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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7. 보리를 깨닫는 방편문

보리방편문 2-3

허공虛空할새;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이 어떤 제한도 없고 어떤 장애도 없듯이, 우리 마음은 사실은 장애가 없는 것인데 중생이 ‘나’라는 장애, ‘너’라는 장애 그런 상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은 허공과 등할새’ 라는 실존을 그대로 말한 법문으로 해서 탁 털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편운척영片雲隻影이 무한 광대무변廣大無邊의 허공적虛空的 심계心界를 관하면서; 조각구름이라든가 조그마한 그림자도 없는 넓고 크고 또는 갓이 없는 허공 같은 마음세계를,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이와 같이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허공 같은 세계입니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인달하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염하고; 허공이 텅 비어있는 끝도 갓도 없는 그런 공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청정법신입니다. 오염도 없고 청정한 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훤히 비어있는 생명이란 뜻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훤히 비어있는 광대무변한 하나의 생명체, 이것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허공적虛空的 심계心界에 초일월超日月의 금색광명金色光明을 대한; 이와 같이 끝도 갓도 없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마음 세계가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나 해 보다도 훨씬 찬란스럽고 초월적인 금색광명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보는 그런 광명이 아니라 질료가 순수한 적광寂光 또는 정광淨光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구無垢의 정수淨水가 충만充滿한 해상적海象的 성해性海를 관하면서; 그런 광명을 띠고 있는 티끌이 없는,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청정한 생명수가 충만한 바다와 같은, 그야말로 끝도 갓도 없는 하나의 광명의 바다를 우리가 관찰합니다.

 

원만보신圓滿報身인달하야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염하고; 끝도 갓도 없는 광명의 바다도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시 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이 붙습니다. 모든 가능성, 모든 생명을 생성하고 또는 그런 가능성이 원만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원만보신 노사나불입니다. ‘인달하여’는 접속사 고어에 불과합니다.

 

로 염기염멸念起念滅의 무색중생無色衆生과; 자기 마음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우리 관념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하는 추상적인 관념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무색중생인 것입니다.

 

로 일월성수日月星宿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무정중생無情衆生과; 밖으로, 우리 시각으로 보는 ‘해요, 달이요, 별이요, 산이요, 내[川]요 하는 것과 또는 대지요’ 기타 모든 만상의 무정중생과, 즉 아직까지 의식이 미처 발달되지 못한 그런 중생들과

 

인축人畜 내지乃至 준동함령蠢動含靈의 유정중생有情衆生과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그런 의식 활동이 있는, 물론 그런 것들은 의식이 아직은 완전히 발달은 못 되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그것은 5식五識은 있고 5관五官은 있습니다. 사람이나 축생이나 꿈틀거리는 여러 가지의 식이 있는 유정중생과의 일체중생을 우리 관념인 무색중생, 일반 동물이 아닌 무정중생, 동물인 유정중생 이렇게 합해서 일체중생 그럽니다.

 

성해무풍性海無風 금파자용金波自涌인 해중구海中漚로 관하면서; 일체중생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면, 그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라는 참 생명의 바다 즉 말하자면 초일월의 금색광명이 충만해 있는 그런 생명의 바다 위에서 바람도 없지만 ‘스스로 자’자, ‘뛸 용’자 금색파도가 스스로 뜁니다. 별, 산, 사람, 동물 모두가 다 무엇인가 하면 천지우주의 금색광명이 가득 찬 가운데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나오는데 생명이 마치 금색바다에서 뛰노는 물거품 같습니다. 금파자용은 일체 존재를 모두가 다 끝도 갓도 없는 금색광명의 바다 가운데 있는 거품으로 관찰합니다. 사실은 모두가 거품입니다.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 나도 한도 끝도 없는 바다에 있는 거품이고 산이요 내[川]요 모두가 하나의 점도 못 되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달하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염하고; 사람, 동물 무생물, 두두물물 산이요 내요 들이요 별이요 하도 많으니까 천백억화신이라 합니다.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원래 부처님한테서 왔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한테서 온 것입니다. 부처님한테서 와서 부처님 성품이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은 못 봅니다. 바로 보면 산이 되고 사람이 되고 해도 변질이 없는 것인데 천백억화신인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이라는 것을 좁게 생각할 때는 인도에서 나오신 역사적인 인물인 석가모니불인 것이고, 광범위하게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석가모니불입니다.

 

다시 피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구상중생漚相衆生을; 다시 저 무량무변의 청공심계는 비로자나불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만성해는 천지우주의 모든 역량을 갖춘 금색의 바다입니다. 또는 구상중생, 즉 말하자면 거품 같이 일어나는 일체중생을 말합니다.

