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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보시(2)

마음에서 우러난 보시


M.O'C. 월슈


어떤 사람들은 베푸는 일이 극히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남에게 주면 즐겁고

 주지 못하면 불편해 한다. 혹 분별없이 베푼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건전하

고 가치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은 모름지기 모든 종교가 인정하는

바로서, 기독교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이슬람교에서는 가진 재산의 일부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역

설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일부 사람들을 종종 곤혹스럽게 하는 부

분, 즉 승가에 베푸는 보시 문제를 숨김없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재

가 불자들이 자주 듣고 직접 외우기도 하는 독송 구절 가운데 승가는 '세

상을 위한 무상(無上)의 복전(福田)'(anuttaram pu~n~nakkhettam lokassa)이

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승가에 보시함으로써 얻는 공덕은 어디에도 비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독송을 듣거나 직접 외우는 재가 불자들이

모두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뜻을 이해하

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히 서양 불자들이나 불교에 공감하는 정도의 사람

들은 승가가 세상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복밭이라는 귀절에 대해 그 표현이

 너무나 속 들여다 보인다거나, 지나치다고 여겨 반발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 사실 성장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루터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면 마틴 루

터가 비난한 카톨릭 교회내 악습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 머릿속에 '선행'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으례 안일에 빠

져 타락한 사제와 수사들을 먹여살리거나 그와 관련된 일들 뿐이었다.


따라서 일부 서구인들이 무상(無上)의 복전이라는 표현에 반발할 만도 하지

만 타당한 설명을 해줌으로써 바로잡아질 수 있다. 그리고 승가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법대로 수행하는 집단이라고 분명히 이해된다면 그런 오해

는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전통적인 불교 교단은 비구, 비구니, 그리

고 남녀 재가 불자를 합하여 모두 네 부류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다. 비록

남방 불교국에 있던 원래의 비구니 승가는 사라졌지만 출가의 길을 택하여

사실상 비구니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으며 그들의 숫자는 앞으로 계속 늘

어날 것이 확실하다.

출가 수행자들과 재가 불자들 간의 관계는 하나의 공생 관계이다. 결국 승

가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시물(施物)인 불법을 간직하고 있다. 경전에 "법

을 보시하는 것이 그 어떤 선물보다도 낫다"고 한 말씀이 그것을 나타낸다

(Dhp.354). 승가의 구성원인 스님들은 당연히 계에 맞춰 생활하고 깨달음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렇게 함으로써 승가는 스스

로 '무상의 복전'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며, 만일 이러한 책임을 다 하

지 못한다면 그들 스스로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후원하는 재가 불자들까지

 망치는 꼴이 될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비구나

비구니는 스스로 승가를 떠나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반드시 떠나지 않으

면 안 된다. 재가 신자들이 베푼 시물을 적어도 일부분이나마 함부로 쓴 행

위의 과보로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경에 의하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다. 그

런데 유태교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네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

고 하는 실로 행하기 어려운 계명을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 불교의 자비관(

mettaa-bhaavanaa) 수행은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

주는 것이 더 복된 일' 이라는 성경 구절에도 불교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 좋은 것을 받는

다면 불교에서는 이전에 지은 선업에 따라 과보(vipaaka)를 받는 것으로 풀

이한다. 그것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좋으나 선업이 다 하면 공덕도 다 하고

만다. 그러나 주는 일은 어디까지나 선한 행위, 즉 선업(kusala-kamma)이며

 그것은 베푸는 이에게 가져다 줄 행복한 과보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

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확실히 복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복'은 순전히 현세적이며 '세상살이를 위한 복짓기'로 제한되

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위는 습관이 되는 것이어서 한 번 주고 나면 다시 또

 주고 싶은 마음을 일으켜 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 쌓이게 된다. 또한 이러

한 선행은 다시 다른 선행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보시(daana)가 십바

라밀의 첫번째로서 지계(siila)보다도 앞에 오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계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마음이 후 할 수는 있는 것이다.


故 I.B.Horner 여사가 십바라밀을 설명하기 위해 열 가지 자따까 이야기를

발췌하여 엮은 책이 있다(이 소책자는 기초 빨리어 교재로도 널리 사용된다

). 그녀는 이 책에서 보시 바라밀 설명을 위해 토끼가 자기 몸을 먹이로 내

던진 감동적인 이야기(Jaataka No.316)를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시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 가운데서 서구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

는 본생담의 맨 끝에 나오는 웨싼따라 자따까(No.547)로, 거기서 보살은 모

든 것을 주어버리고 결국에는 아내와 자녀들까지 내주고 만다. 이 이야기의

 윤리성을 의심쩍게 생각할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태국에서는 언제나 이

 이야기를 재가 불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특별히 읽어 주거나 설법의 주제로

 삼곤한다.


보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주는 것 그 자체를 즐거움으로 삼는데, 만일 이러한 보시가 지혜와 조화를

이룬다면 실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주기는 주되 마지못해 주는 사람

들도 있으며 그런 사람들은 좀체로 '미안하지만', '감사합니다', '죄

송합니다'와 같은 말을 하지 못하는 유형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가슴을 활

짝 열 수 있도록 사무량심 가운데 자비관(mettaa-karu.naa-bhaavanaa)을 수행하면 이로울 것이다.


최근 들어 우리는 영국에서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난 보시의 한 훌륭한 사

례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보시를 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어

디에서 나왔는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디오피아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참상에 크게 자극받은 록 스타 봅 겔다프가 엄청난 국제 규모의

구호금 모금 생방송 콘서트를 기획, 수백만 파운드의 기금을 모았다. 그의

무대는 현대 전문기술의 도움을 얻어 음악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

음은 물론이고 정치와 종교 사이의 벽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록 음악

중독증에 걸린 팬들과 록을 싫어하는 사람들 간의 심연마저 건너 뛴, 역사

상 가장 장엄한 보시 행사였다.


보시의 실천 역시 신중한 태도로 행해져야 하며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중

도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원하거나 또는 원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다

주는 일이 아이들을 키우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과 같다. 요즘의 풍조로

꽤나 성행하고 있는 이론과는 반대로, 버릇없는 아이의 기를 가끔 꺽어놓는

 것도 해롭지만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무언가 보답을 바

라고 행하는 보시 역시 비록 그것이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소망이라 할지라

도 결코 최상의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식의 보시는 근본적으로 집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어서 업을 면하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행하는 보시가 집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보시자에게 돌아가는 진정한 이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웨싼따라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우리 서구인들은 보살이 희

생시킨 그 아내와 가족의 불행에 생각을 돌리게 된다(비록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이고 행복하게 끝나긴 했지만). 그러나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내와 자식들 역시 집착의 대상이며, 따라서 어차피 놓아야만 할 것

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웨싼따라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

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원래 부처님으로부터 나온 이야기가 아니고 불

교적 규범을 마련하기 위해 전래 설화를 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가 보시에 관해 생각을 기울여 볼수록 보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측면이

 나타나게 되고 보시행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슬기로운 방법 혹은 그렇지 못

한 방법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소위 공덕을 제대로 거두지 못한 보

시행과 관련하여, 경전 속의 재미있는 일화를 예로 들면서 끝을 맺을까 한

다.

