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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주당 청화(淸華)큰스님/5. 청화 큰스님 수행처

6. 동리산 태안사

 청화큰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동리산 태안사


사진 ․ 김동현/ 글 ․ 정진백


 봄꽃 다 보내고 가을꽃떼 채 나오기 전에 한껏 청청靑靑한 잔치를 벌이는 갈매빛 봉두산鳳頭山, 동리산桐裏山의 풍광이 수려秀麗하기 그지없다. 봉두산, 이름 그대로 봉황鳳凰의 머리와 같이 특출한 형상의 산이다. 또한 그 아래 동리산이란 봉황이 깃들어 산다는 오동나무 우거진 숲속이라는 뜻 아닌가. 그리고 봉황은 죽실竹實을 먹음에 ‘봉황’ 태안사는 죽곡竹谷을 거처로 삼았고.


 봉황, 새 중의 으뜸으로서 고귀하고 상서祥瑞로움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상상의 영물靈物이다. 이 봉황이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하여 성천자聖天子, 성인聖人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유韓愈는 『송하견서送何堅序』에서 “내가 듣기로 봉이라는 새가 있는데 항상 도道가 살아 있는 나라에 나타난다”라고 했고, 『순자荀子』에는 “정치가 생명을 사랑하고 살생을 싫어하면 봉이 줄지어 앉는다(其政好生惡殺 鳳在列樹)”라고 했다.

 태안사泰安寺는 (谷城 竹谷) 그 봉두산, 동리산의 품안에 있다. 절의 처음 이름은 대안사大安寺였는데 이는 절의 위치가 그 뜻에 합당하기 때문이리라. 적인혜철寂忍慧徹 선사 비문에 “천 개의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고 한 줄기 계곡물이 맑게 흐르며 용龍은 서기瑞氣를 떨치고 독사는 독을 감추는데 솔숲이 짙고 흰구름 또한 깊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니 마음자리를 닦고 기르는데 마땅한 곳”이라 하였다.

 태안사는 원래 세 분 스님에 의해서 개창開倉되었다. 신라 경덕왕 원년(서기 742년)의 일이다. 그 후 대찰大刹이 된 것은 적인혜철 선사(서기 785∼861년)께서 주석駐錫하면서 부터이다.

 적인 선사의 법명은 혜철慧徹이며 자는 체공體空이다. 숙생의 인연인 듯 어려서부터 절을 찾아 불법佛法을 배우다가 열다섯 살에 출가하여 화엄종찰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스물 두 살이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에는 계율을 무겁게 여겨 도반들의 귀감이 되었다. 팔백십사년, 중국(당나라)으로 건너가 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를 스승으로 삼았다. 서당지장 선사는 정중무상淨衆無相,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맥法脈을 이어 받은 선지식인데 가지산문의 도의道義선사와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창한 홍척洪陟선사도 바로 지장 선사의 법제자法弟子이다.

 지장 선사한테서 심인心印을 받은 적인 선사는 중국의 이곳 저곳을 순력巡歷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이르러 삼년 동안 대장경을 연구하였다.

 마침내 때가 되어 불법을 고국땅에 널리 선양하고자 귀국하여 쌍봉사雙峯寺에 주석하며 법력을 높이 드날렸다. 철감澈鑑도윤道允선사께서 귀국하기 팔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수승殊勝한 땅, 동리산 태안사로 옮겨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방에 전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선사는 출가하여서는 일찍이 계율에 철저하며 화엄을 공부하였고 중국에서는 서당지장 선사의 심인心印을 얻는 가운데서도 대장경을 열람하며 경전연구에도 정통하였다 하니 선禪 · 교敎 · 율律을 아우른 보기드문 종장宗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적인 선사의 제자로는 도선道詵국사, 여如선사 그리고 태안사를 크게 일으킨 광자대사廣慈大師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적인선사의 법계도를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당지장 선사에게 법을 전해준 마조도일 선사의 스승인 정중무상 선사이다.

 청화 큰스님께서는 정중무상 선사(김화상)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김화상은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605∼675)로부터 지선대사智詵大師(609∼702), 처적대사處寂大師(669∼736), 무상대사로 이어지는 선문의 정통조사正統祖師로서 출가사문出家沙門의 엄연한 전통인 두타청빈頭陀淸貧의 행지를 견지堅持한 철저한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선사禪師였다.

