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고 소멸의 진리[滅聖諦 Dukkha Niroda Ariya Sacca]
부처님께서는 세 단계로 깨달음[大覺]을 성취하셨다. 이른 밤[初夜]에 부처님께서는 이전의 존재 상태에 대한 지혜[宿命通]를 얻으셨는데 이러한 기억은 깊은 선정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한밤중[中夜]에 그분은 존재들이 지은 바 업에 따라 한 존재상태로부터 다른 존재상태로 옮겨가는 방식에 대한 지혜[天眼通]를 얻으셨다. 그분이 고의 진리와 업을 통해 작용하고 있는 도덕적 인과율을 통찰하신 것이 바로 이 시점에서였다. 동틀 무렵[後夜] 그분은 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원인들, 즉 연기의 진행과정에 대한 지혜를 확철하셨다. 그때 그분께서는 존재의 생기(生起)가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 조건들의 뿌리가 갈애와 무명이라는 것[集聖諦]과 이 연기과정을 끝내는 방법[道聖諦]을 모두 깨달으셨다.
그리고 해돋이에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에서 마음을 연기에 집중하여 형성의 순서[順觀]와 멸의 순서[逆觀] 두 길로 연기를 관하다가 해가 떠오르자 무상의 정각을 이루셨다. 그리고서는 과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이 하셨던 것과 같은 말씀, 승리의 말씀을 이렇게 발하셨다.
“헛되이 나는 이 집 지은 자를 찾아 수많은 생을 헤매었다.
거듭 태어나는 것은 실로 괴로운 일.
이제 집 짓는 자여. 너는 들켰다. 다시는 짓지 못하리.
너의 서까래는 모두 흩어지고 대들보는 내던져졌다.
내 마음은 조건지어지지 않기에 이르렀다.
갈애가 사라졌다!”
『법구경』주석과 게송 153~154
집은 몸이고, 짓는 자는 갈애, 서까래는 정욕, 대들보는 무명이다.
“왜냐하면, 갈애가 완전히 시들어 사라지면 존재에 대한 집착은 소멸하고, 집착이 그치면 형성과정이 소멸하고, 형성과정이 소멸하면 재생이 소멸하고, 재생이 소멸하면 늙음․죽음․비애․한탄․고통․슬픔․절망이 소멸한다. 이렇게 해서 이 모든 고의 덩어리가 소멸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됨으로써 색, 수, 상, 행, 식을 그치고 초극하게 된다. 이것이 고의 그침이요, 병의 끝남이요, 늙고 죽는 것을 초극하는 것이다.” (『상응부』 제12 연(緣)상응)
고의 끝남이 열반(Nibbāna)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Nirvāna)인데 원래 ‘불다’는 뜻을 가진 어근 vā에 부정적 어미 nir를 붙여서 만들어진 어휘이다. 불교적 의미로는 열반은 형성해 가는 과정을 그친다는 뜻이며, 이는 마치 연료 공급이 중단되거나 공기가 통하지 않게 되어 불이 한창 타다가 꺼지는 경우와 같다. 이 불이란 바로 탐․진․치 세 갈래의 큰 불길인데, 연료가 끊어져서 타기를 멈추게 되면 생명을 지탱하는 충동들이 끝나면서 더 이상 재생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태는, 정신적․육체적 온은 아직 남아 있지만 오취온(五取蘊)이 아닌 상태, 갈애와는 아무 관련이 없게 된 열반 상태, 즉 유여의 열반(有餘依 涅槃)상태의 아라한이 자연수명이 남아있는 여생 동안 경험하는 상태이다. 그것은 절대적 평화․적정․충족이다.
“여행을 끝마친, 모든 비애에서 헤어난, 어느 길로나 다 해방된, 모든 집착을 부수어버린 그에게 어떤 고뇌도 남아있지 않다. …… 대지처럼 원한이 없고, 마을 어귀의 솟대처럼 성품이 확고하고, 진흙이 없는 깊은 못처럼 청정한 사람에게 윤회의 헤맴이 더는 있을 수 없다.…… 마음이 고요하고 말이 고요하고 행동이 고요한 사람, 올바로 정견을 갖춘 그 사람은 완전히 해탈했으며 평화롭다.”
