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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6. 안거법어

성륜사 동안거 해제법어

성륜사 동안거 해제법어

 

선방에 계시는 우리 대덕 스님들이나 또는 후원에서 공부하신 우리 재가 불자님들 정진하시느라고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 하시고 또 참 장하셨습니다.

 

해제 날은 공부를 다 마치는 날이 아니라 우리 공부를 재점검하는 날입니다. 과연 내가 어느 만치 공부가 되었는가, 또는 그 지겨운 그런 상을 내는 것은 얼마만치 줄었는가, 또는 우리가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과연 내가 부처가 되어있는가, 또는 부처가 되는데 우리가 앞으로 몇 걸음이나 전진해 있는가 하는 것을 재점검하는 그런 날이 해제 날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범부가 바뀌어져서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 공부하는 분들의 최상의 목적입니다. 헌데 그 범부가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본래로 부처의 성품은 다 똑같다 하더라도 너무나 많이 나쁜 버릇을 붙여왔습니다. 따라서 그런 버릇을 떼지 않고서는 본래 부처라는 그런 자리를 얻을 수 가 없습니다. 우리는 번뇌 망상을 지극히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인 한에는 번뇌 망상을 도저히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번뇌 망상을 떼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최상의 법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라 그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우리가 범부를 초월해서 성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반야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반야의 지혜는 일체존재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른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생명의 실상지혜입니다. ‘나’라는 아상我相을 내고 ‘너’라는 인상人相을 내고 또는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상이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버릇으로 해서 공연히 상을 낸다 말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나와 남이 둘이고 이것과 저것과 분별하고 선과 악을 분별합니다. 그것은 우리중생들은 겉만 봐서 그럽니다. 우리중생들이 겉으로 봐서 그런 것이지 근본성품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의 성품입니다.

 

참선을 가리켜서 불심종佛心宗이라, ‘부처 불’자 ‘마음 심’자 불심종이라고도 합니다. 참선하는 것은 바로 불심종을 닦는 것인데 요즘 세상이 발달되고 또는 혼란스러운 것이니까 사람들이 마음을 어디다 의지할 때가 없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법이 아주 도움이 됩니다. 시골, 도시, 국내, 국외구분 없이 무슨 기수련이네, 단전호흡이네 별별 것이 다 있습니다. 또 같은 불교 내에도 버마나 스리랑카나 태국 같은 데는 위빠사나라는 관법이 있단 말입니다. 위빠사나 관법도 훌륭한 법이지마는 달마스님에게서 전수해 내려오는 순수한 참선만은 못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선 일반 보통 명상과 참선법이 어떻게 다른가. 그런 것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가지셔야 됩니다. 자고로 우리 불가에 내려오는 그런 선을 분별하는 그런 가르침이 있어요.

 

첫째는 외도선外道禪이라, 즉 말하자면 인과因果도 모르고 부처님 가르침도 믿지 않고서 그냥 덮어놓고서 ‘우리가 명상하면은 몸도 좋아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또는 참 재수도 있어진다.’ 이런 정도로 이른바 공리심功利心을 떠나지 못하면서 마음을 닦는 그런 법이 이른바 외도선입니다.

 

그 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선은 부처님 법을 어렴풋이 믿기는 믿으니까 좋은 일하면 반드시 행복이 오는 선인선과善因善果라 나쁜 일 하면 또 반드시 그 나쁜 과보로 해서 그런 고통이 오는 그 악인고과惡因苦果라 하는 이런 것을 안다 말입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피하고 좋은 선을 닦으면서 마음을 맑히는 선이 범부선이지요.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이라, 부처님 법속에 들어와서 닦는다 하더라도 온전히 대승법이라야 참다운 부처님법입니다. 소승법은 근기가 낮은 사람한테 제시한 그런 법인데 소승선은 ‘나 라는 존재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정도는 알고 닦는 명상법이 소승선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본래로 존재한다. 실존적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소승선도 못 됩니다. 적어도 소승선만 되기 위해서는 ‘본래 무아無我다. 또는 무소유無所有다.’ 이렇게 알아야 이른바 소승선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들어가는 관문은 꼭 우리가 통과해야 됩니다. 그런 관문을 통과 못 하면은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관문이 뭣인가 하면 나라는 것이 원래 실제로 있지가 않는 것이란 말입니다.

 

불교의 특징은 그러기에 ‘없을 무’자, ‘나 아’자 무아(無我) 아닙니까. 무아라, 말은 쉽지만 과연 내가 지금 무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얼마만치 내가 무아로 들어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 할 때는 보통은 다 한심스럽습니다. 그런데 ‘무아라는 것이 우리 중생이 욕심을 내니까 부처님께서 무아 라고 하셨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로 무아란 말입니다.

