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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여나는가

열 셋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

― 재생에 대한 아비담마적 해석 -

                      출처: 고요한 소리 http://www.calmvoice.org

구나라뜨나  지음

  유 창 모  옮김

Rebirth Explained

By V. F. GUNARATNA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1980     Sri Lanka

First Edition         1971

Second Impression    1980

THE WHEEL PUBLICATION NO. 167/168/169


차 례

머리말  5

1장 변화의 법칙  9

    들어가는 말  9

    변화의 법칙  10

2장 생성과 연속성의 법칙  15

    연속성의 법칙  17

3장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19

4장 인력의 법칙  23

5장 마음과 변화의 법칙  33

6장 의식단계의 마음과 무의식단계의 마음  41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중요성 - 그 기본적 위치  45

7장 생각, 생각-과정 및 심찰나  49

    생각이란 무엇인가  50

    생각-과정이란 무엇인가  51

    심찰나란 무엇인가  52

    심찰나와 생각-과정  53

8장 정상적인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55

    정상적 생각-과정의 순서  56


9장 임종시 생각-과정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65

    죽음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  65

    마음에 대한 죽음의 영향  67

    세 가지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가 나타남  68

    임종시의 생각-과정은 반드시 일어난다  69

    재생산하는 업  70

    임종시 생각-과정의 순서  70

    강력한 생각-대상 혹은 죽음의 표시에 대한 설명  73

    마지막 죽음직전 생각의 잠재력  80


10장 태어날 때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85

11장 태어남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과 불교적 설명  88

12장 최면을 통한 전생기억  99

13장 저절로 이루어지는 전생기억  104

14장 조사연구를 거친 몇 가지 재생사례  106

15장 질문과 대답  116


옮긴이의 말  148


머 리 말


불교의 재생 주1) 이론은 힌두교의 재육화(再肉化) 주2) 전생관과 구별되어야 한다. 짧지만 심오한 이 논문을 쓴 V. F. 구나라뜨나 씨는 평소 이 주제를 즐겨 다루어 온 분으로 학식 풍부한 저술가이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불자인 저자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해왔다.


그는 이 짧은 글에서 재생에 관한 모든 복잡 미묘한 문제점들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불교의 관점에서 풀고 있으며, 그 밖의 많은 관련된 질문들에 대해서도 만족스런 해답을 주고 있다.


1970년 4월 29일

콜롬보의 와지라라마에서

나라다(Naarada) 합장


1장  변화의 법칙


들어가는 말


이 책의 목적은 윤회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윤회론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이해하고 다시 태어나는 현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아는 데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사실과 불교적 논리 체계를 소개하려는 데 있다. 라다크리슈난은 "생명과 운동으로 가득 찬 이 거대한 세계는 항상 생성, 변화하지만 그 중심에는 한 법칙이 있다"고 말했다. 이 중심 법칙이 바로 법(Dhamma)이다. 불교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법은 근본 우주 법칙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 드러나는데, 이 법의 작용에 의해 재생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들 몇몇 법칙에 대한 검토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들을 법칙이라 부른다 해서 어떤 통치기구가 반포했거나 사람이 제정한 규칙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선 안될 것이다. 이들은 사람이나 물질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사물에도 똑같이 작용하는 일정한 작용방식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자연법칙 혹은 원칙이다. 부처님은 이들 법칙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다만 찾아내어 세상에 선포하셨을 뿐이다.


변화의 법칙


윤회생사를 이해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첫번째 근본 법칙 혹은 원칙은 변화의 법칙(Law of Change, anicca)이다. 그것은 이 세상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정태적(靜態的)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은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무와 곤충, 꽃과 열매, 상품이나 기타 소유물, 건물과 땅, 사람과 동물 ― 간단히 말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예외없이 이 보편적인 변화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어떤 경우는 이 변화가 눈에 보이게, 그리고 단기간 내에 일어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엔 아주 느리게 서서히 일어나 변화의 과정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강과 산들 뿐 아니라, 과학의 주장대로 그 변화 과정이 수백 수천만 년도 걸린다는 해와 달 그리고 별들까지 포함된다. 참으로 우주의 다양한 운행은 그 전체가 하나의 끊이지 않는 변화다.


그러면 이 변화란 무엇인가? 변화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고 드러나는 방식도 다양하기 그지없다. 성장과 쇠퇴, 상승과 몰락, 증가와 감소, 얽혀듬과 흩어짐, 확장과 수축, 통일과 다변화, 제한과 확대, 진보와 퇴보 등은 변화의 일반적 양상들이다. 변화의 모습이 어떤 갈래로 오든 간에, 하나의 조건이나 상태에서 다른 조건이나 상태로 바뀌는 것이 모든 변화의 본질이다. 이 변화는 모든 사물의 어김없는 특성이다. 변화는 세상을 지배한다. 그 어디에도 영속성과 영구불변은 없다. 시간이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 살면서 그 변화의 와중에 우리 자신도 내내 변화한다. 이것이 바로 저 엄정한 법칙, "삽베 상카라 아닛짜(Sabbe sa^nkhaaraa aniccaa)" ―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는 법칙이다. 