 

일여一如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하면서; 청공심계의 공, 정만성해의 성, 구상중생의 상 이것이 결국은 셋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로 합해서 종합적으로 관찰하면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인달하야 아()ㆍ미() ㆍ()불을 상념常念하고; 청정법신淸淨法身, 원만보신圓滿報身,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의 삼신三身이 결국은 하나의 부처란 말입니다. 하나의 부처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아는 화신化身을 의미하고, 미는 보신報身을 의미하고, 타는 법신法身을 의미합니다. 아미타불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생각하고 우주가 우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외생멸상內外生滅相인 무수중생無數衆生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자기 마음으로 생각하는 자기 관념이라든가, 또는 밖에 보이는 여러 현상들이라든가, 또는 내외의 생하고 멸하는, 자기도 죽고 없어지고, 또는 일체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다 생하고 멸滅하고 생하고 멸하고 생사를 거듭하듯이 고요하게 머무르지 않는 행이란 말입니다. 무상無常이라, 우리는 무상이란 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무상이란 말은 어떤 것이나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나 어느 순간도 머물지 않습니다. 내 몸 세포나 내 관념이나, 부처라는 관념 외에는 모두가 다 움직이고 경망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 같습니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인달하야; 무상제행을, 덧이 없는 허망한 행위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모두가 다 심수만경전이라, ‘마음 심’자, ‘따를 수’자, 심수心隨, 마음이 결국 만경萬境에 따라서 구른단 말입니다. 사람이요, 별이요, 산이요, 내[]요 모두가 다 결국은 생명체가 인과율因果律 따라서 만 가지 경계로 구른단 말입니다.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관찰思惟觀察할지니라; 미타의 미는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미인 것이고, 타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타입니다. 미타의 즉 말하자면 법신과 보신이지요. 현상적으로 제 아무리 잘나든 못나든 천지가 다 파괴되어 텅 비어버리든 결국은 모두가 다 미타의 일대행위란 말입니다. 일대행상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그러니까 우주의 모든 역사를 하나의 지혜로 딱 묶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읽어보시고 더욱 더 깊이 생각해보시면 우리 마음이 하나로 통일이 되어 갈 것입니다. 마음이 산란스러운 것은 이렇게 저렇게 자꾸만 분별시비하니까, 즉 말하자면 우주의 도리가 하나의 진리로 통일이 안 될 때는 산란스러운 것입니다만, 우리 중생은 미처 못보고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그런 성자는 분명히 보듯이 하나의 것으로 딱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부처님으로 통일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사실은 우주는 하나님뿐인 것이고 우주는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못 보고, 성자는 항시 하나님하고 같이 살고 있으니까, 바이블 보면 예수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있는 하나님이 말한다.’ 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엇을 판단할 때 ‘부처님차원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 같은 분은 불교철학과 굉장히 가까운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말 가운데서 ‘영원의 상 위에서, 영원의 이미지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우리 마음은 순간순간 영원에 참여한다,’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봅니다. 우리가 산기슭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시야가 좁지요. 산 중턱에 올라가면 시야가 넓습니다.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사방을 다 봅니다. 그와 같이 영원의 차원, 부처님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 봅니다. 파스칼의 철학서를 보면 마치 불경佛經을 보는 기분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이렇게 생각하면 너, 나의 구분이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이 공해가 심할 때 함부로 휴지를 버릴 수 없는 것이고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산도 살아 있고 물도 살아있고 나무도 살아있고 다 살아 있습니다. 나무가 있으면 결국은 목신이 있고, 또 집이 있으면 집을 지키는 택신이 있고, 산이 있으면 산신이 있고, 물이 있으면 용왕이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겉만 보고 속의 생명은 못 봅니다. 희랍 때라든가, 로마 때라든가 또는 동양의 고대라든가 바라문교나 ‘일체만유一切萬有에 다 신이 들어있다. 일체만유가 다 생명체다.’ 이런 교훈들이 약간 표현만 다른 것이지 사실은 모두 하나를 말씀했습니다.

 

이 시간에 다른 것은 다 못 외우셔도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는 말씀은 꼭 외워두십시오. 타성일편이라, ‘때릴 타’자, ‘이룰 성’자, ‘한 일’자, ‘조각 편’자, 우주를 하나의 체계로 딱 묶어버립니다. 하나로 묶으면 굉장히 속편한 것입니다.