 그리고 지혜해탈智慧解脫과 선정해탈禪定解脫을 겸전한 성승聖僧이었기에 신통묘용神通妙用의 많은 이적도 여러모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초기선종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멀리 티베트불교의 요람기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특히 김화상의 선과 염불을 회통會通한 교화행각은 문파門派와 종파宗派를 초월하였으며, 불문佛門과 종교일반의 고질인 법집法執의 계박繫縛을 초탈하여 수기응량隨機應量하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은 모든 종교인의 절실한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김화상 교법의 심요인 삼구 곧 과거를 헤아리지 않는 무억無億과 미래를 근심하지 않는 무념無念과 그리고 매양 정념正念만을 상속相續하는 막망莫忘은 바로 명상明 · 相을 여읜 반야지혜般若智慧로 해탈을 성취하는 조사선의 무위선풍無爲禪風을 여실히 도파道破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선사는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 불법에 눈을 떠 중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의 출가와 유학을 촉발한 것은 결혼에 임하여서도 출가를 결행한 막내 여동생의 독실한 불심이었다. 이에 ‘대장부’로서 무심無心할 수 없어 머리를 깎고 바다를 건너 ‘입당구법入唐求法’의 길에 올랐다. 이후 스승으로 모실만한 분을 찾아 여러 곳을 두루 섭력涉歷하며 도를 탐구하다가 마침내 지주 덕순사資州 德純寺에 이르러 손가락을 태워 공양한 후 당화상 처적處寂선사를 참문參問하였다.

 이어 ‘무상無相’이란 법호를 받고 곁에서 머무르며 교시敎示에 따라 수행정진하였다. 그 후 처적선사로부터 전법가사傳法袈裟를 수여받고 사천성 천곡산天谷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역대법보기』는 무상선사의 수도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깊은 산에 들어가서 바위아래에 자리잡고 불철주야 좌선하는데 풀잎을 엮어 몸을 감싸고 나무열매, 나뭇잎, 풀뿌리를 먹거리로 삼았다.

 

『송고승전』의 묘사는 더욱 신이로운 지경에 이른다.


무상선사의 앉은 자리 바로 앞에서 짐승이 싸우다가 선사의 몸에 그 털이 닿는데 차기가 얼음같았다. 찬 몸이 부딪쳐도 그런 일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매양 선정에 들면 며칠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번은 눈이 한 자가 넘게 왔는데 맹수 두 마리가 와서 그 앞에 누웠다. 선사께서는 자기 몸을 깨끗이 씻고 맹수들에게 바쳤는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냄새만 맡고는 물러가 버렸다. 무상선사께서 자주 깊은 선정에 들었다가 간혹 손을 자리 밑에 넣어보면 호랑이의 털이 감촉되곤 했다.


이렇게 산중에서 오랜 수도 생활을 보낸 결과 수염과 터럭이 선사의 얼굴을 덮었다.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자 짐승으로 잘못 본 사냥꾼이 활을 겨누기까지 했다.

 무상선사는 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참선 수행자로서 간단한 옷을 걸치고 걸식을 하며 묘지나 숲속에서 생활했다. 무상선사의 두타행頭陀行은 철저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마침내 무상선사께서는 대중의 뜻에 따라 묘지근처에 정중사淨衆寺를 열고 대중교화에 나섰다.

 이때 지방장관이 찾아와 예배하였고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을 당하여 피란을 온 당 현종玄宗도 공양을 드리고 선법禪法을 들었다. 또 티베트사절단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것은 중국불교의 티베트진출로 이어졌다.

 무상선사는 정중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포교활동을 폈다. 수천의 대중을 모아 수계식을 갖기도 했다. 선사께서는 또한 인성염불引聲念佛로써 불자들을 이끌었으며 마침내는 무념의 경지에 이르도록 지도했다. 그것은 염불을 통해,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지향하는 염불선念佛禪이었다. 여기에 무억無億 무념無念 막망莫忘의 삼구를 더하였다.

 삼구는 바로 계戒 정定 혜慧 등 삼학의 다른 표현이다. 이 삼구야말로 실상實相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선사께서는 “내가 말하는 이 삼구는 달마조사로부터 내려온 원법原法으로서 선화상詵和尙(지선)이나 당화상唐和尙(처적)도 이를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는 정통선의 맥락에 있어서 달마조사와 직통한다는 뜻이리라.