『법구경』 게송 90, 95, 96
아라한이 생을 끝내게 되면, 즉 생명전개과정의 최종적 정지(停止)에 이르면 무여의 열반(無餘依 涅槃)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으로 조건지어지지 않은 열반으로 거기에는 개체적 인격요소 같은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의 무화(無化)는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는 그 어느 존재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전개과정만 있었기에 열반은 그 전개과정의 종결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일찍이 현상적인 생명연속을 일으키던 집착의 온들이 꺼진 것이다. 고(苦)가 도무지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태, 그것은 오직 열반뿐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선언하신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통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저 갈애의 완벽한 그침, 포기, 버림이며, 저 갈애로부터 완벽한 헤어남이며, 저 갈애로부터 완벽하게 떨어져버림이다.”12)
부처님의 최초의 법문에 나오는 열반에 대한 기본적 서술에서 우리는 의미심장한 윤리적 어휘들로 표현된 심리적 세계를 접하게 된다. 그 어휘들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감각적 인식 내용에 대한 자세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열반계(Nibbānadhātu), 다시 말해 그 자체의 특성 면에서 고려한 열반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 자체의 궁극적 측면에서 고려할 때 열반은 변화라든가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계 즉 어떤 면으로도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정의된다. 또한 다른 현상세계의 사물들과는 달리 조금도 복합된 것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일원성의 그 무엇이라 말하기도 한다. 열반을 두고 이렇게 무엇 무엇이 아닌 어떤 것 식으로 우회하지 않고 바로 실증적 어휘로 정확하게 규정짓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의사소통을 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모두가 조건지움의 세계에 속하는 사물이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들이기에 다른 어떤 개념과 비교․대조되지 않는, 그래서 다른 것과 관련없는 개념을 표현하는 방법을 우리는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경험내용은 모두 다 관계성의 복합체인 것이다. 생각은 끊임없이 서로 상반된 것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명․암, 열․냉, 선․악, … 이 모두는 서로 정반대되거나 강하게 대비되는 상대적 가치들이며, 이러한 상대성과 분리되어서는 아무런 실질적 의미도 없게 되는 것들뿐이다. 감각적 경험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다른 그 무엇과 관련되지 않으면 아무런 성질도 띨 수 없기 때문에 이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세계는 상대적 실제일 뿐인 어떤 영역으로 간주하는 길밖에 없다. 사실 이 세계는 의식이 통상적으로 기능하는 어떤 특정한 지혜랄까 앎이랄까하는 수준에서 볼 때에는 분명히 실재하는 세계이다. 물론 이때에도 그 세계의 세부적 성질에 관해서는 단 두 사람 사이에도 똑같은 안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여전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감각 세계는 의식의 차원이 달라질 때에는 전혀 실재성이 없어지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물리학자는 이 우주를 전자력으로 본다. 수학자는 다시 그것을 수학 공식으로 환산한다. 이 때 이 두 사람도 보통사람들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는 그런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이 전문가 수준에서 그려내는 세계의 그림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들은 두 세계를 살고 있는 셈이다. 즉 자신들의 감각기관이 알려주는 대로 받아들인 감각세계와 또 그 감각의 그림이 사실대로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지성의 세계, 이 둘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는 그림은 궁극적 의미에서는 감각적 속임수의 작품이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대상물 중 가장 견고한 고체를 두고 보더라도 그 구성은 물질 자체보다 훨씬 더 많은 빈자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실은 지금 알려진 것 중 가장 작은 원소인 수소원자의 구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수소원자에서는 핵으로부터 전자궤도까지의 거리가, 규모비율로 따져 태양과 지구간의 거리의 두 배, 즉 9천 6백만 마일이 된다. 비교해 보자면 고체 물질에 우리 태양계보다 더 넓은 공간이 담겨있는 셈이다. 우리가 감관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상대적 측면, 즉 우리 자신의 특정 의식 양태에 상대적으로 부합된 사물일 뿐이다. 우리 눈에 띠는 물질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말이다. 우리의 의식[識] 수준에서는 그것은 엄연한 사실로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물이 외재하는 객관적 실재로서 정말로 있다고 한다면 더욱 진실에서 동떨어진 것이 된다.
사정이 이와 같기 때문에 열반에 관한 사유는 가능하다면 관념의 개입이 없이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행히도 여러 가지 오해가 생겨나게 된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에 대해서 딱 부러진 정의를 내리기를 계속 거부하셨고, 또 이 세계가 영원한지 영원하지 않은지, 아라한이 열반에 들어서도 계속 존재하는지 않는지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를 거부하셨기 때문에 불가지론자로 불리기까지 했다. 이런 질문에 대한 그분의 말씀은 질문이 잘못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질문들은 논의 대상들이 실재하느냐 않느냐 하는 식의 잘못된 관념에서 나왔고, 그리고 그 대상들을 언급하는 데 쓴 용어들도 잘못된 관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정적 형태의 대답이나 부정적 형태의 대답이나 마찬가지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 따름이다. 만일 이 생이 진실된 의미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면 열반은 무, 즉 단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상은 그렇지 않다.
반대로 만약 이 생이 전적으로 실재가 아니라면 결국 무(無)일 것이고 그럴 경우 열반은 절대적 존재가 될 것이다. 두 가지 중 후자가 다소 진리에 근접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전적으로 진실은 못된다. 이 생이 비실재 즉 무가 아닌 것은, 고의 경험이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또 열반을 유(有)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개별적 ‘자아의식’ 같은, 유(有)에 결부시키는 특징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그 특성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은 자아와 같은 개체성을 띠지 않는다. 다른 질문들도 마찬가지로 반박될 수 있다. 즉 그 질문들은 실다운 타당성을 띠지 못하는 상태를 묻고 있으며 또한 질문하는 언어도 온당하지 않기에 인정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몰라서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르칠까봐 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점은 확고하게 견지되고 있는데 즉 이 우주 체계에 창조주 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배하는 힘’이라는 개념은 우리를 숙명론과 무기력에로 끌어가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를 분명히 배격하셨다.
