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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5. 청화 큰스님 수행처

11. 지리산 칠불사

 청화큰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11


지리산 칠불사


사진 ․ 김동현/ 글 ․ 정진백



요 며칠 동안 하늘은 온통 구름 덮이고 눈이 펄펄 내리더니(上天同雲 雨雪雰雰), 지리산 칠불사七佛寺를 찾아가는 호강스런 날, 모처럼 하늘에 눈이 개어(一天晴雪)중천에는 해가 한창 밝게 빛나고(中天日正明), 어느덧 화창한 기운은 사뭇 꽃소식을 재촉하고 있다(淑氣催花信).

 여기에 금상첨화인가. “혁명의 아침같이,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여는 저기 저 물굽이 같이, 부드러운 힘으로 굽이치며, 잠든 세상 깨우는,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고운 물살로, 유유히”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의 봉황산 상추막이골에서 “전라도 실핏줄 같은” 물줄기로 시작한 섬진강은 진안·임실·순창·남원·곡성 등지의 여러 산봉우리에서 흘러나온 “개울물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마침내 강물을 이룬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곡성 압록에서 보성강을 “그리워 얼싸안고” 본격적인 위용을 갖춘다. 그리하여 흔히 오백리(212.31km)라고 하는 섬진강 긴 물줄기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여기저기 이곳저곳 산굽이 돌고 논밭두렁 돌아 시퍼런 그리움으로, 어라 둥둥 만나, 얼싸 절싸 어우러지며, 가슴벅찬 출렁임으로” 너른 들판과 착한 마을들을 적신다. 따라서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며 애타게 빚어내는 강 언덕, 산자락의 풍광은 하염없이 아름다울 수밖에. 더욱이 삶이 숨쉬는 강이 아닌가.

 

 섬진강 오백리 물길 가운데 가장 깊고 너른 화개나루를 지나면 하동이다. 하동은 지리산의 장엄함과 섬진강의 평화스러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옛 백제의 땅(한다사군) 이었는데 삼국통일 뒤에 하동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物産을 교환하고 지리산의 생산물이 모이는 ‘화개장花開場’을 지나면 쌍계사雙溪寺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때 (서기 724년)에 의상대사의 제자 삼법三法스님께서 창건하였다. 삼법스님은 중국(당나라)에서 “육조혜능 六祖慧能선사의 정상頂相을 모셔 삼신산(三神山, 금강상·한라산·지리산을 일컬음) 눈 쌓인 계곡 위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 선사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신라 문성왕 때 (840) 진감 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 하였다. 일천오백구십이년(1592) 임진왜란 때 크게 손실되었는데, 조선시대 인조 때 (1632) 벽암碧巖 스님에 의해 중건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를 지나 화개동천花開洞天정상을 향하여 한참을 더 들어가면, 흰구름 속에 절이 있는데(寺在白雲中) 이름하여 칠불사七佛寺다. 칠불사는 지리산 반야봉(해발1732m) 남쪽 해발 팔백미터(800m)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지라산 반야봉의 거대한 혈맥이 남쪽으로 용트림하여 사십여리를 뻗어내린 신령스런 터에 위치하고 있는 칠불사의 지세地勢는 칠불사에서 피아골 연곡사로 걸어서 넘어가는 당재에서 바라보면 그 용자容姿를 실감할 수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지리산은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한다는 곳으로서 이 산의 명칭이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유래되었는데 발음으로는 지리智利, 문자로는 지이智異(이異는 문수文殊의 수殊와 같은 뜻임)로 쓰인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1915m)과 주봉인 반야봉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문수보살의 큰 지혜를 의미하는 반야봉을 주봉으로 하는 칠불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수신앙 중심지로서 실제 등산지도를 펴고 대각선을 그어 보면 거의 지리산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칠불사는 삼국시대 초기,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야伽倻, 일명 가락국駕洛國의 태조이자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곱왕자가 이 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사라 불리우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동국여지승람 하동지』등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사십이년(42)에 태어났으며 인도 갠지스강 상류지방에 기원전 오세기 때부터 있었던 태양왕조 아유다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여 십남이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巨登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석錫 왕자와 삼남 명明 왕자는 모후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왕자는 출가하여 허황옥의 오빠인 인도스님 장유보옥長遊寶玉선사를 따라 처음에는 가야산에서 삼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일백일년(101) 지리산 반야봉 아래서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더욱 정진, 수로왕 육십이년(서기 103년) 음력팔월 보름날, 야반삼경의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아 모두 생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일곱왕자들인 혜진慧眞, 각초覺初, 지감智鑑, 등연等演, 주순柱淳, 정영淨英, 계영戒英은 성불한 후 각각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光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로 불리었다.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들은 수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국력을 기울여 그곳에 큰 절을 짓고 일곱 부처가 탄생한 곳이라 해서 칠불사七佛寺라 불렀다. 이는 공인된 것은 아니나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다고 하는 고구려 소수림왕 이년(서기372년) 보다 약 이백칠십여년 앞선 기록이다. ‘삼백칠십이년 북방전래설’은 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임을 반해 이곳은 가락국이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받아 들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 이와 같은 창건 설화를 지닌 칠불사는 종래의 북방 불교 전래설과는 또다른 남방불교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칠불사는 예로부터 (통일신라 이후)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라 하여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선원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참선도량이다. 칠불사는 임진왜란으로 퇴락하였는데 서산西山·부휴浮休선사가 중수重修하였다. 그후 일천팔백년(1800)에도 보광전 약사전 등 십여 동의 건물이 실화失火로 전소되었으나 금담錦潭·대은大隱 스님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계속되던 일천구백오십일년(1951) 일월 ‘지리산 빨치산 대토벌’때 한국군의 방화로 아자방亞字房을 비롯한 대가람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로부터 삼십년 가까이 잡초만 무성한 폐허로 버려져 있다가 제월풍광霽月風光스님께서 일천구백칠십팔년(1978)부터 이십여년에 걸쳐 대작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말의 고승 도선道詵국사가 저술한 『옥룡자결玉龍自訣』을 보면 “하동 땅에서 북쪽으로 일백리 가면 와우형臥牛形의 명지名地가 있는데 이곳에 집을 지으면 부富는 중국의 석승 못지 않고 백자천손百子千孫이 번창할 것이며 기도처로 삼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도를 깨칠 것”이란 내용을 접할 수 있는데 예로부터 이르기를 음택陰宅으로는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이 으뜸이고 양택陽宅으로는 지리산 칠불사가 제일이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칠불사에는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머물렀다. 고려시대의 정명靜明, 조선시대의 벽송碧松·조능祖能·서산西山·부휴浮休·백암栢庵·무가無價·금담錦潭 두 율사께서는 이곳에서 용맹기도 끝에 서상수계瑞相受戒를 받아 지리산 계맥 즉 해동계맥海東戒脈을 수립했다. 또한 한국 다도茶道의 중흥조이자 대선사이신 초의艸依대사께서 일천팔백이십팔년(1828) 아자방에서 정진하시며 다신전茶神傳을 등초騰抄하였다.

