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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5. 청화 큰스님 수행처

10. 월출산 상견성암

 청화큰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10


월출산 상견성암


사진 ․ 김동현/ 글 ․ 정진백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이 “호남에서 으뜸가는 그림 같은 산”이라고 추켜세운 월출산月出山은 소백산계小白山系의 무등산 줄기에 속한다. 높이 팔백구미터(809m)로 높지는 않지만 돌병풍을 둘러친 듯 서 있는 산의 풍채는 매우 크고 수려하다. 삼국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이라 하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부터 월출산이라 불렀다. 천황봉天皇峯을 주봉으로 구정봉九井峯, 사자봉獅子峯, 도갑봉道岬峯, 주지봉朱芝峯 등 높고 낮은 산들이 마치 구슬을 꿰듯이 서로를 잇달아 일으켜 세우며 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있다. 택지지擇里志에 쓰여 있는 대로 이 산들은 “돌 끝이 뾰족뾰족하여 날아 움직이는 듯한” 기암절벽이 많아 예로부터 작은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풍광이 빼어나다. 일찍이 고려시대 시인 김극기 金克己는 “월출산의 기묘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지며 개이는 것하며 추위와 더위 또한 모두가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하고 예찬한 바 있다.


 도갑사道岬寺와 상견성암上見性庵은 이처럼 신령스러운 월출산의 서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시대 도선道詵국사께서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아 창건하셨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사王師이신 수미守眉선사께서 일천사백오십육년(1456 세조2년)에 중창하셨다. 수미왕사는 국가적 지원으로 구백육십육칸 (966)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고 부속 암자만 해도 상견성암, 미륵암 등 열 두 곳이나 되었다. 사원 중창은 그 뒤로도 이어졌는데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받드는 정치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대규모 중창불사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도갑사가 갖고 있는 큰 영향력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일천육백오십삼년 (1653, 효종 4년)에 세워진「도선국사 수미선사비명道詵國師 守眉禪師碑銘」은 ‘도선국사와 도갑사’ 사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암 명산 월출산의 기암괴석은 생각건대 신인(神人)을 낳다 강신(降神)으로 태어나신 그 인물 다름아닌 도선국사다. 국사께서 처음으로 태어나실 때, 일반사람 태어남과 같지 않았다. 빨래하던 어머니가 오이를 먹고 그날부터 임신하여 태어나시다. 낳자마자 숲속에 버렸으니 비둘기가 날아와서 날개로 덮다. 이를 본 그의 부모 이상히 여겨 후회하고 다시 거둬 양육하였다. 국사께서는 신라시대에 태어났지만, 위대하신 그 업적 지금도 생생하다. 버려졌던 그 바위는 국사암國師巖이고 태어났던 그 이름은 구림촌鳩林村이다. 비둘기가 날아와서 날개로 덮으니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은 기러기가 모여와 보호했으니 그 인연을 비교하면 다름이 없다. 신승神僧이라 불리우는 스님 있으니 그가 바로 다름 아닌 도선국사다.


 위대하신 고려초의 도선국사는 민족 위해 태어나신 용상龍象이시다. 어떤 분야 학술이던 무불통無不通이니 그 중에서 뛰어남은 지술地術이다. 당황제唐皇帝가 현몽現夢받고 유택幽宅을 위해 예를 갖춰 사신使臣 보내 초빙招聘해 중국 가서 황제 위해 점복占卜해 주고 일행선사一行禪師 친견하고 지술地術을 받다. 스님께서 중국에서 수학한 다음 마음 가득 채우고서 귀국하였다. 귀국후엔 송악松嶽터를 살펴보고서 오백년의 도읍터라 지상地相을 보다. 투철하신 스님 법안法眼 비길 데 없어 오백년을 꿰뚫어서 밝게 보시다. 조석화복朝夕禍福 길흉이란 알 수 없지만 스님께선 혜안慧眼으로 미리 아시네. 우리나라 지형지세地形地勢 살펴보시고 그 형국이 배 모양과 같다 하시다.


 진추없이 뜨는 배는 위험을 초래하여 정박停泊커나 항해航海함에 조종操縱을 잃다. 지형이란 태초부터 정하여진 것 그에 맞춰 조율함이 지술地術아닌가. 해가 뜨는 동쪽 나라 우리 국토는 삼천리의 금수강산 반만년 역사. 회령會寧에서 제주濟州까지 멀고 넓지만 도선국사道詵國師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절을 짓고 탑을 세운 그 공덕으로 높은 메부리와 낮은 계천 진압鎭壓하였다. 월출산의 동쪽에다 절을 지으니 그 이름이 높고 빛난 도갑사이다.

 

 도갑사 뒤쪽의 ‘길 없는 길’을 찾아 상견성암上見性庵을 오르다 문득, 깊이 도道에 사는 이의 즐거움이 담긴 시가 떠올랐다. 손 가는 대로 맡기어도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고 찬연히 써내어 그 운어韻語가 빛나는 나옹懶翁선사의 법어法語인데 내용은 이렇다.


