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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6. 안거법어

성륜사 하안거 결제법어

   성륜사 하안거 결제법어

 

 

선원에서 안거 정진 하실 우리 대덕스님들 또는 재가 선원에서 정진을 같이 하시는 우리 재가 불자님들 또 오늘 돌아가셔서 자기 집안에서 참선 공부를 하실 우리 불자님들 만나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이 참선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는 우리가 세 가지를 주의해야 됩니다. 한 가지는 암증선暗證禪이라, ‘어두울 암’자, ‘증명할 증’자 암증선이라, 교학에 의지하지 않고서 자기 주관대로 한다든가 또는 그러한 교학을 배울 기회가 없어서 그런 교학에 의지하지 못 하고서 하는 그런 참선이 암증선입니다. 암증선을 하는 경우는 자칫하면 증상만增上慢이라, 증상만이란 것은 자기 정도 이상으로 아만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우리가 무슨 삼매에 든다 하더라도 삼매에도 깊은 삼매가 있고 얕은 삼매가 있는 것인데, 깊은 삼매에 미처 못 들어서 경계에 부딪히면 어느 정도 쾌적하면 ‘내 공부가 상당히 됐구나.’ 이러한 것이 이른바 증상만입니다.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는 그런 것이라든가 또는 자신의 경계가 좋은 경계가 아닌데도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이 증상만입니다. ‘더할 증’자, ‘윗 상’자, ‘거만할 만’자를 씁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암증선, 덮어 놓고서 하는 그런 선을 할 때는 증상만이 되기가 쉬운 것이고 또는 교학을 좀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 체계는 세웠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이른바 생사해탈이라 하는 참선의 구경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는 것인데 이른바 해오解悟라, 해오란 것은 이론적으로 해석해서 아는 것이 해오입니다. ‘풀 해’자, ‘깨달을 오’자 그래서 그 참선이라는 것은 실참실구實參實究라, 우리가 스스로 실천해서 닦아서 우리 업장業障을 녹이고서 깨달아야 할 것인데 이론적으로만 알고서 깊은 삼매에 들어서 하는 공부가 아니고서 그냥 문자나 말로만 아는 그런 식의 공부가 이른바 문자선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야호선野狐禪이라, 야호선이란 것은 ‘들 야’자, ‘여우 호’자로 꾀가 많고 또는 삿된 지혜가 많은 여우란 놈이 그와 같이 꾀를 부리고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못 깨닫고서 깨달았다고 한다든가, 재주나 꾀로 교묘한 말로 해서 깨달은 척하는 이런 것이 이른바 야호선입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분들은 세 가지 그런 경우를 다 피해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암증선暗證禪이라 이른바 암중모색하는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차원 높은, 바로 불조佛祖가 말씀하신 참선인 것인가. 이런 것을 모르고 닦는 암증선, 또는 문자로만 해석해서 체계를 세워 가지고서 공부가 다 되었다 하는 이른바 문자선, 또는 못 깨닫고 깨달았다고 한다든가, 자기가 어느 수승한 경계를 증득하지 못하였는데도 나는 수승한 공부를 증득했다고 하는 이른바 증상만을 하는 그런 야호선을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참선에 있어서는 우리가 관례가 있는 것인데 구참 스님들께서는 다 아시겠지만 우리 재가 불자님들은 잘 모를 성 싶으니까 제가 간단히 얘기하겠습니다. 지금 명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까. 서구식의 명상도 있고 또는 어느 위대한 철인도 명상을 배제하고서 위대한 철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꼭 그 나름대로 방법은 다르다 하더라도 명상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우리의 앎이라는 것이 앎 자체로 해서는 한 체계는 선다 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우리 업장業障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업장은 그 무수 생 동안에 과거 전생이나 또는 금생今生에나 아주 습관성이 되어서 상당히 집요한 것인데 그 앎 자체만으로 해서는 업장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업장을 녹이려면 깊은 삼매三昧,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조주스님은 임제스님이나 같은 시대의 분입니다. 임제스님하고 조주스님은 상당히 성격도 차이가 있고 교화하는 면에서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는 분입니다. 임제스님은 아주 발랄하고 그야말로 활발하게 패기가 넘쳐흐르는 분이고 또 조주스님은 아주 겸손한 분입니다. 조주스님은 겸손하고 자비심이 많은 분인데 남전 보원선사한테 법을 이어받은 분입니다. 남전 보원선사를 모시고 원주도 살고 또는 유나維那도 지내고 말입니다. 또는 절 주지도 맡고 해가지고서 60세까지는 아주 성실하게 스님을 시봉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남전 보원선사가 열반 들으시니까 ‘인제는 나도 만행萬行도 하고 행각승으로 해서 재방의 선지식도 방문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60세가 되어서 남전스님이 돌아가시니까 비로소 만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80세까지는 제방의 선지식들을 방문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해서 그 80세에야 비로소 조그마한 절을 하나 얻어가지고 120세에 돌아가셨으니까 40년 동안 교화를 하신 셈이지요. 그렇게 지낸 분인데 그 분은 건성으로 않고서 아주 세밀하고 면밀하게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상당에 올라가서 하신 법문이 무엇인가 하면 일념불생一念不生이라, 일념불생이란 말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특히 참선 공부는 분별시비를 끊어야 합니다. 아는 것이나 모르는 것이나 그런 것은 일반세간적인 의미는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이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좋은 것이나 궂은 것이나 모든 분별시비를 다 끊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중생이 아는 것은 모두가 다 아견我見이라 하는 ‘나 아’자, ‘볼 견’자 거기에 근거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견이 있으면 이것은 범부 중생이고 아견이 없으면 이것은 깨달은 성자고 또는 그야말로 참 부처의 경계에 가까이 있는 분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근데 아견이란 우리가 사람치고 보통 ‘나’라는 관념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다 ‘나’라는 관념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나’라는 이것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없을 무’자, ‘나 아’자 무아無我가 참말로 자기를 옳게 보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바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불교와 외도外道와의 가장 근원적인 차이도 거기에 있습니다. 다른 외도는 아견을 없앤다든가 그런 것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교는 처음부터 그 나라는 견해, 나라는 존재 이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가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은 상식적이 아닙니다. 상식적이 아니라 본래대로 있는 사실 그대로 있는 부처님 가르침을 말씀하셔서 사실 그대로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이 사실인 것이고 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다만 인연 따라서 잠시간 우리 중생의 착각에서 내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은 것이 그 순간순간 변화무상해서 마지않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변화무상하다는 것은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공간 내에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항시 기본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명심하셔서 잘 관찰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시간도 절대적인 시간이 없는 것이고 공간도 절대적인 공간이 없습니다. 물질도 절대 물질이 없습니다.

