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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여나는가(2)


7장  생각, 생각-과정 및 심찰나


어느 언어에 있어서나, 어떤 단어와 표현들은 정확성을 기하기보다 인습적으로 느슨하게 적당히 사용되고 있다. 일례로 우리는 `해가 뜨고 진다'는 말을 쓰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5장에서 우리는 `마음'이 결코 영구적이고 안정적인 것이 아닌데 `마음'이란 단어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듯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보았다. 이 장에서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마음'처럼 역시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볼 것이다. 맥두걸 주23) 이 그의 저서 「심리학(Psychology)」에서 "의식에 관한 사실들을 기술하다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나 단어들이 분석적 기술(記述) 작업에 매우 부적절함을 발견한다." 고 했던 말을 새삼 상기하며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어떤 대상을 의식하거나 알아차리는 것이다. 생각의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내면의 것일 수도 있다. 의식상태에서든 무의식상태에서든 사람이 생각을 하지 않는 찰나는 없다. 불교 심리학에서는 생각을 하나의 통일적 개체로 보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생각-과정(thought-proc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느슨하게 부르는 것이 실은 생각-과정인 것이다. 「효과적 사고(Effective Thinking)」를 저술한 조셉 제스트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각이란 정신의 진행과정들이 복합적으로 모인 것을 지칭하는 편리한 이름일 뿐이다."


생각-과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앞에서 마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의 연속으로서, 무언가 영원하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각각의 생각이 이웃 생각을 뒤따르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실제로 마음은 단일체가 아니라 하나의 진행과정이다. 다만 어떤 특색이 한정된 진행과정이라는 점, 다시 말해 17의 심찰나들이 서로 뒤쫓는 한정된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각-과정이 된다. 사람이 나무를 보고 바로 나무라고 인식했다면, 그것은 나무에 대한 자각 혹은 의식이 그 사람 안에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일이 단 하나의 정신작용에 의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나무에 대한 자각 혹은 의식, 아니면 생각이 온전히 일어나려면 17의 단계 혹은 심찰나들이 이미 일어났을 것이다. 나무를 본 사람은 17단계 혹은 심찰나들을 모두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들 정신적 과정의 어떤 부분 특히 초기과정은 마음의 `바왕가' 즉 무의식상태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각-과정을 마치거나 완성시키는데는 17단계, 혹은 심찰나가 필요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는데 긴 시간이 소요된다고 추측하면 잘못이다. 오히려 거기에 걸리는 시간이 극도로 짧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석가들은 생각-과정을 번갯불이나 눈의 깜박임에 비교하곤 했다. 생각-과정에 걸리는 시간은 그만큼 극미하다. 이들 17단계 혹은 심찰나들의 구성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밝혀보고자 한다.


심찰나란 무엇인가


하나의 생각-과정의 지속시간을 측정하는 단위는 심찰나인데 이 또한 시간을 무한히 작게 분할한 것이다. 모든 심찰나들은 마치 바다의 파도가 솟구쳐서는 덧없이 짧은 찰나 동안 머물렀다가 가라앉아 버리듯이, 의식단계의 마음에서 일어나 한 찰나 거기에 남았다가는 무의식단계의 마음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므로 심찰나들이 거치는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


(1)시작단계 혹은 발생단계[生, uppaada] (2)지속단계[住, .thiti] (3)정지단계[滅, bha^nga]. 이들 세 단계 역시 더할 수 없이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 이렇듯 짧디짧은 하나의 심찰나조차도 그냥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 첫째에서 둘째 단계로, 둘째에서 셋째 단계로 번개처럼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심찰나와 생각-과정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의 생각-과정은 17심찰나로 이루어지며, 각 심찰나들은 다시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의 생각-과정을 끝내어 완성시키려면 17심찰나들이 각기 일어났다가, 머물렀다, 사라져가야만 된다. 17번째 심찰나의 정지단계가 사라지고, 다음번 생각-과정에서 첫번째 심찰나의 발생단계가 일어나기 전 바로 그 연결점에서, 하나의 생각-과정이 끝났기 때문에 의식단계의 마음은 가라앉고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활동하여 다시 나타난다. 이 무의식단계의 마음도 역시 오래가지 않는다. 이 역시 덧없이 짧은 한 찰나 동안 무의식단계의 남았다가 사라져 다음 생각-과정이 의식단계의 마음에 떠오르도록 한다. 이 새로운 생각-과정도 17단계 혹은 심찰나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러면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다시 나타난다. 이런 방식으로 식의 진행과정이라는 끝없는 개울물은 흐르고 또 흐른다.


이와 같은 여러가지 식의 상태 내지 작용(이하 식의 상태라고 쓰기로 한다) 주24) 기찻간들처럼 연결되어 일종의 톱니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잘못이다. 하나하나의 식의 단계는 그 다음 단계로 고스란히 녹아든다. 각 식의 단계와 그 다음 단계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없다. 그러므로 한 심찰나의 발생단계와 그에 이어지는 지속단계 사이에 혹은 지속단계와 정지단계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생각-과정과 다음 과정 사이에도 뚜렷한 구분선이 없다. 하나의 의식적 생각-과정이 끝나고 다음 것이 시작하기 전에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나타난다고 말은 비록 그렇게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뚜렷한 구분선은 없다. 왜냐하면, 앞장에서 기술했듯이, 의식단계의 마음은 무의식단계의 마음으로 녹아들듯 합쳐지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뚜렷한 구분선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나 또 어떤 상황하에서나 각 정신단계는 다음 것에 그처럼 합쳐진다. 그래서 죽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의식하는 식의 단계도 그 다음 생의 태아의 첫번째 식의 단계와 합쳐진다. 이는 심령적 현상이지 물리적 현


상은 아니기 때문에 거리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는 사람의 마지막 의식단계의 정신적 상태가 갖는 합성력은 어떤 특정한 육체적 요인들과 더불어 다음 생 태아의 명색(名色 : 12연기의 4번째 항목)을 이루게 된다.


