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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5. 중각보왕삼매염불직지

第二十 시염불멸죄의문(示念佛滅罪義門)

第二十 시염불멸죄의문(示念佛滅罪義門)

염불(念佛)이 업죄(業罪)를 소멸(消滅)한다는 의미(意味)를 보인 문(門)


어떤 객(客)이 질문(質問)하였다

염불삼매직지(念佛三昧直指)는 극락(極樂) 의보(依報) 정보(正報)에서 시작(始作)하여 왕생(往生)을 구(求)하는 행원(行願)의 문(門)에서 끝났읍니다. 모든 것을 구비(具備)하지 아니함이 없음이나 다만 경(經)에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한소리만 칭명(稱名)하여도 팔십억겁(八十億劫)의 무거운 죄업(罪業)을 소멸(消滅)한다는 구절(句節)은 모(某)가 의혹(疑惑)함이  없게 하지를 못 합니다 과연(果然)그렇한 이치(理致)가 가능(可能)한 것입니까


요즈음 세상(世上) 사람들로서 귀(貴)하거나 천(賤)하거나를 막론(莫論)하고 주목(注目)하여 살펴보니 생명(生命)이 다하게 됨에 그 명호(名號)를 칭양(稱揚)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없었읍니다 그러하다면  모두가 이같은 무거운 죄(罪)가 소멸(消滅)되고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을 성취(成就)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世上)사람들은 여전(如前)히 업식(業識)이 망망(茫茫)하여 죽음이 덮쳐오면 마치 오히려 뜨거운 끊는 물에 떨어진 물방게 처럼 아래 위를 오르고 내리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하여 당황(唐惶)하고 방황(彷徨)하는지요


죄(罪)를 소멸(消滅)한다는 의미(意味)가 어디에 있는지요 부처님의 말씀이 절대로 허망(虛妄)하지 않고 진실(眞實)하다면 원(願)하건데 잘 해석(解釋)하여 이해(理解)가 되도록 설명(說明)하여 주십시오

 

여기에 대답(對答)함이라 지극(至極)하다 질문(質問)함이여 세간(世間)에서 이치(理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대의 질문(質問)을 인(因)하여 이 삼매(三昧)에서 퇴전(退轉)하지 않고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곧 바로 왕생(往生)하게 되리라 요즈음 세상(世上)에서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 말은 방편(方便)으로 정진(精進)하여 수행(修行)하기를 권(勸)한 말이라 생각한다 이는 부처님의 진실(眞實)한 말씀으로 반듯이 나를 속여 기만(欺瞞)하지 않음을 어떻게 깨달아 알겠는가


어찌하여 그대는 저 무량겁(無量劫)전(前)에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와 더불어 범부(凡夫)가 되었다는 의미(意味)를 듣지도 못 하였는가 아님인가 우리부처님 세존(世尊)께서 도(道)를 성취(成就)하신 이래(以來)로 그대와 같은 처소(處所)에서 티끌과 같은 겁수(劫數)를 경유(經遊)하여 지나셨는데 이 티끌과 같은 겁(劫)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서 소상(昭詳)히 밝혀져 있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러한 처소(處所)와 겁(劫)의 범부지(凡夫地)에서 육도(六道)에 표령(飄零)하며 지어온 모든 결습(結習)의 업장(業障)을 헤아려 알지 못하고 있다


시간적(時間的)으로 부처님과 동일(同一)하게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래고 먼 것은 상이(相異)함이 없는 것이다 이같은 티끌 같은 겁(劫)을 어떻게 헤아려 칭량(稱量) 하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일생(一生)동안 행(行)한 여러가지 나머지 착함은 거론(擧論)하지 말고 다만 부처님 명호(名號)만을 칭량(稱量)하기를 수명(壽命)이다하도록 소리소리를 내어 단절(斷絶)하지 않았는데 그가 칭양(稱揚)한 명호(名號)를 따라 낱낱이 팔십억겁(八十億劫)의 생사중죄(生死重罪)를 모두 소멸(消滅)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일생(一生)을 다하고 타생(他生)에 미치기까지 부처님 명호(名號)를 칭양(稱揚)하여 죄(罪)의 겁수(劫數)를 소멸(消滅)한 것이 많다고는 함이나 가령(假令) 이같이 극대(極大)하고 구원(久遠)한 티끌 같은 겁수(劫數)에 비교(比較)한다면 마치 손가락에 묻은 흙을 대(大)토지(土地)에 비교(比較)하는 것과 같다


