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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보시

보시             

출처: 고요한 소리 http://www.calmvoice.org


Daana

The Practice of Giving


비구 보디 역음

혜인 스님 옮김


차 례


들어가는 말 ----------------------- 비구 보디

보시의 실천 ----------------------- 수잔 엘바움 주틸라

빨리 경전속에 나타나는 보시 --------- 릴리 드 실바

마음에서 우러난 보시 --------------- M. O'C. 월슈

보시는 속마음의 표시다 ------------- 니나 봔 고르콤

보살의 보시행 (짜리야 삐따까 주석서) -- 비구 보디 영역


들어가는 말

비구 보디


무엇인가를 베푸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기본이 되는 인덕(人德)의

바탕으로 알려져 있다. 베푸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가 얼마나

속 깊은지 또는 자기의 한계를 얼마나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도 역시 베풂의 덕을 펴는 것은 정신적

발전의 기반이자 씨앗이라고 하여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빨리 경전을 보

면 근기에 따라 베푸셨던 부처님의 점진적 설법들 가운데 '베풂에 관한 말

씀(daanakathaa)'이 늘 제일 먼저 다루어지고 있음을 자주 접하게 된다. 부

처님께서는 아직 귀의를 하지 않은 대중들에게 설법하실 때마다 으례 '베

풂'의 덕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먼저 가르치셨다. 그들이 이 보시의 진가를

 이해하게 된 다음에라야 부처님께서는 계행, 인과법, 출가의 공덕과 같은

불법의 다른 면들을 말씀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이런 원리들이 깊이 새겨진

 다음에야 부처님 당신께서 독특하게 발견해 내신 사성제(四聖諦)를 자세히

 설해 주셨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시는 팔정도 가운데 하나의 항목도 아니요, 깨달음의 필

수요건(bodhipakkhiyaa dhammaa, 助道品)에 드는 것도 아니다. 보시를 행한다

고 해서 곧 바로 지혜가 나타나거나 사성제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므로 거

기에서 제외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보시는 수행에서 담당하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 즉 수행의 궁극

적 단계인 깨달음의 과정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자리잡기보다는 수행인이

 번뇌에 찌든 마음을 맑히기 위해 기울이는 온갖 노력을 조용히 뒷받침해

깨달음의 토대가 되고 새로운 마음의 각오를 갖게 하는 것이 보시의 역할이

다.


따라서 비록 보시행이 팔정도의 여덟 항목 가운데 하나는 아니지만 해탈의

노정에 기여하는 보시의 공덕이 간과되거나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정해 주신 여러 가지 수행 체계들 가운데서 보

시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그 공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충분히 알 수 있

다.

보시는 점진적인 설법의 첫번째 주제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세 가지 복짓

는 일(pu~n~nakiriyavatthu, 三福業事)註1)이나 네 가지 남들을 이롭게 하는

일(sangahavatthu, 四攝法)註1), 그리고 십바라밀에서도 항상 첫번째 덕목

으로 꼽힌다. 특히 십바라밀은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발원한 사람이면 누구

나 닦아야 하며, 완전한 부처의 경지인 최상의 깨달음을 향해 보살의 길을

걷는 이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용맹 정진하여 닦아야 할 거룩한 덕목들이

다.


베풂은 달리 말하면 관대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보시행에서는 보시물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

달되는 겉으로의 행위보다 베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이 베풀

려는 마음은 베푸는 행위에 의해 강력해지고, 다시 그 강력해진 베풀려는

마음은 마침내 자기 희생적인 보시행까지 가능하게 한다. 관대함은 소위 선

지식(sappurisa)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이다. 선지식이란 물론

그 밖에도 신심이나 계행, 교법의 이해나 지혜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격자들이다. 보시를 이처럼 관대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보시행은 성불

을 위해 기울이는 모든 노력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 수행의 목표는 결국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인데

, 관대한 마음을 키우면 곧 탐욕과 성냄이 사그러드는 한편 마음이 유연하

게 되어 어리석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법륜 문고는 이처럼 중요한 불교의 덕목인 '보시'를 보다 깊이 있게

 탐구해 보고자 편집되었다. 사실상 지금까지 생활 속의 실천 불교를 다루

는 책자에서마저도 보시행은 누구나 다 아는 것으로 여겨 적절한 설명없이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이 책자에서는 불교 경전에 대한 깊은 학식을 갖추었

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수행하고 있는, 네 사람의 이 시대 불교인들이 보시

의 다양한 측면들을 음미하는 동시에 불법 수행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검토해 보고 있다.


이 선집 끝에는 중세의 주석가 담마빨라(Dhammapaala)註1)스님의 짜리야삐따

까(Cariyaapi.taka)註2)주석서 가운데 바라밀 설명에서 발췌한 '보살의 보시

행' 부분을 번역하여 실었다.


보시의 실천


수잔 엘바움 주틸라


보시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 불자가 반드시 먼저 닦아야 할 덕목들 가운데

하나이다. 무언가를 베풀면 그것은 바로 공덕이나 선업의 바탕이 된다. 그

것은 또 도덕성과 선정력과 통찰력[戒, 定, 慧]을 계발하면서 거듭되는 생

의 바퀴인 윤회(samsaara)로부터 해탈을 성취하게 해준다. 이미 해탈로 향

하는 길에 굳건히 들어선 사람들조차도 보시행을 계속한다. 보시는 그들이

해탈을 이루기까지 몸받아 살게 되는 남은 기간 동안 경제적 안정과 아름다

움과 기쁨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보살들은 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팔 다

리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음으로써 보시의 궁극적 경지인 보시 바라밀(daanapaarami)을 성취하기도 한다.


모든 선행이 다 그러하듯이 보시의 행위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인과법에

따라 장차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가 그 같은 사실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보시는 금생에나 다음 생에 이로움을 가져다 주겠지만 베

풀고자 하는 마음이 바른 이해[正見]와 조화될 때 보시의 공덕은 훨씬 커지

게 된다.


보시를 통해 얻는 공덕은 베푸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보시했는가, 받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순수한가, 그리고 어떤 물건을 얼마나 보시했느

냐에 따라 달라진다.

항상 우리는 자기가 한 행동의 결과와 마주치며 살고 있다. 바른 행위로는

좋은 결과를, 옳지 못한 행위로는 나쁜 결과를 겪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로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선업을 많이 쌓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보시행에서

 본다면 이것은 곧 베풀 때 순수한 마음을 지닐 것, 될 수 있는 한 훌륭한

수혜자(受惠者)를 선별할 것, 그리고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가장 적당하고

후한 시물을 선택할 것을 의미한다.


보시의 동기


보시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보시하는 사람이 베풀기 전과 베푸는 동안

, 그리고 베풀고 난 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우

리가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알맞은 시물이나 최상의 수혜자를

고를 수가 없고 적절한 시물과 수혜자를 갖추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보시를 하고 난 다음 그것을 후회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註1)"


불교에서는 베푸는 이의 마음 바탕을 유심히 살피어 어떠한 마음으로 베푸

는지, 그 마음 상태를 여러 가지로 나눈다. 우선 분별없이 되는 대로 주는

것과 지혜롭게 베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후자가 전자보다 수승한 것

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를테면 나이 어린 소녀가, 자신의 행위가 어

떤 뜻을 갖는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어머니가 그리 하라고 일렀기 때문에

집에 모신 불단에 꽃을 올리는 경우, 이는 가장 초보적인 보시로 볼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나 덕을 베푸는 모든 과정이 지혜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

로 가장 수승한 보시행이 된다.

지혜롭게 베푸는 데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첫째, 원인이 있으면 결과

가 있다는 업의 법칙에 따라, 보시 행위는 미래에 반드시 유익한 결과를 가

져올 것이라고 분명히 이해하면서 베푸는 것. 둘째, 베풀어지는 물건이나

주는 이, 받는 이 모두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고 베푸는 것. 셋째, 깨

달음을 향한 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베푸는 것이다. 시물을 베푸는 데

는 다소간의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므로 한 번의 보시행을 하면서도 베푸는

과정의 여러 단계에서 이같은 세 가지 마음을 다 경험하며 베풀 수 있다.


