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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6. 안거법어

삼보사 하안거 해제법어

  삼보사 하안거 해제법어

 

 

오늘 날씨는 우리 본래 마음자리 같이 쾌청하게 한 점의 구름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와 같이 본래는 광대무변하고 조금의 번뇌도 없는 맑은 마음인데 어쩌다가 무명심無明心에 가리면 사실을 사실대로 보니 못하고 미워도 하고 애착도 하며 마음이 흐리멍덩해 집니다. 우리 불자님들 이민사회에서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복이 많으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불교의 인생관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인연을 과거 전생에 잘못 심어 놓으면 그때는 나쁘고 사나운데 가서 태어나고, 인연을 잘 심어 놓으면 좋은데 가서 태어나 안락을 누린다는 것인데 확실히 미국 땅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굉장히 안정된 처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삼복더위 한창 더울 때 한국을 다녀왔습니다만 30도 40도 가까우니까 정말로 찜통입니다. 한국에서 한 달 동안 지냈는데 카멜같이 날씨 좋은데서 있다가 가니까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에 비해서 과거 전생에 업을 좀 더 많이 지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들께서는 고생도 많으시지만 복도 많으십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생활의 기반을 잡기가 어려운데 미국까지 오셔서 더구나 소수민족, 약소국의 민족이란 핸디캡 때문에 훨씬 더 고생이 많으실 것인데, 고생이 많으신 가운데서도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셨으니 복이 참 많으십니다. 미국 땅에 와서 부처님 가르침을 믿기는 더욱더 어렵습니다. 교포 가운데도 80퍼센트 이상 기독교를 믿는 모양입니다. 사실 우리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으면 훨씬 더 수월 할 텐데 부처님 가르침을 잊지 않고서 이렇게 많은 수가 오신다고 생각할 때에 기쁘고 저희들 마음이 한 없이 환희심에 충만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법왕법法王法이라, 이렇게 법상法床이라는 것은 제가 잘나서 높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을 조금도 흠축이 없이 말씀을 잘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자리는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든지 법문을 할 때는 이렇게 높은 자리에서 법문을 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승가僧家의 도리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여름 공부를 해제解除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했다 말았다 자꾸만 간단間斷이 있으면 공부가 지속이 안 되고 잘 못됩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공부를 해야 공부도 익어지고 우리 나쁜 습관성이 녹아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특히 우리 출가사문들은 이와 같이 일 년에 두 번씩, 여름에 음력으로 4월 보름부터서 7월 백중까지, 또 겨울에는 음력으로 보름부터 이듬해 정월 보름까지 3개월 동안 합해서 6개월 동안은 오로지 공부하는 기간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심상공부心想工夫라, 우리가 보통 생활하면서 집안에서 가정생활도 하면서 하는 심상일용心想日傭간에 애쓰고 놓치지 않고 하는 공부가 이른바 심상공부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심상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별시공부別時工夫라, 심상공부로 해서는 과거 전생의 업장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가 있고 금생에 와서도 잘못 배우고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하고 그런 것이 모두가 우리의 업장이 되는 것인데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합니다. 이와 같이 과거 전생부터서 묻어 내려온 번뇌, 금생에 우리가 지은 번뇌, 합해 놓으면 번뇌가 상당히 무겁습니다. 따라서 심상일용간에 그렁저렁 공부해서는 제자리걸음 밖에는 못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사흘이나 또는 일주일이나 또 한 달이나 우리 스님네 같이 3개월 동안 오로지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 업장의 습기濕氣가 녹아나갑니다. 더 하고 싶으면 1년을 해도 무방하고 3년을 해도 무방하고 우리 부처님은 6년 고행도 하셨는데 이와 같이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하는 공부를 가리켜서 별시공부別時工夫라, ‘다를 별’자 ‘때 시’자 이와 같이 별도로 때를 정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별시공부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임종공부臨終工夫라, 어언간 죽을 때에 이른단 말입니다. 우리 같이 출가한 승려도 자꾸만 시간을 미룹니다. ‘올해는 그렁저렁 살아도 내년에는 조금 더 애쓰고 해야 되겠구나.’ 이러다 결국은 어언간에 죽음이 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노소부정老少不定이라, 늙었다고 해서 빨리 가고 젊다고 해서 나중 간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늙으나 젊으나 인연이 다하면 죽어진단 말입니다. 죽음문제를 소홀히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삶이 다하면 그만인 것이고 잘 살면 그만이지, 죽은 뒤에는 모르는 것인데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러나 우리 불교 인생관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로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받은 이 몸뚱이만 바꾸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는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낳아도 인연 따라서 몸뚱이만 나오는 것이지 우리 생명이 없던 것이 나오지 않는단 말입니다.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우리 몸뚱이가 멸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생명자체는 없어지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우리 생명자체는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살면 틀림없이 삼악도三惡道가 존재합니다. 지옥地獄도 존재하고 또는 아귀餓鬼도 존재하고 또는 축생畜生도 존재합니다. 지옥이라 하는 것은 영만 존재하는 세계인데, 영이 전생에 사람 세상에 살다가 살생도 많이 하고 부처님법도 비방을 하고 이런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인데 지옥은 사람 몸뚱이 같은 몸은 없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고생만 받는단 말입니다. 지독한 고생을 받아서 조금도 쉴 새 없는 그런 세계가 지옥세계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지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우리 영혼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귀라는 것은 탐욕심이 많아서 이기심만 부리고 꼭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이런 사람들은 아귀 귀신이 됩니다. 아귀 귀신이 되어서 욕심은 한도 끝도 없이 많은데 목구멍은 바늘귀만 한데 많이 먹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면 갈증만 나겠지요.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불로 변화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이 아귀세계입니다.