8장  정상적인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앞장에서 우리는 보통 생각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부르는 것이 실은 생각-과정이며, 그것은 17단계, 또는 17심찰나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보통 때 생각-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 다음의 두 장은 죽을 때에 생각-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태어날 때는 생각-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각각 설명할 것이다.


이제 정상시 하나의 생각-과정이 어떻게 17의 단계들 혹은 심찰나들을 통하여 진행되는지 그 흥미로운 과정을 주석서의 설명대로 추적하여 보자. 정상적인 경우 그들이 일어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정상적 생각-과정의 순서


1. 과거의 무의식[過去有分, bhava^nga-atiita]

2. 무의식의 동요[有分의 動搖, bhava^nga-calana]

3. 무의식의 정지[有分의 斷壞, bhava^nga-upaccheda]

4. 다섯 감각의 문을 향함[五門轉向, pa~ncadvara-aavajjana]

5. 다섯 갈래의 의식[五識, pa~nca-vi~n~naa.na]

6. 받아들임[領收, sampa.ticchana]

7. 조사[推度, santiira.na]

8. 결정(決定, votthapana)

9-15. 생각-촉진[速行, javana]

16,17. 경험의 등록[彼所緣, tadaalamba.na]


첫번째 심찰나 : 과거의 무의식

우리는 의식단계의 과정이 가동하기 직전 단계부터 추적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의식단계의 마음이 정지 중에 있어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흐름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흐르고 있는 단계이다. 그러한 상태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있어 바깥 대상이나 자극에 마음이 반응하지 않을 경우에 존재한다. 이 단계는 추적 조사를 시작하기 위해 첫 단계로 간주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아직 과정이 시작되지는 않은 단계이다(이 첫번째 단계는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의식단계의 한 생각이 가라앉고 다음 것이 일어나기 전의 그 짧은 시간 간격 동안에 역시 존재한다).


두번째 심찰나 : 바왕가의 동요

이제 외부의 물체나 자극이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모양이나 소리, 그 밖의 감각인상(오관의 하나를 끌어당기는 어떤 종류의 자극이든지)으로 받아들여진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무의식단계 마음의 흐름은 방해를 받게 된다. 이것이 두번째의 심찰나 혹은 단계이다. 이런 현상 역시 깨어있는 상태에서 하나의 의식단계의 마음이 가라앉고 다음 것이 일어나기 전에도 일어날 수 있다. 그때 마음은 매우 짧은 사이지만 무의식상태에 있다. 무의식의 흐름은 이제 동요하기 시작한다(`짤라나'는 흔들림 혹은 동요를 의미한다). 이때의 동요는 한 심찰나 동안 지속된 다음 가라앉는다. 이 상태를 셰 잔 아웅은 「철학개요」 서문에서 회전속도가 떨어져 막 넘어지려는 순간의 팽이의 흔들림에 비교하였다. 이것은 자극이나 (감각)대상이 무의식의 흐름을 막아 그 주의를 의식단계의 마음 쪽으로 돌리도록 강요한 결과이다.


세 번째 심찰나 : 무의식의 정지

이것은 무의식단계 마음의 흐름이 저지당하거나 끊기는 단계이다(`우빳체다'는 단절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의식단계의 마음이 흐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그 자극물이나 감각대상은 인식되지 않고 있다.


네 번째 심찰나 : 다섯 감각의 문을 향함

이 단계는 무의식단계의 흐름을 저지한 대상을 의식단계의 마음이 인식하기 시작한 첫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안·이·비·설·신) 다섯 감각의 문 중 어느 쪽으로 자극이 들어오는지 알아내기 위해 두리번거리기 때문에 빤짜드와라 아왓자나라 불린다(`빤짜드와라'는 다섯 개의 문을 의미하며 `아왓자나'는 향해 돌아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봄, 들음, 냄새맡음, 맛봄, 접촉의 다섯 감각통로 중 어느 하나를 통해 오는 자극이나 대상 쪽으로 주의를 돌리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잠을 자던 사람이 방금 깨어났기 때문에 그의 주의를 끌어당기는 무언가 쪽으로 향하지만 그것에 대해 더 알지는 못한다. 이 상황은 때때로 거미줄이 흔들렸을 때 줄을 흔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행동을 취하는 거미의 움직임에 견주어진다. 의식단계의 마음의 활동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평온하게 흐르고 있는 무의식단계는 거미줄 한복판에서 꼼짝않고 있는 거미의 조용한 모습에 비교된다. 곤충이 거미집에 들어와 어느 한 줄에 얽히면 거미집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거미는 어느 줄에 무엇이 얽혀있는지 보려고 몸을 돌린다. 이러한 것이 정확히 다섯 감각의 문을 향하는 심찰나의 기능이다.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은 자극이 다섯 가지 감각의 문 중 어느 것을 통하여 들어왔는지 알아보려 한다. 모양인가 소리인가 아니면 다른 감각인상인가? 그는 계속 두리번거린다. 그것은 아직 무언가를 낌새채는 정도이다. 만약 자극이 다섯 가지 감각 기능을 통해 야기된 것이 아니고, 생각을 통하여 내적으로 발생된 것이라면 이 단계는 뜻[意]의 문을 향함이라 한다. 이것은 다섯 가지 감각의 문에 포함되지 않는 색다른 과정이다. 이 생각-과정의 진행에선 다섯번째에서 여덟번째까지의 심찰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금 기술하고 있는 생각-과정과는 그런 점이 다르다.


다섯 번째 심찰나 : 다섯 갈래의 의식

이제는 자극에 의해 생겨난 감각인상과 부응하는 종류의 의식이 나타나는 단계이다(`빤짜'는 다섯을 의미하며, `윈냐나'는 의식을 의미한다). 만약 자극이 모양에 의한 것이면 안식(眼識)이 작용한다. 만약 그것이 소리에 의한 것이면 이식(耳識)이 작용한다. 이런 식으로 각 감각기관 나름대로 특정 감각 의식이 있어 그 감각 의식들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자극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느 감각 문에 나타났는가를 알아챘을 뿐이다.