 

화두話頭란 것도 ‘무’자가 있고 ‘이뭣고?’가 있고 많이 있습니다만, 결국은 모두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로 묶으면 마음이 텅 비어서 시원스럽습니다. 하나의 체계로 묶은 다음에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공부해야합니다.

 

보리방편문을 잘 외우십시오. 한 번 외우면 외우신 이상으로 ‘아! 정말로 내 마음이 부처구나. 내 마음 속에는 이와 같이 참 무량한 공덕功德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마음이, 자기라는 옹색하고 폐쇄된 마음이 해방됩니다. 불교란 것은 해탈解脫이라, 마음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물질에 얽매이고, 자리에 얽매이고, 관념에 얽매이고 그러한 것을 우리가 다 파헤치고서 풀어버리는 것이 해탈이 아니겠습니까.

 

‘천지우주는 오직 마음뿐이다. 부처님뿐이다. 하나의 진리로 다 되어있다.’ 이렇게 관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제 말씀이라면 여러분들이 잘 안 들으시겠지만 무수한 도인들이 증명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진실불허眞實不許라, 성자의 말씀에는 거짓말이 있을 리가 만무하고, 또 무수한 성자들이 증명했기 때문에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그만치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뿐이다.’ 이 마음을 갖는 순간 사실은 우리는 정화됩니다. 지금 내가 쓰는 내 마음이 내 근본생명이 아니라 ‘내 생명은 한도 끝도 없다. 내 생명은 모든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한번 믿는 그 마음이 우리를 굉장히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치로 알았다 하더라도 이치로만 알면 실감이 덜 나니까, 실존적으로 우리가 우주의 생명하고 정말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체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처가 쉽게 되면 좋지만, 금생今生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한 것이 우리 잠재의식에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읽고 읽다 보면 자기의 기성관념이 하나씩 깨져서 완전히 법문내용과 하나가 되어버리면 깨달아서 확 트일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공부해나가면 ‘인후개통咽喉開通 획감로미獲甘露味’라, 목구멍이 툭 트입니다. 처음에 공부할 때는 답답하고 옹색합니다. 공부하다보면 그야말로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탁 트여서 어디 막힌 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상쾌한 맛이, 물론 도통까지는 아직 천리만리이지만 우선은 자기 몸이나 마음이 툭 트여서, 어디 막힘도 없고 얽힘도 없는 그런 관념만 가져도 그것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런 관념만 가져도 가슴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혼침昏沈도 없고 더 나아가면 밤을 새워도 눈이 피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렇게 쓰면 쓸수록 더욱 더 무시무시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쓰면 차근차근 무디어져서 물질에 딱 얽매였습니다. 물질에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몸뚱이가 더 무겁습니다. 그러나 닦아서 가벼워지면 차근차근 가벼워 옵니다. 나중에는 이 몸뚱이가 어디 있는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공중에 붕 뜬 모양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정말로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우리 몸이 하늘로 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나 위대한 도인들이 비행자재飛行自在라, 그런 말을 우리는 신화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원자력 가지고서 별별 재주를 다 부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 원자력보다 더 고성능 무한 성능인 것이 불성인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비약적으로는 잘 안 되는 일입니다. 금생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한 것이 다닥다닥 끼여 있으니까 자꾸만 그런 기성관념 때문에 막혀놔서 하나하나 가닥을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푸는 것이 수행의 단계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은 먼 나그네 길입니다. 성불成佛이라 하는 그런 멀고 먼 고향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빠지고 엎어지고 그때그때 일어나고 하겠습니다만, 결국은 성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성불로 가려고 할 때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자량위資糧位’라, 부처님 법문을 딱 믿고서 우리가 그렇게 되고자 애 씁니다. ‘나’라는 것도 허망하고 ‘너’라는 것도 허망하고 물질도 허망하고, 이와 같이 허망한 것을 자꾸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명상도 하고 염불도 합니다.

 

즉 말하자면 자량資糧은 거기에 따르는 재료를 우리가 준비합니다. 참선도 해보고, 염불도 해보고, 경도 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행도 해보고, 하고 싶을 때는 단식도 해보고 말입니다. 이렇게 성불을 하고자 여러 가지 자기한테 맞는 행법行法을 공부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는 우리 범부보다는 앞서 욕심도 누르려고 해보고 그러는데 그때를 ‘삼현위三賢位’라고 합니다. 성자라는 것은 자기가 억제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하는 행동이 모두가 법도에 딱 맞는 것이 성자인 것이고, 현자는 법도에 맞도록 애쓰고 지킵니다. 욕심도 누를 수가 있고, 또는 진심瞋心도 누를 수가 있습니다. 범부는 그것을 못 누르겠지요. 현자라는 것은 성인군자 같은 성자는 미처 못 되어도 죄악도 안 범하고 애쓰고 어렵게 행합니다.

