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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6. 안거법어

성륜사 동안거 해제법어

성륜사 동안거 해제법어

 

  

 

옷깃만 스쳐가도 삼생 인연이라고 했는데 하물며 이와 같은 자리에서 부처님 법을 설하게 된다는 것은 정말로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무수한 생을 되풀이 하면서 만나고 또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십니다. 지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만나기도 하고 오늘도 처음 뵙는 분도 계십니다만 한결같이 똑같은 그리운 고향사람들이십니다. 그러나 세월이 또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그렇게 지나다 보면 다시 또 무상한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헤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 또는 영생의 고향을 찾는 이른바 불성佛性 존재입니다. 본래 우리 성품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 성품과 하나가 되기까지는 영원한 나그네 길을 걸어가면서 고생고생 윤회하고 다시 태어나고 그러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는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공덕과 본래 죽음이 없는 생명을 갖추고 있는데도 우리 현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는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도 우리가 이 사바세계의 그런 제한된 것을 다 초월해서 정말로 우리가 필경 돌아가야 할 고향자리를 재차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어려운 말씀도 있고 쉬운 말씀도 있습니다만 모두가 남도 죽음도 없는 영생의 고향자리를 우리한테 보여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우리의 보통 마음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우리 생명의 근본 도리인 것인가.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또는 ‘참 진’자, ‘같을 여’자 진여眞如나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냥 말로만 그쳐서는 우리의 근본 성품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인식하는 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상밖에는 못 봅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다 하는 상대유한적인 그런 상 밖에는 우리 중생은 인식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으로 해서는 우리의 본래 생명의 자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한 말로 말씀을 드리면 상을 거두어서 상을 여의고서 상을 초월한 영원의 자리로 돌아가는 즉 다시 말하면 본체로 돌아가는 그런 말씀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극락세계 하면 ‘우리가 사바세계에서 고생을 많이 하니까, 우리를 위안시키기 위해서 안락스러운 극락세계를 말씀했다.’ 이렇게만 쉽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 고해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설이다.’ 이렇게 말씀한 분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 불자님들께서도 극락세계하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생소하고 그 자리를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인가. 극락세계를 가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의심을 많이 품습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몇 만생을 우리가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꼭 도달해야 될 우리의 근원적인 영생의 고향입니다.

 

따라서 바꿔 말하면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여행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극락세계라 하는 영원의 세계를 가기 위해서 걸음걸음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극락세계에 꼭 가야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은 본래 극락세계에 가게 되어있단 말입니다. 본래 성품이 아까 말씀드린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불성으로 우리 마음의 이루어지고 우주의 일체만유가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부처의 성품인 그 생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불성과 하나가 되는 그런 자리가 아니고서는 우리 마음은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단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자님들 또는 우리 스님네 가운데서도 극락세계는 우리 인간을 달래기 위한 방편법문方便法門이지 어디에 극락세계가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분명히 존재하는 실상實相의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가상假相의 세계인 것이고 극락세계가 참다운 실상의 세계입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10리의 반이 5리 아니겠습니까. 무중霧中은 ‘안개 무’자, ‘가운데 중’자, 5리나 안개가 끼어 앞이 안보이면 답답하겠지요. 우리 범부 생활은 그와 똑 같습니다. 자기 과거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죽어서는 어디로 갈 것인지도 우리 범부는 모릅니다.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자가 돼야 비로소 뒤도 보고 앞도 훤히 내다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견성오도見性悟道라, 자기 본래의 성품을 봐야 비로소 아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견성오도는 공부하는 스님네나 필요하지 우리 불자들이 어떻게 견성오도를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견성오도를 못하면 육도윤회六道輪廻,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아수라阿修羅나 인간이나 또는 천상天上을 뱅뱅 돈단 말입니다. 과거의 위대한 철인들 가운데서 우리가 지은바 업보業報에 따라서 사람으로 또는 축생으로 또는 지옥으로 뱅뱅도는 윤회설을 말씀한 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참다운 도인들은 윤회설을 긍정하고 역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비록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을 우리가 숙명통宿命通으로 해서 보면 더러는 귀신도 되고 축생도 되고 또는 지옥도 갔단 말입니다. 우리 본래 성품은 불성佛性이건만 우리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함부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해서 결국 개가 됐다 소가 됐다 좀 잘 살아서 사람으로 태어났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금생今生에 나와서 그때그때 고생도 많이 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의 허물도 아닌 것이고 우리 스스로 지어서 그대로 받습니다. 우리 몸뚱이라든가 우리 음성 같은 이런 것도 과거세에 어떻게 살았던가 자기 업의 과보果報로 해서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내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념오백세一念五百世라, 한 생각을 하면 한 생각의 그 기운이 오백세 동안이나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남 미워하면 미워한 그 마음이 오백세 동안이나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남을 지나치게 너무나 좋아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니겠습니까. 영원한 고향이라 하는 극락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 인생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불멸의 극락세계가 분명히 실존적으로 존재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가상假相에 불과한 것이고 극락세계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영원의 고향이고 참다운 실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에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신비부사의 합니다. 참선 하는 것이나 주문을 외이는 것이나 염불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가기 위한 그런 법문입니다. 극락세계는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열려야 갑니다. 우리 마음이 깨달은 단계, 견성오도 하는 단계가 돼야 극락세계에 우리가 도달한단 말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한 말이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예수는 훌륭한 분이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닮지 않는단 말입니다. 욕심은 욕심대로 부리고 진심瞋心은 진심대로 부린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간디가 우리 불교인들 보면 그와 비슷한 말을 할 것입니다. “나는 불교를 좋아하지만 불교인은 안 좋아한다.”라고 불교인들이 부처님을 닮지 않았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닮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견성오도를 해야 되니까 말입니다. 쉽진 않겠지요. 그러나 견성오도를 하지 않고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못합니다. 우리 마음의 불안을 다 불식하고서 정말로 행복스러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오랜 나그네 길인데 영원히 안락스러운 극락세계에 가지 못하면 또 윤회 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윤회가 싫지만 그것도 무서운 하나의 진리입니다. 자기가 닦은 대로 뱅뱅 돈단 말입니다.

