그런 대중적 인기란 미심쩍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아무 때고 조사관이 다시 방문하여 어린이와 증인을 재검사할 경우엔 허물어져버릴 것이 뻔합니다. 그런 거짓 연극을 연출하는데 드는 엄청난 노력을 보상받을 길은 전혀 없습니다.


질문  2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거나 전이되는 무엇이 없이 재생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대답

이 질문은 우리 안에는 죽음의 찰나에 옮겨가거나 전이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무언가는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무엇일 거라는 가정을 내세웁니다. 무언가가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지려면 금생 내내 지속되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 문헌을 바탕으로 마음과 몸을 엄밀히 분석해보면, 앞장에서 간단히 지적한 대로 몸과 마음은 매찰나 변화를 겪고 있으며 무자비한 변화의 법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무엇도 머물러 있거나 그대로 남아있을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장에서 기술한 대로, 생성의 법칙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순간에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되는 과정에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계에서 무언가 변하지 않고 안정적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은 소리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인과 법칙의 작용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됩니다. 과보는 꼭 그 원인과 물리적으로 관련지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보는 단지 원인의 결과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진을 찍을 때, 사람에게서 사진까지 무엇이 건너갑니까?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을 때 그의 상이 거울 속에 있다고 무엇이 사람에게서 거울로 건너갑니까? 그것이 바로 원인을 따라 나타나는 결과의 한 예입니다. 윌리엄 크룩스 경은 에딘버러에서 행한 정신과학 강의에서, "의지를 행사함으로써 마음이 금속지레 같은 물건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하여 증명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한 것이 염력의 성질입니다. 더 나가서, 원인적 요인이 정신적이거나 심령적인 것이라면 거리는 인과법칙의 작용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심령적 차원에서 시간과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식조차도 옮겨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사띠라는 비구가 말했다가 부처님께 심한 꾸중을 들은 기록이 있습니다[ 중부 , Ⅰ, 제38경, 대애진경(大愛盡經, Mahaa Ta.nhaa Sa^nkhaya Sutta), 258쪽]. 그러므로 다음 생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무언가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사람이 죽고나면 천국으로 혹은 지옥으로 간다는 막연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태양이 실제로는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닌데도 동쪽에서 뜬다고 하듯이, 죽은 사람이 어디로도 가는 것이 아니건만 다만 표현상의 편리를 위해 인습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즉 은유적 표현인 셈입니다. 금생은 전생에서 지었던 원인의 결과입니다. 과거 생에 했던 생각과 말과 행위들이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어, 현생의 일어남을 조건지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업과 환생」에서 냐나띨로까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아라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이 지속적 변화과정, 찰나찰나를, 나날을, 연년을, 생생을 이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일 뿐이다. 이는 마치 바다의 표면 위를 서둘러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파도가, 실제로는 에너지의 전파를 받을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언제나 새로운 물의 질량이 계속 일어났다 꺼지는 것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와 같이, 엄밀히 생각할 때, 궁극적 의미에서는 윤회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어떤 영구적 자아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생을 향한 충동과 의지에 내몰려 이따금씩 일어나는, 육체적 및 정신적 현상들이 진행되는 과정일 뿐이다."

에너지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지 않습니다. 한 장소에서 드러나 있기를 그치고, 다른 장소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질문  3

만약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다시 태어난 사람은 앞의 생에서 죽은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요? 그는 죽은 사람과 똑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대답

죽은 사람의 몸이나 마음이 다시 태어난 사람 속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인격적인 동일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될 중요한 사실은 죽은 사람과 재생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릴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마음(naama)이 영구적인 불변의 실체가 아님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거나 정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역동적입니다. 그것은 식(識)의 상태 하나하나가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도 마치 영구적인 것처럼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진행 과정, 연속(santati), 혹은 흐름입니다. 또한 우리는 한 식의 상태에서 다른 식의 상태로 변화하는 이 과정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어떤 원리 때문인가도 알아보았습니다. 죽음의 찰나 마지막 식의 상태가 정지되면 그 결과로 다른 차원이나 장소에서이긴 하지만 다른 식의 상태(재연결의식)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생각이 힘 즉 에너지이기 때문에 가능하며 바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육체와 함께 소멸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변화의 과정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죽는 사람의 정신 쪽(naama)은 연속성을 가집니다. 죽는 사람의 마지막 식의 상태와 재생하는 사람의 최초의 식의 상태는 같은 인과의 흐름에 속합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 사이에 동일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동일성이 있다고 해버리는 것도 여러 모로 잘못된 생각을 낳기 쉽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밀린다 왕이 똑같은 내용의 질문을 한데 대해 나가세나 스님이 한 다음의 대답일 것입니다. "완전히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닙니다(na ca so na ca a~n~no)." 이 대답은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고 혹은 교묘한 말장난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은 성급하고 지나친 것입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다 "예"나 "아니오"로 속시원하게 대답해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때 나가세나 스님은 "밤 이경(二更)에 켜놓은 촛불의 불꽃은 그날밤 삼경(三更)의 불꽃과 같은 것인가요?"라고 반문하는데, "예"나 "아니오"나 다 그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인이 되었을 때 당신은 그 노인이 옛날의 어린아이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상황을 "예"와 "아니오"로 딱 부러지게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 경우에도 "완전히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닙니다."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경우 어린이와 노인 사이에는 어린아이 적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 노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충분한 동일성이 존재합니다.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난 사람 사이에도 이와 유사하게 전자의 행위에 대해 후자가 책임져야 하는 동일성이 충분히 존재합니다. 『청정도론』17장에 나오듯이 "연속되는 흐름에는 동일성도 없거니와 상이성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속되는 흐름 속에 절대적 동일성이 내재한다면 우유로부터 요구르트가 만들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절대적으로 다르다면 우유에서 요구르트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인과관계로 생겨난 사물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절대적으로 같다고도 절대적으로 다르다고도 가정할 수 없습니다." ― (냐나몰리 스님의 번역)


질문  4

만약 모든 탄생이 죽음에 이어서 오는 것이라면, 세계의 인구는 일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세계 인구는 해마다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니 어째서 그렇습니까?