빠야시 경(Paayaasi Sutta, Diigha Nikaaya No.23; 장아함 7, 패숙경)은 꾸마라

 까싸빠(Kumaara Kassapa) 스님과 내세를 믿지 않는 빠야시 왕자와의 대화를

 담고 있다. 왕자는 스님으로부터 재미있는 여러 비유담을 듣고서 마침내

자신의 개종을 선언하고 수행자와 브라흐민, 나그네, 거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기로 결심한다. 그는 젊은 브라흐민 웃따라(Uttara)

로 하여금 보시물들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註1) 그러나 나누어 주는 음식과

 옷가지가 너무 형편없는 것이어서 왕자 자신은 손도 대지 않을 것들이라고

 웃따라가 불평하자 빠야시는 마침내 자신이 먹고 입는 음식이나 옷과 같은

 정도의 것을 나누어 주라고 허락했다. 경전의 끝에 이 두 사람이 받은 과

보가 나오는데 인색하게 베푼 빠야시는 천계에 태어나긴 했으나 그 중 가장

 낮은 사천왕(四天王) 세계의 텅빈 세리사까궁(Seriisaka-vimaana)에 살게 되

었다. 낮은 천계에 가서 낮잠을 자는 버릇이 있는 가왐빠띠(Gavampati) 존

자가 어느 날 그곳에 들른 적이 있는데 그 덕분에 이 이야기가 땅으로 전해

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보시물을 다시 꾸려 마음에서 우러난 보시

를 행한 웃따라는 더 높은 삼십삼천(Taavatimsa-devaloka, 도리천)에 태어

났다.


아마 삼십삼천에 태어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보시행을 할 서구인들은 별로

 없을 듯 싶다. 대개는 불편한 양심을 달래기 위해 한다는 편이 옳을 것이

다. 이디오피아를 위한 자선행사의 경우처럼, 무언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

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불편해서 견딜 수 없기에 보

시행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베푸는 것은 하늘에 나기 위해서 주는 것보다

는 분명히 나은 것이겠지만 그런 식으로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안이한 태도일 수도 있다. 보시하는 그 자체가 보람인 것, 그것

이 최상의 보시이다.


보시는 속마음의 표시다


니나 봔 고르콤


큰 꽃 더미에서 많은 꽃 목걸이 만들어내듯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많은 선행 해야 되리라.

(법구경, 53)


쓸모있는 물건이나 좋아하는 것들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덕스러운 행

동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관심을 기울

인다면 우리 자신이 참으로 덕스러운 존재인지 아닌지를 알기 어렵다. 행동

을 하도록 만드는 속마음을 우리는 좀 더 들여다 봐야 한다. 진정으로 덕스

럽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베푸는 동안에 우리의 생각이 마냥 착하거

나 고결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베풀고자 하는 우리의 동기가 그저 순수

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보답을 바라거나, 받는 사람의 호감

을 사려고, 또는 후덕한 사람이라고 알려지기를 기대하는 따위의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베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 생각이 일어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가운데 참으로 너그러울 때가 있는가 하면

다른 속셈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변함없이 지속되는 마음이나 영혼이 주체가 되어 갖가지 경

험을 해나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 자

체가 서로 다른 의식의 순간들이며 그 의식들은 한 순간 일어났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순간의 의식들은 바로 다

음 순간의 의식으로 이어진다. 삶이란 이와 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순

간적인 의식의 연속인 것이다.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의식을

 점점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의식에는 불건전한 또는 미숙한 의식(akusala-

citta)이 있고, 건전한 또는 성숙한 의식(kusala-citta)이 있으며, 건전하

지도 불건전하지도 않은, 비선비악(非善非惡;ahetuka, avyaakata)의 의식이

있다. 한 순간에는 오직 하나의 의식만이 일어나지만 낱낱의 의식에는 몇

가지 정신적 요소들이 따라온다. 불선한 즉 건전치 못한 의식은 집착, 인색

함, 시기, 미움 등의 건전치 못한 요소들을 수반하며, 이와는 반대로 선한,

 성숙된 의식은 베풂, 친절, 연민과 같은 아름다운 정신적 요소들을 수반한다.


특히 건전치 못한 정신적 요소들 가운데 집착(lobha,貪), 미움(dosa, 瞋),

무지(moha, 痴) 세 가지는 악의 근본(akusala-muula)註1)이며, 불건전한 의

식의 뿌리이다.


이들 불건전한 요소들은 가지각색으로 차이가 심하다. 가령 우리가 어떤 음

식을 탐하거나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갖고 싶어할 때는 마음 속에 탐욕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치나 음악을 즐길 때에도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집착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다. 사회

생활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가벼운 집착은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건전'은 우리가 일

상적으로 쓰는 '부도덕'이라는 말보다 훨씬 범위가 넓은 것으로 그것은

흔히 부도덕하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는 것들도 포함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거

기에는 그럴 만한 조건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행을 통해 건전하고 건전치 못한 요소들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아주 미세한 집착에도 이기심은 어느만큼 살아 있다. 따라서 이런 불

건전한 의식은, 자신의 즐거움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을 때 너그러움을

수반하면서 일어나는 사심 없는 의식들과는 다른 것이다. 일어서고, 움직이

고, 다가가고, 먹고 자고 하는 모든 행위를 하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항

상 집착심이 들어 있다. 자신에 마음을 쓰고 자신에게 달가운 것을 손에 넣

으려고 든다. 또는 남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를 기대하는 심정,

그 역시 집착의 한 모습인 것이다.


때로 우리는 친척들에 대해 가지는 집착은 건전한 것일까 아닐까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건전치 못한 것으로 순수한 자애심과는 다르다.

친척이나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데서 생기는 기꺼운 감정에 매달릴 때 우리

는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염려해 줄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생각치 않게 된다. 그런 때가 바로 건전한 의식이 일어나는 순

간이다. 집착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아마 사심 없는 사랑과 집착

이 일어나는 순간의 차이를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들 각기 다른 종류의 의식들은 아주 빠르게 다음 것으로 바뀌기 때문에 우

리가 그것을 바로 이해하는 능력을 계발하지 못하는 한, 의식의 자리바꿈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미움 역시 정도에 따라 차이가 매우 심하다. 그것은 가벼운 불쾌감으로 드

러날 수도 있고 혹은 분노나 증오로 거칠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혐오

감과 집착이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집착이 있을 때 의식은 그 순간 경

험하고 있는 대상을 좋아하고, 혐오감이 있을 때는 그 대상을 싫어하게 된

다. 집착이나 혐오감은 각각 그것과 관련된 특정한 형태의 의식과 함께 일

어나게 마련이며 아무 의식이나 다 함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무지(moha)는 불선근(不善根)의 하나로 모든 형태의 건전치 못한[不善] 의

식과 함께 일어난다. 따라서 모든 악의 근원(muula)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

지는 어떤 것이 선(善)하고 불선(不善)한 것인지를 가리지 못하며 사물의

실상(實相)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집착과 미움이 일어난 마음 속에는 무지

가 항상 함께 있다.