이 변화 법칙의 중요한 특징은 모든 것이 변하게 마련이면서도, 그 무엇도 결코 없어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그 형태만이 달라질 뿐이다. 그래서 고체는 액체가 될 수 있고 액체는 기체로 변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완전히 없어지는 법은 없다. 물질은 에너지의 한 표현이며, 따라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과학윤리에 의하면 그것은 없어지거나 소멸될 수 없다. 주3) 주4) 생리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인간의 몸이 잠시도 쉴새없이 변화를 겪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하여 인체의 모든 부분 ― 피부, 뼈, 머리, 손톱은 7년마다 한 번씩 완전히 새로 바뀌게 된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러서도 신체는 어느 한 군데도 소멸되지 않는다. 역시 그 모습만이 바뀔 뿐이다. 생명이 없어진 신체의 각 부분들은 해당 부위의 성질에 따라 액체나 기체, 광물이나 염분 등으로 변화된다. 생리학은 인간의 육체가 7년마다 한 번씩 바뀐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몸은 살아있는 동안 보이지 않는 변화를 끊임없이 겪는다고 가르치셨다. 이 같은 미묘한 변화과정을 불교심리학(아비담마)에서는 찰나적인 죽음[刹那死]이라 부른다. 여기서 우리 한번 생각을 가다듬어보자. 어린애가 젊은이로 변하고, 또 젊은이가 노인으로 변한다는 것은 미상불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젊은이는 어릴 적 그와는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도 젊은이가 어린 시절을 기억해낼 수 있다니. 마찬가지로 노인은 젊은 시절을 기억해낸다. 따라서 우리가 한 개인의 동일성 운운하는 얘기는 결국 끊임없는 변화과정의 연속성을 두고 하는 말이 될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그 어린이와 청년과 노인을 동일인으로 간주하게 되는데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한 생은 끊임없는 변화과정이면서도 그 가운데 어떤 지속적 연속성이 견지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변화의 법칙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을 생각하게 된다. 즉 한 조건이나 상태와 그 다음 나타난 조건/상태 사이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 조건이나 상태는 각각 물샐틈없이 밀폐된 칸막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조건 혹은 상태는 다음 조건/상태로 융화(融化)되어 들어간다. 넘실대며 출렁이는 대양의 파도를 생각해보자. 솟아오른 파도는 저마다 다른 파도를 이루며 가라앉고, 그 다른 파도는 또 다른 파도를 일으키며 솟구쳤다 가라앉곤 한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파도의 어느 한 점, 어느 위치를 가리키며 하나의 파도가 끝나고 다른 파도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파도는 번번이 다음 파도 속으로 합쳐 들어간다. 하나의 파도와 다음 파도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이 세상에 변화하는 모든 조건들도 그와 같다. 리스 데이비스(Rhys Davis) 주5) 교수가 미국의 어느 강연에서 말했듯이, 어떤 경우에나 시작이 있자마자 바로 그 순간 끝남도 시작된다. 따라서 이 변화는 하나의 지속적인 과정이고, 하나의 변천이며 흐름이니 ―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이다. 주6) 그와 같은 개념은 다시 다음 장에서 검토할 다른 두 가지 근본 법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TOP ∥◀이전화면 ∥



2장  생성과 연속성의 법칙



윤회생사를 이해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또 다른 기본 법칙 혹은 원칙은 생성과 연속성의 법칙이다. 우리는 방금 변화의 법칙이 모든 사물 속에서 전개되는 변화의 과정을 가리킨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변화의 과정이란 모든 것이 자신과는 다른 어떤 무엇으로 (생성)되고 있는 과정을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생성[有, bhava]의 법칙이다. 변화의 법칙은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항상 바뀌고 있다는 것이지만, 생성의 법칙은 모든 것이 매순간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변화의 법칙에는 결과적으로 생성의 법칙이 따른다.


식물의 씨앗은 순간순간 묘목이 되는 과정에 있으며, 묘목은 매순간 나무로 커 가는 과정에 있다. 꽃봉오리는 내내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 중에 있으며, 아기는 쉬지 않고 젊은이로 자라는 과정에, 젊은이는 또 노인이 되는 과정 중에 있다. 어떤 시점에서 끊어보더라도 그 자신 외의 다른 것으로 되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지 않은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끊임없는 생성은 모든 사물의 특징이다. 그것은 항상 모든 변화의 기초가 되는 특성이다. 모든 것은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에 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생성만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일한 진행과정이라 한다.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역동적이다. 따라서 생성의 법칙은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없고, 되어가고 있을[有] 뿐이다'라고.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씨앗이 땅에 심어지지 않았거나 묘목이 뿌리째 뽑혔다고 가정합시다. 그래도 당신은 씨앗이 묘목이 되고 묘목이 나무가 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변화의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계속 중이다. 방향을 달리하여 ― 부패와 분해 쪽으로 말이다. 씨앗이나 묘목은 서서히 변질되고 썩어 구성요소로 와해되고 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그들 또한 소멸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또 다른 법칙인 연속성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연속성의 법칙


생성의 법칙에 의존하여 연속성의 법칙이 있다. 생성은 연속성으로 통하고 따라서 생성의 법칙에는 결과적으로 연속성의 법칙이 따른다. 앞에서 변화의 법칙은 사물을 바꾸어놓을 뿐 소멸시키지는 않으며, 고체는 액체로, 액체는 기체로 바뀔 수 있어도 그 무엇도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형태는 바뀔지라도 특정 에너지들(사물은 그 에너지들의 표현이다)은 존속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연속성 또한 모든 사물의 어김없는 특성이다. 하나의 조건이나 상태와 그 다음 조건/상태를 구별짓는 뚜렷한 선이 없는 것도 바로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도 없다.


시간도 연속적이다. 문법학자는 과거시제, 현재시제, 미래시제가 마치 물샐틈없는 칸막이들 안에 똑똑 나누어 떨어져 있는 듯이 말하지만, 실제로 현재, 과거, 미래를 똑떨어지게 나누는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를 생각하는 순간 현재는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가 버린다. 당신 친구가 지금 몇 시인지 묻는다. 당신은 손목 시계를 본다. 그것은 오전 9시를 가리키고 당신은 친구에게 `지금은 오전 아홉 시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고 정확히 말해서 정말 그러한가? 당신이 친구에게 대답하는 순간 이미 오전 9시는 아니다. 오전 9시에서 최소한 몇 분의 일초라도 지난 후일 것이다. 시간은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보다 앞서 있다. 시간도 역시 연속성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모든 사물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연속적 진행과정을 보이고 있다면 인간만이 이들 움직이는 과정 한가운데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홀로 서 있을 수 있을까? 변화, 생성, 연속성의 법칙 같은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강력한 법칙이 죽는 순간이라 하여 사람에 대해서만 작용하기를 멈추고 완전 정지되는 법이 있는가? 인간도 연속적인 진행과정의 한 부분이 아닐까? 그렇다면, 죽음은 일시적 현상의 일시적 끝일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이란 변화의 또 다른 경우가 아닐까? 그리고 죽음은 죽는 자에게 다른 조건이나 상태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닐까? 이것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재생의 원리를 거부하기 전에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


