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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7. 보리를 깨닫는 방편문

보리방편문 해설2

보리방편문 해설 2

 

 

그지없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오늘날과 같이 성자들의 예지叡智를 필요로 한 때는 없었습니다. 흔히 복잡다단한 시대를 생각할 때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생각합니다만 춘추전국시대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각기 자기 목소리를 냈지만 오늘날과 같이 국민들 모두가 다 술렁거리는 때는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은 심지어 중학생까지도 마르크스주의의 병을 앓고 있는 때입니다. 따라서 명확한 자기 인생관의 정립이 없으면 자기도 바로 못 살고, 자기 가정도 못 다스리고 학생들도 바르게 교육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얼마나 가지 수가 많습니까. 같은 교파 내에도 역시 여러 가지 파벌이 있습니다. 또한 같은 불교 내에도 날이 가면 갈수록 분파가 많이 생깁니다. 분파도 교리적인 차이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권과 같은 순수하지 못한 동기 때문에 생기고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의 신념체계인데, 신념체계에 변동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역시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어떠한 진리가 가장 옳을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종합적으로 모든 것을 다 수렴해서 하나의 진리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희들이 어려서는 사상가라 하면 굉장히 차원이 높고 위대한 분들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같이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사상가는 한 면에 한사람이나 두 사람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학생들도 사상가가 되고 거의 온 국민이 사상가가 되는 혼란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런 때는 어느 누구나가 나름대로 철인哲人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인이 되지 않고서는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서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예지는 상대적인 어중된 지식이 아니라 참다운 성자가 우리한테 교시한, 인생의 등불이 될 수 있는 참다운 지혜를 말하는데 그런 예지만이 자기도 바로 살고 우리 민족도 바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그전에 제가 여러 가지로 요청을 받은 바도 있고, 딴 복잡한 문제는 거두절미하고서 우선 수행론修行論에 대해서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수행론에 대한 관심이 재가 불자님들보다 훨씬 더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론이 자기에게 안 맞으면 헛된 수고만 하고 결론적으로 성과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수행자는 더욱 그렇고 재가 수행자라 할지라도 수행론이 자기 적성에 안 맞으면 싫증나서 오래 못가는 것입니다.

 

수행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불교에서는 ‘인간성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하는 것부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라는 것은 ‘심종心宗’이라, ‘마음 심’자, ‘마루 종’자입니다. 불교에서는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를 다 ‘마음’으로 봅니다.

 

불교는 유심론唯心論적인 입장에 서있지만 단순 유심론이 아니라 철학적인 술어로 말하면 구체적 유심론입니다. 이것은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일반인들은 굉장히 저항을 갖습니다. ‘내 몸도 물질이고, 세상의 과학문명이 모두가 다 물질로 된 것인데, 어떻게 해서 모두가 마음일 것인가.’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상당히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모두가 다 물질뿐이라서 ‘만법유심萬法唯心’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을 느낍니다.

 

이 마음은 상대적인 너나 나나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우주의 본바탕으로서의 이른바 성령聖靈 기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료가 아닌 공간성과 시간성과 인과율因果律에 얽매이지 않은, 즉 말하자면 시공時空과 인과율을 초월한 하나의 영체靈體를 가리켜서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아닌 일반 동물은 ‘안, 이, 비, 설, 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입맛을 알고, 몸으로 촉각을 느끼는 5관五官을 씁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보다 더 진일보해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있듯이 ‘안, 이, 비, 설, 신, 의’로 의식까지를 씁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인간의 의식을 통해 보는 인식을 너무 신뢰합니다.

 

그리스 철인인 프로타고라스 같은 분도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물 자체가 그대로 우리한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에 의존해서 푸르게 누렇게 보이는 것이지, 푸르고 누런 것이 원래 실존적으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만 인간의 시각 따라서 푸르게 보이고 누렇게 보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그야말로 사람이 보면 물이고 귀신이 보면 피로 보이고, 천상인간이 보면 유리로 보이고, 고기는 자기가 사는 집으로 본다고 하듯이 그 사람의 시각 따라서 달리 봅니다. 같은 사람도 ‘수행의 정도가 깊은가, 옅은가’에 따라 달리 봅니다. 하나의 수학적인 문제도 초등학생이 보는 것과 중학생이 보는 것이 차이가 있듯이 우리가 보는 물질이란 것도 역시 실존적인 물질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주관에 비추어서 봅니다.