여섯 번째 심찰나 : 받아들임

이것은 자극으로 인해 야기된 감각인상이 제대로 받아들여졌을 때 일어나는 심찰나이다. 감각된 것이 이제 받아들여진다(`삼빠띳차나'는 받아들임을 뜻함).


일곱 번째 심찰나 : 조사

받아들이는 기능에 뒤이어 조사하는 기능이 일어난다. 이 생각-과정은 감각인상을 발생시킨 자극이나 대상을 조사하고 분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받아들여진 것이 조사된다(`산띠라나'는 조사를 의미한다).


여덟 번째 심찰나 : 결정

이것은 감각인상을 일으킨 자극에 관하여 결정이 내려지는 심찰나이다(`옷타빠나'는 결정을 의미한다). 조사된 것이 결정되거나 확정된다.


아홉 번째에서 열다섯 번째까지의 심찰나 : 생각-촉진

이제 일곱 심찰나 동안 자와나, 통각(統覺) 혹은 촉진이라고 불리는 단계가 이어지는데 심리적으로 중요한 단계이다(임종시에는 이들 일곱 심찰나 중 다섯 심찰나만이 일어난다). 그것은 내적 통찰의 단계이며 그 뒤를 이어 행위가 일어난다. 이 심찰나의 심리적 중요성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자와나란 말은 달리다, 몰아가다, 혹은 자극하다를 의미하는 빠알리어 `자와띠'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들 식의 상태는 앞의 상태와 달리, 심찰나가 길게 지속되는데 그 주요 기능 중의 하나가 촉진하는 기능이다. 이 촉진력은 의식단계 마음의 진행이 절정에 달했을 때 뿜어나온다. 이 단계가 인식이 최고조에 이른 때이므로 사람은 비로소 대상이나 자극을 모든 연관관계 속에서 충분히 의식하게 된다. 업이 선 혹은 악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 이 단계에서인데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 단계에서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모든 의식단계의 순간들은 반사반응과 같다. 일어나야 되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자와나만이 사람이 나름대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계다. 이 중대한 심찰나에는 선택의 요소가 존재하며, 이 요소가 어떤 성질의 의지를 발휘하는가에 따라 사람의 장래가 좌우된다. 만일 마음에 들어온 감각대상이 갈애[貪], 증오[瞋]나 미혹[癡] 이라는 때로 더럽혀지지 않고 올바르게 사념된다면[yoniso manasikaara, 如理作意] 조화로운 결과가 따라올 것이다. 만일 그릇되게 사념된다면[ayoniso manasikaara, 非如理作意] 조화롭지 못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이 같은 맥락의 자와나는 번역하기 힘든 단어임에 틀림없다. 리스 데이비스 교수는 빠알리어 사전에서, 의식단계 마음의 활동과정 중 열두번째 단계로서의 자와나는 `나아감(going)'이되, 빨리 달린다는 뜻이 아니라 지적인 움직임이라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 충분한 지각 혹은 통각의 단계인 것이다.


리스 데이비스 부인 주25) 은 자와나에 관해, 신경조직 내 중추 기능이 원심성 신경활동을 시작하거나 신경섬유를 분포하려고 할 때 신경돌기 내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국면 혹은 그에 유사한 국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신경분포란 생명유지와 체내 여러 기관들의 기능을 위해 필요한 신경작용을 말한 것이므로 이 같은 비유가 부적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리스 데이비스 여사는 이 단어 번역에 여러 시간을 할애한 다음에도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자신은 원어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셰 잔 아웅은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철학개요」서문에서 자와나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제 온전한 인지(認知)의 통각단계가 나타난다. 앞에까지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었거나 두루 통합된 대상이 통각되는, 즉 적절하게 인지되는 단계다. 이 단계는 통상 일곱 심찰나가 걸리든가 아니면 전혀 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예외적으로 임종 순간이나 마취, 환각, 현상 창조와 기타 다른 특별한 경우에는 일곱 이내의 심찰나가 진행된다. 이 통각단계에서 주체는 감각인상을 해석하고 이 경험의 객관적 의미를 속속들이 음미한다."


열여섯 번째 및 열일곱 번째 심찰나 : 경험의 등록

이들은 앞의 생각-촉진 찰나들의 결과로 생기는 찰나들로, 두 심찰나 동안 지속한다. 이들 찰나의 유일한 기능은 생각-촉진 심찰나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상을 등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단계의 과정을 구성하는데 없으면 안되는 부분은 아니고 단지 사라져버리는 경험의 회상일 뿐이다. 만약 감각인상이 강하지 않다면 이 심찰나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따달람바나'는 `그 대상'이라는 뜻의 `땃(tad)+알람바나(aalambana)'에서 나온 말이다. 앞의 생각-촉진과 같은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으며, 『청정도론』에서는 배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 잠시 배 뒤를 따라 돌아치는 물의 흐름에 비유되고 있다.


전체로 본 17개 심찰나

언뜻 생각하면 길게 느껴지는 이들 17의 심찰나들은 무한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단 하나의 생각-과정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과정의 진전은 자극의 강도에 따라 다르다. 만약 강도가 아주 클 때는 전 과정이 모두 일어난다. 강도가 보통 큰 정도면 열여섯번째와 열일곱번째의 등록 순간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강도가 작거나 아주 작으면 과정은 그대로 전개되나 온전하게 인지되지 않는 상태에 머문다.

유명한 `떨어지는 망고'의 비유

이들 17단계의 심찰나를 옛 주석가들은, 잠자던 사람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망고 때문에 잠이 깨어 그것을 먹고 다시 잠들 때까지 일어나는 17단계에 비유하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망고나무 밑에서 머리를 덮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하자. 문득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자 익은 망고가 그의 옆에 떨어지게 된다. 잠자던 사람이 그 소리에 잠이 깨어 일어난다. 그리고는 떨어진 망고를 발견한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검사한다. 그것이 먹음직스러운 과일임을 알게 되자 그것을 먹고 마지막 한 조각까지 삼킨 후, 머리를 덮고는 다시 잠이 든다.