3장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윤회생사를 잘 이해하기 위해 검토되어야 할 또 하나의 기본 법칙 혹은 원칙은 작용과 반작용, 혹은 행위와 반응의 법칙(Law of Action & Reaction)이다. 이 법칙의 기본 가설은 모든 작용에는 어떤 결과나 반작용이 따라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행위로부터 결과가 나온다는 이 원칙은, 그것이 자연에 의한 작용이든 사람이 행한 행위든 모든 영역에 다 적용된다. 이는 보편 법칙이므로 물리 세계와 정신 세계에 똑같이 적용된다. 이 법칙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Law of Cause & Effect), 즉 인과의 법칙으로 불린다. 이 법칙이 인간의 행위와 관련될 때는 업의 법칙(Law of Kamma)으로 불리며 여기에서 우리가 고찰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업(kamma)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행위의 결과를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하는데, 행위의 결과를 가리키는 경우 좀더 정확한 표현은 업이숙(業異熟, kamma-vipaaka), 업의 과(業果) 혹은 업보이다.


사람이 행한 행위의 결과를 지배하는 것이 업의 법칙이다. 즉 어떤 행위와 그 결과간에 작용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된다. "씨 뿌린 대로 열매를 거둔다." 업의 법칙에 따라 좋은 행위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행위는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게 되어 있다. 그 작용 원리는 완벽한 정의(正義)라 하겠으니, 업이란 그야말로 엄격한 회계사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 


만약 업이 그렇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작용한다면, 왜 착한 행위를 한 어떤 사람은 마땅히 거둬야할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고 죽고, 나쁜 행위를 한 어떤 사람은 그 악행에 대한 응분의 고통을 받지 않고 잘 살다 가는가, 하는 질문이 당연히 나옴직하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업의 법칙의 타당성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인생살이 속에는 이와 유사한, 설명을 필요로하는 변칙 상황들이 많다.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기쁨이나 슬픔, 부(富)나 가난, 건강이나 질병 따위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도 그 일부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변칙으로 보이는 것은 그 법칙적용의 시간대가 이번 한 생(生)이라는 좁은 범위에 제한돼 있다고 생각했을 때뿐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전생과 내생을 가정한다면, 이런 모든 상황은 완벽하게 설명이 된다. 전생의 행위는 금생에 결과를 낳고, 마찬가지로 금생의 행위는 내생에서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까. 이로써 금생에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평등이 설명된다. 『중부』, Ⅲ,  제135경(203쪽)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행위(업)는 바로 그 자신의 것이다. 행위는 자신의 상속물이다. 행위는 자신의 근원이다. 행위는 자신의 일가요 친척이다. 행위는 자신의 버팀목이다. 행위는 존재를 나눈다. 비천한 존재와 우월한 존재로." 주7)


행위의 결과가 현실화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모든 영역의 행위전반에 걸쳐, 어떤 결과는 즉각적으로, 어떤 결과는 지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결과가 항상 그 원인 작용이 일어났던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외적 요인들이 생겨나 그 순서를 교란시킨다. 인간 행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업의 과가 현실화함에 있어 "먼저 온 손님부터 먼저 대접한다"는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지 않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업의 법칙은 참으로 여러 방면으로 작용하고 또 업의 다양성도 너무나 큰 만큼 업의 전개과정 역시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다 설명할 길은 없으므로 여기서는 요점만 간추려보기로 한다.


업의 법칙에 의해 하나의 행위 뒤에는 그 과보가 따라온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원인적 요소들도 끼여들 수 있으므로 이들이 뒤섞여 결과를 빚어내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업인이 오로지 하나의 업과를 낳을 수는 없고, 더욱이 하나의 업인이 다수의 업과를 낳을 수도 없으며, 다수의 업인이 단지 하나의 업과만을 산출할 수도 없다. 이 다수 업인, 다수 업과 이론에 대해서는 『청정도론』17장에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하나의 업과든 혹은 여러 업과든 오직 하나의 업인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고, 여러 업인에서 오직 하나의 업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냐나몰리 스님의 영역에 따름). 그러므로 하나의 업과를 낳기까지는 여러 업인이 결합해야 한다. 이렇게 결합된 업인들의 일부는 그 업과를 강화 촉진시킬 수도 있고[支持業], 일부는 그 업과를 방해하고 늦출 수도 있으며[妨害業], 다른 일부는 업과를 완전히 무효로 만들 수도 있다[旣有業]. 대립하는 업들이 상호작용할 때, 때로는 그에 따른 업의 균형이 업과의 성격을 결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세한 업이 전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우세한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가루까 깜마(Garuka-kamma : 무거운 업)

2. 아싼나 깜마(AAsanna-kamma : 죽음직전에 짓는 업,        마지막 업)

3. 아찐나 깜마(AAci.n.na-kamma : 습관적인 업)

4. 깟따따 깜마(Kattata-kamma : 유보된 잡다한 업)

(마지막 것은 그 앞의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업을 말한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가정이 성립할 때에만 비로소, 인생의 모든 변칙적 상황이나 불공평이 설명될 수 있다. 재생론을 믿으려들지 않는 사람들은 이들 비정상적 사태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 해왔다. 그런 시도들은 논리적으로 분석해 볼 때 말이 되지 않거나 아니면 재생 이론보다 훨씬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재생 이론은 유한한 인간의 마음이, 삶에서 겪는 갖가지 불공평과 변칙상황으로 비치는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낸, 가장 합리적이고 정당한 가정이라 할 수 있다.



