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7. 보리를 깨닫는 방편문

보리방편문해설1-3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씀한 것이 바로 보리방편문 법문의 골격입니다.

 

보리방편문, 방편문이라, 비록 진리를 사람의 말이나 문자로 표현한 것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진리는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방편이란 말을 썼습니다. 결국은 진리에 들어가는 방편의 문입니다. 도인들은 이와 같이 같은 말도 굉장히 신중하게 합니다. 제 아무리 고도한 학문이나 이론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진리는 못 됩니다. 참다운 도에 들어가는 문이란 말입니다.

 

 

心은 虛空과 等할새 片雲隻影이 無한 廣大無邊의 虛空的 心界를 觀하면서 淸淨法身인달하야 毘盧遮那佛을 염하고

 

 

허공虛空할새 ;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우리는 우리마음을 지금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음을 풀이한 그대로를 말한 것입니다. 제 2 석가라는 용수보살이 『보리심론菩提心論』에서 마음에 대해 풀이를 한 것을 금타대화상이 참선 중에 감득하신 것인데 이것은 용수보살의 『보리심론』의 내용을 압축시켜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허공과 같다는 말입니다. 허공은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옹졸하고 좁습니다만, 달마스님의 『관심론觀心論』에 ‘심심심心心心난가심難可尋이라’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 했지만, 그 문제에 관해서 확실한 해답은 못 내렸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먼저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잘난 사람 마음이나, 못난 사람 마음이나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똑 같은 것입니다. 또 그것은 광대무변합니다.

 

편운척영片雲隻影 ; 구름 같은 어떤 흔적이나 흐림이 조금도 없는

 

광대무변廣大無邊허공적虛空的 심계心界하면서; 넓고 크고 또는 갓이 없는 허공 같은 마음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淸淨法身인달하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염하고; 그 허공과 같은 끝도 갓도 없는 허공세계, 마음세계 그것이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우리가 생명이면 우리 마음도 응당 생명이겠지요. 따라서 마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으로 표현하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관찰하고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허공 같은 그 자리를 비로자나불로 생각하고,

 

 此 虛空的 心界에 超日月의 金色光明을 帶한 無垢의 淨水가 充滿한 海象的 性海를 觀하면서 圓滿報身인달하야 盧舍那佛을 念하고

 

  허공적虛空的 심계心界초일월超日月금생광명金色光明 무구無垢의 정수淨水 충만充滿한 해상적海象的 성해性海하면서;

이와 같은, 허공 같은 끝도 갓도 없는 광명변조光明邊照의 마음세계에 해와 달보다도 더 밝은 해와 달과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찬란한 금생광명을 띠고 있는 무구無垢의 조금도 찌꺼기나 때가 없는 아주 청정한 물의 맑은 정기가 충만한 그런 바다와, 바다에 바닷물이 가득 차 있듯이, 훤히 트여있는 광대무변한 마음세계에 청정한 정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원만보신圓滿報身인달하야노사나불盧舍那佛을 염하고; 청정한 정기가 가득 차있는 그것이 즉 말하자면 원만보신노사나불입니다. 원만보신노사나불을 생각하고

 

 

 內로 念起念滅의 無色衆生과 外로 日月星宿 山河大地 森羅萬象의 無情衆生과 人畜 乃至 蠢動含靈의 有情衆生과의 一切衆生을 性海無風 金波自涌인 海中漚로 觀하면서 千百億化身 인달하야 釋迦牟尼佛을 念하고

 

  로 염기염멸念起念滅의 무색중생無色衆生; 그리고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좋다, 궂다, 나요, 너요’하는 그런 생각인 무색중생, 우리는 중생이라고 하면 사람만 중생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본래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우리 생각, 사고활동도 결국은 하나의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그런 우리 사고활동인 무색중생과

 

로 일월성수日月星宿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무정중생無情衆生과; 또는 밖으로 눈에 보이는 해요 달이요 별이요 산이요 내[川]요 또는 대지요 그런 삼라만상의 무정중생과 즉 말하자면 의식이 없는 중생과

 

인축人畜 내지 준동함령蠢動含靈의 유정중생有情衆生과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또는 사람이나 축생이나 꿈틀거리는 그런 곤충이나 이러한 유정중생과의 모든 중생,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중생에 해당합니다. 이런 일체중생을

 