이 사람의 수면상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흐르는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흐름을 나타낸다. 바람이 나무에 와 부딪치는 것은 `과거 무의식'을 나타낸다. 잠자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계속 잠을 잔다. 무의식단계도 이와 같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무의식의 동요를 나타낸다. 수면이 방해를 받는다. 무의식도 이와 같다. 망고의 떨어짐은 무의식의 흐름이 정지됨을 나타낸다. 사람의 깨어남은 다섯 감각의 문을 통해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가 일어남을 나타낸다. 머리 위에 덮었던 것을 벗고 망고를 보는데 눈을 사용하는 것은 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는 의식의 다섯 형태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과일을 집는 것은 수용을 나타내며, 그것을 검사하는 것은 조사를 나타낸다. 과일이 먹


음직스러운 망고임을 발견하는 것은 결정이다. 과일을 먹는 것은 일곱 심찰나 동안의 통각 행위를 나타낸다. 입안에 남은 마지막 조각을 삼키는 것은 인상의 등록을 나타낸다. 이 사람이 머리를 가리고 다시 잠드는 것은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평탄하게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9장  임종시의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정상적인 상황에서 생각-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그 다음 과제, 즉 죽음을 맞는 순간 생각-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별어려움 없이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이해함으로써만 우리는 심령적 차원에서 죽음 뒤에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재생은 이해될 수 없다.


죽음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


인간은 정신·물리적 유기체 즉 마음과 몸의 결합체[名色, naama-ruupa]다. 몸과 마음은 꽃과 향기처럼 서로 긴밀한 결합상태에서 공존한다. 몸은 꽃과 같고 마음은 향기와 같으며 죽음은 공존하던 양쪽의 헤어짐에 불과하다. 임종의 순간 사람의 몸과 마음(명색)은 무력하다.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모든 면에서 강했을지 몰라도 바로 죽음의 순간에는 힘이 없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부터 역산(逆算)한 17번째 심찰나부터 새로운 육체적 기능 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동차 운전자가 차를 멈추기 직전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어내 엔진에 더이상 추진력이 주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업에서 생겨나는 육체적 속성(kammaja-ruupa)'들이 더는 일어나지 못하고, 그 심찰나 전단계까지 존재했던 육체적 속성들은 임종의식[cuti-citta, 死沒心] 찰나까지만 존속하다가 마침내 멈춘다. 더이상 새로운 육체적 속성들이 재생되지 않기 때문에 전체과정은 약해지고 또 약해진다. 그것은 기름등잔의 기름이 떨어지자 사그라지는 불꽃과 같다.


마음과 몸의 결합체가 결합체로서 살아있기를 멈춘다고해서 몸이나 마음이 파괴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결합했던 부분들이 제각각 따로 한 조건, 또는 상태로부터 다른 조건, 또는 상태로 시시각각 간단없이 변화해 나간다. 비록 이제는 두 개의 과정이 제각각 따로이기는하지만. 육체를 구성했던 부분은 한때 사람의 몸에 입혀졌었지만 이제는 버려진 낡은 옷처럼 저 혼자만의 변화과정 즉 천천히 부패되는 과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다. 물질은 에너지이며 없어지거나 파괴될 수 없다. 앞의 장에서 언급한 대로 육체적 성분들은 그를 구성해온 원소들, 즉 어떤 것은 기체로서 `공기'로, 어떤 것은 유동체로서 `물'로 그리고 나머지들은 광물로서 `흙'으로 변화한다. 이 원소들 역시 파괴되거나 없어질 수 없고 단지 그들의 형태만 바뀔 뿐이다. 인간의 육체 부분에 관한 한 변화의 과정은 이런 방식으로 지속된다.


마음에 대한 죽음의 영향


그러면 정신 부분(naama)은 어떠한가? 정신 쪽 역시 육체 쪽과 마찬가지로, 더이상 육체와는 관련이 없지만 한 조건 또는 상태로부터 다른 조건 또는 상태로 끊임없는 변화를 계속해 나간다. 생각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이므로 파괴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 앞에서 우리는 마음이 영원한 것도 고정된 것도 아님을 알았고, 하나의 단일체가 아니라 빠른 속도로 생각이 생각을 뒤쫓는, 그래서 영원하고 고정된 것인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생각의 연속적 흐름(santati)임을 보았다. 죽음은 이 연속적 흐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며, 이 과정을 계속 진행시키는데 장애가 되지도 않는다.


생각생각이 이어져가는 법칙은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임종의 마지막 생각-과정 중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mara.nasanna-javana-citta)이라는 마지막 심찰나는, 비록 힘이 없어 혼자서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강력한 잠재력을 끌어낸다. 왜냐하면 죽어가는 마음의 문턱[識  ]을 들어서는 세 가지 강력한 생각-대상 중 하나가 그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 가지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가 나타남


그때 임종자에게는 눈앞에 나타나는 이 세 종류의 생각 -대상에 대해 저항할만한 힘이 없다. 강력하게 나타나는 이 생각-대상들은 틀림없는 죽음의 표시이다. 이에 관하여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임종자의 마음은 비록 생각을 일으킬 힘이 없지만, 이들 세 가지 강력한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 중 하나가 나타남으로써 강력하게 떠밀리거나 혹은 충동을 얻게 되어 다른 생각이 일어나는데에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이어서 일어나는 생각이 재생의식 혹은 재연결의식이다. 재생의식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관하여는 차후에 다룰 예정이다.