4장  인력의 법칙


윤회를 이해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또 하나의 기본 원리는 인력의 법칙(Law of Attraction)이다. 이 법칙은 "같은 것들끼리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같은 종류의 힘들은 서로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법칙은 친화성의 법칙이라고도 부른다. 특정 강도와 질의 진동을 가진 원자는 진동이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다른 원자를 끌어당긴다. 무선 전신장치들은 주파수가 맞추어졌을 때에만 서로간에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 법칙은 무정물 에너지계에서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세계에서도 작용한다. "새들은 같은 깃끼리 함께 모인다."는 속담은 이러한 경향을 가리킨다. 새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같은 유형끼리 무리를 짓는다. 인간에 있어서도 관심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이끌린다는 것은 일반 상식이다. 같은 방향의 공부나 취미, 경기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이 모여 모임이나 클럽을 만드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입증해준다. 부처님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열한 의향의 중생들은 하열한 의향의 중생들과 한데 어울리고 서로 뜻이 맞는다. 착한 의향의 중생들은 착한 의향의 중생들과 한데 어울리고 서로 뜻이 맞는다. 그들은 과거에도 그렇게 해왔고 미래에도 그렇게 할 것이며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다."(『상응부』, Ⅱ, 「인연편」, 156쪽 참조). 정신적 텔레파시는 인력 법칙의 작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인력의 법칙이 인간계에 적용될 경우, 다른 계에서는 작용하지 않는 매우 특별한 면이 한 가지 더 있다. 사람은 유사한 성향과 경향을 가진 사람을 끌어당길 뿐만 아니라 종종 그가 아주 좋아하는 물건이나 몹시 갈망하는 조건, 상황 등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수도 있다. 물질이나 조건을 끌어당기는 이런 특수능력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년 전에 잃어버린 친구의 주소를 가장 급하고 아쉬울 때에 전혀 뜻밖의 곳에서 찾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미 절판되어 좀처럼 구할 수 없는 책을 꼭 필요로 할 때에 길가의 헌 책방에서 발견하게 되는 일도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이 아닌 다른 원리에 따라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연만이 유일한 설명일까? 아니 우연이란 말이 과연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일에는 다 원인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 수 없는 것일 때 이 우연이라는 편리한 말을 끌어내곤 한다.


지금 이야기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네 욕망의 진동 속에 욕망을 구현시키고 그 목적을 찾게끔 해주는 어떤 강력한 힘이나 능력이 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욕망은 그 진동을 멀리 그리고 넓게 퍼뜨려 구하여마지 않는 바로 그 사물이나 조건에까지 다다른다. 그럴 경우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므로 거리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의 엄청난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법구경』은 바로 첫구절에서 "마음은 모든 조건들 중 앞서는 것이며, 마음이 최고이며,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manopubba^ngamaa dhammaa manose.t.thaa manomayaa)."고 선언하고 있다. 더 나아가 『상응부』, Ⅰ, 「유게편(有偈篇)」, 「제천상응(諸天相應)」, 39쪽에서 부처님은, "이 세상을 이끄는 것은 마음이다. 세상은 마음에 의해 끌려간다. 바로 마음이 그 모든 것 위에 있어 무엇이든 원(願)대로 한다." 주8) 고 하셨다. 그런데 바라던 일이 흔히 실현을 못 보고 마는 것은 그 일에 필요한 고도의 집중력이나 지구력을 가지지 못하였거나, 다른 근원에서 오는 더 강력한 상쇄 진동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의 욕망을 겨냥한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집중은 압도적인 인력(引力)을 일으킨다. 그 누적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이 압도적 인력은 잠재의식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잠재의식 세계야말로 인력이 힘을 받을 수 있는 장(場)일 뿐 아니라, 의식단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장이다. 사람은 의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잠재의식적으로도 욕망을 가질 수 있다. 욕망으로부터 분출하는 잠재의식적 동기는 의식적 동기보다 더 강력하다.


영감에 충만한 작가였던 W. W. 애트킨슨은 생각이 바로 이와 같은 대단한 인력(引力)을 지녔다고 보아 생각-자석(thought-magnet)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적확한 말이라 생각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생각, 욕망, 그리고 느낌은 자체가 가진 끌어당기는 힘을 십분 발휘하여 다른 생각, 욕망, 느낌 등이 자기 쪽으로 끌려오도록 만든다. 이 모든 것은 생각-자석이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잡아당기는 능력은 처음에는 느리게, 다소 천천히 작동하나, 눈덩이처럼 혹은 자라나는 수정처럼 점점 커지면서 성장속도도 빨라진다."

―「생각은 물체이다(Thoughts are things)」중에서


독자는 이 모든 일이 재생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 관계는 이러하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정물(有情物)의 세계에서 동기를 유발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욕망 혹은 갈망이다. 그것은 딴하(ta.nhaa, 愛)라고 부른다. 수없는 가지각색 욕망들이 이 근본 딴하로부터 솟아오른다. 그런데 이 딴하 혹은 갈애(渴愛)에는 세 가지 특수한 상(相)이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존재에 대한 갈망(cravings for existence, 有愛)이다. 인간의 삶과 행위 면에서 이 형태의 갈망이 얼마나 포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가는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있지 않다. 다양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활동 밑에는 거의 언제나 이 존재에 대한 갈망이 깔려있어 사람은 살아가는 찰나를  거의 모두 의식적으로, 또 더욱 더 자주 잠재의식적으로 갈망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계속 살고 싶은 욕망은 모든 다른 욕망의 원천이 된다. 계속 살고 싶은 욕망은 행위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밑바탕 흐름이다.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옷을 입는다. 물론 우리가 죽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근본에 있어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죽기가 아니라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미워한다. 꼭 마찬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투쟁하고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 세운다. 거짓을 말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 모두가 근본적으로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자살 행위조차도 근본적으로는 살고자 하는 욕망, 곧 어려움과 고통이 없는 삶, 장애와 좌절이 없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앞의 논의에 의해 이제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이 사람 마음속에 의식적으로 뿐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도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것이다. 생각이 모두 다 그러하듯이 갈망도 에너지의 한 표현이며, 따라서 없어지거나 소멸될 수 없다. 이 강력하면서도 지속적인 갈망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에너지의 표현으로서 사람이 죽는다하여 함께 소멸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 인력의 법칙에 따라 (삶이란 존재하고자 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갈망의 연속 상태에 불과하기에) 살고 싶다는 이 강력하고 끈질긴 욕구 혹은 갈망으로부터 방출되어 축적된 에너지가 바로 그 다음 존재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죽어가는 사람에게 끌어당겨주는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망이 그를 다시 존재하게 만든다. 살겠다는 의지가 그를 다시 살게 한다. 그때 그는 정신적으로 또 다른 존재를 움켜쥐게 된다. 이 움켜쥐는 모습을 서구의 저술가 모리스 월슈 주9) 는 「오늘날을 위한 불교(Buddhism for Today)」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힘차게 표현하였다.