 

 초의선사께서는 일천칠백팔십육년(1786)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나셨는데 속성俗姓은 장씨張氏이고 이름은 의순意恂, 자字는 중부中孚다. 초의는 법호法號이며 그 밖에 해옹海翁, 일지암一枝庵 등으로 불리었다. 열다섯살 되던 해(1800)에 전남 나주 남평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벽봉민성碧峰敏性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제방諸方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참방하며 절차탁마한 끝에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연담유일蓮潭有一선사의 선지禪旨를 이어 받았으며 대은·금담 율사의 계맥을 전수받았다.

 

 선사께서는 실로 조선 후기의 선종사에 활력을 불어 넣은 선문禪門의 거벽巨擘이었다. 선사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사변만어四辯漫語』는 백파스님의 『선문수경禪文手鏡』의 오류를 일일이 변증하여 조선 후기 선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시 불교계의 간화선看話禪 일변도로 흐르고 있는 사조에 반해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하여 원통불법圓通佛法의 진리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선사께서는 선禪과 교敎뿐 아니라 유교와 도교 등 여러 학문에까지 조예가 깊어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자하 신위 紫霞 申緯 등과도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칠불사하면 아자방亞字房을 떠올리 만큼 아자방은 유명한데 신라 효공왕(孝恭王 897~911)때 김해에서 온 담공曇空선사가 선방인 벽안당碧眼堂 건물에 아자亞字형으로 구들을 놓았는데 초기에는 한 번 불을 때면 석 달 이상 따뜻했다고 한다. 이 아자방은 이중 온돌 구조로 되어 있으며 방안 네 모퉁이와 앞뒤 가장자리 쪽의 높은 곳은 좌선처坐禪處이고 십자十字형으로 된 낮은 곳은 좌선하다가 다리를 푸는 경행처輕行處이다. 이 아자방은 유명해서 중국 당나라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중구조의 이 온돌은 수평인 곳이나 수직인 곳, 높이있는 좌선처나 낮은 경행처 모두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여 탁월한 과학성을 자랑하고 있어,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맞배 건물의 주련 또한 아름답다.