 

그리고 미련해서 분별시비分別是非도 모르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죽어서 보통은 축생畜生이 됩니다. 업장이 무거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업을 지었단 말입니다.

 

지금 세상은 투쟁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싸움 좋아 하는 사람들은 죽어서 아수라阿修羅 귀신이 됩니다. 조금 잘 살아서 그래도 반 정도는 선도 하고 악도 하고 다섯 가지 계행戒行 정도는 지키는 사람들은 죽어서 다시 인도 환생인도환생이라, 사람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십선계十善戒라, 착한 일을 보다 더 많이 해서 무던히 잘 살았던 사람들은 천상天上에 태어난단 말입니다. 천상도 3계 28층이라, 28층이 하늘에 있습니다. 자기 업 따라서 업이 가벼우면 높은 하늘로, 업이 무거우면 낮은 하늘에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마음 깨달아서 나와 남이 본래로 둘이 아니고, 부처와 나는 본래로 둘이 아니다. 이와 같이 자기 마음자리가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달아서 천지우주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는 정도로 깨달은 사람들은 극락極樂에 간단 말입니다. 극락은 사실 성인들만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임종공부臨終工夫는 설사 평소에 공부를 못해서 죽음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죽은 순간에 선지식을 만나고 부처님 경전을 봐서 ‘세상은 다 허망한 것이고 삼독심을 여의면 극락 간다. 극락은 분명히 존재한다. 극락세계는 성인들이 항시 부처님 설법만 하고 있고, 또는 조금도 불행이나 고통이 없이 영생불멸하게 안락을 누린다.’ 그 생각 가지고 목숨을 마치면 금생에 설사 그렁저렁 살았다 하더라도 임종 때 그 생각 때문에 극락이나 천상에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활하면서 하는 심상공부心想工夫도 있고, 또 한 달이나 두 달이나 오로지 하는 별시공부別時工夫도 있고, 또는 임종 때 마음 잘 결정하면 결정한 그대로 저승에 가는 것인지라 천상도 가고 인간도 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께서 일용동안에 시간을 많이 아끼셔서 평소에 8시간 잠을 자시면 될수록 잠을 줄여서 7시간이나 6시간을 자도 우리 건강에 큰 지장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스님네는 보통은 5시간 잡니다. 그러나 충분히 건강을 유지하지 않습니까.

 

부처님 공부는 업을 녹이는 것이고, 선업善業을 짓도록 하는 공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 가정에서 심상일용적으로 한 듯 만 듯한 그런 공부로 해서는 우리 업장이 잘 안 녹습니다. 그러니까 무던히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 이르면 성도 나고 누가 배신하면 죽이고 싶도록 밉기도 하고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잠재의식에 들어있는 나쁜 업들이 그때그때 발로가 돼서 그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가 불자님들이라 하더라도 될수록 기회를 만들어서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일 년에 적어도 몇 번 정도는 그런 기회를 가지셔야 됩니다. 기독교의 일요일도 그래서 나왔단 말입니다. 주일이라 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과 더불어서 주님의 가르침 따라 살기 위해서 주일이 있단 말입니다.