보시의 동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열반을 성취하고자 쏟는 노력들을 북

돋우기 위해 베풀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해탈은 모든 마음의 번뇌(kilesa

)들을 없앰으로써 성취되는데, 이들 번뇌들은 모든 행위 뒤에 그 행위들을

주관하며 계속 존속하는 '내'가 있다는 미혹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 일단 이러한 미망이 소멸되면 이기적인 생각들은 더 이상 생겨날 수가 없

다. 만일 우리가 보시를 통해 참다운 평화와 청정함을 얻고자 한다면, 완전

한 베풂인 보시 바라밀을 실천해서 깨달음의 성취를 열매맺을 공덕의 창고

를 지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목표를 세우고 나갈 때 우리의 속마음은 베푸는 행위 뒤

에서 자연히 유순해질 것이며, 이처럼 부드럽고 푸근한 마음이야말로 해탈

을 이루는 데 가장 근본 요소인 선정과 지혜 계발에 꼭 필요한 자질이리라.


이른바 성자(ariya, 尊者)들, 이미 성스러운 사과(四果)의 어느 단계엔가

들어선 거룩한 이들은 그 마음이 지혜라는 바탕 위에서 작용하는 까닭에 늘

 순수한 뜻을 가지고 베푼다. 이러한 수준에 아직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가

끔 건전하지 못한 마음으로 경솔하게 혹은 공경심 없이 주어버릴 수도 있다

. 부처님께서는 몸과 입으로 짓는 모든 행위가 다 그러하듯이 보시행도 거

기에 수반되는 의도가 보시의 덕스러움을 재는 잣대임을 가르치신다. 가령

어떤 사람이 스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때 공경하는 자세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짓이다. 구걸하는 사람을 떼어버리기 위해 동전을 던져

주는 행위도 보시행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베풂이 최상의 결과를 낳게 하려면 베푸는 사람은 적절한 시물을 때 맞추어

 베풀도록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중간 사람을 통해 베푸는 것은, 예를

들면 본인의 손으로 직접 스님들께 음식을 공양하지 않고 하인을 시켜 전달

하는 것 등은 보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이다. 자기가 한 행위의 결과는

자기가 받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채 베풀 때, 그 보시 또한 공덕의 힘을 줄

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보시할 마음은 먹었으나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

는다면 그 공덕의 성취는 아주 미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가

로막지 않는 한 베풀려는 마음은 항상 재빨리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보시

행을 한 다음 혹시라도 괜히 했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 보시의 공덕은 대부

분 잃어지고 말 것이다.

덕스러운 사람은 공손하고 정중하게 베푼다. 그 베푸는 시물이 즉흥적인 것

이든 미리 계획된 것이든 간에 시물의 내용이나 베푸는 때가 받는 이에게

합당한 것인지를 알아볼 것이다. 남방 불교 국가에서는 가정 주부들이 매일

 이른 아침 몇 분 스님들을 공양에 초대하여 음식을 올리는 일이 많다. 이

주부들은 가족들의 조반을 차리기 전에 스님들에게 손수 공양을 올린다.


만일 보시를 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좋지 않게 여길까봐 불안해

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압력에 못 이겨

 베푼다면 그 공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역시 미미한 결과 밖에 얻

지 못할 것이다.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하는 자선 행위 역시 이기적인 것

이어서 값진 보시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상대의 호의에 대한 응답으로 베

풀거나 보답을 바라고 주는 것 역시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전자의 경

우는 빚을 갚는 것과 같고 후자는 뇌물을 건네주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

다.


보시를 받는 사람


받는 사람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는 보시의 공덕을 결정짓

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된다. 즉 받는 사람이 훌륭하면 할수록 보시자에게 돌

아올 공덕이 큰 까닭에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좋다

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수혜자로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

과 출세간의 도(magga, 道)를 닦아 과(phala, 果)를 이룬 당신의 제자들

같은 거룩한 성자들을 꼽으셨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지혜를 통해 성취한 청정한 마음이야말로 베푼 이의 보

시행으로 하여금 많은 공덕을 가져오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

상의 공덕을 쌓기 위해서는 그런 분들께 할 수 있는껏 많이, 그리고 가능한

 한 자주 보시를 베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성스러운 경지에 들려는 목표

를 세우고 수행하는 스님들께, 혹은 오계를 수지하고 불법에 따라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베푸는 보시 또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성과를 증득한 거룩한 이들이 공양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베푸는 이로 하여

금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공덕을 지을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가장  높은 두 가지 성스러운 경지에 올라선 아라한(arahant, 應供)과

 아나함(anaagaamin, 不來)은 이미 감각 대상이 되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

린 분들이다. 따라서 이 분들에게 보시할 때, 그 분들의 마음은 보시물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보시하는 사람에 대한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

담마빠다(Dhammapada, 법구경) 주석서註1)에 있는 시왈리(Sivali) 스님 이

야기는 비록 사소한 물건이라도 부처님께서 이끄시는 승가(Sangha, 僧伽)

에 베풀어질 때 큰 공덕을 이룬다는 사실의 좋은 예이다.

옛날 위빳시(Vipassi) 부처님 당시 어느 도시에 사는 시민들과 왕 사이에

누가 부처님과 승가에 가장 큰 보시를 할 수 있는지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

다. 시민들은 공양 올릴 물건들을 빠짐없이 갖추었지만 거기에 싱싱한 꿀이

 빠진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해 오도록 하기 위해 여러 심부름꾼들에게 각기

충분한 돈을 주어 내보냈다. 심부름꾼 가운데 한 사람이 그 때 마침 방금

딴 벌집을 팔려고 시내로 들어오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심부름꾼은 그에

게 벌집 한 개 값으로는 너무 많다 싶었지만 자기 돈 모두를 주고라도 그

벌집을 사겠노라고 제의하자 농부는 의아해 하면서 물었다. "당신 제 정신

이요? 한 냥 값도 안될 것을 천 냥을 주겠다니 그 까닭이 뭡니까?" 그 꿀

은 시민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의 마지막 품목인 만큼 그만한 값이 있

노라는 심부름꾼의 설명에 농부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그렇다면 돈을 받

고 팔지는 않겠소. 그 보시의 공덕을 내가 얻을 수 있다면 거저 드리리다.

" 시민들은 그만한 횡재를 쉽게 마다하는 농부의 신심에 감동되어 보시의

공덕을 그에게 돌리기로 기꺼이 동의했다.


위빳시 부처님 때 올린 이 작은 공양 덕분으로 그 농부는 그후 거듭거듭 천

상에 태어났고 바라나시 국의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물려 받기도 했다. 그

의 마지막 생인 지금에서 그는 시왈리 존자가 되어 부처님 제자로서 아라한

과를 증득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도 그 벌집 보시는 계속해서 결실을 맺었

다. 이미 여러 겁(kappa, 劫) 전에 맛있는 것을 보시한 그 분에 대한 예우

로 하늘 신들은 부처님과 시왈리 존자를 포함한 오백 명의 스님들이 여러

날 인적 없는 지역을 지나는 동안 쉴 곳과 음식을 마련했던 것이다.


정신적으로 그다지 향상되지 못한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에도 보시는 역시

유익함이 있다. 베푸는 이의  뜻이 좋으면 비록 받는 사람에게 도덕적인 결

함이 있다 하더라도 보시하는 사람은 공덕을 쌓게 되며, 나아가 이런 보시

행으로 인해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탐욕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이 굳

건하게 자리잡힌다. 마음 속으로는 거룩한 승가에 올리고자 했던 공양물이

실제로 덕스럽지 못한 스님들에게 베풀어진다 하더라도 그 보시 또한 큰 결

실을 맺는다. 나쁜 사람을 억지로 좋은 사람이라 여기면서 베풀 필요는 없

다. 단지 우리는 무언가를 베푸는 동안 자신이 어떤 자세로 하고 있는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의 태도이지 남은 아니기 때문이다.


