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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6. 안거법어

태안사 동안거 해제법어

   태안사 동안거 해제법어

 

 

 

오늘은 정월 보름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평소에도 무엇인가 남한테 좋은 선물을 받기를 바랍니다. 특히 정월 보름 때는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남한테 누구나 주기를 좋아하고 또는 받기를 좋아하는 것인데, 그런 가운데도 가장 좋은 것을 주고받기 좋아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또는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것을 과거의 위대한 스님들께서는 명주明珠라, ‘밝을 명’자, ‘구슬 주’자 말입니다. 밝은 구슬이란 말입니다. 밝은 구슬이 가장 귀중한 보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배는 그냥 물질적인 보배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보배는 조그마한 보배가 아니라 천지우주를 다 삼킨 보배란 말입니다. 저는 귀금속을 잘 모릅니다만, 가령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이아몬드 조그만 손톱만큼 되는 것도 굉장히 값이 비쌀 것인데 천지우주를 다 삼키는 우주 같은 그런 밝은 구슬 말입니다. 명주는 다이아몬드 보다 더 순수한 구슬을 말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 큰 구슬이 가장 귀중한 보배란 말입니다. 사실 이와 같이 너무 커버리면 우리가 받기도 곤란스럽겠습다만 아무튼 이러한 천지우주를 삼키고 모든 것이 거기에 다 담아있는 그런 보배를 선물로 하는 것이 참다운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물은 비록 우리가 상징적으로 천지우주를 담는다고 하지만 사실 뜻은 그보다 더 훌륭하고 가장 높고 귀중한 보배가 바로 우리가 짐작해서 아는 바와 같이 참다운 도리, 참다운 진리 아닙니까. 참다운 진리를 베푸는 것과 같이 가장 소중한 보배는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가장 참다운 진리인 것인가. 물론 각기 자기가 신봉하는대로 그런 보배를 말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진리가 가장 소중한 보배라고 말하겠지요. 우리는 불자이니까 부처님 도리가 가장 귀중한 보배라고 우선은 가정을 합시다. 가정한 뒤에 차근차근 같이 풀어가 봅시다. 사실은 부처님 법은 난해하고 복잡한데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장 가깝고 가장 친근한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궁극적인 가르침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기 개인의 불행을 한탄도 하고 또는 사회의 혼란상도 한탄을 합니다. 우리는 원인을 모르고서 결과만 가지고 따진단 말입니다.

 

가령 요새 신문을 보니까 농민들이 서울에 올라와서 내몰리다시피 했습니다만 그런 것도 결과만 봐서는 폭행을 했으니까 농민들이 나쁘겠지요. 그러나 그 원인을 더 캐서 보면 굉장히 복잡한 것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정부 당국에서 농경農經도 미흡했을 것이고 과격한 사람들은 선동도 했을 것이고 말입니다. 농민은 결국은 조금 참을 것인데 너무 지나치게 했고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다 곁들어 있단 말입니다.

 

