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
聖八支道
비구 보디 지음|전병재 옮김
The Noble Eightfold Path
Way to the End of Suffering
Bhikkhu Bodhi
The Wheel Publication No. 308/311 1994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Sri Lanka
*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빠알리성전협회(PTS)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경임.
* 로마자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함.
* 각주는 원주(原註)이며, 역자주는 [역주]로 표기함.
▲ 차례
시작하는 말 6
Ⅰ ‘고’가 끝나는 길 11
Ⅱ 바른 견해 37
Ⅲ 바른 의도 66
Ⅳ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96
V 바른 노력 132
Ⅵ 바른 마음챙김 159
Ⅶ 바른 집중 195
Ⅷ 지혜의 계발 219
맺는 말 244
저자소개 246
부록 1: 팔정도의 요소별 분석 247
부록 2: 권장 도서 251
시작하는 말
부처님 가르침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의 두 핵심 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사성제는 교의(敎義)에 해당하여 이를 들으면 대뜸 우리는 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부터 생각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팔정도는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넓은 의미의 율(vinaya)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의 구성 체계 안에서는 이 두 원리가 하나의 불가분의 통일체로 맞물려 있는데 우리는 이를 법율(Dhammavinaya), 또는 줄여서 법(Dhamma)이라 부른다.1) 사성제의 마지막인 도성제(道聖諦)가 곧 팔정도이고 또 도성제의 첫 항목이 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사실이 불법의 이와 같은 내적 통일성을 잘 보여 준다. 거듭 말해서 사성제의 체계 속에 팔정도가 들어 있고 팔정도는 다시 사성제를 수렴하는 식으로 이 두 원리가 서로 삼투(?透)하여 각기 상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통합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큰 가치를 지니는가, 즉 교의가 더 중요한가 실천도(實踐道)가 더 중요한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물어온다면 답은 도(道)의 쪽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도이기 때문이다. 도는 자칫 추상적 교리를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 되기 쉬운 법[Dhamma]을 진리의 지속적인 시현(示顯)이 되도록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팔정도는, 부처님께서 당신 가르침의 서두로 삼으신 ‘고’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출구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팔정도는 부처님 가르침의 목표인 ‘고(苦)로부터의 해탈’이 우리의 경험세계 속에서 접근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해준다. 그럴 때에만 해탈은 비로소 실다운 의미를 띠게 된다.
팔지성도(八支聖道)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앎의 문제가 아닌 실천 여부의 문제다. 그러나 그 길을 바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올바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 자체가 바로 실천행의 한 주요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바른 이해’야말로 팔정도의 여타 항목을 이끄는 선도자이자 길잡이 구실을 하는 첫 번째 항목으로서의 정견(正見)의 진면목인 것이다.
따라서 초심자의 열정으로서는 지적 파악이라는 과업이 귀찮고 마음만 산란하게 만드는 일이어서 선반 위에 올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지 모르지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수행이 궁극적 성공을 거두려면 바른 이해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자는 팔정도의 여덟 항목과 그 각각의 구성 요소들을 살펴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팔정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필자는 도(道)의 항목들을 설명함에 있어 부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 다시 말해 빠알리 경장에 나오는 말씀들을 주축으로 하여 되도록이면 간결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경전을 접하기가 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이미 고전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냐나띨로까 스님의 『붓다의 말씀』2)이라는 단행본에 담긴 부처님 말씀을 주로 인용했다. 그러나 그 인용구들 중에는 필자의 생각대로 조금씩 고친 경우도 없지 않다. 또 때로는 의미를 부연 설명하기 위해 주석서를 인용하기도 했다. 특히 제 7장과 8장에서「집중」과「지혜」를 필자 나름으로 설명할 때에는 5세기경 붓다고사 스님이 저술한 『청정도론』3)에 크게 의지했는데 이 책은 도의 실천 체계를 자세히, 그러면서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방대한 백과사전적 저작이다.