 

본래로 내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불교의 가장 초보적인 특징이 제행무상입니다. 제행무상은 모든 법이 모든 존재가 거의 항상 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고유한 것이 없습니다. 산이나 냇이나 우리 생각이나 모두가 다 그때그때 그 변화무상해서 마지않습니다.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강도가 높다하는 다이아몬드 같은 것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자 현미경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순간순간 마멸돼 간단 말입니다. 이른바 사라져갑니다. 어느 순간도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바로 없다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든 것이 그때그때 변화해서마지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제행무상 아닙니까. 변화해서 마지않으니까 필연적으로 그때는 제법諸法이 무아無我라, 나라고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나는 어제의 나나 오늘의 나나 똑같다고 생각해야 그것이 참다운 나라는 존재가 실존적으로 있다고 볼 것인데 엄격히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같은 자기는 없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범부의 망상으로 해서 태어날 때 나나 지금 나나 똑같다고 보는 것이지 그 동안에 우리 세포는 신진대사해서 몇 천 번 바꿔지고 다시 새로워지고 그런 것입니다. 그럼 어떻든 간에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의 얄팍한 번뇌로 봐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사실은 내 소유도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거니 내 소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 몸뚱이가 꼭 내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하니까 내 집이 있고 내 아내가 있고 내 남편이 있고 하는 것이지 자기라는 존재가 그와 같이 본래로 무상한 존재라고 본다면 나에 따른 소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닦아야 비로소 소승참선이 됩니다. 소승명상은 됩니다. 하지만 그도 아직은 대승명상은 못 됩니다. 대승명상은 나도 없고 또 우리 주변으로 보는 모든 대상이 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소식을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현대는 다행히 현대과학문명이 모두가 변화무상하고 또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을 합니다.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 물질이나 에너지나 모두가 그대로 가만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리 분석 해봐도 그 위치라던가 그 운동을 정확히 측정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성인들은 직관적으로 훤히 아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만 허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적으로 보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제가 너무나 딱딱한 말씀만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부처님 가르침은 상식적인 가르침은 아니지 않습니까. 상식을 초월한 가르침입니다. 성인 자체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인데 우리중생은 업에 가려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 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못 보니까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비뚤어지게 생각하지요. 지나치게 욕심을 내고 지나치게 진심瞋心을 내고 하는 것도 모두가 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우리가 바르게 보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나라는 것도 다 허무한 것이고 또 너라는 것도 허무한 것이고 또는 내 재산, 내 폐물, 자기가 소중히 아끼는 모두가 다 허무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을 적에 아무 것도 가지고 못 갑니다. 자기 몸뚱이도 가지고 못 가는데 우리가 폐물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대통령한들 그런 직함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다 그래서 자기도 공하고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느끼고 우리가 마음을 닦아야 비로소 대승참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달마스님을 통해서 전해 내려오는 참다운 참선법은 못 됩니다. 참다운 참선법은 최상승선이라, 참다운 참선법이 돼야 비로소 참선이라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 한다고 하지만 나도 있고 너도 있고 그런 분별시비에 얽매여가지고 하는 그런 좌선을 하면 그것은 참다운 참선이 못 됩니다. 최상승선 참다운 참선은 무엇인가. 이것은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나도 부처고 너도 부처고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성자가 보면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입니다. 우리중생들은 자기 업장대로 봅니다. 우리가 똑같은 밝은 달을 본다 하더라도 슬퍼서 보면 달도 눈물에 어리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쁠 때는 달님도 미소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중생은 항시 업으로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대로 우리가 명상 한다. 우리가 참선 한다 하지만 인과因果도 모르고 그냥 덮어놓고 앉아있고 또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런 상만 가지고 앉아있으면 이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한 것 보다는 좀 좋을 런지 모르겠지마는 우리가 범부를 초월해서 성자는 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돈오頓悟란 말씀을 들으셨지요. 돈오는 ‘문득 돈’자, ‘깨달을 오’자 문득 깨달아버린다 말입니다. 문득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 범부가 바뀌어져서 단박 성인이 되기는 쉬운 문제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치로는 우리중생들이 생각할 힘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사유하는 힘이 있고 판단하는 힘이 있으면 학문을 많이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는 우리마음이 본래로 부처인지라 진리에 걸맞는 그런 가르침은 우리가 안 배운다 하더라도 정말로 누군가 진정으로 말씀만 해주면 ‘아 그렇구나.’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문득 내 마음이 부처고 천지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구나. 이런 소식을 들으면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모르거니와 보통은 마음이 편해지고 또는 어떤 사람들은 그 말만 들어도 마음이 깨달아져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돈오頓悟라 문득 깨닫는 그런 경계에 이른단 말입니다.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은 먼저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이치를 깨닫고 닦아야 합니다. 이치는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반야의 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부처님뿐이다, 하나의 진리뿐이다. 하나의 생명뿐이다. 이렇게 돼야 반야의 지혜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불법이 못 됩니다. 우리가 참선을 하든 또는 염불을 하든 기도를 모시든 간에 그런 자세로 반야의 지혜가 항시 전제가 돼 가지고서 우리 공부를 해야 됩니다. 가령 우리가 남한테 뭣 인가 베풀고 사회봉사를 하다 보면 그 분명히 그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적인 생각을 우리가 떠나지 못 하고서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저 사람은 나 보다 더 구차하니까 내가 지금 도와준다. 이렇게 해서 베푸는 것은 참다운 베품이 못 됩니다. 이른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라, 상이 있는 보시란 말입니다. 상을 떠나서 저 사람과 나와도 본래 둘이 아니다. 사실은 둘이 아닌 것인데 우리중생이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나누어서 보는 것은 우리의 허물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우리가 한 달이나 두 달이나 몇 달이나 우리가 참선한다고 생각 할 때에 정말로 참 많은 복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데 그 모든 인연을 끊고서 몇 개월 동안씩 또는 몇 년 동안씩 우리가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지극히 큰 복을 우리가 받은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중한 시간을 허송세월을 말아야 합니다. 참선 할 때 가장 두 가지 큰 원수가 있는데 그 원수가 뭣 인가 하면 산란심이라, 이것인가 저것인가 자꾸만 우리마음으로 헤아리고 또 평소에 누구 섭섭하면 섭섭한 마음 내고 말입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면 좋아하는 마음 또 지나치게 내고 사실은 우리가 부처님 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를 섭섭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누구를 지나치게 애착을 품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 봐서 그런 것이지 바로 보면 다 똑같이 부처님화신化身이라 말입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이런 법문이 있어요. 일체 만법이, 일체만법이라는 것은 우리 사람을 위시해서 자연계 모두를 다 포함한 현상계가 일체만법입니다. 일체만법이 자성기연自性起緣이라, ‘스스로 자’자, ‘성품 성性’자 자성自性이 스스로 인연 따라서 이렇게 나투는 것이란 말입니다. 인간이라든가 또는 다른 모든 자연계라던가 이 환경 모두가 다 본래 자성 ‘스스로’자, ‘성품 성’자 자성이라는 말이 중요한 말씀이니까 잘 기억해두셔야 합니다.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이나 또는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일체만법이 어디서 왔는가 하면 모두가 다 자성, 불성에서 왔다. 나쁜 사람이든지 또는 좋은 사람이든지 또는 짐승도 사자같이 용맹스러운 것이나 또는 조그마한 곤충이나 모두가 다 근본적으로는 불성입니다.