 

그런데 보통은 안, 이, 비, 설, 신, 의 6식까지는 쓰는 것이고 그 저변에 잠재의식, 심층의식인 말나식末那識이라 제7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7식은 어디서 나왔는가. 7식은 그것이 가장 저변이 아니라 더 깊은 식인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습니다. 또 아뢰야식 그것도 끄트머리가 아니라 아뢰야식의 근본은 제9식인 암마라식菴摩羅識입니다. 암마라식은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6식 밖에는 못쓰고 있고, 그리고 인간이 아닌 동물은 5식 밖에는 못쓰고 있다 하더라도 5관五觀이 있으니까 5식은 쓰지만 일반식물은 5관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본래 구경적인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동물이나 식물이나 광물 같은 것만의 본질이 불성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하나의 미시적인 세계, 산소라든가 수소라든가 또는 더 미세하게 분석해서 가장 적은 알갱이인 소립자素粒子까지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위에서 이루어진 에너지의 파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대체로 물리학을 하신 분들은 아시는 바와 같이 에너지가 곧 물질이요, 물질이 곧 에너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질을 파괴하면 물질은 형체는 사라지지만 에너지는 남습니다. 에너지는 영구히 멸해지지가 않습니다. 소립자를 파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양만 사라지는 것이지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에너지는 영생永生합니다. 따라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이라, 색은 현상계 물질을 말합니다. 색은 즉 공이요 그런데 그 공이 허무하다면 나중에 공즉색이 나올 수가 없지요. 색즉공의 공은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공이 아니라 시간 공간성을 띤 질료는 아니겠지만 하나의 심심미묘한 생명이기 때문에 공 가운데서 다시 인연 따라서 색이 나옵니다. 물질이 즉 에너지요, 에너지가 즉 물질이라는 것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공이나 공즉색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물리학적인 술어를 말하면 상당히 저항을 느낍니다. ‘부처님 뜻은 보다 더 깊은 것인데 왜 그렇게 쉽게 말하는가.’ 언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다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언어에 걸리면 공부를 못합니다.

 

물질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을 일본인 다니구찌 마사하루 같은 분은 굉장히 강력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금타대화상의 천문학 같은데서 가령 우주에 에너지가 충만해있는 것인데, 에너지를 ‘쇠 금’자, ‘티끌 진’자, 금진金塵이라 하는데 금진이 좌로 선행旋行할 때는 양자陽子가 되고 즉 자기磁氣가 나오고 금진이 우로 선행할 때는 전자電子가 돼서 전기電氣가 나옵니다. 이런 학설은 금타대화상이 처음 세우신 것인데 제가 실험을 다 안 해서 확증은 못합니다만 확신은 합니다. 그와 같이 도인들은 투철한 직관력으로 보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세한 문제에 관해서는 표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튼 천지우주는 하나의 에너지, 불교용어로 말하면 일체의 여러 가지 가능을 갖춘 순수한 불성입니다. 불성은 다시 표현하면 금강륜金剛輪 또는 금진金塵이라고도 합니다. 그럼, 동력動力은 무엇이겠습니까.

 

희랍 철인 엠페도클레스는 물질이라는 것은 미움과 사랑 때문에 생긴다는 이론을 정립시켰습니다. 이것을 다시 표현하면, 우리 중생이 싫어하면 싫어하는 염력이 순수에너지를 오른쪽으로 선회시켜서 동력이 되고 우리가 탐욕심을 내면 좋아하는 염력이 순수에너지를 왼쪽으로 선회를 시킵니다. 이것이 하나의 함수관계가 되어서 지, 수, 화, 풍 사대四大가 나온다는 것을 엠페도클레스라는 철인도 말했습니다.