세 가지 선근(kusala-muula; 善根)으로는 탐욕 없음(abobha; 無慾)), 성내

지 않음(adosa; 無에), 지혜로움(amoha; 智慧))이 있다. 하나하나의 선한

 의식은 이들 세 가지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선근들도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탐욕 없음이나 성

내지 않음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선한 의식이 일어날 수 없어 보시행을 하

고자 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못한다. 집착하는 마음과 후하게 베푸는 마음은

 공존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너그러울 때 그는 평등하게 베풀며

따라서 그 베풂을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가족에게만 제한시키지

않는다. 결국 모든 선량한 행위(kusalata, 善)가 지향하는 바는 마음의 때

를 닦아내고 이기심을 없애는 데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관념에 매달리는 버릇을 근절시킬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셨다. 그러나 우리가 인색함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소유물에 매달

리기만 한다면 자아에 대한 집착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후한 베풂은 자신에게 이롭고 이기심이나 인색함은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되

면 우리는 베풀 기회를 더 많이 만들고 싶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불선(不善)한 의식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실망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 불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장본인

인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집착과 미움과 무지로 가득

찬 삶을 살아 왔으며, 어쩌면 그것은 여러 전생에 걸쳐 그러했을 지도 모른

다. 그러한 성향들이 축적되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과거는 이미 사

라져 버렸지만 그렇게 쌓인 해로운 성향들은 현재에도 불선한 의식들을 생

겨나게끔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쁜 성향만을 쌓아 온 것은 아니다. 선량한 성향들도 함께

축적해 왔다. 지금 우리 마음에 후덕함이나 자비심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불선한 의식이 일어날 때 불선을 더 쌓게 되고, 선한 의식이

일어날 때 선을 더 쌓게 되어 있다.


부처님께서는 선행을 계발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니, 우리가

그것을 배워 몸에 익힌다면 더 많은 선행을 쌓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는

셈이다. 우리는 주는 동안 뿐만 아니라 주려고 마음먹은 것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주고 난 다음 그것을 돌이켜 보면서까지도 보시의 기회를 가지게 된

다. 우리는 베푸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불선(不善)한 의식이 끼어들어 보시

의 소중한 기회를 망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기

만 하다면 말이다. 가령 선물을 사거나 장만하는 동안에 귀찮아지고 이내

싫은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또 베풀어 주는 동안에 받는 사람이 고마워

하지 않거나 기대한 만큼의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실망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실로 선행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정견을 가진다면, 우리

는 선한 마음 상태[善意]를 계발해 나가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뿐, 다른 사

람들의 반응 따위는 염두에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선은 바로 선 자체이며

, 그 누구도 그렇게 일어나는 건전한 의식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부처

님의 가르침을 몰랐을 때에는 보시행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못했고 순

간순간 일어나는 의식의 내용들에 대해 주의해 보지도 않았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 실제

로 보면 선의를 가지고 베풀고 나서도 나중에 그것을 돌이켜 보면서 불선한

 의식으로 망치는 수가 있다. 처음에는 후하게 보시를 베풀고 나서도 후에

그것이 너무 비쌌다고 깨닫거나 돈 쓴 것이 아깝다고 후회할 수도 있다.


부처님께서는 연달아 일어나는 가지각색의 의식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떤

자아(自我)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셨다. 그 의식들은 다만 생겨날

 만한 인연이 마련됨으로 해서 일어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의식들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우리가 쌓아 온 성향들

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사물의 참모습을 보다 잘 알아보게

되며 이러한 바른 이해가 또한 선(善)인 것이다. 인색한 성향을 축적해 온

사람이 보시행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

게 되면 이런 성벽 역시 바뀌어질 수 있다.


수다보자나 자따까(Sudhabhojana Jaataka, J.No.535)의 주석서에서 우리는

부처님 당시에 최대의 보시행을 한 어떤 스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탁발한 음식을 남에게 주었고, 두 손에 담길 만큼의 마실 것만 얻

어도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러나 과거생에 그는 '뾰죽한 풀잎 끝에 찍힐

만큼의 기름 한 방울도 줄줄 모르는' 인색한 사람이었다.

어느 전생에 그는 꼬시아(Kosiya)라는 이름의 구두쇠였다. 어느 날 그는 쌀

죽이 먹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남편만 먹을 것이 아니라 온 바라나

시 사람들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죽을 준비하겠다는 말에 그는 마치 '몽

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부인이 점점 그 수를 줄여 한 골목

가득 찰 만큼의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다시 온 식솔들과 함께 먹을 만큼만,

 그리고 결국에는 둘이만 먹자고 말해 보았으나 꼬시아는 다 거절했다. 그

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숲속에서 혼자 끓여 먹을 심산이었다.

이 때 제석천(Sakka)이었던 보살은 그를 개심시키기 위해 브라흐민으로 가

장한 네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내려오셨다. 한 사람씩 구두쇠 앞으로 다

가가 죽을 나누어 달라고 청했다. 나누어 먹기를 거부하는 꼬시아에게 제석

천은 보시를 찬양하는 게송을 읊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베풀어 보라.

아무것도 주지 않는 데는

아무 말, 할 말 없구나.

꼬시아,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그대 지닌 것으로 공양 베풀라.

혼자 먹지 말라.

홀로 앉아 드는 사람

복 받는 법 없으리.

자비로운 보시행으로

성스러운 길을 따라오르라.


꼬시아가 마지못해 다섯 불청객에게 죽을 조금씩 나누어 주고 자리에 앉자

마자 그 중 한 브라흐민이 개로 변하더니 그들 앞에서 오줌을 누었다. 꼬시

아가 손등에 묻은 오줌을 닦으러 강으로 내려간 사이에 그 개는 다시 아직

도 많이 남아 있는 죽그릇을 오줌으로 채워 버렸다. 화가 난 꼬시아가 막대

기를 들어 때리려 들자 개는 다시 커다란 말로 변하여 그를 뒤쫓았다. 제석

천은 수행원들과 함께 공중에 떠올라 선 채로 꼬시아를 가르치고 불행한 내

세를 경고했다. 인색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이해하게 된 그는 전 재

산을 나누어 주고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


재물을 내놓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목숨이 다 해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도 없는 것이 재산이다. 인생은 짧다. 그 짧은 한 평생, 기회 있

을 때마다 너그럽게 베푸는 일로 이기심을 물리치도록 해야 한다. 현재 보

시하는 마음 그 하나하나가 미래에 또 다른 보시행을 일으키는 인연이 된다.