임종시의 생각-과정은 반드시 일어난다


죽음을 맞고 있는 사람은 옆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런 의식도 없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선 이 마지막 정신적 과정이 엄연히 진행되고 있다. 이 과정은 죽음을 당하는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갑작스럽고 뜻밖에 닥친 죽음일지라도 임종의 찰나에는 반드시 일어난다. 주석서에 따르면 사람을 갑자기 물에 빠트려 직사시킬 경우에도 역시 죽음직전에는 이 마지막 생각-과정이 작용할 찰나가 있다. 모루 위의 파리가 망치에 맞아 순식간에 뭉개지는 경우도 죽음직전 마지막 생각-과정이 작용할 틈새는 있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생각은 에너지이다. 그것도 창조적인 에너지이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 충분히 강력할 경우엔 어떤 특정상황하에서 능히 창조적 원인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도 앞에서 언급한, 그리고 후에 충분히 설명하게 될 강력한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 중 하나로부터 그 힘을 끌어내는 마지막의 생각-촉진의 마음은 적합한 장소에서 재생의식 혹은 재연결의식을 어렵지 않게 일으킬 수 있다. 그 적합한 곳이 어디인지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재생산하는 업


여기에서 언급해둘 것은 이때 나타나는 강력한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가 다름아닌 임종자가 평생동안 한 행위들에 의해 조건지워진다는 점이다. 생각-대상들이란 곧 그 자신이 지금까지 행했던 행위들의 반사 영상이고 재생을 뒷받침해주는 것도 죽어가는 사람의 과거 행위들이기 때문에, 이 중요한 시점에 작용하는 특정 형태의 업은 말 그대로 재생산적인 업이다.

이제 임종자의 이 마지막 생각-과정의 추이를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때의 생각-과정에는 앞장에서 검토해본 정상시 생각-과정에서의 여러 단계가 다 포함되지는 않는다.


임종시 생각-과정의 순서


1. 과거의 무의식

2. 무의식의 동요

3. 무의식의 정지

4. 뜻[意]의 문을 향함

5. 죽음직전의 생각-촉진 혹은 마지막 생각-촉진의 마음

6. 경험의 등록

7. 임종의식

8. 다음 생에서 일어나는 재연결의식 혹은 재생의식



1. 과거의 무의식단계

평상시의 생각-과정을 추적했을 때 했던 것과 동일한 설명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죽음의 과정이 의식단계의 마음에서 가동하기 바로 직전 단계부터 추적을 시작하자. 그것은 무의식상태의 마음으로, 수면 혹은 의식단계 마음에서 하나의 의식적 생각-과정이 멈춘 뒤 다음 것이 시작되기 직전의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생각-과정이 실제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추적을 시작하는 기점으로 삼기 위해 첫째 단계로 간주하는 것이다.


2. 무의식단계의 동요


3. 무의식단계의 정지

정상적인 생각-과정에서 이 두 단계에 대해 했던 설명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여기서도 역시 앞의 단계 즉 무의식의 동요단계는 어떤 자극이 임종자의 마음속에서 흐르는 무의식적의 흐름을 교란시키거나 동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는데 그친다. 그 다음 단계 즉 무의식의 정지단계에선 자극이 지속됨에 따라 무의식의 흐름이 완전히 저지당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아직 작용하고 있는 자극을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이 자극은 다름아닌 바로 세 가지 강력한 생각-대상들, 혹은 죽음의 표시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4. 뜻[意]의 문을 향함

정상적인 생각-과정을 살필 때에 `다섯 감각의 문을 향함'이라는 단계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이 단계는 듣고,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다섯 감각 통로 중의 어느 하나를 통하여 자극이 인식될 수 있을 때 일어난다. 반면 임종시 생각-과정의 경우, 다섯 감각의 문을 향하는 단계는 대개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임종자의 무의식을 교란시키는 자극은 외적인 것이 아니고 생각이나 기억 등, 본성적으로 내적인 것이며 뜻[意]이라는 통로를 통하여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를 여기서는 `뜻의 문을 향함'이라 부른다.


5. 죽음직전의 생각-촉진 혹은 마지막 생각-촉진의 마음

이제 생각-촉진이라고 하는 심리적으로 중요한 단계가 온다. 정상적 생각-과정을 살피면서 이 단계에 대해 언급한 모든 것이 여기에도 적용되지만, 임종이 박두했기 때문에 이 단계가 일곱 심찰나를 다 채우지 않고 다섯 찰나만 지속한다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잊지말아야 할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임종을 맞은 사람은 무력하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생각을 추스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강력한 심찰나 혹은 죽음의 표시 중 하나가 나타나 무의식의 조용한 흐름을 방해하고 이를 가라앉게 하여 의식단계의 마음이 일어나게끔 유도한다. 이렇게 일어난 의식과정이 방금 기술한 무의식의 동요, 무의식의 정지, 그리고 뜻[意]의 문을 향하는 단계를 거친 다음, 생각-촉진이라는 중요한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무능력했던 의식단계의 마음이 자신을 일깨운 자극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게 되었다.


강력한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에 대한 설명


지금까지 임종자의 마음 문턱에 나타난다고 설명해온 세 가지 자극은 하나같이 강력한 것이다. 이때의 생각-대상은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의 생각-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다음 생의 재연결의식의 생각-대상이 되며, 또한 다음 생의 무의식단계 마음의 생각-대상이 된다. 이 가운데 나중 두 가지의 식의 상태는 의식단계의 것이 아니고 무의식단계의 것이지만 역시 존재하기 위해선 생각-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앞 생의 최종 생각-촉진 때에 품었던 특정의 생각-대상, 즉 세 가지 죽음의 표시 중 하나를 그들의 생각-대상으로 취한다. 그러므로 죽기 전 마지막 의식단계의 생각이 취했던 생각-대상이 새로운 생에서의 첫 생각의 생각-대상이 된다. 그렇게 하여 삶의 과정은 계속 이어지게 되니… 한 생각은 다음 생각을 낳고, 하나의 삶이 다른 생을 낳으며 계속된다. 여기서 잊지 말 것은 생각이 에너지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없어지거나 파괴될 수 없다. 생각은 계속 결과를 낳으며, 그 결과들은 다시 그 자신의 결과들을 낳게 된다. 그것이 반드시 지구상이거나 동일한 차원의 계(界)에 국한되어야 할 까닭은 물론 없다. 이리하여 존재의 연속성은 유지된다.