개란 놈은 미련한 놈 아닙니까. 사자 같이 영리한 놈은 흙덩이를 던지건 돌을 던지면 사자란 놈은 영리해서 돌덩이는 어디로 가든가 말든가 돌을 던진 사람을 쫓아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개란 놈은 미련해서 돌덩이나 뭘 던지면, 그 던진 사람은 그만 두고서 돌덩이나 흙덩이만 쫓아간단 말입니다. 그런 것은 사태의 결과만 보고서 원인을 모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의 진리는 모든 것의 결과라든가 피상적인 것을 보지 않고서, 물론 그것도 참고는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 얽혀있는 가지가지의 인과연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부처님의 참다운 진리, 우주를 감싸고 있는 진리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거기에 인과 연이, 인연법因緣法이 다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사태나 인연을 거기에 포함하지 않으면 참다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자기 딸이나 아들이 입시공부해서 실패를 했다 하더라도 이것도 잘못 생각하면 실패한 아들한테나 딸한테만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도 가지가지의 인과 연이 거기에 다 깃들어 있습니다. 잘못 지도하고 교육제도 문제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문제를 보다 광범위하게 생각할 때는 우선 사태 하나가 우리 중생이 생각하는 몇 가지 범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의 모든 것이 다 걸려있습니다. 하나의 매화꽃이 핀다 하더라도 매화나무 자체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태양에만 있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밑에 거름에만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이것저것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힘 또는 천지우주의 분위기 말입니다. 어떠한 것도 하나의 사태에 관련이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불교용어로 하면 중중무진重重無盡이란 말입니다. 하나 가운데 만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고 또한 동시에 만 가지에 하나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진리란 말입니다. 이것을 다 안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가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서 단순하게 결정을 내리고 독단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선공부를 하기도 하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웁니다만 우리 공부도 ‘하나만 무엇이 옳다’ 이렇게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가지가지의 인과 연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진리를 제도 하실 때에는 바라문교도가 오면 “바라문교를 믿지 말아라.”는 말 한마디 없단 말입니다. 바라문도 역시 옳은 것을 추구하니까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결국은 부처님 법문으로 들어오게 만든단 말입니다.

 

이런 인연관계, 인연 이것이 말은 쉽습니다만 그와 같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어느 한 가지도 사람이 죽는 것이나 광주사태 같은 커다란 사태도 역시 하나만이 원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중생은 모르니까 한 단체만 책망하고 추궁한단 말입니다. 책임을 그러나 부처님 법으로 본다고 할 때는 모두가 다 곁들여 있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중생들이 얼마나 부족합니까.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4년간이나 두고 싸웠습니다. 4년간이나 말입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나 소련이나 모두가 다 학자도 많이 있고 종교인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도 종교인의 통계를 보면 한국전체 인구보다도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물론 각 종단마다 좀 부풀려서 자기 종단을 내세우기 위해 했으니까 실제로야 맞지가 않겠습니다만, 그와 같이 한국 전체 인구보다 종교인의 수가 더 많단 말입니다. 종교를 신봉하는 인구가 이렇게 많은데도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모두가 인과因果를 모른단 말입니다. 불교를 믿으면서 인과를 모르면 불교를 믿지 않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내용은 결국은 인연법因緣法인데, 이른바 연기법緣起法이란 말입니다. 그와 같이 모두가 인연법이라 생각한다 할 때는 우리는 함부로 말도 못하고 행동도 못한단 말입니다.

 

자기란 대체로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자기 실존, 자기 존재를 밝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참다운 존재를 밝히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철학자 모두가 다 자기존재, 실존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두고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만 모두가 다 완전무결한 해결은 없습니다. 완전무결한 해결은 역시 부처님 가르침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이런 것도 오늘 이 짧은 시간에 다 변증을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인연법이라 하는 연기법에 벌써 다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생겨났기 때문에, 사실은 고유한 존재가 없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과거 또는 금생에 나올 때에 부모인연 또는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 인연이 모두 곁들여서 나 같은 하나의 존재가 나온단 말입니다. 인연생이라, 네가 없이 내가 나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 미국에 있는 하나의 나무가 없이 내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세계의 어느 것이나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누가 미우면 그 사람 때려 죽여서 흔적도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떠한 존재나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취불사不取不捨라, 취할 것도 없고 또는 버릴 것도 없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바로 보고 바로 느껴서 바로 못 보는 사람들을 바로 보게 인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나왔기 때문에 그때는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몸은 무엇인가. 불교를 배워서 아시는 바와 같이 지地 ‧ 水 ‧火‧ 사대四大란 말입니다. 하나의 질료기운이 지란 말입니다. 또는 습은 윤기가 있는 ‘물 수’자란 말입니다. 또는 온도가 있는 따스함이 있는 기운이 화란 말입니다. 또는 운동, 동력이 있는 풍 이와 같은 원소기운들이 모였단 말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나온 4쿼크론을 좀 봤습니다. 3쿼크로도말합니다만 그런 것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런 아주 미세한 양자학적인 것들은 우리 불교 법문하고도 상당히 상통해 있단 말입니다. 넬리라는 사람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를 물리학에다 도입을 시켜서 말했단 말입니다. 그 정도로 우주의 근본구조, 일체존재의 근본구조는 인간의 지혜로 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른바 불확정성 원리 아닙니까. 우리가 확정적으로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과학도 깊이 들어가면 결국은 내내야 신앙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말이 빗나갔습니다만 가장 소중한 내 몸도 역시 사실은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무수한 그런 기운들이 합해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합해져서 그대로 항시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흘러가고 흘러가서 변해서 마지않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잡다한 것이 합해서 과정에 불과한 것이 내 몸인데 우리 중생 모든 죄악은 모두가 다 ‘나’라는 몸 때문에 생깁니다. ‘나’라는 몸이 중요하니까, 내 아내가 중요하고 자기 애인이 중요하고 자기 남편이 중요하고 자기 자식이 중요하고 하겠지요. ‘나’라는 것이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사실 자기 권속도 허망한 것이고 말입니다. 자기 권속과 자기가 허망하니 자기 물질, 자기 소유가 그때는 허망하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인연만 가지면 다 해결됩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결국은 공이란 말입니다. 일정한 존재가 없단 말입니다.

