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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불교- 과학시대의 종교(2)


과학이 종교적 믿음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의 치유를 위해서 심리과학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병든 사회를 위해서 사회과학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분석전문의나 사회복지사는 어느 정도까지 성직자나 전도사의 일을 계승할 수 있는가?


심리과학이나 사회과학이 이러한 종교적인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비효율적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은 동일한 문제를 세 가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제기한 것이므로 한 데 묶어서 다루어야 합니다.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여러 학문적 분야는 병든 마음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바가 없지 않으나 아직도 실험적 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들은 이 거칠고 어지러운 사회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것이 없는 데서 생기는 긴장과 내적 갈등을 해소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현대 의학은 신경증을 치료하는 데 진정제나 안정제 따위에 의존해 버리는 경향이 강합니다. 심리과학은 사람의 심적 불안의 요인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습니다. 그 요인을 밝혀내어 제거하지 못하는 한 이러한 ‘불안’의 완전한 치유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적 치료의 방법은 오래 걸리고 힘들 뿐 아니라


그 성과도 결코 보장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치료는 대부분의 소득 계층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자신감과 내적 조화를 회복시키는 데 있어서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심리과학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종교적 신념만큼 성공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조금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심리과학으로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깊은 내적 각성을 이끌어 낼 수 없으며 이 위험한 세계에서의 안전감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종교의 몫입니다.


사회과학은 우리의 주변 환경과 외적 조건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사회과학은 이 외적 조건들을 개선할 수 있는 한에서만, 그리고 사람들이 이 조건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사회과학은 사람들의 내적인, 그리고 사적인 삶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폭풍에 휩싸인 것과 같은 긴장 속의 삶이 항시 안고 있는 위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있는 피난처, 곧 평온과 자신감이 필요한 곳은 바로 내적이고 사적인 삶인데 말입니다. 사고, 질병, 육체적․정신적 기능의 쇠퇴 그리고 늙음과 죽음은 사회과학의 처방으로는 막을 수가 없으며 그런 점에서도 사회과학은 종교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본능적 욕구만 충족하면 되는 동물 이상의 존재인 인간은 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하며, 그러한 욕구가 대단히 강해서 아무것도 믿지 않기보다는 비록 허황할지라도 종교의 이름으로 제시하는 주장을 받아들일 자세를 가져 왔습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종교의 이러한 주장들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이렇게 깨트려버린 다양한 종교적인 믿음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안을 마련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의학이나 생물학이 기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새 시대의 의료 종사자들이 약물을 통해서 옛 종교 의식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와 자애심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외과 수술과 약물로 우리가 개인적인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같은 문제를 말만 바꾸어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옛 종교 의식이 현대인에게 더는 치유 효과가 없기 때문에 약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약물이 주는 효과는 심리적으로 현대인의 조상들이 종교 의식에서 얻었던 것과 똑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약물이 일시적으로는 옛 종교 의식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둘 다 심리적 불안의 근본적 요인, 곧 인간의 욕구를 잠재우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전통적 종교들은 최소한 사람으로 하여금 욕망을 억제하도록 제동을 거는 데 반해, 오늘날 우리의 상업적 문명은 모든 욕망이 다 채워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면서 그러한 욕망을 더 키웁니다.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경쟁심을 가지도록, 그리고 가지고 싶은 것을 어떻게든지 손에 넣도록 가르침을 받으며 이러한 능력을 미덕으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남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 많은 부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일에 성공을 못 한 실패자가 되었을 때 이것 외의 다른 생의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좌절감과 적응 실패로 고통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얻고 싶은 것을 다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보다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실패한 사람은 옛 종교 체재 속에서 저주를 받은 사람이나 한가지입니다. 과학이 이러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헛되이 완화제나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사람들이 정신질환, 정신 신체 질환, 신경증을 앓거나, 알코올 중독이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는 오직 한 가지 요법이 있을 뿐입니다. 곧 지식과 이해력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은 자기의 존재를 지배하는 법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나쁜 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면 자기가 왜 그러한 환경에 처해 있는지, 왜 남들은 자기보다 더 좋은 환경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절망에 빠지지 않고 그러한 처지를 견디어 갈 수 있으며, 기대를 가지고 더 나은 미래를 자신 있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업과 재생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바로 이 합리적 이해력입니다.


