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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6. 안거법어

태안사 3년결사 해제법어

태안사 3년결사 해제법어

 

 

 

 

벙어리가 꿈을 꾸면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꿈 얘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벙어리 자신은 무슨 꿈인지 짐작은 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도 이 자리에 올라와서 어떻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속으로 짐작은 좀 되지만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운데 오셨으니, 그리고 3년 동안이나 신세를 끼치고 지냈으니 무슨 말씀이든지 해야 되겠습니다. 3년 세월이라고 합니다만 돌이켜보면 너무나 무상한 세월이었습니다. 원래 세월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고 보면 역시 하나의 꿈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있지가 않습니다.

 

과거는 어디에 있으며 또는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시간은 모양도 없습니다. 과거 모양도 없고 현재 모양도 없고 미래 모양도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현상 따라서 존재가 조금 변하면 과거요, 아직 변하지 않으면 그때는 미래요, 지금 변하고 있으면 현재요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름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과거심過去心 불가득不可得’이요, ‘미래심未來心 불가득不可得’이요 또는 ‘현재심現在心 불가득不可得’이라, 과거 마음을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미래 또한 안 왔으니 우리가 알 수 없단 말입니다. 현재는 순간 찰나도 머물지 않고서 변동해서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무엇인가 있기는 있단 말입니다.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고 좋다 궂다 시비분별是非分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나가는 시간, 있지 않는 시간,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는 그런 시간은 허망한 것이고 사실은 없는 것인데, 다만 상대성원리에 따라서 하나의 존재가 있으면 존재의 변화에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가 설정될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기는 있단 말입니다. 무상無常을 떠나서 무상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이런 세월이 불교용어로 해서 ‘여래일如來日’이라, 여래는 내내 부처님 아닙니까. ‘날 일’자 말입니다. ‘여래실상일如來實相日’이라, 즉 말하자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이러한 지나간 무상한 것은 없다 하더라도 영원히 변치 않을 영생의 시간은 있단 말입니다. ‘여래실상일’이라, 우리 생명의 본바탕은 이와 같이 무상한 것에 있지가 않은 것이고, 영원히 멸치 않는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 조금도 구속받지 않는 그러한 실상적인 하나의 생명체 이것이 우리 본분자성本分自性입니다.

 

