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6. 안거법어

* 첫째모음 태안사 하안거 결제법어

 

 

 

태안사 하안거 결제법어

 

 

 

고향을 떠난 나그네가 오랫동안 헤매다가 귀향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가지 않고서는 고향 소식을 상세하게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

 

이 참선법문參禪法門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마음의 고향자리. 마음의 본체本體자리를 분명히 밝히고서 증명이 돼야 할 것인데, 사실 저는 그와 같이 마음의 본체, 마음의 체성體性을 낱낱이 밝히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참선법문, 즉 마음의 본체를 들어서 본분자성自性을 밝히는 법문을 할 때는 마치 양이 사자의 가죽을 씀과 같이 굉장히 거북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연 따라서 부득이하게 참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저의 소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명안납자明眼衲子, 눈 밝은 본체의 소식을 분명히 아는 분한테는 제가 하는 말씀이 군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초심만학初心萬學이라, 참선 길에 처음 들고 또는 나이가 많아서 늦게 든 그런 분들한테는 노파심으로 몇 말씀을 드리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문관無門關 48칙 제1관에 조조무자趙州無字가 있는 것은 아는 분들은 다 아십니다.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한테 가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단 말입니다. 묻는 그 사람은 개와 불성佛性을 둘로 봤단 말입니다. ‘불성이 어디가 따로 있어가지고 개한테 집어넣는다’라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차별심으로 해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겠지요. 본체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런 서투른 물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께서는 ‘무’라,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경전이나 각 성자의 말씀에 ‘준동함령蠢動含靈이,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거니 어째서 개가 불성이 없습니까?’ 이렇게 또 반문할 수밖에는 없겠지요. 조주스님께서 무라 하는 것은, 불성이라 하는 것은 어떤 제한이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한테 있고 너한테 없고, 사람한테는 있고 개한테는 없고, 또는 개한테는 있지만 식물한테는 없고, 또는 삼라만상 가운데는 있고 또는 공기 가운데는 없고 그러한 것은 불성이 아닙니다.

 