베풀어지는 것[施物]


보시행의 세 번째 요소는 무엇을 베푸는가인데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물

질이 아닐 수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전해 주는 법보시야

말로 어떤 선물보다도 좋은 것이라고 하셨다(Dhammapada, 354).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해 주는 분들, 이를테면 불법을 알려 주거나 설명해 주거나 경

전을 암송하는 스님,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들은 대중들과 불법을 함께 나누

는 것으로 최상의 보시를 실천하고 있다. 법을 가르쳐 줄 만한 자격을 갖추

지 못한 사람들도 다른 방법으로 법을 베풀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

긴 책을 누구에게 주거나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펴게 될 진귀하고 새로운

사본을 번역, 출판하는데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다. 또한 자주 불교에 관한

토론의 기회를 만들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계를 지키게 하거나 참선을 하도

록 권장하는 것도 모두 훌륭한 보시행이다. 그리고 남들을 위하여 불법에

관해 해설을 쓸 수도 있다. 선원(禪院)이나 거기에서 참선을 지도하는 분은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므로 이런 수련원을 위해 금전

을 베풀거나 몸으로 일을 거들거나 지도하는 분을 돕는 일들은 모두 법보시

가 되는 것이다.

베풂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물질적인 보시이다. 시왈리 스님의 벌집 이야

기에서 보듯이 시물이 꼭 비싼 것이어야만 큰 공덕을 가져온다는 법은 없다

. 하루에 밥 한 그릇 밖에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 그날 양식의 전부인

한 그릇의 밥을 보시할 때 그는 매우 큰 보시를 한 셈이고 공덕 또한 지대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부자가 스님이 탁발하러 올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

도 앞의 가난한 사람이 한 것과 같은 분량의 밥만을 준비했다면 그 공덕은

지극히 빈약한 것이 될 것이다.

버마 사람들은 스님들께 공양할 과일은 보통 때 자기네들로서는 값이 비싸

사먹기 힘든, 시장에서 제일 좋은 과일을 산다고 한다. 우리도 최소한도 자

신이 쓰기에 손색이 없는 정도의 물건을 베푸는 자세를 갖춰야 마땅하다.


승가에 대한 보시물로는 음식, 의복, 약 또는 스님들이 기거할 사원 등이

있으며 이들은 저마다 질적인 면이나 양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승가에 바치는 보시의 한계는 부처님께서 비구 승단이 순수하고

튼튼하게 유지되게끔 필요에 맞게 제정해 놓으신 계율(vinaya)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승단이 지켜야 할 계율을 미리 재가 불자들이 잘 알아 비구,

비구니 승가에 적당한 물건을 적당한 시기에 보시할 수 있다면 그 공덕은

무량하다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 으뜸가는 여(女) 재가 불자의 하나인 위사카(Visaakhaa) 이야기(

Buddhist Legends, 2;67-68)는 큰 보시가 가져온 공덕을 말해 주는 재미있

는 일화이다. 위사카의 아버지는 딸을 시집보내게 되자 오백 수레 씩의 금,

은 겣톩구리 그릇겫奏?버터와 쌀, 농사에 쓸 연장 등 엄청난 분량의 혼수감

을 공들여 마련했다. 그리고 딸에게 가축도 함께 주어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위사카 아버지는 일꾼들을 시켜 한 골목을 채울 만큼의 소들을 우리에서

내몰게 했다. 그 골목에 소들이 꽉 들어차자 부친은 "이만 하면 충분하겠

지" 하고 우리 문을 닫아 걸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문빗장이 걸렸는데도

여러 마리의 황소와 암소들이 위사카 몫으로 나간 소들을 따라 울타리를 뛰

어넘는 것이었다. 일꾼들이 갖은 애를 다 썼는데도 그 소들을 다시 잡아 가

둘 수는 없었다.


이 가축들이 위사카를 따라간 데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오랜 옛날 까

사빠(Kassapa) 부처님 당시 위사카는 이만 명의 비구와 사미들에게 다섯 가

지 우유 제품을 푸짐하게 베푼 일이 있었다. 바라나시를 다스리던 끼끼(Kik

i) 왕의 일곱 딸 가운데 막내였던 그녀는 충분히 들고 난 스님들에게 계속

우유, 커-드(요구르트), 버터 등을 더 드시도록 권했던 그 때의 보시 공덕

으로 그렇게 많은 가축들이 금생에 위사카로 태어난 그녀를 따라갔고 누구

도 그 공덕의 결실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새 법당이나 탑을 세우는 데 시주하는 일, 탑모(搭帽)의 도금을 위해 금박

을 시주하는 일, 또는 절에 불상을 모시는 데 시주하는 일 등은 종교적 성

격을 띤 물질적 보시가 된다. 그러한 보시의 수혜자는 일반 대중이 되며 그

 절을 찾거나 불상 앞에 예배하는 사람들 모두가 보시를 받는 사람이 된다.


보시 가운데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이웃들을 위해 베푸는 사회적인 보

시도 있는데 여러 가지 복지 기관에 기부하는 일, 병원이나 공공 도서관에

헌금하는 일, 주변 공원을 깨끗하게 가꾸는 일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 누

구든 그러한 사업을 위해 돈만 내놓는 데 그치지 않고 몸으로 하는 노력 봉

사로까지 참여한다면 그 과보는 아주 지대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보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청정한 마음으로 행해진다면 그 공덕은 엄청날 것이

다.


완전한 보시 [보시 바라밀]


보시행 가운데는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베푼 결과가 어떤 세속적

이득을 가져올 것인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런 보시가 있다. 그러한

보시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없애겠다는 생각, 즉 탐욕에서 벗어나겠

다는 깊은 뜻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나 가장

주기 어려운 것을 베풀고자 애쓴다. 이처럼 보살들은 언제라도 기회만 오면

 오로지 최상의 완전한 보시인 보시 바라밀을 실현하기 위해 베푼다. 보시

바라밀은 성불을 위해 반드시 최상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완성시켜야 할 열

가지 덕목 가운데 첫번째이다. 보살이 완전한 보시행을 달성하려면 보통 사

람들이 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해내야만 한다. 고따마 붓다가

 과거에 보살이셨을 때 자기 몸이나 세간의 이익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어

떻게 보시했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본생담(Jaatakaa)에 수없이 나온다. 보살이

 덕을 베풂에 있어 오로지 성불하는 데 꼭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자 하는 것

에만 마음을 쓰고 있을 뿐이다.


소부경(小部經)의 하나인 소행장(所行臧)註1)은 보살의 전생 이야기 열 가

지를 담고 있다. 이 전생 기간 동안 보살이 한 번은 상카(Sankha)라는 이름

의 브라흐민으로 태어났다. 어느 날 그는 한 벽지불(Pacceka-buddha)이 사

막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공덕을 쌓겠다고 발원했으면서 지극 정성으로 보시하기에 가장 훌륭한 분

을 만나고도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 공덕은 줄어들고 말 것이다"라고 생각

한 상카 브라흐민은 자신도 체질이 허약해서 꼭 신어야 하는 자기 신발을

그 벽지불에게 드렸다[1장, 제 2화].


한 번은 또 보살이 마하 수다싸나(Maha Sudassana)라는 이름의 황제였을 때

 날마다 자신의 영토 전역 수천 곳에 관리들을 시켜 국민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이 있는 자는 와서 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음을 알리게 하였다

.

"낮이든 밤이든 걸인들은 무엇이든지 받아갈 수 있노라"고.

마하 수다싸나 왕은 오직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아무런 집

착이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진실로 아낌없이 베풀었던 것이다[1, 4].