 

사실은 그런 것이 불교에는 있습니다. 육재일六齋日이라, 여러분들은 지금 미국에 와서 육재일을 지키지 못 하시니까 이름도 잘 모르시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육재일이라, 음력으로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이 여섯 날은 재가 불자라 하더라도 출가한 수행자와 똑같이 공부한단 말입니다. 한국에서 제가 있던 절에서는 대체로 육재일을 지키는 신도가 많습니다. 금생에 우리가 생활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것은 업을 녹이고서 성불하는 도업道業을 짓는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한테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육재일 날은 집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내외간에 가능하면 잠자리도 같이 안 하시고 고기도 안 잡수시고 가능하면 하루에 한 때를 잡수시고 말입니다 이슬람교도 라마단 달은 사람들은 한 달 내내 하루 한 때 먹습니다.

 

어느 종교나 순수하게 나갈 때 청빈하고 깨끗하게 욕심을 절재한단 말입니다. 욕심의 절재 없이 수행생활이나 신앙생활은 못하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어떠한 종교나 사람의 욕심과 분노를 절재하고 위대한 지혜를 개발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모두를 다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지 않습니까.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우리 중생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는 어려운 말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라, 반야반야의 지혜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잘못 생각해서 괜스레 밉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꼭 그 사람만 좋은 것도 애착을 가지고 좋아 하는 것입니다. 또는 무슨 주의를 믿으면 그 주의를 위해서 자기 생명도 바친단 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인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거꾸로 잘못 보는 것입니다. 뒤바뀌어 본단 말입니다. 아무리 세간적인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인 공부는 부처님 지혜, 반야바라밀, 반야의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불교입니다. 반야의 지혜를 모르면 불교가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어려운 말로 하면 아집我執, 법집法執이라, 나라는 집착과 아울러서 내가 아는 것이 전부란 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꼭 옳고 다른 사람들의 것은 별 것이 아니다.’ 이것이 법집인데, 아집과 법집이 있으면 이것은 반야바라밀이 못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렇게 옹색하고 어려운 법문이 아니더라도 잘 살면 그만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실런가 모르겠습니다만 부처님께서 보신 지혜는 우주의 도리를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우주의 실상實相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의 도리에 어긋나면 자기도 고생을 받고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역사 이래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까. 많은 갈등과 모순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우리 인간들이 우주의 도리대로 살지 못하고 엉뚱하게 잘못 보고 사니까 그와 같이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바른 지혜, 실상의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없단 말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소중해도 불교를 믿는 분들은 무아無我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주의 도리이니까 말입니다. 본래 없는 것인데 우리 인간이 지혜가 짧고 업장에 가려서 ‘내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것도 역시 사람들이 상대적인 지혜를 가지고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만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바른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를 배워 놓으면 그것만 옳다고 주장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마음도 괴롭고 사회도 그른 길로 인도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떠나서 안락스러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불안스러우면 몸도 불편하시겠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이 불안을 떠나기 위해서는 다른 묘방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마음을 가장 평온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자리가 원래 하늘같이 광대무변해서 조금도 흐림이 없이 만공덕萬功德을 포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그 마음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 마음을 모르고서 ‘자기 마음은 자기 몸 안에 있다.’ 