우리는 3년 동안 결사 정진을 했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의 가피를 기원했고 또 우리가 사부대중한테 맹세를 했었습니다. 우선 저 자신도 3년 동안 아프지 않고 어떠한 장애가 없이 대중스님들의 뒷바라지를 해드려야겠다는 간절한 서원을 세웠었습니다. 그 서원이 별로 큰 서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현재 이와 같이 아프지도 않고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이 사람 개인적인 힘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두가 인연 따라서 같이 동행 선지식으로 정진하는 우리 도반들의 힘, 또는 사부대중께서 뒷바라지 해주시는 힘, 이런 모든 가지가지의 인연이 합해서 제가 이와 같이 건강한 모양으로 나와 있단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무수무량의 인연이 합해서 오늘날 이와 같이 3년 결사회향이 이루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우선 도반스님들한테 또는 삼세제불께 또는 호법선신護法善神께 또 사부대중四部大衆께 다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러한 눈에 보이는 우리 대중, 중생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이 태안사 도량道場, 눈에 안 보이는 도량신道場神, 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모두가 다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이러한 모든 인연들이 합해서 오늘날 이와 같이 3년 결사회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3년 결사 할 때는 누구나가 다 ‘3년 동안에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마쳐야하겠다.’ 하는 확고부동한 각오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공부를 내 놓아라.’ 그럴 적에 ‘뭘 내놓아야 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벙어리 같이 할 말이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계시다가 인도로 돌아가실 때에 당신 제자 분들한테 하신 인연담을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오늘 바깥 날씨도 이렇게 찬 날씨고, 바깥에 계시는 분도 있기에 장황한 말씀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만, 달마스님께서 중국에 인연이 다해서 인도로 가실 때가 되어서 제자들을 모아서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대들이 지금 까지 공부해 놓은 것을 한번 보여 봐라,”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때 도부道副라 하는 ‘길 도’자, ‘버금 부’자, 도부라 하는 제자가 나와서 ‘제가 알기로는 어떠한 법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는 집착을 여의지도 않고 모든 어묵동정語默動靜, 도용을 쓸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집이라는 것은 아직 마음은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냥 이치로 해서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 “그대는 나의 가죽 밖에는 모르는구나.”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니총지라, 총지總持라는 비구니가 있단 말입니다. 총지라는 비구니는 양무제의 딸입니다. 양무제의 딸이 달마스님의 제자가 되었단 말입니다. 니총지, 총지비구니가 와서 자기 경계를 말한단 말입니다. ‘저는 별로 공부를 한 것은 없으나, 마치 아난존자가 아촉불阿촉佛을 잠시간 보고 다시 볼 수가 없듯이 저는 그런 경계를 맛보았습니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아난존자도 공부가 순숙純熟되어서 나중에 활연대오 할 때의 말이 아니라 처음에 공부할 때는 잠시간 아촉불을 뵈었단 말입니다. 공부한 분들이 성불할 때는 가장 먼저 아촉불을 뵌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또는 공부한 경계에 따라서 그때그때 부처님을 뵈올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어떠한 법신광명法身光明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허나 공부가 순숙이 됐으면 항상 영생불멸한 진여법성眞如法性의 광명을 언제나 보고 있을 것인데, 공부가 아직 순숙이 못돼서 한 번 얼핏 보고 만단 말입니다. ‘한 번은 그렇게 뵌 다음에 다시는 뵐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달마대사께서 “그대는 나의 살만 겨우 얻었구나.”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아까 도부는 겨우 달마대사의 표피가죽만 얻었다고 말씀하셨고, 지금 총지비구니는 아촉불을 한번 보고서 다시 볼 수 없다고 그렇게 말씀을 올리니까, “그대는 겨우 내 살만 얻었구나.”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도육道育이라는 달마대사 제자가 있었습니다. 도육은 말씀을 드리기를 ‘제가 얻은 경계는 사대四大가 본래 공하고, 또는 사음四陰이, 사음이나 사온四溫이나 같은 말입니다만, 사온도 역시 있지 않거니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드렸단 말입니다. 사대는 내내야 지地 ‧ 水 ‧ 火 ‧ 이니까 이것은 물질을 말하는 말씀 아닙니까. 물질도 이것도 본래는 공한 것이고, 또는 수와 상과 행과 식이라, 정신적인 것도 역시 본래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물질과 정신이 비었으니까, 결국은 천상천하가 모두가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제가 얻은 바로 해서는 물질도 비어있고 또는 정신도 비어있고 모두가 비어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달마대사께서 “그대는 나의 뼈를 얻었느니라.” 이와 같이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다.

 

맨 나중에 달마대사의 정법正法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수받은 분이 혜가 慧可 선사 아닙니까. 혜가선사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달마대사의 앞에 와서 절만 하고서 자기 자리에 가서 점잖이 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달마대사는 그때 감동의 미소를 보이시면서 “그대는 나의 골수를 얻었느니라.” 내내야 골수는 가장 심오한 데에 있는 우리 생리적인 기관 아닙니까.

 

이와 같이 도부와 또는 총지비구니와 또는 도육과 혜가와 네 분이 각각 자기 경계를 점검 받았는데 맨 처음에는 다만 나의 가죽, 즉 말하자면 법이 깊이는 못 들어가고서 피상적으로 법의 그런 형식만 좀 알았다는 그런 말씀이고, 다음은 조금 더 들어갔지만 잠시간 무슨 법상法相만 좀 봤지 별로 크게 얻은 바가 없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공은 알았지만, 사대四大가 공이요 지 사대四大로 구성되는 물질이 다 비어있고 말입니다. 또는 우리 감각이나 의지나 또는 분별시비나 이러한 우리 의식도 비어있고, 이러한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있어서 한 물건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의 도리를 알았단 말입니다. 이것은 달마스님 말씀으로 하면 완전한 것은 못되고 이제 겨우 뼈만 얻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혜가스님께서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절만 하고 가만히 자리로 돌아가서 섰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뜻은 무엇인가. 아라한도를 성취한 대성자의 경계에도 부처님의 공덕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의 불공덕佛攻德은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불가설不可說의 경계를 어떤 말이나 형식으로 나타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묵묵부답으로 다만 자기가 얻은 경계를 경건하게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아무 말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은 혜가스님 정도의 경계가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정도도 못 되고 어느 정도라는 것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전에 지리산 벽송사에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래서 벽송사 내역을 좀 압니다만, 한 백 년 전에 서룡瑞龍스님이라, ‘상서로울 서’자, ‘용 용’자, 서룡스님이라는 스님이 계셨는데, 지금 분들한테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굉장히 위대한 분이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맨 처음에는 과거를 보려고 공부를 많이 했단 말입니다. 그 분은 고향이 서울인데 한 17,18세 먹어서 거리에 나가 보니까, 한 백 년 전이니까 이조말엽 안 되겠습니까. 사람 목을 잘라서 그 잘린 목이 상투가 흩어진 채로 높은 막대기에 걸려있단 말입니다. 얼마나 징그럽고 비참하겠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수십 명 수백 명이 모여서 수군수군 한단 말입니다. 수군수군하는 그 말을 들어보니까 목이 잘린 그 분이 아주 훌륭하고 얌전한 분인데 당파싸움 때문에 반대파한테 져서 역적으로 모함당해서 목이 잘렸단 말입니다. 그걸 보고서 ‘내가 과거를 해서 정승이 된다 하더라도 잘못 하면 저런 꼴이 되겠구나,’ 이와 같이 무상無常을 느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절로 들어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해가지고 도를 깨달았습니다.