 이것이 바른 삶을 향한 노력을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며 동기가 됩니다. 이 합리적 이해력이야말로 성직자와 그가 행하는 종교 의식(儀式) 그리고 현대 의료 종사자와 그들의 약물 처방,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보다도 월등히 낫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기 운명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자기이며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하루하루를 정신적으로 새로워지게 하고 희망에 찬 시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그리고 영구한 정신 치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기 통제를 통해서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 심리학의 바탕이며, 지혜와 통찰력을 얻음으로써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물을 신의 제단에 바치기보다 유전학자나 화학자에게 바치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


오늘날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대체로 과학자들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이 특수한 분야에 관한 한 그들은 옳습니다. 불교도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종교는 곡식을 많이 수확하고 못하고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밭을 부지런히 가꾸고 거름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신의 제단에 아무리 많은 기원을 한다고 해도 더 좋은 수확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경작자가 과거에 좋지 않은 업을 쌓았을 경우에는 그 어떤 과학의 힘을 가지고도 벌레, 병, 불순한 기후 등이 그의 농사를 망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인과응보가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 이상의 여러 원인이 작용합니다.


신의 제단, 과학, 혹은 자신의 노고 중 어느 하나를 전적으로 믿거나, 아니면 그 세 가지를 모두 믿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과학적 유물론자나 유신론적 종교주의자, 상식적인 보통사람들의 해답과는 다른 해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저는 이 점을 특히 강조하는 바입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단순한 ‘우연’으로 보이는 일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농부라면 누구나 불교의 설명이 그 어느 설명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물학 분야의 과학은 사회적 무질서와 불공평(injustice)을 막는 데 일조할 수 있는가?


인간을 개조하는 데까지 이를 만큼, 다시 말하면 인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인류를 창조하는 데까지 이를 만큼 자연의 생물학적 과정에 개입하지 않고는 사회적 무질서와 불공평성을 막는 데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범죄자나 범죄를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뇌를 수술함으로써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설사 그러한 미덥지 못한 기술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해도 그 기술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러한 수술은 개인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거운 도덕적 책임을 안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인권이 말살된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나 그와 같은 수술이 널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의 핵심적 문제는 불공평에 관한 것입니다. 생물학은 오직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들고, 인간 본성에 보편적 획일성을 부여함으로써만 불공평성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집단적 사고로 개인과 개인 사이의 견해 차이를 없애는 그런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이미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미래에는 사람들이 개별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마치 개미사회의 단위 조직처럼, 국가가 필요로 하는 대로 그에 맞추어 정신 감응을 전파하는 두뇌 센터의 통제를 받아서 집단적으로 사고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불공평이라는 것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을 때만 존재합니다.


불공평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면 어떤 불공평한 일도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과 실제로 그러한 것과의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습니다. 불평등과 불공평해 보이는 것의 배후에는 업의 법칙이 실재하는데 이에 간여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습니다. 민주주의에 입각한 법률로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모든 사람의 지능이나 성격이 같아지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불공평성은 인간의 특성 그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왜 어떤 아이는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고, 왜 다른 아이는 정신박약자로 태어납니까? 생물학자는 개인적 특성이라는 것은 유전자를 통해서 물려받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생물학적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 왜 그러한 과정이 생겨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자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은 유전자가 하필이면 ‘왜’ 꼭 그런 식으로만 결합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불교도 그러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밑바탕에 있는 업이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업의 작용을 훼방하기 위한 시도를 할 수 있고 또 그 업의 흐름을 어느 정도 바꾸어 놓을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는 종국적으로 인류에 대한 재앙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개미처럼 획일적 상태로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획일적 조건하에서는 인간의 지극히 높은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공평하다고 의식하지만 않는다면 이 세상에 불공평이란 없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그보다 나은 해답은, 불공평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사람이 만든 불공평으로서 이것은 고쳐질 수가 있으며, 또 하나는 타고난 불공평으로 겉으로만 불공평해 보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어떤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는지는 모르면서 오직 그들이 현재 비참한 처지에 있는 것만을 보고 세상이 공평치 못하다고 탓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현생에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불리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업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무슨 죄를 짓고 거기에 들어왔는지 모르면서 감옥을 보러 온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직 죄수들의 현재의 불리한 처지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지면서 작용하는 인과의 법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엄정한 업의 원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봅니다. 그러한 사람은 부당한 고통이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이러한 고통은 도덕적 계율을 지킴으로써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이러한 이해만 있으면 사람들은 운명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으로 인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물학에서 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그 어느 방법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지구는 수많은 위험요소들을 안고 있다. 그런 위험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우리의 소망에 대해 물리학은 화답을 하고 있는가?