 

그렇게 가다가 ‘가행위加行位’라, 법문도 확실히 알고 앞서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천지우주는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본래 청정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 하나의 불성佛性이다.’ 이렇게 확신이 서고 결단심을 내서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집에서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오로지 공부를 해야겠구나.’ 결심하고 하는 공부가 ‘가행위加行位’ 즉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이따금씩 불심을 생각해도 간 곳이 없이 가버리니까 하다말다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일상생활인 것이고 그래서는 본래 부처인 불심佛心과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우리가 그놈을 붙들어 잡기 위해서는 오로지 해야 하기 때문에 사흘이고 며칠이고 그와 같이 공부합니다. 보통 3일, 1주일, 21일, 49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1년 동안에 3개월씩 그렇게 하지요. 더하면 3년도 우리가 안 나갑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아무리 미련한 사람도 부처님을 찾다보면 부처님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시원해옵니다. 몸도 시원하고 말입니다. 마치 꼭 전류에 ‘찌르르’ 감전된 것 같이 시원해옵니다. 이렇게 시원해 오면 사실은 몸의 피로가 순식간에 싹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그래도 더 합니다. 따라서 ‘따스울 난’자, 난법상煖法相, 이런 경계는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하면 잘 못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승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업장이 많다든가, 또는 환경이 나쁘면 몇 년 동안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이런 시원한 경계를 못 본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전류에 감전된 것 같이 ‘찌르르’ 전신이 시원해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쉬지 않고서 더욱 정진해 가면 ‘이마 정’자, 정법頂法이라, 이런데 오면 욕심은 차근차근 줄고 욕계欲界로 해서는 끄트머리까지 올라갑니다. 욕심이 많아서 끄트머리가 아니라 욕심을 떠나면 끄트머리까지 갑니다. 누가 물질을 써도 갖고 싶지도 않고, 음식도 먹으나마나 한 때가 옵니다. 그때는 몸이 시원하고, 마음이 시원하기 때문에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시원해옴과 동시에 어렴풋이 광명光明이 비추어옵니다. 아주 맑은 달이 줄어지고 커지고 이런 때가 오면 천지우주의 기운이 자기 몸을 향해서 오는 기분입니다. 그러면 자기 이상의 힘도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돼가다가 또 안 쉬고 더 나가면 인법忍法이라, ‘참을 인’자, 인법까지 되어 놓으면 별로 큰 후퇴가 없습니다. 애쓰고 하던 참선이나 기도를 놔버리면 다시 번잡해지고 후퇴하겠지만 그것이 습관성이 되어서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월心月이라, ‘마음 심’자, ‘달 월’자, 그럽니다. 그때는 광명기운이 더 커지고 줄어들고 하면서 우주에 꽉 차버리는 그런 기분이 생깁니다.

 

이와 같이 되어 가다가 그야말로 안 쉬고 더 나아가면 심월광명이 차근차근 금색광명을 띕니다. 이런 단계를 가리켜서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고 합니다. 성자는 다 못 됐다 하더라도 인간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법입니다. 세제일법이라, ‘인간 세’자, ‘차례 제’자, ‘한 일’자, ‘법 법’자 말입니다. 인간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단계에 있습니다. 맹자나 그런 분들은 이런 단계에 거의 올랐겠지요.

 

이런 단계를 넘어서 우주가 확 열려서 천지우주의 광명이 자기한테 감득感得이 되고 이른바 광탄만상光呑萬象이라, 천지우주가 광명 속으로 다 들어가 버립니다. 그렇게 돼 버려야 참다운 견성오도가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각 성자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 인간이 여기까지 가야 비로소 ‘내 고향에 왔구나.’ 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됩니다. 그전에는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여기에서 계속 공부를 해서 나아간다 생각할 때는 계율戒律도 바르고 음식도 함부로 안 먹고 그렇게 나아간다고 할 때에는 순간 찰나에 천지우주가 광명으로 변하면서 통달위通達位라, 이 단계가 견성오도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되었다 하더라도 공부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지만 우리 번뇌의 습기가, 종자種子가 남아있습니다. 금생今生에 잘못 배우고, 잘못 듣고, 잘못 느낀 것은 이제 다 사라져버렸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인간생명이 과거 무수생 동안에 낳고 죽고, 낳고 죽고를 되풀이 하면서 살생도하고, 또는 남을 배신도 한 것이 우리 잠재의식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석가모니 같은 분도 과거 전생에는 배신도 하고 살생도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지은 번뇌는 견성오도와 더불어서 다 사라진다 하더라도 과거전생에 지은 번뇌는 종자가 남아 그놈을 차근차근 빼야 합니다. 그놈을 못 빼면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 천안통天眼通도 하고 천지우주를 다 알 수가 있고, 그야말로 하늘을 날 수도 있는 재주가 다 들어있지만 그런 종자가 남아 있으면 그런 재주를 못 부립니다. 불성에 갖춰 있는 공덕을 우리가 못 부립니다.