 

우리 행동 하나, 생각 하나, 우리 말 하나가 우리 의식에 남아 있다가 그것이 업보가 돼서 우리 생을 결정합니다. 부처님 같으신 분은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백겁百劫이라 하는 무량세월 동안 자기 몸뚱이를 범한테 바치기도 하고 또는 부처님 법을 듣기 위해서 몇 번이나 목숨을 바치기도 해 무수한 난행고행을 함으로 해서 부처님의 삼십이상三十二相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라, 그런 존귀한 상이 됐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기분 사나워 찌푸릴 때에 거울 한 번 보십시오. 금쪽 같이 아까운 자기 몸뚱이지만 찌푸릴 때 자기 얼굴이 얼마나 추악한가 말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 공자, 우리나라의 원효대사, 의상대사, 대각국사, 보조국사, 서산대사와 같이 훌륭한 스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스승들이 쉽게 견성오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무수 생 동안에 닦고 금생에 사람 몸 받아서도 부처님께서 6년 고행을 하셨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야 그냥 견성오도라 하는 우리 인생의 참 면목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어느 때 가도 가야 할 길입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 제일 쉬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한테 가는 길만이 우리 마음의 불안을 씻어 버릴 수 있고 동시에 부처한테 가는 길만이 사람 사람끼리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길입니다.

 

또 진리가 둘이 아닌지라 부처가 되는 길만이, 다른 종교하고도 참다운 화해가 되는 것이고 또 자기 자녀들한테 부처님한테로 가는 길에 대한 모범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때는 부모한테 별 다른 효성은 못했다 하더라도 부모님을 위해서 부처님한테로 가는 길을 역설하고 권고했다면 그 효성이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영생으로 가는 길을 지도했으니까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쉽단 말입니다.

 

부처님 공부를 하는데 가장 방해가 무엇인가 하면 망아妄我라, ‘망령될 망’자, ‘나 아’자 참다운 자기를 모르고서 자기를 망령되게 잘못 안단 말입니다. 이 몸뚱이는 대체로 무엇인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 같은 것들이 인연 따라서 결합된 것이 우리 몸뚱이 아닙니까. 우리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은 우리가 또 감수하고 상상하고 의욕하고 또 분멸 시비하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됐단 말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마음이나 몸뚱이나 하나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불성 아님이 없습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부처님 성품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나타난 내 존재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석적으로 보면 산소나 수소나 탄소 같은 각 원소가 인연 따라 합해진 것이 내 몸뚱이고 내 마음은 금생今生에 태어나서 느끼고 상상하고 또 의욕하고 분별한 것이 자기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가 마음과 몸뚱이 같은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망령될 망’자, ‘나 아’자 망아妄我란 말입니다. 망령된 나에 얽혀있는 한에는 도저히 풀려나올 수 없습니다. 내 몸뚱이와 마음이 결합돼 있는 인간 존재의 한계 내에서는 우리는 참다운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과 몸뚱이 이것은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몸뚱이라든가 우리 마음 같은 것은 우리가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지 정말로 과학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고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없단 말입니다. 김 아무개, 박 아무개의 ‘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안목에서는 분명 존재한다고 믿겠지요.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나’라는 것이 결국은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바람기운, 불기운, 또는 물 기운, 흙 기운 각 원소 기운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합해진 것이 이 몸인 것이고 우리 마음도 역시 금생에 우리가 태어나서 느끼고 또는 분별하고 남 미워하고 좋아하고 모두 다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사실은 우리 중생들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무아無我의 도리를 모르면 불교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눈으로 봐서는 명명백백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백백히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법공이라, 여러분들『반야심경』에서 수 천 번 많이 하셨지요. 제법공이란 말은 우리 눈에 보이는 상은 모두가 비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제법공을 잘 모르고 불교를 알 수 없습니다. 불교가 심오한 가르침이고 방대한 가르침이지만 사실『반야심경』한 편만 바로 알면 다 알 수 있습니다.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상에 걸려서 우리가 바른 길로 못 가는데 그런 ‘모든 상이 본래로 허망하다.’ 이런 것만 알아 버리면 불교의 핵심을 깨달아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우리 마음이 본래로 비었다는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하거나 화두공안을 의심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생각 생각에 연결돼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힘이 생긴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백일 동안 기도를 모시지 않습니까. 문둥병 환자도 기도 모시면 낫습니다. 병균도 역시 우리가 부처님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佛性으로 됐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제한된 눈이나 현대 현미경 가지고 보니까 문둥병의 세균이 따로 있는 것이지 깨달은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불성으로 됐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외우는 것도 그냥 입으로만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성 자리를 인격적으로 표현할 때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런 도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불법佛法을 생각할 때에 인격적으로 생각해야지 인격을 배제해 버리면 우리한테 큰 도움이 못됩니다.