소위 10무기(无记)13)라 불리는 문제들과 또 명확히 선언되지 않은 열반의 본성에 대한 문제는 속제와 진제 두 가지로 진리를 구분하는 불교의 인식에 의해서 정연하게 처리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된다. 개념적 진리는 상대성의 영역을 포용하는바 그 타당성은 일반적으로 용인된 관계성의 양식에 좌우되고 또 상당부분 의미론의 법칙에 지배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다’(attāhi attano nātho 『법구경』 게송 160)라고 말씀하실 때 이 자기(attā)라는 용어를 의미론적 역할 상 불가피하게 쓰고 계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현상계의 사람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을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비가 온다’를 습관에 따라 ‘It is raining'이라 하는데 이때 it가 구름을 가리키는지 하늘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기상학적 제 조건의 총화를 가리키는지 규정짓기 어려운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계속 변하고 있는 제 온들의 화합체이고 변이의 흐름이기 때문에 어떤 본체론적 실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절대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서술적으로 말해 시․공 연속체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흐름이라고 묘사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이런 서술 영역을 넘어서 버리면 어떤 의미에서도 그런 것[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단순히 인습적 실재일 뿐이다. 이 점을 거듭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불교의 생명관은 물론, 궁극적 목표인 열반이라는 개념도 바로 이 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리를 따르면, 상대적 실재에 관한 어휘들로 짜인 질문을 그와 똑같은 어휘들로 아무리 대답해 본들 절대적 진리를 구현하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궁극적 의미에서 '최고의 진리'(paramaṭṭha sacca)는 전혀 표현할 길이 없다. 현상에 관한 분석적 서술조차도 상대적 진리에 속하는 보다 조잡한 오개념(误概念)들을 제거해냄으로써 도달하는 어림셈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불교의 윤리심리 체계인 아비담마에 포함되어 있는 ‘서술된’ 최고 진리와 동종의 것인 바, 거기서는 오늘날의 동태적 심리학의 조류를 예시하기나 하듯 존속하는 실체라는 개념에 매이지 않고 마음의 여러 상태를 다루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사유자’가 없는 사유를, 또 ‘행위자’가 없는 행위를 보게 된다. 마치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에 나오듯 생각도 행위도 모두 윤회하는 식의 여러 모습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열반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열반을 실현했다 해서 존재일반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나 열반과 관련된 의문들에 대해서 별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문들이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의문들은 상상이 낳은 가공적 구조물로서 궁극적 진리가 감각자료의 영역과 용어들에 매인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최대한 심오하고 복잡한 노력을 다 하고서도 그들의 그 용감한 시도가 실체에 관해 완벽하게 만족스럽고 최종적인 해명을 주는 데 일찍이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열반의 경험이 본질적으로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빠알리 경전에는 그에 관해 서술한 말들이 꽤 많다. 이 말들은 열망의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찬 비철학적 언어로 윤회의 제 조건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이상을 전해주는,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의미 심장한 가치를 지니는 말들을 담고 있다. 열반은 불사(不死) 외에도 피안, 불로(不老), 행복, 견뢰(坚牢)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열반은 끝내 ‘설해지지 않은 것’(Asankkhāta)이고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Anakkhāata)이다. 원인의 원인을 찾다보면 우리는 단지 결과만을 발견한다. 구경 열반은 원인과 결과가 하나되는 곳, 하나를 제거하면 다른 것도 사라져 버리는 곳, 공간․시간 그리고 일체사유의 범주를 단멸시키는 그 지점이다.
“비구들이여, 유위법이건 무위법이건 이욕(离欲 virāga)이 제일이다. 다시 말해 아만의 추방, 목마름의 제거, 집착의 근절, 생사 윤회의 단절, 갈애의 소멸, 이욕, 멸절, 열반이다.” (『증지부』 Ⅱ품 34경)
열반의 실상에 관하여 적극적 확언을 하신 적도 없지 않다. 부처님께서 무시(无时)․불변의 무위계(无为界)와 생(生)․노(老)․사(死)의 유위계(有为界)를 대비하여 설하시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발견되는데 한 예로『감흥어(Udāna)』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연기(缘起)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나니. 그처럼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연기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과 같은 어떤 상태가 없다면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연기되고, 형성된 것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실로 이처럼 ‘태어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연기되지 않은 것’, ‘형성되지 않은 것’과 같은 어떤 상태가 있기에 태어났고, 만들어졌고, 시작된 것이며 형성된 것으로부터의 탈출이 진실로 있는 것이다.”