임종자의 무의식단계를 교란시키며 최종 단계에 나타나는 생각-대상은 우연히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도, 임종자가 선택한 것도 아니다. 이 최종 단계에서는 자기 스스로 생각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다름아닌 오직 죽어가는 사람 자신이 평생 지은 행위에 의해서 조건지워질 뿐이다. 재생산 업의 작용에 의해, 임종자가 과거에 행한 어떤 강력한 행위의 기억이 마음에 솟구쳐올라 마지막 생각 즉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의 생각-대상을 구성한다. 그 뒤에 이어 일어나는 생각은 이 마지막 생각의 성질에 따라서 결정된다. 의식상태에서건 무의식상태에서건 어떤 생각도 생각-대상 없이는 기능할 수 없다. 죽음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는 다음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이다.


(1) 업(kamma)

아무리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고, 또 죽는 찰나 아무리 주변환경을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죽음직전에 행한 중요하고 비중있는 행위에 대한 기억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에게 다가온다. 그런 행위, 즉 죽음이 다가왔을 때 행하게 된 행위는 아싼나 깜마(aasanna-kamma)라고 한다. 죽음의 시간은 미리 알 수 없으므로, 대부분의 경우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아주 선한 행위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죽음직전의 두드러진 선행이나 악행이 없을 경우엔 과거에 습관적으로 해온 행위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 행위가 아찐나 깜마(aacinna-kamma), 즉 몸에 밴 행위 혹은 습관적 행위라는 것이다. 죽음직전의 행위 혹은 습관적 행위를 이행할 때 경험했던 도덕적 혹은 비도덕적 의식이 바야흐로 죽음의 찰나에 새삼스런 의식으로 떠오른다.


(2) 업의 상징(kamma-nimitta)

때로는 임종자에게 나타나는 기억이, 앞서와 같이 자신이 지은 행위를 기억하는 형태로서가 아니라 그가 행한 행위를 상징하는 어떤 형상을 기억하는 형태로 떠오를 수도 있다(`깜마'는 행위를 의미하며, `니밋따'는 상징이나 표시를 뜻한다). 그래서 백정의 눈앞에는 칼이, 술고래의 눈에는 술병이, 순례자에게는 사원이 보이는 수가 있다. 이것들은 마음의 눈을 통하여 보여진다. 즉 육체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통로를 통하여 보여진다.


(3) 재생의 상징(gati-nimitta)

임종자의 마지막 생각-대상은 그가 다시 태어나게 될 곳에 대한 어떤 징후나 예측일 수 있다. 그러므로 지옥에 태어나게 되어있는 사람의 마음의 눈에는 불이 나타날 수 있으며, 천신의 세계로 갈 사람은 아름다운 꽃이나 아름다운 궁전을 볼 수 있다. W. T. 에반스-웬츠 박사는 「티베트 사자의 서(The Tibetan Book of the Dead)」 주26) 에서 임종시 자신의 장래 운명을 예고하는 환상을 본 사람들의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스리랑카나 그 밖의 지역에서 임종자가 자신이 경험한 그런 환상에 관해 간혹 언급했다는 사실들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칼루따라(스리랑카)에서 죽어가는 열두 살짜리 소녀가 슬픔에 잠겨 침대맡에 서 있는 부모를 향해 화려하게 장식한 꽃마차가 자기를 데리러 와 있다고 즐거운 듯이 말한 일이 있었다.


6. 경험의 등록

`죽음직전의 생각-촉진 마음' 단계 다음에 죽음과정 상의 또 한 단계 즉 `경험등록' 단계가 일어나는데 이 단계 역시 앞서 설명한 그대로이다. 받아들인 인상의 경험을 등록하는데 그칠 뿐이며 심리적으로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경험의 등록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초래될 일은 없다.



7. 임종의식(cuti-citta)

이것은 현생에서 경험되는 마지막 생각이다(`쭈띠'는 사라짐 혹은 죽음을 의미한다). 임종자는 이제 마음속으로 죽음을 알고 있다. 이때 죽음을 알아차리는 경험의 주체는 의식단계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단계의 마음이다. 이는 금생에서의 마지막 무의식단계 생각으로서, 그 생각-대상은 곧 다음 생에서 첫번째 무의식단계 생각의 생각-대상, 즉 금생과 연결시키는 재연결의식의 생각-대상이 된다. 임종의식 역시 심리적으로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것은 아무런 업과도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의식할 뿐이다. 따라서 마지막 생각으로 간주되는 것은 임종의식이 아니라 5항에서 설명한 `죽음직전의 생각-촉진 마음'이다.


8. 재연결의식(pa.tisandhi-vi~n~naa.na)

생각-과정의 다음 단계는 (이제는 임종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단계인 재연결의식(relinking consciousness) 혹은 재생의식의 단계다. 우리가 더이상 마음을 영원불변한 것으로 보지 않게 되면, 하나의 생각-과정이 설혹 같은 인격체 내에서가 아니라 해도 다른 생각-과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마음을 (실상 그대로) 식의 상태의 연속 혹은 열(列)로 보게 되면, 어떻게 한 생에서의 어떤 식의 상태가 다른 생에서의 다른 식의 상태를 야기시킬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다음 생에서의 재연결의식을 일으키는 것은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이라 알려진 임종자의 최종 식의 상태이다.