보살이 최고 경지의 보시행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는 물질적인 재화보다

훨씬 더 주기 힘든 것을 베풀어야 한다. 자기 몸의 일부나 자기 자녀들이나

 아내,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조차 거침없이 내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역시 부처님께서 아직 보살로서 시위(Sivi) 왕이었을 때, 눈먼 노인으로 나

타난 제석천(Sakka)에게 맨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빼주었다. 제석천은 보살

에게 이와 같은 훌륭한 보시행의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눈먼 노인 행세를

하며 시위 왕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시위 왕은 이 보시를 행하기 전에나

행하는 동안 조금도 망서리지 않았고, 나중에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

그는 "나의 보시행은 오로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두 눈이 내게 소

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깨달음이 더욱 소중한 것이기

에 기꺼이 두 눈을 내주었노라"고 말했다[1, 8].


또 웨싼따라(Vessantara) 왕자로 태어났을 때 보살은 경쟁 상대인 이웃 나

라 사람들이 행운의 상징인 용맹스런 왕궁 코끼리를 달라고 하자 그대로 넘

겨 주고 말았다. 이 관대한 처사 덕분에 그는 결국 아내와 두 어린 자녀들

을 데리고 외진 산 속으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아내가 낮이면 식구들이 먹

고 살 산 열매를 찾아다니는 동안 그는 오두막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하

루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나그네가 그에게 아들 딸을 달라고 청했다. 웨

싼따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아이들을 내주었고, 나중에는 정숙한 아내

까지도 남의 손에 넘겨 주고 말았다. 그는 "아이들이 귀찮아서도, 아내 맛

디(Maddii)가 싫어서도 아니었다. 완전한 깨달음만이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

었기에 사랑하는 그들을 버렸노라"고 말했다[1, 9]. 물론 그 당시 자녀들

이나 아내는 일반적으로 가장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맛디 부인 또한 이미 오래 전에 보살의 아내가 되어 보살께서 성불하

기까지 겪어야 할 모든 시련을 함께 나누기로 원력을 세운 바 있었다. 그녀

가 세운 서원의 과보가 웨싼따라 왕자의 성불 의지를 도와 완성시켰고, 자

신은 남의 손에 넘겨지도록 했던 것이다. 그 아이들 또한 부모를 떠나는 것

으로 자신들의 과거 업의 과보를 겪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언젠가 보살은 영리한 토끼로 태어난 적이 있었다.

그는 배고픈 브라흐민에게 공양을 올려 허기를 면케 하려고 기꺼이 불 속으

로 뛰어들었는데 그 브라흐민은 이번에도 제석천의 변신이었다. 이렇게 보

살이 몸과 목숨을 내던져 최상의 보시를 행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설사 타는 불이 그의 몸을 에워싸도 그는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

다. 보살은 그 때 일을 이야기하면서 "완전한 보시 바라밀을 실현했던 까

닭에 실로 그 불은 마치 시원한 물인 양 나를 진정시키고 평온을 가져다 주

었다"고 말했다.


보시의 궁극적 목표


수행에 나선 불자의 목적은 거듭되는 생사 윤회의 고(苦)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다.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음[無明]과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번뇌들을 뿌

리뽑을 때 고(苦)가 완전히 없어진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번

뇌는 우리로 하여금 '자아'라는 환상에 집착하게 하며, 본질적으로 무상

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들로서 그 끝없는 감각적 욕망을 채우려고 안달하

게끔 만든다.

부처님께서는 보시행이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노력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

셨다. 선한 마음으로 행해지는 보시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고의 근절을

돕는다. 첫째, 우리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 그 대

상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줄어 든다. 따라서 베푸는 버릇을 몸에 붙이게 되

면 불행의 주된 요소 가운데 하나인 갈애가 점차 약해진다. 둘째, 선한 마

음으로 보시행을 하면 다음 생에 청정한 불법을 만나 수행하기에 적합한 복

된 곳에 태어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베풂을 통해 열반을

 성취하기에 족할 만큼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보시를 하면

그 너그러운 행위는 곧바로 계, 정, 혜(siila, samaadhi, pa~n~na)의 향상을 북

돋워준다. 계, 정, 혜는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고귀한 팔정도의 내

용이며 이 팔정도의 완성이야말로 고를 벗어난 해탈이 아닐 것인가.


만일 우리가 내세에 복된 삶을 얻겠다는 어떤 바람 속에 베푼다 해도 보시

를 착실하게 행하기만 한다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

서는 내생의 세간적인 복을 구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해탈을 향한 수행으로

서의 보시가 훨씬 수승하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복을 받겠다는 바람으로 하

는 보시는 어딘가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갈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시행으로 얻어진 공덕은 덧없는 즐거움 속에서 언젠가는 끝장이

오고 그렇게 얻은 세간적인 행복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생사 윤회 속을 언

제까지나 헤매게 만든다.

결국 그렇게 얻어질 행복을 좀 더 깊숙이 헤쳐 본다면 다른 형태의 고(苦)

에 불과한 것이다. 갈애와 연결된 보시는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결코 멸하

지 않을 영원한 행복에의 길은 아니다. 그러한 경지는 오로지 갈애의 완전

한 소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갈애와 집착으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보시행은 불법(佛法)이 살아 있는 시대, 즉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시대에만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바로 그런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는 우리가 무언가를 베풀고자 한다면 곧 갈애를 뿌리

뽑으리라는 원력을 세우고 그리 해야 마땅하지 않으랴.

갈애가 끝날 때 고는 멈추어지고 그것이 곧 해탈일 터이기에!


이 법보시 공덕이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 나누어지이다.!

빨리 경전 속에 나타나는 보시


릴리 드 실바


빨리 경전의 가르침은 보시행을 훌륭한 덕행으로 기리고 있다. 실로 해탈을

 향한 수행 길은 보시를 시발점으로 한다. 부처님께서는 초심자들을 가르치

실 때면 으례 보시의 미덕(daanakathaa, Vin. 1, 15, 18)을 설명하시면서 당

신의 점진적인 설법을 시작하시곤 하셨다. 세 가지 복짓는 일 가운데서도

보시가 첫번째이며 다음으로 계율을 수지하는 것, 마음을 닦는 일로 순서가

 되어 있다. 이는 또한 부처가 완전하게 성취하는 십바라밀의 첫 번째이기

도 하다. 이런 까닭에 아라한이나 부처와 같은 해탈의 경지를 목표로 삼는

수행은 보시의 실천이 그 첫 걸음인 것이다.


보시의 기능


보시행은 삼독심(akusalamuula, 三毒心, 不善根)의 첫번째인 탐욕(lobha)을

 무찌르는 데 있어 최상의 무기인 까닭에 불자들의 마음 닦는 수행 과정에

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다. 중생들은 자기의 개성을 '나'라고 여기고

자신의 소유물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탐심은 이기심에 싸여

있다. 베푸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이기심을 녹여 내는 데 도움이 되며 또한

 이기심과 탐욕이라는 독성을 치유하는 해독제인 것이다.

데와따상유따(Devatasamyutta)[S.I,18]에서는 "탐욕의 때를 벗겨내고 보시

를 행하라"고, 법구경[Dhp. 223]에서는 "보시로 인색함을 이기라"고 권

고한다.


탐욕과 이기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 보시의 미덕을 베풀기는 어렵게 된다.

 데와따상유따[l. 20]에서 보시행을 하나의 투쟁과 같다고 한 것은 그런 이

유에서이다(daana~n ca yuddha~n ca samaanam aahu S.I, 20).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쓸모 있는 것을 남에게 베풀기로 마음먹기 이전

에 먼저 탐욕이라는 마장과 싸워야 한다. 메추리 비유경[M.I, 449:La.tukiko-

pama Sutta]은 정진력이 모자란 사람이 이미 몸에 붙인 습을 버리기가 얼마

나 어려운지를 설명하고 있다. 조그만 메추리는 하찮은 썩은 덩굴에 걸리기

만 해도 죽는 수가 있다. 비록 힘없는 썩은 덩굴이라도 그 조그만 새에게는

 엄청난 속박이 된다. 그러나 힘센 코끼리에게는 쇠사슬도 그다지 큰 힘을

못 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불행한데다 마음마저 나약한 사람은 비

록 낡아빠져 보잘것 없어진 소유물도 버리지 못하는 데 비해, 왕이라 해도

마음이 굳센 사람은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확신하면 왕국마저도

내놓을 수 있다.