고의 소멸을 적극적 목표로 제시하는 세 번째 진리가 현실감 있게 우리 가슴에 구구절절이 와 닿는 것은 이와 같은 확언이 계셨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고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道聖諦 Dukkha Nirodha Gamini Patipada Ariya Sacca]
“비구들이여, 그러면 성스러운 고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스러운 팔정도 즉 바른 이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삶,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장부』 22경, 『상응부』제56 진리상응)
이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열반을 실현하는 구체적 길을 제시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제시하기에 앞서 부처님께서는 먼저 그 당시 유행하던 일부 그릇된 관념들, 특히 진리 탐구에 중대한 장애가 되는 것들부터 지워내셨다. 당신께서 고행을 그만 두셨을 때 버리고 떠났던 다섯 고행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이 최초의 법문에서 부처님께서는 양극단의 진로를 피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셨던 것이다. 한편은 감각적 탐닉의 길로, ‘상스럽고, 저열하고, 천하고, 순수하지 못하고, 이롭지 못한 것’이며, 다른 한편은 극단적인 육체적 고행을 닦는 길이니, ‘고통스럽고, 순수하지 못하고, 헛되고, 이롭지 못한 것’이다. 이들 입장과 대조되는 ‘중도’는 부처님이 발견하신 길로서,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하여 평화로, 통찰로, 완전한 지혜로, 열반으로 이끌어주는 길이다. 이 길은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비탄과 고뇌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것은 완벽한 길이다.”(『장부』 22경, 『상응부』제56 진리상응)
현대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극단적 고행을 나무라신 데에는 당신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뜻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실행되고 있는 어떤 요가 고행 중에는 병적인 자기 혐오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어쩌면 고통을 경험하는 데서 자학적 쾌감마저 느끼는 지도 모른다. 동기야 무엇이건 그런 수행을 하다보면 비정상적일 만치 육체에 마음을 쓰게 된다. 마음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육신에 더 붙들어매는 결과를 낳는다. 이와 같은 도착된 관능성이 표출될 지경에 이르면 몸과 명확하게 구분되고 또 몸과 싸우는 어떤 영혼이라든가 영적 실체에 관한 생각 등, 수행을 방해하는 생각들이 떼를 지어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육체는 영혼의 적이며 따라서 증오할 대상으로서 안성맞춤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결국 영혼은 이 적을 조복하기 위해 새로운 고문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와 매우 유사한 양상은 초기 기독교 고행주의의 매질, 거친 마소직(麻巢织) 옷 착용, 장기 단식, 수난의 자초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육체는 상존하는 적이었다. 적이라고 부를 때는 이미 그것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 적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육체 역시 정신으로부터 이런 취급을 당하다보니 따로이 유리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그것도 적개심에 찬 행로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수시로 틈만 나면 반격을 가하고, 괴로운 심리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그렇지만 불교는 남에게든 자신에게든 일체의 폭력을 피한다. 몸은 분명 제어해야 할 대상이지만 방법이 달라야 한다. 몸은 그 자체가 정염(情炎)의 저택이 아니라 단지 그 운반체일 뿐이다. 갈애의 성채를 점령하는 일은 마음에 대고 할 일이지, 몰이꾼이 모는 대로 움직일 뿐인 불쌍한 소와 같은 몸에 대고 할 일이 아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마음과 더불어 시작되고 마음을 초극함으로서 끝나는 삶의 방식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존재의 성격에 대한 지적인 파악을 의미하는 바른 이해[正见]이다. “바른 이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고(苦)와, 고의 원인과,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해는 것이다.”(『장부』 22경) 또 다른 곳에서는 바른 이해를 선한 행위와 불선한 행위의 뿌리, 즉 도덕적 인과율에 대한 이해로 설명하고 있다. 『상응부』에서는 다시 “색, 수, 상, 행, 식이 무상하고 고이며 무아임을 이해할 때 그것은 ‘바른 이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바른 생각[正思]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고, 악의에서 벗어나고, 잔인성에서 벗어난 생각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바세계와 관련되는 바른 의도로 그것은 선한 행위로 나타나고 그래서 좋은 세속적 결실을 가져온다. 또 하나는 더 높은 출세간적 청정의 도[向]를 지향하는 것으로 열반이 그 결실이다.
“그러면 바른 말[正语]이란 무엇인가? 실로 그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며, 험담을 삼가고, 이간질 대신 화합을 조장하며, 거친 말을 삼가고, 점잖고 정중한 말씨를 쓰도록 하며, 헛되고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잡담을 피하고, 항상 가치 있는 주제, 즉 깨치신 분의 법과 같은 주제를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바른 행위[正业]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살생을 피하고 훔침과 횡령을 피하고 부모 형제 친척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여인, 결혼한 여인, 임금이 금하는 여인, 약혼 중인 여인, 다른 사람의 첩 등과 성적인 관계를 피하는 것이다.” 여기서 살생, 훔침, 금지된 부류의 여성과의 성관계를 피하는 것은 세속의 바른 행위라 하고, 이는 금생이나 다음 생에서 좋은 세속적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해탈의 길을 지향하는 깨끗한 마음으로 이런 행위를 버리고 완전히 거부하면 이는 출세간의 바른 행위라 하며 청정한 도와 과[四向四果]를 맺는다.”
