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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7. 보리를 깨닫는 방편문

보리방편문 해설 Ⅰ--②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 우주의 정기를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불성佛性입니다. 현대적인 말로 하면 에너지가 되겠지요. 물질이 다 텅텅 비어서 우주가 파괴가 되어버린다 하더라도 에너지만은 존재합니다. 나중에 다시 에너지의 활동으로 해서 우주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그와 같은 도리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주가 파괴가 돼서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텅텅 비어서 그야말로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라 텅텅 빈 공겁空劫이 됩니다. 공겁이 된 뒤에는 다시 거기서 순수한 생명이 우주를 생성시킵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이렇게 우주생성원리까지 다 풀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은 다 비어버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는 그런 허망한 것은 없어진다 하더라도 참말로 있는 것은 불성이고 또는 순수에너지입니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제삼시교第三時敎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모두가 다 비었다 하는 주관도 비고 객관도 비었다 하는 그런 공에 집착하는 것과, 또는 소승小乘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데 객관이 없는 것인데 일반 소승은 있다고 봅니다. 소승의 그런 유집有執을,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다 아울러서, 우리가 부정하기 위해서 비공비유比空非有라, 비어있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대로 있지 않고, 또는 소승이 보는 대로 아직 낮은 보살이 보는 대로 해서 비어있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비어있지 않고, 정말로 있지도 않은 참다운 중도中道를 밝혔습니다.

 

이와 같이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중도를 밝힌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말, 이것을 꼭 취해야 합니다. ‘있다’ 하는 것도, 또는 ‘비었다’ 하는 것도 우리는 취해서는 안 됩니다. 비어있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참다운 것, 영생永生으로 존재하는 또는 시간과 공간과 모두를 다 떠나서 항시 있는 에너지 같이,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린다 하더라도, 에너지 불멸이라 에너지는 우주에 항시 있습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들은 생사를 떠나서, 모두를 다 떠나서 항시 있는 영원히 존재하는 그러한 중도실상의 불성을 보는 것이고 거기에 안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도 없고, 또는 여러 가지 불행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선행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세 차원으로 나누어서 검토를 해 보았습니다. 가장 낮은 차원은 제일시교第一時敎 ‘나는 허망하고 그림자 같지만 객관적인 사물은 존재한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 다음 제이시교에서는 ‘나도 비어있고 허망하지만 결국 객관도 모두가 텅텅 비어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제삼시교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다 비어있고 참말로 존재하는 진짜 내가 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참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가르치신 참다운 가르침입니다.

 

『법화경法華經』 같은 부처님 결론 같은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오신 뜻이 무엇인가 하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어디에도 안 치우치신 중도의 대도大道를 우리 중생이 알고 느끼고 깨달아서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도, 마땅히 ‘중도中道’라고 하신 부처님의 마지막 법문을 꼭 느끼시고 아셔야 만이 참다운 해탈과 자유와 참다운 행복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보리방편문의 골격을 제가 간추려서 여기에 도식으로 표시했습니다. 이 보리방편문은 한 말로 말하면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말씀했습니다. 이른바 불교 한문식으로 말하면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 보리방편문 줄거리의 골격입니다. 따라서 조금 복잡하게 이론 전개가 되어 있고, 법문이 상당히 길지만 한 말로 말하면 결국 심즉시불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방편문의 대의입니다.

 

                                                                                                如來

                                                                                                眞如

                                                                                                法性

                                     法身…淸淨法身毘盧遮那佛…空…陀               實相

                                                                                                菩提

                                                                                                道

                    心      報身…圓滿報身盧舍那佛……性…彌     佛        大我

                                                                                                眞我

                             化身…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相··阿              涅槃

                                                                                                極樂

                                                                                                一物

                                                                                               中道

                                                                                                  覺

                                                                                             主人公

 

 

분석해 놓고 보면 불심佛心과 중생심衆生心은 둘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 마음이나 좋은 사람 마음이나 겉만 다르고 표현만 다른 것이지 속의 알맹이는 똑같은 것입니다. 석가모니 마음이나 예수마음이나 공자마음이나 마음의 깊이는 똑같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의 마음의 계발 정도에 따라서 차이만 있습니다.

