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5. 청화 큰스님 수행처

7. 칠현산 칠장사

 청화큰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칠현산 칠장사


사진 ․ 김동현/ 글 ․ 정진백


 홀로 앉아 허연 귀밑털을 슬퍼하노라니

 텅 빈 대청에 어느덧 이경이 깊어가는데

 비내리는 가운데 산과일 떨어지고

 등불 아래선 풀벌레 소리 구슬프도다

 흰 머리는 마침내 다시 검기 어렵고

 생로병사가 사라짐을 알고자 한다면

 오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불법을 배우는 일 뿐이로다.


 獨坐悲雙鬢 空堂欲二更

 雨中山果落 燈下草蟲鳴

 白髮終難變 黃金不可成

 欲知除老病 惟有學無生


-왕유王維의 시「가을 밤에 홀로앉아(秋夜獨坐)」전문


 만물은 스스로 성숙함 (萬物自從成熟得) 인가. 어느새 가을이다. 가을바람 한 떼가 엷은 구름 쓸고 가니 온 땅의 봉우리들이 묘한 빛으로 새롭다(金風一陣掃微雲 大地峯巒妙色新).


 칠장사가 있는 칠장산군七長山群 (덕성산 · 칠현산 · 칠장산)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뻗어나온 금북정맥에 속한 산이다. 높지는 않지만 산의 폭이 크고 산림이 울창하여, 산 속은 “고요하고 잠잠하여 도에서 멀지 않다(寂寂寥寥道不疎)”.

 경기도 안성시와 충청북도 진천군이 경계를 이루는 칠장산의 동남방향에 위치한 칠장사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는 천년고찰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이 본산 용주사의 말사이며 경기도 문화재 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사적기寺蹟記가 없어 사찰의 정확한 내력에 대해서는 소상히 알 바가 없으나 신라 진덕왕 시대인 서기 육백사십팔년경에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창건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장율사는 원래 신라 진골 출신의 후예로서 높은 벼슬자리를 권유받았으나 산림에 숨어 부임하지 않고 출가한 인물이다. 왕은 크게 노하여 취임하지 않거든 참형하라 하였다. 이에 자장율사는 “내 차라리 하루나마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계를 깨뜨리며 백년을 살고 싶지는 않다 (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완강히 거절했다. 그 굳은 결의에 감동한 왕은 출가를 허락했다. 이렇게 청정한 정신으로 수행한 자장율사는 당나라에 건너가 수학하고, 환국하여서는 대승적 율학律學을 정립하였으며 화엄사상을 널리 알렸다. 특히 황룡사皇龍寺를 중심으로 한 신라불국토설新羅佛國土設과 오대산五臺山에서 현신한 문수보살을 친견한 설정은 불교가 신라사회 곳곳에 정착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칠장사가 크게 중수重修된 것은 고려시대인 서기 일천십사년 혜소정현慧炤鼎賢 (서기 972~1054년) 국사國師에 의해서였다. 혜소국사께서는 서기 구백칠십이년(고려 제4대 광종 23년) 경기도 죽산군(현 안성시)에서 태어나셨는데 속성은 이씨다. 아홉 살 때인 서기 구백팔십년에 광교사光敎寺 충회忠會대사에게 출가한 후 열세살 때 칠장사에서 유가종瑜伽宗의 회주會主인 융철融哲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무살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스물다섯살 때 (서기 996년) 미륵사彌勒寺에서 승과에 급제하여 스물여덟살에 이르러 대사의 지위에 오른 이후 마흔 세 살 때 (서기 1014년)에 칠장사를 크게 중건하였다. 마침내 예순 한 살에 왕사王師가 되어 법천사法泉寺 · 현화사玄化寺등에서 주석하시며 신비한 이적異蹟을 보이며 많은 중생을 제도하셨다. 여든 세 살에 칠장사에서 임종법문臨終法門후 앉은 채로 입적하셨던 바 왕은 혜소국사라고 시호를 내리었다. 국사께서 입문하신 유가종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중요시 한 당나라 현장玄獎스님에게서 기원한다. 그는 불경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유가론이나 유식론唯識論 등 논소論疏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가종의 명칭도 여기서 기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시대부터 삼론학三論學의 대가가 많이 배출되었지만 유가종의 학파적 기원은 원효元曉대사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어 경흥憬興 · 태현太賢스님이 더욱 깊이 연구하였고 진표眞表스님은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종파형성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진표스님은 특히 참회와 실천, 그리고 미륵신앙으로써 수많은 인민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고려초기의 유가종은 삼대종파의 하나였고 중기에는 한때 화엄종에 버금가는 세력을 확장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이론상으로는 전통의 유가론을 이어 받았으나 천태학天台學에서 중요시하는 법화사상法華思想과도 밀접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전기에는 고승대덕을 많이 배출하였다.


