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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5. 청화 큰스님 수행처

3.백암산 운문암

 청화큰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백암산 운문암


사진 ․ 김동현/ 글 ․ 정진백


지난 해 봄, “고향에 대한 아픈 향수,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타는 목마름”의 김지하 시인께서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이영진 시인을 통해 연락해왔다. 반가워 지선知詵스님(전 백양사 주지, 오대산 상원사 결제중)께 청하였더니 쾌히 승낙하였고 김지하 시인은 곧바로 아름다운 인연에 화답하듯 「백학봉 1」(창작과비평, 2001년 여름호)이라는 한 소식을 널리 전하였다.


 멀리서 보는 / 백학봉白鶴峯 // 슬프고 / 두렵구나 //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는 / 한 마리 흰 학, // 봉우리 아래 치솟은 / 저 팔층 사리탑 // 고통과 / 고통의 결정체인 / 저 검은 돌탑이 / 왜 이토록 아리따운가 / 왜 이토록 소롯소롯한가 // 투쟁으로 병들고 / 병으로 여윈 지선知詵스님의 얼굴이 / 오늘 / 왠일로 / 이리 아담한가 / 이리 소담한가 / 산문 밖 개울가에서 / 합장하고 헤어질 때 /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 아 이제야 알겠구나 / 흰 빛의 / 서로 다른 / 두 얼굴을


 얼마 전, 지선스님과 함께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선생을 심방尋訪하던 날이었다. 김지하 시인이 정지용 선생의 탄생 일백주년을 맞은 올해 ‘제14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낭보를 접했다. 또한 그 수상작이 바로 앞에 소개한「백학봉 1」이었다니 비단 위에 꽃이 더해졌다.

 그날 아산 선생을 모시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청화 큰스님 대목에 이르러 지선 스님은, “권세 ․ 명예 ․ 안일에 초연하신 채 팔순 노구에도 수행자 본연의 고행정진을 계속하시는 큰스님께서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성자이자 우리 시대의 생불生佛이시다”고 감격해 하셨다.

 백학봉 운문암은 청화큰스님께서 출가하신 곳이다. 청화큰스님께서는 “광음을 헛되이 보낼 수가 없어서 뱃속은 불이 나고 마음은 바빠서 분주하게 도를 찾아 물었다(光陰 不可空過 腹熱心忙 奔波訪道).”

 육조단경은 말한다.

 “세상사람으로서의 생사문제야말로 중대하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하루 종일 먹거나 하고 오로지 복덕이나 바랄 뿐, 핵심이 되는 삶의 불안이나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사람으로서의 한없는 고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 않는다. 본래성품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만 한다면 복 따위를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世人生死事大 汝等終日供養 只求福田 不求出離生死苦海 自性若迷 福何可求)”

 청화큰스님께서는 일천구백사십칠년, “모든 인연을 한꺼번에 다 놓아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도록(萬緣放下一念不生)” 연마하여 금타대화상을 은사로 득도하셨다. 금타대화상은 당시 불교의 분파와 간화본위看話本位의 법집法執을 안타까워하며 원통불교를 주창하고 계셨다. 또한 금타대화상은 고행의 극점에 서서 자기 개인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고 진리의 불덩어리같아 보였다. 하루 한끼를 공양하는 일종식에 짚신을 손수 삼아 신는 등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것은 물론이고 늘 장좌불와의 수행법을 지켰다.

 

 불교의 공부는 계戒 ․ 정定 ․ 혜慧의 삼학三學에 귀속되고, 삼학은 계로써 근본을 삼고 있다. 그러기에 “계로 말미암아 정이 생기고, 정으로 말미암아 혜가 생긴다”하였다. 율律은 부처님의 신행身行이요, 선禪은 부처님의 심념心念이며 경經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설言說인 것이다. 그러므로 율선경律禪經이 세 개의 솥발(鼎足)과 같아서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된다.

 청화큰스님은 운문암에서 환희용약하였다. 몸과 마음이 순숙純熟해지면서 공부길이 분명하였고 마음먹은 대로 공부 할 수 있어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다. 초발심자인 경우 불법 듣기 어렵고(佛法難聞), 선지식 만나기 어려운데 청화큰스님께서는 운문암에서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방거사는 말씀하신다.


사방에서 납자들 한데 모여서 十方同一會

 각자가 모두 무위법을 배우네 箇箇學無爲

 여기는 부처를 뽑는 과거마당 此時選佛場

 마음 비워 급제해서 돌아간다네 心空及第歸


청화 큰스님께서는 출가 수행담을 이렇게 들려주신다.


 출가담에는 그렇게 흥미진진한 내용은 없습니다. 단순하고 평범하지요. 그때가 내가 스물 다섯이었는데 인연 상황이 출가를 안하면 안 되게끔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회의도 느낄 때였고, 문학도로서 시도 쓰고 그러면서 많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출가한 처소가 보통의 대본산이라든가 그런 곳이 아니었고 그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가장 고행주의자라고 꼽히는 분이 계신 백양사 운문암으로 출가했습니다. 운문암 생활이란 것은 철저히 원시불교, 부처님 당시의 생활을 따랐습니다. 일과는 아침엔 두시 반에 기상을 해요. 침구도 요때기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이 요를 평소에는 접어서 좌복으로 삼고 잘 땐, 펴서 침구로 쓰는 것입니다. 아침 예불도 법당에 들어가서 하는 게 아니라, 사실 기름도 아깝고 초도 구하기 힘들 때니까 아끼기 위해 그랬겠지만 다 법당 밖에서 드렸습니다. 단지 점심 때 마지 공양만 안에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결제 때가 아니면 대개 작업을 한 두 시간 정도 하고 밤에는 참선만 하지요. 그런 생활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온 세상 중생들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가지고 있는데도,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망상만 여읜다면 곧 청정한 지혜, 자연적인 지혜, 스스로 아는 지혜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大地衆生 皆有如來智慧德相 祗因妄想執着 不能證得 若離妄想 則淸淨智 自然智 無師智 自然現前)”고 하셨다. 옛사람 역시 “다만 범부의 마음만 없애라. 따로 성인의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但盡凡情 別無聖解)”고 말하였다. 이른바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기만 하면, 만물이 항상 둘러싸고 있다해도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但自無心 于萬物何妨 萬物常圍繞).”