 

따라서 만물이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니고 일체중생이 나와 더불어서 원래 하나란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인뿐만 아니라 유교나 도교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만물이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일체중생이 나와 더불어서 하나란 말입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안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기만 잘되기 위해서 남을 구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사람 마음이나 모두가 다 바로 부처입니다. 한계나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또는 공부를 좀 한 사람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모두가 다 간격도 없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나 같이 못나고 업장 많은 사람이 왜 부처일 것인가.’ 의심을 갖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즉 무명심無明心이라, 무명無明이란 말은 굉장히 소중한 표현인 것입니다. 밝지 않습니다. 우리한테 있는 불성佛性, 부처님마음은 훤히 밝아서 우주를 다 비추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업장에 가려서 밝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을 내가 다 모릅니다. 무명 때문에 몰라서 그런 것이지 잘나나 못나나 좀 덜 배우나 많이 배우나 모두가 다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심즉시불心卽時佛이라, 마음이 부처인 것인데 그 마음자리를 바로 부처라 하면 너무 싱겁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도 복잡하니까 부처님 경전 따라서 조금 더 해설을 해야 하겠지요. 그 중 가장 체계적으로 한 해설이 보리방편문식 해설입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 본체를 법신法身 그럽니다. 또 그것을 불교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입니다. 해석은 불경에 가서 있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보리방편문은 불경에 있는 그런 귀중한 술어를 원용援用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상관성 있게 이해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 마음의 근본체성體性, 본체를 법신이라 하는 것이고, 조금 더 구체화시켜서 말하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우주를 훤히 비추고 있는 광명이란 뜻입니다. 대일여래라는 것은 큰 대’자, 날 일‘자, 이런 태양 같은 광명이 아니라 몇 천 배 몇 만 배나 더 밝은 우주의 광명, 우주의 생명을 대일여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더 새기면 광명변조光明邊照라, 태양보다 훨씬 더 밝은 광대무변한 광명의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본 체성은 광명변조라, 우주에 광명이 곽 차있습니다. 잘나나 못나나 미련한 사람이나 벙어리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의 본래 마음자리는 다 천지우주에 꽉 차있는 광명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미처 못 보는 것이고 성자는 분명히 거기에 하나가 됐습니다.

 

그런 청정법신자리, 우리 마음의 본체자리에 들어있는 자비나 지혜나 일체공덕을 보신報身이라 합니다.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조금 더 보편적으로 얘기 하지 않고서 협소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법신法身은 사람만의 본체다’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부처님 뜻은 그렇게 좁지 않습니다. ‘유정有情, 무정無情, 유상有相, 무상無上 일체존재를 말한 것입니다. 산이나 내[川]나 물질이나 모든 존재들의 가장 근본이 되는 본체를 법신이라 합니다.

 

또한 그 법신 속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功德, 지혜나 자비나 능력이나 일체의 가능성을 보신이라 합니다. 이것을 보다 더 구체화시키면 ‘원만보신圓滿報身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 합니다. 이것을 또 달리 말하면 정만성해淨滿性海라, 즉 일체공덕이 갖춰있는 성품의 바다와 같습니다.

 

보리방편문은 이렇게 굉장히 고도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8만4천 법문 가운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지만, 사실은 꼭 우리가 알아두어야 합니다. ‘현대 과학보다도 불교가 어째서 앞서는 것인가.’ 또는 ‘같은 불교 내에도 어떠한 것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골수인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또는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다종교 사회 가운데서 불교가 으뜸 되는 그런 의의, 또는 과학이 도리어 주인이 되어 있고 인간이 끌려가는 현대에 있어서 불교가 과학보다 더 앞서 있다는 증거, 이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이런 법문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이 법신인 것이고, 또 그 법신에 포함되어 있는 일체공덕이 보신입니다. 또 거기에서 우러나는 현상적인 것은 모두가 화신化身입니다.

 

법신·보신·화신 이것을 잘 외워두십시오. 오늘 보리방편문을 가져가셔서 천번 만번 보시면 굉장히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금생뿐 아니라 세세생생에 큰 보배가 될 것입니다. 나중에 꼭 그렇게 아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법신 이것은 인생과 우주의 본래자리입니다. 순수생명자리, 이것이 법신인 것입니다. 순수생명자리, 법신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 지혜, 능력, 자비, 행복 일체가 다 들어있는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일만공덕一萬功德이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많은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보신입니다. 또는 그 자리에서 산이요 내[川]요 사람이요 또는 일체중생이 나옵니다. 그래서 현상적인 모두는 화신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 가르침은 모든 우주를 다 통틀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역시 화신 자리에서는, 현상적인, 형상화된 자리에서는 조그마한 인간 밖에 안 되지만 우리 마음 깊이에서는 결국 보신, 법신자리는 다 똑같아집니다.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무변대해無邊大海에서 천파만파 파도가 일어납니다. 또는 천개 만개 또는 몇 십억의 거품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 거품이나 파도는 높고 낮고 거품도 적고 크고 하겠지요. 그런 차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바다도 그렇습니다. 우주란 것은 법신이라 하는 순수한 생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순수한 생명은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이 아니라, 일체 공덕을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일체 진리와 일체 공덕이 다 들어있는 바다 가운데서 일어나는 존재가 사람이요 하늘에 있는 별이요 산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고향은 법신이고 보신입니다. 법신·보신은 영원히 변동이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부증불감不增不感이라,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또는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또는 더럽지 않고 청정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에너지의 세계가 법신·보신입니다.