빠띠산디 윈냐나는 항용 재연결의식으로 번역되는데(`빠띠산디'는 글자 그대로 `재접합'을 의미한다), 현생을 내생과 연결시켜주므로 적절한 역어일 듯 싶다. 실제로 양쪽 식의 상태의 생각-대상이 동일한 것은 이 재연결의식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마지막 죽어가는 생각의 생각-대상이, 그 생각-대상의 결과로 초래될 재연결의식의 생각-대상이 되는 것이다. 재생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연결의식을 철저히 이해해야만 한다. 첫째, 재연결의식을 일으키는 것은 임종의식이 아니고 그에 선행하는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임종의식은 무의식단계의 마음인데 반해 마지막의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은 의식단계의 마음이다. 임종의식이 재연결의식을 일으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옳지 않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임종의식은 단지 등록하는 역할만을 하고 결과를 가져올 어떤 활동적 기능도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종과정에서 그것은 마지막 생각이긴 하지만 무의식단계의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등록하기만 한다. 변화의 법칙, 생성의 법칙, 연속의 법칙, 작용과 반작


용의 법칙 그리고 인력의 법칙에 따라, 마지막의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은 강력한 마지막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 중의 하나를 그 생각-대상으로 받아들이며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은 법칙들의 작용에 의해 재연결의식 즉 다음 생의 핵을 구성하는 무의식 형태의 한 생각을 일으킨다.


임종자의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이 재연결의식을 일으킨다고 할 때, 우리는 앞의 식의 상태가 원인적 요소가 되어 뒤의 식의 상태를 일어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그처럼 중요한 결과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원인적 요소도 그만큼 강력해야 한다. 그 잠재력의 근원을 조사해보자.



마지막 죽음직전 생각의 잠재력


우리는 강렬한 생각은 창조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앞부분에서 인용했던 『법구경』의 첫구절은 마음의 우월성(manose.t.thaa)과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왔다는 사실(manomayaa)을 말하고 있다. 「생각은 물체이다(Thoughts are things)」라는 책에서 W. W. 애트킨슨은 `창조적 사고'라는 제목에 한 장을 할애하면서 "과학은, 안에 것이 밖으로 드러나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되려는, 표출되지 않은 것이 표출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생각은 행위로 형상화되려 애쓴다. 생각은 자신을 물체화시키려 끊임없이 애쓰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생각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고유의 창조 능력은 별문제로 하더라도, 죽음직전의 생각은 임종자로서의 마지막 능동적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마지막 생각이 가장 강렬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경주에서, 달리기 선수의 마지막 역주(力走)는 그가 지닌 최대의 힘을 보여준다. 과일 나무가 죽게 되면 그 마지막 결실기에 가장 많은 소출을 낸다고 한다. 어떤 힘이나 능력이 최고, 최대로 발휘되는 것은 마치 죽음을 앞두고 들려오는 백조의 노래처럼 그 자체의 붕괴 소멸이 다가왔을 때이다. 존재에 대한 욕구(ta.nhaa)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받쳐주는 가장 지배적인 동기이므로, 죽음의 찰나에 무섭게 강해져 움켜쥐려는 자세(정신적으로)를 취한다. 부처님의 말씀처럼(이것도 이미 앞에서 인용되었다), 죽음의 찰나 이 지배적인 딴하는 움켜쥐는 힘(upaadaana)이 되어 자신 쪽으로 다른 존재를 끌어당기게 된다. 이 움켜쥐는 힘을 싣고 있는 것이 바로 마지막 생각-과정인 것이다.


심리학에 의하면 잠들기 전 마지막 생각은 매우 강력하여 다음날 아침 깨어날 때의 첫번째 생각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새벽 기차를 타고 싶을 때, 시간에 맞춰 일어날 것을 잠들기 직전에 암시해두면, 아무리 늦잠 버릇이 몸에 밴 사람도 틀림없이 그 시간에 일어나게 된다. 낭시의 유명한 치료자 에밀 꾸에(Emile Coue)가 환자 치료과정에서 자기암시를 통해 긍정적 자세를 가지게 하는데 성공을 거둔 것은 암시요법이 환자들의 취침 바로 전에 시술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이 시간에 암시되는 것은 강력한 효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마음은 이 시간이 되면 암시를 아주 잘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콜린스와 드레버(전자는 에딘버러 대학의 강사이고 후자는 동 대학의 교수이다)는 공저 「심리학과 실제 생활(Psychology and Practical Life)」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자연적 피암시성은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증진된다. 넓은 의미의 최면상태(hypnoidal) ― 수면과 각성의 중간상태, 수면상태, 최면상태로 분류되는 모든 상태에서는 피암시성이 매우 높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외과 수술 목적으로 환자 마취에 최면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잠들기 직전은 강력한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활동할 시간과 아주 가깝고 뿐만 아니라 마지막 의식적 생각과 잠이 유도하는 무의식단계의 마음 사이에 끼여들 수 있는 것도 거의 없기 때문에, 잠들기 전 마지막 생각에는 거대한 창조적 가치와 창조적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잠들기 전의 마지막 의식적 생각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첫번째 생각이 되므로, 같은 논리에 따라 죽음의 잠 직전의 마지막 의식적 생각이 ― 최종의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 ― 그가 깨어나게 되는 다음 생의 첫번째 생각, 재연결의식이 된다고 하면 너무 지나칠까?


임종자의 마지막 생각은 순전히 집중된 에너지 덩이인데 그런 에너지가 사람이 죽는다고 사라질 리 없다. 그것은 창조적 에너지로서 어딘가에 그 자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E. R. 로스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존재가 죽었을 때, 뇌 속에 갇혀있던, 의식으로 대표되는 모든 힘들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도, 흩어져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 생에서 생명의 개울 속을 의식의 연속이 끊이지 않고 흐르고 있듯, 죽음에도 내내 그 생명의 개울의 흐름이 있다. 또 이 생명의 개울이 기능면에서 직분을 다하자면 존재의 진화선상에 알을 깔 자리를 찾아야 하듯이 주관면에서는 객관적 기반의 형성을 필요로 한다."