"죽음의 순간 높은 수준의 정신적 기능들은 멈추어 버리고, 과거 업에 말미암은 무의식 형태들 주10) 이 표면에 떠오른다. 그 가운데 으뜸은 갈망, 딴하의 힘이다 … 이 갈망의 엄청난 힘에 의지하여 육체적 새 기반을 잡으려는 본능적인 움켜쥠이 있어, 새로운 존재가 잉태되고 새 생명이 시작된다. 이러한 설명이 이치상 뭐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가? 죽어가는 사람은 으레 죽어가는 육신이 해낼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버티며 더 살고자 발버둥친다. 이 무섭도록 강한 충동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간단히 사라져버릴 수 있겠는가? 텔레파시의 기능을 보건대 우리는 마음이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어떤 의미에서는 `건너뛰듯'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현상이 가능하다고 인정한다면, 인정하지 않을 도리도 없지만, 우리는 머리 속에서 죽음의 순간 `정신적 도약'이 어떻게 일어날까에 대해서도 그려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왓차(Vaccha)라는 떠돌이 수행자가, 임종의 순간 한 삶을 다음 삶으로 연결시키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움켜쥠을 의미하는 우빠다나(upaadaana, 取)라는 강력한 힘에 대해 말씀하시고 죽음의 순간에 딴하 즉 갈망이 바로 이 움켜쥐는 힘이 된다고 설명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에 관해 간결하게 그러나 힘주어 말씀하셨다.


"왓차여, 하나의 존재가 그 몸을 내버리고 다른 몸에서 다시 일어날 때, 갈망이 새로운 몸을 움켜쥐는 힘이 된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밝혀두노라. 진정으로 왓차여, 그럴 경우 갈망은 움켜쥐는 힘이 된다."

― 『상응부』, Ⅳ, 398쪽 ―


죽음의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명백하게 밝혀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가장 강력해지는 (의식적으로는 활동이 없을지 몰라도) 존재에 대한 갈망은 강력한 움켜쥐는 힘이 된다. 갈망이 끌어당긴 재생의 기회를 잡는 것은 바로 이 움켜쥐는 힘이다. 취(取)는 애(愛)가 강력해진 형태이다. 움켜쥐며 달라붙는 그 힘은 다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가히 압도적이다.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바다 한가운데서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배 갑판에서 떨어졌다고 치자. 그는 삼킬 듯 덮쳐오는 파도와 싸우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미친 듯이 허우적댈 것이다. 그러다가 워낙 쉬지 않고 질러대는 고함소리를 배 위에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듣게 되어 밧줄을 던져주었다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끌어당길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필사적으로 밧줄을 붙잡을 때, 그래서 기어코 배에 올라 한 목숨을 건지고야 말 때 그 집요함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런데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허우적대는 임종자의 정신적 집착[取]은 이보다도 훨씬 더 집요하다. 그 순간 살고자 하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갈망으로부터 몽땅 뿜어져나온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에너지는 다른 삶의 기회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게 되며, 이 기회를 그는 더할 수 없는 집요성으로 움켜잡는 것이다. 이 기회와 움켜잡는 행위는 순전히 정신적인 현상이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논의될 것이다.


참으로 생명이란 갈망의 연속이다. 임종하는 사람은 그 동안 축적된 살고자 하는 갈망 위에 죽는 순간의 강력한 갈망이 합해져 다음 생을 끌어당긴다. 진정 살려는 의지가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이다.


이 소식은 연기(緣起)의 공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갈망을 연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난다[愛緣取]

집착을 연으로 하여 생성이 일어난다[取緣有]

생성을 연으로 하여 재생이 일어난다[有緣生].


5장  마음과 변화의 법칙


첫째 장에서 우리는 육체가 어떻게 변화의 법칙에 지배받는지를 보았다. 이제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 역시 같은 법칙에 지배를 받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음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과거 어떤 유파의 사상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은 두뇌에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은 두뇌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두뇌가 마음속에 있지도 않다. 불교 심리학에 의하면 마음이란 단지 생각들의 연속적인 흐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은 작용하고 있는 마음이다. 바람이 다만 움직이는 공기일 뿐이듯, 생각은 움직이고 있는 마음이다. 그런데 생각은 에너지의 표현이므로 마음도 생각과 마찬가지로 없어지거나 파괴될 수 없다. 다만 변화를 피할 수는 없다. 마음은 찰나찰나 바뀐다. 한 찰나 어떤 생각이 마음을 차지하면 다음 찰나 다른 생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생각이 생각의 뒤를 잇는 이 과정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단지 생각의 끝없는 연속에 불과하다. 그것은 뭉뚱그려진 통일체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체이다. 그것은 지속적이지도 정적(靜的)이지도 않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물(series : santati, 相續)이다. 그것은 유동(流動) 혹은 흐름(sota)이다. 그것은 찰나찰나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져가는 연속적인 생각의 흐름이다. 생각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이어지므로 우리는 마치 마음이 어떤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인 양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어둠 속에서 한쪽 끝에 불을 붙인 막대기를 빙빙 돌리면 그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멀리 있는 사람은 마치 불로 된 고리나 원(圓)이 있는 것으로 착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성질의 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불타는 막대기들이 빠른 속도의 원운동을 일으켜 만들어낸 연속 그림일 뿐이다.