어찌 가이 부처님 명호(名號)를 칭양(稱揚)함에 능(能)이 다겁(多劫)의 죄(罪)가 멸(滅)한다는 까닭으로 다시는  나머지 겁(劫)에 있어 업(業)으로 하여 장애(障礙)됨이 없이 나는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한다 말하는가 그리하여 아직 소멸(消滅)하지 못한 죄(罪)의 겁수(劫數)가 장구(長久)함에도 시작도 없고 즈음<사이>도 없이 부처님과 더불어 동일(同一)한 수명(壽命)으로서 실(實)로 이와같은 팔십억등(八十億等)의 겁수(劫數)을 헤아려 계산(計算)함에 저 칭량(稱量)하는 밖으로 초월(超越)하여 지난다는 것을 깨달아 알지 못함이라


또 햇불이 뜨겁다 하여 이것으로써 대지(大地)에 쌓인 눈을 녹이고자 하는 것과 같음이니 어떻게 용이(容易)하게 녹여서 풀리게 하겠는가 그래서 염불(念佛)하여 죄(罪)를 소멸(消滅)하였으나 왕생(往生)을 성취(成就)하지 못한 자(者)도 이에 그 의미(意味)가 이와 같은 것이다 하물며 사람들은 장구(長久)한 긴 겁(劫)으로 업(業)을 짓는 마음은 견고(堅固)하고 잠깐 염불(念佛)하는 마음은 나약(懦弱)하여 물러나기는 쉽지만 진수(進修)하기는 매우 어려움이 되는 것임에 있어서 이겠는가

 

또 더구나 부처님과 동일(同一)하게 범부(凡夫)였던 이전(以前)의 겁수(劫數)는 배나 많았음에 있어서 이겠는가 또한 번뇌(煩惱)는 시작(始作)이 없었으나 발심(發心)은 요즈음에야 비로소 시작(始作)했거늘 죄(罪)를 어떻게 쉽게 소멸(消滅)하겠는가 지금 하루에서 칠일(七日)에 이르도록 일심(一心)으로 혼란(混亂)하지 않으면 바로 왕생(往生)을 하며 임종(臨終)시(時)에 일심(一心)으로 혼란(混亂)하지 아니하고 부처님을 한번만이라도 칭양(稱揚)하면 그 즉시(卽時)에 팔십억겁(八十億劫) 생사(生死)의 무거운 죄업(罪業)을 소멸(消滅)하며 내지는 극(極)히 악역(惡逆)한 사람이 임종(臨終)할 때 지옥(地獄)의불 모양(模樣)이 나타난다 해도 십념(十念)만 칭양(稱揚)하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한다 말하였다


이는 대체(大體)로 우리가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칭양(稱揚)하여 죄(罪)를 소멸(消滅)한 위신력(威神力)의 한순간(瞬間)공덕(功德)에 의지(依支)하여 부처님이 신속(迅速)히 구제(救濟)하시는 대원력(大願力)에 의지(依支)한 것이다 비유(譬喩)하면 장사(壯士)가 전쟁(戰爭)을 하는 것과 같다 포위망(包圍網)에 떨어져 위급(危急)할 즈음한 용감(勇敢)한 사나이를 얻어 그와 강궁(强弓) 예리(銳利)한 칼 훌륭한 말 좋은 채찍으로 바로 그 뜻을 맹렬(猛烈)하게 발(發)하였다