 

불경 보면 우리에게 욕심의 뿌리만 다 뽑혀도 그때는 몸이 하늘을 날 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신화와 같이 알지 마십시오. 우리가 공부해보면 차근차근 가벼워옵니다. 이것만 본다 하더라도 정말 견성오도해서 참말로 욕심뿌리가 다 뽑아져버리면 우리 몸이란 것이 원래 무게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중력이 있는 것이지 사실은 인력이니 중력이니 모두가 다 중생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영원적인 순수에너지 차원에서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번뇌의 종자를 뽑아버리면 이것이 이른바 ‘수습위修習位’라, 천지우주가 오직 불성뿐이구나. 불성뿐이라는 그 자리에 딱 안주해서 불성을 봤으니까 말입니다. 견성오도 했으면 통달해서 그때는 불성을 확실히 봅니다. 광탄만상光呑萬象이라, 우주가 광명 속에 다 들어갑니다. 다만 번뇌의 뿌리 때문에 결국은 불성의 공덕을 우리가 제대로 발휘를 못합니다.

 

그래서 불성에 입각해서 차근차근 닦아나가면 그때는 불성이 보이니까 불성만 보고 있으면 되겠지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무엇을 안 한다 하더라도 불성이 보이니까 그 자리를 보고 있으면 공부가 나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있으면 있은 만큼, 흐린 탁수를 가만히 두면 흐린 앙금이 가라앉고서 바닥이 보이듯이 견성오도見性悟道한 다음에는 가만있으면 정에만 들어가면 차근차근 녹아집니다.

 

녹아가서 좀 올라가면 2지二地요 3지요 4지요....... 더 올라가서 10지에 올라가면 불지佛地요. 올라가서 번뇌가 근본적으로 다 없어지면 석가모니 같은 성불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원효스님 같은 분들은 견성오도한 뒤에 8지까지 올라갔다 하는 것이고, 서산스님 같은 분들은 4지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일본의 공해 같은 분은 3지에 올라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보림수행保任修行이라, ‘지킬 보’자, ‘맡을 임’자, 즉 말하자면 견성오도한 그 자리를 소중히 지켜야합니다. 불성을 봤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면 결국은 많이 못 나갑니다.

 

그러니까 교만심이라는 것이 굉장히 장애인 것입니다. 조금 알면 그것을 좀 풀이해 먹으려고 하고, 또 견성오도 해서 확 트여서 환희심이 충만하면 우쭐해 가지고서 결국은 공부도 못 나갑니다. 오로지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해야 만이 참다운 깨달음입니다. 아직은 광명을 봤다 하더라도 광명기운을 못 씁니다. 순수한 에너지에 갖추어져 있는 무한한 힘을 못 씁니다. 자꾸 사람 만나고 얘기하면 힘이 빠져버리고 시간도 없어 더 못 나갑니다. 그러니까 공부 깊이 들어간 사람들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했습니다. 중봉스님은 배에 가 피하고 산에 가 피하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심정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견성오도한 것을 잘 지키고 계행戒行도 잘 지키고 이렇게 잘 가꾸어야지 도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먹고 함부로 해 버리면 삼매三昧에 못 들어가서 번뇌의 종자를 못 녹입니다. 그리고 자비심 많은 분들은 우선 중생을 교화 하고 싶어서 못 올라갑니다. 우선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좀 매섭고 지혜가 수승한 사람들은 ‘중생은 겉으로 봐서 중생인 것이지 바로 보면 부처 아닌가. 내가 먼저 올라가야 쓰겠구나.’ 이렇게 올라가고선 올라간 경계에서는 중생을 교화하고 싶은 생각을 갖겠지요.