마음도 이와 같다. 생각들은 마음속에서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서로의 뒤를 잇는다. 그래서 마음은 흔히 강물의 흐름에 비교되어 왔다. 강물 속에서 물줄기들은 빽빽하게 쉴새없이 이어지므로 강이라고 하는 영속성을 지닌 어떤 것으로 보이게 되고 또 그렇게 보려드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어제의 켈라니 주11) 강은 오늘의 켈라니 강이 아니다. 아침 출근길에 건너간 강이 저녁 퇴근길에 다시 건너게 되는 그 강은 아니다. 그것은 매일, 매시간, 매찰나 다른 물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도 그와 같다. 매찰나 다른 생각인 것이다. 한 생각 뒤를 다른 생각이 잇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마음이라 불리는 어떤 영속성의 것이 있는 양 착각하게 될 뿐이다.


이 생각의 이어짐이 얼마나 빠른 것인가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신 적이 있다(『증지부』i. v.).

"비구들이여, 나는 마음의 변화만큼 빨리 변하는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것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 것인가를 설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석서『아타살리니』 주12) 에서는 "물질의 한 단위가 일어나 지속되는 동안 16개의 심찰나(心刹那, 원문은 cittakkha.na, 영역은 thought-moment, 또는 conscious-moment) 주13) 가 일어났다 흩어지는데, 어떤 예를 든다 해도 그들이 차지하는 시간의 짧음을 표현할 수는 없다.(P. T. S. 영역본, part 1, pp.81)"고 말하고 있다. 주14)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생각이 서로 이어지는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뿐 아니라, 생각과 생각 사이에 경계선이 없다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생각은 다른 생각 속으로 섞여 들어가기 때문에 `생각들의 이어짐[連續]'이라는 표현은 상황을 적절히 기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강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이 이어져 내려간다기보다는 물이 흐른다고 기술하는 것이 적절하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 주15) 교수는 그의 「심리학:단기과정(Psychology:Briefer Course)」에서 `의식의 흐름'이라는 제목에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말하기를 "그런데 의식은 그 자체가 잘게 토막낸 조각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우선 첫째로, 의식이 드러나는 양을 표현하여 `사슬 같다'느니 `열차 모양 같다'느니 하는 단어를 쓰는 것부터가 적절하지 못하다. 그것은 이어 맞추어진 것이 아니고 흐르는 것이다. `강'이나 `흐름'은 그것을 가장 자연스럽게 그린 상징적 표현이다. 이제부터는 의식을 말할 때, 생각의 흐름, 의식의 흐름 혹은 주체적 삶의 흐름이라고 부르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 부분을 이탤릭체로 구별하여 썼는데 우리말로 옮기면서 고딕체로 바꾸었다.)


한 생각을 다른 생각 속에 끊임없이 융합시키는 진행 과정이 너무 빠르기에, 언뜻 보아선 우리의 마음이 어떤 독립·안정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갖게 되고, 그 뿐 아니라 생각이라는 정신적 기능을 행하는 신비스럽고 영구적인 무엇이 우리 마음 안에 주재하고 있는 듯 상상하게 된다.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 이 부분에 관하여 그의 「심리학의 원칙(Principles of Psychology)」에서 "생각은 그 자체가 생각하는 자이다."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조금 깊이 숙고해 보는 자세가 요구된다. 앞서 언급한 `의식의 흐름' 장에서 그는 "우리가 보통 `비가 온다.' 혹은 `바람이 분다.'라고 말하듯이 `생각이 난다.'(It rains. It blows.와 마찬가지로 3인칭을 사용하여 It thinks.로 사람의 생각-과정을 비인칭화한다면)라고 말한다면 사실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저명한 심리학자들은 대부분 마음을 하나의 통일적 개체가 아닌, 생각의 연속체로 보는 견해를 보였다. 예를 들어, 「종교와 과학(Religion and Science)」에서 버트란드 러셀 주16) 은, "아주 최근까지 과학자들은 더이상 쪼개질 수 없고 파괴될 수 없는 원자의 존재를 믿었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원자를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충분한 이유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심리학자들 또한 이와 같은 충분한 이유에서 마음이 하나의 지속적 정체성을 지닌 무엇이 아니라, 어떤 친밀한 관계 속에 한데 묶여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덧붙여 말하기를 "따라서 영원한 존재란 현존하는 육체와 결부되어 일어나는 사건들과 그 육체의 사후에 일어나는 다른 사건들 사이에 이 친밀 관계가 존재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고 했다.

개개의 생각은 의식단계의 마음을 뜰 때, 자체 특유의 모든 에너지와 인상 혹은 경향 등을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에 넘겨주지만 사람은 이런 전도현상을 감지하지 못한다. 정신적인 모든 과정이 의식단계의 마음에 떠올라 감지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적 과정도 많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 심리학에서 `바왕가찌따(bhava^nga-citta)'라고 부르는, 마음의 무의식적, 잠재의식적 측면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룰 터이므로 여기에서 상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단지 우리의 생각들이 남기는 인상들이 어딘가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면 과거에 일어난 많은 사건들이나 전에 암송했던 시구, 문장 등을 마음대로 저장하고 불러내는 저 놀라운 기억이란 기능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제기해두고자 한다.