여기에서는 지면 관계상 각 항목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다루지는 못했다. 이런 결함을 보완하는 뜻에서 책 말미에 독자들에게 권장 도서 목록을 실었다. 그 책들을 통해서 팔정도 항목 하나하나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 수행에 전념할 경우, 특히 정(定)?혜(慧) 공부를 본격적으로 닦으려 할 때에는 책임 있는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스승과의 만남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비구 보디
I. ‘고’가 끝나는 길
고통을 겪다 보면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 해방의 길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은 빛이나 황홀경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고뇌, 실망, 혼란 등의 세찬 역풍 속에서 비틀거리며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苦)가 무언가 순수한 정신적 탐구를 출산해 내려면 밖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고’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고는 우리들이 보통 세상과 마주칠 때 손쉽게 빠져들기 쉬운 안이한 타성을 꿰뚫고, 저 발아래에 계속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위험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채는 인식이랄까, 그러한 내면적 각성을 촉발시키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와 같은 통찰이 비록 순간적으로 단 한 번 반짝 비치기만 해도 우리에게는 심각한 개인적 변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런 통찰경험을 한 번만이라도 겪게 되면 우리는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목표와 가치관을 뒤집어 엎어버리게 되고, 습관적으로 열중해왔던 일들도 하찮은 것으로 보게 되며 지금껏 즐기던 향락거리들도 불만스러워져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변화가 처음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법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각을 굳이 거부하려 들게 되고, 뻔한 사실을 놓고 쓸데없는 의심을 일삼고 있다고 생각하려 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엄연히 당면하고 있는 불만도 새로운 일을 추구함으로써 외면해 버리려 애쓴다. 그러나 탐구의 불길은 일단 점화되면 계속 타기 마련이다. 우리가 수박 겉핥기식 자기 개선에 스스로를 내맡기거나 아니면 낙관적 기질을 발동하여 마음 편한 대로 적당히 견해를 꾸며대어 그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 한, 애초의 통찰의 미광은 다시 불길을 뿜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치 못할 고경(苦境)과 맞서게 만든다. 바로 그 때가, 빠져나갈 길이 모두 막혀 버린 바로 그 시점이, 우리 자신의 불안한 상태를 끝낼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구와 기성의 지배적 사회규범의 압력에 떠밀려 인생을 어정쩡하게 살아오던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더 깊은 진실의 세계가 우리에게 손짓한다. 더 참되고 견실한 행복이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제 거기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편안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일단 정신적 삶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하고 거기에 필요한 가르침을 찾다보면 너무나 다양하고 서로 다른 교시들이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류 고금의 정신적 유산을 쌓아놓은 서가에는 제각기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심오한 길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정신적 가르침과 수련 방식들이 시장 바닥의 상품들처럼 즐비하게 펼쳐져 있다. 구경(究竟)의 경지를 향한 우리들의 탐구를 위해 필요한 지식들이 단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로 다른 수많은 가르침들 속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과연 어느 쪽이 우리를 해탈의 길로 이끄는 올바른 가르침이고, 어느 길이 허점을 안고 있는 잘못된 곁길인지를 올바로 판단해내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요즘 인기 있는 해결책 중 하나가 절충식 접근 방식이다. 여러 전통에서 편리한 대로 취사선택하여 자기 입맛에 맞게 꿰어 맞추는 것이다. 불교의 마음챙김 명상법을 힌두교의 만트라 암송과 조합할 수도 있고, 기독교의 기도를 수피즘의 춤과, 유태교의 카발라를 티베트 불교의 심상(心像)수련과 짜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절충주의는 우선 아쉬운 대로 세속의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 정신적인 삶을 사는 듯한 색조를 띠게 하는 데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색깔은 얼마 못가서 바래게 마련이다. 절충주의는 우리를 적당한 중간 기착지까지는 실어다 줄 수 있을지언정 종착점까지 가 닿는 믿음직한 수레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절충주의가 안고 있는, 서로 맞물린 두 가지 결함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절충주의가 자신이 끌어대고 있는 전통들 그 자체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삶의 질이 손쉽게 고양되기를 원한 나머지 위대한 여러 가지 전통들이 제시해 놓은 수행법들을 제멋대로 오려내고 갖다 붙이고 한다 해서 기대하는 대로의 성과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위대한 정신적 전통일수록 그것이 제시해 놓은 수행법들은 낱개로 만들어진 독자적 기법들의 단순한 얼개가 아니라 그 중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는, 완전체에 속하는 필수적 부분들이며, 실재의 근본적 본질과 정신적 탐구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수미일관한 통찰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무릇 정신적 전통이란 발을 살짝 담갔다가 쉽게 뺄 수 있는 얕은 개울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 같아서 우리 삶의 마당을 온통 덮쳐 버릴 수 있다. 우리가 그 강을 타고 여행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배를 띄워 깊은 곳까지 나아갈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할 것이다.