당체전시當體全是라, 당체當體가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개는 개의 당체, 소는 소의 당체, 사람이면 사람의 당체, 불성이 없다면 사람도 있을 수가 없고 동물도 있을 수가 없고 식물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있는 것 없는 것, 유정有情 무정無情 모두가 다 불성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개만이 불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원래 조실祖室이라는 것은, 조실이나 조사祖師의 ‘조祖’자를 붙이는 것은 어떤 때 붙이는가 하면 달마達磨대사의 『관심론觀心論』에도 명백히 했습니다만 일체만유一體萬有가 오직 불심佛心뿐이라는, 불심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는 그러한 불심을 극명克明하게 사무치게 밝혀서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행과 해가 상응되어서 그때는 조금도 간격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야만이 ‘조’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이 조실이고 조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심을 극명克明하지 못하고 행해行解가 상응相應이 못 되면, 그때는 ‘조’자라는 말은 못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 같은 사람이 이 자리에 오른 것이 마치 양이 사자 가죽을 쓴 것 같이 굉장히 거북합니다. 그러나 체라는 것은, 불심의 체라는 것은 불심의 용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불성을 밝혀서 행해상응자리에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법상에 올라앉아서 그냥 ‘텅텅’ 주장자를 치고 또는 할을 하고, 이것도 역시 불심을 극명克明하는 자리가 못 되면 그때는 하나의 호할난방胡割亂棒이라, ‘되 호’자, ‘꾸짖을 할’자 말입니다. ‘어지러울 난’자, ‘방망이 방 棒’자, ‘방망이 봉棒’자를 ‘방’이라고 중국속음으로 합니다만 불심을 깨닫지 못하면 그때는 호할난방에 불과합니다. 천지우주가 진동할 만치 할을 하고 또는 삼천대천세계가 떨 만치 방망이로 때린다 하더라도 불심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호할난방이라, 그것은 하나의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인연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씀은 역시 그러한, 채 알지도 못하는 체에 대한 말씀보다도 거기에 올라가는 방법계제方法階梯, 그런 문제에 관해서 조사어록祖師語錄에서나 부처님말씀을 따라서, 고구정녕苦口丁寧한 그런 말씀을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얘기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본래 자성自性 자리에 가야 할 것인가. 중국의 참선법은 돈오頓悟를 주로 말합니다. 인도의 참선법은 점수漸修를 주로 말합니다. 인도의 참선법은, 가령 욕심이 많으면 그때는 부정관不正觀이란 말입니다. 욕심이 지독히 많은 사람이 고도한 행법行法을 가지고 앉으면 욕심 때문에 자꾸만 기가 올라갑니다. 또 진심嗔心이 많은 사람이 비약적으로 고도한 행법을 취하면 그도 역시 기가 올라가서 공부가 잘 안됩니다. 진심 많은 사람한테는 진심의 불을 끄는 자비관慈悲觀을 해야 합니다. 또는 마음이 너무나 산란스러워서 거북한 사람은 그때는 수식관數息觀이라, 즉 단전주丹田住나 혹은 호흡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또는 지혜롭지 못해 꼭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와 같이 자타自他를 구분하고, 일체만유가 연기법緣起法인지를 모르는 사람, 일체존재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존재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한테 대해서는 그때는 연기관緣起觀이라,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가르치고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도 말해서 그와 같이 연기법을 가르침으로 해서, 인연생因緣生인지라 그때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인과 연과 합해서, 그것이 전부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중생이 잘못 봐서 내가 있다고 한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생겨났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보면 그때는 무상이고, 시간적으로 보면 그때는 텅빈 공이고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인연법을 몰라서 아에 집착하는 그런 치심痴心, 그런 사람들한테는 인연관因緣觀을 제시해서 마음을 열리게 한단 말입니다.

 