 

금타대화상의 법문에도 우주의 질량, 열량을 수치로 표시한 것이 있는데 그중 가장 근원적인 것도 역시 어떻게 해서 물질이 나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9세기 철인 가운데서 듀포아렌드라는 분도 3불가사의, 7불가사의를 말한 가운데 가장 부사의한 것은 ‘물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과 물질이라는 것은 어떤 관계성이 있는 것인가?’ 이 세 가지 문제가 가장 부사의한 의문으로 남습니다. 이런 문제는 결국은 성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란 항상 상대적인 것에 머물기 때문에 상대성을 떠나면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알려면 직관력으로 성자의 밝은 안목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범부凡夫의 지혜로 해서는 성자가 해놓은 것을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제 아무리 고성능 전자현미경으로 본다 하더라도, 물질의 저편 피안彼岸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주의 순수에너지가 어떻게 해서 물질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누가 정확히 말한 분이 없었는데 부처님께서 비로소 말씀을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는 세밀하게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물질이라는 것은 그냥 중생의 업력業力 소치라고만 표현하셨습니다.

 

불교 우주론에서는 우주가 나중에는 텅 비어버립니다. 우주가 파괴되어 텅 비어버리면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 엔트로피 상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무엇을 사용해 버리면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의 찌꺼기가 남는데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는 산화가 되어서 천지우주가 다 타버린 셈이지요. 그때는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결국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가 성겁成劫이라 이루어지고, 주겁住劫이라 생물이 살고, 생물이 살다가 우주가 불타서 파괴되고 맙니다. 텅 비어 질료는 조금도 없고 텅 비어서 에너지만 남습니다. ‘에너지만 남으면 허무하지 않은가.’ 에너지는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 가운데 무한한 가능의 에너지로 차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성공덕佛性功德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것을 불교의 공덕으로 말하면 자비로운 기운, 지혜로운 기운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더 부연시키면 다섯 가지 지혜 또는 백사십불공법百四十不共法이라,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을 백사십 종류로 구분한 것도 있어요. 그와 같이 불교는 세밀합니다. 우리가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마이너스 기운은 자비慈悲에 해당하고 플러스 기운은 지혜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배대시킬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자비와 지혜입니다. 불성도 하나의 성품으로 보면 불성이지만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부처님이라 합니다.

 

그와 같이 텅 비어버리지만 그 가운데는 자비로운 기운, 지혜로운 기운이 똑 같으면 마이너스, 플러스 기운이 제로가 되어 다시 성겁成劫이 안 일어나지요. 그러나 마이너스, 플러스 기운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동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동합니다.

 

말하자면 중생의 업력業力이라 표현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와 같이 공겁空劫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의미에서 생각할 때는 우리 같이 원소로 구성된 몸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심식心識만 존재하는 중생만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다 파괴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중생 가운데서 부처가 미처 못된 의식만 있는 중생이 있습니다. 의식만 있는 중생들이 생각을 합니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생각 말입니다. 좋아하는 생각은 인력引力이 되고 싫어하는 생각은 척력斥力입니다. 그것이 정화되면 자비慈悲와 지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煩惱가 즉 보리菩提요, 보리가 즉 번뇌입니다. 우리가 잘 활용하면 그 근본성품은 결국은 자비요 지혜인데, 우리 중생이 잘못 쓰면 미움과 탐욕이 됩니다.

 

의식만 있는 중생들이 싫어하면 불성을 우로 선회시켜 전자가 되고 또 좋아하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동력이 되어서 불성을 좌로 선회를 시켜 그것이 자기가 되어서 중성자, 중간자가 됩니다. 이렇게 되어서 양성자나 중성자를 핵으로 해서 전자가 뱅뱅 도는 원자가 됩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여서 무수한 중생들의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동력이 되어서 중생들의 공업력共業力으로 해서 천지우주를 구성합니다. 그래서 지구요, 별이요, 화성이요, 금성이요 하는 것도 우리 중생이 에너지 차원을 못 보니까 그러는 것이지 에너지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모두가 불성으로 보이고, 에너지로 보입니다.