탐욕만이 보시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과법이나 사후 세계에 관해

관심조차 없으며 또 아는 것이 없을 때도 베풀고 싶은 마음은 생겨나기 어

렵다. 보시행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위대한 덕행을 실천할 기회를 잡기 위해 잠시도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부

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보시의 가치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다면 단 한

 끼의 밥도 남들과 나누지 않고는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Itivuttaka, p.18).


보시하는 사람의 품성


경전(D.I.137:Kutadanta-Sutta)은 보시하는 사람들이 지니는 품성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신심이 확고한 사람으로서 계를 지켜 건전하게

 살아가는 생활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믿고 업의 인과 법칙에 예외가

없다는 것과 내생이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도덕적으

로 영적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물질주의자가 아

니며 불겧?승 삼보에 확신을 가지고 귀의한 사람이다. 그는 한낱 뭔가를

주는 자(daayako)에서 그치지 않고 주인답게 베푸는 자(daanapati)이다. 주

석서는 '주인답게 베푸는 자[施主, 檀越]'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다. "스스로는 맛난 것을 즐기면서 남에게는 맛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자

신이 베푸는 선물의 종이다. 자신이 즐겨하는 것과 같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는 선물의 친구쯤 된다. 자신은 아무것이나 되는 대로 만족하며 남에게

는 좋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가 곧 주인답게 베푸는 자이며 자신이 베푸는

 선물의 어른이요 주인이다"라고.


보시하는 사람은 또한 필요한 이들을 위해 늘 문을 열어놓고 있는 사람(anaa

vatadvaaro)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출가 수행자, 브라흐민, 의지할 데

 없는 사람, 길 떠난 이, 유랑인과 걸인들을 위해 샘터(opaanabhuuto)가 되어

 준다. 이와 같은 품성으로 온갖 공덕을 짓는 사람, 그가 곧 보시인인 것이

다. 그는 아낌없이 베푸는 자(muttacaago)이며 자기에게 돌아오는 복을 기꺼

이 나누어 주는 자(daanasamvibhaagarato)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는 자애로운 사람(vada~n~nuu)이며, 그는 언제라도 남들의 요구

에 응할 채비로 손을 닦은 사람(payataapa.ni)註1)이다. 그는 마음 놓고 부탁

할 수 있는 사람(yaacayogo)이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즐거

움으로 삼는 사람(vossaggarato)이며, 베푸는 일에 마음 쓰는 사람(caagaparibhaavitacitto)이다.

경전은 너그러운 보시인들의 품성을 이상과 같은 말들로 기리고 있다.


고매한 마음으로 베푸는 사람은 주기 전에도, 주면서도 그리고 주고 나서도

 기쁜 사람이다(A.III, 336). 베풀어 볼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보시하기

이전에 이미 즐거우며, 다른 이의 아쉬움을 충족시켜 기쁘게 해준다는 점에

서 주는 동안에도 즐겁고, 주고 나서는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여 만족한다

. 경전들은 소위 덕인(德人)이 되는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로 너그러움을

 꼽는다(A.IV, 220). 부처님께서는 바르게 모은 재산을 어려운 사람에게 베

푸는 이를 두 눈을 갖춘 사람으로, 모으기만 할 뿐 베풀지 않는 사람을 한

쪽 눈 밖에 없는 사람으로 비유하신다(A.I, 129-30). 숫따니빠따(102)에서

는 '베풀 줄 모르고 혼자만 부(富)를 즐기는 사람은 자기 무덤을 파는 사

람'이라고 말한다.


베풀어지는 것[施物]


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이면 다 시물이 될 수 있다. 닛데사(Niddesa,2,523)는

 보시하기에 적당한 열네 가지 품목들을 열거하고 있다. 즉 승복, 식사공양

, 머물 곳, 환자를 위한 약품과 기타 필수품, 먹을 것, 마실 것, 옷가지,

탈 것, 꽃줄, 향수, 침구, 집 그리고 등불이다.

처한 형편에 따라 베풀 수 있는 것이므로 보시를 실천하는 데 반드시 많은

것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원하는 이 있거든 작은 것에서라도 떼어 줄

 것이니'(Dhp.224), 또는 '작은 데서 내준 것이 천 배의 값이 있다'(S.I

,18)는 경전 말씀에서 보듯이 빈곤한 살림 속에서 베풀어진 보시가 더욱 값

진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보잘것 없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면

서도 바르게 살며, 분수에 맞게 가족을 부양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남

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낼 때 그의 보시는 천 번의 제사를 올리는 것보

다 더한 가치를 지닌다(S.I,19-20).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수단으로 모은 재

물로 베풀어진 공양을 크게 칭찬하신다(A.III,354:It.p.66:A.III,45-46).

이렇게 보시하는 재가 불자는 금생에나 오는 생에나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숫따니빠따 가운데 마가경(Maagha Sutta)에서 부처님께서는 '바른

수단으로 벌어 궁핍한 사람에게 후하게 베푸는' 마가를 매우 칭찬하신다.


비록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깊은 신심으로 베풀 때 보시는 복된 미래를 맞

게 한다. 위마나왓투(Khuddaka-Nikaaya 제6경)는 이와 같은 사례들을 많이

보여 준다. 아짜마다이까 위마나왓투(AAcaamaadayikaa vimaanavatthu)에 의하면 아짜마다이까 부인이 성스러운 아라한 가섭 존자(Maha-kassapa)에게 정성으로 베푼 한 줌의 쌀겨 공양 공덕으로 부인은 다음 생에서 아름다운 천상에 나게 되었다.


닥키나 위방카 경(Dakkhi.na vibhanga Sutta:중아함 180 구담미경)에서는

"보시하는 사람이 덕스러울 때 보시물은 베푸는 사람에 의하여 청정해진다

. 받는 사람이 덕이 있으면 받는 이에 의해서, 양쪽이 모두 덕스러울 때는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 의해 청정한 시물이 되며 만일 양쪽 모두 순수하

지 못하다면 부정한 보시가 된다"고 가르친다. 또한 법보시, 즉 불법을 널

리 보급시키는 일은 모든 보시를 능가하는 것이다(sabbadaanam dhammadaanam jinaati, Dhp.354).


앙구따라 니까야(A.IV,246)는 옛부터 성인들이 훌륭한 보시물이라고 존중해

 온 다섯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보시의 가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결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려깊은 출가 수행자들이나 브

라흐민들은 바로 이러한 보시를 가장 존중했다.

오계(五戒)를 철저히 지키는 것도 이 다섯 가지 위대한 보시 가운데 하나이

다. 오계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계행을 통해 모든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

애주며 자비와 은덕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행동을 바로 하여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고 겁내지 않도록 지켜 준다면 이는 세상에서 가장 고

결한 보시행일지니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유정들에게까지 그 덕이 미

칠 것이다.


보시받을 사람들


경전들은 또한 누구에게 보시물이 베풀어져야 마땅한지에 대해서도 설명하

고 있다(A.III,41). 집에 찾아 온  손님이나 여행자, 병든 이들을 친절하고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기근이 들면 마땅히 곤궁한 사람들에게 후덕하게 베

풀어야 한다. 새로 추수한 햇곡식은 제일 먼저 덕스러운 분들께 올려져야

한다.

경전에는 일반인들의 보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출가 수행자(sama.na), 브라흐민(braahma.na), 의지할 곳 없는 사람(kapa.na), 길손(addhika), 유랑인(va.nibbaka), 걸인(yaacaka)들이 나온다. 출가 수행자나  브라흐민들은 생업을 가지지 않는 종교인으로서 재가자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해 주고, 재가자들은 그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게 되어 있다. 없는 사람은 생존을 위해 넉넉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풍족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부유해진다. 교통 수단이나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던 시대에는 일반인들이 자진해서 길손들을 돕는 일에 나서야만 했었다. 이와 같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는 것이 바로 불교의 입장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앙구따라 니까야에서, 브라흐민들이 제사에서 쓰는 불(aggi)

을 비유로 들어 정성과 존경심으로 돌보아야 할 세 부류의 사람들을 설명하

신다.

