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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5. 청화 큰스님 수행처

12. 지리산 벽송사

청화큰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12


지리산 벽송사


사진 ․ 김동현/ 글 ․ 정진백



 꽃피니 뜰 앞에 비뿌리고

 난간밖 바람부니 소나무 우네

 그대여 신묘한 진리찾아 궁구하는가

 이게 바로 오묘한 깨달음인 것을


 花笑階前雨 / 松鳴檻外風 / 何須窮妙旨 / 這箇是圓通


 조선시대의 강한 억불정책 아래서 옷 한 벌 바리때 하나 (一衣又一鉢)로 겹겹이 쌓인 천 산의 눈을 다 밟고 (踏盡千山雪) 조주의 문을 들며 날며 (出入趙州門) 살다 간 벽송지엄碧松智嚴선사의 게송이다.


 이제 바야흐로 봄이다! 살갗에 스미는 봄바람이 그렇고 땅속 깊은 곳에서 달아오르는 속삭임도 그렇고, 새로 돋아나는 연한 풀잎의 푸른 빛 미소 또한 그렇다. 더 가까이 봄이 오면 예대로 온갖 꽃 피어나 (春來依舊百花發) 다투어 향기를 토할 것이고 나무에 새싹이 나와 맑은 기운 천지에 가득하리라. 대자연 말 없으되 다 생각 있음에 (造物無言却有情).

 지리산에 들어서니, 허공경계를 헤아릴 수 없으나 (虛空境界豈思量) 산은 무심히 파랗고 구름은 무심히 하얗다 (山自無心碧 雲自無心白). 대도는 그윽하여 뜻이 새삼 깊은가 (大道淸幽理更長)!


 우리 역사에서 지리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물론 산은 자연적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이고 그 내용은 역사적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른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고 박현채朴玄埰 선생께서는 “산을 보는 데 있어서 산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그것도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 위에서 자기를 규정받고 있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식되어야 한다.”고 정리한 바 있다. 다시 말해 한 사회의 지배계급한테는 산이 ‘좋은 자원’의 산출처나 명당자리 따위로 인식 될 수 있으나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처절한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회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나 압박과 수탈에서 벗어나려는 인민들의 살림터이자 은신처 또는 억압에 대항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도 지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은 민중적 삶에 있어서는 어머니이고 아버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지리산이 민중적 삶의 내용을 반영하여 온‘능동적’의미는 크다.

 역사에서 비켜선 일반 인민의 존재와 이들의 사회경제적인 궁박된 조건, 그리고 정치적 압박과 이에 대한 인민의 대항구도 속에서 지리산의 역할은 중요했다. 특히 조선시대 말기 봉건사회,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공간 이후 남북분단과 민족대립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상황에서 겪은 시련은 너무나 가혹했고 험난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조국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은 지리산은 수대에 걸친 민족민중운동의 역사에서 처절한 한을 머금어 지금도 우리 안에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칠선계곡七仙溪谷은 지리산 등반길 가운데서 가장 길고 험한 곳이다. 때문에 계곡 전체가 수많은 폭포와 깊은 못물로 이루어져 있어 청정하기 이를 데 없다. 칠선계곡으로 오르는 출발점이 되는 추성리 들목에서 왼쪽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碧松寺(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가 ‘고요 앉은’ 푸른산 중턱에 그윽한 모습을 드러낸다. 천왕봉·임천강이 조망되는 절경이지만 한국전쟁 때의 ‘역사적 비극’을 처참히 보듬고 있는 ‘증인’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벽송사는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쓰여졌다. 또한 절 주위는 빨치산 ‘벽송사루트’가 되어 빨치산들이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울창한 산죽들 사이로 몸을 피해 은신한 ‘산죽비트’, 빨치산들이 땅 속으로 들어가고 많은 낙엽으로 지상부를 덮어놓았던 ‘낙엽비트’, 빨치산들이 은신하던 바위틈, 굴인 ‘바위비트’등이 설치되었다.

 

 벽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벽송사는 신라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년고찰’이다. 예로부터 눈밝은 구도자들의 수행처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창건 이래 여러 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불에 타서 사적기가 없어 창건연대 및 변천되어 온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재의 절이 서 있는 위치에서 50미터 위의 옛 절터에 있는 삼층 석탑이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 절의 창건 역시 신라말 또는 고려 초기로 미루어 보는 것이다.