성해무풍性海無風 금파자용金波自涌인 해중구海中漚로 관하면서; 광대무변한 마음자리에 금색의 생명이 충만해 있는 그 자리에 바람은 없지만 금색광명, 즉 말하자면 생명이 스스로 뜁니다. 그 가운데 들어있는 에너지의 작용이 스스로 뜁니다. 스스로 뛰는 바다 가운데 우리가 거품으로 관찰합니다. 관찰하면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달하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염하고; 천백억화신이라, 천지우주에 있는 현상은 하도 수가 많으니까 어떻게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가리켜서 천백억화신이라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좁은 의미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하면 역사적인 석가모니를 말하지만, 광범위한 의미에서는 일체존재가 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와 사’를 구분해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광범위한 의미, 또는 좁은 의미 말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인도에서 나온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 광범위하게는 나나 너나 일체현상 모두가 다 석가모니불이란 말입니다.

 

 다시 彼 無量無邊의 淸空心界와 淨滿性海와 漚相衆生을 空·性·相一如의 一合相으로 通觀하면서 三身一佛인달하야 阿(化)彌(報)陀(法)佛을 常念하고 內外生滅상인 無數衆生의 無常諸行을 心隨萬境轉인달하야 彌陀의 一大行相으로 思惟觀察할지니라

 

  다시 피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구상중생漚相衆生을; 다시 되풀이해서 저 무량무변의 끝도 갓도 없는 청공심계와 텅 비어있는 그런 마음세계와 또는 마음세계에 가득 차있는 생명의 광명세계와, 또는 거기서 거품같이 일어나는 모든 중생을, 구자는 ‘거품 구’자입니다. 거품 같은 중생을

 

空 · 性 · 일여一如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하면서; 공·성·상 텅텅 빈 청공심계, 또는 그 자리에 가득 차있는 모든 공덕인 정만성해, 거기서 일어나는 거품 같은 중생의 현상세계 이런 것이 결국은 하나란 말입니다. 셋이 아니라 하나인 일합상으로, 하나로 합해서 통일해서 관찰하면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인달하야 아() 미() 타() 불佛을 상념常念하고; 삼신일불이라, 청정세계의 법신法身과, 또는 거기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功德인 보신報身과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일체현상인 화신化身, 이 세 몸이 결국은 하나인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은 저 극락세계에 계시면서 우리 중생을 제도하시는 그런 부처님이지만, 또 한 가지 가장 근원적인 뜻은 바로 우주가 아마타불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본질도 역시 아미타불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번뇌煩惱에 가리어서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 성품은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인데 우리 중생은 모르는 것이고, 성자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차이뿐인 것입니다. 번뇌가 있으면 못 보는 것이고, 번뇌가 없으면 하나가 되어서 우주와 더불어서 영생합니다.

 

이와 같이 법신과 보신과 화신 그런 세 가지 몸, 부처님의 본래자리, 근본자리에 있는 법신과, 또는 법신에 갖춰있는 모든 공덕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체존재가 결국은 셋이 아닌 하나의 몸인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을 항상 생각하고

 

내외생멸상內外生滅相인 무수중생無數衆生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자기 마음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이나, 자기 눈으로 보는 별이요 산이요 남이요 나요 좋다 궂다 하는 모든 것의 생하고 멸하는 무수중생의, 한 도 끝도 없는 중생의 무상제행을.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인달하야; 그때그때 변동해서 마지않는 심수만경전이라, 마음이라 하는 것이 만 가지 경우에 따라서 변전變轉합니다. 산이나 내[]나 사람이나 모두가 다 마음이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변동도 하고, 또는 그때그때 작용도 하는 활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뿐입니다. 다만 마음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이 어떤 상을 내는 것인가. 마음이 활동해서 이렇게 상을 내면 우리 중생은 마음 자체는 못 보고 상만 보니까 나요 너요 구분합니다.

 

부처님의 그런 상에 대한 비유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횃불을 빙빙 돌리면 불 동그라미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불 동그라미가 사실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돌리면 우리 중생들은 불 동그라미로 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사실 각 원소가 결합되어서 분자 구조가 되고 하나의 세포가 되어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운동하는 그 현상만 보는 것이지 본질은 안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상만 보는 것이고, 도인들은 상도 보지만 상을 떠나서 결국은 본 성품을 봅니다.