대답

세계의 인구가 빨리 증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죽음에는 탄생이 뒤따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의 내용을 생각할 때 이 두 진술 사이에는 서로 모순이 없습니다.


1. 탄생은 (인구 계산이 가능한 유일한 세계인) 이 세상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무수히 많은 다른 계(界)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2. 재생은 그 전생의 죽음이 꼭 인간계에서 일어났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죽은 동물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3. 마찬가지로 모든 죽음이, 다음 재생처가 반드시 인간계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는 사람은 동물로도, 천신으로도 재생할 수 있습니다.


질문  5

만약 임종자의 의식에 떠오른 마지막 생각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에 따라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이나 기타 조건 등이 결정된다면, 대체로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죽는 찰나에 아주 나쁜 생각을 가짐으로써 그 결과 매우 나쁜 환경에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전에 행한 착한 일은 몽땅 무(無)로 돌아가게 됩니까?


대답

일반적으로 마지막 생각이 어떤 성질의 생각인가에 따라 다음 탄생의 성질이 결정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전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다시 태어나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음직전의 마지막 생각은 제일 마지막에 일어난 것이므로 태어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제일 먼저 영향을 끼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생각과 행위들이 후에 새로운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흔히 울타리 안에 가득 몰아넣은 소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잠가놓은 울타리 문 바로 옆에는 어쩌다 보니 힘없는 늙은 황소가 있고 젊고 힘센 황소들은 울타리 뒤에 있습니다. 문이 열리자 늙은 황소가 맨 먼저 나와 젊은 소들보다 앞서 걸어가지만 결국 젊은 황소들이 늙은 황소를 앞지르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음의 문에 다다랐을 때 그 마음을 차지하는 선하거나 악한 생각(aasanna-kamma)은 즉각적인 과보를 낳지만, 이전의 생각과 행위도 정당한 순서를 밟아 그 과보를 낳을 것입니다. 동시에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루까 깜마(무거운 업)가 아싼나 깜마(죽음직전의 업, 혹은 마지막 업)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질문  6

죽음과 전생의 관계는 그만큼 밀착되어 있고 즉각적이어서 시간적 틈새가 조금도 없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죽음은 탄생이고 탄생은 곧 죽음이라는 입장이 되겠습니다. 맞습니까?


대답

어떤 부파에서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중유(中有,  antarabhava)가 있다고 믿으나, 상좌부 불교에서는 죽음과 태어남이 하나의 과정 속에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는 없다고 봅니다. 임종이 멈추자마자 재연결의식이 일어납니다. 죽음직전의 생각-촉진 마음과 임종의식이 멈추면 필연적으로 재연결의식이 뒤따라 일어납니다. 이 곳에서의 죽음은 다른 곳에서의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다른 어떤 곳에서 나타납니다. 하나의 문은 관찰자가 서 있는 출구가 되기도 하고 입구가 되기도 합니다. 누가 나가는 것을 보면 그는 그것을 출구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그 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을 다른 관찰자가 보면, 그에게 있어 그 문은 입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사용된 것은 같은 문입니다. 불교에 의하면, 죽음은 한 생으로부터 다음 생으로 통하는 문에 불과하며, 끊임없는 의식과정은 인간의 여러 삶들을 결합시키는 매체일 뿐입니다. 독일의 달케는 "죽음은 단지 태어남을 뒤쪽에서 본 것뿐이며, 태어남은 죽음을 앞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 사실상 양자는 같은 것으로 끊임없는 집착이라는 하나의 모습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달케는 나비로 변하는 송충이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불가사의 앞에서 과학은, 마치 생전 처음 자연계 현상(박물학)을 관찰해보는 소년과 같은 꼴을 보인다. 유리상자 속에서 모충이 죽고 애벌레가 태어난 것을 보고 소년은 `두 기적이 일어났다. 있던 것은 죽어버렸고 못 보던 것이 나타났으니.'라고 할 것이다. 이 경우,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파악되지 못하여 두 개의 진실이 합쳐지지 못하고, 잘못된 개념 때문에 이 두 가지 진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과학에서도 꼭 마찬가지다. 이 곳에서의 죽음과 저 세상에서의 태어남이 하나의 동일한 경험 형태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각도에서 양쪽을 보며 하나로 이해하는 대신, 두 개의 불가사의가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는 물리학자는 그나마 유아기는 지난 셈이다. 물리학에서는 이제 `둘 다 기적이로군! 열은 사라졌고 운동은 남아있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물리학에서는 비록 물질의 반응 형태에 국한되긴 하지만, 진실의 실마리를 찾은 셈이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은 아직 두 개의 기적을 정확하고 올바른 다른 개념으로 대체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태어남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태어남 자체만을 하나의 사실로, 죽음 자체만을 또 다른 사실로 다루어, 본질적으로 풀릴 길 없는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한 상태로 남아있다."