과학 기술의 덕택으로 우리가 많은 생활상의 편의를 누리고 있는 한편, 핵 물리학을 비롯한 그러한 과학 실험실들에서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많은 위험 요소가 발생한다. 생활의 편의와 생존의 위협이 과연 서로 맞비김 될 수 있는가?


나아가, 인간이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우주가 무심하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절망에 빠져버린다면 그 모든 편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또, 우주는 우리가 뜨겁게 원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태양과 모든 생명의 소멸이라는 죽음의 냉기로 귀결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곳인가?


물리학은 사람들의 이러한 심정을 달래주거나 생각을 바꿔 줄 수 있는가?


우리 생활은 내연 엔진을 비롯해서 과학기술의 모든 성과 덕분에 편리해지기는 했으나 그에 비례해서 위험도 많아졌습니다.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베푼 것 중에는 우리를 다치거나 죽게 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동차나 비행기 사고로 죽으며, 노동 절약을 위해 고안된 기계에 감전사하고, 의사의 주사기나 수술용 칼에 죽음을 당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러한 재난들을 사고라고 하지만 실은 인간이 자신의 탐욕, 증오, 무지 때문에, 또 도덕적 계율을 무시함으로써 과학 기술을 오․남용하여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적 재해나 인간의 불완전성 앞에서는 여러 모로 무력합니다.


삶은 항상 서로 상반되는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나 유리한 점이 있으면 불리한 점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정신적 도덕적 가치에 맞게 적용되지 않고는 그것이 우리에게 더 많은 행복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설사 그런 방식으로 적용된다 해도, 과학기술의 의도적인 오용이나 없앨 수 있을 뿐,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 우연한 재난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재난이 왜 일어나는 것인지는 여전히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인간이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우주가 무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리적 세계는 스스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거나 은혜로운 신이 있다거나 하는 데 대해서는 아무런 암시도 하지 않습니다. 불교도는 이런 사실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삶이란, 욕망의 충족 이외에는 아무 목적도 없는 갈애(渴愛)라는 힘이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연이은 재생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생명의 과정을 불교에서는 윤회(Samsāra)라 합니다. 이 과정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려는 갈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 이상의 더 높은 목적은 없다고 봅니다. 이 점이 바로 불교가 과학과는 일치하고 유신론적 종교와는 완전히 상치되는 매우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부분입니다. 불교에서는 더 높은 인생의 목표가 꼭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 높은 정신적 목표는 갈애를 소멸시킴으로써, 반복하기만 하는 재생을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우주적 질서, 또는 윤회를 넘어서는, ‘열반’이라고 하는 더 없이 높은 목표를 지향합니다. 오직 거기에서만 절대적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윤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투쟁, 곧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만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쾌락 원리’와 생물학적 진화론에서 말하는 ‘생존 경쟁’은 모두 불교가 늘 인정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불교의 인과 법칙에는 도덕적 질서가 내재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무감각하고 비인격적이며 무심한 기계에 눌리듯이 인과율에 짓눌려 버린다면 그것은 도덕적 질서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자유의지를 잘못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냉혹하고 사정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더더욱 사람은 스스로 자비의 마음을 계발해야 합니다. 윤회에 매인 삶 속에는 없는 높은 자질을 그 속에 부어넣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신성(神性)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스스로를 정화하고, 욕망[貪], 악의[瞋], 미망[癡]의 세속적 본능을 소멸시킴으로써 사람은 스스로 ‘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습니다. 윤회에서 인간계보다 높은 주처에는 청정한 신(visuddhi-deva)이라는 존재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의 아라한도 역시 청정한 신입니다. 그들은 모든 세속적 집착이 끊어져 없어졌을 때만 얻을 수 있는 희열과 완전한 평화를 누립니다. 이 경지에 이르는 것이 도무지 아무 목적 없이 반복되는, 윤회하는 삶에 우리 스스로가 부여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우주는 우리에게 아무런 목적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삼든지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입니다. 우리 앞에는, 재생이 있을 때마다 따라오는 모든 괴로움을 안고, 감각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는 길을 가든가, 아니면 욕망의 불길을 꺼 없애고 열반이라는 지극히 높은, 궁극적인 경지에 드는 길을 가든가 하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습니다.