  진공眞空의 일없는 선정이 내게 있어 / 바위 사이 돌에 기대어 낮잠을 자네. / 신기한 일이 무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며는 / 한 벌 해어진 옷으로 한 평생을 산다 하리. // 온종일 방장실에는 세상 시끄러움이 없고 / 돌구유에는 언제나 들물이 맑네 / 다리 부러진 노구 솥에는 먹을 것이 넉넉커니 / 무엇하러 명리名利와 영화 따위에 마음을 쓰랴 // 흰 구름 무더기 속에 삼칸 초막이 있어 / 앉고 눕고 거니는데 한가함이 그지없네 / 깨끗한 시냇물은 반야를 이야기하고 / 맑은 바람이 달과 어울려 온몸이 시원하네 // 그윽한 바위에 고요히 앉아 헛이름을 끊었고 / 돌병풍에 의지하여 세상 인정을 버렸네 / 꽃과 잎은 뜰에 가득하여도 오는 사람 없고 / 저 때때로 들리는 새들의 지남指南하는 소리 // 산에 살면서 한 번도 산이 싫지 않나니 / 가시 사립과 띠풀집이 세상살이와 다를 뿐 / 맑은 바람이 고운 달빛 안고 처마 스칠 때 / 시냇물 소리 시원하게 가슴 씻어 흐르네 // 시름없이 걸어나가 시냇가에 다다르니 / 말갛게 흐르는 물 선정을 연설하네 / 만나는 온갖 것이 진면목을 나타내니 / 공겁(空劫)의 생기기 전 일 무엇하러 논하랴


 세속을 떠나 출가 수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터, 그것은 오랜 세월 쌓아 놓은 선근 없이는 아니 될 일이다. (莫道出家容易得 昔年累代重根基) 더욱이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두어칸 토굴 지어놓고 묵묵히 홀로 앉아 생사를 뛰어넘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하는 어렵고 힘든 수행(艱苦之行)은 바라볼 수 조차도 없는 고고한 도업道業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공부길에 있어서 만약 본래 갖춘 진여불성을 밝히지 못하면 생사심을 타파하지 못할 것이요, 생사심을 타파하지 못하면 무상살귀가 생각생각에 끊이지 않나니 이것을 어떻게 배견하리요 (做工夫若不發明 本具底大理 則生死心不破 生死心旣不破 無常殺鬼 念念不停 却如何排遣)하였다. 이어서 생사심을 타파하기를 요긴히 할지니, 몸과 목숨을 돌아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 구원해 주기를 바라지 말며 딴 생각을 내지 말고 잠시라도 그치지 말며 앞으로 나아가 바로 깨치어 해탈을 얻어야만 옳게 살아나는 법 (要箇破生死心 不顧身命 不望人救 不生別念 不肯暫止 往前直奔奔得出 是箇好手)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자의 품은 뜻이 드높을수록 비상한 인내와 용맹스런 정진이 뒤따라야 하리라. 그러므로 황벽黃檗조사께서는, “세간의 진로에서 생사를 해탈한다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니, 사공이 뱃줄을 잡듯 마음의 고삐를 잡아 한바탕 애쓸지어다. 만약 찬 기운이 뼈에 사무치지 않는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맡을 수 있으리. (塵勞逈脫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若非一香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하였다. 공부에 노력을 아까지 말아야 된다는 간절한 철리哲理를 담고 있는 경책警策이다. 마음씀이 참으로 간절하다면 방일과 해태懈怠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며 산란심이나 혼침 또한 일어나지 않아, 옛 사람의 깨친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 없으며 (不愁不到古人田地) 생사를 타파하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으리라 (不愁生死不破).


 “가파른 절벽 위에 풍경처럼 매달린” 상견성암은 이름대로 ‘견성’의 ‘득력처得力處’로서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주석하시며 수행하신 곳이다. 자갈밭 나무숲길 헤치기를 근 한 시간, 암자에 이르니 눈 앞에 펼쳐진 ‘만물상’이 빼어남을 자랑하고 있다. 그야말로 천 개의 기묘한 봉우리가 서로 제 모습을 견주고 만 개의 계곡이 그 흐름을 다투는 뛰어난 경관이다. 멀리 보이는 해남의 두륜산, 달마산의 위용에 진도珍島의 풍광까지도 승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경외감이 모골毛骨마저 송연悚然하게 한다. 이토록 고적孤寂한 천인단애千仞斷崖의 백척간두에서 진일보進一步할 분 그 몇일까.


한 삼년은 “눈이 장님같고 귀는 먹보같으며 심념이 일어나려해도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것과 같아야 비로소 공부에 상응함을 얻을 텐데(眼如盲耳如聾 心念纔起時 如撞着銀山鐵壁相似 如此則工夫如得相應)” 과연 어느 분께서 그러할 수 있을까. “뜻을 태산과 같이 굳게 세우고 마음은 바다와 같이 편안하게 가지면 큰 지혜가 해와 같아서 삼천세계를 널리 비출 수 있겠지만 (立志如山 安心似海 大智如日 普照三千).”

 아마 그것은 진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중생을 위하여 자기를 잊어야 가능하리라 (求法者爲法而忘軀 利衆者爲衆而忘己). 결국 생사대해生死大海 건너기는 위없는 참선 밖에 없음에.


