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7. 보리를 깨닫는 방편문

보리방편문 해설 2-3

  보리방편문 해설 3

 

 

 

용수龍樹보살께서 저술한 책 가운데서 『보리심론普提心論』이라 하는 논장에 공부하는 요체가 많이 설명되어 있습니다만 이『보리방편문普提方便門』은 그 논장 가운데서 공부하는 요령을 금타(金陀 1898~1948)스님께서 간추린 것입니다. 전에『금강심론金剛心論』을 낼 때는 저희들이 현대적인 어법을 좀 구사해서 냈습니다만 생각해 보니까 별로 오래된 분도 아닌데 고인들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그분들의 생명을 호흡하는 것 같아서 금타스님 문장 그대로 옮겼습니다.

 

菩提方便門

이의 菩提란 覺의 義로써 菩提方便門은 見性悟道의 方便이라 定慧均持의 心을 一境에 住하는 妙訣이니 熟讀了義 한 후 寂靜에 處하고 第一節만 寫하야 端坐正視의 壁面에 代하야써 觀而念之하되 觀의 一相三昧로 見性하고 念의 一行三昧로 悟道함.

 

阿彌陀佛

心은 虛空과 等할새 片雲隻影이 無한 廣大無邊의 虛空的 心界를 觀하면서 淸淨法身인달하야 毘盧遮那佛을 念하고 此 虛空的 心界에 超日月의 金色光明을 帶한 無垢의 淨水가 充滿한 海象的 性海를 觀하면서 圓滿報身인달하야 盧舍那佛을 念하고 內로 念起念滅의 無色衆生과 外로 日月星宿 山河大地 森羅萬象의 無情衆生과 人畜乃至 蠢動含靈의 有情衆生과의 一切衆生을 性海無風 金波自涌인 海中漚로 觀하면서 千百億化身인달하야 釋迦牟尼佛을 念하고 다시 彼 無量無邊의 淸空心界와 淨滿性海와 漚相衆生을 空 ‧ 性 ‧ 相 一如의 一合相으로 通觀하면서 三身一佛인달하야 阿(化)彌(報)陀(法)佛을 常念하고 內外生滅相인 無數衆生의 無常諸行을 心隨萬境轉인달하야 彌陀의 一大行相으로 思惟觀察할지니라.

 

보리菩提란 깨달음의 뜻으로서 보리방편문은 견성오도見性悟道의 하나의 방편입니다. 정과 혜를 가지런히 지니는 마음을 한 가지 경계에 머물게 하는 묘한 비결이니 잘 읽어서 뜻을 깨달은 후 고요한 곳에 처하고 제 일절만 써서 단정히 앉아 바로 보는 벽면에 붙여서 관하고 생각하되 관의 일상삼매一相三昧로 견성見性하고 염의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오도悟道함이라.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일상삼매 일행삼매나 또는 4조대사의 일상삼매 일행삼매와도 상통이 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여기에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은 허공虛空과 등할새 편운척영片雲隻影이, 조그마한 그림자나 흔적이나 흐림이 없는 광대무변의 허공적 마음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淸淨法身인달하야, ‘인달하야’ 이 말은 ‘무엇무엇인’ 하는 접속사로 고어입니다. 곧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와 같은 광대무변의 허공적 심계心界에 일월日月 보다도 초월한 금색광명을 띈 무구無垢의 정수淨水가, 눈부신 세간적인 금색광명이 아닌 순수한 금색광명을 띄고 있는 티끌이 없는 청정한 물의 성품이 충만한 해상적海象的, 마치 바다와 같은 불성佛性 바다를 관찰하면서 이 자리가 바로 원만보신圓滿報身인 노사나불임을 염하고 자기 마음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해지는 무색중생無色衆生과, 불교에서 중생이라 하면 자기 생각 즉 관념도 중생이라 합니다. 다만 모양이 없으니까 무색중생인 것입니다. 밖으로 눈으로 보이는 일월성수日月星宿나 산하대지 삼라만상의 무정중생無情衆生과, 의식이 없이 보이는 중생은 우리 중생차원에서 무정중생인 것이지 본질적으로 본다면 일체존재가 다 진여불성의 화신인지라 모두가 다 마음이요 모두가 다 식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나 축생이나 내지 꾸물거리면서 식이 있는, 인간 같은 6식이 아니라 5식을 말하겠지요. 준동함령의 유정중생有情衆生과의 일체중생을, 광대무변한 불성바다에 갖춰 있는 공덕으로 바람도 없이 금색파도가 스스로 뛰는 마치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으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즉 앞에든 우리 관념상의 무색중생이나 또는 우리가 밖으로 보이는 해나 달이나 또는 각 별들이나 산하대지 삼라만상의 무정중생이나 우리 사람이나 축생이나 내지 준동함령의 유정중생이나 이런 것 모두를 어떻게 관찰하는가 하면, 광대무변한 불성바다에 바람도 없이 거기에 갖춰 있는 불성공덕으로 스스로 뛰노는 불성의 물거품으로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이구나 하고 염하고, 석가모니불의 명의를 좁게 본다면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만 화신이겠지만 광범위하게 본질적으로 본다면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중생이 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는 화신입니다. 따라서 무색중생이나 또는 무정중생이나 유정중생이 모두가 다 천백억화신이라는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우리 중생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상에서 볼 때에 석가모니 부처는 깨달은 부처고 중생은 깨닫지 못한 부처일 뿐입니다.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하여 저 무량무변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청정하고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하게 비어있는 마음세계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그 가운데 진여불성의 무량공덕의 성품이 가득 차있는 생명의 바다인 원만보신과 또는 구상중생漚相衆生을, 불성바다에서 인연 따라서 물거품같이 일어나는 것 같은 천백억화신인 구상중생을, 청공심계의 공空 ‧ 정만성해인 성품의 바다인 성性 ‧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체중생의 상相이 원래 셋이 아니라 하나인, 합해서 하나의 실상으로 통해서 관찰하면서 이것이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청정법신이나 원만보신이나 또는 천백억화신이나 이 삼신이 원래 하나의 부처인 아미타불이라고 회통會通해서 항상 끊임없이 관찰하고 생각하고,