조건 지어진 존재는 무상하며[無常], 괴로움에 매여 있고[苦], 자기 실체가 없습니다[無我]. 그런 까닭에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 실재는 윤회 바깥에, 윤회 너머에 있습니다. 열반이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열반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낱말이나 개념은 상대적 세계에서의 삶의 경험에서는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반은 경험만 할 수 있을 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열반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조금은 짐작케 하는 특정한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조건 지어지지 않음(Asaṅkhata), 피안(윤회너머)(Pāra), 늙음이 없음[不老 Ajarā], 죽음이 없음[不死 Amata], 영원함(Dhuva), 귀의처(Ṭhāna), 구원처(Lena) 등으로 표현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열반은 질적(質的) 가치를 가지고 논할 수 없습니다.3) 왜냐하면 질(質)이라는 것은 상대적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열반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무상하고, 고에 매여 있으며, 실체성이 없는 이 윤회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무상하지 않고, 고로부터 자유로우며, 궁극적인 의미의, 실재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열반’이라는 말로 뜻하는 바로 그 ‘실재(Reality)’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부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부정과 긍정 양쪽 저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부정이나 긍정은 상대적 세계의 양쪽 극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한 쪽은 다른 쪽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양쪽 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대립관계가 우주를 있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있지도 않은 ‘자아’가 가지는 관점과 관계가 있는 선과 악이 항상 혼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반은 자아라는 미망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인간의 자아 중심적 관점이 빚어낸 대립관계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설사 태양이 죽어 이 세상이 온기라고는 없는 동토가 되리라는 것이 예견된다 해도 불교도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부처는 우주, 혹은 순환하는 세계가, 마치 개개인의 삶이 그렇듯이, 끝없이 연속해서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언젠가는 틀림없이 종말이 옵니다. 이전의 세상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사는 존재들은 그들의 업과 보에 따른 삶이 계속되는 한 다른 주처, 다른 우주에 다시 태어나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존재 상태는 다 무상하되, 열반만이 변함이 없습니다.


과학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도 못합니다. 오직 지혜와 이해력만이 그럴 힘이 있습니다. 우주와 삶의 본질을 알면 이러한 현실을 두려움이 없이 직시할 수 있습니다. 형성된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은 모든 우주가 무너져 없어지는 것까지도 평온한 마음으로 관망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이 종교에 끼친 공로는 부정적인 것인가?  


우리는 괴로움이 없이, 희망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오래된 신앙들을 정신없이 찾아내어 매달려야 하는가? 그것들이 종교 이외의 다른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서 우리가 더 선호하는 과학적 소신에 비추어 아무리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 해도 말인가? 


우리가 비이성적인 삶을 견뎌낼 수 있을까?