 담공선사 빼어난 솜씨 멀리 중국까지 알려졌고

 금관가야에서 오시어 아자방을 축조하셨네

 정교한 공법 기이한 공적 엿볼 수 없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천번만번 생각케 하네

 눕지 않고 한끼먹고 면벽하고 앉아

 다그치는 참선공부 서리발 같이 엄하네

 천길 벼랑 끝에 매달린 손놓고 몸을 돌려야 하나니

 중간에 아예 사량분별 하려들지 말게나

 솔 바람 가을 달은 바위에 비춰 어리고

 고목에 꽃이 피니 영겁밖의 향기로다

 훗날 나와 더불어 만나게 되면

 임제의 선풍이 한 바탕 나타나리


 曇空手藝遠聞唐 來自金宮築亞房

 巧制奇功窺不得 令人千萬費商量

 不臥一食面壁坐 鞭逼工夫似雪相

 懸崖撤手飛身轉 中間切莫擬思量

 松風秋月班圓石 枯木花開劫外香

 他年與我來相見 臨濟狂風現一場


아자방에서 위로 일백오십여 미터를 더 올라가면 스님들이 상주하며 참선수행하는 운상원雲上院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景德王 ?~765)때 사찬(沙餐, 벼슬이름) 공영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오십년간 머물면서 거문고를 연구하여 신곡 삼십곡을 지어 명득命得에 전했고 그것은 뒷날 이 곳에서 왕산악 이후의 금법琴法을 정리하여 우륵의 가야금과 더불어 거문고가 우리나라 현악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칠불암을 찾아온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도 이와 비슷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이곳 운상원雲上院을 일명 옥보대玉寶臺라 부르기도 한다.


 이천이년(2002) 이월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선생님을 모시고 칠불사를 다녀왔으니 꼭 일년여 만에 다시 찾아온 셈이다. 지난 해 아산 선생님께서는 청화큰스님께서 일천구백구십팔년(1998) 수선안거修禪安居하실 때 찾아오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당시 한국사회는 대통령선거후 영호남 지역갈등이 극심하였다. 그리고 한국불교조계종단 역시 총무원장선거와 관련하여 내홍이 심각하였다. 그 때 청화큰스님께서는 묵언黙言 중이셨다. 때문에 아산선생님께서는 큰스님 친견은 안 하시고 ‘이심전심’의 인사만 드리고 오셨다는 것이다.

 

 생각해본다. 자성불성自性佛性을 닦아 조사로서 일가一家를 이루신 청화큰스님의 법력法力의 광명은 도속道俗에 두루 이익을 입혔건만 어이하여 노구를 무릅쓰고 묵언 정진하셨을까를.

 학인은 항하사같이 많으나 제대로 깨친 이 드물어 혀끝에서 길을 찾는데 허물이 있어서 (學者恒沙無一悟 過在尋他舌頭路)일까. 뜻은 말에 있지 않고 (意不在言) 지극한 말은 말을 잊어버리는 것(至言忘言)이어서 일까.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고 비어 있지 않으면 울림이 없으며, 기다림이 끊어지면 말 또한 ‘없음’이어서(孤掌不鳴 不虛無響 絶待無言)일까. 또는 고요함이 지극하면 마음이 통달하고, 말을 잊으면 본체를 이해한다(靜極則心通 言忘則體會)는 가르침일까. 아니면, 참선에 있어서 팔재환八災患 (憂·喜·苦·樂·尋·何·入息·出息)을 경계하시는 노파심일까.

 청화큰스님께서는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선을 오래 하게 되면 가급적으로 활동도 줄이고 말도 줄여서 에너지 소모를 막아야합니다. 에너지를 너무 소모하면 머리도 흐릿해지고 잠도 더 빨리 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할 때는 될수록 불교 전문술어로 말하면 신구의 삼함身口意三緘이라. 될수록 활동을 적게 하고 말도 적게 하고 뜻으로 헤아리지 않고 이 셋(신·구·의)을 닫아버리면 참선하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너무 피로하게 일을 해도 참선 공부에는 방해가 되니까 참선할 때는 모든 생활을 너무 긴장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긴장하면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많아 지니까 몸과 마음을 느긋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부질없이 근심하고 지나치게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참선하다가도 큰소리로 웃기도 하고 그럽니다마는 그것은 참선이 깊어지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러는 동안에 참선 기운이 도망가고 맙니다. 될수록 고요한 기운이 새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이른바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이렇게 해야 우리 공부가 차근차근 익어집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본질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참선공부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묵조나 주문이나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주의 본바탕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저 하늘 어디에 따로 있고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나 밖에나 어디에나 다 존재하는 하느님, 부처님, 이렇게 생각할 때만이 참다운 참선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