 중국에서 선종은 달마대사로부터 오조 홍인弘忍선사에 이르기까지는 크게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육조 혜능慧能선사와 신수神秀선사에 이르러 비로소 독자적이고 역사적인 종파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무상선사가 중국에 건너갈 무렵 혜능의 남종선南宗禪과 신수의 북종선北宗禪은 분열하고 있었다. 이에 무상선사는 성도 지방을 중심으로 더욱더 발전적인 선종을 열었다. 선사는 법회에서 불자들에게 단숨에 염불을 하게 하고는 분위기가 고조되면 대중을 향해 ‘무억 무념 막망’이라고 외쳐 삼매로 이끌었다. 때문에 달마대사로부터 직접 전해받은 선의 원형이라고 밝혔으리라.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인연일까. 청화淸華 큰스님과 태안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일천구백육십년대에는 주지로, 일천구백팔십년대에는 조실로 주석하시며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사찰의 여러 당우를 새로 짓고 복원하여 오날날 격조높은 ‘수행처’의 틀을 제대로 갖추어 놓으신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태안사 중흥의 원력을 세우시고 일천구백팔십오년 동안거를 결제하시며 이십여명의 도반과 함께 결행하신 삼년 묵언결사를 거양擧揚하지 않을 수 없다. 시절인연까지 더했음인가. 청화큰스님께서 염불선을 수시垂示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무엇보다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청화큰스님께서 세우신 태안사 정중당淨衆堂과 무상선사가 일으킨 정중종淨衆宗의 인연이다. 물론 청화큰스님께서 정중당을 지으실 때는 국제불교학계에서 무상선사를 광범하게 조명하기 전의 일이고 따라서 무상선사의 ‘존재’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기연이 아닐 수 없다. 위로 황천皇天을 감동시키면 난봉鸞鳳이 찾아온다(上感皇天 則鸞鳳至) 하였던가. 중국 땅에서 달마대사의 법에 연맥連脈하여 인성염불引聲念佛과 무억無億 무념無念 막망莫忘 삼구를 핵심으로 정중종을 일으킨 무상선사, 무상선사의 법손인 서당지장선사로부터 심인心印을 받은 적인혜철 선사, 새로운 회통적 선풍으로 염불선을 제시하신 청화큰스님 간의 시공을 뛰어넘는 인연을 생각할 때 사무치는 법열法悅이 하염없다.


 오늘날까지 불자들 사이에 신화로 회자되고 있는 청화큰스님의 위없는 두타고행頭陀苦行과 태안사에서의 묵언결사黙言結社 그리고 원통불법 · 염불선 교화는 한국불교사상 희유한 ‘대사건’이다. 어쩌면 이렇게 저 오래 전의 정중무상 선사의 수행법과 여여如如한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깊고 넓기가 한량이 없다. 그런데 종파주의로 경지經旨를 자리매기고 독단주의로 부처님 뜻(佛意)을 한정하는 것은 마치 소라에 바닷물을 담고 대롱으로 하늘을 보려는 것과 같지 않은가. 만약 결정적으로 한쪽만을 집착한다면 그것은 모두 과실(若決定執一邊皆有過失)인 것이다.

 때문에 청화큰스님께서는 방광평등方廣平等의 신비로운 보장寶藏(方等之秘藏)을 열어 불법의 큰 바다(佛法之大海)로 이끌어 주신다. 그리하여 여러 경전들의 부분을 통합(統衆典之部分)하여 수많은 교설을 본디의 한 맛으로 나아가게 하시며(歸萬流之一味) 부처님의 뜻이 지극히 공정함을 열어 주시어(開佛意之至公) 각기 다른 주장을 화회하고 (和百家之異諍) 계신다.

 일천구백구십삼년 이월, 동리산 태안사 동안거 해제에 즈음하여 금강선원金剛禪院 수좌 스님들의 청법請法으로 특별법회가 이루어졌다. 참선 수행에 있어서 실제로 닦고 증득하는 수증론修證論과 부처님 가르침을 원융무애하게 회통시킨 법문이었다. 큰스님께서는 회향법어廻向法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 문중門中에 집착하고 자기 종단宗團에 얽히고 자기가 공부하는 법, 내 것만이 옳다는 것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 마음은 바로 어두워지고 그지없이 옹색해집니다. 이것 자체가 전도몽상입니다. 본래 훤히 트여서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없는 마음인 것을 구태여 지어서 아집我執을 하고 법집을 한다면 우리 공부에나 다른 사람한테나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되며 그것이 또한 우주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현대는 개방적인 시대입니다. 아무렇게나 방만放漫하게 한다는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라, 법집을 털고 아집을 털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해탈을 지향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번뇌 해탈을 지향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맞춰야 첨단 과학에도 뒤지지 않고 우리가 오욕五欲의 수렁에서 헤매는 무량중생을 구제하는 진정한 보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金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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