 칠장사는 고려시대 유가종에 소속한 사원으로 유가종 스님들이 출가, 주지住持 · 안거安居한 곳으로 관련이 깊다. 그것은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서史書 · 문집文集, 그리고 고문서古文書의 간기刊記에도 실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니 담적湛寂하여 편안하다. 조그만 암자 안에 온 법계가 들어 있다 (法界含容小屋頭)하였던가.

 사천왕상四天王像의 기품 또한 경탄스럽다. 거대한 소조상塑造像에 무병장수無病長壽의 상호, 그리고 네 분의 천왕이 표정을 달리 하고 있는 섬세한 표현 등 공교로우면서도 웅혼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니 장대석 다섯 단의 기석을 쌓고 원형 초석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운 맞배지붕 삼 칸의 단정한 대웅전이 말간 얼굴로 반기었다. 대웅전 안 마당에는 괘불대가 세 대나 있다. 오른쪽의 전면에 ‘죽산 칠장사 영산회 괘불탱기석 급탱죽 조성기 竹山 七長寺 靈山會 掛佛幀基石 及幀竹 造成記’라고 새겨져 있다. 이 영산회상의 모습을 그린 괘불은 법보화法報化 三身佛을 그린 고본古本 괘불과 함께 칠장사에 모셔져 있으나 모두 국보 · 보물이기에 보존에 따른 어려움으로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조 말에 중창한 것이지만 배흘림이 느껴지는 기둥은 전부 같은 것이 아니다. 원주 중에는 육백년 전 것으로 보이는 기둥도 있다. 벗겨진 단청, 풍상에 씻기어 그대로 드러난 나뭇결이 청아淸雅하고 고풍스럽다. 깨끗한 가난이 한 줄기의 신선한 빛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영주 부석사 등의 고찰들과 비교하여도 이만큼 오래된 기둥은 흔하지 않을 전통깊은 사찰이다.

 대웅전을 참배하니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존으로 하여 좌우에 문수 · 보현 보살을 협시挾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법당 한 쪽에는 일천칠백팔십이년에 조성된 범종이 있다.


 대웅전 옆에 모셔진 봉업사지불입상奉業寺址佛立像과 원통전 · 명부전을 참배하고 혜소국사비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범부의 눈으로 보아도 가히 수도처로서의 지세가 참으로 좋다. 뒤를 두르고 있는 산은 완만하고, 아담한 일곱 개 봉우리는 소잔등처럼 살갑게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이곳이 청화큰스님의 수행처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온갖 훌륭한 경계는 무심에서 나타나므로 공부는 고요한 곳에서 행해야 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諸般勝境無心現始覺工夫靜處看)할까.


 혜소국사비는 국사가 입적하신 지 여섯 해가 지난 고려시대 문종 때인 서기 일천 육십년에 왕명으로 구층 사리탑과 함께 현재의 비전 자리에 세워졌었다. 칠장사는 조선시대의 중종때인 서기 일천오백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도에서 몇 안되는 큰 사찰이었다. 명종때인 서기 일천오백육십년경에 생불生佛로 추앙받던 병해대사(일명 갖바치 스님)께서 칠장사에 주석하시다가 입적하였는데 임꺽정의 스승으로 유명한 설화를 남기고 있다. 임꺽정은 스승을 위해 목불木佛(세칭 꺽정불)을 조성하였는데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다. 그러나 임진전쟁을 맞아 혜소국사 구층 사리탑이 망실되고 국사의 행적비도 적군의 칼날에 맞아 훼손되었으며 병화로 사찰건물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본래 이 산의 이름은 아미산峨嵋山이었고 절의 이름도 칠장漆長이었다. 그런데 이 절에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설화로 이름이 바뀌었다.

 혜소국사께서 칠장사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도적 하나가 이 절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물바가지가 순금인 것을 발견하고 슬쩍 품에 숨기고 돌아왔다. 두 번째, 세 번째, 일곱 번째 도적까지 다 제각각 물을 마시러 갔다가 금 바가지 하나씩을 숨겨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숨겨온 금바가지가 온데 간데 없는 것이다. 한 도적이 조심스럽게 이 사실을 고백하니 다른 여섯 도적이 모두 똑같은 사실을 실토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곧 혜소국사의 신통력에 의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찾아와 뵙기를 청하였다. 마주한 일곱 사람은 한결같이 혜소국사의 신통력에 의한 도력道力에 이끌리어 제도를 청하였다.