 

『금강경金剛經』이나,『반야심경般若心經』의 대의大義가 무엇인가. 모두가 제법공諸法空도리입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지만 바탕을 보면 결국은 텅 비어있습니다. 도인은 바탕을 보는 것이고 우리 중생은 겉만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남과 똑같이 상식적으로 겉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라, 우리가 고기를 구할 때는 바다나 물에 가야 할 것인데 나무에서 구합니다. 나무에서 천 년 만년을 구해도 고기가 안 나옵니다. 모래를 삶아도 밥이 안 됩니다.

 

우리 중생이 인연법, 참다운 도리를 무시하고서 행복을 구하고 안정을 구하고 평화를 구하는 것은 그와 똑같습니다.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드는 것이나 또는 나무에 가서 고기를 구하는 것이나 똑같이 절대로 행복도 안 오고 절대로 평화도 안 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가 혼란스러운데 우리 젊은 학생들한테 좋은 대학 들어갔으니 공부나 할 것이지 괜히 이런다고 말합니다. 물론 괘씸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것도 역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지가지의 인과 연이 합해있단 말입니다. 부모님이 교육도 완벽하지 못했을 것이고 말입니다. 가르치는 스승도 역시 완전한 교육을 시키지 못했을 것이고 말입니다. 사회 분위기도 마찬가지고 정부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가지가지의 인과 연이 합해서 우리 학생들이 그와 같이 망동도 하고 과격한 행동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우리가 헤치고 나가려면 싫으나 좋으나 간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보배인 부처님 가르침, 인과의 도리, 인연의 도리를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공부를 하루할 때와 이틀 할 때와 한 달 할 때와 일 년 할 때가 다릅니다. 공부를 해 가다보면 자기 업장業障이 녹아짐에 따라서, 업장이 녹아지면 지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것도 더 깊어진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지가지의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불교도 근본불교, 원시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밀교 이와 같이 모두 다 들어와 있단 말입니다. 불교만 믿는 분들도 ‘어떻게 믿을 것인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회 역시 자본주의 하나만 있으면 좋은데 사회주의가 있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은 거기에 굉장히 많이 휩쓸립니다. 어째서 휩쓸리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라는 것이 굉장히 모순이 많단 말입니다. 부족하고 모순이 많은 사람들이 구성한 사회인데 모순이 없겠습니까. 옛날 요순시대나 또는 공자시대도 사회라는 것은 모순덩어리입니다. 세종대왕 같은 성군 때도 역시 모순덩어리고 말입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뿐이겠지요. 소크라테스가 나와서 정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몇 천만 인구가 다 중생인데 중생이 모여 산다는 것은 완전무결한 사회가 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자유경쟁 사회이기 때문에 조금만 잘나고 꾀가 많은 사람들은 올라간단 말입니다. 물론 거기에 자기 복도 있었겠지요. 복도 좀 있고 좀 잘나고 말입니다. 꾀도 많고 그러면 올라간단 말입니다. 꾀가 적고 너무나 바른 사람들은 올라갈래야 또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특히 자본주의 사회는 굉장히 모순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아시는 바와 같이 부자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단 말입니다. 이러한 모순구조를 자본주의 사회의 학문체계 가지고서는 제대로 모른단 말입니다. 제대로 모르는 것을 그래도 마르크스가 완전무결하게는 해놓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구조를 상당히 질서정연하게 파헤치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젊은 학생들이 사회모순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마르크스주의를 보면 상당히 잘 돼있거든요.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이나 유물사관唯物史觀이나 상당히 효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고 오류가 많습니다만 보다 더 완전무결한 것이 없을 때는 추종하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데서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혼란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범부 중생이 모여 사는 사회이니까 가정도 불편스러운 것인데 하물며 몇 천만이 사는 사회는 항시 불평이 있는 것입니다. 