 

‘구경위究竟位’라, 금생今生에 지은 번뇌, 또는 과거 전생으로부터 우리한테 묻어온 잠재의식 속에 있는 번뇌를 다 뿌리 뽑아서 결국은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과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정각성불正覺成佛’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격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를 보나, 『마태복음서』를 보나, 공자의 『논어』를 보나, 노자의 『도덕경』을 보나, 어떤 경전을 보나 이와 같이 구경지까지 완성을 시키는 방법체계를 말한 법문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범부가 인격의 가장 최고봉까지 가는 순위를 다 말씀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금생 내내 못 가고 만다 하더라도 우리 목표만은 뚜렷이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표만 세우면 예수가 골고다언덕 바위위에서 혼자 있다 하더라도 역시 하나님을 믿어 희망이 있듯이 인간의 재앙의 구렁에 든다 하더라도 역시 불성은 죽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때 묻지 않아 우리가 불성을 생각할 때에는 위안이 되고 행복의 미소를 띠울 수가 있습니다.

 

참선하는 과정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만 석가모니께서 당신이 직접 보리수 밑에서 몸소 행하시고 열반에 드실 때 우리한테 보여주시고 근본경전인 『아함경』에서 몇 십번 아홉 가지 차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맨 처음에 사선근四善根, 즉 말하자면 가슴이 시원해지고, 심월心月이 나오고, 심월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찬란스러운 심일心日이 나오고, 이와 같이 사선근을 거쳐서 삼매에 들어 견성오도見性悟道하는데, 선정禪定차원으로 보면 초선정初禪定에 들어갑니다. 여기에 들어가야 견성오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복됩니다만 아무튼 초선정이라, 이때는 거친 분별은 다 끊어집니다. 세밀한 분별만 남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가 이선정二禪定이라, 여기 올라가면 분별은 다 끊어집니다.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관계없이 오직 마음 하나의 자리만 지킵니다. 우리 중생은 몸도 다르고 몸 따라서 마음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사실은 이렇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근차근 같아집니다. 결국, 올라가면 우리 중생은 몸이 아니라 모두가 광명신光明身입니다. 우리가 광명光明이기 때문에 몸뚱이 때문에 서로 피차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도 먹고 싶은 생각만 있으면 포만 되어 많이 먹으려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올라가면 광명의 몸이기 때문에 하등의 갈등이 없습니다.

 

그렇게 돼가다가 삼선정三禪定이라, 올라가면 오로지 한마음이지만 마음도 광명도 하나입니다. 밑에는 같은 광명신이지만 광도光度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선정에 올라가면 차이가 없습니다. 순수광명인 동시에 마음도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부처의 지위는 아닙니다.

 

그 다음은 사선정四禪定이라, 이때는 마음이 조금도 동요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도 동요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우주가 텅 비어서 광명도 하나의 질료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순수광명인 것입니다. 마음도 우주에 충만해 있고 무소유처無所有處라, 이것이고 저것이고 원융무애한지라 구분 할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 생각이 있을 것도 없고 생각이 없을 것도 없습니다. 하도 미세해서, 우리 중생이 느끼는 번뇌는 조금도 없고 아주 맑은 생각들이 조금 있습니다.

 

이렇게 돼가다가 이제 멸진정滅盡定이라, ‘멸할 멸’자, ‘다할 진’자, 그야말로 번뇌의 찌꺼기를 다 녹여버립니다. 여기까지는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있습니다만, 올라갈수록 차근차근 근본번뇌가 녹아져서, 저기 가서는 번뇌가 다 녹아져서 완전히 우리 범부라 하는 즉 말하자면 ‘이생위離生位’라, 너와 나의 차이, 또 사물과 나의 차이, 일체존재가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완전히 통일이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정각불성正覺佛性이 되는 것입니다.

 

보조국사 어록에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말이 나옵니다. 문득 깨닫는 것이 돈오頓悟지요. 문득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말입니다. 이것은 앞서도 얘기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 갈래, 만 갈래 구분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하나의 진리로 딱 통일이 되어버립니다. 이른바 타성일편打成一片, 천지가 하나의 진리로 타성일편 되어버리는 것을 가리켜서 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증명은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돈오를 높은 차원으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도 논쟁이 심하나 우선은 역사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보조국사는 돈오를 불경의 체와 용, 성과 상 모두를 둘로 보지 않았습니다.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으로 천지우주 모두를 하나의 진리로, 하나의 체계로 딱 묶어버립니다.