선행은 좋은 결과를 낳고 악행은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업의

법칙, 즉 인과법이다註1) 한 생에서의 행위(Kamma, 業)는 다시 태어남을 통

해 그 과보를 낳을 수도 있다. 선행은 복된 내세를 만들고 악행은 불행한

내세를 불러온다. 인간계 외에도 다른 세계들이 있어 행복을 누리는가 하면

 비참을 겪기도 한다.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은 선업으로 인해 좋

게 환생한 경우이다. 그리고 지옥에 나거나 아귀,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은

악업으로 인해 나쁘게 환생한 것이다. 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관을 통해

 느끼는 즐겁거나 불쾌한 경험으로 과보를 맺을 수도 있다. 보거나 듣는 것

은 결국 의식의 형태인데 이것들은 업의 결과이다. 우리는 즐겁거나 불쾌한

 대상들을 보거나 듣는데, 이 때 즐겁다거나 불쾌하다는 경험은 업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인색함의 과보는 금생이나 내생에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인 재물의 손실로

나타난다. 베푸는 행위는 재물이 늘어나는 행복한 결과를 불러온다. 그렇다

고 보시행을 하면서 어떤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 또한 집착으로,

 집착은 해롭기 때문이다. 결과에 대해 관심을 두거나 두지 않거나 간에 행

위는 거기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한다. 보시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집착하

는 마음 없이 행위와 그 과보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선(善)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면서 선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미 말했듯이 지

혜(pa~n~na)는 선근(善根)으로써 그것은 건전한 의식과 함께 일어날 수도 있

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지혜가 건전한 의식과 함께 일어날 때는 선행

의 질이 높아진다. 그러나 우리 마음대로 지혜를 일으킬 수는 없다. 그것은

 그럴 만한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는 것은 더욱 폭 넓은 이해의 바탕이 된다.

설사 우리가 남에게 베풀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라도 보시의 방법

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주위 사람들이 행하는 선행을 이해하고 찬탄

하는 것도 일종의 보시행이다. 사람은 누군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그 행위의 진가를 인정하고 지지와 찬사를 보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소유물을 가지고 인색하게 굴듯이 남을 칭찬하는 일에도 인색하기가 쉽다.

우리는 차츰 다른 이들의 선행을 제대로 평가해 주는 면에서도 후하게 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필자 역시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바로 그와 같은 보시행을 태국에 있

을 때 알게 되었다. 태국에서 나는 시리낏(Sirikit) 왕비의 생일을 기념해

발간한 책 한 권을 받게 되었는데 그 책은 불교를 육성하고 사원을 후원하

는 한편 갖가지 개발사업을 기획하여 지방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높인 왕비

의 공적을 여러모로 기리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것을 읽으면 진심으로 그녀

의 공적을 찬탄하고 기뻐하게 되어 있었다.

또 태국에서는 사람들이 합장한 채 머리를 숙이며 '아누모다나'(anumodana)

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아누모다나'는 고맙다는 말로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존중하고 인정할 때, 흔히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책을 보시하는 것을 볼 때 하는 말이다. 그

런 경우에 그 선행을 높게 평가한다는 뜻을 표현하는 것은 좋은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보시행이 이렇게도 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관해

말할 때 선량한 마음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선근을 기르는 데는 긴 안목이 필요하다. 선행이건 악행이건 지금하는 모든

 행위들이 쌓여서 미래에 또는 내생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처한

주변 환경이나 또는 친구들을 더 정확하게 평가하게 되고, 그런 환경이나

친구들이 선근을 키우는 데 알맞은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삼가해야 될 말이 무엇이고 앞으로 더 함께 나눌만한 이야기가 무엇인

지 분명하게 된다. 사람들은 으례 남의 허물이나 들추고 쓸데없는 잡담이나

 늘어놓기가 일쑤여서 선근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람은 항상

남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어 있는 만큼 남들과의 대화를 어떻게 하면 선행을

 위한 기회로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보시행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신의 선행을 남과 더불

어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지은 선행의 좋은 과보를 다른 사람들이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중생들은 제가 지은 업의 '상속자'라고 부

처님께서는 가르치셨다. 우리는 저마다 제가 지은 행위의 결과를 받을 뿐이

다. 다만 선행을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는 의미는 그들이 우리의 선행을 보

고 기뻐할 때 우리의 선행이 그들 마음 속에 선한 의식을 일으키는 인연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심지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들과도 우

리의 선행을 나눌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덕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있

다면!


띠로꿋다 숫따(Tirokudda Sutta, Khuddaka-Nikaaya, I,p.6)註1) 주석서는 다

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한 번은 빔비사라(Bimbisara) 왕이 부처

님께 공양을 올리고 그 공덕을 다른 중생들에게 회향하는 것을 깜빡 잊었다

. 회향을 고대했다가 수포로 돌아간 전생의 친척 고혼들은 몹시 낙담한 나

머지 밤새도록 끔찍한 비명소리를 질렀다. 이와 같은 상황을 알려 주시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빔비사라 왕은 공양을 새로 올리고 나서 "이 공양

공덕이 그 친척들에게 돌아가지이다"라고 회향했다. 고혼들은 그의 보시

덕으로 즉시 선의를 품게 되고, 그들이 겪는 고통도 경감되었다. 연꽃으로

덮힌 연못들이 그들을 위해 생겨났으며,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몸을 씻자

 이내 금빛으로 빛나게 되었다. 천상에는 곧 바로 그들을 위한 음식, 옷가

지, 집들이 생겨났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선행을 이미 고혼이 된 이들과

나눌 수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만일 돌아가신 친척들이 그 공덕을 받을

수 없다면 다른 중생들이라도 받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때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떻게 선근을

계발할 수 있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픔과

 미움으로 가슴을 채우기보다는 우리의 선행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선행의 공덕을 돌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들

의 의식 또한 건전한 쪽으로 전환될 것이며, 마침내는 남들과 선행을 나누

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 누구에게 회향할 것인가를 정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불교에는 음식물이나 승복을 공양하고 나서 스님들이 축원 염불을 하는 동

안 시주들은 그 공덕을 남들과 함께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손에 물을

따르는 관행이 있다. 이 물은 바다를 채우는 강의 상징으로 선행의 공덕 또

한 남들과 나눌 수 있을 만큼 크고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행은 덕을 높이는 보시행과 도덕성을 높이는 지계(持戒)와 정신적 향상을

 도모하는 수행, 세 부분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엄밀하게 구

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를 지키거나 악행을 삼가하는 것이 경우에 따

라서는 관대함으로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로도 보일 수 있

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행을 삼가할 때 결국 우리는 남들이 안전하고 평화

롭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베푸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덕스러움을 키우고 싶

다면 우리는 선한 마음을 계발하는 정신적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덕스러움이나 그 밖의 유익한 자질을 계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때  건

전한 의식이 일어나며 어느 때 건전치 못한 의식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야 되

는 것이다. 갖가지로 나타나는 의식에 대해 보다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곧

정신적 향상을 도모하는 수행인 것이다.