―「불교와 과학(Buddhism and Science)」중에서


질문  7

우리에게 정말 전생이 있다면 왜 전생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전생이 있다면 우리가 마땅히 지난 생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답

일반적으로 죽음은 지워없애는 작용을 함으로써 다시 태어난 사람이 그 전생을 기억하는 일은 정신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보호작용입니다. 왜냐하면 재생한 사람은 금생의 삶의 조건을 따라가야 하는데 과거의 기억이 현재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예를 들면 동생이 다음 생에 그 형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경우가 있었는데, 그는 주변 친척들이 아무리 야단을 치고 주의를 줘도 현생의 아버지를 부득부득 형이라고 불러 아버지를 당황케 하였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대하는 정신 자세도 아들이 보통 아버지를 대하는 것과는 같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해서 그것이 왜 전생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까? 그렇게 우기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물어보고 싶습니다. "전생은 차치하고라도 자기가 처음에 태어났던 갓난아기 적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도대체 누가 태어날 때의 일을 기억한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거나 갓난 시절이 없었다는 얘기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실상 태어날 당시나 초기 유아기에 우리의 마음은 대부분 바왕가 즉 무의식 및 잠재의식상태에 있었지 완전한 의식상태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새로 태어난 갓난아기는 낮 동안도 대부분 잠을 자며 보냅니다. 인간의 기억 기능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어른도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을 잊어버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은 의식단계의 마음에 한번 그 인상을 심어 놓으면, 그 인상이 의식단계의 마음에서 희미해져가도 무의식단계의 마음에로 가라앉는 것이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특별한 경우에 적절한 기법으로 기억에 다시 떠올려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12장에서 이미 논의되었습니다. 또 최면술의 도움없이 전생을 자동적으로 기억재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는 13장에서 논의했습니다. 언제 기억재생이 가능하고 언제 가능치 않은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질문  8

재생 원리는 사람의 전생이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고 무수히 많았으리라고 가정합니다. 그렇다면 계속되는 태어남의 시발점은 어디일까요? 연기법의 설명은 어째서 직선으로 이어지는 생사의 연속을 말하지 않고, 순환을 말하는지요? 일직선상의 연속으로 설명한다면 생사 흐름의 출발점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최초 원인(조물주)은 없다는 말인가요?

대답

부처님께서 불법을 펴신 것은 생명의 기원이나 세상의 태초 발단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의 한 가지 목적은 고통받는 인류에게 둑카[苦, dukkha(부조화)]라는 보편적 질병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느끼기엔 이 일만이 항상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질곡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자 애썼습니다. 그 밖의 것은 다음과 같은 그분의 말로 알 수 있듯이 그의 목적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만을 나는 설한다

           슬픔과 그 끝냄을. 주33)

― 『중부』Ⅰ, 제22경, 140쪽 ―


목적이 이처럼 한정되었던 만큼 부처님은 세상의 시초나 생명의 기원에 관해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추상적 개념을 늘어놓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지적처럼 그런 것들은 삶의 목표나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분에 의하면, 삶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도덕적으로 향상시키고[戒], 정신집중 능력을 기르고[定], 그 도움으로 더 높은 지혜[惠]를 얻음으로써 우리가 사물을 실제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如實智], 그리하여 이 고통의 삶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인생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실 가운데서 이 목표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것들만 내세웠던 것입니다.


재생설은 왜 최초 원인(조물주)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부처님께서 재생 즉 윤회생사 현상에 대해 말씀하신 목적은 이번 생에서 우리가 한 행위의 결과가 다음 생에 우리를 따라오며, 따라서 우리는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함에 있어 조심스럽게 분별해가며 해야함을 보여주는데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셨던 것은 이번 생에서 우리의 조건, 우리의 기쁨, 슬픔, 기회, 장애 등이 대부분 전생에서 행한 행위의 결과임을 설명하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본래 실제적인 것이어서 윤회의 과정을 파고들어 철학적 추상개념으로 들어가는데엔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연기설은 왜 최초 원인(조물주)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윤회설의 경우와 같이, 연기설(pa.ticca-samuppaada)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오한 의미를 간직한, 이해하기 힘든 이 교리는 일련의 12조건들 혹은 요인이 되는 상태들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 조건들 혹은 요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는데, 말하자면 조건지어줌(paccaya)과 조건지워짐(paccuppanna)의 사이클(순환)을 형성합니다. 이는 존재 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심오하고 중요한 진행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들 12요소는 끊임없이 작용하는데, 그 작용이 연기(緣起)의 과정이기 때문에 각 조건은 다른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다시 다른 조건으로 진행되어 갑니다. 이 과정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은 원인(cause)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조건성(conditionality)이나 의존성(dependence)이라는 매개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조건성은 이 과정의 전개 방식입니다(pa.ticca는 `조건에 따르는' 혹은 `의존적인' 것을, samuppaada는 `함께 일어남'을 의미함).

여기는 심오한 연기법을 상세히 설명할 자리는 아니지만 제기된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얻으려면 부처님께서 이 교리를 설명하실 때 그 과정의 전개 방식이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첫번째 방식은 태어남과 고통의 반복 쪽으로 향하는 구조이고, 그 역의 방식은 반복되는 태어남과 고통을 종식시켜 마침내 온갖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찬 존재의 멈춤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꼭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 안에서 그 과정이 전개되는 방향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는 점입니다.


