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6. 안거법어

성륜사 하안거 해제법어

성륜사 하안거 해제법어

 

 

 

 

사바세계裟婆世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고해苦海입니다. ‘괴로울 고’자, ‘바다 해’자 인생사 고해입니다.

 

불교 인생관에서는 삼계三界인 사바세계를 다시 구분해서 세 가지 경계로 또 구분 짓습니다. 어떤 것인가 하면 우리 인간 존재가 사는 욕계欲界가 있고 그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색계色界가 있고 또 더 높은 차원의 무색계無色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욕계 중생의 마음이나 색계 중생의 마음이나 또는 무색계 중생의 마음이나 마음자리는 똑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이라는 것은 한계가 없습니다. 국한이 없어서 국한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좁다 크다 이렇게 구분할 수 없는 문제 아닙니까.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나쁜 사람 마음이나 좋은 사람 마음이나 마음이라는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똑같이 국한이 없기 때문에 광대무변합니다. 우리가 어째서 불행한가 하면 우리 마음이 본래로 광대무변한 것인데 광대무변한 그런 자리를 그대로 수용을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우리 마음을 스스로 분별시비로 해서 좁히고 괴롭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 욕계 중생의 사는 생활은 그렇기 때문에 욕계산지欲界散地라, 산지散地라는 것은 ‘흩을 산’자, ‘산란스러울 산’자, ‘땅 지’자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하나의 산지란 말입니다. 항시 마음이 산란스럽습니다. 왜 산란스러운가 하면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 마음을 광대무변하게 확장을 시키고 그 무한대의 마음을 쓴다고 생각할 때는 나나 너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그런 시비도 없고 항시 마음이 개운하고 마음이 허공 같이 영롱할 것인데 우리가 그렇지를 못하고서 마음을 좁혀 한계 있게 마음을 두기 때문에 꼭 우선은 자기 몸뚱이 색신色身을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번뇌중 기본적인 번뇌가 ‘자기라는 존재가 실존적으로 이렇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아견我見입니다. ‘나 아’자, ‘볼 견’자 아견이란 말입니다. 일반 중생과 성자의 구분이 어디 있는가하면 우선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우리 중생은 아견을 참다운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성자는 아견의 한계를 초월해서 그 본래적인 우리 마음자리로 돌아간 분이 성자란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이와 같이 삼복더위에 이렇게 애쓰고 공부하는 것도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아견我見에서 풀어서 본래적인 마음자리로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참 불안스럽지 않습니까. 참 불안스럽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행복을 추구하고 또는 마음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바랍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무슨 종교나 또는 다른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모두가 다 안심입명을 바라지 않습니까. 마음이 우선 불안스럽지 않아야 행복이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마음 따로 몸 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참 불안스러워도 몸으로 편안하고 잘 먹고 잘 지내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구분해서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절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이 불안스러운데 몸만 불편하지 않고 편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몸이라는 것은 우리마음자리를 반영한단 말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개명이 많이 되어서 명상들을 하려고 애씁니다. 다른 나라 가서 보더라도 매디테이션meditation이라, 명상공부가 여러 가지 종류도 많고 합니다. 그런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느 사람들은 마음도 편하고 몸도 가볍고 몸에 있는 잔병도 떨어지고 그렇게 명상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는 명상, 부처님 공부를 하는 명상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른바 상대적인 것을 구하는 그런 명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우리 마음의 본성자리를 구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가서 일반적인 명상과 불교의 명상의 근원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흘이고 나흘이고 닷새고 참 애쓰고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명상법을 잘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큰 소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신비로운 것이어서 우리가 지은대로 간단 말입니다. 나쁜 생각하면 나쁜 쪽으로 우리 마음이 흘러가서 자기 마음도 괴롭습니다. 우리가 남을 관용하고 관대하게 마음을 가지면 자기 마음도 역시 너그럽고 참 편하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계시는 참선법이 본래적인 근본명상입니다.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대유한적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래적인 성품을 깨닫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성품 이것은 어떠한 것인가. 불교의 팔만사천법문이 여러 가지 교리 체계가 있지만 궁극적인 문제는 역시 마음을 깨닫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의 『혈맥론』에 보면 마음의 풀이에 있어서 관시寬時에 변법계徧法界라, 마음을 키우고 확장을 시킨다고 생각할 때는 온 법계라 하는 것은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세계가 법계입니다. 비단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해서 끝도 갓도 없는 그런 세계가 이른바 법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너그럽게 하면 그 마음이 법계에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 반대로 착야窄也에 불용침不用針이라, 우리 마음을 좁혀서 마음을 잘못 쓰면 옹졸하고 좁기가 바늘귀 하나도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고 또 지나친 욕심을 내는 경우는 결국 바늘귀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마음을 바로 쓰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이고 우주와 나와 결국은 둘이 아닐 정도로 되어버리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자기 개인적인 내 존재는 내 몸뚱이다. 내 몸뚱이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른바 아견我見이라, ‘나 아’자, ‘볼 견’자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아까 표현한 바와 같이 바늘귀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우리 마음이 협소해진단 말입니다.