 

17세기에 뉴튼이라든가 또는 데카르트 같은 분들이 물질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고 공간도 시간도 실제로 있다고 생각을 해서 주장을 하니까 우리 중생들은 우선 우리 지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범위에서 우리가 판단하니까 ‘그런 것이 옳구나.’ 합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그런 것이 허망한 것이고 부처님 말씀에도 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고 물질도 사실 우리가 측정할 수 없이 허망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도 다 무상無常하고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깊이 명심들 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시간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변화무상한 것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우리가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우리가 사실로 본단 말입니다. 너무 또 깊이 말씀을 드리면 공연히 또 분별시비가 되니까 제가 줄여서 말씀을 드립니다.

 

참선參禪이란 것이 모두가 다 제법공諸法空이라, 일체 존재가 다 본래로 없다는 그런 자리에서 출발해야 참선이 됩니다. ‘나’라는 주관도 없고 또는 ‘너’라는 객관도 없고 ‘나’라는 견해는 이것은 ‘나 아我’자, ‘볼 견’자 아견我見이 아닙니까. 또는 대상적으로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객관의 이른바 하나의 불교에서 말하는 만법萬法이란 말입니다. 아견과 그런 법견法見,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나라는 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집인 것이고 또는 대상적으로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것이 법집입니다. 아집과 법집이 없다는 소식을 우리가 증명은 못해도 그 자리를 알고 들어가야 그래야 이른바 참선이란 말입니다.

 

일반 명상은 참선이 못 됩니다. 보통 여러 가지 명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 유위공덕有爲空德이라, 가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이득이 있다. 몸이 건강해진다. 머리가 좋아진다.’ 불법도 모르면서 이런 정도로 유위공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외도外道의 선입니다. 아니 선이라고 감히 말 붙이지도 못합니다. 외도의 명상이란 말입니다.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서 인과因果는 좀 알지만 아직은 그 유위공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닦는 그런 선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범부선凡夫禪입니다. 또는 소승선小乘禪이라, 이것은 아공我空을 알고 나라는 것이 원래 없는 것이라는 집착을 떠나서 닦는 선이 이른바 소승선입니다.

 

그 다음은 대승선大乘禪이라 한 차원 더 올라가서 나만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객관적으로 보이는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다.’ 아집, 법집을 떠나서 닦는 선이 이른바 대승선입니다.