―「의식의 성질(Nature of Consciousness)」중에서


이러한 논거를 불교에 적용시켜보면, 앞서 언급한 세 가지의 강력한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 중 하나를 객관적 기반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 유력한 마지막 생각은 이제 엄청난 창조력을 지니게 된 것으로 간주하여 마땅하다. 또 마지막 생각의 기능은 새로운 존재의 준비란 뜻으로 `아비나와 까라나'라고 부른다. 강력한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 중 하나가 임종자의 마음 앞에 나타나는 것은 이 준비를 이행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마지막 생각이 이 특별한 생각-대상을 동반으로 삼는 재연결의식이 일어나게 된다. 이 재연결의식은 일종의 정신적인 것이므로, 육체라는 짝과 결합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재연결의식은 모태 내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 아무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가서가 아니라 ― 반드시 알맞은 환경의 알맞은 어머니의 자궁에, 특히 금생에 영위했던 삶의 형태에 어울리는 모태 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사람은 하나의 명색 즉 몸과 마음의 결합체이므로, 다시 태어난 사람 역시 몸과 마음의 결합체이다. 그렇기는 하나 사람이 정신만 있고 몸이 없는 영의 세계에 태어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 경우에도 재연결의식은 일어난다.


이상으로 재생현상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앞의 각 장에서 다룬 기본법칙 혹은 원리들, 즉 변화, 생성, 연속, 인과(因果) 그리고 인력의 법칙들의 복합적 작용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냐나지와꼬 스님이 「쇼펜하우어와 불교」(The Wheel, No. 144∼146, B. P. S.)에서 그 대부분의 견해가 매우 불교적이라고 지적한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들 신비한 힘들은(실제로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지만) 죽음의 찰나 모두 함께 나와 활동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들 신비한 힘들이란 다름아닌 앞서 언급한 기본 법칙들이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으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에만 신비한 채로 있다. 재생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의 종합적 작용이다. 그러므로 재생은 이들 자연법칙의 작용으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10장  태어날 때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불교 심리학에 따라 임종시의 생각-과정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태어날 때의 생각-과정에 주의를 돌려보자. 이미 앞의 8장과 9장, `정상적인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와 `임종시의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에서 기술한 여러 정신상태에 비추어 보면, 태어날 때의 생각-과정은 많은 설명없이도 쉽사리 추적될 수 있다. 즉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신상태는 이미 다 검토를 마친 셈이다. 태어날 때 밟게 되는 생각-과정은 다음과 같이 다섯 단계로 되어 있다.


 1 재연결의식

 2. 무의식단계의 마음

 3. 뜻(意)의 문을 향함

 4. 생각-촉진

 5. 무의식단계의 마음


1. 재연결의식

앞장에서 임종시 생각-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열거된 정신상태 중 마지막 상태 즉 재연결의식이 임종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상태가 아닌데도 거기서 언급된 이유는 다른 정신상태들이 이 재연결의식과 함께 하나의 연속과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재연결의식은 다시 태어난 자의 마음,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세상 밖에 나오지 않은 태아의 마음에 일어난다. 사실상 부모의 정자세포 및 난자세포와 결합하여, 적당한 모체의 자궁에 태아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이 재연결의식 형(型)의 정신적 에너지이다. 다시 말해 적당한 모체의 자궁에서 새로운 몸과 마음의 결합, 즉 새로운 명색의 세포핵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재연결의식(혹은 재생의식)이다. 따라서 태아는 곧 마음과 몸의 혼합체다. 부모의 정·난자세포는 태아의 육체 부분을 만들어내지만 재연결의식은 정신 부분을 제공한다. 죽는 생명을 새 생명과 연결시키는 것은 이 재연결의식인 것이다. 그것이 연결고리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임종자의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의 결과이고 또 동일한 생각-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각이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 과정은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죽는 찰나의 마지막 의식도 이 과정에 예외가 되지 않는다. 같은 몸에서는 아닐지라도 역시 다음 생각을 일으킨다. 새로 생긴 생각이 재연결의식이다. 이는 단지 한 찰나만 지속되고,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그 뒤를 잇는다.


2. 무의식단계의 마음

최초의 재연결의식 뒤에는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이어지는데 16심찰나 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아직 세상 밖에 나오지 않은 이 존재는 태아기 동안 모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보통은 외부세계와는 접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태아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잔잔히 흐르는 것은 무의식의 흐름이다. 이제 막 생명이 시작된만큼 식의 상태가 충분히 성숙되지는 못했다. 이 부분에 관하여 셰 잔 아웅은 「철학개요」의 부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불교에 의하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 과거 생의 `재생산 업'의 결과에 따라 육체적 성장이 시작됨과 동시에 선천적인 마음이 주어진다. 잉태 순간 태아의 마음은 순수상태의 잠재의식일 뿐이며 그것은 보다 성숙된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꿈없는 숙면에 들어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3. 뜻(意)의 문을 향함

앞에 기술한 대로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16심찰나 동안 지속하고는 가라앉는다. 이어 `뜻의 문을 향함'이라는 식의 상태가 뒤따른다. 무의식의 성격을 띤 태아의 식의 상태는 태아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삶을 향해 일어나는 욕망 탓으로 의식단계의 마음으로 대체된다.


4. 생각-촉진

`뜻의 문을 향함'이라는 식의 상태가 가라앉은 다음엔 생각-촉진의 상태가 일어난다. 그것은 뜻의 문을 통로로 하여 일어난 생각 즉 새로운 존재에 대한 욕망을 더욱 더 진행시킨다. 이들 `생각-촉진'은 새 생명의 마음속에 새로이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발전시킨다(bhava-nikanti javana, 존재욕망 생각-촉진). 이것은 일곱 심찰나 동안 지속된다.


5. 무의식단계의 마음

일곱 생각-촉진 심찰나들이 일어났다가 가라앉고나면,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잔잔한 흐름이 다시 일어난다. 이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 방해하지 않는 한 계속 조용히 흘러가며 방해가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태아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와 독립적인 존재가 되면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시작된다. 그 다음엔 정상적 생각-과정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