강도가 있고 사기꾼도 있고 또는 비리 공무원도 있고 어떻게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서 레닌이나 스탈린이 일으킨 사회는 어떤가. 그것도 역시 사람인지라 제 아무리 제도를 잘 갖추어 놓았다 하더라도 역시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든 사회발전은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모순 따라서 사회가 변동이 온다.’ ‘사회 안정을 추구하려면 물질만 공평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질만 공평히 해서 공평한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재산의 공유를 한다고 해도 역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레닌도 결국은 할 수 없이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조금 도입시켰단 말입니다. 흐루시초프를 보십시오. 흐루시초프는 자본주의적인 것을 더 많이 가미했단 말입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극단적인 것은 배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만으로 해서 사회를 움직이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인간사회는 물질이 주인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역시 존재의 주인은 분명히 우리 인간의 정신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미숙한 때는 성자나 도인 같으면 밥을 굶으나 안 굶으나 나쁜 마음을 품을 수가 없지만 일반 대중들은 배고프고 헐벗고 가난하면 벌써 나쁜 마음을 품기가 쉽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마땅히 평등사회 분배균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하면 결국은 여러 가지 사회적 폐해를 면치를 못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 인간 정신이 소중한 점을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누구나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 같은 공평무사하고 또는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의 가르침, 어디에도 안 치우침과 동시에 근원적인 진리를 말하는 가르침 말입니다. 노동자나 학생이나 자본가나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자기 정화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정화가 안 되면 평화와 안정된 사회는 바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참다운 우리마음의 안정이라든가 우리 마음의 참 행복을 즉 말하자면 자기 주인공을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몸뚱이는 지地 ‧ 水 ‧火‧ 사대四大로 구성되고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도 역시 감각으로는 한 가지 ‘받을 수’자, ‘감수甘受하는 수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과 우리가 의지하는 행과 말입니다. 분별시비하는 우리 식과, 이와 같은 것이 모이고 결합해서 우리마음이란 말입니다. 제 아무리 자기 마음을 내가 아는 것 같지만 금생에 자기만이 옳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은 내내야 과거생의 자기 속에다가 금생에 나와서 배우고 듣고 한 것이 모인 것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아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은 하나의 제한된 식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제한적인, 이른바 도인 같은 무가정無假定의 원리를 모를 바에는 항시 겸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도그마를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부인 한에는 결국은 누구나가 다 정도의 차이뿐인 것이지, 도그마 즉 독단을 피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스님네도 공부를 많이 했다고 그래도 역시 정말로 도인이 되어서 일체종지一體宗旨를 다 아는 것 같으면 모르거니와 보통은 하나에 치우쳐있어요. ‘나만이 옳다, 내 수행만 옳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는 수도인도 그러려니 하물며 사회인들은 제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역시 아버지가 말한 것이나 어머니가 말한 것이나 다 옳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피차가 다 겸허하면 자연히 절제가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겸허하지 않고서 ‘나만이 옳다.’ 이런데서 독단이 나오고 폭력이 나오고 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마음도 역시 그런 요소가 합해져서 사실은 이것도 역시 고유한 존재가 아닌 것이고 따라서 자기 몸도 마음도 결국은 다 공입니다. 그러나 다 공이지만 또 역시 인연이 닿으면, 인연이 합해지면 역시 무엇인가 나온단 말입니다.