 

“상을 내지 마라. 누구한테 베풀어도 상을 내지 마라. ‘나’라는 상을 내지 마라. ‘너’라는 상을 내지 마라.” 이런 말씀이 있지요. 우리 중생들은 상만 보고 본 성품을 못 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성자는 본 성품을 보는 것이고, 우리 중생은 상, 곧 겉만 보는 것입니다.

 

일체존재가 다 마음이라 하는 우주의 실상입니다. 우주의 실존은 마음입니다. 우주 안에는 결국 에너지뿐인 것입니다. 에너지 활동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활동영상만 보는 것이지 에너지 자체는 모릅니다. 마음이, 에너지가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인과의 법칙 따라서 그때그때 운동하고 활동합니다.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관찰思惟觀察할지니라; 마음이 만 가지 경우에 따라서 변하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이 미타입니다. 미타의 일대행상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보리방편문, 이것이 우주의 체계입니다. 우리 마음의 체계인 동시에 또는 불성佛性체계, 우주의 체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을 소화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팔만장경을 거의 다 소화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팔만장경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법문이 천태지의天台智顗선사가 체계를 세운 천태학天台學입니다. 천태학 가운데는 공, 가, 중이라, 인연 따라서 생겨난 법은 무두가 다 텅텅 비어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합해진면 ‘가’가 있다. 그러나 ‘공’도 아니요, 참다운 진리는 중도中道이다. 이와 같이 천태지의 선사가 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런 체계가 불교철학 가운데서 가장 고도한 철학입니다.

보리방편문은 이런 체계를 염불하는 체계와 하나의 체계로 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체계만 두고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실은 불교의 가장 어려운 것을 아는 것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제가 더 부연해서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바로 ‘참다운 염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참다운 선과 염불念佛은 무엇인가?’ 하는 ‘선과 염불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치고 염불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염불에 대한 뜻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염불은 하근중생下根衆生이 한다. 참선參禪은 근기가 높고 수승한 사람들이 하고, 염불은 공부도 않고 미련한 사람들이 한다.’고 염불을 폄하해서 말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서 염불말씀을 제일 많이 하셨습니다. 200부 이상, 책 권수로는 몇 천권 되겠지요. 200부 이상 가운데서 염불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염불이 방편方便 염불과 진실眞實염불로 차이가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이 저 밖에 계신다. 밖에 계셔서 우리가 부처님을 간절히 염불하면 우리한테 오셔서 돕는다.’ 이런 염불은 방편염불입니다. 이런 염불은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꼭 하시고 싶어 한 염불공부의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잘 새기셔야 됩니다. 염불하는 방법에 방편과 진실이 있습니다. 방편염불은 부처님을 자기 밖에다 두고서, ‘나와 부처님은 다른 것인데 내가 부처님한테 간절히 기원 드리면 부처님이 나를 돕는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방편염불인 것입니다.

 

참다운 진실염불은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닙니다. 내 본래면목本來面目, 내 본래 생명자리도 역시 똑같은 법신·보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나와 마음 바탕은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습니다. 강도나 내 마음이나 마음자리는 똑 같습니다. 예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마음자리는 똑같습니다. 다만 겉만 차이가 있습니다. 상만 차이가 있지 본 성품은 똑같습니다. 따라서 일체존재는, 나나 너나 산이나 내[]나 하나의 곤충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성품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어떤 거품이나 어떤 파도나 똑같이 물을 근본으로 했듯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존재나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라 하는 부처님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차이가 어디 있는가 하면 일반 소승들은 ‘아! 모두가 텅텅 비어있다.’ 허무를 바탕으로 합니다. ‘법계연기法界緣起라, 같은 인연법因緣法도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일체만유가 진여불성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어야 참다운 대승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것저것 합해서 내가 생겼다. 인연이 합해서 이것저것 이루어졌다.’ 이런 것은 소승적인 연기법인 것입니다.