말위에서 몸을 솟구치며 위무(威武)를 씩씩하게 분발(奮發)하여 힘차게 휘두르고 당기며 포위망(包圍網)을 뚫고나왔다 전쟁(戰爭)에 승리(勝利)하여 도적(盜賊)을 항복(降伏)받아 은혜(恩惠)를 베풀고 되돌아서는 그 임금을 받들고 풍성(豊盛)한 즐거움을 영원(永遠)히 누렸다 그와같이 저 부처님이 접인(接引)하여 극락국(極樂國)에 왕생(往生)하는 의미(意味)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부르는 한소리가 팔십억겁(八十億劫)생사(生死)의 무거운 죄(罪)를 소멸(消滅)한다 하신 것이요


지금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오늘은 세 번 다음날은 네 번하다가 머뭇거리기도 하고 혹(或)은 목전(目前)의 조그만한 성색경계(聲色境界)를 보면 바로 이끌려가 완전(完全)히 마음으로 붙잡는 것 없이 애초에 염불(念佛)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한번 염불(念佛)했다 해서 다겁(多劫)의 죄(罪)를 진실(眞實)하게 소멸(消滅)하여 바로 장애(障礙)받지 않고 즉시(卽時)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고자 한다면 되겠는가


그러나 이같은 염불(念佛)하는 사람의 소리 소리가 이같은 겁수(劫數)의 죄(罪)를 소멸(消滅)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초심(初心)을 느슨하게 했기 때문에 그 과보(果報)로 왕생(往生)하는 것 또한 느슨하여 타생(他生)에 왕생(往生)할 인연(因緣)을 짓는 것에 그칠뿐이다 혹(或)은 염불(念佛)하기를 쉬지 않아 이슬을 모아 흐르는 물을 이루는 공부(工夫)가 있다 해도 앞에서 말한 것과 어떻게 우열(優劣)및 속질(速疾)을 비교(比較)할 수 있겠는가


가령(假令) 어떤 사람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정진(精進)한다면 왕생(往生)은 손바닥 뒤집듯 손쉬울 것이며 화살로 과녁을 취(取)하는 것처럼 결단(決斷)코 적중(的中)하지 않음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알지라 산란(散亂)한 마음으로 염불(念佛)하는 사람과 지성(至誠)으로 하기는 해도 망상(妄想)을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은 혹(或) 이와같은 겁외(劫外)의 죄(罪)에 장애(障礙)를 받아 과보(果報)가 타생(他生)에 있을 뿐 그 공부(工夫)에 바로 감응(感應)하지는 않는 것이다


가령(假令) 소리를 가다듬고 뜻을 다하여 염불(念佛)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겁(劫)의 죄(罪)를 소멸(消滅)하고나서 용맹(勇猛)하고 빠른 힘을 따라 남은 겁(劫)의 죄(罪)에도 장애(障礙)되지 않고 십념(十念)으로 정토(淨土)왕생(往生)을 얻는다 이 의미(意味)는 요연(瞭然)하게 보임으로 결정(決定)코 의심(疑心)할 것이 없다 어떻게 유유(悠悠)하게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여전(如前)히 업식(業識)이 망망(茫茫)하여 죽을 때 마치 끓는 물에 떨어진 방게 처럼 하는 것과 같겠는가


그리하여 부처님이 허망(虛妄)한 말을 하셨다 의심(疑心)하며 다만 이는 진수(進修)하기를 권(勸)하였을 뿐이라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알라 부처님의 힘은 광대(廣大)하여 일체(一切)의 시간(時間)과 처소(處所)를 두루 덮으신것이다 우리의 작은 선행(善行)이라도 능(能)히 다 거두어 부처님의 대원(大願)에 들어가 일미(一味)가 되게 하시며 모든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여 안락(安樂)한 땅에 안치(安置)하고 일체(一切)의 겁죄(劫罪)를 다 소멸(消滅)하게 하신다 왜 팔십억겁(八十億劫)의 죄(罪)를 소멸(消滅)하는데 그칠뿐이겠는가

 