 

부처님 명호는 그때그때 쓰임새의 차이가 있어서 학문적으로 공부할 때는 여러 가지로 갈등을 느낍니다. 아미타불이라 하면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는 극락세계 교주라고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그것은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인 것이고 가사,『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등에 나와 있는 아미타불은 우주자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대일여래大日如來 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나 같은 뜻입니다.

 

아미타불을 극락세계의 교주라 할 때도 뜻을 깊이 새겨보면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 극락세계의 무량공덕을 수용 못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정수正受와 같이 정다웁게 여법히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더러운 땅인 예토穢土요, 사바세계裟婆世界가 되는 것이지 우리가 정말로 삼독오욕三毒五慾을 다 떼어버리고서 청정한 마음이 된다고 할 때는 정수正受가 되어 이대로 사바세계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 교주의 아미타불이란 뜻이나 천지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이란 뜻이나 결국은 같은 뜻인 것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아자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자는 보신을 의미하고 타자는 법신을 의미하나니 아미타불 곧, 참 나[眞我]를 생각하고, 마음으로나 밖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이나 생하고 멸하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중생의 덧없는 모든 행위를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라, 이것도 대승경전에서 자주 나옵니다. 우리 마음이 만 가지 경계로 구른다, 곧 바꿔진다는 말입니다. 마음이라 하는 우주의 실존생명이 만 가지 인연 따라서 만 가지 경계로 전변한다. 인연 따라 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실상인 마음 곧 불성은 변하지 않겠지요. 다만 상만 나툴 뿐인데 우리 중생은 상만 보고 본 성품을 못 보는 것이니까 다르다, 변한다 하는 것이지 본체에서 본다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만 가지 경계에 전변하는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뜻을 보다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시 정리를 해봅니다.

 

보리방편문 전 뜻을 한마디로 하면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본체는 법신法身입니다.

 

더 구체화시키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즉 대일여래나 비로자나불이나 같은 뜻입니다. 또 마음의 본체에 갖춰 있는 무량공덕이 보신報身입니다. 마음이 텅 빈 허무한 마음이 아니라 거기에는 자비나 지혜나 무량공덕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무량공덕이 원만보신 노사나불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별이나 은하계 등 우주나 인간이나 일체존재는 모두가 다 화신化身입니다. 더 구체적인 이름으로 하도 수가 많고 헤아릴 수 없으니까 천백억화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좁게 석가모니 부처님을 인도에서 나오신 부처님이라고만 생각하면 그것은 소승적이고, 대승적으로는 일체존재가 다 석가모니불인 것입니다. 화신의 현상계는 아미타불의 아에 해당하고 보신경계는 현상의 성품이 되니 미에 해당하고 화신과 보신이 둘이 아닌 본래 공한 근본경계가 법신으로 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인, 한 부처인 아미타불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는 중생을 교화하는 인연 따라 그 공덕에 들어맞게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여래如來라, 곧 진리 그대로 왔다. 진여眞如라, 진리 그대로다. 또 진리에서 오고 진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여래여거如來如去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그대로 있지만 사람은 자기 무명 따라 스스로 업을 지어 스스로 받을 뿐인 것입니다. 진여도 진리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진여를 줄여서 여라는 말만으로도 진리를 표현합니다. 이렇듯 올바른 것이 진리요, 또는 일체존재의 근본성품이니까 법성法性이요, 또는 불성佛性이라, 또는 실상實相이라 하는데 이른바 우주만유의 실존實存이라는 말입니다.