 

참다운 대승연기는 ‘법계연기,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진여법성眞如法性이 만유萬有가 되었습니다. 사람도 진여법성이 되고, 달도해도 하나의 곤충도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법성이 됐습니다. 어떠한 것도 에너지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궁극적인 것은 다 에너지입니다. 그와 똑같이 어떠한 것도 궁극적인 본성품은 진여법성입니다. 우리 중생은 진여법성을 못 보는 것이고, 성자는 맑은 눈으로 해서 그 원수 같은 탐욕심, 진심瞋心, 무명심無明心만 걷어 버리면 우리도 훤히 트여 진여법성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 우리 인간이 비로소 참다운 고향에 들어가서 영생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한 말로 말하면 ‘여실지자심如實知自心’이라, 우리 마음을 참답게 알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내가 나를 안다. 내가 나쁘다, 내가 좋다, 나는 제법 양심이 있는데’ 이러지만 우리 중생은 자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째서 모르는 것인가. 우리 중생은 우리 성품을 모릅니다. 알더라도 자기의 겉만 알지 본 성품을 모릅니다. 남의 성품도 모르고 내 성품도 모르는 것이 우리중생입니다. 성자의 맑은 눈만이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된다 하더라도, 어떠한 고도한 현미경을 쓰더라도 우리 인간의 본 성품, 우주의 본 성품, 불성은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질료가 있는, 상대성의 한계에 있는, 공간성이 있는 그것만 과학은 압니다. 우리 범부凡夫라는 것은 인과율因果律에 제한되고 또는 시간, 공간에 제약돼있는 그런 질료質料만 아는 것이지 질료가 아닌 참다운 세계, 참다운 생명은 모릅니다.

 

그 세계는 삼매三昧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져서, 모아진 힘으로 해서 번뇌가 녹아져서 탐욕심이 녹아지고 진심瞋心이 녹아지고, 치심癡心이 녹아져서, 청정무비한 맑은 정신으로만 영원적인 참다운 자기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할 일은 여실지자심이라, 우리 마음의 실상實相을 여실히 아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참다운 불성에서 왔거니, 불성을 모르고서 인간의 행동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역시 진리를 모르고서는 전쟁과 갈등, 분열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진리를 알고서 진리에 따라야만, 우주의 도리에 따라야만 참다운 자유, 참다운 행복, 참다운 평등이 있습니다. 중도실상中道實相, 참된 부처님 도리를 가지고 있어야만이 참다운 사고가 됩니다.

 

남 미워하고 남 좋아하고 우리 중생마음은 지금 번뇌에 갇혀있습니다. 우리 중생마음은 지금 감옥생활입니다. 우리 중생은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 삼독심三毒心의 노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법문을 외울 때에, ‘비록 내 마음은 욕심에 갇혀있고, 또는 진심에 갇혀있다 하더라도 내 본래 마음은 청정하고 광대무변하다.’ 이 순간에 우리 마음을 딱 해방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분명히 허공 같습니다. 광대무변합니다. 내 마음, 네 마음 모두가 허공같이 다 비어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의 소중한 마음을 모르고 죽는 것 같이 원통한 것이 없습니다. 몇 억대, 몇 십 억대, 몇 백 억대의 재산을 쌓았다 하더라도 내 마음을 내가 모르고 죽는다고 생각할 때는 얼마나 한스러운지 모릅니다. 인간의 실상, 인간의 실존을 알려면 우리 마음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잘나나 못나나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같을 새, 조금도 흐림도 때도 없는, 넓고 크고 또는 갓도 없는 그런 허공 같은 마음세계를 부처님 이름으로 하면 이것은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세계, 그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같은 마음세계에 해나 달 보다 더 훨씬 밝은 그런 여러 가지 공덕功德이 꽉 차있습니다. 자비慈悲도 행복도 지혜도 꽉 차있습니다.

 