수다원[入流]은 깨달음의 첫 단계에 들어서 있는 성자이다. 그는 지금 일어

나고 있는 각기 다른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정견을 계발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다.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면 그는 처음

으로 조건지워지지 않은 실재의 세계인, 무위(asankhata, 無爲) 열반을 경

험한다. 그 깨달음의 순간 자아에 대한 그릇된 견해가 뽑혀 나가면서 동시

에 인색함 역시 부숴지게 된다. 다시는 인색한 마음이 일어날 수 없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베풂의 완성, 보시 바라밀을 성취한다. 보통 사람들은 일

시적으로 적어도 무언가를 베푸는 동안에는 인색함을 억제할 수 있지만 예

전부터 쌓아 온 인색한 성벽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언제라도 다시 일어나

게 되어 있다. 그러나 수다원과를 성취한 성자는 정견을 확립함으로써 인색

함을 다시 일으킬 성향을 완전히 소멸하였으므로 다시는 인색한 마음에 지

배받지 않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어떻게 선행을 증진시키고 번뇌를 제거할 것인지

를 배우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이런 연유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佛

法)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선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치

신 바를 익히고 선행을 계발하는 가운데 우리는 무엇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못한 것이며 어떤 것이 진정한 것이고 어떤 것

이 한갖 환영에 불과한가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바로잡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을 때 우리는 아마 즐거운 감각 대상을 만끽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서부터 이기적 집착은 정신적인 불안을 불러오고 그것

은 곧 우리 자신과 남들 모두에게 해독을 끼친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

다. 동시에 선행은 자신과 남들에게 모두 유익하며 마음의 평화를 가져온다

는 것도 깨닫게 된다.


인생에서 무엇이 값진 것인가에 대한 견해는 바뀔 수 있다. 무엇이 선업이

고 무엇이 악업인지, 그리고 업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견해를 바로잡게 된다.

또 우리에게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은 어떤 자아가 아니라 좋거나 좋지 못한

갖가지 서로 다른 의식들이라는 점, 그리고 이 의식들은 갖가지 인연들에

의해 생겨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견해를 바로잡게 되는 것이다

. 견해를 수정하는 데는 다양한 정도가 있는데, 사물의 실상(實相)에 대한

이해를 계발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그릇된 견해가 뿌리뽑히며 그로 인해 완

전한 보시가 실현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기심

은 점점 없어지고 베푸는 마음은 더욱 더 커져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 역시 나날이 확대되어야만 할 것이다.


보살의 보시행

-보시의 완성-


짜리야삐따까 주석서註1)

아짜리아 담마빨라 지음

비구 보디 영역


보시 바라밀은 중생을 여러 가지로 이롭게 함으로써 실천된다. 자신의 행복

, 소유물, 몸 그리고 목숨까지도 내주는 것으로, 두려움을 제거해 주는 것

으로, 또는 법(Dhamma)을 가르치는 등의 방법으로 실천되는 것이다. 

베풀어지는 내용에 따라 보시는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물질적인 보시(aamisa-daana, 財施),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abhaya-daana, 無畏施), 그리고 법을 베푸는 보시(dhamma-daana, 法施)가 그것이다. 시물(施物)은 또 외적인 시물과 내적인 시물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외적 시물에는 음식, 마실 것, 의복, 탈 것, 꽃줄, 향, 연고, 침구, 거주처 그리고 등불의 열 가지가 있다. 이러한 시물들은 다시 그 내용과 성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음식에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 있는 것과 같다.

외적 시물을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감각 대상별로 분류하면 형태, 소

리, 냄새, 맛, 감촉 그리고 정신적인 것의 여섯 가지가 될 수도 있다. 어떤

 한 감각의 대상들도 다시 세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각 대상인 형태에

도 빨강 파랑 노랑 등 여러 가지 다른 색깔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외적 시물을 귀중품, 동산, 부동산 식으로 나누면 보석, 금, 은, 산호 등;

전답, 대지, 정원 등; 일꾼, 소, 물소 등 여러 가지가 된다.


큰 보살(Mahaa-satta, 摩訶薩)이 외적 시물을 베풀 때는 필요한 것이면 무엇

이나 그리고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림없이 베푼다. 또한 구하지 않

아도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알아서 베푸니 청해 올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너그럽게 베풀지 좀스럽게 주지 않는다. 베풀 만한 것이 있을

때 그는 넉넉하게 베풀지 모자라게 베풀지 않는다. 그는 보답을 바라고 베

풀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에게 충분히 돌아갈 만큼 넉넉하지 못할 때는 무

엇이건 나눌 수 있는 대로 고르게 나눈다. 그러나 그는 무기, 독약 그리고

술, 마약처럼 취하게 하는 것 등 남을 불행에 빠뜨릴 것은 주지 않는다. 신

상에 해롭고 게으름에 맛들일 재밋거리도 주지 않는다. 아픈 사람에게는 설

령 본인이 달라고 해도 적당치 않은 음식이나 음료는 주지 않으며, 무엇이

건 적당한 한계를 넘어 지나치게 주지 않는다.


그는 또한 청하는 사람이 재가자이면 재가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며 스님들

에게는 그들에게 유용한 것을 베푼다. 그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는 법이

없이 부모, 일가, 친척, 친지, 자녀, 아내, 일꾼들에게 베푼다. 훌륭한 물

건을 주기로 약속하고 보잘것 없는 것을 베풀지 않는다. 그는 이득이나 체

면이나 명예를 원해서 혹은 어떤 보답을 기대하여 베풀지 않는다. 그가 바

라는 과보가 있다면 오직 최상의 깨달음 한 가지일  뿐이다. 물건이 싫어져

서나 또는 요구하는 사람이 귀찮아서 베풀지는 않는다. 설령 자기를 헐뜯고

 욕하는 버릇없는 거지에게라도 버릴 것을 주지 않는다. 그 어느 때든지 항

상 정성스럽게 평온한 마음으로 자비심에 넘쳐 베푼다. 미신적인 예언을 믿

기 때문이 아니라 인과의 법칙을 믿음으로 베푼다.


베풀면서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사를 차리게 하지 않으며, 남들을 전혀

 성가시게 하지 않고 그저 베풀 뿐이다. 속이거나 해치려는 생각으로 베풀

지 않으며 오로지 때묻지 않은 마음으로 베푼다. 거친 말을 하거나 찡그린

얼굴로 베풀지 않으며 정다운 말과 선선한 어조로 웃으며 베푼다.


보살은 어떤 물건이 값이 높거나 아름다워서, 혹은 값진 골동품이거나 사사

로이 아끼던 물건이어서 그것에 대한 자신의 욕심이 지나치구나 싶으면 바

로 그런 생각을 쫓아버리고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 주어 버린다. 그다지 훌

륭한 것은 아니라도 남에게 줄만 하고 누군가 그것을 바라고 있다면 그는

두 번 다시 생각할 것 없이 받는 사람이 마치 숨은 성자라도 되는 양 공경

하며 서둘러 내준다. 그러나 보살은 누군가가 자기 자녀들이나, 아내, 일꾼

이나 하인들을 요구해 오면 그들이 기꺼이, 자진해서 가려고 하지 않는 한

보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가고 싶어하고 기꺼이 응할 때는 보내준다. 더

구나 요구하는 자들이 도깨비나 귀신, 악귀들이거나 또는 성격이 잔인한 사

람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요구에 응해 주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는 사람들을 해치고 괴롭히고 불행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위인에게는 나라를

 넘겨주지 않겠지만 정법(Dhamma)으로 세상을 보호할 의로운 사람에게라면

기꺼이 그것을 내어줄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외적 시물을 베푸는 방법이다.