 

도를 깨달아서, 나중에 78세쯤 되어서 죽을 날이 닥쳐와서,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은 지사기知死期라, 자기 죽을 날짜를 거의 다 아는 것입니다. 대중들한테 말씀하시기를 ‘섣달 스무 이렛날이 내가 죽을 날이다.’ 이와 같이 대중들한테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손주 상좌가 와서 ‘노스님께서 지금까지 공부도 많이 하셨는데, 하필이면 내일 모레가 설인데 설날 불공도 못 모시면 스님께서 공부한 어르신인데 여러 대중한테 원망의 말씀을 들으실 것이고 일반 대중도 곤욕을 치릅니다. 기왕이면 스님의 도력으로 며칠이나 연기 할 수 없습니까.’ 이와 같이 말씀드렸단 말입니다.

 

서룡스님께서 한참 생각해 보더니 ‘생각해보니 불공도 못하고 대중한테 폐가 많겠구나, 그러면 연기를 좀 해야 하겠구나.’ 그래서 불공도 하고 설을 쇠게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월 초이튿날 돼서 ‘저번에는 내가 못 갔지만 오늘은 내가 갈 날이구나.’ 그래서 다시 대중한테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때도 똘똘한 손주 상좌가 와서 ‘노스님 생각해 보십시오. 정월 초이튿날인데 내일이 삼일이고 삼일 불공도 모셔야하고 또 칠성불공도 모셔야 하는데 가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따지니까 노스님께서 ‘그도 참 그렇겠구나, 그러면 기왕 연기한 김에 또 한 번 연기해야 하겠구나.’ 그래서 8일 날 그러니까 그때는 칠성불공도 모시고 별로 다른 계획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8일 날을 정해서 열반 들으실 때에 누가 다시 시비를 하겠습니까.

 

그때 하시는 법문이 삼무생사三無生死라, ‘석 삼’자, ‘없을 무’자 말입니다. 세 가지 생사가 없단 말입니다. 삼무생사란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한 가지는 지무생사知無生死라, ‘알 지’자, 생사가 없음을 안단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증무생사證無生死라, ‘증명할 증’자, 생사가 없음을 증명한단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용무생사用無生死라, 생사가 없음을 우리가 활용한단 말입니다. ‘생사에는 이러한 세 단계가 있는 것이니까, 그대들은 잘 명심하고서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말씀을 남기고서 아주 흔연스럽게 마치 고향 가는 그런 기분으로 열반 들으셨단 말입니다.

 