 이에 국사께서는 법요法要를 설명하시며 일곱 사람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연유로 산 이름은 칠현산七賢山으로, 칠장사漆長寺는 칠장사七長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증명하듯 혜소국사비 옆으로 나한전羅漢殿이 있고 그 안에 일곱 현인의 현신이라는 일곱 나한상이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사방 이미터 정도 밖에 안돼 보이는 방 같은 집 위로 커다란 노송 한 그루가 육백년을 역력歷歷히 담은 고고古高한 자태로 당당堂堂하게 서 있다. 외로이 홀로 높은 봉우리(孤高有一峯)에서 원통을 관자재함인가(圓通觀自在) 송운으로 모든 티끌을 쓸며(松韻塵塵掃).


 이 소나무는 나옹懶翁선사께서 심으신 것이라고 전해진다. 나한전과 나무의 배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니 일대의 경치마저 빼어나게 아름답다.

 청화큰스님께서 주석하신 비전碑殿 · 산신각山神閣을 배관拜觀하고 바위 아래 약수를 마시니 선미禪味가 족하다. 마침 여기에 합당한 나옹선사의 게송이 있다.


 만 골짝 천 바위와 소나무 잣나무 사이에

 영혼의 근원이 깨끗하여 몸은 편하고 한가하다

 깊고 깊은 골 속에서 늘 흘러나오나니

 마시는 이의 온 몸이 뼛속까지 차가워라


 萬壑千嵒松檜間 靈源皎潔體安閑

 深深洞裏常流出 飮者通身徹骨寒


 청화큰스님께서는 일천구백팔십사년 한 해를 칠장사에서 보내셨다. 지극히 존귀한 분께서 무엇하러 오셨을까 (今日降尊何所爲).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큰스님께서는 몸소 많은 불사를 이끄시어 사격寺格을 제대로 갖추고 사찰의 전답과 임야도 되찾아 살림을 크게 늘리셨다. 그렇게 사원을 중수하고 사방손님 접대하니 남북의 납자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重修寺院接方來南北禪和去再廻). 진리를 향한 정성스런 마음이 간절하고 알뜰한 (向道誠心勤又重) 나머지 공부하다 남은 의심 풀려고 (餘疑要決) 천리 먼 길 스승찾아 (千里問明師) 참방하는 그 뜻이 끝없이 이어졌다 (參方意莫窮). 청화큰스님께서는 과연 자비의 칼을 잡고 건곤을 움직이신 것이다 (果將慈刃動乾坤).

 옛 글에 “저 성현은 모두 범부로서 지어진 것이거니 (聖賢都是凡夫做) 도를 배우고 참선하려면 산처럼 뜻을 갖고 (學道參禪志若山) 굳건히 뜻을 세워 끊임없이 공부하여 (堅剛立志用無間) 마치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하듯 하라 (猶如走馬更加鞭)”하였다.


 무량수경無量壽經 (청화큰스님 번역, 『정토삼부경』88쪽)은 말한다.

 

비유하건대 비록 큰 바닷물이라도 억겁의 오랜 세월을 두고 쉬지 않고 품어내면 마침내 그 바닥을 다하여 그 가운데 있는 진귀한 보배를 얻을 수 있듯이, 만약 사람이 지성으로 정진하여 도(道)를 구하면 마땅히 원하는 결과를 얻고 마는 것이니, 어떠한 소원인들 성취 안 될 리가 없느니라.


세상의 이익과 공명이 몇 해 가는가. 세어보면 다만 그저 백년 안인 걸 (世利功名 能幾年 算來只是百年前).


 다시 무량수경(청화큰스님, 앞의 책 154~155쪽)은 말한다.


목숨은 오래 살기 어려운 일

 부처님 만나 뵙기 더욱 어렵고

 믿음과 지혜 갖긴 또한 어려워

 바른 법 들었을 때 힘써 닦으라.

 법문 듣고 능히 잊지 않으며

 뵈옵고 공경하면 큰 경사 되니

 그는 바로 나의 착한 친구라

 그러므로 마땅히 발심할지니.

 온 세계에 불길이 가득하여도

 반드시 뚫고 나가 불법을 듣고

 모두 다 마땅히 부처가 되어

 생사에 헤매는 이 구제하여라.    金輪

'*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 > 5. 청화 큰스님 수행처' 카테고리의 다른 글

9. 남해 금산 보리암  (0) 2010.06.19
8. 내장산 서래봉 벽련선원  (0) 2010.06.17
6. 동리산 태안사  (0) 2010.06.08
5. 무안 혜운사  (0) 2010.06.04
4. 지리산 백장암  (0) 2010.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