 높이 3.5미터의 석탑은 주목되는 ‘작품’으로 보물 제 474호다. 지표에 넓은 지복석地覆石을 마련한 뒤 그 위에 중석中石을 얹었는데 중석 하단에 한 단의 얕은 턱을 두었다. 중석에는 우주隅柱와 각 면 한주씩의 탱주가 표현되었다. 갑석甲石은 폭이 좁아서 중석 하단의 턱이 폭과 같으며 위는 경사진 가운데 한 단의 굄이 있으며 약간의 반전反戰이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각 면 일 매의 판석으로 구성하고, 각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 한 주씩이 모각되었다. 갑석은 일 매석인데 밑에는 부연副椽이 있고 위에는 역시 우각隅角에 반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가 한 석씩이고 각층 옥신석에는 우주가 있을 뿐 장엄조각은 없다. 옥개석은 초층과 이층에 네 단, 삼층에 세 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 우각에서는 심한 반전을 보인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 남아 있다.


 삼층석탑 곁에 서 있는 고고한 소나무 한 그루의 기품이 말할 수 없이 장엄하다.

 

 벽송사는 서기 1520년(조선 중종 15년)에 벽송지엄碧松智儼선사께서 중창하여 벽송사라 하였다. 『동사열전東師列傳』『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따르면, 벽송지엄선사께서는 146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셨는데 속성은 송씨이고 호는 야로埜老이시다. 1491년(성종22) 5월, 스물 여덟 살 때에 도원수 허종許琮의 군대에 들어가서 여진족女眞族과 싸워 이마차尼麻次를 물리치고 크게 공을 세웠으나 탄식하기를 “심지心地를 닦지 못하고 싸움터에만 쫓아다니는 것은 헛된 이름일 뿐이다”하고 계룡산 상초암上草菴에서 삭발, 출가하였다. 그 뒤 선정禪定을 즐겨 닦다가, 연희衍熙스님을 찾아가서 원돈교圓頓敎의 뜻을 묻고 능엄경을 배웠으며, 벽계정심碧溪正心선사한테서 법맥을 이어받아 불법사태佛法沙汰 속에서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1508년(중종3) 가을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에 들어가서『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개에게 불성이 없다(拘子無佛性)’는 화두話頭를 의심하여 짧은 시일 안에 깨달음을 얻었고, 또 고봉어록高峯語錄을 보다가 양재타방颺在他方이라는 어구에 이르러 활연히 깨달았다. 1511년 봄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서 2년을 지내다가 1531년 오대산五臺山으로 옮겼고, 다시 백운산白雲山·능가산稜伽山 등 여러 산을 옮기면서 도를 닦았다.

 

 1520년 지리산에 들어가 외부와의 교제를 끊고 더욱 불법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뒤 문인 영관靈觀·원오圓悟·일선一禪 등 60여명에게 대승경론大乘經論과 선禪을 가르쳤다. 또한 『선원집禪源集』과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으로 초학자들을 지도하여 참다운 지견知見을 세우게 하고, 다음『선요禪要』와 『대혜서장』으로 지해知解의 병을 제거하고 활로를 열어주었다. 이 네 가지 문헌은 현재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서 사찰 강원 사집과四集科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연원은 이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1534년 지리산 수국암壽國庵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강하다가 방편품方便品의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선설宣設 할 수 없다.”는 구절까지 설명한 뒤, 제자들에게 밖에서 구하지 말고 노력하여 진중할 것을 당부하고 속랍 71세, 법랍 44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가송歌頌 50수를 엮은 『벽송집』1권이 있다.


 벽송사에 전래되는 조선시대 말 서룡瑞龍선사의 이야기도 의미깊다. 만년에 벽송사에 머물렀던 선사께서는 1890년 12월 27일에 문도를 불러서 ‘입적入寂’을 고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섣달 그믐의 바쁜 일들이 끝나거든 입적하실 것을 청하였다. 정월 초이튿날 다시 입적하시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제자들은 정초라 불공하러 오는 신도들이 많다는 이유로 다시 며칠을 미루도록 하였다. 초사흘이 지난 다음날, 선사께서는 “이제 가도 되겠느냐?”고 물은 뒤 제자들을 불러모아 다음과 같이 유명한 법문을 남기시고 천화遷化하셨다. “불법佛法을 닦을 때 생사生死를 해탈하려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하고 (知無生死), 둘째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셋째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

 

 현재의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폐허와 같았는데) 1960년대 중건하여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보광전普光殿(현재 중수중)을 중앙으로 왼쪽에 방장선원方丈禪院이 있고 오른쪽에는 간월루看月樓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앞쪽에는 산문山門과 종루를 배치하였고 뒤쪽에는 산신각이 있다.