이 교리의 기반을 이루는 원칙은, 12요소를 일일이 헤아리지 않고 보면 다음과 같이 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역순(逆順)으로 이 원칙은 다음과 같이 작용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그치면 저것이 그친다." 주34)


이렇게 하여 우리는 상대성과 상호의존을 특성으로 하는 연기(緣起)의 원칙을 갖게 됩니다. 이 원칙은 모든 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성질의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 원칙을 삶의 진행과정을 설명하는데 적용하셨고 또 어떻게 그 과정이 멈추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데만 적용하셨습니다.


각각 선행요소에 종속하여 일어나는 이들 열두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명(無明, avijjaa) - 무지

2. 행(行, sa^nkhaaraa)- 의도적 행위들 주35)

3. 식(識, vi~n~naa.na) 또는 빠띠산디 윈냐나(pa.tisandhi-vi~n~naa.na) - 재생의식 또는 재연결의식

4. 명색(名色, naama-ruupa) - 마음·몸 복합체

5. 육입(六入, sa.laayatana) - 여섯 감각영역 또는 통로

6. 촉(觸, phassa) - 접촉

7. 수(受, vedanaa) - 느낌

8. 애(愛, ta.nhaa) - 갈애

9. 취(取, upaadaana) - 붙잡음 또는 달라붙음

10. 유(有, bhava, kamma-bhava) - 형성과정 혹은 제활동과정

11. 생(生, jati) - 태어남

12. 노·사(老死, jara-mara.na) - 늙음과 죽음


이들이 바로 인간 존재가 생과 사를 끝없이 반복 순환하면서 삼사라(윤회) 속을 헤매는 긴 여정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요소들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처음 두 요소는 전생의 원인적 조건(atiita-hetu)을 언급합니다. 그 다음 다섯 요소는 현생에서의 과보(vattamaana-phala)를 가리킵니다. 그 다음 둘은 현생에서의 원인적 조건(vattamaana-hetu)을 마지막 둘은 내생에서의 과보(anaagata-phala)를 말합니다.


무명(無明)은 삶의 과정에서 내내 만나게 되는 모든 슬픔과 고통, 부조화의 근본 원인이자 계속되는 원인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삶의 과정을 윤곽 그리면서 무명을 시발점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무명이 생명의 기원이라거나, 이 세상의 최초 기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삶의 과정을 이해하고, 또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아내는 출발점으로서 무명이 적격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무명 자체는 행(상카라)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행은 역으로 무명에 의해 조건지워지기 때문에, 또 태어남에는 죽음이 따르고 죽음에는 태어남이 따르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나타내는 데는 직선보다 원이 훨씬 더 적합합니다. 그 과정의 열두 요소는 바퀴 안에 있는 열두 개의 바큇살과 같습니다. 이렇게 각 바큇살을 각각의 요소로 치면 우리는 과정에 대한 고찰을 어느 바큇살에서나 다 시작해볼 수 있으며 결국엔 그 바큇살로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은 순환적 질서로 작용합니다. 돌고도는 바퀴와 같습니다.


최초 원인(조물주)에 대한 부처님의 견해


말룽꺄뿟따(Maalu^nkyaaputta)라는 비구가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유한한 것인지 아닌지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명백히 해주지 않는다 하여 부처님에 대해 불평을 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 한 더는 승려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고 선언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말룽꺄뿟따를 향해 그의 출가가 부처님께서 이 문제들에 대해 분명히 답해준다는 조건부였던가를 물으셨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대답을 확인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비구를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습니다. "말룽꺄뿟따여, 그것은 마치 독을 잔뜩 바른 화살에 맞은 사람이 있어 그 친구와 친척들이 의사를 데려오자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누구에게서 상처를 입었고 내가 맞은 화살의 성질은 어떤 것인지 등 상세한 것을 알기 전엔 이 화살을 뽑게 하지 않겠다.' 그 사람은, 말룽꺄뿟따여, 그런 사실을 알아내기 전에 숨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왜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말룽꺄뿟따여, 나는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인지 아닌지, 유한한 것인지 무한한 것인지 밝히려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논의들은 이익됨이 없고 성스러운 삶[梵行]의 기초와 관계가 없으며, 싫증냄[厭離], 냉정[離欲], 멈춤[滅, nirodha], 고요[寂止, upasaama], 직관적 지혜[言+正 智, abhi~n~naa], 깨달음[等覺, sambodhi], 열반(涅槃, nibbaana)에 도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  중부 Ⅰ, 제63경, 「소 말룽꺄뿟따경」, 426∼432쪽 ―


 상응부 의 「아나마따가 상응(Anamatagga Sa.myutta)」에서 부처님은 생명의 최초 기원은 우리의 사유(思惟)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윤회의 시작은 인지로 생각할 수 없는 것(inconceivable)이다. 무명에 덮이고 욕망에 묶인 존재들이 윤회해온 최초의 시발점은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주36)


초기 불교적 관점에 의하면, 어떠한 것도 단일 원인으로부터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 모든 상태가 서로 조건을 이루고 동시에 조건지어짐으로써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든, 우주 내의 어떤 일도 홀로 떨어져 다른 일들과 관계가 없이 분리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원인이 독자적으로 유효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상호관련된, 상호의존하는 원인들과 조건들에서 오는 복잡성이 존재하게 마련이므로, 하나의 원인은 동떨어지고 분리된 단일 원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여러 원인과 조건들로부터 일어나는 게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그 스스로가 근원이 되는 최초 원인(조물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념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맹신에 의해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이성과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최초 원인에 대한 위대한 사상가들의 견해


저명한 철학가 조우드는「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위 우주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근본 원칙, 그 하나만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다원성과 다양성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려면 최소한 두 원칙이 요구된다."