또는 갈앙중생염불관渴仰衆生念佛觀이라, 업장 많아서 마음이 자꾸만 꺼벅꺼벅하니 막혀서 잘 안 트이는 그런 사람한테는 부처님을 간절히 흠모추구하고 갈앙하는 염불이 좋습니다. 법당 가서 부처님한테 참배하는 것도 그냥 ‘그건 상이다’ 이와 같이 비방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황벽黃蘗스님 같은 그런 대선사도 어떻게나 절을 많이 했는지 이마에 혹이 났단 말입니다. 원래 그런 분들은 그런 상이 없습니다. 부처라는 상이 없고 나와 너의 상이 없습니다. 다만 상이 없는 자리에서 절만 할 뿐이란 말입니다. 습기習氣를 녹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갈앙중생염불관이라, 업장이 많은 사람들은 그 갈앙심, 우리가 본래 부처라고 할망정 역시 우리는 부처의 공덕을 다 발휘를 못합니다. 따라서 부처님한테 간절한 갈앙심 간절한 흠모심, 이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같은 경전은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한 생각에 극락세계에 바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내내야 극락이라 하는 것은 깨달은 그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한 생각 사무치면 그때는 바로 우리 본체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갈앙심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냥 이치로만 ‘내가 원래 부처니까 내가 이렇게 구한다. 무엇무엇하면 그때는 부처가 되겠지.’라고 갈앙심을 배제하면 우리한테 있는 소중한 감성을 우리가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심리에는 감성도 지성도 의지도 있습니다. 지성적으로만 구하는 행법, 의지로만 구하는 행법 또는 감성으로만 구하는 행법, 그런데 우리는 역시 지정의知情意라, 지와 정과 의의 그런 요소가 우리 심리에 원래 있어서, 그런 감성도 지성도 의지도 한 번에 다 모아서 조화적으로 구하면 그때는 공부가 더 빠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사어록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선정禪定과 지혜가 아울러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현대심리학적으로 말하면 그때는 지와 정과 의가, 그와 같이 우리 심리의 3요소가 한 번에 조화를 취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인도의 행법은 그런저런 법으로 해서, 그와 같이 탐심이 많으면 부정관不正觀이라, 내 몸이 더러운 것이고, 내 몸은 탐욕물이 모여서 되어있고, 또는 어머니 뱃속에서도 언제나 내 몸은 따지고 보면 사실은 청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하일색이나 또는 천하미남이나 어떤 사람이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다 더러운 것뿐입니다. 침, 오줌, 똥, 고름 이런 것이 모여서 내 몸이 되었단 말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의 부모님의 태중, 또는 막 태어나서의 그 존재, 어떠한 것이나 우리가 따지고 보면 볼수록 내 몸은 청정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보통은 자기 몸에 취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몸에 취합니다. 그것 때문에 바로 못 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부정관이라, 더러운 것을 분명히 본다고 하면 그때는 우리가 별로 탐욕이나 집착을 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세존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불하실 때에 마왕이 부처님의 마음을 요동시키고자 해서 굉장히 요염한 천녀를 파견했단 말입니다. 허나 부처님께서는 실상實相을 보신지라, 겉으로 예쁘고 밉고 그런 것에는 부처님 마음이 끌리기 만무하단 말입니다. 이미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서 곧 깨닫는 자리에 가신 그분이 상에 끄달리기가 만무하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당시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그 사람의 그릇 따라서 그때그때 탐심이 많으면 그때는 부정관, 또는 성내는 진심嗔心이 많으면 그때는 자비관慈悲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어리석으면 그때는 인연관因緣觀 말입니다. 또는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그때는 호흡을 해서 산란을 다스리는 수식관數息觀, 단전주丹田住를 한단 말입니다. 또 업장이 많으면 그때는 부처님을 흠모해서, 흠모하는 그것이 굉장히 우리 마음을 정화시킵니다. 마치 타향살이 하다가 자기 고향을 흠모하는 향수가 우리 마음을 맑게 하듯이 내내야 우리 고향은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부처님을 흠모하는 그 마음이 굉장히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장중생多障衆生, ‘많을 다’자, ‘장애 장’자 말입니다. 업장이 많은 중생은 염불관念佛觀이라, 부처님을 흠모하는 그런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합해서 그때는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 우리 마음의 번뇌, 때 묻은 그런 마음을 다스리는 다섯 가지 방법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다음에는 고 ‧ 공 · 무상無常 ‧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인생은 고요 무상이요 무아라는, 제법공諸法空의 반야사상을 위주로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올라가서 그때는 참 실상관實相觀, 실상實相을 관조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가 지금으로 부터서 벌써 2500여년 이상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대체로 문명시대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나오셨다 하더라도 인도의 당시 민중들의 3분의 2이상이 석가모니의 출현을 몰랐단 말입니다. 석가모니께서 출현하셔서 80년간 계셨다 하더라도 역시 그 온 인도 지방이 석가모니가 나오셨다는 소식을 3분의 2쯤은 못 들었단 말입니다. 지금이야 지구촌 정보화시대이니까 당장에 들을 수가 있고 알겠습니다만, 이런 미개한 때니까 고도한 행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으로 불법佛法이 옮겨와서는 그때는 차근차근 보다 더 발전된, 이른바 일초직입一超直入이라, 한 번에 훌쩍 뛰어서 부처의 경계에 드는 그런 법을 차근차근 생각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중국에 들어와서는 돈오법문頓悟法門이라, 문리文理를 떠난 그 법문, ‘돈오법문이 아니면 그때는 선이 아니다.’ 이정도로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지금은 선을 말할 때는 선은 돈오頓悟가 돼야 비로소 선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돈오가 안 되면, 돈오라는 말이 거기에 계제階가 안되면 그때는 선이란 말도 못 붙이는 것입니다.