 

불성 이것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제한된 생명이 아니라 우주에 가득한 생명입니다. 불성이 어떻게 진동하는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그것 따라서 각 원소가 된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현상적으로 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로 우주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있다 하더라도 근본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진여불성뿐입니다. 그 진여불성을 순간도 놓치지 않고서 공부하기 위해서 화두공안이 있고 또는 염불이 있습니다.

 

자성이란 말은 불성이란 말하고 똑 같습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자 불성이나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 자성을 깨달으면 이른바 견성이지요. 견성하면 그때는 도를 깨닫는단 말입니다. 우리의 영생불멸한 고향자리에 들어가야 비로소 영원히 행복스럽습니다. 극락세계는 우리 마음의 고향인데 우리가 극락세계에 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흠모심과 그리움이 없으면 빨리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마음이 굉장히 소중한 힘이 됩니다.

 

『법화경』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어요. ‘심회연모갈앙어불心懷戀慕渴仰於佛’이라, 마음으로 극락세계를 연모하고 갈앙이라, 목마를 때 우리가 물을 찾듯이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즉종선근卽種善根이라, 우리 선근善根이 더 깊어진 동시에 빨리 간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숭배의 대상이 너무 많으니까 자칫하면 다신교多神敎가 아닌가 오해받기도 합니다. 그 하나의 자리를 놓쳐버리면 불교는 다신교로 타락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처님의 명호名號가 있다 하더라도 본래는 모두가 다 하나의 자리란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다시 바꿔 말하면 법신불法身佛이라 하는 하나의 자리입니다. 하나의 자리에 왜 그와 같이 많은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의심을 품을 수 있겠지요.

 

그것은 하나의 자리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자비도 있고 지혜도 있고 갖은 공덕이 다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을 다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쪽으로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문수보살’, 이와 같이 이름이 붙는 것이지 김가 박가 모양으로 뿔뿔이 있지 않단 말입니다. 만약 뿔뿔이 있다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불교는 다신교가 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란 말입니다. 법신法身이나 법성法性이나 진여眞如나 실상實相이나 중도中道나 모두가 같은 뜻입니다. 근기가 다른 만 중생을 제도하고자 해서 이렇게 저렇게 표현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주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신묘한 순수에너지 순수생명으로 해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닷물에 비유하면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바다는 불성에 해당하고 바람 따라서 파도가 친다 하더라도 물의 성품은 조금도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주에는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는 것인데 진여불성 위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작은 파도 또는 큰 거품, 작은 거품 같은 것이 제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똑같은 다 물입니다. 사람이 되나 개가 되나 또는 지옥중생이 되나 다 모두가 불성으로 돼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람은 불성으로 보고 지옥이나 축생 존재 같은 것은 불성으로 볼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적인 인식 범위에서 말하는 것이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다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어느 누구나가 다 구제합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구제를 받습니다. 영원한 지옥 가운데서 헤매지가 않습니다.

 

모든 경전 가운데서 ‘나무아미타불’에 관한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제 아무리 부처님 이름이 많이 나열돼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근본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무’란 귀의한다, 우리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바쳐서 귀의한다는 뜻이고 ‘아미타불’이란 것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다 겸해 있단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인 법신 말입니다. 또는 근본에서 이루어진 현상계 모두와 그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을 다 포함한 포괄적인 이름이 이른바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불경 가운데 ‘나무아미타불’ 법문을 제일 많이 했어요. 법신, 보신, 화신을 포괄한 통합적인 명호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 내서 크게 할 때는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가 돼서 음률이 잘 들어맞습니다. 그러고 참선을 주로 해서 묵묵히 참구 할 때는 ‘나무’를 빼버리고서 간단하게 ‘아미타불’만 해도 좋습니다.