또 한 사람 유명한 사색가 올더스 헉슬리 주37) 는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에서 말했습니다. "최소한 서구에서는 이제 현상들을 첫째 원인에 소급 귀착시키는 짓들은 하지 않는다 (…) 우리가 세상의 모든 악이 생기게 된 첫째 원인을 찾겠다는 야망을 버리고 그 대신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많은 원인들의 존재를, 얽히고 설킨 상관관계와 되풀이되는 작용과 반작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이 철기시대를 황금의 시대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또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 신자가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에서 말했습니다. "도대체 세계의 시초가 있었다고 가정할만한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사물에 시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상상력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다."


문명의 아주 이른 새벽부터 사색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시초를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설사 첫째 원인에 대해 어떤 가설이 나온다 해도 곧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것입니다.


질문  9

사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은 불교도에게만 국한된 것입니까? 그러한 믿음은 불교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있었습니까?


대답

사후의 생명을 믿는 사람은 결코 불교도들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상고적부터 있던 것 중의 하나이며, 불교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이집트인에게도 존재하였고 나중에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인도 브라만들 중에도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비불교도의 믿음과 불교도의 믿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비불교도들의 믿음은 사람 안에 한 생으로부터 다른 생으로 옮겨가거나 전이될 수 있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이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는 재생(rebirth)이 아니고 재육화(reincarnation)입니다. 불교적 원리에 의하면 한 생으로부터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영혼과 같이 변함없고 안정적이며 머물러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재생을 표시하는 빠알리어는 `뿌납바와(punabbhava)', 글자 그대로 `다시 있는 존재'입니다. 만일 영혼의 존재가 용인된다면, 재생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만, 불교는 영혼을 시인하지 않고 한 생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불교의 재생이론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다양한 종교 체계와 신조의 신봉자들이 사후의 생에 관한 믿음을 공유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고 그것에 음식과 죽은 사람이 생시에 좋아하던 옷을 놓은 이유는 그의 `카(Ka)', 즉 영혼이 다른 육체를 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터무니없지만, 그러한 관습은 사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이 보편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B. C. 6세기에 이르러 이 믿음은 그리스의 페레시데스,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피타고라스의 글 속에 나타납니다. 나중에 플라톤은 그의 「공화국(De Republica)」에서 같은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로마의 시인 오비드는 그의 「변형(Metamorphoses)」에서 재육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카이사르 주38) 는 「갈리아 전기(De Bello Gallico)」 6권에서 그가 정복했던 갈리아(옛 프랑스)의 관습과 예절을 설명하면서, 갈리아인들 사이에 이런 재육화의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불교가 나타나기 이전 인도의 종교는 브라만교였는데 뒤에 우파니샤드의 단계에 와서 역시 존재의 재육화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친 일도 부인한 일도 없었지만 재육화 사상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서』 여기저기에 재육화의 사상이 희미하게 언급된 곳(예를 들면 「시편」 126)이 나오는 반면 『신약성서』(「마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17장)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재육화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재육화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은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했던 질문들 가운데 발견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던진 문제에 대해 그들이 한 대답(「마태복음」 16장과 「누가복음」 9장)에서도 눈에 뜨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Confessions)」에서 육화의 교리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 오리겐도 「원칙(De Principiis)」과 「콘트라쎌서스(Contra Celsus)」에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리겐은 어딜 가나 이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초기 기독교회는 이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후기의 교부들은 강력히 반대하여 A. D. 533에 특별히 소집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공식 기각되었습니다(「바이드 카톨릭 백과사전(Vide Catholic Encyclopedia)」, 1909년판, p. 236-237).


이 결정의 결과 기독교 안에서 재육화 신앙은 사라졌지만, 19세기경부터 그 믿음이 다시 꾸준히 힘을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W. W. 애트킨슨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재육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워즈워드, 테니슨, 롱펠로우 그리고 메이스필드 같은 유명한 시인이 이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의 유명한 목사 레슬리 웨더헤드가 이에 대해 강의를 하였는데 그것은 「재육화의 사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질문  10

재생의 조사연구 결과에 관한 것인데, 지금까지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진 사실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히 밝혀졌다는 지적(知的) 만족감 외에, 재생 문제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익을 준단 말입니까?