 

실존철학도 ‘우주의 실상이 무엇인가? 나의 본래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철학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나 또는 야스퍼스의 철학을 보면 시각의 차이는 있으나 실존을 알려고 애도 쓰고 방불하게 실존의 윤곽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는 보리菩提라 또는 도라, 대아大我라 합니다. 중생은 소아 또는 속아俗我입니다. 속된 아란 말입니다. 또는 진아라, 열반이라, 또는 극락이라, 또는 오직 하나의 일의제一義諦 즉 일물一物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할 때는 결국 이 자리를 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도中道라, 또는 깨달음의 각이라, 바로 이것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법신 ‧ 보신 ‧ 화신도 원래 셋이 아닌 것입니다. 근본 체성體性은 법신이고 근본 체의 성공덕性功德인 자비나 지혜 등 무량공덕은 보신이고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법계에 갖춰있는 성공덕이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일체존재가 화신입니다. 따라서 법신 ‧ 보신 ‧ 화신은 셋이 아니기 때문에 삼신일불三身一佛입니다.

 

그래서 이 보리방편문 같은 공부 방식은 우리 자성自性이 바로 부처임을 밝히는 법문이기 때문에 이른바 자성선自性禪이라고 이름 붙인 경론도 있습니다. 어느 선이나 다 부처를 또는 자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사실은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빨리 마음을 통일 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우리가 몸부림치는 것도 다 마음이 통일이 안 되고 산란심과 혼침昏沈이 제거 되지 않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혼침과 산란심을 어떻게 빨리 없앨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수행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보면 거의가 다 산란심을 어떻게 제거하고 혼침을 막는가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 음식에 대한 계율을 보더라도 모두가 다 우리가 혼침을 덜 내게 하는 데에다 초점을 두고 말씀이 되었습니다. 가사 많이 먹거나 짜게 먹으면 분명히 혼침은 더 옵니다. 계율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을 하겠습니다만 아무튼 혼침과 도거掉擧 문제는 깊은 관심을 두고 싸워서 극복해야할 문제입니다.

 

따라서 산란심을 제거 하려면 자기 수행법에 대해서 스스로가 환희심을 가지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싫증나는 문제를 억지로 하려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수행법 가운데 구분한 것을 보면 수신문隨信門과 수법문隨法門이 있습니다. 믿음을 주로 하는 문이 있고 또는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이 말하는 어떤 법에 따라서 가사, 관법灌法에서 무슨 관을 한다든가 또는 화두를 든다든가 어떤 법에 따라서 하는 수행법이 수법문입니다. 수신문은 신앙대상을 생명의 실상으로 확신하고 믿음을 위주로 공부하는 방법이 수신문입니다. 기독교라든가 이슬람교라든가의 가르침은 수신문에 해당하겠지요. ‘오! 주여’ 하듯이 하나의 신앙대상에 대해서 전폭적인 신심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가는 수신문은 타력문他力門이고 또는 어떤 수행법으로 관조하고 참구해가는 수법문은 자력문自力門으로서 다 각기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필요하고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하면 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하든지 간에 공부 정진에 있어서 한 고비만 넘어서 버리면 자력‧타력이 하나가 되어버립니다만 우리 인간 자체가 원래 믿는 정서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에만 치우쳐 버리면 오래 감내堪耐를 잘 못합니다. 중간에 하기 싫지 않게 나가려면 우리 인간성에 본래 갖춰 있는 믿음도, 참구하는 지혜도 가지런히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흠모 추구하는 부처님은 바로 생명자체요, 나 또한 생명이요, 본래면목도 역시 생명이기 때문에 일체존재가 바로 생명인지라 부처란 바로 생명의 실상이며 내 생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할 때는 저절로 자기 고향같이 그리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생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여 흠모하고 연모하는 염불하는 마음이 밑받침 되어 있어야 어떤 공부를 하든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선정법四禪定法에도 말씀이 나옵니다만 『아함경阿含經』에서 보면 석존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도하실 때도 사선정, 멸진정滅盡定을 닦아서 대각大覺을 성취했습니다. 또 열반 드실 때에도 역시 멸진정을 거쳐서 사선정의 삼매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라한도 초선初禪 2선 3선 4선을 거쳐 멸진정에서 아라한도를 성취한다고 여러 군데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달마스님께서 중국에 오시기 전까지는 대체로 선이라 하면 사선정, 멸진정 법을 닦았습니다.