 

제법의 실상을 볼 수 있는 도인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즉공卽空이라,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 보면 결국은 공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라 하는 것은 바탕으로 보면 공인 것이고 인연이 합해지면 그때는 존재가 있으니까 가라, 현상現象인 것이고, 공과 현상이라, 공과 현상은 둘이 아닙니다.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을 지금 현대말로 하면 에너지가 즉 물질이요, 물질이 곧 에너지입니다. 에너지는 형태가 없지요. ‘에너지가 즉 물질이요, 물질이 곧 에너지요.’라는 그 말이 약간 뉘앙스가 차이는 있다고 본다 하더라도 근본은 같습니다. 불교의 색즉공이나 공즉색이나, 에너지가 즉 물질이요, 물질이 즉 에너지란 말이나 똑같습니다. 사실은 이와 같이 결국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어느 중간쯤을 따서 어중간하게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색 가운데 공이 있고 공 가운데 색이 있단 말입니다. 전체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 가운데 전체가 있단 말입니다. 제 말씀이 사변적思辨的이어서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되실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어려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것을 알아야 자기도 바로 살고 자기 아들이나 딸도 바로 가르치고 우리 이웃도 바로 인도한단 말입니다.

 

저는 저번에 어느 신문에서 안 호상 박사가 인터뷰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분은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분 아닙니까. 그 분은 철학박사이고 지금 나이가 90경 될 겁니다. 그 분이 어느 종교인하고 인터뷰할 때 말입니다. 당신은 단군교를 믿고 당신 아내는 불교를 믿고 밀입니다. 당신 딸은 카톨릭교를 믿고 당신 아들은 개신교를 믿는다고 그랬어요. 그이 말씀으로 ‘종교의 뿌리는 하나다.’라고 알겠습니다만 뿌리가 하나라고 안다고 한다 할지라도 역시 당신이 불교의 무가정의 도리, 그런 훌륭한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당신 아내나 딸이나 아들이나 딴 종교로 가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치 불교를 잘 모르신단 말입니다. 철학박사고 90경된 노인도 그러려니, 하물며 우리 보통 분들은 정말로 바른 도를 알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바른 도를 모르면 결국은 선생님을 해도 바른 선생님도 못되는 것이고 바른 아버지도 못되고 바른 어머니도 못됩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의 인연도리에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바탕에서 보면 텅텅 비어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중생의 눈으로 본다고 할 때는 이와 같이 현상계現象界가 있단 말입니다. 선이요 악이요 모두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요 너요, 내 동생이 더 중요하고 딸이 더 중요하고 지금 증명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공인줄을 알고 지내면 훨씬 더 마음이 편안합니다. 우리가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사실은 몸만 바꾸는 것이지 죽음은 없습니다. 물질적인 경계는 죽음이 있다 하더라도 에너지나 참다운 공경계空境界는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에너지는 어디에 죽음이 있습니까. 에너지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설사 죽어진다 하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역시 몸만 바꾸는 것이지 죽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결국은 슬프다가도 눈물도 그냥 개일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공을 증명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마땅히 공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을 증명해야 만이 참다운 자유가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공이지만 다만 공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한의 가능을 갖춘, 즉 에너지가 무한의 가능성이 있듯이 무한의 가능을 갖춘 공이란 말입니다. 자비도 지혜도 행복도 다 갖추어있는 그런 공입니다. 따라서 그런 공이 되어야 만이 시간도 초월하고 또는 공간도 초월하고 또는 인과율因果律도 초월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인과율과 시간 공간에 얽매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라는 것은 공간과 시간과 인과因果를 초월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스스로가 역시 공도리를 증명해야 합니다. 공도리를 증명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인과의 도리를 못 넘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우리 한 생명이 금생에는 어영부영하다가 다 저물어버린다 하더라도 결국은 역시 공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을 증명해서 천지우주의 참다운 성품의 공, 생명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이 불성佛性 아닙니까. 물리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공이고 에너지고, 생명적으로 표현하면 공 그것이 바로 불성입니다. 불성을 우리가 증명하면 성불成佛아닙니까. 즉 성불이 안 되면 인과율도 못 초월하고 또는 시간도 못 초월하고 공간도 못 초월한단 말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자유가 못 되지요. 해탈도 못 되고 말입니다.