대답

그것은 이 문제를 너무 좁게 본데서 나온 말입니다. 재생의 진리는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은 열망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열망은 분명 교육받은 사람들에게서 더 뚜렷하지만, 배우지 못한 계층에 있어서도 최소한 가끔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특히 소중하고 가까운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할 때, 이 같은 열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지적인 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충동입니다. 삶과 죽음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라는 가슴으로부터 올라오는 자연스런 요구입니다. 삶이 이 생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슬픔과 기쁨, 걱정과 희망, 상실과 이득으로 가득찬 지금의 생은, 작용과 반작용의 위대한 원칙에 따라 논리정연하게 전개되는 재생의 결과임을 충분히 알게 될 때 인생은 더이상 불가사의도 수수께끼도 아닙니다. 그렇게되면 삶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삶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심장한 중요성을 띠게 됩니다. 인생은 이제 사건과 상황들의 지루한 반복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느껴집니다. 새로운 시야가 활짝 열립니다. 자기 운명의 배를 조정하는 것이 자신이고, 자신의 미래의 생을 짓는 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깨달음에 눈뜨기 시작할 때, 인생을 보는 견해는 완전히 새로 자리잡습니다. 자신의 모든 생각, 말, 행위가 스스로의 미래를 건설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이 하는 생각과 말과 행위 면에서 점점 더 조심하여 선택하게 됩니다. 자신이 훌륭한 삶을 살았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쾌하고 자신있게 다음 생에서의 행복한 경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설혹 우리가 좋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업이란 아주 마감된 사항이 아니고 끊임없이 만들어져가는 것이기에 현재의 좋은 행위로 나쁜 행위의 과보가 수정되고 변경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역시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누구나 삶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과, 참된 마음으로 시작한 그러한 일은 설혹 죽음이 끼여들어 미완으로 남게 되는 경우에도 내생에 다시 착수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재생에 대한 이해는 우리 자신의 삶을 정화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까지도 예외없이 순화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삶이라는 위대한 여행의 도반(道伴)들임을, 우리들이 따르고 있는 보편적 법칙과 기본적 원칙을 똑같이 따르고 있는 동반자, 같은 배를 타고 여행하는 동승객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항상 도움의 손길을 기  꺼이 내밀 준비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적대자를 용서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되기를 항상 기원할 것입니다.


옮긴이의 말


이 책은 윤회재생이 하나의 자연법칙임을 누구나 알 수 있는 평이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윤회의 사실은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500여 년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끝에 큰 깨달음을 이루시던 날, 초저녁에 첫번째로 성취하신 것이 전생회상의 능력이었다. 이때 수없이 많은 곳에서 살아오신 수많은 전생이 명료하게 회상되셨다. 다음으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시며 뭇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가를 보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들이 어김없이 자신의 행위에 따른 삶을 받아가지는 인과응보의 이치를 깨달으셨다. 세번째 중요한 사건은 업에 의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쳇바퀴가 지혜에 의해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니, 바로 무명에서 빚어진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신 것이다. 이로써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이루시어 하늘과 인간세계의 영원한 스승이 되셨다. 부처님이 이 정각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보이듯이 전생에 대한 밝은 지혜의 획득은 깨달음에 있어 중요한 단계를 이룬다.


요즘 서점에는 환생에 대한 책들이 눈에 많이 띄인다. 이들 책들은 불교적 지식없이 쓰여진 듯한데도, 불교의 윤회설과 공통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인간은 결코 죽음에 의해 소멸되는 존재가 아니고, 단지 변화의 여러 국면을 지나고 있는 것뿐이라는 주장에서 그러하다. 영가가 사후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내 눈으로도 확인한 적이 있다. 1982년 미국에서 "Thats incredible"이라는 프로가 매주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때 한 프로에서,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영매의 눈에만 보이는 영가를 카메라로 잡았다. 그 후 나는 영가가 사후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브라이언 와이스 박사나 기타 여러 정신과 의사들의 최근 연구 결과는, 윤회재생이 과학적인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 손을 대게 된 동기는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근본불교 이론체계(아비담마)에서는 윤회재생의 과정을 어떻게 보는가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회재생은 무슨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우리가 재생한다는 사실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순간순간 삶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다는 것이며, 삶은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즉 윤회재생은 인간의 영적 진화를 위하여 마련된 자연법칙의 일환으로서, 우리가 무지하여 잘못된 삶을 선택할 시에는 고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엔 탐욕스럽고, 야심에 찬 사람들로 득실거리고, 또 한쪽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다. 재생의 사실은 일견 모순에 가득찬 이 세계에 엄연한 법칙이 있음을 말하고, 우리의 삶이 아주 조심성 있게 선(善)을 향하여 선택되어야 하는 이유를 밝혀준다. 일생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며 많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삶과 시간이 헛되이 소모되고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계속 재생하여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탐·진·치 미망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일깨워주셨다(고요한소리에서 나온 칼 베르너의 보리수 잎·셋「세상의 무거운 짐, 삼독심」에 현대적 삼독심의 해악이 쉽게 잘 설명되어 있다). 다음 생에 어떤 삶이 주어질는지가 현재의 업지음에 달려있다는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면, 과연 잘못된 자아의 허상에 속아 헛된 삶이나, 스스로를 괴롭히게 될 삶을 무모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지난 몇해 동안 내 가까운 주위에서도 몇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제 그들이 세상을 떠난 것이 단지 하나의 변화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다시 그들이 세상에 돌아온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올런지….


역주


1) 재생은 영어 `rebirth'의 역어이다. 영어권에선 rebirth가 빠알리어의 jaati(生)의 역어로 자리잡고 있고, 또 남방전통에선 12연기의 생(生)은 재생으로 확고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별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rebirth를 우리말로 재생 또는 `다시 태어남'이라 옮길 경우엔 다소 문제가 따른다. 불교 이외의 종교나 사상에서 이해하는 관념과는 다른 불교의 특색을 나타내기에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윤회생사·재생 등으로 옮겼다. ∥원문으로∥


2) 재육화 : 원어는 reincarnation. 영혼전생 또는 화현전생(化現轉生)으로 풀 수 있겠다.