첫째는 공경해야 할 불(ahuneyya-aggi)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잘 보살펴

드려야 할 부모님들을 가리킨다.

두 번째는 가장의 불(gahapati-aggi)로, 아내와 자녀들, 고용인 그 밖에

가장으로서 부양해야 될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공양해야 될 불(dakkhi.neyya-aggi)은 성위(聖位)註1)를

 이룬 아라한이나, 마음 속의 해로운 요소들을 닦아내기 위해 수행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마치 브라흐민 사제가 제사 의식에 쓸 불을 간수하듯이

정성스럽게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숫따니빠따의 마하 망갈라 경(Mahaa-mangala Sutta:Sn.262-63)에 따르면 재가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상서로운 일 가운데 하나는 친지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일이다.


한 번은 코살라 왕이 부처님께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

여쭌 적이 있다. 부처님께서 "베풀고 나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베풀

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다시 큰 공덕을 얻기 위해서 누구에게 베풀어야 되

는지를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질문을 두 가지로 구별하여 각각 대답해 주

셨다. 먼저 덕스러운 이에게 베푼 공양이 큰 결실을 맺는다고 답하시고, 이

어서 다섯 가지 장애(niivara.na)를 제거하고 지계(siila,持戒), 선정(samaadhi,

禪定), 지혜(pa~n~naa,智慧), 해탈(vimutti,解脫) 그리고 해탈지견(vimutti-~naa.na-dassana, 解脫知見)을 성취한 덕스러운 출가 수행자에게 베푼 공양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된다고 명백히 밝히셨다.


사까 상유타(Sakka-samyutta)에서 사까(Sakka,帝釋天) 역시 누구에게 베푼

 보시가 제일 공덕이 큰가를 부처님께 여쭙는다. 부처님께서는 승가(sangha

, 僧伽)에 베푸는 것이 가장 큰 결실을 맺는다고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말

씀하시는 승가란 '성위를 향하는 길(magga)에 들어섰거나, 사성위(四聖位)

 가운데 한 과(phala, 果)를 이미 성취하고 계겵쨦혜를 갖춘 바르고 고매한

 성자들의 집단'이라고 밝히셨다. 율장(Vinaya)에서 말하는 승가란 특정한

 의식, 의결 같은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승단을 대표하여 정족수 이상의 승

려들이 모여 이룬 집단을 뜻하지만 경전에서의 승가란 네 쌍의 성스러운 인

격체(cattaari purisayugaani), 즉 예류과를 향하게 된 수다원, 일래과를 향

하게 된 사다함, 불환과를 향하게 된 아나함, 불사의 경지를 향하게 된 아

라한의 길에 들어서거나 그 길에서 과를 성취한, 여덟 부류의 사람(a.t.tha

purisapuggalaa)들을 의미하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가 경(Maagha Sutta. Sn.P.86)은 공덕짓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에게 공양

을 올려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아라한의 덕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브라흐마나 상유따(Braahmana-samyutta)에서는 가장 큰 결실을 맞게 해줄

보시로 '전생을 아는 사람들, 천상과 지옥을 본 사람들, 더 이상 태어남을

 받지 않을 사람들 그리고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한 이에게 베풀었을 때'라

고 설명한다.

경전 속에 묘사되는 바와 같이 승가가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공양 받을 자격

을 갖춘 훌륭한 인격체들로 구성될 때 복을 거둘 수 있는 복전(福田)이 되

는 것이다. 마치 급수가 잘 되고 비옥한 땅에 뿌려진 씨앗이 많은 수확을

내듯이 성스러운 팔정도에 확고하게 들어선, 계행 청정한 이들에게 베푼 공

양은 훌륭한 결과를 낳는다(A.IV,238;I,162).

법구경(Dhp.356-59)에 의하면 "잡초에 덮여 못 쓰게 된 밭처럼 사람은 탐

욕(raaga)과 성냄(dosa), 어리석음(moha), 바람(iccha), 갈애(ta.nhaa)로 어

지럽혀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점들을 없앤 이들에게 베푼 보시는 큰 공덕

(mahaa-phala)을 낸다." 보시가 어떤 결실을 맺는가는 베풀어진 시물의 양

이나 질보다도 받는 사람이 어떤 자질을 갖춘 복전인가에 더 좌우된다.


부처님께서 웰라마(Velaama)라는 브라흐민으로 태어났을 때 행한 엄청난 보

시 이야기가 '앙구따라 니까야(A.IV, 392-95)'에 나온다. 보살은 누구든

지 원하는 사람에게는 음식, 음료, 의복은 말할 것도 없고 금, 은, 코끼리,

 소, 수레 따위까지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훌륭한 수혜자

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아낌없는 선심도 공덕을 쌓는 면에서는 별로 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베푼 웰라마의 엄청난 보시보다 정견(

正見)에 비추어 수다원(sotaapanna, 入流) 한 사람을 공양하는 공덕이 크고,

 백 명의 수다원보다 한 사람의 사다함(sakadaagaamin, 往來)을 공양함이 더

 낳은 것이다. 아나함(anaagaamin, 不來), 아라한(arahant, 應供), 벽지불(pa

ccekabuddha, 獨覺) 그리고 정등각불(sammaasambuddha, 正等覺佛)에게 하는

보시 공덕의 크기가 마찬가지로 비교될 수 있다. 부처님과 승가를 함께 공

양하는 것이 부처님 한 분만을 공양하는 공덕보다 크며 언제 어디서나 승가

가 사용할 절을 세우는 일은 큰 선행이 된다. 그러나 불겧?승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 훌륭하다. 오계를 지키는 삶은 더욱 더 값진 일이다

.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자비관을 닦아 자애심을 계발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가장 수승한 것은 우리를 열반으로 이끌어 줄 '무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계발하는 일이다.


보시의 동기


경전들은 보시를 실천하는 동기를 여러 가지로 기록해 놓았다. 앙구따라 니

까야(A.IV, 236)는 보시행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


1. 불편한 기분으로, 혹은 상대방의 비위를 거슬리려는, 혹은 모욕하려는

마음으로 준다(AAsajja daanam deti)註1).

2. 두려운 나머지 준다(Bhayaa danam deti).

3. 전에 받았던 것의 보답으로 준다(Adaasi me ti daanam deti).

4.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내게 주겠지' 생각하며 준다(Dassati me ti daanam deti).

5. 주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아서 준다(Saadhu daanan ti daanam deti).

6. "나는 밥을 지었는데 이 사람들은 밥을 하지 않았구나. 밥을 해 놓은

사람이 밥 없는 사람에게 주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 생각하며 준다.

그만큼 애타적인 동기로 베푸는 사람들이다(Aham pacaami, ime ne pacanti,

na arahaami pacanto apacantaanam adaatun ti daanam deti).

7. "이 공양을 올리면 덕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이 자자해지겠지" 생각해

서 준다(Imam me daanam dadato Kalyaa.no kittisaddo abbhuggacchatii ti daanam deti).

8. 자신의 마음을 가꾸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보시를 한다(Cittaalankaara- cittaparikkhaarattham daanam deti).


때로는 편애하는 마음(chanda)이나 악의(dosa) 또는 망상(moha)에 빠진 나

머지 보시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집안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공양이

 베풀어질 수도 있다. 또 사후에 천상에 태어나고자 하는 바람 역시 보시의

 동기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베

푸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므로 좋은 기분을 맛보자는 생각으로 베풀기도 한

다(A.IV,236).