 

따라서 몇 생을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생명이라 하는 것은 꼭 불성을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삼동三冬동안 우리 스님들이 공부를 했습니다. 어째서 공부해야 하는 것인가. 말로야 어느 스님네가 공도리를 모르겠습니까. 다 압니다만 증명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증명은 역시 자기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차근차근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의 근기와 업장 따라서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습니다만 이른바 습기習氣가 녹아버려야 공도리 즉 불성을 증명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하루걸이 앓는 병자나 같습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가분 나쁘면 그냥 성내고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도 외우고 법문도 많이 듣지만 기분 상하면 역정냅니다. 경계에 부딪히면 탐심貪心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루걸이 병자 같이 우리 중생들은 변덕이 많단 말입니다. 평등심을 갖기가 어렵단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결국은 우리의 업장業障, 습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을 녹이기 위해서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기도 모시고 참선도 하는 것입니다.

 

저도 갑자기 목을 쓰니까 목도 아프고 여러분들이 밖에서 춥고해서 제 말씀을 간단히 줄이겠습니다만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가 하루걸이 병자가 안 되고서 마음이 항시 평등심으로 유지 할 것인가. 우리 근본자리는 결국은 공이란 말입니다. 공자리를 생명적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을 보다 생명적으로 표현할 때는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이라, 화두를 드나 염불을 하나 주문을 외우나 결국은 공자리, 부처님 자리를 우리가 안 놓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자리에서 항시 머물러 있는, 부처님과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 결국은 도인 아닙니까. 공부를 좀 했다고 하면 부처님자리에 생각을 좀 했다가 말았다가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했다 말았다 하는 그것이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하루걸이 병자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데서 부처님 자리를 안 놓치는 공부 즉 말하자면 ‘이것이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중국으로 오신 뜻은 무엇인가.’ 말입니다. 또는 ‘본분사本分事가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모두가 ‘부처님이 무엇인가.’와 똑같습니다. 이와 같이 그런 부처님 자리, 불성자리, 우리 본래 면목자리를 안 놓치기 위해서 화두가 있고 염불이 있고 주문이 있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자리를 말한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지장보살’을 염한다 하더라도 ‘지장보살이 따로 있고 또는 관음보살이 따로 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조그마한 사물도 역시 하나 가운데 전체가 포함되어 있고 이렇게 어려운 말로 하면 천지우주가 융통融通이라, 우주가 다 연관되어 있거니 말입니다. ‘지장보살’ 가운데서 ‘관음보살’이나 다른 보살이나 그런 정신이나 성령이 거기에 안 들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어느 한 사람이 법명도 있고 이름과 성이 따로 있듯이 말입니다. 추사 같은 분은 자기 호가 80개가 넘듯이 말입니다. 그와 같이 같은 사람이지만 이름이 많듯이 불성자리도 부처님 공덕도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이름만 달리 부른단 말입니다. 부처님 공덕이 우리 지구를 다스리는 면에서는 ‘지장보살’인 것이고 또는 지혜로운 면으로 봐서는 ‘문수보살’이고 그와 같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모두를 다 갖추고 있는 부처님 기운, 불성佛性기운, 자성自性기운, 우리 본래면목 가운데서 어떠한 것을 우리가 주로 얘기할 것인가. 견해 따라서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달리 이름이 된 것이란 말입니다. ‘지장보살’ 또는 ‘관세음보살’이 따로따로 뿔뿔이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관음보살’을 왼다 하더라도 역시 ‘관음보살’ 가운데 천지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너도 일체만유가 말입니다. 