이런 정도로 소박하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도리를 바로보신 석가모니부처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성자나 철인들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부처님이 가장 철저히 밝혔다는 특징이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 중생은 자기 마음을 편안히 해야 할 것인데, 자기 마음의 본래자리를 모르면 편안하게 안 됩니다. 제 아무리 물질적으로 많은 것이 있고 내외간에 화목하다 하더라도 그런 걸로 해서는 항시 편안할 수 없단 말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고 마는 것이고 어쩌다 잘못 살면 이혼도 하고 말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이 본래자리를 찾아서 안주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마음이 편안하고 항시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저번에 무슨 병리학회에서 나온 잡지를 보니까 사람들의 병은 대체로 80퍼센트가 스트레스가 쌓여서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해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기분 사나워서 음식을 먹으면 소화도 안 되고 판단도 흐려집니다. 스트레스는 우리 마음이 불안해서 옵니다. 우리마음이 무지해서 옵니다. 우리마음의 본 모습은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하고, 본래 번뇌가 없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자비나 또는 지혜나 공덕이나 능력이 완전무결하게 충만해 있는 것이 우리 마음자리란 말입니다. 그런 마음자리를 잘못 써서 자꾸만 불행을 자초합니다. 우리 본래 마음자리가 바로 불심인 것이고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이 자리를 바로만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그 공덕이 칠보로 장엄한 보배가 우주 가운데 가득 차있다 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증명을 해야 되겠습니다만 우선 이치로라도 우리 마음자리가 광대무변廣大無邊하고 청정해서 조금의 흐림도 없고 그 가운데는 무한의 자비, 지혜, 능력, 공덕이 충만해 있다고 분명히 긍정하고서 안다고 생각할 때에 그것만으로도 우주에다가 칠보로 장엄한 보배가 가득 채운다 하더라도 그 보다 더 훨씬 공덕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식을 바로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은 이른바 정보화시대 아닙니까. 가지가지 정보가 얽히고설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정보가 하도 얽히고설키니까 우리 마음이 불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수행법도 ‘지장보살이 좋다 또는 관음보살이 좋다.’는 식의 여러 가지가 많단 말입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유교 등 종교도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불교도 한국만 해도 50종파가 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마음이 불안스럽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몇 백 종파가 있다 하더라도 내내야 우리 마음자리를 밝혀서 우리가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는 장차 더 닦아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심상공부心想工夫도 하고 별시공부別時工夫라,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오로지 공부를 하셔서 우리 번뇌가 맥을 추지 못하도록 공부를 하셔 가지고서 우리 마음이 더욱 더 맑아지고 넓어져서 장차는 부처가 되도록 까지 하시고, 설사 그렇게 증명은 못하신다 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분명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지금 김 아무개 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 이것은 본래 부처마음, 석가모니 같은 마음 예수 같은 마음이란 말입니다.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우리 공덕 가운데 어떠한 재물보다 더 큰 공덕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하찮은 것 때문에 누구와 사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내 마음이 본래로 무한의 환희, 자비나 보배를 갖춘 것인데 무엇 때문에 싸울 것입니까. 싸움은 결국 자기 마음에다가 공연히 어두운 그림자를 두게 되어 우리 마음을 괴롭힌단 말입니다. 괴롭히면 우리 몸도 해롭단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우면 몸도 거기에 상응해서 꼭 괴로운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천지우주가 마음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물질이 아니니까 본래 비어있겠지요. 우리가 소중히 아끼는 몸뚱이도 비어있고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텅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비어있다는 소식을 부처님 같은 분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도 잘 못 알아먹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22년간이나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密이라, 공도리를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일체존재가 다 본래로 비어 있다고 믿으시고 믿는 그 마음으로 해서 화두도 참구하고 염불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비어있는 소식을 여러분이 체험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현대물리학이 비었다는 소식을 증명을 합니다.