 또 하나, 벽송사 입구에 있는 나무장승 한 쌍(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이 인상적이다. 그 풍부한 표정에서 민중 미학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빼어난 장승이다. 장승은 사찰에 잡귀의 출입을 막고 사원 경내의 각종 규제와 풍수비보風水裨補를 지켜주는 수문守門과 호법護法의 신장상神將像구실을 한다. 불교와 민속신앙, 상호간의 습합習合 양상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전체 높이는 4미터 정도 되는데 땅속에 1미터 정도가 묻혀 있고 썩은 몸통을 지탱하기 위해 둑을 쌓아 1미터 정도가 더 묻혀 있어, 드러나 있는 것은 2미터 정도이다. 약 90년 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재질이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어졌기에 지금까지 그 모습을 지키고 있다. 왼쪽의 여장승은 1969년 산불이 났을 때 머리 부분이 불에 타 없어져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툭 불거져 나온 왕방울 눈과 성난 표정을 짓는 입에서 민중적 사실주의를 느낄 수 있다. 금호장군禁護將軍이라는 명문銘文이 음각돼 있다.

 오른쪽 남장승은 그나마 다행으로 어느 정도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머리는 둥근 짱구 모양의 민머리이며 공을 박아놓은 듯한 왕눈과 주먹코의 모습이다. 입 모양은 합죽하며 둘레에 마치 불꽃무늬 같은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 이와 귀는 새기지 않았고 몸통에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는 명문이 음각돼 있다.


 청화큰스님께서는 1968년을 전후하여 벽송사에서 안거 수행하셨다. 멀리 티끌세계를 끊고 장좌불와長坐不臥하신 채, 날마다 한 끼만 자셨다. 한 번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 (大死一番大活現前) 하였음인가. 청화큰스님께서는 불성 자리를 깨닫고 증명하기 위해,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기 위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생명을 거신 것이다.


 청화큰스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삼매를 수행할 때 인연조건이란 독처한거獨處閑居라, 우리가 대중적으로 공부할 때는 사실 오로지 삼매에 들기는 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주변 조건에 관심을 두어야 하니까요. 우리가 보살심으로 더불어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정말로 내가 꼭 며칠 동안에 깨달아야겠다고 비장하게 마음 먹을 때는 한가한 데서 독처獨處에서 지내면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과적입니다.

 지계완구持戒完具라, 계행도 그냥 보통이 아니라 철저히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청정 심청정身淸淨心淸淨이라, 우리 몸이 청정해야 마음도 청정합니다. 상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공부해서 꼭 가피를 입으려면 제불보살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호법신장이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일중일식日中一食이라, 일중일식은 오정午正을 넘어서면 안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되 많이 먹는 것이 아니라 일단식一段食 곧 주먹밥 정도로 먹는 것입니다. 중후불식하면 소음小淫이라, 음심이 적고 또는 소수小睡라, 그 무서운 원수인 잠이 적어지고 득일심得一心이라,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쉽습니다. 무하풍無下風이라, 적게 먹으면 몸이 가뿐하고 방귀도 없습니다. 신득안락身得安樂이라, 몸이 항시 안락스럽다는 것입니다.

 

 묵언정진黙言精進이라, 말이라는 것이 개념이기 때문에 말을 하면 그만치 산란스러워집니다. 우리가 말을 안하면 갑갑하겠지만 공부가 익어진 사람들도 역시 묵언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헷갈리지 않고 오롯이 통일되어가는 것입니다.

 삼시세욕三時洗浴이라, 세 때에 목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과 용변외에는 좌부득坐不得이라, 앉지말아야 합니다. 앉아버리면 편해지고 또는 혼침이 오기 쉬우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상경행무휴식常經行無休息이라, 항시 경행經行 즉, 거닐며 포행하고 휴식을 말아야 합니다.

 일념아미타불一念阿彌陀佛이라, 오로지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외우며 끊임없이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