그러면 서룡스님이 말씀하신 지무생사란 무엇인가. 생사가 없음을 안단 말입니다. 『화엄경華嚴經』에도 삼생성불三生成佛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견문생見聞生이라, ‘볼 견’자, ‘들을 문’자 말입니다. 우리가 법문을 듣고 보고해서 공부하는 성불의 자량資糧을 심는단 말입니다. 이러한 견문생도 있고, 다만 보고 듣기만으로 해서는 생사해탈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해행생解行生이라, 역시 우리가 생각을 많이 해서 해석도 하고, 또는 실제로 우리가 행동한단 말입니다. 해석도 하고 우리가 행동도 하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순숙純熟하지 못하면 그때는 생사해탈을 못합니다. 그 다음은 증입생證入生이라, ‘증명할 증’자, ‘들 입’자 말입니다. 비로소 우리가 증명해서 진여법성을 증해야만 비로소 생사를 떠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있듯이 서룡스님이 말씀하신 법문도 지무생사知無生死라, 생사가 없음을 아는 이것은 우리가 듣고 보고 해 가지고서 법문을 좀 알아서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미처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의 그런 밝은 지혜로 해서 본다고 할 때는 생사가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생사가 없음을 알고 믿는 그러한 단계의 공부의 경계가 지무생사 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서는 힘이 없단 말입니다. 증무생사證無生死라, 우리가 증명해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3년 동안 공부한 도반들도 가끔 와서 ‘3년 동안 공부했으나 별로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공부라 하는 것은 눈에 띄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번뇌 가운데는 금생에 지은 번뇌도 있지만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과거 전생부터서 무수하게 지어 놓은 번뇌가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번뇌 습기習氣를 녹이려면 오랜 시일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랫동안 공부를 익혀야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탈하는 경계도 지혜로 해서, 분별시비로 해서 이른바 간혜지幹慧智로 해서 아는 것은 어느 정도 공부가 되어 가면 아! 그렇구나 짐작이 됩니다만, 정작 통달무애通達無碍 하는 그런 지혜를 얻으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입니다. 공부를 한다 해도 금생 내내 해도 다 못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저 같은 사람도 다 하려면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무궁무진한 무상대도無上大道인지라, 공부를 조금 했다고 내 놓으라고 그러면 사실은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업장이 하나씩 둘씩 차근차근 녹아진단 말입니다.

 

따라서 구구순숙이라, 이렇게 오랫동안 순수하게 닦아오면 그때는 ‘자연내외타성일편自然內外他姓一片’이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기 몸도 차근차근 때가 빠져지고 말입니다. 자기 마음도 차근차근 번뇌가 사라지고 바람이 차집니다. ‘자연내외타성일편’이라, 자기의 밖이나 안이나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타성일편他姓一片이라, 차근차근 하나로 딱 뭉쳐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뒤에 가서는 하나로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하나가 되지만 그 단계로 해서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맨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벙어리가 꿈을 꾼다 하더라도 어떻게 말 할 재주가 없단 말입니다. 기특한 꿈을 꾸었지만 결국은 어떻게 말할 재주가 없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몸도 마음도 탁 빠져서 텅텅 비었고 ‘천지와 내가 하나구나, 이만치 오면 공부가 된 것인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되어도 말할 만한 무슨 꺼리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 정도는 아직 증무생사證無生死라, 생사를 어느 정도 증명해서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내 몸도 없고 환경도 없고 내외가 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아까 달마대사께서 점검을 하실 때에 세 번째 도육道育이라 하는 제자가 말하자면 ‘사대四大가 본공本空이요, 지‧ 수 ‧ 화 ‧ 풍 사대물질도 비어있고 또는 내 마음도 비어있고 일체가 다 비어있어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한 경계나 똑 같습니다. 우리 공부한 사람들은 이경계가 비록 끄트머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경계까지 이르러야만 비로소 자기한테 부담을 느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습기習氣가 남아있어서 비록 비었기는 비었지만 그것으로 해서는 다만 공이라, 단공但空에 빠져서 그때는 별로 힘이 없단 말입니다. 이래서는 아직은 소승小乘 단계에 불과합니다.

 

거기에서 정말로 우리가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전해오는 습기를 녹이고서 차근차근 불공덕佛空德을 발휘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그와 같이 마음도 비우고 몸도 빈자리에서 공부가 되었다 해 가지고서 말도 별로 막힘도 없고 어느 정도 자신이 서겠지요. 그러나 이걸로 해서는 사실은 힘을 못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로 해서 되었다 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별로 믿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이것도 허망한 한 가지 기우에 불과하다.’ 부처님의 무량무수無量無한 신통자재한 지혜를 믿지 않습니다. ‘불교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과장에 불과하다.’ 보조지눌의 『화엄론華嚴論』에 있는 바와 같이 ‘과불공덕果佛功德이 분호불수分毫不殊’라, 부처님께서 과불공덕으로 얻으신 모든 지혜공덕이 분호불수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진여법성眞如法性에 갖추고 있는 기운이라는 것은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물리학에서 이런 것을 다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소립자에 숨어있는 그런 무시무시한 정보나 능력을 보십시오. 그것을 본다고 할 때에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은, 소립자나 물질을 다 통합해서 모든 것의 가장 근원적인 힘과 생명이 불성 아닙니까. 진여자성眞如自性의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경에도 몇 겁을 두고 성자가 다 헤아려도 부처님 공덕은 능히 헤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 공덕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텅 빈자리, 마음도 개운하고 몸도 개운하고 탁 트여서 뭔가를 알듯 한 그런 기분, 비록 표현은 미처 못 하지만 불경을 봐도 쭉쭉 문리文理가 얻어지고 말입니다. 이런 경계를 다 되었다 해 가지고 함부로 망동한단 말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지금 조실祖室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입장에 따라서 할 수 없이 부처님 대신으로 제가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조실이란 무엇인가. ‘조’라는 것은 달마스님 어록에 보면, 불심을 사무쳐 깨닫고서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행과 해가 상응 되어야만이 그래야만 ‘조’라는 말을 듣는단 말입니다.