“그러면 바른 생활[正命]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그릇된 생계 수단을 거부하고 바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여기서 그릇된 생활은 도살이나 유정물의 안녕에 해가 되는 어떤 방식으로 생계를 도모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바른 노력[正精进]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네 가지 고귀한 노력[四精勤]이니 그 넷이란 피하려는 노력, 극복하려는 노력, 계발하려는 노력,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첫 번째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불선법(不善法)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노력이니 다시 말해 의식[识]에게 감각대상이 표상될 때,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래서 그 결과로 탐욕과 슬픔이 생기지 않도록 피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두 번째 것은 그런 연기과정을 거쳐 이미 생겨난 불선법들을 극복 제압하려는 노력이다. 세 번째 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선법(善法)들을 계발하려는 노력이다. 네 번째 것은 이미 생겨난 이러한 선법들을 꾸준함, 활기참, 진력함에 의해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면 이제 바른 마음챙김[正念]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몸, 느낌, 마음, 법을 수관(随观)함이다. 이때 수행자는 세속의 탐욕과 비애를 털어 버리며 열심히, 분명한 의식으로, 주의 깊게 몸, 느낌, 마음, 법을 수관하면서 산다.” 이는, “청정에 이르도록 이끌고, 슬픔과 후회를 극복하도록 이끌며, 고통과 비애를 끝내도록 이끌며, 바른 길과 열반의 실현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유일한 길”(『장부』22경「대염처경」)이라고 설하신 바의 사념처(四念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바른 집중[正定]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마음의 몰입,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킴, 이것이 바른 집중이다.” 집중의 대상은 사념처이며, 집중의 예비조건은 네 가지 고귀한 노력[四精勤]이다. 그리고 “이들 사정근과 사념처를 닦고 계발하고 키우는 것이 ‘정’의 발전을 이룬다.”
팔정도의 여덟 부문은 제각기 매우 명료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적 체계 전반과 빈틈없이 정연하게 서로 맞물려 있다. 따라서 ‘바른 이해’는 단지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명확한 그 무엇이다. 그것은 설령 세부적이지는 못하고 윤곽만일지라도 인생의 실상을 지적(知的)으로 파악한다는 뜻이 된다. 팔정도의 다른 한쪽 끝에서 우리는 ‘바른 집중’을 만나는데 이것은 의식의 초월적 상태를 표시하는 바 거기에서 진리는, 지성에만 의지해서 불완전하게 이해되던 이전의 상태에서 벗어나 직접적으로 직관적 경험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이루어져야만 ‘바른 이해’도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도(道)의 여덟 부문은 하나 하나씩 점차적으로 다룰게 아니라 일괄적으로 계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가지가 완성되려면 나머지 것들도 동시에 다 같이 발전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연기법의 공식을 구성하는 연결고리들의 경우와 똑같이 팔정도의 각 구성요소들도 단지 서로간의 시간적 인과관계 속에 세워져 있는 것뿐만이 아니고, 서로 북돋우어 주는 관계에 있다는 측면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바른 집중’은 애초에는 ‘바른 이해’의 차원에서 그치던 지혜를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 발전시켜 준다. 이런 식으로 팔정도는 시종 수미일관 되고 있다.
도(道)는 관례적으로 계․ 정․ 혜 세 부분으로 나뉜다.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은 계에 속하고,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은 정에 속하고, 그리고 ‘바른 이해’와 ‘바른 의도’는 혜에 속한다. 불교 윤리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기에 그만 두고, 다만 불교의 도덕성은 불교 철학 체계의 중심 개념인 무아, 즉 자기의 궁극적 부재에서 곧바로 분출된다는 점만 지적해 두겠다. 소위 ‘나쁜’ 또는 불선한 행위는 자기중심, 자기본위[利己], 탐욕 또는 애욕, 증오심과 미혹에 지배되는 행위를 말한다. ‘좋은’ 또는 선한 행위란 이기심이 없는, 자비와 통찰에 의해 고무된 행위이다. 불교의 도덕은, 그 가치가 미심쩍은 신학체계에 한 가닥 줄을 대어, 시간이나 상황의 전개에 따라 얼마든지 휘둘릴 수 있는, 도리에 따르기보다는 견해에만 근거한 독단적 품행 규범집이 아니다. 