절충주의가 갖는 두 번째 결함은 첫 번째 결함에서부터 빚어진 것이다. 원래 정신적 수행 체계들은 각기 나름대로 진리관과 궁극적 선에 대한 인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상보관계를 이룰 수가 없게끔 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전통들의 가르침을 꼼꼼히 검토해 보면 각기 세상 보는 눈에 있어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차이들이 단순히 동일한 내용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라고 손쉽게 간주해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 차이들은 최고의 목표와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보여 줄 매우 상이한 경험들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상이한 정신적 전통들이 제시하는 시각과 수행법들이 본원적으로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절충주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한 길을 택하여 진지하게 전념해 볼 태세가 갖추어지면 또 다른 중대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과연 어떤 길이 참된 깨달음과 해방으로 이끌어 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지침은 우리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참된 해방의 길을 걸으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자문하고 확인하는 일이다. 신중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고’의 종결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일이다. 결국 그 모두가 고의 문제로 귀착된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고를 ‘충분히’, ‘최종적으로’ 끝장내는 길인 것이다. 여기서 이 두 수식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길은 모든 고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끝낸다는 의미에서 ‘충분한’ 것이고 또 어떤 고이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최종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살펴 본 것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당위성의 문제라면, 실제로 고를 충분히, 최종적으로 끝장내 줄 수 있는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점이 이와는 별개의 현실 문제로 다가온다. 우리가 어떤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전에는 그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떤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위해서는 그 길의 효험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필요하다. 정신적인 길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것은 새 옷을 고르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새 옷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옷을 거울 앞에서 직접 입어보고 그 중 가장 보기 좋은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신적인 길의 선택은 오히려 결혼을 하는 일에 더 가깝다.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를 구하는 경우에는 누구나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믿음직하고 한결같은 반려자와 만나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를 안내해 줄 길이란 어디에도 없으니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 보거나 아니면 동전을 던져 점이라도 쳐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선택을 할 때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맹목적이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도 유용한 지침은 있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길은 대체로 총합적 가르침의 틀을 갖추어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의 틀을 잘 검토해 보면 그 틀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길이 과연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검토할 때에는 다음 세 가지를 평가기준으로 삼아볼 수 있다.
첫째, 그 가르침이 고(苦)의 범위에 대해 충분하고도 정확한 그림을 제시해야 한다. 만약 그 가르침이 제시하는 고의 그림이 불완전하거나 결함이 있으면, 그런 가르침이 제시하는 길 또한 흠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마련해 주지 못할 것이다. 환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충분하고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고’로부터의 해방을 구하는 우리도 우리의 상황에 대해 믿음이 가는 설명을 해주는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기준은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외적 증상을 개괄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드러난 증상 아래 깔려있는 근본 원인까지 꿰뚫어보고 그 원인들을 정확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어떤 가르침이 원인분석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면 그 치료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 번째 기준은 바로 길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어떤 가르침이든 그것이 제시하는 길은 반드시 고를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길은 고의 원인부터 제거함으로써 고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 길이 이와 같은 근본적 수준의 해결을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궁극적 의미에서 그 길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런 류의 가르침은 병의 증상을 가시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 만사가 해결된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치명적 병에 걸린 사람이 병의 뿌리가 속에서 계속 자라고 있는데도 겉으로 성형수술이나 받고 만족해도 되겠는가.
요컨대 고를 종식시키는 참된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라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첫째로 고의 범위와 깊이에 대해 완전하고도 정확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둘째로 고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내놓아야 하며, 셋째로 고의 원인을 뿌리째 뽑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글은 세상의 온갖 수행법들을 이 세 가지 기준에 비추어 일일이 따져보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Dhamma)과 그 법이 고의 문제에 대해 제시하는 해결책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갖추고 있는 본연의 성질, 즉 사물의 시종을 설명함에 있어 덮어놓고 믿음을 강요하는 식의 종교적 교의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고’로부터의 해방을 경험을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전언(傳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우선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이 전언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를 실제로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을 구체적인 수행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이 바로 성팔지도(聖八支道 ariya a??a?gika magga)이다. 이 성팔지도 또는 팔정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심장이나 다를 바 없다. 이 팔정도를 발견함으로써 부처님의 깨달음이 개인적인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 의미를 띠는 것으로 되었고 그래서 그분으로 하여금 일개 현자나 자비로운 성자의 지위를 넘어 ‘세상의 스승’으로 우뚝 서시게 한 것이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그분의 모습은 다음과 확실히 표현된다.