 

일체만법이 자성기연自性起緣이라, 모두가 다 불성에서 왔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불성의 바다에서 인연 따라서 그때그때 거품이 일어나듯이 이렇게 나오는 것이 만유의 그런 제법이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때 지독하니 섭섭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버릇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섭섭한 것도 다 근원을 따져보면 다 부처한테서 왔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금방 다 해소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참선할 때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산란심散亂心을 제거를 잘 못합니다. 우리중생은 자기 업으로 보니까 자꾸만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분별 시비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앉아있으면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나서 공부도 안 되고 그러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산란심입니다. 몇 시간동안 앉아도 산란심만 내다가 시간 보내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 피로하니까 꾸벅꾸벅 조는 혼침惛沈이 온단 말입니다.

 

이 산란심과 혼침 이것이 우리가 좌선할 때 극복해야 할 두 가지 가장 큰 원수입니다. 혼침과 산란심을 극복을 해야 이른바 본래마음자리는 조금도 흠절이 없는 아주 영롱하고 만 공덕을 갖춘 바로 부처님이 될 것인데 그 산란심 때문에 산란심은 금생今生에만 우리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부터서 짊어지고 오는 우리 업이 있단 말입니다. 금생에도 잘못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고 어디에서 배우고 한 것이 모두가 다 사실은 산란심이란 말입니다.