 

그러면 달마스님 뒤에는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근본불교根本佛敎가 필요가 없다면 마땅히 사선정, 멸진정이 필요가 없이 폐기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근본불교도 필요하다면 사선정, 멸진정을 꼭 참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근기가 수승해서 범부가 비약적으로 멸진정에 들어가면 모르겠지만 보통은 그렇게 되지 않고 성불까지의 과정에 수많은 경계가 우리를 산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경계에 따라 기분이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어서 좋은 경계는 집착해서 얽매이고 나쁘면 나쁜 대로 또 벗어나려고 얽매이는 것입니다. 참선할 때에 무서운 것이 나와서 유혹도 하고 공포심을 준다면 우리는 그 놈 떼려고 몸부림치고 애를 씁니다만 그럴수록 도리어 달라붙습니다. 따라서 그때그때 경계를 대치對治해 나가고 부정否定해 가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삼매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 사선정, 멸진정이기 때문에 반드시 닦아야 할 삼매법인 것입니다.

 

우리 범부가 견성오도見性悟道하는 직전에 들어가는 선근의 경계가 무간정無間定인데, 무간정까지 갔다 하더라도 기분이 너무 황홀하니까 만심慢心을 부리기가 쉽습니다. ‘이 만치 되었으니 사회에 나가서 중생제도하면 되겠지, 불경이나 법의 해석도 척척 되니 이것이 바로 견성이겠지!’ 하고는 닦지 않아 버리면 결국은 그대로 범부로 끝나 버리지요. 아만심이나 자의식이 과잉한 사람들은 견성을 핑계해 가지고서 도인이라고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무던히 아니까 도인같이 보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대망언大妄言 죄를 짓게 됩니다.

 

따라서 단박에 깨닫는 분도 있겠지만 그와 같이 단박에 쉽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부하는 방법이 자기 마음에 내켜야 환희심을 내고 환희심을 내야 피로가 안 생기고 몸에 병도 안 생기는 것입니다. 싫어하면서 억지로 하면 꼭 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항시 우리 마음의 바닥에서는 훤히 빛나는, 행복도 자비도 지혜도 모든 것을 다 갖춘 그 자리를 한사코 여의지 않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 번뇌 망상 때문에 가려져 있는 것인데, 번뇌 망상을 대별하면 이른바 혼침과 도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시비 망상하는 도거나 또는 꾸벅꾸벅 혼침해 버리는 동안은 결국은 우리가 죽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걸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최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감성적感性的으로 예술적인 능력도 있고 그런 소질이 많은 사람들은 역시 부처님을 생명적으로, 그리움 쪽으로 참구하는 수신행隨信行이 훨씬 더 적성에 맞을 것이고 또는 자력적으로 ‘내가 본래 부처인데 어디에 무얼 의지할 것인가?’ 이렇게 성격상 아주 강직하고 이지적理智的인 분들은 수법행隨法行의 수행법을 참구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또는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유연심柔軟心이 더 강하다 하더라도 본래 지혜도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감성적인 쪽만 구해서는 싫증을 내는 것이므로 지혜로 참구參究하는 방법도 참고로 해서 보완을 시키는 것이고, 또는 강강剛剛해서 자력적인 분도 부처님을 생명으로 추구해서 어느 때는 법당에서 절도 많이 해보고 해제解制 때는 기도를 모셔보는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꼭 염불만 해야 한다거나 죽도록 까지 화두만 해야 한다고 집착을 말고서 화두나 염불이나 진여불성 그 자리를 밝히는 것이니까, 자기 적성과 인연에 따라서 정진하면 공부에 싫증이 안 나고 우리 마음이 정혜균등定慧均等해서 깊은 삼매 경계를 성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993년 2월 태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