과학적 지식은 독선적인 ‘계시’ 종교에 대해 부정적일 뿐 아니라 확연히 적대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위와 같은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과학은 조금 다른 차원에서 진리를 위한 진심어린 탐색을 해왔습니다. 그러한 과학적 발견이 준 충격 때문에 종교에 대한 묵은 생각이 많이 무너져 내린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처음부터 현대과학의 모든 개념이 내재해 있었습니다. 생물학적 진화론으로부터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이르기까지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과학의 원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현대과학의 사고방식이 수용할 수 있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교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조차도 현대과학이 불교의 가르침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를 제대로 인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Dhamma)을 여러 측면에서 공부하고 또 명상을 해 본 사람만이 그 가르침이 과학이 제기한 문제들을 푸는 데 얼마나 큰 빛이 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불교는 과학이 넘지 못하는 한계를 넘어서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과학적 원리들을 더 높은 차원의 인식으로 끌어 올립니다. 물리학적 법칙은 정신적 법칙과 짝을 이루며 이 둘이 만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불교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물리학이, 단단해 보이는 모든 물체가 실제로 단단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은 전자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말한다면, 그보다 앞서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은 불교입니다. 만약 과학 철학자가 이 실체가 없는 원자적 현상을 단단하고 내구성 있는 물질로 인식하도록 우리의 감관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불교는 그보다 먼저 그와 똑같은 말을 했으며, 바로 그러한 사실을 모든 현상 분석의 근거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과학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심리학자, 신경학자, 생물학자가 사람 속에 불멸의 영혼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부처는 이천오백 년 전에 이미 그러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과학이 창조주로서의 신을 믿을 근거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만약에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 현재 그러한 경향이 있듯이 ― 마음 또는 마음의 활동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생명 현상을 추동하는 배후의 힘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불교가 항상 주장해 온 영원한 진리 중의 하나와 만난 것이 됩니다. 부처께서 “마음이 모든 현상에 앞서며 마음이 모든 현상을 주재하고 또 만들어낸다.”(Mano pubbangamā dhammā, manosetthā, manomayā)4)라고 말씀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상을 지어내는 것은 사람의 정신작용입니다. 그리고 그 지어지는 행위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계속 이어져 나갑니다. 우리의 행위를 낳는, 행위 하고자 하는 마음속의 의도가 곧 업(Kamma)입니다. 만약 그 마음속의 의도가 부도덕한 상태의 것이면, 그에 대한 과보로 인해서 그 후의 의식 상태가 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속의 의도가 도덕적이고 그 행위가 선하고 유익한 것이면, 그 후의 의식상태도 행복한 것이 됩니다. 달리 말하면, 선한 행위는 그 결과로서 좋은 여건을 낳고, 그러한 여건에 따른 즐거운 의식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업과 보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을 좋게 혹은 나쁘게 만듭니다. 진실로, 삶은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그대로입니다. 이런 연유로 불교는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바깥에서 구원자를 찾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지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이로움을 위해서 우리가 저 막강한 마음의 힘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마음의 과학입니다. 불교가 심오한 심리학적 체계인 아비담마(Abhidhamma)에 그렇게도 큰 비중을 두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비담마’라는 말은 ‘최상승법(最上勝法)’이라는 뜻이며, 이 체계는 의식의 모든 상태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바, 자기통찰과 자기통제로 나아가는 완벽한 길[道]입니다.


아비담마는 마음의 기본 원리를 다루고, 정신작용을 도덕적 가치의 보편적 체계와 연관시켜 설명하기 때문에 현대 서양 심리학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서양의 정신 분석학자는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바로 이 점이 서양 심리학의 부족한 점이라 하겠습니다. 사실상 정신분석학자는 인간의 상상 범위 바깥에도 도덕적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미심쩍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지표도 제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도덕성이 인과 법칙의 필수적 요소임을 보임으로써 정신 활동과 윤리적 법칙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인과 법칙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그 사고에 뒤따르는 행위에 의해 정해집니다.


과학은 어떤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을 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 원인을 어떻게 다스려서 더 좋은 결과를 낳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현상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보는 점에서 불교는 유물론의 반대편 끝에 있지만 불교가 내 보이는 물리적 세계의 그림은 현대과학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지성인의 주의를 끌어 마땅할 만큼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부처가 아무런 현대 과학적 지식의 도움이 없이, 순전히 직접적인 통찰만으로 이천오백 년 전에 우주의 본질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깨달음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세계 역사상 그 어느 종교의 스승도 이런 깨달음을 이룬 적이 없습니다.