다음 내적 보시는 두 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떻게 둘인가?

어떤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남에게 넘겨주고 남의

고용인이 되거나 종살이에 들어가듯이, 큰 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최상의 번

영과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깨달음을 위해 보시바라밀을 성취하겠다는 마

음으로 남에게 자신을 넘겨주고 남들이 자신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내맡겨

 중생들을 섬긴다. 그는 자신의 손, 발, 눈 등 신체의 부분 또는 기관을 필

요로 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에 떨거나 위축됨이 없이 베풀어 버린다. 신체에

 집착함이 없이 마치 하찮은 재물을 내어주듯 그것들을 베푸는 일에 움츠러

들거나 피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보살은 두 가지 동기로 내적 시물을 베푼다. 하나는 남들이 원하

는 바에 따라 그것을 즐길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또 하나는 사람들의 욕

구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극기를 위해서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완전하게 베풀면서 "무집착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리라"고 생각한

다. 보살의 내적 보시는 이와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큰 보살은 내적 시물을 베풂에 있어 오직 받는 이에게 이로울 것만을 베풀

뿐, 그 밖의 것은 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몸이나 몸의 일부 또는 기관들

을 요구하는 자가 마라(Mara)나 그의 사악한 권속들임을 알면 "나의 보시

행이 그들로 하여금 더 악행을 하게 만들어 그들을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 생각하여 그것을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마라나 그의 권속들에게 홀린

 사람들이나 미친 사람에게도 보시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밖의 사람

들이 요구하면 그는 즉시 그것들을 베푼다. 이런 요구는 극히 드물 뿐더러

그런 보시를 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남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보시[無畏施]는 포악한 왕이나 도둑들, 불, 물,

적(敵), 사자, 호랑이, 기타 야생동물들, 용, 도깨비, 귀신, 악귀들의 위협

으로부터 중생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불법을 베푸는 법보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청정한 마음으로 삿되지 않게

설명해 주는 행동을 말한다. 즉 금생에도 이롭고 내생에도 이로우며 마침내

는 궁극의 해탈로까지 이끌어 줄 체계적인 지침을 가르쳐 주는 선행이다.

그와 같은 가르침에 의해 아직 불교에 입문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불문에 들

어오게 되고, 이미 들어온 사람들의 수행은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불법을 베푸는 법보시의 방법은 아래와 같다.

간략하게는 보시와 지계(持戒)에 관해서, 천상계(天上界)에 관해서, 감각적

 쾌락에 가려 있는 괴로움과 더러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버리는 데

서 오는 유익함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 좀 더 자세하게는, 부처님의 제자로

서 깨달음(saavakabodhi, 聲聞覺)을 향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살은 다

음의 주제들 가운데서 합당한 것을 택하여 그들이 깨달음을 향한 정진에 더

욱 전념하고 청정을 이룩할 수 있도록 그 주제의 고결한 특성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 주제들은 삼보에 귀의함, 계율을 지키고 자제함, 감관을 단속하기, 음식

의 절제, 깨어 있기 정진, 칠선법(satta-saddhammaa, 七善法), 서른여덟 가

지 주제 (kamma.t.thaana)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사마타(samatha, 寂止) 수

행에 매진함, 신체를 비롯한 일체의 경험 대상들을 관(觀)하는 수행(vipassanaa), 청정에 이르는 여러 과정(visuddhipa.tipada), 정도(正道)의 이해(sammattagahana), 삼명지(3 vijjaa, 三明智), 육신통(6 abhi~n~na, 六神通), 사무애해(4 pa.tisambhidaa, 四無碍解), 성문각(saavakabodhi, 聲聞覺) 등이다.


또한 보살은 벽지불(paccekabuddha)이나 정등각불(sammaasambuddha, 正等覺

佛)의 깨달음을 발원한 사람들에게 각각 그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을 거둘 수

 있도록 이 부처님들의 신통력이 얼마나 수승한가를 설해 주고 십바라밀을

세 단계로 나누어 그 각각의 단계가 가지는 고유한 성질과 특징, 기능 등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그들이 향하고 있는 벽지불이나 정등각불의 길에 더

욱 매진하며 청정해질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보살은 이렇게 중생들에게

법보시를 행한다.

큰 보살이 물질을 베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음식을 줄 때는 "이 보시로

 중생들의 수명이 길어지고 아름다움과 행복, 건강, 지혜 그리고 순결무구

한 지복인 최상의 과보를 성취하게 되어지이다" 하며 베풀고, 음료는 감관

에서 일어나는 갈애가 없어지길 바라면서 베풀고, 의복은 염치와 양심을 갖

추게 되고 부처님처럼 훌륭한 용모를 지니게 되길 바라면서 베푼다. 또 탈

것은 신통력과 열반의 지복(至福)이 성취되길 바라면서, 향은 덕행의 아름

다운 향기가 나길 바라면서, 꽃줄과 연고는 부처님이 갖추신 공덕과 같은

아름다움이 생겨나길 바라면서, 좌구는 깨달음의 도량(道場)에 자리가 마련

되길 바라면서, 침구는 여래가 누리는 휴식이 얻어지길 바라면서, 집은 중

생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길 바라면서, 등불은 다섯 눈[五眼]註1)이 얻어지

길 바라면서 각각 베푼다.


보살은 눈에 보이는 것[色]을 베풀면서 부처님 몸에서 나는 상서로운 빛을

얻기를 염원하며, 소리[聲]를 베풀면서는 부처님의 범음(梵音)을, 맛[味]을

 베풀면서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감촉되는 것[觸]

을 베풀면서는 부처님과 같은 고상한 기품을 얻게 되기를 각각 염원한다.

보살이 지금 약(藥)을 주는 것은 훗날 불과(佛果)를 이루어 중생들에게 생

사(生死)가 없는 열반의 경지를 베풀고자 함이며, 종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

은 훗날 번뇌의 노예 상태로부터 중생들을 구하고자 함이며, 허물되지 않을

 놀잇거리나 재밋거리를 주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정법 가운데 환희심을

내게 하리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는 또한 훗날 모든 중생들을 고결한 혈통을

 이어 받은 자기 자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자녀들을; 온 세상의 주인(samin,

 남편)이 되기 위해 아내를; 32상(相)註1)과 80종호(種好)註2)를 갖추기

위해 귀한 금, 은, 보석과 온갖 장신구를 내어 준다. 정법이라는 보배를 얻

기 위해 금고를 열어버리며, 법왕(Dhammaraaja)이 되기 위해 나라를 내준다.

 선정(jhaana) 등을 이루기 위해 사원, 정원, 샘, 동산 등을; 발에 상서로운

 법륜상(法輪相)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발을; 정법의 손길을 뻗쳐 네 격류(

ogha)註3)로부터 중생들을 건지고자 손을; 신근(saddhindriya, 信根), 정진

근(viriyindriya, 精進根) 등의 정신력(indriya)을 이루기 위해 귀, 코 등

을;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체안(samantacakkhu, 一切眼)을 위해 눈을 베푼

다. 또한 보살은 "이 몸이 온 세상의 생명을 살리는 수단이 되어 지이다.