 

인간성과 우주의 본바탕을 확실히 봐야 성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자와 범부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범부는 근본 우주의 실상實相을 못 보지만 성자는 우주의 근본실상을 봅니다.

 

부처님공부는 어떤 공부든지 간에 ‘불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거기에 따라서 부처님의 수행법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선 ‘옴마니반메훔’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티베트불교의 고승들은 다 ‘옴마니반메훔’을 합니다. 한국도 진각종에서는 ‘옴마니반메훔’을 주로 합니다. 또 우리 전통적인 불가에서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이라 해서 ‘옴마니반메훔’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진언들은 ‘오종불번五種不飜’이라 해서 우리가 함부로 번역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매우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 중생의 제한된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호기심이라는 것이 한도 끝도 없어서 중생의 호기심에 맞추기 위해서 번역한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부처님의 광명’ 그렇게 번역이 됩니다.

 

불성佛性이란 것은 순수한 에너지인데 심심미묘한 무량지혜를 갖춘 하나의 빛입니다. 빛이란 개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태양광선 같은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불교용어로 적광寂光이라, 고요한 광명 또는 정광淨光입니다. 이런 정광, 적광이라는 개념이 우리한테는 굉장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공부해가면 자기가 정화됨에 따라서 차근차근 광명과 접근되어 갑니다. 기도를 깊이 모신 분들이 광명을 감득感得하지 않으신 분들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 광명을 감득을 해야 환희심이 납니다. 또는 평소에 몰랐던 것이 머리에 마치 번개모양으로 반짝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본이 되는 불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하니까 소신공양燒身供養, ‘태울 소’자, ‘몸 신’자, 몸을 불사르기도 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순교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같은 분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는데 짐짓코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생명의 실상實相을 변증한 셈이지요. ‘사람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몸뚱이는 우리 마음에 있다.’하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생명의 실상을 생각할 때에는 사바세계의 허망한 것에 대해 깊이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라는 것은 중생의 업력기관이라, 중생의 업을 짓는다고 『지관론止觀論』에 나옵니다. 업을 지어놓으면 그 업의 여러 가지 조합으로 해서 ‘업의 가화합假和合’이라, 업이 가짜로 화합합니다. 업이 화합돼서 ‘종중연생從衆緣生’이라, 인연 따라서 나옵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으실 때는 주로 12인연법十二因緣法으로 깨달으신 것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어디서 나왔는가?’ 당연히 엄마 뱃속에서 나왔겠지요.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나는 무엇인가?’ 말입니다. 엄마의 태에 의지해서 뱃속에서 나올 때까지는 아는데 엄마한테 의지해서 나오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이렇게 소급해서 생각이 올라가고 올라가서 결국은 ‘우주의 끝은 무엇인가?’로 마음이 모아집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상대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인데, 마음이 하나로 딱 모이면 우리 전신의 근본뿌리가 불성이기 때문에 집중하는 힘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우리의 전생이 무엇인가?’ 이렇게 파고 들어가서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일념으로 확 열려버려서 과거를 알 수 있습니다.

 

도인들이 공부해서 마음이 열릴 때 맨 처음 나오는 신통神通이 숙명통宿命通입니다.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압니다. 자기 전생도 다 압니다. 과거를 알고 보면 하나의 영체靈體가 자기 아버지, 어머니 생명파장에 걸려서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의 영체로 헤매다가 아버지, 어머니의 그런 파장에 걸려서 온 것입니다. 그렇게 돼서 어머니 배안에서 영양 섭취하고, 나서는 젖 먹고 영양을 섭취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몸뚱이가 생깁니다.

 

따라서 이것은 가화합假和合으로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같은 성분들이 세포의 성분이 되어서 모였습니다. 중생의 업력 기관으로 해서 종중연생從衆緣生이라, 뭇 인연 따라서 이와 같이 생명이 났는데 사실은 이것이 실체가 아닙니다. 각 원소가 다 가짜로 임시로 화합되어서 잠시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번뇌煩惱가 ‘몸뚱이, 이것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내 몸은 무엇입니까?’ 각 분자가 합해서 되었습니다. 또 우리가 죽어진 다음에는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다 흩어져 버립니다.