그러나 경전(A.IV,62)에서는 그 무엇도 바라는 마음 없이 공양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구나 받는 사람에게 집착을 가지고 베풀어서는 안 된다

. 만일 나중에 쓸 것을 염두에 두고 공덕을 쌓아 두자는 생각이나 사후에

보시의 과보를 누리기를 바라며 베푼다면 이는 졸렬한 보시이다. 오직 보시

의 동기로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욕심과 이기심의 추한 때를 벗겨내고 마음

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겠다는 뜻이어야 한다.


보시하는 태도


경전(A.III,172,등)에서는 베푸는 태도를 아주 중요시 한다. 보시할 때는

시물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선의(善意)를 지닌

자세로 보시했느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따라서, 공손히 베풀어야 한다(Sakkaccam daanam deti): 받는 사람이 굴욕

감을 느끼거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베풀

어야 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남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으례 거북한 기분

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를 더욱 낭패스럽게 만들거나 이미 짖눌린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하지 않는 것이 주는 사람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또 신중하고 정중하게 베풀어야 한다(Cittikatvaa daanam deti): 주는 사람

이 기꺼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 자신이 느끼도록 해주

어야 한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보시할 때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는 서

로 간격이 없고 넉넉한 정이 솟아나게 되리라.

자기 손으로 직접 베풀어야 한다(Sahatthaa deti): 보시행을 할 때 스스로

직접 참여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이것은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 마

음의 다리를 놓아주며  그것이 곧 보시의 사회적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들

이 몸소 나서서 따뜻한 인정으로 덕을 베풀 때 이 사회는 서로 걱정해 주고

 돌봐주는 하나의 유기체로 융합될 것이다.

버리기에나 알맞을 것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Na apaviddham deti): 받는

사람에게 유용하고 합당한 것만을 베풀도록 주의해야 한다.

받는 사람이 다시 오고 싶지 않을 만큼 쌀쌀맞게 베풀어서도 안 된다(Na

anaagamanadi.t.thiko deti).


지극한 신심을 가지고 베푸는 행동(saddhaaya deti)은 경전 안에서 거듭 칭

송을 받고 있다. 특히 성직자에게 공양을 올릴 때는 그런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하며 겸손하게 공경하는 자세로 대접해야 하고 요긴하게 쓰일 수

있도록 적절한 시기에 베풀어야 한다(Kaalena deti). 때에 맞추어 베푼 보

시는 궁지에 처한 사람의 근심을 덜어주고 긴장감을 해소시켜 주므로 그 가

치는 아주 크다.

그리고 남들이 어려울 때 그저 돕는다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베풀며(Anuggahacitto daanam deti), 본인이나 받는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베푼다(Attaana~n ca para~n ca anupahacca daanam deti).


부처님께서는 사려깊게 베푸는 일을 권장하셨다(Viceyyadaanam sugatappasattham). 만약 그 시물이 받는 사람을 복되게 해준다면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만, 받는 이의 안녕을 저해하게 된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보시는 고매한 보시(sappurisadaana) 행위로 크게 권장할 만한 것이다. 무엇을 베푸는가보다는 어떻게 베푸는가가 보시의 가치를 결정짓는다. 크게 베풀만큼 넉넉지 못한 처지라 해도 베푸는 이의 태도에 따라 받는 사람이 세심한 배려를 받고 있다고 항상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시의 가치


경전을 보면 보시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공덕이 나온다.

보시는 사회 구성원들을 응집시키고 단결시키는 힘이 있다. 보시는 가진 자

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놓인 물질적 경제적 격차를 메꿔 준다기보다

는 심리적 단절을 이어 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보시가 자리잡을 때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Sn.187:Maagha Sutta). 마음이 너그

러운 이는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친한 사람이 많다(A.III,40). 베푸는

일은 또한 정을 돈독하게 해 준다(Sn.187).


어떤 사람이 보시한 후에 어느 특정한 곳에 나고자 발원하더라도 그의 소원

은 오직 계행이 청정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A.IV,239). 만일 어떤 사람

이 극히 얼마 안 되는 보시행과 계행을 실천했을 뿐, 선 수행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면, 다음 생에서 그는 인간계에 불행하게 태어난다. 또 상당한 정

도의 보시나 지계 등의 선행을 하지만 선 수행에 관한 이해가 없으면 인간

계의 복락을 누리는 데 그친다. 그리고 참선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어도

한없이 많은 보시행을 하고 계를 철저히 지킨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게 되며

, 그들은 수명과 미모, 복락과 명성 그리고 오관의 감각적 즐거움에서 다른

 신들을 능가한다(A.IV,241-43).


앙구따라 니까야에서는 보시를 베푼 결과 누리게 되는 세간적인 복덕으로

"인색하지 않고 후덕한 사람은 남들의 호감을 얻는다. 아라한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공양을 받고 그에게 제일 먼저 법을 가르쳐 준다.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이 퍼진다. 그는 어떠한 모임에도 자신감과 위엄을 가지고 참석할

 수 있다. 사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A.IV,79)는 점을 꼽는다. 다른 곳

에서는, 관대한 사람은 인망을 얻고 고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그와 어

울리며, 재가자의 도리를 다 한 것(gihidhammaa anapeto hoti)에 스스로

만족한다고 덧붙이고 있다(A.III,41).


음식물을 베푸는 것은 실상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과 활

력과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들 한다. 남에게 그와 같은 것을 베풀면 실은 자

기에게 베푸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A.III,42), '심은 대로 거둔다'(Yaadisam vapate biijam taadisam harate phalam.S.I,227)는 말이 간결하게 그 뜻을 잘 드러낸다.

신심으로 베푼 보시는 언제 그 결실을 맺게 되든지 재물과 아름다움을 성취

하게 하며, 그 위에 더 나아가 마땅히 공경할 사람에게 성의껏 공양을 올리

면, 공손하고 충실하며 사려깊은 자손과 아내, 부하와 아랫사람들을 얻게

된다.

때맞춰 베푼 공양으로는 커다란 부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온갖 필요한 것

들이 제때에 충족될 것이다.

오직 남을 돕겠다는 순수한 바람으로 베푼 보시는 막대한 부와 오관의 쾌락

을 맛볼 수 있는 건강한 체질을 가져다 준다.

자기와 남을 상하지 않고 행한 보시는 화재, 홍수, 도둑을 막아 주고 통치

자의 횡포나 원치 않는 사람이 상속자가 되어 일으키는 화근으로부터 안전

하게 보호해 준다(A.III,72).

성스러운 팔정도를 따르는 수행자들에게 베푼 공양은 마치 비옥하고 잘 손

질되었으며 물이 충분한 땅에 뿌려진 씨앗이 많은 수확을 내듯이 놀라운 과

보를 받게 한다(A.IV,238).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베풀어진 공양은 보시한 사람을 범천(brahma-loka)

에 나게 하고 그는 거기서 아나함 과를 성취하게 된다(A.IV,62).


닥키나 위방카에는 보시를 베풀 대상과 그로 인한 공덕이 순서대로 나열되

어 있다. 동물에게 베푼 것은 백 배의 보답을 가져온다. 행실이 변변치 못

한 보통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천 배의 보답을, 계행이 훌륭한 사람에게 베

푼 보시는 십만 배의 보답을 낸다. 불교에 귀의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감각

적 욕망을 떨쳐 버린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10억 배나 되는 과보를 내며 수

다원의 도(道)에 들어선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a

sankheyya, appameyya) 과보를 낸다. 하물며 수다원 과를 이미 성취한 사

람이나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벽지불 그리고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신 부

처님께 올린 보시야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M.III,255).