이 보시 공덕으로 인해 단지 내 모습을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따르

는 것만으로도 일체 중생들에게 늘 번영과 행복을 가져다 주사이다" 하는

발원과 함께 자신의 살과 피를 베풀며, 온 세상의 으뜸, 무상존(Anuttara,

無上尊)이 되고자 머리를 베푼다.


보살은 이처럼 보시하기 때문에 마지못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면서나

, 두려움 때문에 혹은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또는 없는 사람들의 비난 때문

에 베풀지 않는다. 또한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잘것 없는 것을 베풀

지 않으며, 자신을 추켜세우고 남을 헐뜯으며 베풀지 않으며, 그는 결과를

바라고 주지 않으며, 요구하는 사람을 꺼리는 마음으로 또는 되는 대로 베

풀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그는 정성을 다해, 손수, 적절한 시기에, 분별있게, 공평하게

그리고 내내 기쁨에 넘쳐 베푼다. 그는 주기 전에, 주는 동안에, 그리고 주

고 난 다음에도 기쁨에 차 있으며, 주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없다. 그는 받

는 사람에게 오만하게 굴거나 아첨하지 않고 다만 따뜻하게 대해줄 뿐이다.

 후하고 넉넉하며 덤(saparivaara)까지 곁들여서 베푼다. 음식을 베풀 때는

"여기에 무언가 더 보태주자" 생각하여 옷가지 등을 곁들이며, 의복을 보

시하면서도 음식 등을 함께 베푼다. 탈 것이나 그 밖의 것을 보시함에도 또

한 그와 같다. 또한 감각의 대상이 되는 어떤 것을 보시할 때, 예컨대 눈으

로 보이는 것을 베풀 때는 좋은 소리, 향기, 맛 등이 곁들여지게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보시한다는 뜻은 꽃이나 의복 또는 청, 황, 홍, 백색의

 사리(sarira, 舍利) 같은 것이 생기면 그 모양새를 생각하면서 모양새를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수혜자에게 그 모양의 바탕인 실제 물건을 주

는 것이다.


소리 보시는 이를테면 북소리 따위의 보시를 의미한다. 사실 연꽃 다발을

따로따로 뿌리에서 떼어내어 받는 사람의 손에 올려 놓듯이 소리만을 분리

하여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소리를 보시한다는 것은 소리의 근

본, 즉 악기 따위를 주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삼보(三寶)전에 크고 작은 북

등의 악기를 기증하거나 또는 설법하는 스님에게 기름이나 당밀 등 목소리

를 도울 만한 약을 보시하는 것, 법회가 있음을 널리 알리는 것, 경전을 독

송하는 것, 설법하는 것, 불법에 관한 토론을 갖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의

선행을 소리내어 찬탄하는 것 등이 곧 소리 보시이다.

향기의 보시는 향기로운 뿌리 또는 가루향 등을 마련하여 그 향기로움을 생

각하면서 향기를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삼보전에 올린다. 또는 향 보시를 하

려는 의도로 침향(agalu, 沈香)이나 전단목(candana) 등을 베푼다.


맛의 보시는 잘 조리한 뿌리 등 맛있는 것을 마련하여 그 맛스러움을 생각

하며 맛을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적절한 사람에게 베푼다. 또는 곡식이나 젖

소 같은 맛좋은 것을 내준다.


감촉으로 알 수 있는 것을 보시한다는 것은 침구, 좌구, 덮개 등을 베푸는

것이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침대, 의자, 방석, 베개, 내의 또는 겉옷 등을

마련하여 그 감촉되어지는 특성을 생각하며 감촉 있는 것을 보시한다는 생

각으로 적당한 사람에게 베푼다.


마음으로 알아지는 것을 보시한다는 것은(dhammadaana)註1) 영양소, 음료,

생명을 보시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알아지는 대상물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영양소와 같은 좋은 물건

이 마련되면 마음으로 알아지는 대상물의 바탕이라고 생각하며 비감각적인

것을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버터기름(sappi)이나 버터(nonita) 등의 영양

물 또는 망고즙과 같은 여덟 가지 음료를 베푼다. 또는 생명의 보시라 생각

하여 식권註1) 공양(salakabhattabojana, 籌食)이나 보름 공양(pakkhikam-

bhojana)을 베푼다. 그 밖에도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치료하도록 의사를

 주선해 주고, 덫이나 그물에서 짐승을 풀어주며, 그물이나 새장을 부수어

없애고, 옥에 갇힌 사람을 내주거나, 짐승을 죽이지 않도록 권하며, 그 밖

에 중생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면 무엇이나 실천한다.


그는 이렇게 보시하여 성취한 모든 공덕을 온 세상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그리고 무상(無上)의 깨달음으로 자신이 얻게 될 해탈을 위해 회향

시킨다. 모든 공덕을, 선행을 쌓으려는 끝없는 의욕과 다함없는 선정, 지혜

, 지식, 해탈로 회향시킨다. 이와 같은 완전한 보시행을 할 때 보살은 생명

과 소유물을 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이나 소유물을 많은 사

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것으로 보아 항상 끊임없이 일체 중생들을 향해

큰 자비심을 일으켜야 한다. 마치 집이 불타고 있을 때 주인은 자기 몸과

귀중한 물건들을 밖으로 옮겨 집안에 중요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는 것처

럼, 큰 보살은 차별이나 거리낌없이 한결같이 베푼다.


큰 보살이 그가 소유한 유정물[생명 있는 것]겧チㅉ°[생명 없는 것] 모두를

 내주리라 굳게 마음먹을 때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네 가지 장애가 있으니,

 곧 주는데 익숙치 못했던 과거의 습관, 보시물의 조잡함, 보시물의 훌륭함

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물건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 이 네 가지이다.


(1) 보살이 베풀 만한 물건을 갖고 있고 구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마음에 베

풀고자 하는 생각이 솟아나지 않고 주고 싶지 않을 때는 이렇게 결단해야

한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주고자 하는 생각이 일지 않는 것은 필시 과거

세에 주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훗날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쉽

게 보시할 수 있도록 지금 주어야 한다. 앞날을 내다보며 지금 내 손에 있

는 것을 필요한 이들에게 주어버리자."

이렇게 그는 너그럽고 후하게 기쁜 마음으로 내주며, 베풀고 나누어주는 일

을 마냥 즐거워하면서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아낌없이 베푼다. 큰 보살은

이렇게 보시를 가로막는 첫번째 장애물을 산산이 부수어 없애 버린다.

(2) 다시, 베풀려는 물건이 볼품없거나 결함이 있을 때 그는 이렇게 생각한

다: "과거에 베푸는 일에 마음쓰지 않았던 탓으로 지금 이 보시물이 변변

치 못하다. 마음이 아프고 이 물건이 비록 보잘것 없더라도 있는 그대로 베

풀어 보자. 이렇게 함으로써 훗날에는 최고의 보시 바라밀을 성취할 것이리

라."