 

그럼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영혼을 부인해 버립니다. 아기가 엄마의 태안에 의지할 때 그것을 하나의 물질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혼이 안 보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피가 결합되어서 비로소 결국은 하나의 생명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인들이 물질 저쪽세계를 보는 안목에서는 그렇게 안 봅니다. 분명히 하나의 생명이 과거에도 사람 됐다가 뭣도 됐다가 했겠지요. 하나의 생명이 마치 귀신이 헤매듯이 헤매다가 부모님의 생명 파장하고 맞으면 걸려옵니다. 왔다가 죽으면 몸뚱이는 결국은 각 원소로 분해되고 영체만 남습니다.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던가. 금생에 내 영혼의 성숙된 정도만 남습니다.

 

저희 절은 매일매일 구병시식救病施食을 합니다. 귀신 때문에 어디가 아프고 하면 부처님 법으로 해서 귀신을 떼기도 하고, 또 인연이 닿으면 즉각 약을 쓰지 않아도 낫기도 합니다. 이렇게 합니다만 대개 젊어서 죽은 영혼이라든가, 총을 맞아 죽었다든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만나서 죽었다든가 하는 영혼들은 바로 못갑니다. 나이 먹어서 자기가 생사관生死觀에 투철하고 자기 갈 곳을 아는 사람들은 그냥 바로 갈 수가 있고, 간다 하더라도 역시 가는 곳이 영혼의 성숙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나쁜 영혼은 저 밑으로 뚝 떨어져서 지옥 같은 데도 분명히 가는 것입니다.

 

지금 불교를 믿는 분들은 지옥, 아귀 그러면 ‘부처님께서 하나의 방편으로 해서 그렇게 말씀하셨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제한된 시각에서 볼 수 없는 세계에 분명히 지옥중생이 영체로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분명히 있듯이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귀신이 의심스러우면 점쟁이들을 몇 사람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보통 점쟁이들은 귀신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은 뒤에도 역시 몸은 흐트러진다 하더라도 우리 심식心識은 남습니다. 말하자면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암마라식菴摩羅識은 끝내 남습니다. 불성佛性은 가장 본질이기 때문에 조금도 중단이 없지요.

 

우리 몸뚱이에 대한 하나의 애착 때문에 인간이 여러 가지 고난도 많고 시비도 많고 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결국은 이 몸뚱이를 보배덩어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죄악의 씨앗이 됩니다. 손가락에 반지를 몇 개나 끼고 하는 것도 모두가 다 몸뚱이를 아껴서 하는 것 아닙니까.

 

이와 같이 우리 몸뚱이라는 것이 물리학적으로 생각해보면 결국은 뻔한 것인데, 각 원소가 분자가 돼서 모인 것에 불과한 것인데 영양을 좀 잘 먹여주면 힘이 더 날 것이고 덜 먹여주면 덜 나오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의 껍질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못 버리면 신앙생활은 절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나 기독교에서나 고행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무슨 필요로 밥 한 끼도 굶기가 어려운 것인데 요단강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금식기도를 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저런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몸뚱이라는 것이 꼭 몇 칼로리를 먹어야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단식을 해보면 짐작이 갑니다. 월남의 메디콩 같은 사람은 반체제 스님인데 정부군한테 구속돼서 옥중에서 100일 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말도 못하겠지요. 옥중에서 물만으로 100일 동안 살았는데, 그것도 그냥 산 것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2시간씩, 하루 4시간씩 염불을 했습니다.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 마음, 식에 있습니다. 몸뚱이는 결국 하나의 보조에 불과합니다. 영양도 보조에 불과합니다.

 

저는 40대에 광주 동광사에서 지도 법사로 몇 개월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보름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단식을 하는 동안 제가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법문을 한다고 했는데 옆에서 제가 법문을 나가려고 하면 만류를 합니다. ‘보름동안이나 단식을 하고 쓰러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그러나 제가 평소에 말더듬이지만 제 평생에 그때에 보름동안 단식하고 나가서 처음으로 말을 잘했습니다.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고 잘했습니다.