우리 마음세계는 그냥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도 자비도 지혜도 끝도 갓도 없이 꽉 차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나 각 도인들은 자비나 지혜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능력은 사실은 무한대입니다. 우리는 자기 능력을 절대로 제한하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무제한적인 그런 가능성이 우리 마음에는 꽉 차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말로 하면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광대무변한 자리에 일체공덕과 지혜가 꽉 차있고, 일체존재는 나나 너나 또는 곤충이나 원자나 별이나 모두가 다 그런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하나의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에 비유하면 광대무변한 바다 그 자체는 법신法身이고 바다에 곽 차있는 불 이것은 보신報身이고 그런 바다에서 일어나는 거품이나 파도는 산이나 내[川]나 사람이나 모든 존재는 화신化身입니다. 달에 비유하면 달 자체는 법신인 것이고 달 광명은 보신인 것이고, 또는 달그림자는 화신인 것입니다. 하나의 달이 휘황찬란하게 밝아서 중천에 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시냇물이 백이요 천이요, 두만강 또는 한강 그야말로 금강 영산강 이런 내[川]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내[川]가 많이 있지만, 달이 하나가 떠있으면 내마다 달그림자는 똑같이 비춥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연 따라서 하나의 중생이 이루어지면 그런 중생들은 모두가 다 똑같이 부처님의 광명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의 화신인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중생 스스로가 잘나고 못났다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훤히 빛나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은 못 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광명으로 빛나있고, 사실은 중생 스스로가 바로 광명의 화신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가사, 산소가 수소와 합해진다 하더라도 산소 스스로의 성분이 변동은 안 됩니다. 또는 에너지가 전자나 양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에너지 스스로가 변동이 없습니다. 에너지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어떠한 현상을 나투든지 에너지 스스로는 변동이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불성佛性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이 불성 스스로의 인연 따라서 사람이 되고 또는 하늘의 별이 되고 한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잘나고 못나고 했다 하더라도 불성은 조금도 변동이 없으니까, 불성을 볼 수 있는 부처님이나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모두가 다 훤히 불성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존재는 모두가 다 광명으로 빛나는 보신의 바다에서 내가 사고思考하는, 좋다 궂다 생각하는 그런 생각이라든가 또는 눈으로 보이는 해나 달이나 내나 산이나, 또는 사람이나 곤충이나 모두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님 바다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물거품과 같습니다. 광명의 파도나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다 합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사실은 나도 너도 역시 모두가 다 아미타불입니다. 절에서 아침에 장엄염불莊嚴念佛을 합니다만, 장엄염불 가운데서 아미타불을 찬탄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도마죽위稻麻竹葦 무한극수無限極數라’, 도마죽위라는 것은 삼밭에 삼대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는 대밭에 대가 얼마나 많습니까. 대밭에 대가 많고, 또는 삼밭에 삼대가 많듯이 말입니다. 도마죽위 무한극수, 한도 끝도 없이 많은 수란 말입니다. 일십일만一十一萬 구천오백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말입니다. 동명동호라, 같은 이름, 같은 상호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부처 이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여기 계시는 몇 백 명 불자님들이 모두가 다 아미타불입니다. 에너지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산소가 되나, 사람 몸을 구성하나 에너지란 차원에서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제로를 천만번 곱한다 하더라도 제로는 제로입니다. 에너지가 뭣이 되나, 에너지가 어떻게 운동을 하나, 빨리 진동하나 또는 느리게 진동하나, 에너지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불성佛性이라 하는 참다운 우주의 성품이 사람이 되나 개가 되나 소가 되나 독사가 되나 조금도 불성의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불성을 볼 수 있는 부처님의 청정불안淸淨佛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눈으로 봐서 우주를 보는 그런 견해가 바로 보리방편문 지혜입니다. ‘부처님 눈으로 봐서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 눈으로 본 우주관, 인생관이 바로 여기 있는 보리방편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생하고 멸하는 죽었다 살았다 하는 현상적인 모든 것이 다 불심佛心, 다 마음입니다. 부처란 말이나 마음이란 말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이 남도 미워하고 좁은 것이지만, 이 마음의 근본마음은 부처와 더불어서 같습니다. 물질도 역시 근본은 다 마음입니다. 물질이 따로 없습니다.

 

세상의 비극은 ‘물질이 따로 있다. 또는 다이아몬드가 따로 있다. 뭣이 따로 있다.’고 구분을 하는 것이니까 다이아몬드는 좋고 철은 나쁘고 하겠지요. 그러나 근본은 똑같습니다. 다이아몬드나 철이나 무쇠나 근본은 다 똑같습니다. 다만 그것이 진동정도, 운동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근본을 못 보는 것이니까, 우선 상상만 봐서 다이아몬드는 좋고 철은 나쁘겠지요. 성인은 근본을 보는 것이고 중생은 겉만 봅니다.