 

19세기 말까지는 물질의 근본은 원자라고 했지만 20세기 초부터는 원자 그것도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진동하는 상황에 불과합니다. 에너지는 물질이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물질이란 것은 결국은 본래로 모두가 다 비었다는 것을 현대과학이 증명합니다. 현대과학이 증명하는 것을 우리가 부인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눈으로 해서 있다고 보인다 하더라도 이것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 가운데도 ‘부처님께서 다 비었다는 것은 우리가 욕심을 내지 말고 허망하니까 허망한 것에 집착을 내지 말라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실 분도 계십니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비었으니까 비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었어도 그냥 분석한 뒤에 빈 것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공이라, 색은 물질이 아닙니까.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이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아집我執이나 법집法執을 떠난 성자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뚱이나 다이아몬드나 금이나 모두가 그대로 비었단 말입니다. 우리의 번뇌 때문에 안목을 너무 신뢰하지 마십시오. 자기 무지無知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철학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 말대로 우리 무지를 먼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무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무명無明에 가리고 번뇌에 가려서 거꾸로 봅니다.

 

여러분께서 바로 보시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화두도 참구하는 것입니다. ‘본래 나는 무엇인가. 내 생명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본래의 자리, 우리 중생은 근본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우리 한국도 지금 굉장히 무거운 병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도 허망한 것인데 자기 재물은 잠시간 관리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것이 꼭 내 것이다.’고 생각해서 폐해가 많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 병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무명에서 옵니다.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해서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의 본질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입니다. 우리가 증명이야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공부를 많이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증명은 어렵겠습니다만 이치만은 분명히 느끼셔야 됩니다. 거짓말을 안 하시는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으니까 우리가 믿으셔야지요. 또 많은 성자가 한결같이 말씀하신 그런 도리란 말입니다. 그건 바로 우주의 도리입니다.

 

현대물리학은 불성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일체존재가 다 비어있다는 소식은 안다는 말입니다. 다 비어서 물질이 아닌 그 자리는 현대과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상대유한적인 것 밖에는 모르는지라 이것은 성자의 길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을 모르고서 불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야지혜를 알려고 생각할 때는 ‘모두 다 비어있고 참말로 있는 것은 부처님성품, 마음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불교를 안단 말입니다. 우리가 반야의 지혜를 안다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 중생이 살기가 편하고 모두가 순타하게 다 풀리는 것이 비유하면 이무기가 구름을 얻어서 용 되는 것이나 같고 호랑이가 언덕을 의지해서 천리를 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합니다.

 

오늘 해제解制날, 여러분들께서 비록 재가불자님들이라고 하시더라도 적어도 일주일에 몇 번 정도는 꼭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지켜서 주와 더불어서 하루를 보내듯이 우리도 부처님과 더불어서 하루를 보내고 부처님 공부하시는 걸로 해서 한 달의 몇 번 정도를 보내셔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 생활도 보다 깨끗해지고 절도가 있어집니다. 일주일에 하루씩은 그렇게 부처님 공부하는 날로 정해서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는 고기도 안 드시고, 평소에도 안 드시면 더욱 좋지요. 더불어서 내외간도 그날은 목욕재계하고 향도 피우고 깨끗이 하고 그날 하루만 음식도 자재해 보십시오. 그러면 숙변도 빠지고 몸도 개운합니다. 음식은 적게 먹으면 적게 먹을수록 몸이 개운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경험 안하셔서 모르시지만 음식을 많이 먹어서 탈나는 것이지 적게 먹어서는 절대로 탈이 안 납니다. 우리가 비타민이나 무슨 단백질이나 안 가려도 적게 먹고 살면 자연적으로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스님네도 50일 동안 단식한 스님네가 있습니다. 이해를 잘 못하시겠지요. 또 저번에 한국 들어가서 만난 분인데 30년 동안 물만 먹고 살았습니다. 여러분들 믿기지 않으시지요. 사람 생명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중생만 이렇게 오염된 몸이 있어서 물질이 필요한 것이지, 천상天上중생은 음식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잘못 먹어서 우리 몸이 보통 많이 상하지 않습니까. 성인병은 대체로 고기를 많이 먹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리학자의 말입니다.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그렁저렁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을 보다 북돋우는 가르침입니다. 금생뿐만이 아니라 미래 영생토록까지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계율은 모두가 다 빨리 성불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해지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꼭 그와 같이 부처님 날을 정하셔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공부를 하셔서 더욱 더 부처님하고 가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셔야 오늘 이와 같이 해제解制날 여러분들이 참여하신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영가천도靈駕薦度를 합니다. 영가靈駕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영혼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죽어지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은 그냥 죽자마자 지옥으로 가는 것이고 아주 좋은 사람들은 죽자마자 극락으로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극락으로 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아주 나쁘지도 않고 아주 좋지도 않고 어정쩡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보통은 영혼으로 오랫동안 헤매는 것입니다. 보통은 49일 동안은 헤매니까 49재도 모시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수치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3이나 7이나 49나 그런 수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수치에 따라서 우리 생명이 그때그때 변신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어서 보통은 업이 가벼우면 일주일 동안에 몸 받아 가는 것이고 좀 무거우면 이주일 동안에 몸 받아 가는 것인데 특히 젊어서 죽는다거나 또는 애착이나 미련이 많아서 죽은 뒤에도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대해서 애착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영혼들은 오랫동안 못갑니다. 오랫동안 못가면 영혼도 괴롭지만 영혼들이 못가니까 헤맨다는 것이 산사람 주변을 헤맨단 말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아프기는 아픈데 병원에 가서 진단해 보면 무슨 병명이 안 나온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영혼들이 못가고 있다가 괴로우니까 산사람 만지기도 하고 또는 악수해보고 말입니다. 또는 산사람을 의지해서 괴로움을 면하려고 해보기도 하고 이런 것 때문에 산사람이 아프단 말입니다.