 

평생 우리가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역시 마음 쓰는 생활이 우리의 생활 아닙니까. 생활의 전부인데 마음을 금생今生에 잘 쓴다고 생각할 때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겠지요. 육도윤회六道輪廻라, 이것은 하나의 방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실존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은대로 받습니다. 사람 같은 행동을 하면 그때는 분명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또는 천상 같다는 것은 십선계十善戒라, 우리가 열 가지 계율을 지키는 그런 정도란 말입니다. 그런 정도의 마음가짐이면 틀림없이 천상에 태어납니다. 같은 천상도 그런 십선계를 지킬 정도의 계를 지키고 동시에 우리 마음이 이른바 고요히 참선에 잠긴단 말입니다. 이른바 선정禪定에 든단 말입니다. 이런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공덕으로 해서 십선계와 참선 공덕으로 해서 그때는 천상에 태어난단 말입니다.

 

현대적인 공부를 하신 분들은 천상이고 지옥이고 이런 얘기를 하면 ‘그런 것은 하나의 권선징악적으로 과거에 성인들이 우리한테 좋은 일 하라는 방편으로 내놓은 것이지 천상이 우리가 실제로 찾아봐도 보이지도 않는 것이고 지옥도 마찬가지고 그런 것은 하나의 가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자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냥 가정적으로 한 말씀은 절대로 없습니다. 꼭 근거 있는 말씀을 우리한테 하셨단 말입니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 뒤에도 무수한 성자가 다 증명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천상도 분명히 있는 것이고 또는 지옥도 있는 것이고 또 최상의 경계 영생의 그런 행복을 누리는 극락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 존재로 해서 아까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생고해人生苦海라, 고생고생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이 몸뚱이도 아팠다가 실패를 했다가 결국은 늙어서 죽어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하신 의도가 어디 있는가 하면 인간의 생로병사를 벗어나고자 해서입니다. 과거 전생에 우리 인간 정도밖에 업을 못 지었기 때문에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태어나서도 쉴 새 없이 인생고를 느낀단 말입니다. 현대사화도 얼마나 불안스럽습니까. 지금 사화는 인간의 문명이 어디로 갈는지 예측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 수는 얼마나 많습니까. 또 차는 얼마나 많습니까. 또 공해는 얼마나 심각합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불안스럽기가 한이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인촌이 많이 퍼지고 이렇게 차가 많고 공해가 심각하다고 생각할 때에 틀림없이 인간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는 그런 결론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냥 삽니다.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는단 말입니다. 그저 말로만 하는 것이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를 않습니다. 제가 8.15 해방 막 지나서 서울 올라오니까 서울 인구가 40만 정도라 그래요. 40만 정돈데 지금 서울 인구가 얼마입니까. 인구수가 가속도로 올라갑니다. 지금 60억 정도 인구라 하는데 앞으로 십 년 후면 얼마나 인구가 더 팽창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또 거기에 곁들어서 우리 인간이 받는 인생고는 얼마나 더 경쟁적이고 비참해지겠습니까. 우리는 생각을 좀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도 젊은 남녀들도 많이 계십니다만 특히 젊은 사람들은 욕망을 좀 절제해야 됩니다. 욕망을 절제해서 인구팽창을 막는 것도 역시 인류에 대한 지대한 봉사란 말입니다. 남녀 인간이 서로피차 애정을 가지고 지내는 것은 좋습니다. 좋으나 우리 인간 존재가 금생에 지구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최상의 과제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아까 명상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인간존재로 밖에는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좁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확장시켜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해방시키는 그런 작업입니다. 그런 작업이 제일 중요합니다. 비단 사회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에서도 그것은 우리 인간에 있어서 지상명령입니다.

 

석가모니가 우리한테 모범을 보여주신 것, 또 예수가 우리한테 모범을 보여준 것 말입니다. 역대조사, 역대성인들이 우리한테 모범을 보여 주신 것도 다 근본적인 문제가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특히 우리 기성세대들은 이미 다 가정을 구성해서 벌써 늦어버렸지만 적어도 젊은 세대는 결연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그렁저렁 남녀이성간에 욕망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인류란 것은 오래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더구나 지금 노령 층이 얼마나 많이 불어납니까. 저 같은 사람도 그전 같으면 진작에 죽었을 것인데 지금 80가까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노령화 현상 아닙니까.