 

아무튼 생명자체가 본질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즉 식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즉 몸이라서 몸이 건전하면 마음도 건전하고 몸이 취약하면 마음도 취약하기 때문에 둘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몸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눈썹 하나, 우리 치아 하나가 다 우리가 지은대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관상을 보는 사람들은 우리의 치아가 생긴 것만 보고도 그 사람의 성품을 압니다. 머리 색깔 보고도 그 사람의 성품을 압니다. 그렇게 우리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아무튼 너무나 빗나갔습니다만, ‘우리 마음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마음, 이것이 우주의 본바탕이고 우리 인생의 본바탕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결국은 30년, 또는 50년, 80년,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을 위해 너무 봉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봉사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 몸뚱이는 좋고 남의 몸뚱이는 가볍게 여깁니다. 내 몸뚱이가 좋으니까 자기 권속, 자기 아내, 자기 남편, 자기 자식의 몸뚱이는 좋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 인생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싸움이 되고 마는 셈입니다. 그러나 몸은 하나의 종에 불과한 것이고, 즉 다시 말하면 소리에 따르는 메아리,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만이 자기 몸뚱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안 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집착을 여의는 것이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이른바 고행생활입니다. 따라서 저희 같은 수행자는 뭘 많이 먹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제일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제일 높은 스님이 아닙니다. 될수록 골라서 누더기를 입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못 먹고, 가장 못 입고, 가장 못 살면서 정신적인 면만 최고도로 정화하는 것이 출가 수행자의 본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 사의지四依止라, 가장 알찬 행동 네 가지를 보면 분소의糞掃衣라, 우리 옷은 똥 묻은 밑씻개나 할 수 있는 그런 누더기를 깨끗이 빨아서 누벼서 옷을 해 입고 말입니다. 그리고 수하좌樹下座라, 집에서 자지 말고 나무 밑이나 돌에서 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상걸식常乞食이라, 항시 얻어서 먹고 얻어먹더라도 많이 먹지 말고 주먹으로 하나쯤 되게 먹고 말입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표본입니다. 그와 같이 청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가 다 같지 않기 때문에, 또 집단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절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본 정신만은 잊지 말아야 우리 승려가 청빈과 경건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우주의 본체고, 비록 이렇게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마음이, 불성佛性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선회해서, 우로 선회하면 전자가 되고 불성이 좌로 선회하면 양자가 되고 한다 하더라도 불성 그것에는 조금도 훼손이 없습니다. 불성이 좌로 진동해서 양자가 되고 중성자가 됐다 하더라도 역시 중성자 그걸로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성 차원에서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순금으로 가락지를 만드나 무얼 만드나 순금이라는 성품은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불성, 이것은 탄소가 되나 빛도 안 나는 그런 하나의 뭉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 차원에서는 변치가 않습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렇게 인연 따라서 천차만별로 모든 것이 된다 하더라도 예쁜 사람, 미운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역시 사람이 되었어도 불성이라는 것에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변질이 없으니까 불성을 볼 수 있는 명확하고 영롱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다 불성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되어도 불성은 변함이 없고, 무쇠가 되어도 변함이 없고, 가령 더러운 똥이 되어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운문스님한테 가서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부처란 무엇입니까?’ 물으니까 ‘똥 마른 막대기’라, ‘부처란 무엇입니까?’ 물을 때는 부처란 것은 초월적이고 존귀하다고 생각해서 물었겠지요. 물었을 때 운문스님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란 것은 존귀한 것만이 부처가 아니라, 똥이나 뭣이나 모두가 부처니까 말입니다. ‘똥 마른 막대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처란 것은 위대한 것인데 왜 똥 마른 막대기란 말인가.’ 그렇게 의심하다 보면, 의심하는 그것으로 마음이 모아집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그 집중력으로 해서 마음이 트입니다. 마음이 트이고 모아져 깊이 파고 들어가면 불성까지 확 트입니다. 확 트이면 그때는 깨달아집니다. 똥이나 먼지나 모두가 불성으로만 보이니까, ‘똥 마른 막대기를 불성이라 했구나.’ 하고 확연히 알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