“일찍이 생긴 적이 없었던 길을 생기게 하신 분, 일찍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길을 만드신 분, 일찍이 선포된 적이 없었던 길을 선포하신 분, 길을 아시는 분, 길을 보시는 분, 길을 안내하시는 분”(『중부』108경)
그분 자신도 다음과 같은 말로 구도자들을 고무하시고 그들에게 약속하신다.
“너 자신이 분발해야 한다. 모든 부처들은 단지 길을 가르치는 스승일 뿐이다. 이 길을 나아가는 선(禪)수행자들은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법구경』 276게)
팔정도가 과연 해탈로 안내하는 확실한 길인지 점검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언급한 세 기준에 비추어 부처님께서 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는지, 또 그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그 치료책으로 어떤 처방전을 제시하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고’의 범위
부처님께서는 고의 문제를 슬쩍 건드리기만 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 당신 가르침의 초석으로 삼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삶이 그분께서 고(苦 dukkha)라고 부르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게 묶여 있다는 선언[生卽苦]을 당신 가르침의 요체인 사성제의 모두(冒頭)로 삼으신다.
빠알리어 ‘둑카’는 흔히 ‘고통(suffering)’이라고 번역되고 있으나 이는 통상적으로 느끼는 아픔이나 고통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뜻하고 있다. 이 말은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들을 제외한 모든 중생의 삶을 관류하는 근본적 불만족성을 일컫는 것이다. 이 근본적 불만족이 때로는 슬픔, 비탄, 실망, 절망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은 사물이 완전해지는 일은 결코 없다거나,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으로 기대하는 일에 충분히 부응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등의,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모호한 것,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일종의 느낌으로서 우리들 알아차림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는 그러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고’라는 사실이야말로 참다운 정신적 문제로서 유일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밖의 다른 문제들 - 수세기에 걸쳐 종교 사상가들을 우롱해 온 신학적, 형이상학적 문제 같은 것들 - 은 ‘해탈로 이끄는 것이 못되는 일들’이라 하여 조용히 옆으로 젖혀두신다. 부처님은 당신이 가르치는 것은 ‘고’와 ‘고의 종식’, 다시 말해 둑카[dukkha 苦]와 둑카의 멸[滅]일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부처님은 고를 개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가 취하는 다양한 모습을, 분명한 것은 분명한 대로 미묘한 것은 미묘한 대로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신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가장 비근한 고, 즉 생명 그 자체의 생체적 과정에 내재한 고로부터 시작하신다. 고는 태어나고 늙고 죽는 일에서, 병들기 쉽고 사고 당하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일들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드러난다. 또 고는 가슴 아픈 이별, 불쾌한 만남,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함 등에서 비롯되는 노여움, 슬픔, 좌절, 두려움으로 드러난다. 심지어는 즐거움조차도 고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 즐거움은 그것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행복을 안겨주지만 그런 즐거움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즐거움도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아쉬움뿐이다.
우리들의 삶은 대부분 쾌락의 목마름과 고통의 두려움 사이를 오가고 있다. 즐거움을 좇거나 고통을 피해서 하루하루를 허둥대며 살다보면 만족스런 평화는 거의 누리지 못하고 만다. 진정한 만족은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지평선 저 너머 멀리 있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다. 그러다가 평생 쌓아올린 자기 존재도 포기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결국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죽음마저도 고의 종말이 될 수는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왜냐하면 생의 흐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생명이 한 곳에서 한 육체와의 인연을 끝맺음할 때 ‘식(識)의 연속’ 즉 ‘각 개인의 식의 흐름’은 어디선가 새로운 육신을 물질적 바탕으로 삼아 다시 이어진다. 이와 같이 생의 순환은 거듭거듭 생?노?사를 지어나간다. 그런데 이 끝도 없는 생의 순환과정을 추진하는 요소는 갈애, 즉 존재를 더 지속하려는 갈망이다.