 

위대한 사람들 그분들 전기를 더듬어 보면 그분들은 천재일 뿐만 아니라 근원적인 우주의 장래까지 내다본 분들이라고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석가모니께서나 또는 예수나 플라톤이나 말입니다. 또는 근대에 있어서 칸트나 또는 니체나 말입니다. 음악가로해서 슈베르트나 베토벤 또는 하나의 예술가로 해서 미켈란젤로나 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입니다. 모두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자녀를 낳으면 자기 짝을 얻지 못할까봐 부모님들은 여러 가지로 고민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이 내외간 같이 결합해서 자식 많이 낳아서 살고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욕심을 못 떠난 욕계중생이 그 욕망 때문에 못 떠나는 것이지 욕망 그것은 우리 인간에 있어서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이나 사화 혼란은 어디서 옵니까. 집단적인 욕심 또는 개인적인 욕심 이런 것을 우리가 못 떠난 데서 인간의 불행이 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차근차근 우리 마음이 좁아집니다. 좁아지면 좁은 마음 그 때문에 우리가 저승에 갑니다. 저승, 내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육도윤회六道輪廻라,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수라나 인간이나 또는 천상이나 그런 육도란 것은 우리가 꼭 지은대로 받습니다.

 

우리의 행동 또는 말 한마디 우리의 생각하나 모두가 다 우리생의 형태를, 금생과 내생을 결정한단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참 더우신데 제가 여러 말씀을 드리면 고통스러우시겠지요.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대로 누구나 하루 살면 하루 산만치 마음을 열으셔야 됩니다. 마음을 연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도 그냥 편안합니다.

 

명상생활 이 마음을 여는 공부 가운데 제일 본래적인 수행법이 이른바 참선공부란 말입니다. 참선공부라 하는 것은 본체만을 문제시 합니다. 본래면목인 우리 마음만을 문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런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마치 빙산의 일각 모양으로 지금 그 밑에 있는 바닷물에 잠겨있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크지만 빙산의 일각이라고 하는 것은 뾰족이 물위에 나와 있는 그런 모서리 아닙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쓰는 마음은 그런 좁은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밑에 깔려있는 마음은 얼음산뿐만 아니라 한도 끝도 없이 우주와 더불어서 같이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은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의 본래 마음자리가 나온단 말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부처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 심불중생心佛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마음과 중생과 부처와 이것이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란 말입니다. 꼭 하나의 것입니다. ‘하나의 것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마음 쓰는가. 마음을 얼마만치 넓히고 확장을 시키는가.’ 이것 따라서 차이가 있을 뿐이란 말입니다. 지금 비록 사람의 몸을 받아가지고 산다고 하더라도 역시 사람 같은 마음도 못쓰고 뭔가 욕심이 지나치면 그때는 짐승 같은 마음도 쓰지 않습니까. 또는 표독스러운 그런 맹수 같은 마음도 쓴단 말입니다. 하루에도 우리 마음이 몇 번씩이나 변화무상합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본래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그 본래 마음자리만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것이 참선공부입니다.

 

우리가 불행스럽고 또는 그때그때 마음이 동요해서 흔들리는 것은 우리 마음이 주체성이 없는 탓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어디다 둘 것인가. 학문에 두기도 하고 또는 일에다 두기도 합니다. 그렇게 상대유한적인 것에다가 우리 마음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의 불안을 가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불안스러우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행복스러울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최상의 행복이고 최선의 봉사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꼭 마음자리를 근본 마음자리, 부처의 마음자리, 이 자리를 가리켜서 불교적인 용어로 해서 자성自性 그래요. 자성이라,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 그럽니다. 자성이나 불성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기 마음의 근본자리를 모르는 것과 같이 어리석고도 한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금생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 비록 단박에 마음의 본래자리, 불성佛性, 부처님자리를 얻기가 어렵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설사 금생에 나와서 바른생활을 못했다 하더라도 그 본래 마음자리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 또는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 자리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었습니다. 우리가 실망할 필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음은 원래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다하더라도 나쁜 버릇만 좀 붙은 것이지 근본적으로는 오염이 안 됐단 말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청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의 가르침 따라서 한 생각 돌이키면 그때는 바로 성자란 말입니다. 우리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우리가 초월해야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도 비약이나 초월 같은 말을 쓰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상에 얽매여 있으니까 실상實相 우리의 실존, 우리 본래의 고향자리로 우리 마음을 비약을 시키고 초월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사는 보람입니다.

 

말씀을 한없이 많이 하고 싶으나 여러분들이 땀을 뻘뻘 흘리시니까 제가 미안해서 말씀을 그만 줄이겠습니다. 정말로 마음공부 부지런히 하셔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마음은 절대로 청정하고 오염이 안 되었습니다. 따라서 마음 돌이키는 그 순간 영원한 행복의 자리로 우리 마음을 비약을 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이번 기회에 정말로 그런 깊은 공부를 하시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2001년 8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