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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5. 청화 큰스님 수행처

4. 지리산 백장암

 청화큰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지리산 백장암


사진 ․ 김동현/ 글 ․ 정진백


지리산은 우리 한반도의 남부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높고 큰 산이다. 서로 이어지는 산봉우리 산 줄기를 따라 삼도三道(전남 ․ 전북 ․ 경남) 오군五郡(구례 ․ 남원 ․ 산청 ․ 함양 ․ 하동)이 그 영향력 안에 깃들어 있어 지리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특히 조국과 민족의 역사적 맥락에서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 사회적 관계에서 지리산의 위치를 본다는 것은 그 의미가 중중첩첩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날, 김지하 시인은 불꽃같은 사랑의 언어로 지리산을 노래하였다.


 눈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 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짖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또한 민족민주운동의 역사위에 지금도 우뚝한 고 박현채(사회운동가 경제학자)선생은 일천구백팔십육년 오월 ‘지리산과 민족운동사’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민중사에 있어서 지리산이 갖는 의미는 큰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적 시대를 달리하면서 다른 내용을 지니는 것이었으나 오늘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중적 삶의 내용을 반영하여 보다 처절한 것으로 되면서 능동적 요소를 크게 하는 것으로 되었다.

 한국전쟁 후의 역사에서 지리산은 산으로서의 모성母性이 강조되기보다는 부성父性이 강조되는 시기이다. 전후 남북분단과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둘러싼 민족적 대립은 산, 그것도 지리산을 거대한 군사기지로 전화시켰다.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 그리고 1950년 9월의 한국전쟁이 귀결한 것은 지리산을 거대한 군사기지로 되게 하면서 동족간의 피나는 싸움의 장으로 되게 했다.

 민족적 에너지는 그것에 앞서는 시기에서 외세에 저항하여 민족해방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나 전후의 상황에서는 동족상잔으로 되면서 앞선 자들이 자기 죽음으로 만든 땅 위에 민족의 새로운 젊은 싹들을 다시 잠들게 했다.

 수난의 땅으로서의 지리산의 한은 여기에 있다.

 젊은 생명을 자기 조국을 위해 바친 수대에 걸친 죽음이 층층이 쌓여 있는 산, 그것은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고 더욱 깊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는 풀 길 없는 민족적 한의 크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산으로서의 지리산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속에, 우리들 그 자체로 있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백장암百丈庵은 웅장한 지리산의 반야봉, 천왕봉을 앞에 둔 청정한 도량이다. 특히 엄정한 계율과 용맹정진으로 선풍禪風이 외외巍巍로운 곳이다.

 불문佛門의 흥망성쇠는 계율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계를 범한 부처님 제자는 사자 몸 안의 벌레와도 같이 사자의 살을 먹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말세의 불제자는 계를 스승으로 삼아야(以戒爲師) 불법이 오래 갈 것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태어날 때 사람되기 어렵고 부처님 세상 만나는 것도 어렵다. 마치 큰 바다 한 가운데 눈 먼 거북이 물에 뜬 나무 만나기와 같은 것이다(生世爲人難 値佛世亦難 猶如大海中 盲龜遇浮木).

 백장청규百丈淸規, 계를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불손함이 없는 정직한 마음이 학습의 도량이며, 한결같이 곧은 마음이 불보살이 머무는 정토(直心是道場 直心是淨土)인 것이다.

 때문에, 백장암은 세상의 탐진치애貪瞋痴愛에 미련을 두고 나와 남, 옳고 그름을 따지며 생사를 끝내지 못하는 범부에게는 가히 외경畏敬의 경계다.

 백장암은 청화淸華큰스님과는 그 인연이 깊다. 그것은 일천구백육십년대 후반에 지리산 벽송사 ․ 삼불주 ․ 구지터 토굴에서 공부하실 때부터 일천구백팔십년대 중반 전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큰스님께서는 일천구백팔십년대 초반 백장암에서 인연따라 교화하여 사람들을 건지고자(隨化度人) 처음으로 대중을 제접提接하셨으며 염불선念佛禪을 일러 주셨다. 또한 ‘안자고 안눕고 하루 한끼만 자시는’ 가행정진의 청규淸規를 세상에 알려주신 곳이다.