 

따라서 근본을 볼 수 있는 안목, 부처님께서 보는 청정한 인생관이 보리방편문입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마음의 본 바닥은 법신法身인 것이고 본 바닥에 들어있는 일체 공덕功德은 보신報身인 것이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은 화신化身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불성이거니, 인이나 연이나 모두가 다 불성입니다. 따라서 불성 가운데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모두가 다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인 것입니다. 미운 사람, 고운사람,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의 줄로 이어져 있습니다. 가령, 누가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나와의 사이도 역시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못 봅니다만 나와 남의 관계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바로 딱 붙어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결국 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서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 진리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 체성體性은 법신이고, 그 속에 들어있는 자비나 지혜나 일체공덕은 보신이고 도 거기서 일어나는 일체현상은 화신입니다. ‘나’라는 것은 화신 가운데 하나 아닙니까.

 

하루에 몇 번이나 이렇게 불교 인생관, 불교 우주관은을 되뇐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관찰하는 것이 ‘내가 부처’임을 느끼면서 하는 바른 염불인 것입니다. 부처를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바로 우주의 실상實相 또는 나의 실상을 관찰하고 음미하면서 하는 염불이 바른 염불인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본질, 우주의 본질을 떠나지 않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현상現象에서 애써서 점수漸修로 닦아나가는 것이 일반 공부인 것이고 참선 공부는 본질을 딱 느끼고서, 본 성품을 딱 느끼고서 그 자리를 안 떠나는 공부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본 체성을 딱 느끼고서, 본 체성을 안 떠나려고 애쓰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이 뭣고?’ 화두話頭라든가 ‘뜰 앞의 잣나무’라든가 그런 화두는 모두가 다 근본자리를 안 떠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조주스님한테 가서 어떤 스님네가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니, ‘뜰 앞의 잣나무니라.’ 했습니다. 애쓰고 부처를 찾고자 해서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뜰 앞의 잣나무’라 했습니다. 조주스님한테 부처를 묻는 그 사람은 부처는 저 밖에 있다고 생각을 하겠지요. 이렇게 부처를 밖에서 구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물었겠지요. 그러나 깨달은 도인인 조주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니라.’ 라고 말합니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뜰 앞의 잣나무’나 ‘컵’이나 모두가 바로 보면 결국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부처의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다 부처입니다. 우리는 煩惱번뇌 때문에 바르게 안 보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 부처로 수용하고 부처가 보는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하는 공부가 참선공부입니다.

 

‘옴마니반메흠’을 하든, 우리가 염주를 헤아리든 그런 모양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나나 너나 천지우주가 다 본래로 부처구나. 천지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참선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역시 지장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밖에서 구하면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서 구하는, 부처와 나의 한계를 가려서 구하는 그것은 방편염불입니다. 참다운 염불이 못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아도 제한된 복 밖에는 못 받습니다.

 