1장에서 우리는 육체가 하나의 변화과정임을 알아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마음도 역시 하나의 변화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심리적 물리적 결합체 즉 마음과 육체의 결합체이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변화하는 마음과 변화하는 육체의 결합체임을 안다. 마음과 육체를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은, 살아있는 것은 실상 한 찰나뿐이고 다음 찰나의 삶은 또 다른 삶이라는 견해를 새삼 음미하게 한다 ― 물론 그 이해가 쉽지는 않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존속기간은 그러니까 한 찰나뿐이다. 이 같은 사실을 종종 `생명의 찰나성'이라고도 일컫는다. 『청정도론』8장에서 생생하게 지적하듯이 돌고 있는 바퀴는 특정 찰나에 땅의 한 점만을 스친다. 다음 찰나에는 바퀴의 바로 그 다음 점이 땅의 그 다음 점에 닿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심찰나만을 살 뿐이며, 바로 다음 찰나는 실제로 다른 삶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마치 바퀴의 다른 점이 땅의 다른 점에 닿듯이, 다른 마음이 다른 육체와 함께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음 찰나에 기능하는 것이 다른 육체라는 것은 1장 변화의 법칙에서 설명하였는데, 이때 몸은 매찰나 변화하는 것이고 찰나찰나 되풀이되는 삶과 죽음[生滅]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처럼 찰나찰나 삶과 죽음이 되풀이되는데도 삶의 연속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왜냐하면 순간적 삶과 죽음이 있는 한편으로 순간적인 다시 삶(reliving)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받는) 인상과 경향들은 전도(傳導)되므로 재생은 지나간 찰나의 삶과 관계가 있다. 한 생각이나 의식이 다음 것을 일으키는 과정은 중단없이 계속된다. 다른 장에서 논의하겠지만, 이번 생을 마감하는 그 찰나에도 마지막 임종시 의식은 다른 의식을 일으킨다(물론 그 일어나는 곳은 다른 몸, 다른 장소, 심지어는 다른 존재차원일 테지만). 이 새 의식은 새로운 존재의 핵을 형성하는데 가장 알맞는 쪽으로 당겨져 두 가지 새로운 육체적 요소(부모의 정자와 난자세포)와 결합한다. 연속되는 의식이 무한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이어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첫째로는 그것이 물리적 의미의 이동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로 인력의 법칙은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심령적 차원에서도 역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성립된다. 삶과 죽음의 차이가 단지 한 심찰나뿐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생에서 찰나찰나 삶이 바뀌는 것이나 한 존재에서 다음 존재로 삶이 바뀌는 것이나 본질에 있어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뒤따른 생에서의 첫번째 심찰나(心刹那)는 자력으로 발생된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앞 생의 마지막 심찰나의 속편(sequel)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록 다른 세계에 다른 몸으로 태어나더라도 내내 앞의 생을 구성했던 일련의 연속적인 심찰나들과 이어진 연속물이다. 앞 생의 마지막 의식단계의 심찰나가 뒤이은 생의 첫번째 심찰나를 조건짓는다. 이들 두 생각은 동일한 아람마나(aaramma.na) 즉 생각의 대상을 갖는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일으키는 이 연속과정에서 육체의 죽음은 아무런 방해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6장  의식단계의 마음과 무의식단계의 마음


지난 장에서 마음은 변화하는 과정임이 밝혀졌다. 이 과정은 `위티찌따', 즉 의식단계의 마음과 `바왕가찌따', 즉 무의식 및 잠재의식단계의 마음이라는 두 가지의 단계 혹은 흐름으로 나타난다. 주17) 서구 심리학자들의 가설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은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라는 세 개의 층 혹은 흐름으로 되어 있다. 의식의 수준에는 자기가 무엇을 행하고 말하는지 아는 자각이 존재한다. 그보다 깊은 잠재의식 수준에는 의식적 마음을 지나쳐간 생각들이 남긴 모든 인상과 기억들이 감추어져 있다. 이들 인상들 중 상당 부분은 마음대로 되불러낼 수 있다. 또 그들 중 일부는 저절로 의식 속에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가장 깊은 수준은 무의식인데 거기에도 의식 수준의 마음을 지나쳐간 생각들의 인상과 생각의 기억들이 감추어져 있으나 결코 원하는 대로 되불러낼 수는 없다. 때때로 그런 인상이나 기억들이 저절로 의식 표면에 다시 나타나는 수가 있고 또 최면술 같은 특별한 방법에 의해 끄집어낼 수는 있다.


불교 심리학에서 이들 세 가지 층 주18) 을 `위티찌따'와 `바왕가찌따'의 두 항목으로 나눈다. 의식의 단계는 `위띠찌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합해서 `바왕가찌따'라는 한 이름으로 다루고 있다. 잠재의식과 무의식은 별개의 분리된 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서구 심리학자들도 잠재의식적 마음과 무의식적 마음은 서로 합쳐지므로 뚜렷한 경계가 없음을 시인한다. `바왕가찌따'는 `위티찌따' 즉 의식단계의 마음을 통과한 모든 생각들의 인상과 기억들이 들어있는 숨겨진 저장고다. 모든 경험과 경향은 그 곳에 저장돼 있으면서 거기로부터 때때로 의식단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지만 표면의식은 그 영향의 근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불교의 `바왕가찌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서구 심리학의 무의식과 유사하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 `바왕가찌따'는 서구식 무의식보다 더 범위가 넓으며, 불교 심리학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조건지우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엄밀히는 동시에 같이 작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깨어있는 낮 동안 활발한 의식활동과 사물을 알아차리는 상태에 있다. 그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은 다섯 감각을 통해 밖으로부터 쉴새없이 받아들이는 모든 충격이나 인상을 인식하고, 또 한편 관념이나 사고(思考) 또는 지나간 생각의 회고를 통해 내면으로부터 받게 되는 인상들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동안의 의식단계의 마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의식이 있다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든 안에 있는 것이든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으로부터나 바깥으로부터 항상 인상을 받아들이는 의식단계의 마음이, 예를 들어 잠든 동안과 같이 비활동적인 상태로 침잠하면 다른 종류의 흐름, 즉 수동적인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과정이 나타난다. 이 무의식단계의 마음을, 모든 의식단계의 생각-과정(viithi)으로부터 풀려났거나 자유로워졌다는(mutta) 의미에서 `위티뭇따찌따(viithi-mutta citta, 離路心)'라고도 부른다. 이 수동적 과정은 의식단계의 마음이 일어나 교란하지 않는 한 잔잔한 개울물처럼 계속 흐르기 시작한다. 흐름에 대한 교란은 다섯 감각 통로 중의 어떤 것을 통하여 수면상태가 방해를 받게 될 때 일어난다.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은 수면 동안만이 아니다. 사람이 깨어있는 동안도 의식단계의 마음이라는 한 생각이 가라앉고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까지의 지극히 짧은 시간 사이에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반드시 끼여든다. 그러다가 의식단계의 다음 생각이 떠오르면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비활동상태로 침잠한다. 낮 동안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라지는만큼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중단되는 일이 그만큼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셈이다.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중요성 - 그 기본적 위치