이와같이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칭양(稱揚)한 공덕(功德)은 실(實)로 헤아리기 어렵다 대승(大乘)의 원돈(圓頓)이 횡적(橫的)으로 초월(超越)하여 바로 절단(截斷)하는 지취(旨趣)를 여기에서 보게 된다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에서 말하기를 비유(譬喩)하면 열 아름드리 가되는 새끼줄은 천(千)명의 사나이도 끊어 제지(制止)하지 못하지만 어린 동자(童子)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면 순식간(瞬息間)에 두 쪽으로 절단(切斷)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하품(下品)의 무리가 왕생(往生)하는 인(因)을 말한 것과 같은데 이 비유(譬喩)는 겨우 생각만 하여도 죄(罪)를 소멸(消滅)하고 즉시(卽時)에 왕생(往生)한다 한 것이다 또 부처님 세상(世上)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 중회(衆會)에 출가(出家)하고자하였다 성(聖)스러운 대중(大衆)들에게 두루 참례(參禮)하였으나 모두들 도안(道眼)으로 관찰(觀察)하고는 이 사람에게는 영원(永遠)히 선(善)한 종자(種子)가 없다 말하며 득도(得道)시키려하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 부처님계시는 처소(處所)에 이르렀더니 부처님께서 그를 득도(得道)시키자 비구(比丘)가 부처님께 질문(質問)하였다


이 사람이 비록 선근(善根)이 없긴 하지만 다만 무량겁(無量劫)이전(以前)의일은 이승(二乘)의 도안(道眼)으로 알바가 아닐 뿐이다 이 사람이 땔나무를 하러 산(山)으로 갔다가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위로 올라가 호액(虎厄)을 피(避)하다가 홀연(忽然)히 실성(失性)하여 나무불(佛)하고 부처님을 칭(稱)하였다 이렇게 한번 명호(名號)를 칭(稱)했기 때문에 현겁(現劫)중에서 나의 득도(得道)를 만난 것이다 뒤에는 반듯이 도(道)와 회합(會合)하리라 한 것과도 같다 이는 일생(一生)에 염불(念佛)하면 바로 과보(果報)를 성취(成就)하지 못하고 후세(後世)에 왕생(往生)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비례(比例)한다면 한번 부처님 명호(名號)를 칭(稱)하여 어느 부처님이라고 집착(執着)하지 않아도 사람의 죄(罪)를 소멸(消滅)하고 도(道)를 얻게 한다는 것을 알리라  더구나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원력(願力)은 시방(十方)을 초과(超過)함이겠는가 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에게 전일(專一)하게 주의(注意)를 기우려서 명호(名號)를 부른 공덕(功德)으로 소멸(消滅)한 죄장(罪障)은 생각하거나 의론(議論)할 수 있겠는가


경전(經典)에서 말하기를 한번부처님께 귀의(歸依)합니다 부름에도<칭(稱)함에도> 모두가 부처님의 도(道)를 성취(成就)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이 말을 증명(證明)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알아야함이라 가령(假令)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칭(稱)하며 생각 생각에 쉬지 않는다면 그 공덕(功德)은 실로 계산(計算)하여 헤아리기 조차 어려운 것이다 비록 장애(障礙)가 지중(至重)한 사람이 산란(散亂)한마음으로 퇴전(退轉)했다 해도 왕생(往生)의 증험(證驗)은 반듯이 장래(將來)에 있는 것이다


또 입으로 부처님을 칭(稱)한 것은 오직 그 공(功)을 의론(議論)했을 뿐 이고

마음속으로 염불(念佛)해야만 이에 그 덕(德)이 나타난다 공(功)을 의론(議論)한다면 나의 나태(懶怠)하지 않음에 있고 나타난 덕(德)은 곧 부처님이 현전(現前)하는 것을 본다 동일(同一)하지 않은 두 의미(意味)에서 우열(優劣)을 알아보리라 입으로 부르기만 해도 그러함인데 더구나 마음으로 사념(思念)함이겠는가 이 때문에 나는 지금 그대의 질문(質問)으로 해서 경전(經典)을 의지(依支)하여 사건(事件)을 기술(記述)한 것이다 모든 동행(同行)으로서 뜻을 결단(決斷)한 사람들까지 이 의미(意味)를 말과 같이 수행(修行)하고 의심(疑心)스러운 사려(思慮)함을 삼가지 말기를 바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