 부처가 되는 높은 도는 무한한 다생多生을 두고 신명身命을 버리며 정진수행해서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견디고 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여야 비로소 성취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기에 “세세생생에 물러서지 않으면 반드시 부처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生生若能不退 佛階決定可期)”고 위산潙山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마 청화큰스님께서는 상구보리의 지혜를 얻어 자성自性을 증득한 다음 전법도생傳法度生을 목적으로 삼고자, 당시 한국 불교계에서 승행僧行이 청정하고 여법如法히 수행하는 운문암을 찾으셨으리라. 사자상승師資相承! 청화큰스님께서는 일상생활의 준칙이 엄중하였던 운문암에서 실로 일생일대의 인연은 물론 불법수행에 큰 기틀을 마련하셨다. 청화큰스님께서는 금타대화상의 행화行化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금타대화상에 대해서 대략 말씀드리면 백양사의 만암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하셨습니다. 출가한 뒤 강원도 졸업하고 그 당시의 불교 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이십육세경 과학이나 수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여 현대사회를 제도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잠시동안 환속하였다가 삼십세 때 재입산하여 오십세에 입적入寂하셨습니다. 삼십구세에 내장사 벽련碧蓮암에서 깨달음을 얻고 읊으신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이 남아 있습니다.


 연잎 둥글고 뾰족한 모서리가 바로 진실이며

 바람 불고 비가 뿌리는 일이 허망한 경계가 아니로다.

 버들꽃 날리는 곳에 연꽃이 피고

 송곳끝과 거울바닥에서 금빛이 빛나도다.

 荷團稜尖是眞實 風吹雨打非幻境

 絮蝶飛處生蓮華 錐端鏡面放金光

 운문암 생활은 순수하게 참선을 위주하여 일체 불공도 사절하고 식생활은 아침 죽 공양, 점심 때 공양하고 철저한 오후불식午後不食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체 경비는 대중 전원 탁발托鉢로 충당하였습니다.

 금타 스님은 대중들이 탁발 나간 부재중不在中에 시봉 몇 사람만 남아있을 때 열반에 들게 되었습니다. 금타 스님 사리舍利에 관해서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물 항아리를 묻고 장치를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럴 만한 계제가 되지 못하여 유감스럽게도 사리는 수습하지 못하였으며, 백양사 큰절 스님들 말로 화장터에서 사흘 동안이나 베폭 너비의 서기瑞氣가 하늘로 뻗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금타 스님께서 부처님 정법正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修行하고 여실如實하게 증득하여 부처님 법의 정수를 시기상응時機相應하게 기록으로 정리하였다는 사실에 우리 후학들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화큰스님께서 출가하여 참선수행하신 운문암이 있는 백학봉 높은 산에 올라서니 사방을 돌아봐도 끝이 없다(高高山頂上 四顧極無邊). ‘운문암’ 법왕法王 앞에 ‘온 산’이 만조백관滿朝百官되어 조회朝會를 받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고 당당하다. 그러하니 “밝고 밝은 온갖 풀끝에도 밝고 밝은 조사의 뜻이 담겨있다(明明百草頭 明明祖師意)”할까.

 진실한 구법열求法熱로 불타오르던 청화큰스님의 비범한 뜻 역시 높고 높은 봉우리에 서고 깊고 깊은 골짜기를 다녔으리(高高峯頂立 深深丘壑行). 그리하여 지혜로써 본심인 반야의 본성을 잡아(智慧取自本心 般若之性)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금강석처럼 견고한 법륜法輪을 굴리셨으리라.

 

 묘법연화경에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일수유만 정좌해도 항하사같은 칠보탑을 쌓는것보다 낫다 하였다. 정좌靜坐하는 이 한 법으로 인하여 우리는 진로塵勞를 벗어날 수 있고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으며, 자기의 성품을 원명圓明하게 하고 생사를 아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능엄경에서 아난존자가 말하기를 아승지겁을 지내지 않고 법신을 얻는다(不歷僧祇獲法身) 하였을까.

 번거로움이 싫어 고요함을 그리는 마음(厭煩思靜)을 안고 찾아온 운문암에서, 그 어떠한 법집法執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무애자재하는 절대자유의 경지에서 활연관통하시는 청화큰스님의 원통불법을 하염없이 생각하며 영가스님의 증도가를 옮긴다.


 근본을 얻을 뿐 지말은 걱정 않네 但得本莫愁末

 깨끗하기는 유리가 보배달을 품은 듯 如淨琉璃含寶月

 말법을 한탄하며 시세를 탓하노니 嗟末法惡時世

 중생이 박복하여 제어하기 어렵네 衆生福薄難謂制

 성인 가신 지 오래에 사견은 깊어 法聖遠兮邪見深

 마는 강하고 법은 약해 원망이 많네 魔强法弱多怨害

 무간업을 자초하지 않으려거든 欲得不招無間業

 여래의 정법륜을 헐뜯지 말라 莫謗如來正法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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