 

점수漸修는 ‘점점 점’자, ‘닦을 수’자, 하나의 진리가 됐다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지 사실 체험을 다 못했으니까 체험하기 위해서 점차로 닦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가 돈오를 점수할 것인가.’ 그런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도 참선參禪하는 법이나 공부하는 선방을 보면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화두話頭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주어서 그 문제를 애쓰고 풉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의심을 풀어감에 따라 마음을 모읍니다. 의심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은 ‘하나란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화두를 잘못 의심하면 하나의 것을 놓쳐버리고 상대적인 문제만을 의심해 공부가 안 됩니다. 괜히 끙끙 앓아서 상기만 됩니다. 그래서 화두를 들 때는 반드시 하나의 진리 ‧ 본분사本分事 ‧ 본래면목 그 자리를 안 놓쳐야만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하나의 진리‧ 본분사에 마음을 집중시켜서 의심을 하다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녹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참구參究하는 선법禪法은 우리 조계종 같은 임제종이지요.

 

원불교라든가 일본 조동종은 묵조선黙照禪이라,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의심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천지우주가 부처인줄 알았으면 그 자리를 지키고 공부하면 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뭣 때문에 의심을 할 것인가 해서 가만히 있으면 탁수가 앙금이 가라앉으면 바닥이 보이듯이, 부처가 될 것인데 의심하면 괜히 마음만 더 소란스럽지 않겠는가.’ 해서 잠자코 무념무상으로 비춰봅니다. ‘본래 부처인지라, 가만히 있으면 부처한테 가겠지.’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중국의 송나라 때 화두선話頭禪으로 화두話頭를 의심하는 선법도 있었고, 그와 동시에 거기에 대립해서 묵조默照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자기 문중에서 하는 공부는 좋아 보이고, 다른 문중에서 하는 것은 배격하기도 하고, 또 행법行法이란 것도 자기가 무슨 행법을 취하면 모두가 다 성불의 법인지라 거기서도 재미가 붙습니다. 가령 화두도 하다보면 결국은 마음이 모아지고 개운해지고 공부가 되어 가면 재미가 붙겠지요. 재미가 붙으면 ‘자기가 하는 공부만 재미가 붙고 딴 방법은 별것도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폄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나 부처님께서나 도인들이 말씀한 법문들은 모두가 다 성불하는 법이기 때문에 애쓰고 하면 공부는 다 되는 것입니다. 주문을 하나 염불을 하나 공부는 다 되는 것인데 하나만 많이 해 놓으면 그것만 옳다고 고집을 하다 한 종파가 생기는 것입니다.

 

일본은 묵조선이라, 잠자코 무념무상하는 종파로 조동종인데 굉장히 큽니다. 한 종파지만 불교대학이 몇 개나 있습니다.

 

또 한 파는 ‘기왕이면 화두를 들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겠구나.’ 해서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부처님의 명호로 화두를 합니다. 이것을 염불선念佛禪이라 합니다.

 

한국도 서산대사, 사명대사, 진묵대사, 태고대사, 나옹대사, 연기대사 그런 분들은 염불을 화두보다 더 많이 말씀했습니다. 이른바 화두도 말씀은 했으나 그런 정평 있는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지우주가 다 불성佛性이거니, 또는 부처님법이 모두 다 성불成佛의 법이거니 어떻게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천지우주로 봐서는 하나하나의 법도 따지고 보면 그야말로 버릴 것도 하나도 없고 취할 것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다 불성이니까 말입니다. 안도 없고 밖도 없습니다.

 

우리마음을 본래의 자리, 본체의 자리에다가 딱 머물게 하면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외워두십시오. ‘참선은 저 고도한 사람들이 하고, 염불은 저만치 밑의 사람들이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이라 한다 하더라도 괜히 상대적인 문제, 그런 문제를 따지고 있으면 선이 못됩니다. 본체를 떠나서 무슨 선이 되겠습니까.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이라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이나 여러 경에도 많이 나오듯이 제대로 갖춰있는 하나의 본체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우리 마음에서 안 여읠 때는 모두가 다 선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간에 ‘무’자 화두話頭를 드나, ‘이뭣고?’ 화두를 드나, 그런 본래면목자리를 떠나버리면 선이 아닙니다. 이것은 육조스님께서 내 놓으신 『육조단경六祖檀經』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자고로 도인들은 절대로 한 법에 치우칠 수 가 없습니다. 꼭 한 편만 보는 독선적인 안목 때문에 자기가 하는 방법만 옳다고 하는 것이지 전부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치우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선 서산대사도 『선가귀감이라』, 참선에 대한 귀감을 내 놓고 또 『도가귀감道家龜鑑』이라, 도교에 대한 귀감, 『유가귀감儒家龜鑑』이라, 유교에 대한 귀감을 내놨습니다. 어떤 도인들이나 그 시대의 종교를 다 아우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나중에 종교사를 한 번 보십시오. 모두가 그 당시의 철학과 종교를 다 합해서 하나의 체계로 묶으려고 노력했습니다.