 

그래서 추선공양追善供養이라, ‘쫓을 추’자, ‘착할 선’자, 추선追善인데 그 뜻은 뒤에 남은 산사람들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복을 지어드린다는 말입니다. 가령 부처님 말씀인 경을 우리가 발간해서 그 돌아가신 분들 이름으로 해드리면 그때는 잘못 가셔서 지옥도 가셔 계시고 또는 아귀귀신으로 고생 받고 하더라도 그런 공덕 때문에 풀려나온단 말입니다. 죽어서 헤매면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저승에서 헤맬 때도 역시 산사람이 아까 말한 추선공양이라, 돌아가신 분의 이름으로 해서 누구한테 보시도 하고 아픈 사람한테 약도 지어주고 또는 부처님한테 공양 올리고, 스님들한테 공양도 한다고 생각할 때는 돌아가신 분의 죄업이 탕감이 됩니다.

 

목건련존자는 부처님 당시에 신통제일神通第一 아닙니까. 목건련존자 어머니가 별로 좋지 않게 생활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쁜 갈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목건련존자가 공부가 미숙한 때라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목건련이 공부를 많이 해가지고 천안통天眼通으로 보니까 자기 어머니가 지옥 들어가서 고생한단 말입니다. 그 지옥고地獄苦라는 것은 우리 중생은 실감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많이 한 영혼들이 고생하는 세계가 틀림없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금생에 우리가 지은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건련존자가 자기는 신통을 좀 해서 어머님이 고생하는 것을 보기는 보지만 자기 힘으로 해서는 능력이 부족해서 구제를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간청을 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제가 어머니를 구제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백중伯仲날 스님네한테 가서 음식을 많이 장만해가지고 가서 공양을 드리면 그 공덕으로 해서 지옥에 가서 공생하는 그대 어머니의 그런 지옥고를 면할 수가 있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백중날은 우리 참선하시는 스님네가 공부를 여름동안 많이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업장도 많이 녹이고 공덕을 짓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는 ‘스님네 공부는 스님네 공부고 우리는 우리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갑’이라는 사람 마음이나 ‘을’이라는 사람 마음이나 다 광대무변합니다. 여러분 마음이나 제 마음이나 모두가 다 광대무변해서 결국은 똑같단 말입니다. 물질 같으면 내 마음 네 마음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공간을 같이 공유한단 말입니다. 내 마음 네 마음이 똑같아서 다른 사람이 공부하면 그 영향이 자기한테도 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모시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 마음 닦여진 만치 그때는 우리 우주가 정화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님네가 여름 3개월 동안 오로지 공부했다고 생각할 때는 스님네 자기들만 공부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를 정화시키고 우주에 있는 모든 중생도 그만치 정화가 됐단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백중재伯仲齋를 모시는 인연이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거꾸로 생각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해서, 거꾸로 생각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도현고倒懸苦라,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는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이와 같이 조상들의 위패를 많이 모시고 있습니다. 간략하니 동참으로 그런 재를 모셔드려서 영가들이 틀림없이 모든 망념을 다 없애고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실 것입니다.

 

오늘 천도薦度 받는 영가들이시여,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잘못 봐서, 탐욕심을 지나치게 내고 지나치게 분노하고 어리석음을 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탐욕심을 내고 분노하는 그런 마음은 참다운 자기 마음이 아닙니다. 참다운 자기가 아닙니다. 영혼들이 가실 곳인 모든 번뇌를 다 없애고 영생불멸한 극락세계, 성인들은 현세 이대로 극락세계의 행복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본래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들이 잘못 봐서 그런 나쁜 세계를 스스로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는 행복만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흠모추구하고 그리고 그대들의 참 생명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주의 참 생명도 부처님입니다. 우주의 참 생명의 이름인 동시에 모든 존재의 참 이름도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극락세계를 간절히 흠모하시고서 저승에서 헤매지 말고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만 중생의 참다운 이름인 ‘아미타불’을 염하십시오. 그렇게 외우시면서 조금도 지체 말고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해서 마지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1994년 8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