물리학이 결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거나 평안을 향한 심경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을 때 불교는 그 두 가지를 다 합니다. 불교는 사람들의 지성과 감성을 똑같이 만족시킬 뿐 아니라, 합리적이고 입증 가능한 믿음에 바탕을 둔 희망을 줍니다. 불교도에게는 믿음과 합리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지존이신 부처(Supreme Buddha)를 따르는 우리의 믿음은 이성적이며, 이성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해 줍니다.


혹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한층 발전된 오늘의 모든 지식에 비추어 다시 살펴보고서 이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모습, 인간의 기회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믿을 수 있는 희망적인 모습을 그리는 것이 가능할까?


바로 이러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인간의 자기만족을 혼란시키고, 인간의 이기심과 어긋나기 때문에 수용하기 싫어하는 사실들까지를 포함하여 과학이 밝힌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고, 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을 우주가 지어낸 무한한 현상들 중의 한 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면서도 불교는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노력에 가능한 한 최고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 거대한 우주 현상 속의 하잘 것 없는 존재인 듯하지만 만약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될 수만 있다면 인간은 실로 우주의 주인이라는 것을 불교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사람이란 존재는 비록 맹목적인 자연의 힘에 의해 부서진다 할지라도 자연의 힘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보다 우위에 있는 까닭에, 자연의 힘보다 더 위대하다고 보았습니다. 진리를 다시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가 불교는 사람이 사리분별력이 있어서 자기가 처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짓눌리지 않고 자연의 법칙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향상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부처는 “비구들이여, 감각[想]능력과 의식[識]을 갖춘 이 한 길 몸뚱이 속에 세상과, 세상의 기원, 세상의 소멸, 그리고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나는 천명하노라.”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부세계의 정복은 바깥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과학에 의해 최근에 드러난 새로운 사실이나 과학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을 잠시만 살펴보아도, 사람은 우주가 만들어낸 피조물이며, 우주에 의해서 운명지어져 있고, 그 우주로부터 정신이 주어져서 유한한 방법으로 전체를 이해하며, 무한한 우주가 꾸리는 우주 전개의 거대한 설계에 창조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세세히 파고든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불교에서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엄청난 모순이 여기에 있습니다. 맹목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정신이라는 것이 없는 우주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그런 우주로부터 정신을 부여받을 수는 없습니다. 정신이란 것이 없으면서 우주가 어떻게 그 창조물에 정신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정신이란 것이 유한한 것이라면 어떻게 전체를 이해하며, 무한한 우주가 꾸리는 “우주 전개의 거대한 설계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세세히 파고들”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우주 전개의 거대한 설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우주에,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맹목적이고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기만 하는 갈애 말고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과학은 인간에 대해서 무심한 우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우주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그 설계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인간이 거기에 참여할 가능성이 과연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과학자의 답변은 단순히, 이 문제는 인간의 하찮은 자만의 또 다른 예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저런 노력이 우주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가정할 까닭이 있습니까? 이때 ‘우주’라는 말은 ‘신’이라는 말 대신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는 것은 유신론에서 말하는 ‘신’의 개념과 동일합니다. ‘신’이 전개하는 설계라는 유신론적 개념은 인간에게 어떤 희망, 영생에 대한 희망 같은 그런 희망을 주지만, 어느 민족, 어느 인종에도 아무런 배려를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맹목적이고 비인격적인 우주의 힘이 전개하는 ‘설계’라는 개념은 그러한 희망을 가지게 하지 않습니다. 요원한 어느 미래의 우주가 완전한 인간애를 갖추리라고 예기하고 기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때는 이미 그들 자신은 완전히 소멸해 없어져 있을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생각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개미 군단을 이루는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는 물에 빠져죽어서 동료 개미들을 위한 물 위의 다리가 되는 것에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은 개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삶이 의미와 목적이 있기를 원하지 자기의 먼 후손을 위한 확실치 않은 목표, 그것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좌우간, 생물학적 과정에 의한 인격의 완성은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과학은, 진화가 꼭 그런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진보만이 아니라 퇴보를 낳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종(種)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과학이 해 주고 있습니까? 과학의 힘이 인류의 소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과학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삶에 대한 이런 견해는 결코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켜 주거나 고통스러운 인류에게 위안과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과학이 새롭게 해석한 사실을 정직하게 바라봄으로써 감격적인, 구원을 주는, 희망에 찬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