 

신라 때 원효스님은 각 마을을 다니면서 목탁 대신에 두레박을 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창도하신 분 아닙니까. 의상대사도 마찬가지고 나옹스님이나 보조스님도 염불하셨고 서산대사는『선가귀감』에서 심즉염불경계心則念佛境界라, 마음은 부처님 경계에다 두고서 억지불망億持不忘이라, 간절히 생각하고 그런 우리 마음을 부처님 경계에다 두는 것을 잊지 말고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라, 우리 입으로는 부처님 이름, ‘나무아미타불’을 다 부르면 팔십억겁八十億劫 생사대겁生死大劫이라, 팔십 억겁 동안에 우리가 지은 죄를 다 녹이고서 그와 동시에 무량공덕을 성취한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다른 불, 보살의 명호를 부르신 분들은 억지로 제가 그만 두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내내야 그 자리가 그 자리니까 상관없으나 그래도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역설하ㅅ셨고 부르기도 좋고 또는 개념상 의미도 큰 ‘아미타불’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문수보살’이 다 그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또 극락세계의 교주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우리 마음의 주인공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자리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습니다.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신 자리는 우주의 본바탕으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외우시기 바랍니다. 소리 내서 할 때는 ‘나무’를 보태서 ‘나무아미타불’ 하시면 하기가 쉽고 또 소리 없이 하실 때는 ‘아미타불’만 하시면 됩니다. ‘아미타불’은 내 마음의 근본생명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생명인 것이고 우리가 종당에 돌아갈 고향인 극락세계의 교주란 말입니다.

 

십념왕생十念往生이라, 우리가 업장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10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란 것이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정말로 진실한 마음으로 부처님명호를 외우면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비약이 됩니다. 초월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과 부처는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법신 부처님, 불성과 똑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려면 명예도 필요하고 재물도 있어야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자세는 항시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라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러서는 부처님 가르침만 따르는 쪽으로 우리 생명을 회향해야 한단 말입니다.

 

염불이나 화두를 오랫동안 한 사람들은 저절로 염불이 되어 지고 화두가 들려진단 말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익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액운을 이긴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은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만능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입정하실 때에 외웠던 ‘보리방편문’도 그런 도리입니다. 우주의 순수 생명자리인 법신불法身佛, 또는 법신불에 들어있는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이나 만 공덕 자리가 보신報身인 것이고 그 자리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현상계가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법신, 보신, 화신을 합한 것이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불경에 가장 말씀을 많이 했고 부르기도 좋고 최상의 개념입니다. 차를 운전할 때라든가 어느 때나 중단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돼야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염불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고 또는 찰나에 교통사고를 당할 것인데 항시 염불하고 있으면 신장들이 자기한테서 못 떠난단 말입니다.

 

『몽수경夢授經』에 천라신天羅神 지라신地羅神이라, 우리가 염불하면 공간에 있는 신이나 또는 땅에 있는 신들이 우리를 못 떠난단 말입니다. 염불 소리를 듣고서 우리를 지킨단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정말로 신비에 가득 차 있습니다.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생활은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아미타불’이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인공인 동시에 너의 주인공도 되는 것이고 또는 바로 우주의 주인공이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극락세계의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염불 많이 하고 극락세계에 갈 때는 성중내영성중내영이라, ‘아미타불’과 보살들이 우리를 마중 나온단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신비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안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 생각에 염불을 많이 하셔서 금생에는 행복하시고 금생인연이 다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는 바로 광명세계입니다. 빛으로 빛나는 세계란 말입니다. 현대물리학도 미세한 단계에서는 모두가 광명이란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 차 있어요. 우리 인간이 망령된 ‘나’라 하는 것에 얽매여 있어서 안 보일뿐입니다. 우주는 참 광명의 세계인데 우리 중생들이 자기라 하는 망령된 망아妄我 때문에 자기 몸뚱이에 집착하고 그런 망령된 생각 때문에 본래 갖추고 있는 극락세계를 우리가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끊임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니까 우리의 본래 주인공을 체험을 못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일념이 돼서 정말로 통일이 되면 그때는 삼매三昧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삼매란 말도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란 것은 산란스런 우리 마음을 오로지 하나의 경계에 머무는 것이 삼매란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체험합니다. 삼매에 못 들어가면 말로는 제법 아는 소리를 하지만 체험을 못한단 말입니다. 체험하기 위해서는 꼭 삼매에 들어야하고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는 공부,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주문이면 주문을 오로지 일념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들어야 우리의 본래 불성자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정말로 원래 갖추고 있는 행복을 스스로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2001년 2월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