어떤 의미에서는 수동적인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의식단계의 마음보다 더 중요하다. 전자 즉 바왕가찌따는 의식의 측면에서 보아 활동적이지 않을 뿐 잠재의식적으로는 활동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상태의 활동, 다시 말해 의식의 문턱 주19) 바로 밑에서 벌어지는 활동, 따라서 의식단계의 마음에는 알려질 수 없는 활동이라 간주된다. 의식단계의 마음은 한 찰나에 오지 하나의 생각이나 관념을 수용할 뿐이나, 잠재의식 내지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의식단계의 마음을 드나드는 모든 생각, 관념, 경험들의 인상을 수용한다. 그러므로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귀중한 정신적 창고로 혹은 인상의 저장소로 기능한다.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 「종교경험의 다양성(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에서 잠재의식단계의 마음(`바왕가찌따'의 한 측면에 해당되는)에 대해 "그것은 분명히 우리 존재의 더 큰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잠복하고 있는 모든 것의 거처이며, 기록이 되었거나 주목받지 못한 채거나간에 지나쳐가는 모든 것들의 축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또 다른 특징은 때때로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각, 관념, 인상들 중 일부가 의식단계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최면을 통해 일깨워져 의식 표면으로 끄집어내질 수 있는데 그에 관해서는 뒤에 다루게 될 것이다.


무의식단계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기억과 같은 정신현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들 정신현상들은 설명되기 어렵고 완전 불가사의로 남게 된다. 이에 관하여 냐나띨로까 주20) 스님이 「업과 환생」 주21) 에서 한 말을 상기해보면 도움이 될 듯하다. "잠재의식상태의 생명의 흐름인 `바왕가 소타'의 존재는 우리의 사고(思考)를 설명해주는데 필수적인 가정(假定)이다. 무엇이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지각하고 생각하고 내면으로든 바깥으로든 경험하고 행한 것들이 극도로 복잡한 신경계통에든 아니면 잠재의식 내지 무의식 안에든 어떤 방식으로 어디엔가 빠짐없이 등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전에 무엇을 생각했는지도 기억할 수 없을 뿐더러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고 우리의 부모, 선생, 친구, 기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도대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니 생각은 앞서 한 경험들의 기억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막 태어난 갓난아이의 마음, 아니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태아의 마음보다도 더 아무것도 없는 완전 백지상태일 것이다."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인상들이 저장된 정신적 창고로서의 기능 외에도 그 어원이 시사해주듯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바와(존재)'와 `앙가(요소)'라는 말로 구성된 `바왕가'라는 단어는 `바왕가찌따 즉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존재의 요소 혹은 존재에 없어선 안될 기초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주석서 『위바위니띠까(Vibhaavini.tiikaa, 賢人復註』에 `그로 말미암아 존재나 개체의 흐름이 멈춤없이 유지되는 생명의 요소'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이 바왕가찌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것은 존재에게 필수적이고 지속적인 기초가 되거나 그 밑흐름으로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바왕가 소따(무의식의 흐름 혹은 개울)라고 불린다. 그것은 또 `존재의 기능'이라고도 불려왔으며, 그 이름값대로 삶을 지속시키는 구실을 한다. 서구의 저술가들은 이 뜻을 잘 살리기 위해 생명-연속체(life-continuum) 라는 용어를 썼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불교사전(Buddhist Dictionary)」에서 "일부 현대 심리학자들이 무의식 또는 영혼이라고 부르는 잠재의식적 생명흐름, 또는 생명의 밑흐름(低流)은 바로 그것이 있음으로써 기억의 능력, 염동(念動, telekinesis) 현상의 문제, 정신 육체적 성장, 업 그리고 재생 현상 등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셰 잔 아웅이 「철학개요(The Compendium of Philosophy)」 주22) 서문에서 전개한 바왕가찌따 혹은 `존재의 흐름'의 보다 고차원적 기능에 관한 고찰은 매우 유익한 시사를 던져준다. "그렇다면 존재의 흐름은 현재 의식을 가진 존재의 필수 조건이자 필수 요소, 즉 없어선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개개 생명의 존재이유이다. 그것은 생명-연속체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생각이라는 그림이 그려지는 바탕과 같다. 비유컨대 그것은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어떤 바람 때문에 주름잡히지도 않고, 어떤 파도 때문에 파문을 일으키지도 않고, 어떤 지류의 물도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 내용물을 세상에 내보내지도 않는 채로 조용히 흐르고 있을 때의 강물의 흐름과 같다. 그 흐름이 내부세계로부터 오는 어떤 장애되는 한 생각에 부딪치거나 바깥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이라는 지류의 유입에 의해 동요되면 생각(의식단계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존재의 흐름을, 생각이 그 속으로부터 떠오르는 바닥면(subplane)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일생 동안 혹은 세세생생 동안 식역(識  )하의 찰나찰나적 의식작용과 식역상의 찰나찰나적 의식작용은 내내 병렬관계(竝列關係)를 이룬다. 하지만 그런 작용들이 아래위로 중첩되는 일은 결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