 

그 다음에 진실로 선이라고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인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 본래면목인, 내 마음의 본래자리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네 마음과 불심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참다운 부처는 불교전문 술어로 하면 법신 부처 아닙니까. 법신 부처님은 석가모니가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부처가 이른바 법신 부처란 말입니다. 그 법신 부처하고 내 마음하고 절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 법신 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공덕이 내 마음 가운데도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석가모니, 공자, 노자, 예수와 같은 그런 천재적인 성품이라든가 또는 성자가 되어서 기적도 부리고 신통도 하고 불교용어로 말하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이지요, 그런 모든 가능성이 내 마음에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내가 원래 부처인 것을 내 마음과 법신 부처와 똑같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여기 백여 명 우리 불자님들이 계시지만 다 모두가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 사람 마음, 대학교 나온 사람, 고등학교 나온 사람, 또 박사학위 가지고 있는 분, 이 분들 저 분들의 마음이 지금 뿔뿔이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습니까. 마음은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을 우리가 국한시켜서 얘기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2500년 전의 부처님 마음이나 또는 2000년 전의 예수님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똑같이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있어야 짧다 길다 또는 크다 작다 비교할 것인데 모양이 없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4조 도신 스님 법문을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내 마음도 모양이 없고 그대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또는 석가모니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또는 제방 선지식들 마음도 모양이 없거니 모양이 있고 우리가 측정할 수가 있어야 잴 수가 있을 텐데 모양이 없는 것은 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실은 모든 존재가 마음자리에서는 다 하나입니다.

 

그러면 물질은 무엇인가. 아까도 얘기한 바와 같이 물질이란 이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물질같이 보이는 것이지 그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제법諸法이 공空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 모두가 다 제법이 공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사실은 마음 아님이 없습니다.

 

천지우주는 물질이란 것은 티끌 하나도 없이 모두가 사실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런 것이지 그 마음은 무엇인가. 그 마음이 바로 두 마음이 아닌 옛날 위대한 성자 마음이나 오늘날 우리 마음이나 또는 산 마음이나 물 마음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갈라서 보고 성인들은 하나의 마음자리를 깨달아서 우리 번뇌업장을 다 녹여버리면 그때는 마음만 남는단 말입니다. 순수한 마음만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깊이 명상해서 모든 찌꺼기라든가 우리 잘못 보는 착각을 다 없애버리면 오직 천지우주가 하나의 마음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입니다. 진여란 것이 여기에 있고 저기에 없고 둘이 있고 셋이 있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란 것은 오직 하나의 도리입니다. 진리는 이치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생명이란 뜻을 조금 더 강조하기 위해서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할 때는 바른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본래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부처다.’ 이렇게 알고서 그 자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가 명상을 해야 참선이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최상승 참선이라, 최상승 참선이 되고 또는 여래선이라 조사선이라 또는 무심선이라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자성불성自性佛性이란 말이 백 군데가 넘어요. ‘스스로 자’자, ‘성품 성性’자 자성自性이나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근원적인 그 자리, 근본적인 본체자리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둔단 말입니다. 상을 떠나면 그때는 본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이 현상만 가지고서 내가 있고 좋다 궂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육조단경에』서도 리상즉선離相則禪이라, 상을 떠나면 ‘떠날 리’자, ‘형상 상’자 상을 떠나면 선인 것이고 상을 못 떠나면 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대덕스님들 또 우리 불자님들 상이란 것이 사실 존재한다고 하면 우리가 상을 떠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상은 존재 않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을 우리가 전도몽상顚倒夢想해서 뒤바꿔 보고 착각으로 있다고 보는 것이지 사실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천 번 만 번 ‘있지 않다’고 우리가 되뇌면서 있지도 않은 그 자리 제법공諸法空자리, 오온개공五蘊皆空 자리를 우리가 참말로 증명을 해야 인생고도 떠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 발버둥 쳐도 모두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시비 분별하는 차원에서는 못 떠납니다. 사실대로 봐야 인생고를 떠날 수 있는데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의 생명이 바로 ‘지장보살’이고 ‘문수보살’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아미타불’입니다.

 

부처님 명호도 많지만 이른바 총대명사는 ‘아미타불’아닙니까. 사실 그래서 일반 분들은 가만히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명상하기가 쉽지가 않겠지요. 따라서 염불삼매念佛三昧라 부처님 이름을 자꾸만 외우다보면 그때는 다른 망상이 줄어지고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와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우주는 바로 보면 본체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진여불성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이른바 참다운 화두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고서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하나의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 자리를 참구해야 참다운 화두 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이번 하안거 때는 꼭 만능을 갖춘 본래 부처인 그 자리를 온전히 깨닫도록 하셔야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이란 것이 잘나고 못나고 많이 배우고 덜 배우고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공덕은 절대로 훼손이 안됐단 말입니다. 천재 같은 아인슈타인 마음 그대로, 석가모니 마음 그대로, 예수의 마음 그대로 우리한테 지금 다 갖추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백퍼센트 바로 믿고 우리 본래면목자리, 우리 본래 고향자리에 대한 간절한 구도심만 있다고 생각할 때는 순식간에 우리 마음은 비약해서 극락도 갈 수가 있고 또 성자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2년 5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