그러나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다. 부처란 것이 만 공덕功德을 갖추고 죽어도 죽지 않고 영생으로 행복하고 영원한 것인데, ‘영원한 생명, 모든 지혜를 갖추고 있는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같이 위대한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가장 좋은 마음은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내가 바로 부처라는 그 마음이 가장 좋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과 나의 구분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마음을 부처한테다 머물게 하고 먼지 하나도 부처 아닌 것이 없다 ‘일진불사一塵不捨’라, 한 먼지도 버릴 수가 없이 다 부처로구나. 이렇게 느낄 때 우리 공부는 방편을 떠난 진실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이와 같이 모두를 다 불성이라 보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며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방편설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보통 ‘부처님한테 애쓰고 구한다.’ ‘부처님한테 우리가 가피加被를 바란다.’ 또는 ‘기도를 모신다.’ 이렇게 하면 마음도 개운하고 의지가 되는 것인데, ‘천지가 부처구나.’ 이러면 ‘우주천지가 허망하구나.’ 이렇게 느끼는 분도 계십니다만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디 따로 계셔서 우리를 감시도 하고, 복도 주고, 벌도 주는 그런 부처님은 그야말로 미개한 종교의 대상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부처님은 바로 우주가 부처님인데, 우주가 하나의 생명인데 그런 생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한히 부사의한 공덕이 있습니다. 그런 부처님 복을 무수한 도인들이 몇 만 년을 세어도 다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런 행복이 바로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그런 무한한 행복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한테 기도해서 행복을 받는다.’ ‘우리한테 복이 온다.’ ‘우리가 병을 낫는다.’는 것은 방편인 것이고, 참다운 부처님의 부사의한 공덕을 생각하면서 복을 빈다고 생각할 때에는 정말로 복도 부사의한 것입니다. ‘나와 부처님이 둘이 아니고 내 마음에 무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고 꼭 믿고 염불念佛할 때는 우리 마음은 비약적으로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가련 생전에 그렁저렁 염불도 하고 보시布施도 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불성佛性을 못 보겠지요. 아무리 시주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으로 해서는 불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껏 공은 되도 말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우리가 지은 공을 총 결산을 합니다. 남한테 많이 베풀고 복을 많이 지은 사람들은 그런 과보가 훨씬 더 좋은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에 정말로 ‘내 본심이 바로 부처구나.’ ‘석가모니와 아미타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니구나.’ 또는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내가 한 발도 안 떠나서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구나.’ 이렇게 꼭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순간 찰나에 우리는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 천도식도 안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후손들이 복을 안 빌어 준다하더라도 죽는 순간에 정말로 ‘내 본마음이 부처다. 내 본마음 가운데는 무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 이것을 분명히 확실히 믿을 때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이 비약이 되고 정화가 되어서 바로 성불할 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불하시고 맨 처음에 다섯 비구한테 법문을 했는데 석가모니 법문이 하도 유창하고 진실하고 위엄에 차 있었기 때문에 다섯 도반道伴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한 마디 말씀, 법문을 듣고서 모두가 바로 도인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믿으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번뇌 때문에 바로 못 믿습니다. ‘정말 그럴 것인가?’ 하고 바로 못 믿으면 바로 못 믿는 그 마음 때문에 중생마음은 바로 부처가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믿는 정도가 그때그때자기 업장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마땅히 환희심을 내고서 믿을 때는 우리 마음은 비약적으로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비록 느끼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본래 마음은 바로 불성인 것이고, 또는 불성자리를 바로 말씀한 법문이 이와 같이 보리방편문 법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씀한 것이고, 또 조금 더 구체화시켜서 분석하면 마음의 본체는 법신法身이고 법신자리에 들어있는 일체공덕功德은 보신報身인 것이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체존재는 화신化身입니다. 이것을 다 합한 것이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나도 아미타불 너도 아미타불, 모두가 다 바로 아미타불’인 것이고, 참다운 염불은 이와 같이 우주가 바로 부처임을 느끼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지장보살도 관세음보살도 모두가 이 가운데 다 들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안 떠나는 염불은 바로 참선과 염불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진실한 공덕인 동시에 바로 성불의 첩경인 것입니다. 과학과의 차이, 종교간의 의견 차이, 그런 것 저런 것이 모두가 다 이런 방편문적인, ‘법法·報·삼신三身’ 가장 구경적인 그런 법신, 거기에 들어있는 일체만유의 공덕인 보신, 거기서 우러나오는 일체 현상들인 화신 이런 진리로 비추어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이런 것이 미처 못 들어있으면 종교의 정도가 아직은 미숙한 것입니다.

 

마땅히 이런 체계를 마음에 두고서 하루하루, 될수록 많이 읽으시면 처음에는 모르신다고 하더라도 여태까지 제가 장황히 횡설수설한 그런 말씀을 참고로 하시면서 되풀이해서 읽으시면 ‘과연 우리 마음은 부처구나. 또는 마음의 근본은 법신이구나. 또는 보신이구나. 화신이구나.’ 이런 것을 조금은 납득을 하실 것입니다. 천번 만번 몇 십 만번 외우시면 우리 마음이 성불은 미처 못 한다 하더라도 상사각相似覺이라, ‘정말로 내 마음이 부처구나.’ 이렇게 느낄 때가 꼭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하시다가 임종 때는 정말로 비약적으로 돈오頓悟해서 그냥 부처자리를 깨달으실 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들한테나, 손주한테나, 누구한테나 내 마음자리를 내가 아는 우리 마음을 철저히 아는 동시에 가장 깊이 아는 이 법문을 가장 큰 선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가 쉽게 말씀을 드리고자 했던 것인데 또 역시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만, 역시 어려운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히 스스로 새겨서 깊은 공부를 해주셔서 무상無上의 행복, 행복은 진리를 떠나서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실업인이나 정치인이나 어떤 누구든지 간에 진리를 외면해서는 참다운 정치, 참다운 실업, 참다운 평등, 참다운 진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어디에 있든지 간에 진리를 항시 염두에 두고서 본체를 안 여의는, 본 성품을 안 여의는 그런 행동을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말씀을 마칩니다.

 

                                                                                              1990년 4월21일 광주 금륜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