이러한 불교의 도덕은 보편적이며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원리들에 뿌리박고 있다. 왜냐하면 이 원칙들은 덧없는 사건들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인간성의 항수(恒數)인 내면 심리적 동인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갈애와 집착은 어디서 끝나게 되는가. 부처님께서 하신 대답은 일어난 그곳이 바로 끝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감각기관들과 그 대상들 즉 보이고, 들리고, 냄새맡고, 맛보고, 닿고, 마음에 품어지는 것들과의 접촉[觸]이 바로 그 곳이다. 느낌[受]을 순수한 맨 경험으로, 다시 말해 경험하는 ‘자아’ 따위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빈 현상으로, 그래서 분별하는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그러한 느낌으로 관찰할 때 느낌을 향한 욕망[愛]은 그 뿌리에서부터 잘려 나간다. 즉 분리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신념처’를 닦을 때는 몸을 그 자체 아무런 매력도 없는 물리적 요소들의 집합체로 마치 음식에 빠진 머리카락 보듯이 보며, 전혀 개인 감정이 없이 냉철하게 고찰하면서 몸을 향하여 맨 주의를 집주한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구성체들의 혐오스러운 측면을 냉정하게 주시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집착[取]이 약화되고, 어느 정도 집중을 이루었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마침내는 집착이 제거되기에 이른다. 고행외도의 수행에서처럼 몸을 하열하고 유해한 ‘자아’로 보기보다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수관함으로써 몸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게 된다. 즉 몸을 매 순간 노쇠하고 부패해 가는 과정에 있는 물질로, 물리적 법칙과 과거 업이 아우러진 산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명상의 주제들, 더 정확히는 정신수행(bhāvanā)의 주제들은 수행자의 기질에 따라 각가지로 다양하게 제시되지만 거기에는 한결같이 공통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치열한 정신적 몰입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 목적은 현상의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 관찰자도 관찰대상도 본질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공(suññatā)은 선(jhāna)이나 몰입상태를 넘어섰을 때 완전히 요해(了解)된다. “더 이상 (선정의) 의식을 유념하지 않고 이제 그는 ‘무(無)․무’ ‘공(空)․공’ ‘절(絶)․절’ 하는 식으로 거듭 주의를 기울이고 유념하고, 숙고하고, 사택(思擇)과 심(尋)으로 공략해야 한다.” (『청정도론』 X. 33) 14) 그리하여 “사대(四大)의 궁구(窮究)에 전념하는 비구는 공에 들어서, ‘살아있는 현존체’라는 상(想)을 버린다. 여러 종류의 존재[有]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관념을 품지 않고, 그런 유(有)의 상(想)을 지멸함으로써 그는 공포와 두려움, 즐김과 혐오를 벗어난다. 그는 마음에 드는 것에 들뜨지 않고 싫은 것 때문에 우울해지지 않는다. 그는 큰 깨달음을 지녔기에 불사(不死)를 얻거나 행복한 재생을 확보한다.”(『청정도론』 XI. 117)
미망, 굴레, 고통의 상태와 완전한 해탈상태 사이에 성취해야만 하는 도와 과들이 놓여있는 바 이들은 열 가지 족쇄를 점진적으로 어디까지 제거했느냐에 따라 구획이 지어진다. 열 가지 족쇄는 1. 자아라는 미망, 2. 불법에 대한 회의(懷疑), 3. 해탈을 이루려면 의식 봉행이 효율적이라는 믿음, 4. 감각적 욕망, 5. 악의, 6. 유색계(有色界)에 존재하고자 하는 갈구, 7. 무색계(無色界)에 존재하고자 하는 갈구, 8. 자만, 9. 들뜸, 10. 무명이다. 처음 세 가지를 부숴낸 사람을 ‘예류과에 이른 이’라 한다. 그는 해탈의 흐름에 들어섰으며 갈 길은 정해졌다. 그는 이제 인간보다 낮은 세계에는 결코 몸을 받지 않으며, 완전한 해탈을 빨리 성취하지 못할 경우 늦어도 일곱 생 내에는 그것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 추가해서 그 다음의 두 족쇄를 거의 무력하게 만들었을 때 그는 ‘일래과에 이른 이’가 된다. 욕계에 한번만 더 재생하면 족한 사람이다. 거친 족쇄로 알려진 이들 다섯 가지를 모두 완전하게 부숴냈을 때 그는 ‘불환과에 이른 이’가 되는데, 욕계15)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열 가지 족쇄를 모두 부숴버리게 되면 ‘아라한’의 상태를 성취한다. 그렇게 되면 성스러운 삶을 구성하는 도의 모든 과정들과 그 결실을 실현해낸 것이며 고통스러운 윤회는 끝장이 난 것이다. 이들 성자가 걷는 네 단계가 어떤 경우에는 간격을 둘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바로 바로 뒤이어지는 수도 있다. 그러나 각 단계마다 ‘도의 실현’과 ‘과’는 심찰나적 연쇄선상에서 바로 이어진다.16) 통찰의 심찰나가 섬광처럼 비칠 때 수행자는 일체의 의혹을 넘어 자신이 성취한 경계의 성격을 알며 더 닦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안다.