 

이른바 간혜지幹慧智를 좀 안다든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사대오온四大五蘊이 텅 빈자리를 얻어서 별로 막힘이 없는 정도로 해서는 ‘조’라는 말을 못 쓰는 것입니다. 사대四大가 빈자리만 간다 하더라도 지혜로 해서는 별로 막힘이 없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못 간다 하더라도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이라, 밀교密敎에서 말하는 통달보리심, 이것은 사선근四善根에 해당 하는 것인데 거기만 가도 그냥 별로 법문은 막힘이 없단 말입니다. 문자를 몰라서 그러는 것이지 경만 보면 쭉쭉 다 들어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걸로 해서는 법의 진수를 즉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참 생명을 다 모른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자리를 다 모른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알 것인가. 해탈 가운데는 혜해탈慧解脫과 정해탈定解脫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혜해탈 정해탈이라, 정해탈은 선정해탈禪定解脫이란 말입니다. 선정해탈은 이른바 누진통漏盡通 다시 말하면 멸진정滅盡定을 얻지 못하면 그때는 간혜지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멸진정을 얻어야만 비로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공덕이 나온단 말입니다.

 

어느 분은 3년 결사 시작 할 때에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3년 결사에서 꼭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해서 보여주십시오.’ 하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게으름을 부려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정해탈을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진여자성眞如自性 가운데, 한량없는 일체만덕一切萬德이 다 갖추어 있거니, 불도 있고 또는 물도 있고 또는 이것저것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또는 마음, 자성自性은 원래 신통자재하거니 불을 생각하면 그때는 불이 안 나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의 번뇌 망상에 가려서 못나오는 것이지 응당 불 생각하면 불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화광삼매火光三昧라, 불 삼매에 들면 불이 나와야 하는 것이고 수광삼매水光三昧라, 물 삼매에 들면 그때는 물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지 사대四大가 물도 있고 또는 바람기운도 있고 불기운도 있고 땅기운도 있고 합니다만 능조사대能造四大라, 이른바 소조사대所造四大는 눈에 보이는 사대이지만, 능조사대 이것은 눈에 보이는 사대가 아니라 성품에 들어있는 사대입니다. 성품 가운데는 그러한 물 기운, 바람기운, 불기운, 땅기운이 다 들어 있습니다. 지혜기운 또는 자비로운 기운, 이러한 만덕萬德이 갖추어 있거니,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불 삼매에 들면 불이 안 나올 수가 없고 물 삼매에 들면 물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뽑아 쓰는 것이 현대문명이란 말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에디슨 같은 분은 100종의 발명을 했단 말입니다. 에디슨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누구나가 사실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은 계발을 좀 많이 했다는 그것뿐이란 말입니다.

 