3)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한 것의 서로 다른 형태이다. 질량은 에너지로 변환되고 에너지는 어딘가에 남아 있게 된다.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표현하는 공식 E= mc^2 ~ 은 인류에게 원자력 시대를 열었다. ∥원문으로∥


4)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진공에는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무엇인가로 차 있다. 물질이 전혀 없는 일정한 공간을 선정하고, 그 안에서 빛, 전자파 등의 기초양자를 제거한다. 그러면 그 공간은 전자기 진공을 만든다. 그러나 전기 역학에서 나온 결과를 그대로 적용해 보면, 이 진공이 가진 에너지 밀도는 무한하다. 즉 진공은 무(無)이면서도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 현대 물리학의 개념은 진공은 공허하여 형체가 없으나 만물을 산출할 수 있다는 동양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원문으로∥


5) 리스 데이비스(T. W. Rhys Davids) : 영국의 언어학자. 빠알리성전협회(Paali Text Society)를 창설 및 초대회장 역임. 법륜·하나「부처님 그 분」, 87쪽 주해 참조. ∥원문으로∥


6)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원자는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소립자는 끊임없이 운동하며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에너지의 끊임없는 요동에 의해 물질은 에너지로 변했다가 물질로 되었다가 한다. 양자장론에 의하면, 전자와 같은 물질적 입자는 단지 한 영역에 집중되어 있는 전자장[장(場)은 파동과 같다]에 불과하고, 뚜렷하게 안팎의 경계를 구별지울 수 없다. 전자를 구성하고 있는 단단한 개체 같은 것은 없는 것이고 허공에 널리 퍼져 있는 장만이 유일한 실체인 것이다. 이 현대물리학에서의 실체에 대한 개념은 물질적 실체는 망상(妄想)이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상당히 일치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의식에까지 적용하여, 의식도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동적이고 순간적인 것이라고 가르치며 따라서 변치 않는 자아란 개념도 망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가르친다. ∥원문으로∥


7)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존재는 업의 소유주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을 자궁으로 하며, 업을 친연(親緣)으로 하며, 업을 의지처로 한다. 존재에 우열이 있다면 업이 나눈 것이다."


8)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마음에 의해 세간은 이끌려간다. 마음에 의해 끌려다닌다(고초를 겪는다). 마음 한 법[心一法]이 모든 것을 복속시킨다.'


9) 월슈(Maurice O' Connell Walshe:1911∼) : 영국 런던 태생. 독일어 전공. 1951년부터 활발한 불자로서 불자협회 부회장, 영국 승가 트러스트 회장 등을 역임하며 보리수 잎·하나「영원한 올챙이」등 불교에 관한 글을 다수 발표. 30여 년간 빠알리어를 연구한 후 『장부』를 영역(1987)한 것은 큰 업적임. ∥원문으로∥


10) 뒤에 설명이 나오지만 불교에선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같이 묶어 바왕가(bhava.nga)라 부른다. 여기서 무의식 형태들이란 바왕가를 가리킨다.


11) 켈라니(Kelani) : 스리랑카에 있는 강의 이름.


12)『Atthasaalini(勝義說)』: 논장 중『Dhammasa^nga.ni(法集論)』에 대한 주석서.


13) 인식 과정에서 한 단계가 점하는 시간. 가장 짧은 시간 단위. 번개가 번쩍할 동안 수십억 심찰나가 있다고 주석가들은 비유로 설명함. ∥원문으로∥


14) 참고로 동양에서 작은 수는 다음과 같이 부른다(19C이후 현행. 괄호 안은 서양 단위).


10-1분 分 (deci)    10-2리 厘 (centi)   10-3모 毛 (mili)

10-4사 絲           10-5홀 忽           10-6미 微 (micro)

10-7섬 纖           10-8사 沙           10-9진 塵 (nano)

10-10애 埃          10-11묘 渺           10-12막 漠(pico)

10-13모호 模糊         10-14준순 浚巡         10-15수유 須臾(femto)

10-16순식 瞬息        10-17 탄지 彈指       10-18찰나 刹那 (atto)

10-19육덕 六德       10-20허공 虛空       10-21청정 淸淨 ∥원문으로∥


15)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 : 미국의 철학자·심리학자. 실용주의 철학운동과 기능주의 심리학 운동의 주도자이다.


16)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1872∼1970) : 영국의 논리학자·철학자.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7) ㉮ 위티찌따(viithi citta) : 후기 상좌부에서 쓰는 용어. viithi는 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흐름이란 의미로 쓰여진다고 나라다 스님은 『섭아비담마의론』의 영역본에서 주석달고 있다. 路心. process of consciousness, cognitive, series 등으로 옮기는데 이 책의 저자는 conscious mind란 역어를 택하면서도 서구적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conscious viithi citta 란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의식(활동)단계의 마음'이라 옮기겠다.

㉯ 바왕가찌따(bhava^nga citta) : 有分心. subconsciousness. subhiminal consciousness subconscious life-continuum. 저자는 unconscious mind 혹은 the subconscious or unconscious bhava^nga citta로 표현. 이 잠재 및 무의식은 불교 심리학에서는 본문의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중요성-그 기본적 위치"(45쪽) 이하에서 보듯 서구 심리학에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일단 `무의식단계의 마음'이라 옮기기로 한다. ∥원문으로∥


18) 서구 심리학에서는 마음의 구조를 수직적으로 파악하여 층 혹은 수준으로 보지만 불교 심리학에서는 연속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수준 혹은 층이란 개념보다는 단계란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아 우선 써보기로 한다.


19) 의식의 문턱 : 식역(識  ). threshold of the conscious mind. 의식의 소실 또는 출현의 경계선. 자극에 대해 반응이 시작되는 분계점. ∥원문으로∥


20)「보리수 잎·여덟」62쪽 주(1994년판), 「새불교 원초불교―교설편 Ⅰ」 106쪽 주 참조.