 무릇 진리를 얻기 어렵고(體道難)) 규율을 지키기 어렵고(守規難)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遇師難) 번뇌를 벗어나기 어렵고(出塵難) 마음을 실답게 하기 어렵고(實心難) 진리를 깨닫기 어렵고(悟道難) 관문을 지키기 어렵고(守關難) 마음을 믿기 어렵고(信心難) 마음을 공경하기 어렵고(敬心難) 경을 이해하기 어렵다(解經難) 하였다.

 청화큰스님께서는 온 세상사람이 닦으려 하지 않는(萬萬千千不肯修) 명명백백한 한 길(明明白白一條路)을 어떻게 닦으셔서 안팎의 뿌리깊은 티끌을 훤히 뚫으셨을까(內外根塵俱洞徹).


 자훈慈薰 박병섭朴炳燮 거사가 소개하는 일화는 이렇다.


 일천구백팔십이년 백장암에서 방선시간放禪時間을 틈내어 큰스님께 여쭈었다.

 “큰스님, 얼마만큼 부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외로운 토굴생활이 마땅하신가요?”

 “공부하다 보면 감사한 마음이 끝이 없어서 계속하여 눈물이 납니다. 수건 두 개를 걸어놓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염불을 권하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염불은 제일 하기 쉬우면서도 공덕 또한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빨리 초승超乘할 수가 있습니다.”

 “토굴 생활이 적적하실 때가 있으시지요?”

 “바람이 있고 달이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신묘한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옛 시는 말한다.

 대그림자가 뜨락을 쓸어도 티끌은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 속을 비춰도 자취가 없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중국 송나라 때 영명선사께서는 「선정사료간禪淨四料簡」에서 “참선과 정토를 함께 닦으면 머리에 뿔이 난 호랑이 같아서 현세에서는 인간의 스승이되고 다음 세상에는 불조佛祖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크게 깨달은 성자의 진리는 원통圓通하기 때문에 참선도 도이고 염불도 도이며 나아가 우리가 마음을 근본으로 하고 깨침을 목표로 하여 근원을 철저히 궁구하면 평상시의 일도 도인 것이다.

 청화큰스님께서는 일천구백팔십삼년 정월, 백장암을 찾아온 기자(전북신문 문치상 문화부장)에게 말씀하신다.


불교가 침체 부진한 근원적인 요인은 정통불법의 신행信行과 증득證得을 등한히 한 데서 오는 필연적인 추세로써 유능한 불교 지도자의 빈곤을 초래하게 되고 교단의 불화와 국민의 불신을 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나의 의견을 피력한다면 곧, 정통불법의 중흥이란 명제아래 그 실천요강으로서 첫째, 다양한 교법敎法을 회통會通한 통불교通佛敎의 선양, 둘째 엄정한 계율戒律의 준수, 셋째 염불선念佛禪의 제창, 넷째 구해탈俱解脫의 증득證得, 다섯째 위법망구爲法忘軀(진리를 위해 몸을 버림)의 전법도생傳法度生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서, 네 번째 항의 구해탈俱解脫이란 지혜해탈과 선정해탈로서, 지혜해탈은 번뇌를 끊고 참다운 지혜를 얻음을 말하고 선정해탈이란, 멸진정滅盡定(백팔번뇌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선정)이라고 하는 깊은 삼매에 들어 번뇌의 종자마저를 모조리 끊고 일체 사리에 통달하여 이른바, 생사를 해탈하는 성자의 자재로운 지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위에 말씀한 정통불법의 실천에 의해서만 비로소 인간의식의 본질인 불성을 계발하여 진정한 의식개혁을 이룩할 수가 있고, 이렇듯 철저하고 원만하게 진리를 깨달은 이가 바로 성자요 부처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정진하여 깨달은 성자의 수가 늘어나고 부처가 되려는 중생의 수가 많아질 때 우리 인류는 비로소 몽매에 그리는 지상극락의 여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조선시대 중기, 지리산에 은거한 처사이자 도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이런 시를 남겼다.

 

 저 무거운 천석종을 보라 /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 / 만고의 천왕봉이여 /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네


 請看千石鐘

 非大碌無聲

 萬古千王峰

 天鳴山不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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