 상견성암은 청화큰스님께서 현대한국사회 변혁의 형세가 새로운 모습으로 진보하던 일천구백팔십년 그 아름답고 서글픈 역사를 참구參究하신 곳이다. 청화큰스님께서는 피로 물들여지던 오월 광주, 그 부처님 오신 날, 이곳 상견성암에서 정토삼부경을 친히 번역하셨다. 청화큰스님께서 번역하신 정토삼부경은 가히 심심미묘深深微妙한 결정설決定設이자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명문이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요긴한 대목은 잠깐의 시간도 여의지 않고 일필휘지하신 듯한 간절함에 있다. 어쩌면 크게 사무치신 끝에 “불이 눈썹위에 타는 것과 같이 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한 사람이 만 사람을 상대로 싸울 때 눈깜빡일 여유도 없듯이 (如火燒眉毛上 又如救頭燃 一人與萬人敵 覿面那容眨眼看)” 한달음에 이루신 대작불사이리라.


 “모든 공양 가운데 법공양이 으뜸이라 하였다. 이른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니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중생들을 거두어 살피며 중생들의 고통을 대신하여 부지런히 선근을 닦아 보살의 할 일을 버리지 않고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므로 (諸供養中法供養最 所謂如設修行供養 利益衆生供養 攝受衆生供養 代衆生苦供養 勤修善根供養 不捨菩薩業供養 不離菩提心供養).”


 수승한 정토법문을 통해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찬양하신 청화큰스님의 깊은 뜻은 알 수 없다. 우물안에서는 강호江湖를 알 수 없기에. 감히 살핀다면 북채가 북에 닿으면 소리가 나고 물에 달이 비치면 달 그림자가 나타나는 법이니 인과와 감응을 생각할밖에. (桴感鼓則應以聲水感月則應以影) 인간과 역사, 역사와 인간이 짓고 있는 법칙이 그러함으로.

 청화큰스님께서는 정토삼부경의 머릿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가 다 고뇌와 빈곤이 없는 안락하고 풍요한 행복을 간구하고, 생로병사가 없는 영생永生의 이상향을 그리는 사무친 향수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화 현상은 비록 깊고 옅은 차이는 있을 지라도, 다 한결같이 인생고苦의 구제와 진정한 자유를 그 구경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다만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인간의 고액苦厄을 구제함에는 먼저 인간의 본질 곧, 참다운 자아自我가 무엇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종교 · 철학 가운데서, 인간의 근본 바탕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밝히고, 영원한 안락의 경계에 인도하는 가르침이 불교임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님의 거룩한 서원誓願과 부사의한 공덕으로 장엄된 이상향理想鄕 곧,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너무도 생생하고 인상적으로 밝히신 경전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인데, 이는 무량수경無量壽經 ·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 아미타경阿彌陀經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생활은 현대인의 불안의식과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데도 다시없는 청량제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잃어버린 진아眞我의 회복과 분열된 조국의 광복光復과 인류의 영원한 평화와 복지福祉를 위한 가장 근원적인 최상의 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산승山僧이 미급함을 무릅쓰고 정토삼부경을 번역하는 간절한 비원悲願이 있습니다.


『치문숭행록緇門崇行錄』(운서주굉雲棲袾宏 스님 편찬)이라는 ‘고전’이 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시던 때부터 중국 명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덕행이 높았던 출가사문들의 행적을 모은 책이다. 그 가운데 「연로하신 분의 두타행(年老頭陀)」이라는 내용이 있다. 소개하면 이렇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가섭존자(大迦葉尊者)는 늘그막까지 두타행(頭陀行)을 쉬지 않고 전일하게 닦는구나.”

 부처님께서는 대가섭존자가 자꾸 쇠잔해지는 것을 가엾이 여기시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오랫동안 각고의 수행을 해왔으니 이제는 좀 편히 지내시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섭존자께서 여전히 고행을 계속하시자 부처님께서 더욱 가상하게 여기시며 칭찬하셨다.

 “그대가 일체중생한테 의지처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여래가 세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으리라. 두타행을 그대처럼 하는 자가 있으면 나의 법이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없어질 것이다. 그대는 진실로 큰 진리를 걸머질만 하도다.”

 그 후 대가섭존자는 법을 전해 받고 최초 조사(初祖)가 되셨다.

 

 찬탄하노라.


 두타행의 존멸에 법의 존망이 달렸다 하시니

 금구(金口 : 부처님 입)로 베푸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남아 있는데

 요즈음의 승려들은 잘 먹고 좋은 옷 입으며

 화려한 집에 살고, 온몸을 편케 하니

 빛나는 장식을 임금이나 귀족처럼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말법시대에 법이 무너지려 하니

 실로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야 하리라.

 동 · 서의 비조鼻祖이신 가섭 존자께서 이처럼 했던 것은

 어쩌면 후환을 미리 알아

 자손에게 도모할 일을 남기신 것이 아니리.

 그대 조상의 수행을 따르라.

 원컨대 참선하는 납자들이여,

 말법시대라 하여 스스로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노라.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