불교신앙이라 하는 것은 그런 불공덕, 무량공덕을 믿는데서 신앙이 깊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믿으면 과거에도 막히고 미래에도 막히고 시간에 막혀있는 분들이 생사해탈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역시 인과因果의 구속과 시간을 떠나고 공간을 떠나버려야 비로소 생사해탈하는 것이지 과거에 깜깜하고 미래에 깜깜해 가지고서 ‘해탈했다, 내가 통달무애通達無碍한다,’ 이런 소리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정해탈定解脫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삼명통三明通은 거기에 저절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삼명통은 과거의 시간을 초월하는 숙명통宿命通을 해야 하는 것이고 천안통天眼通은 미래에 막혀있는 그런 벽을 무너뜨려 버린단 말입니다. 과거에 통달무애하고 미래에 통달무애해야 비로소 시간의 구속을 안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간의 구속을 안 받고 또는 자기 번뇌의 습기濕氣를 녹여버려야 지혜공덕이 발휘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응당 선정해탈禪定解脫을 하면 그때는 여러 가지 구속을 벗어나서 삼명三明을 통하는 동시에 생사해탈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서룡스님이 말씀하신 지무생사知無生死 단계에 있는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공부가 돼서 증무생사證無生死라, 공을 증했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고 용무생사用無生死로 해서 우리 습기를 녹여서, 마땅히 지혜해탈智慧解脫과 더불어서 선정해탈까지 겸해서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굉장히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같은 종교라 하는 이름 밑에도 통계한 분들 말씀 들으면 한 몇 백종 되는 종교의 종파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 내에도 아시는 바와 같이 벌써 몇 십종파가 있습니다. 이렇게 돼서는 평화롭게 살 수가 없단 말입니다. 벌써 인간의 인생관의 가장 뿌리가 종교거니, 그런 인생관의 뿌리가 같지 않고 화합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화합을 하는데도 리화理化라, 원리가 같아야 합니다. 원리가 같지 않으면 화합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화합할 것인가. 이것도 역시 불교가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 가운데도 선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참선도 ‘내가 하는 방식이 옳고 네가 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참선의 본도本道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조사어록에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요, 또는 율은 이것은 부처의 행이라, 말씀했단 말입니다. 참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자리를 안 여의여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의 마음자리를 여의면 그때는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의 마음자리 다른 말로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 실상實相 또는 법성法性, 법계法界라고 표현합니다. 자성自性, 법성, 진여眞如, 주인공主人公, 열반涅槃, 극락極樂, 도, 여래장如來藏, 모두가 근본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심자리를 떠나서는 참선이 못된단 말입니다. 선은 바로 불심을 말하기 때문에 불심을 안 떠나면 설사 형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이 선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저만치 우리 마음밖에 있는 어떠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자성, 즉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님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우리 법신불法身佛 같이 생각할 때는 비록 형식으로는 하나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역시 선이 분명히 됩니다. 마호메트가 알라신을 믿는다 하다라도 ‘알라신도 우리 법신불같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해서 안 계신 데가 없고 오직 천지우주는 알라신뿐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이것도 역시 선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처님 이름을 불러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저만치 밖에 있고 내가 여기 있고 이와 같이 대립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관음보살’을 백만 번 외운다 하더라도 부처님과 나와 둘로 보고 그런 상대의식을 못 떠날 때는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방편염불方便念佛밖에는 못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화두를 참구해서 ‘이뭣고’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불심을 안 여의고서 참구해야지 상대유한적인 문제만 의심하면 이것도 역시 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심자리를 안 여의여야만 비로소 참선이라고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화두 보면 화두의 100개 이상이 모두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온 본뜻이 무엇인가. 본분사가 무엇인가. 불법의 요긴한 대의는 무엇인가. 이와 같이 불법의 체를 말씀하신 화두가 100개가 넘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정곡을 찔러서 말씀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그와 같이 불심경계佛心境界를 안 여의고 거기에 안주하기 위해서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방편적인 공부로 해서는 모든 종교나 특히 우리 불교 내에서도 하나로 통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로 통일을 못 시키면 우리 마음이 불안스럽고 잘 못산단 말입니다. 따라서 한 집안에 가령 마호메트교를 믿고 또는 기독교를 믿고 또는 불교를 믿고 이와 같이 각기 다른 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불심을 안 여의는 참선 자리, 진정한 참선만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화합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로 지금 문제가 되고 옳고 그르다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것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상대유한적인 문제는 그때그때 변동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가령 우리 조계종도 ‘태고선사太古禪師가 우리 종조宗祖다,’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종조다.’ 이와 같이 논쟁을 많이 합니다만 이런 것도 우리가 따질 필요가 없이 본체인 불성만 계발하기 위해서 총력을 다하면 된단 말입니다.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습기濕氣를 녹여서 참다운 진공묘유眞空妙有자리, 중도실상中道實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로 혜해탈과 더불어서 정해탈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기를 차근차근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근기가 법기法器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불성은 석가모니나 누구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제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단지 계발하는 정화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자성自性은 똑같단 말입니다. 우리는 무량공덕인 자기 불성을 분명히 믿고서 계발하기 위해서는 응당 지혜해탈과 더불어서 선정해탈禪定解脫까지 가야만 우리가 금생에 태어난 인생의 본분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출가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금생에 못하면 몇 만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인간의 목적은 지무해탈知無解脫과 더불어서 참다운 불성을 증명하는 증무해탈證無解脫이라, 또는 불성공덕을 자유롭게 쓰는 용무해탈用無解脫, 거기 까지 가야만 비로소 참다운 해탈이 됩니다. 이래야 인간의 본래면목을 달성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공덕으로 우리 법기法器를 더욱 더 연성하셔서 성불의 길을 재촉 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1988년 3월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