21)「보리수 잎 ·스물 하나」17∼18쪽, 「새불교 원초불교―교설편 Ⅰ」 252쪽 참조.


22) 미얀마의 Shwe Zan Aung과 영국의 P. T. S. 회장 Rhys Davids 부인이 협력하여 번역 출간한 『섭아비담마의론(Abhidhammatha Sangaha)』의 영역본 제명. 미얀마의 아누룻다 스님(10∼11세기)이 저술한 원저는 남방상좌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교리강요서임. ∥원문으로∥


23) 맥두걸(William McDougall:1871∼1938) : 영국태생 미국의 심리학자. 실험 심리학 및 생리 심리학의 확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적 행동의 기초에 관한 광범한 연구를 자극했던 「사회 심리학개론」을 썼다. 인간의 행동이 단지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본능 내지 본능에 기원되는 애·증·흥미·경쟁 등에 의해 움직인다는 본능론을 폄. ∥원문으로∥


24) 식의 상태 : 영문은 mental states임. 오온 중 식온(vi~n~n.naa khandha)이 14가지 작용을 하고 있는 상태. 1.재연결의식 2.무의식단계(바왕가)의 마음 3.다섯 감각의 문을 향함 4∼8.안식 내지 신식 9.받아들임 10.조사 11.결정 12.생각-촉진 13.경험의 등록 14.죽음의식.


25) 리스 데이비스 부인 : 「보리수 잎·여덟」66쪽 주해(1994년판), 「새불교 원초불교―교설편Ⅰ」 112쪽 주 참조. ∥원문으로∥


26) 「티베트 사자의 서」: 원제는「The Bardo Thodol」. 8,9세기경 파드마삼바바가 인도와 티베트의 불교도를 위해 쓴 책으로, 죽은 사람이 죽음과 재생 사이의 중간계(티베트어로는 `바르도')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음.


27) 라다크리슈난 :「보리수 잎·여덟」68쪽 주(1994년판), 「새불교 원초불교 ― 교설편Ⅰ」 114쪽 주 참조.


28) 법륜·셋「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 34쪽 주 참조. ∥원문으로∥


29) 달케 :「보리수 잎·여덟」70쪽(1994년판) 주, 「새불교 원초불교 ― 교설편Ⅰ」 116∼117쪽 주 참조.


30) 유전자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크릭은 최근 「놀라운 가설(The astonishing hypothesis)」 이라는 책에서 영혼이나 마음이 뉴런(신경세포)의 집합 혹은 이 뉴런들과 연관된 분자들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주로 표면적 의식이 뇌의 신경세포가 파괴될 때 장애를 받는다는 의학적 관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여기에는 의식의 통로와 의식자체를 동일시하는 논리적 잘못이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17단계 생각의 과정을 통하여 표면의식과 끊임없는 교호작용을 하며 생명을 이끌어가는 무의식(바왕가찌따)을 오히려 마음의 주체로 본다. 마음이 모든 것에 앞서고 모든 것을 만들어 간다는 증거는, 수행을 통하여 마음의 정화를 이루어 불치의 병을 치료한 예 같은 것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보리수 잎·아홉「관법수행의 첫걸음」참조). ∥원문으로∥


31) 보리수 잎·스물 하나「업과 환생」9∼10쪽, 「새불교 원초불교 ― 교설편Ⅰ」 248쪽 참조.


32)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1877∼1945) :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되려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교육을 많이 받을 수 없었다. 책방 점원, 보험 세일즈맨으로 일하다가 21세 때 운명의 전환기를 맞게 되어, 최면상태에서 타고난 투시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처방하곤 하였다. 만년에는 `버지니아비치의 기적의 사나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원문으로∥


33) 영문은 one thing only do I teach, Sorrow and its End to reach임.


34) imasmim sati, idam hoti imassa uppaadaa idam uppajjati imasmim asati, idam na hoti imassa nirodhaa idam nirujjhati

    ―『중부』Ⅱ, 제79경「소 사꾸루다이경」, 32쪽, 6∼7행 ― ∥원문으로∥


35) 여기 부쳐진 12연기 각 요소에 대한 해석과 이하 본문에 전개되는 설명은 어디까지나 남방 아비담마의 견해이다. 행을 의도적 행위들이라 단정할 경우 `행은 업이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경전에선 행은 업을 포함할 뿐 아니라 무의식적 활동까지(예로 무의식적 호흡) 포함하는 훨씬 광범한 개념이다. 다만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에 입각하여 12연기를 이해할 때는 이러한 아비담마적 인식이 필연적이다. ∥원문으로∥


36) 원문은 "anamataggo'yam bhikkaahbave samsaaro, pubbaakoti napa~n~naayati avijjaaniivara.naanam sattaanam ta.nhaa.nam vojanaanam samyojanaanam."으로 『상응부』, Ⅱ, 「무지상응」, 179쪽, 186쪽 등 참조.


37)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1894∼1963) : 영국의 소설가, 수필가, 평론가. 제2차세계대전 전부터 외국에 거주. 무집착주의에 의한 평화달성을 제창. 날카로운 문명비평소설 「원숭이와 본질」(1945), 「용감한 신세계」(1932) 등이 있다. ∥원문으로∥


38)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B.C.100∼B.C.44) :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정치가. 저서로는 「갈리아 전기」와 「내란기」가 있음. ∥원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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