닥키나 위방카 경은 또한 승가에게 베풀어진 보시가 한 스님의 역량을 보고

 그 분 개인에게 주어진 보시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전은 또한 "먼 훗날, 계를 지킬 줄 모르고 사악한 성질을 하고도 정직의

 표시로 노랑 가사를 입은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설령 그와 같은 승려들에

게일지라도 승가에 대해 베푸는 것이 한 승려 개인(patipuggalika)의 역량

에 대해 베푸는 것보다 훨씬 공덕이 크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은 계행이 청정한 사람에게 베푼 보시는 크게 유익하지만 부도덕한 사람

에게 베푼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다른 경전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것은 후대에 첨가된 말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심지어 자기가 먹고 난 밥 그릇을 씻은 물이라도 "이 개숫물

 속에 있는 음식 찌꺼기가 땅에 사는 미물들의 먹을 거리가 되어지이다"

하고 후덕한 마음으로 버리면 그 또한 선행이 된다고 설하셨다. 그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에게 음식을 베푸는 일이야 얼마나 큰 공덕이겠는가? 그러나

이 경전은 계를 지키는 덕스러운 이에게 베푸는 공양이 더 유익한 것임을

잊지 않고 강조하고 있다(A.I,161).


또 다른 경전(A.III,336)은 여섯 가지 자질을 모두 구족한 보시는 복되기

이를 데 없어 그 공덕의 크기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가르친다. 이 가운데

 세 가지는 보시자의 자질에, 나머지 세 가지는 받는 사람의 자질에 속한다

.

주는 사람의 자질로 말하자면 보시를 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야 하며

, 주는 동안에도 즐겁고, 주고 난 다음에도 만족스러워야 한다. 베풀기 전

이나 베푸는 동안이나 그 후까지 욕심의 흔적이 조금도 없이 무언가를 베풀

 때 그 고결한 마음에 의해 행해진 보시물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것이 된다.

수혜자 또한 탐겵?치 삼독심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어야 하고 또는 이미

이와 같은 마음의 때를 닦아내기 위하여 수행 길에 들어선 사람이어야 한다

. 이와 같이 훌륭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 간에 주고 받는 보시는 그 공덕이

망망한 바다의 바닷물과 같아서 측량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율장 대품(律臧 大品; Mahaavagga:Vin. I,293-94)에 한 번은 부처님께서

위사카 부인에게 큰 보시행을 함으로써 어떤 이로움을 얻었는가를 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때 위사카 부인은 자신은 다음과 같은 바람으로 아낌없이 보시한다고 지

혜롭게 대답했다.

"어떤 비구 스님, 비구니 스님이 출가 수행자의 성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성취했다는 소문을 듣게 될 때 저는 그 분께서 사왓티에 머문 적이 있다면

제가 항상 올렸던 공양을 분명히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공양

이 그 스님께서 성위를 성취하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

각될 때 마음 속에 큰 기쁨(paamujja)이 일고 기쁜 마음에서 다시 환희심(piiti)이 솟아납니다. 마음이 환희심으로 가득 찰 때 몸이 편안해지며(kaayo passambhissati), 몸이 편안하면 행복(sukha)한 느낌이 생기고 이 행복감은 선정에 들도록 도와줍니다(cittam samaadhiyissati). 이것은 다시 오근(indriyabhaavanaa, 五根)註1), 오력(balabhaavanaa, 五力)註2), 칠각지(bojjhangabhaavanaa, 七覺支)註1)를 계발케 합니다. 제가 아낌없이 보시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로움(aanisamsa)은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위사카 부인의 훌륭한 대답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며 그녀가 승가에 올리고자 하는 여덟 가지 보시를 쾌히 허락하셨다(Saadha saadhu, Visaakhe saadhu kho tvam Visaakhe!… Anujaanaami te, Visaakhe attha varanii ti).


그러나 보시행 한 가지만으로는 생사고를 끝내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부처님께서 으뜸가는 보시자라고 하셨던 아나타삔디까는

수다원 과를 얻었을 뿐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철저한 계행이 수반될 때 보

시행은 좋은 과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비록 아나타삔디까가 나무랄 데

없는 덕을 실천했지만 그가 정신적인 수행(bhaavanaa)을 했다는 이야기는 어

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엄청난 보시행을 했건만 수다원 과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띠까라 경(Gha.tiikaara Sutta, M.II 52)은 보시자가 자리에 없었으면서도

이루어졌던 특이한 보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옹기장이 가띠까라는 까싸빠(Kassapa) 부처님의 으뜸가는 후원자였다. 그는

 늙고 앞 못 보는 부모님을 봉양하느라 출가는 하지 않았으나 이미 아나함

이 되어 있었으며 고결한 행실과 장한 신심으로 까싸빠 부처님의 신망을 받

고 있었다. 어느 날 까싸빠 부처님께서 그의 집에 탁발을 가셨으나 마침 그

는 출타 중이었다. 아들이 어디 갔는지를 묻는 부처님께 일이 있어 나갔음

을 알리고 그 부모님들은 그릇 속에 있는 음식들을 얼마든지 드시라고 말씀

드렸다. 밖에서 돌아와 부모님들로부터 그날 일어난 일을 듣고 난 가띠까라

는 부처님께서 자기가 있었다면 당연히 보시했을 것이라고 믿으실 정도로

자신을 신뢰하고 계신 것을 알고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의 기쁨과 행복

감은 보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의 부모님들의 기쁨과 행복감 또한 이레

동안이나 줄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카사빠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사원의 지붕이 새기 시작했다. 새

기 시작하는 지붕에 덮을 짚을 구하려고 까싸빠 부처님이 몇몇 비구들을 가

띠까라에게 보냈는데 그날도 그는 집에 있지 않았다. 비구들은 빈손으로 돌

아와 지붕에 얹은 짚단 밖에는 덮을 것이 없었다고 말하자 부처님은 그것이

라도 가져오라고 이르셨다. 지붕을 벗겨내는 비구들에게 가띠까라의 노부모

님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사정을 알고 난 그 부모님들은 '모두 가져 가십

시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가띠까라는 부처님께서 그토록 자신을 신뢰하고 계신 것

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난 그 기쁨과 행복감은 보름 동안

이나 지속되었고 부모님들의 기쁨과 행복 또한 이레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

았다. 석 달 동안이나 가띠까라의 집은 지붕도 없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

지만 빗물이 그 집을 적시지 않았다고 한다. 가띠까라의 장한 신심과 너그

러움은 이와 같았다.


이 글의 초두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보시는 모든 선행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다. 그것은 또한 다른 이들을 자애롭게 대하는 네 가지 길(cattaari sangaha-

vatthuuni, A.IV,219, 四攝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탈을 위

한 깨달음의 설흔일곱 가지 요건(bodhipakkhiyaa dhammaa : 三十七 助道品)

가운데 보시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어떤 경(M.III.99 등)에

서는 훌륭한 사람의 특성으로 신심(saddha), 지계(siila), 박학(suta), 관대

함(caaga), 지혜(pa~n~na)의 다섯 가지를 드는데 이런 경우 '다나(daana)'라

는 말 대신 '짜-가(caaga)'가 쓰인다. 준다는 뜻의 보시(daana,√daa)와 소

유물을 놓아버림(caga,√tyaj)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보시

가 실제로 주는 행위라면 놓아버림은 거듭되는 보시행으로 마음 속에 깊이

배어든 이기심 없이 베푸는 자세를 의미한다. 짜-가(caaga:Sk, tyaga)의

원 뜻은 버림, 포기이며 자기 소유물을 인색하게 꽉 움켜쥐었던 손이 놓아

버림으로 해서 풀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보시행은 때로 편애, 악의,

두려움, 미혹, 명예욕 따위의 불순한 동기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짜-가(caaga)는 이기심 없이 놓아버리려는 순수한 덕성이다.


불교는 점진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비워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

선 물질적인 소유물을 내주는 것으로 첫 걸음을 삼는다. 점차 마음 속에 베

푸는 성품이 자리잡고 또한 그러한 성품이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깊은

 이해로 인해 힘을 얻게 될 때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의 미망으로부터 깨어

나게 된다(nibbindati).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어떤 사람은 재가자의 생활

을 청산하고 출가의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다음은 감관을 잘 제어함으로써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유혹들을 비워낸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깊이 들어

앉은 번뇌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고결한 자질들로 채운다. 그러나 부정적

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이 모든 과정은 보시의 실천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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