부처님께서 윤회(sa?s?ra)라고 하신 이 재생의 연속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대를 줄곧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이어져 간다. 이 과정은 첫 공간적 출발점도 그 시간적 기원(紀元)도 없다.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우리는 항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전생(前生)으로서, 한 존재 상태에서 다른 존재 상태로 방랑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지옥계, 축생계, 인간계, 천상계 등, 재생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세계를 그려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최후의 안식처는 아니다. 이 중 어느 차원의 세계에서도 삶이 있는 한 죽음을 피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삶은 무상한 것이고 따라서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고(苦 dukkha)인 불안정성이라는 특징을 띠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의 완벽한 종말을 열망하는 사람은 어떠한 세속적 성취나 삼계(三界)에서의 위치에도 만족해서 머무르고 있을 수 없다. 고의 최종적 종말은 오직 불안정한 소용돌이로부터 완벽하게 해탈을 이루어낼 때라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의 원인
이미 말했듯이 고를 끝장내는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고가 무엇을 인(因)으로 해서 일어나는지를 믿음이 가도록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고를 멈추기 위해서는 고가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고를 그 원인들과 함께 멸해야 한다. 이 원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과연 그것들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철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의 생겨남[生起]에 관한 진리[集聖諦]’를 밝히는 데 부처님은 당신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셨다. 그 발단이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것, 즉 우리 존재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남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해치는 근본적 질병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주셨다. 이 질병의 징후는 정신적으로 불건전한 상태로 빠지기 쉬운 우리들 기질 속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불건전한 상태는 빠알리어로 ‘낄레사(kilesa)’라 하고 보통 번뇌(煩惱), 또는 정신적 오염원이라고 번역된다. 번뇌의 가장 깊은 뿌리는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이다. 탐욕(貪欲 lobha)은 자기중심적 욕구이다. 즉 쾌락과 소유를 향한 욕심, 생존의 욕구, 권력ㆍ지위ㆍ명예를 통해서 자긍심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 욕구 등이 그것이다. 진에(瞋? dosa)는 부정적 반응을 뜻하는 것으로 거부, 짜증, 저주, 미움, 적개심, 분노, 폭력 등의 형태로 드러난다. 치암(癡暗 moha)은 정신적 무지를 뜻한다. 즉 분명한 이해를 차단하는 무감각의 두꺼운 껍질을 가리킨다.
이 세 뿌리로부터 자만, 질투, 야심, 무기력, 오만 그 밖에도 각양각색의 다른 번뇌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모든 번뇌가 아우러져 뿌리와 가지를 이루면서 다양한 형태로 고를 빚어낸다. 고통과 슬픔, 두려움과 불만, 생사윤회 속에서 의지함 없는 떠돎 등의 형태로. 따라서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번뇌들부터 없애야 한다. 하지만 이들 번뇌의 제거는 아주 체계적으로 도모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이 일은 없애야겠다는 의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없어졌으면 하는 소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일은 철저한 탐구와 분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번뇌가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 의지하는 것들의 뒷받침을 제거해내는 것이 우리들의 능력으로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규명해 내어야 한다.
부처님은 다른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하나의 번뇌, 모든 번뇌를 자리 잡도록 만드는 하나의 뿌리가 있다고 가르치신다. 이 뿌리가 무명(無明 avijj?)이다.4) 무명은 단순한 인식의 부재, 특정한 정보 조각들에 대한 지식의 결여가 아니다. 세부적 지식을 아무리 많이 축적해도 무명은 여전히 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더 무섭게 약삭빨라지고 빈틈없게 된다. 고의 근원적 뿌리라 할 때의 이 무명은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근본적 어둠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이 무명은 단순히 올바른 이해를 흐리게 만드는, 소극적 역할에서 그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부단히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큰 사기꾼과 같은 것이다. 이 무명이라는 사기꾼은 수많은 일그러진 지각과 개념화를 요술처럼 부리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 현상을 연출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이를 마음 스스로가 현혹되어 빚어낸 구성물인 줄도 모르고 그것이 곧 세상의 특질인 것으로 착각하면서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잘못된 지각과 관념이 번뇌를 키우는 토양으로 작용한다. 마음은 즐길 거리가 됨직한 것을 겉만 보고는 애착을 일으켜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버리는데 그 결과가 탐욕[貪]이다. 우리는 기쁨을 얻기를 갈망하지만 장애가 나타나거나 방해를 받게 되면 성이 나고 반감이 치밀기 십상이다. 혹은 우리는 모호성 속에서 허둥대다 보면 어느덧 우리의 시야는 흐려지고 마침내 미망[癡]에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간단히 살펴보아도 고를 키우는 터전은 쉽게 발견된다. 무명은 번뇌로, 번뇌는 고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다. 이 인과의 기반이 버티고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는 감각적 즐거움, 사회적 즐거움, 지적?정적 즐거움 등 온갖 즐거움을 아직도 꽤 많이 누리고 있을 수 있지만 아무리 많은 즐거움을 경험할지라도, 아무리 고통을 잘 피해낼지라도 ‘고’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존재의 핵심에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는 고의 영역 안에서 계속 맴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의 원인 제거
고로부터 ‘충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고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하는데, 이는 곧 무명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명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명의 반대인 명(明)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해진다. 무명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명 제거에 필요한 것은 곧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인식이다. 단순한 개념적 인식, 관념으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앎」이면서 동시에 「봄」이기도 한 지각으로서의 인식 말이다.