 

이 자리에 갖추어져 있는 여러 가지의 인연의 힘으로 해서 인연력因緣力이라, 부처님 법문식으로 하면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인연력이라,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심심미묘합니다. 우주에 갖추어져 있는 인연의 힘으로 해서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나옵니다. 이것도 보다 세밀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전문적인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보리방편문의 지혜, 이것은 비단 자기뿐만이 아니라 일체 우주를 다 통괄해 있습니다.

 

내 마음을 파고 들어가도 법신·보신·화신인 것입니다. 하나의 원소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파고 들어가면 역시 다 보신이고 화신인 것입니다. 다만 현상적인 차이에서만 강씨, 박씨, 이씨의 차이가 있는 것이고, 두두물물로 현상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보신·법신차원에서는 모두가 하나란 말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하나인 자리를 훤히 보이는 성자가 자기만 위하고 남을 학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생은 화신 경계에 현상적인 세계에 얽매인 것이고, 성자는 보신·법신을 훤히 봐서 말이나 행동을 보신報身, 법신法身에 입각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신·보신·화신化身을 합한 것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법신만도 부처가 아닌 것이고, 또는 보신만도 부처가 아닌 것이고 현상이나 실상實相이나, 현상이나 절대나, 상대를 모두 합해서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가 바로 부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서 우주와 하나가 된 분이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어떤 도인들도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주의 진리, 법신·보신을 깨달은 분입니다.

 

우리 중생도 금생에는 못 깨닫는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바탕이 바로 법신이요 보신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법신·보신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못되면 우리가 윤회輪廻를 하겠지요. 사람으로 소로 개로 돼지로 갔다왔다 합니다. 우리 인간은 반드시 깨달아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게으른 사람들은 금생에 못되고, 내생來生에도 못 될 것이고 부지런하고 정말로 바른 사람들은 금생에 될 것이고, 금생에 못되면 내생에 되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자리를 중생이 잘 모르니까, 부처님께서 그때그때 경전 따라서, 사람 따라서 달리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를 진여眞如라, 불성佛性이라, 법성法性이라, 실상實相이라, 중도中道라, 보리菩提라, 열반涅槃이라 여래如來라, 주인공主人公이라 이와 같이 불렀습니다. 부처란 말이나, 여래란 말이나, 주인공이란 말이나, 또는 열반이란 말이나, 또는 보리란 말이나, 또는 중도란 말이나 실상이나 법성이나 진여나 똑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알고서 불경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불경을 보든지 ‘아! 그렇구나.’ ‘이 불경은 공을 주로 말했구나.’ ‘이 불경은 유를 주로 말했구나.’ ‘이 불경은 부처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바로 말씀하신 거구나.’ 이와 같이 우리가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골격으로 이루어진 것이 보리방편문의 체계입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한 것인데 마음자리, 마음 본성이 바로 법성인 것이고 법신 속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이 보신이고, 또는 법신·보신에서 이루어진 사람이나 산이나 별이나 일체 존재가 화신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화신 가운데 개별적인 하나란 말입니다. 따라서 화신에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법신·보신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화신이 됐다 하더라도 지금 나와 너는 정말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차이가 있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화신이 된 이 자리에서 김 아무개란 사람, 박아무개란 사람, 그 사람도 역시 별도의 존재가 아닙니다. 현대물리학을 공부한 우리 젊은 세대는 다 아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비록 나와 네가 이와 같이 둘로 있다 하더라도 근본에서 볼 때는 하나입니다.

 

어째서 하나인 것인가. 우리 중생이 사는 데는 공간이 다 있습니다. 공간 속에는 산소나 수소 같은 원소가 꽉 차있습니다. 공기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역시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 것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립자 같은 것은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에너지가 없는 공간이 있습니까. 그런 공간은 없습니다. 나와 남은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다만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런 달리 보이는 것이지 원자의 차원, 또는 에너지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딱 붙어있습니다.

 

내 몸도 산소나 수소나 질소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또는 내 몸과 네 몸 사이 공간도 역시 산소나 수소나 질소로 해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과 나와도 결국은 다 붙어있는 것입니다. 우주가 모두 다 남남이 아닙니다. 다만 중생은 그런 이치를 모르는 것이니까 ‘나와 남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이치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나와 남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선행적인 지식을 두시고서 이 보리방편문을 공부하시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