그는 이처럼 너그럽고 후하게,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내

주며, 베풀고 나누어 주는 일을 마냥 즐거워하면서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큰 보살은 이렇게 보시를 가로막는 두 번째 장애물

을 산산이 부수어 없애 버린다.


(3) 베풀려는 물건이 너무 훌륭하거나 아름다운 것이어서 주저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보살은 이렇게 자신을 타이른다: "선남자여, 그대 가장 고귀하

고 높은 경지,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기로 발원하지 않았던가? 깨달음을

위하여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시물로 내어 놓음이 마땅하리라."

그는 이처럼 너그럽고 후하게 기쁜 마음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내주

며, 베풀고 나누어 주는 일을 마냥 즐거워하면서,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큰 보살은 이렇게 보시를 가로막는 세 번째 장애물

을 산산이 부수어 없애 버린다.


(4) 큰 보살이 무언가를 베풀면서 그것이 없어져 손해라는 생각이 들 때 그

는 이렇게 반성한다: "물질적인 소유물의 성질은 본래 이런 것이다. 결국

없어지거나 사라지게 되어 있다. 더구나 과거에 내가 이런 보시를 베풀지

않았던 탓으로 지금 내 재산이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많건 적건 간에 가

진 것은 무엇이든 베풀자.

이렇게 함으로써 훗날에는 최고의 보시 바라밀을 성취할 것이리라." 


그는 이렇게 너그럽고 후하게 기쁜 마음으로 가진 것은 무엇이든 내주며,

베풀고 나누어 주는 일을 마냥 즐거워하면서,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아낌

없이 나누어 준다. 큰 보살은 이렇게 보시를 가로막는 네 번째 장애물을 산

산이 부수어 없애 버린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 이와 같이 반성한다면 완전한 보시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다. 보시를 완성하는 데 쓰인 똑같은 방법이 계율

이나 그 밖의 다른 수행 덕목들을 완성시키는 데도 적용된다.


주해


1) 三福業事(punnakiriyavatthu): 시(施), 계(戒), 수(修)(dana, sila, bhavana).

2) 四攝法(sangahavatthu):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동사(同事)(

dana, peyyavajja, atthacariya, samanattata).

3) Dhammapala 스님: Buddhaghosa 스님 이후의 주석가라는 것 외에 생존 연대는 분명치 않음.

4) Cariyaapi.taka: Khuddaka-Nikaaya의 마지막 장으로 부처님의 전생 특히 십바라밀을 닦는 보살의 수행을 운문체로 엮은 경전이다.

5) 우 치 틴의 「보시의 완성」 서문 참조(U chit Tin. The Perfection of Generosity, Introduction).

6) E.W.Burlingame, 譯, 「불교설화집」(London;Pali Text Society, 1969), 2:

212-16

7) I.B. Horner 譯, 「짜리야삐따까」 참조 [Minor Anthologies of the Pali C

anon, Part Ⅲ(London:Pali Text Society, 1975)]. ∥원문으로∥

8) payatapaa.ni는 청정한 손(panisuddha-hattha)이라고 설명되며, 베풀기 전에 자신의 손을 닦는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힌두 전적에서도 종종 관대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손이 늘 물에 젖은 사람’이라는 말이 쓰이는 것도 같

은 이유에서이다.

9) 성위(聖位): 해탈 수행에 의해 성자가 차례로 증득하게 되는 네 가지의 초

세간적 경지.

10) 예류과(豫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아라한과(阿羅漢果).

(보리수 잎 하나 P.15, 51쪽, 보리수 잎 열다섯 P.37쪽 법륜 다섯 P. 8 참조)

11) PTS 본에서는 ‘기꺼이 베푼다’로 되어 있지만 이 번역의 정확성은 의심스

럽다. 여기서는 보시의 동기를 저열한 의도로부터 점점 고상한 동기로 향상

되는 순서로 배열한 것으로 보인다. PTS 번역에 따르면 이 순서가 틀리게

된다. 더욱이 asajja는 치다, 거스르다, 공격하다, 모욕하다 등의 뜻을 가

진 asadeti의 동명사이다.

12) 오근(五根, Panca indriya):해탈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다섯 가지의 힘 또는 능력. 신근 정진근 염근 정근 혜근을 말함. (보리수 잎 하나 P. 49 주해 참조)

13) 오력(五力, balabhaavanaa): 신, 정진, 념, 정, 혜가 확고하게 자리잡아 큰

힘을 발휘하는 상태. 오근이 더욱 진전, 성숙되어 확립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14) 칠각지(七覺支: bojjhangabhaavanaa): 깨달음으로 이끄는 일곱 가지의 성분 요소.

①염각지(Sati-bojjhanga), ②택법각지(Dhammavicaya-b), ③정진각지(Viriy

a-b), ④희각지(Piti-b), ⑤경안각지(Passaddhi-b), ⑥정각지(Samaadhi-b),

⑦사각지(Upekkha-b)(법륜 아홉 P, 58. 주해 참조) ∥원문으로∥

15) Rhys Davids의 PTS 본 (Dial.II,372)에는 “Tasmim kho pana daane  Uttaro

naama manavo vyaavato ahosi” 부분이 “웃따라가 분배를 담당했다”가 아닌

“웃따라는 이 큰 보시에서 자기 몫을 받지 못하고 제외되었다”로 오역되

어 있다.

16) 냐나뽀니까 테라의 「선과 악의 뿌리들」 (법륜출판 No. 251/253) 참조.

17) 「업과 과보」 (법륜 출판 No.221/224) 참조. ∥원문으로∥

18) Paramatthajotikaa, 「The Illustrator of Ultimate Meaning」

Khuddakapaatha 주석서, (London : PTS, 1960).

19) 비구 보디 譯, Cariyaapi.taka A.t.thakathaa,에서 발췌. (The Discourse on the All-Embracing Not of Views: In The Brahmajala Sutta and Its Commentaries. BPS, 1978, PP. 289-96, PP. 322-23.)

20) 五眼:肉眼(mamsacakkhu), 天眼(dibbacakkhu), 慧眼(pa~n~naacakkhu), 佛眼(buddhacakkhu), 普眼(一切眼, samantacakkhu). ∥원문으로∥

21) 32상(相): 위인에게 갖추어진 32가지 신체적 특징. 전승에 따르면 석존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와서 석존의 몸에 32상이 구족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만일 석존이 세속에 머문다면 완전한 통치자(전륜성왕)가 될 것이고,

출가한다면 진리를 성취한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22) 80종호(種好): 범인들과는 다른 부처님 몸의 수승한 특징 80가지.

23) 네 격류(ogha): (=4 aasavaa) 欲流(kaama-ogha), 有流(bhava-ogha), 見流(di.t.thi-ogha) 無明流(avijjaa-ogha) ∥원문으로∥

24) 여기서 말하는 dhamma(法)은 본문 내용에서 보는 바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생명(jiva)이나,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양분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의 마지막 법을 가리킨다.

25) salaka : 대나무 조각 등으로 만든 일종의 전표 혹은 초대장이라고 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