불교의 관점에서 성찰한다면 과학이 새롭게 해석해낸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감격적이고, 구원을 주는, 희망에 찬 확신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현실에 대한 과학의 새로운 해석에는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에 들어있지 않은 새로운 진리도 없으려니와 더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는, 과학이 이미 그 허구를 논파한 창조주로서의 신, 영원불멸하는 영혼, 초자연적인 구원 설계, 또는 역사 속의 한 시점이나, 어느 특정 지역에서 어느 개인이나 특수 집단의 사람들을 선택하기 위한 ‘계시’ 따위와 같은 상식화된 종교적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른 생물에는 없는 불변하고 불멸하는 요소를 가졌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특별한 창조물이라는 주장을 불교는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불행과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원죄’ 신화와 같은 어떤 신화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불교와 과학의 관점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불교와 과학적 견해가 일치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포함한 모든 현상들은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것, 생물학적 진화와 정신적 진화 사이의 상응 관계, 갈애 또는 ‘생존 충동’이 진화를 유발하는 요인이라는 진리, 지구가 생명을 낳고 키울 수 있는 유일한 행성이 아니라는 사실, 인류와 동물은 모든 종(種)과 종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질적인 면에서만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지 다른 근원적인 차이가 없다는 진리, 비록 우주는 정신이란 것이 없지만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힘은 정신에 상응하는 활동이라는 견해 등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주란 사람이 정신적 활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불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순환으로 이어지는 세계 하나하나는 과학이 물리적인 것이라 일컫는 자연적 원인과 이전에 살았던 존재들의 업력, 이 둘의 결합으로 생겨나고 지탱됩니다. 과학이나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인과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인류를 위한 최대의 희망이 있습니다. 불교는 도의에 합당한 노력과 정신의 향상을 위한 긍정적이고 이성적인 동기를 부여합니다. 어떤 다른 종교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동기에 의거하지 않고 도덕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과법칙에 불공정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과거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더 높은 정신적 질서를 증장시키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가 자기의 것이나 남의 것이나 과거의 업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러한 업의 결과로 겪는 고통을 줄이거나, 시각장애나 지체장애 같은 업보로서의 신체장애를 보정(補整)하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업을 짓는 것입니다.


불교는 고대로부터의 기본덕목인 자애와 연민을 가르칩니다. 자비가 없는 우주에 자비의 마음을 불어넣는 것은 인간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최선의 노력과 더없는 열망입니다. 그렇다고 세속적인 향상을 단념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향상은 법[Moral law]을 따름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이 세상에서의 조건이 인간의 탐욕(貪慾), 진에(瞋恚), 치암(癡暗)으로 인해 가망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임시 피난처라고 할 수 있는 더 높은 주처들이 있고, 영원한 평화, 곧 열반이라는 최종적이고, 불변하는 확실한 귀의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귀의처는 스스로 청정해지려는 개개인의 노력으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회의에 참여한 분들께 제가 불교의 이름으로 드리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어지러운 이 세상에 평화와 행복과 번영이 있을 수 있게 합니다. 수백만 불교도의 변변찮은 대변인으로써 저는 이해력과 선의를 지닌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마음속으로 가늠해 보시고 그것이 얼마나 진실되고, 합리적이며 유익한지를 여러분 스스로가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원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행복하기를!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장부』 1경

2) 『마태복음』 12장 33절.

3)  질(quality) : 보리수잎 46 『학문의 세계와 윤회』(2006), 14쪽 참조.

4) 『법구경』1 게송.

5) 『상응부』Ⅰ권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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