 

8.15 해방되고서도 우리 조계종이 보다 더 문호를 넓혔으면 이렇게 한 20종의 종파나 될 리가 없습니다. 꼭 화두가 아니면 선이 아니라고 옹색하게 하니까 결국은 그 범주에 못 들어가면 다른 종파를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이라도 자기 종파와 안 맞으면 배격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따라서 불법佛法도 다 열어야 합니다. 기독교 인구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10억 인구 아닙니까. 이슬람도 10억입니다. 10억 인구가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진리가 아니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비판할 때도 바이블도 한번 연구해봐야 합니다. 저는 지난겨울에도 바이블을 다시 한 번 봤습니다. 그전에도 제가 여러 번 봤지만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나 『누가복음서』나 중요한 대목을 보면 불교와 차이가 없습니다.

 

상징적인 비유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남을 이해할 때에 그 말과 상징과 비유를 떠나서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부처님 같이 완전무결한 체계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겨우 2년 반 동안 밖에 교화를 못했습니다. 나이도 30대 아닙니까. 우리 석가모니께서는 공부도 많이 하시고, 또 왕자 출신이고 49년 설법이고 원숙할 대로 원숙해서 체계가 잡혀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비교가 안 되나 근본정신, 인류를 사해동포를 보는 정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원수같이 보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 정신 또는 중생을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는 그런 정신은 모두가 같습니다.

 

누구도 남한테 돌을 던질 자격은 없습니다. 예수님당시에 풍속으로 간통을 하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간통한 음부를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하반신을 묻어 놓고서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래 놓고 예수님한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니 그때 예수님이 “그대들 가운데 마음으로 간음하지 않은 사람은 돌로 때려라.” 하셨습니다. 우리 범부라는 것은 마음으로 간음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간통한 여인을 돌로 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 둘씩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 한분 남았습니다. “나도 그대를 심판하지 않겠노라.”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자가 아닌 한에는 어떤 누구도 남을 심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정죄定罪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광주사태를 다 밝혀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중생은 절대로 밝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는 절대로 밝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중생이 봐서 때 묻은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지 절대로 바르게 밝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그 죄란 무엇인가? 우리 중생이 같이 지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공업共業입니다. 강도가 있어도, 강도 아닌 사람도 역시 공범인 것입니다. 저 미국에 하나의 꽃이 피어도 한국에 있는 모두가 다 연관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교의 인과因果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돌멩이 하나도 우리가 어깨를 한번 드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다 관계가 있습니다. 우주란 것은 하나의 관계로 얽혀있습니다. 이것을 중중무진이라 합니다. 미운 놈이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보니까 미운 것입니다.

 

부처님 진리라는 것은 고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선 내가 남한테 따귀 한 대 맞고 내 아들이 어디 가서 죽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부처님 차원에서 죽지도 않고, 또는 나쁘지도 않고, 맞아도 사실은 맞지도 않은 것이고, 내 몸뚱이가 바로 보면 없거니 누가 때리면 어디 가서 무엇이 남습니까. 그런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고 그런 자리에서 보고 우리가 용서해야 인간이 비로소 화합합니다.

 

우리 생명의 길은, 우리가 가야할 길은 명명백백히 무수한 성자들이 다 증명한 길입니다. 이렇게 이 길을 지향해서 일로매진 하시기를 바랍니다. 재가 불자님이라 하더라도 밥을 먹으나 무엇을 하시든지 간에 사업을 하신다 하더라도 역시 자기가 직원을 부처같이 봐야합니다.

 

6.25사변 때 사람들이 마구 죽이고 죽고 하는 그 무시무시한 때에 저는 애쓰고 부처같이 보려고 하니까 이상스럽게 위험한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난리를 넘기는 가장 슬기로운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을 부처같이 보는 것입니다. 자비와 덕망이 난리를 이기는 가장 큰 보배입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스승,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역시 부처님 도리대로 사십시오. 병자를 본다 하더라도 역시 상대편을 부처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더러운 것도 없고, 보다 더 정성스럽게 봐지는 것이고 부처같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같이 보는 것이 가장 강력한 파장이 되는 것입니다.

 

‘오! 부처님’ 하는 그 말이 우리 몸이나 마음을 굉장히 정화시킵니다. 따라서 상대를 부처같이 보는 그 마음이 상대편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우리 불교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일거수일투족이 모두가 다 부처님을 지향하여 우리 시대의 지상명령인 성불을 향해서 일로매진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1989년 4월 30일 태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