우리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한다고 할 때에도 무자無字 가운데 천지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옴마니반메흠’하면 ‘옴마니반메흠’ 가운데 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두가 다 포함되어 있는 걸로 알아야지 하나만 뚝 떼어서 본다고 할 때는 다신교나 같아 버리는 것이지 그것이 의의가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마음 내키는 공부하는 행법行法을 딱 추려서 그 수행법 가운데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그 가운데 ‘천지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본래면목이다.’ 이와 같이 믿고서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안 놓치고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계시는 주부들은 부엌가나 어디로 가나 ‘관음보살’이면 ‘관음보살’ 안 놓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고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은 화두를 드나 무엇을 드나 자기 공부 가운데서 본래면목자리를 순간도 안 놓쳐야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묵언도 하도 또는 며칠이고 앉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차근차근 날이 가면 갈수록 공부가 익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가운데 우리가 여러 가지 경계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 인간세계가 불교의 우주관으로 볼 때는 상당히 아래에 있습니다. 물론 사람 밑에 아귀도 있고 지옥도 있고 합니다만 우리 인간위에 가서 욕계欲界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사왕천四王天이나 도리천忉利天이나 연화천蓮花天이나 도솔천忉率天같은 천상도 많이 있는 것이고, 또 색계色界가 18층이란 말입니다. 무색계무색계가 4층이라, 이와 같이 부처의 지위까지는 굉장히 층계가 많습니다. 층계가 많기 때문에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정화가 되면 정화가 된 만큼 파장이 맞는 천상이나 그런 경계의 여러 가지 현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마음의 파장이 즉 말하자면 마음의 업장이 도리천만큼 정화되면 도리천의 상황이 나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불까지는 무수무량의 경계가 나옵니다. 그런 경계에 부딪힐 때에 우리 중생들은 조금 기분이 좋으면 ‘공부가 잘 된다.’하고 좀 기분 사나우면 ‘공부가 안 되는 구나.’ 하고 여러 가지로 실망도 합니다만 사실 그런 것은 별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참말로 구하는 것은 결국 성불成佛의 자리,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중간에 나오는 좋다 궂다하는 기분 좋고 안 좋고 하는 것은 우리가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관여할 필요가 없이 자비도 원만, 지혜도 원만, 행복도 원만, 능력도 원만한 그 자리만 구해서 우리가 일로매진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가 인연에 닿는 자기 수행법을 간택해서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배운 것은 잘못 배운 것이 대부분입니다.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칸트의 이론으로나 마르크스의 이론으로나 완전무결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참고로 할 뿐인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결국은 성불의 길 뿐이란 말입니다. 성불의 길은 우리가 안 가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몇 만생이 걸려도 우리가 부처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결국은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면 빨리 못 되는 것이고 부지런하게 정진하면 빠르겠지요. 기왕이면 빨리 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란 말입니다. 최선의 길로 못 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기 위해서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한테 지향하는 그 마음, 참다운 고향을 지향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을 안 놓치기 위해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옴마니반메흠’이나 화두나 자기가 좋아하는 데로 골라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 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불성은 천지우주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의 청정한 광명光明인 것입니다. 정광淨光이라, 淸淨光明청정광명이란 말입니다. 불성은 모든 것을 갖춘 청정광명인 것입니다. 일체 소립자 가운데서 가장 미세한 것이 내내야 광자나 중성미자 아닙니까. 그런 것은 모두가 다 광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지우주는 본바탕이 다 광명인 것입니다. 그런 천지우주에 가득한 영원한 부처님의 광명을 생각하시면서 금생에 게으름부리지 마시고 한사코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989년 2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