 

수학이고 물리학이고 모두가 우리 생활에서 필요한 때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로 가기위해서는 그런 것이 모두가 걸림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아상我相이라든가 또는 대상적인 모두를 다 비워버려야 본래마음자리로 우리가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가 좋은 쪽으로 차근차근 진화 한단 말입니다. 진화론 같은 것도 허무맹랑한 말이 아닙니다. 일체존재는 동물이나 곤충이나 모두가 본래 불성이 있다. 따라서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를 부처님성품, 자성으로 본다 말입니다.

 

제가 『육조단경』을 번역 하려고 여러 차례 읽어보고 조사해 보니까 자성이란 말이나 불성佛性이란 말이 백 군데가 넘어요. 조그만한 책에 가서 자성, 불성이란 말이 백 군데가 넘습니다. 자성, 불성은 바로 우리의 주체성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자리입니다. 우리가 보통 참 자기를 잊어버리고 사니까 함부로 행동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 자성, 불성을 모르면 불성을 모르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바르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불성에서 모두가 연원돼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마음이 자성에 안주해야 비로소 마음의 산란심을 쉴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내 자성이 바로 이 불성이기 때문에 만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둬야 이른바 참다운 신심信心도 나온단 말입니다. 불교의 소승신앙과 대승신앙의 차이는 소승신앙은 마음밖에 진리를 구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마음 밖에서만 구합니다. ‘이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참다운 부처다.’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처는 바로 우리마음의 본성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성입니다.

 

우리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고 이분법, 삼분법 분할을 시키면 절대로 우리마음은 안정이 안 됩니다. 안정이 안 되면 그때는 공부도 안 되겠지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지우주는 오직 그 하나의 자리, 『육조단경』에서 얼마만치 우리한테 역설하시고 싶으셨으면 조그마한 경에서 백번 이상이나 똑같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자성, 불성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심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꼭 외어두셔서 우리중생들은 모양만 보니까 ‘모양은 다르게 보여도 그 근본성품은 다 모두가 부처님의 불성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남한테 보시할 때나 우리가 남을 교육시킬 때나 말입니다. 또는 집안에 어른이 되서 자녀들 교육을 위해서도 아들이나 딸이나 자기 소유물이 아닙니다. 모두가 부처님의 기운을 받고 인연 따라서 잠시간 부모의 인연을 빌렸을 뿐인 것이지 그 본래면목은 다 부처라 말입니다.

 

저 같이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또 공부를 다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마는 그래도 저는 생각하기를 성불하기가 세상에서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된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가 헤매다가 본래 부처자리, 고향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 공부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향광장엄香光裝嚴이라, ‘향기 향’자 ‘빛 광’자 자기 마음이나 자기 몸을 향기나 빛으로 해서 장엄을 시킨단 말입니다. 꾸미는 것이 장엄 아닙니까. 어느 누구나가 자기 마음이나 자기 몸을 향기나 빛으로 장엄을 시키겠지요. 부처님을 생각할 때와 또는 우리가 기분 나쁠 때 우리 표정이 어떻습니까. 부처님 얼굴은 32상 80수형호라, 부처님상은 조금도 흠절이 없습니다. 모두가 지혜와 자비로 해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그 무수생 동안에 더러는 남한테 물질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새끼를 낳고서 굶주려있는 범을 위해서도 자기 몸을 조금도 회한이 없이 바로 몽땅 바쳐버렸다 말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해서 부처님의 32상 80종호라 하는 그런 원만 덕상이 됐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얼굴을 이렇게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 마음이 흐뭇해지고 또는 감사해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자비와 지혜가 원만한 부처님 덕상입니다. 그런데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향기와 광명으로 해서 우리마음과 몸을 장엄시키는 그런 법이 무슨 법인가. 그런 법이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향광장엄이 되려면 다른 어려운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그런 시비분별을 떠나야 합니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괜히 잘 못 봐서 분별시비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를 부처님같이 숭앙하고 또는 부처님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생각 생각에 부처님 생각을 이어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바로 향광장엄 입니다. 우리 몸에다 향을 간직하면 우리 몸에서 향기가 풍기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하고 또는 끊임이 없는 하나의 향기란 말입니다. 진리의 향기고 자비의 그런 향깁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또는 화두공안話頭公案으로 해서 일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화두공안을 드는 것도 ‘이뭣고’ 라든가 ‘무’자 화두라든가 모두가 우리 본래면목자리, 불성자리, 자성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마음과 우주가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하시며 부처님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면 바로 그것이 향과 또는 광명으로 해서 우리를 장엄시키는 것이 됩니다.

 

오늘 해제 날, 다시 스스로 공부를 재점검하셔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향광장엄으로 해서 가장 행복스럽고 주변을 정화하는 그런 우리 일상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2년 2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