탐․진․치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아라한이 열반을 증득할 때 이와 더불어 그는 일종의 정각을 성취하는데 이는 그가 이룬 바에 상응하는 것으로 제자의 깨달음인 성문각이라 한다. 말하자면 그는 존재의 연기적 원인들이 무엇인지, 또 그 원인들이 어떻게 부서져 내렸는지를 완벽하게 안다. 또 그는 통상적으로 마음을 개인의 감각적 경험의 영역 속에 가두어 고립시키는 장벽 역할을 하는 그 자아라는 미망이 무너져 내림에 따라 그의 기능들[諸根]이 확충되는 것을 경험한다.1
그러나 정등각자이신 부처님의 깨달음은 훨씬 수승한 것이며 그 범위도 무한대이다. 아라한의 지혜뿐만 아니라 거기에다 일체지를 더 증득한다. 그분이 정등각자가 되신 것은 전생에 서원하고 절륜의 공덕을 쌓아올리며 실천에 옮겨 온 그의 원력, 일체 중생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정등각자가 되고 세상의 스승이 되겠다는 원력의 결실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완전무결한 지혜가 없이는 법의 바퀴를 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사가 원래 그렇듯 그분의 지혜도 대부분은 남에게 소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자연현상을 말씀하실 때 부처님께서는 용어와 개념을 청중이 쓰는 대로 쓰셨다. 그러지 않고 달리 쓰셨다면 청중들은 기괴하게 생각하고 믿으려하지 않았을 테니까. 유클리드 기하학을 간신히 이해하는 사람에게 일반상대성이론을 말할 사람은 없다.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는 바를 모두 가르쳤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분은 흙먼지를 집어서 손톱 위에 올려놓으시고는 그 흙먼지와 땅에 남아있는 흙먼지 중 어느 쪽이 더 크냐고 물으셨다. 뻔한 대답이 나오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가 갖고 있는 지혜도 가르친 것보다 더 크다.”
이 말씀을 빌미로, 부처님께서 어쩌면 몇몇 제자들에게만 전해준 비전(秘傳)의 가르침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고 이를 찾아보려 시도한 일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을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지만 완전한 해탈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여래는 가르쳤느니라.” 그리고는 다시 “밀교(密敎)와 현교(顯敎) 같은 것을 따로 세우지 않고 여래는 법을 가르쳤다. 여래에게는 무언가 따로 감추어 놓는 스승의 쥔 손[師拳] 같은 것은 없다.”(『장부』16경) 부처님께서 아시면서도 가르치지 않으신 것들은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윤회의 바다를 건너도록 중생을 이끄는 일과는 어느 모로도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부처님께서는 형이상학적 사변을 권장하지 않으셨다. 아무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어떤 이론도 제시하지 않으셨다. “여래는 아무 이론도 신봉하지 않는다”는 문구는 경전에 자주 나온다. ‘진리를 몸소 체득’하셨기에 부처님은 단순히 이성적 사고에만 근거하거나 불완전한 지식에 근거한 견해들은 내버리셨다. 이성은 좋은 길잡이이며, 그것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한 그보다 더 나은 길잡이도 없다. 또 이성에 반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경(究竟)’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는 특정 항해의 기정점(起程点)은 이성이 자체 힘만으로는 우리를 더 이상 앞으로 진전시켜주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거기서부터는 더 높은 마음[增上心, 四禪의 心]이 넘겨받아서 나머지 항해를 마무리지어야 한다. 분별을 일삼는 개념적 마음의 제반 추리행위들은 기정점 이전까지는 도리 없이 용인되겠지만 그 후에는 어느 정도는 장애로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식도 지혜에 공헌하게 만들 수 있으니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 물리세계를 해부해내기 이전에 살았던 선조들보다 어쩌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들을 이해하는 데 좀 더 나은 입장에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아는 사실들만 가지고 사유하도록 정신적 훈련을 시키는 과학적 방법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이런 방법을 절대 진리를 탐구하는 데 적용한 최초의 분이 부처님이시다. 고통이라는 관찰된 사실에서 시작하여 존재의 제 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고통이라는 사실의 원인들과 그 처방을 찾아내셨던 것이다. 그 결과가 법을 요약한 사성제이다. 그리고 과학이 자체의 제 발견을 실증적 증명에 의뢰하듯이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가르침을 이론이나 종교적 독단 또는 몽상가의 꿈이 아니라 누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해 낼 수 있고, 또 실제로 증명되어 온 진실로 제시하신 것이다. 불사의 문을 여시고 나서는 그 열쇠를 한 사람 또는 특정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각자 스스로 노력해서 누구나 그 문으로 들어가도록 활짝 개방해 놓으셨다.