이런 종류의 앎을 혜(慧 pann?)라고 부른다. 혜야말로 무명이 범하는 왜곡 작업을 교정하도록 돕는다. 지혜는, 우리 마음이 실재와 마음 사이에 통상적으로 만들고 있는 관념, 견해, 가정 등의 장막에 구애되지 않고 곧바로, 그리고 즉각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무명을 없애자면 지혜가 필요하다. 그럼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지혜란 사물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확연한 앎이므로 이는 단순히 학습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관련 자료를 수집·축적한다고 해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혜는 계발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일련의 조건을 갖춤으로써 지혜는 생겨나게 되는데, 이들 조건을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이란 실은 심적 요소들로서 특정 목적지로 뻗어있는 행로, 즉 도정(道程)이라 부를 수 있는 체계적 구조를 이루는 의식의 구성요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지는 고의 종식이고 거기에 이르는 도정은 여덟 항목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팔정도이다. 이 여덟 항목이란 바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의도[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부처님은 이 길을 중도(中道 majjhim? pa?ipad?)라 부르신다. 팔정도를 중도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고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어 두 가지 잘못된 시도, 즉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불만을 해소하려는 시도로, 감각적 쾌락을 극단적으로 탐닉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쾌락을 주지만 그렇게 얻은 쾌락은 허망하고 순간적이어서 결코 깊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감각적 욕구가 인간의 마음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에 얼마나 강하게 집착하게 되는지도 속속들이 꿰뚫어 알고 계셨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또 이런 쾌락이 ‘욕심 놓음’에서 오는 행복감에 비해서 매우 저급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구경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감각적 쾌락을 끊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가르치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행위를 “저열하고, 범속하고, 세속적이고, 고귀하지 않고, 목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다른 하나의 극단적 방법은 고행, 즉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방법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이런 고행은 아무 소득 없이 고생만 하게 만드는, 잘못된 가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고행으로 인해 범하게 되는 잘못은, 문제의 진짜 근원은 탐?진?치 삼독에 사로잡힌 마음에 있는데도 애꿎은 육신을 속박의 원인으로 보고 다그치는 데 있다. 번뇌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육신을 괴롭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뿐 아니라 해탈을 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인 이 소중한 몸을 훼손하고 쇠약하게 하는 자기 파괴적인 짓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두 번째 극단적인 방법을 “고통스럽고, 고귀하지 않고, 목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셨다.5)
이 두 가지 극단적 접근방식을 떠난 것이 곧 팔정도이다. 그런데 이를 중도라 한다 해서 양 극단을 적당히 타협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이들 각각에 내포되어 있는 잘못을 피하고 그 둘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팔정도는, 욕구의 허망함을 알고 그것을 놓아버리게 하는 데에 초점을 둠으로써,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극단을 피한다. 감각적 욕구와 쾌락은 진정한 행복의 수단이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의 원천이기 때문에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리는 수행이라 해서 육신을 괴롭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 수련이므로 몸은 이런 내면적 작업에 적합한,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는 잘 보살펴서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한편, 정신적 기능들은 해탈을 위한 지혜를 발생시키도록 훈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팔정도라는 중도로서 ‘눈(cakkuhu)을 생겨나게 하고 지(智 n??a)를 생겨나게 하고 평화로(upasama), 직지(直智 abhinn?)로, 깨달음(sambodhi)으로, 열반(nibb?na)으로’ 이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