법은 더 물을 것도 없이 ‘심오하고 미묘한 것이고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쓰시는 언어체계에서 지혜는 학문적 배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혜라는 말은 사물을 분명하게 보는 능력을 뜻한다. 이런 면에서는 어린아이가 철학자보다 더 지혜로울 때도 가끔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부처님께 최초로 암시를 준 것도 어릴 때의 명상경험이었다. 나이나 경험 박식함 이런 것들은 지혜와 짝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어린이의 천진함은 단순한 동물적 무지일수도 있고 전생에 얻은 바 통찰력이 수반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많든 적든 제근(諸根)을 온전히 갖추기만 했다면 학식이 높거나 일자무식이거나 인생의 참 성질을 찾아내고 또 열반에의 길을 밟을 수 있는 수단을 이미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 불사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저자 소개
프란시스 스토리(아나가리카 수가타난다 1919-1971) 영국출신. 런던대에서 의학을 전공하다 광학 연구로 전환. 비교종교학 공부 도중 16세에 발심, 불교에 귀의. 2차 대전에 인도에서 군 복무 중 사르나트를 방문, 마하보디 협회와 연관 맺음.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종교생활에 전념하기 시작, 상가라타나 장로로부터 ‘프리야달시 수가타난다’라는 법명을 받고 재가 수행자가 됨. 1954년 미얀마 양곤에서 불자협회 설립, 회장으로 활약하다 건강 때문에 스리랑카로 옮김. 골수암으로 투병하다 영국으로 돌아와 병원생활 끝에 1971년 4월 26일 임종을 맞음. 정신을 끝까지 맑게 유지하려고 일체 약의 복용을 거부하며 정념을 챙기는 가운데 숨을 거둠. <고요한 소리>에서 이미 번역 출간한 그의 작품으로는 보리수 잎 여섯 : 『불교의 명상』, 보리수 잎 열셋 :『불교와 과학, 불교의 매력』. 보리수 잎 스물다섯 :『큰 합리주의』가 있음.
1) 필립 토디 (1960), 『장 폴 사르트르 - 문학적 정치적 연구』
2) 역주 : 완전히 정적(靜的)인 것은 아니고 다른 선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적인 만큼, 동(動)하는 것 역시 크게 동(動)하지는 않는다는 뜻.
3) 역주 :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24가지 조건양태(paccaya) 중 선행 조건인 전생연(前生緣:purejāta paccaya) 과 동시발생 조건인 구생연(俱生緣:sahajāta paccaya)을 말함. (냐냐띨로까 큰스님 지음 『Buddhist Dictionary』 참조)
4) 윌리엄 제임스의 다음 말, 즉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맞대놓고 부정하는 것은 생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길 없기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황당하게 들릴 것이다. 따라서 일부 독자들이 여기에서 책을 덮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해명을 서둘게 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의식이란 단어가 실재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에 대응한다는 점을 역설하려는 데 있다.”(『의식은 존재하는 것인가? 』1904.)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정태적 개념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5) 이 주제에 관한 더 상세한 설명은 프란시스 스토리,『윤회의 경우』Wheel Publication 12-13 참조.
6) 리스 데이비스는 스펜스 하디를 좇아 무유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를 ‘내생은 없고 존재는 현생으로 마감한다는 관념에서 현생을 사랑함’ 따라서 ‘이 현세에서 성공하기를 갈구함’이라고 본다. 『불교의 경전들』 「동양의 성전」 11권 148-149쪽 주(註)에서.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는 자아 ― 실체가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자아 ― 소멸 욕구에 역점을 둔다.
7) 연기에서 ‘행’이라는 말은 정신활동의 유형 중의 하나인 ‘습관 형성’에서 유추한 ‘업의 형성력’이라는 말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 이 때 주로 의미하는 바는 재생을 가져오는 의도적 활동이라는 뜻이다.
8) 아누룻다 스님(11-12세기 경)의 저작으로 알려진 논서. 후기 남방불교 전통의 축을 이룬다 할만치 큰 영향을 끼쳐온 저술.
9) 이 중요한 주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에게 삐야다시 큰스님(Piyadassi Thera)의 『Dependent Origination』, Wheel Publication No. 15의 정독을 권함.
10) 오십여년 전에 고(故) 우 쉐 잔 아웅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각이 방사선과 같다고 인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생각에 감응하는,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물질을 이용하여 우리들 생각의 ‘파장’과 그 지속기간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게 될 날이 언젠가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랴.” 『철학개요(Compendium of Philosophy)』 284쪽 (「攝아비담마義論(Abhidhammatthasaṅgaha )」의 첫 영역본, 1910. 쉐 잔 아웅과 리스 데이비스 부인 공역.)
11) 서른 여섯가지 갈애의 흐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빠알리 7론 중 『분별론(Vibhaṇga)』의 제17 雜事分別品에 나온다.
12) 소마 테라가 번역한 『초전법륜경』(Bodhi Leaves No. B. 1.)에서 인용.
13) 역주 무기(无记) : 1. 부처님께서 14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은 것.(대답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후기 아비담마에서 나온 말로 행인데 행 중에) 선도 악도 아닌 것을 가리키고 중립적인 것, (업) 결과를 낳지 않는 것. 여기서는 앞의 뜻으로 본다.
14) 역주 : 청정도론에서는 사(思 takka)는 일반적 일상적 사고, 의식적 사고와 무의식적 사고를 포함하고 심(尋 vitakka)은 의도적 사고, 목적 지향적, 집중된 생각으로 쓰고 있다. (『청정도론』 X. 33)
15) 욕계는 인간계를 포함하는 존재의 세계이다.
16) 역주 : 이 말은 남방 교학 전통에서 말하는 17 심찰나 분상에서 매우 빨리 이어짐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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