 

참선에 관해서 생소하신 분들은 제가 드리는 말씀에 거부반응을 하실 것입니다만 우리 잠재의식 가운데는 바로 불성佛性이 함장 되어있습니다. 일체공덕을 갖춘, 지혜공덕 자비공덕 그런 공덕을 구족원만이라, 원만히 갖춘 불성공덕이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나쁜 버릇 때문에 우리 마음의 본체가 가리어서 그러한 무량공덕 무한의 지혜를 우리가 발동 못 할뿐이지 우리 마음의 자성自性 본체는 바로 무한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좀 못 알아들으신다 하더라도 그냥 듣고 계시면 그것이 우리 마음의 잠재의식에다 훈습薰習을 둡니다. 훈습을 두면 그때는 시절인연 따라서 우리 마음이 명상에 잠기고 할 때는 나중에는 그것이 발로가 되어서 저절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돈오라는 것은 ‘문득 돈’자, 문득 깨닫는 것입니다. 방법계제方法階梯를 거치지 않고서 문득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중생은 문득 깨닫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문득 깨닫는 그것도 역시 해오증오解悟證悟라, 지금 분들은 대체로 고등교육을 받으시고, 또는 현대는 여러 가지 매스컴으로 해서 우리의 사유 활동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총명한 분들은 증오證悟, 불성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 하더라도 사실 해오解悟는 별로 어렵지가 않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야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다. 천지우주가 불성 아님이 없다.’ 이런 말을 하면 굉장히 난해한 법문이어서 상당히 공부한 분도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에 『화엄경華嚴經』설하시고, 화엄경을 못 알아들으니까 후퇴해서 『아함경阿含經』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들은 비록 불교는 안 배웠다 하더라도 철학도 배우고 과학도 배우고 또는 논리학도 배우고 해놔서 논리적인 훈련이 되어있단 말입니다. 불합리한 판단을 하면 지금 사람들은 불신합니다. 신문이나 또는 잡지나 모두가 다 논리적인 사고방식으로 해서 전개가 되기 때문에 지금 분들은 굉장히 총명합니다. 따라서 불성을 증명한다고 하는 그런 자리는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본래 부처다, 지금 내 존재의 현실은 지금 이와 같이 어리석기도 하고 탐심貪心도 부리고 진심嗔心도 부린다 하더라도 ‘내 본 자성自性은 부처다.’ 하는 그런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본래 모두가 불성 아님이 없음을 현대물리학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은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해서 들어가면 저 끝에 가서는 내내야 원자 또는 소립자 아닙니까. 천문학자의 말을 들으면 우주의 시초는 천지우주가 그때는 중성자뿐이다. 우주의 시초가 중성미자라 하는 아주 미세한 소립자뿐이라 합니다. 또는 우주가 여러 가지로 생성 되었다가 다시 파괴될 때는 아주 미세한 중성자라 하는 그런 존재로 환원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텅텅 비어버린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텅 빈 공겁空劫에서 우주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이 되었다가 다시 성겁에서 우리 생류生類가 살 수 있는 주겁住劫이 되었다가 생류가 살다가 다시 파괴되는 괴겁壞劫이 되었다가 다시 파괴되는 공겁이 되었다가 이와 같이 성겁, 주겁, 괴겁, 또는 공겁이 4겁을 되풀이하는 이것과 지금 위에서 말하는 천문학과는 다 비슷비슷합니다. 물리학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고구정녕인 그러한 정도 까지는 다 설명하지 못했다는 그 점뿐인 것이지 다 비슷비슷합니다.

 

천지우주가 파괴 되어서 텅 빈 공이 된다. 그러면 그 공은 무엇인가. 소립자의 저편에 있는 순수에너지인 그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것에 관해서 물리학자들은 굉장히 연구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나 그런 분들은 ‘통일이론’이라, 무엇인가 모르지만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이와 같이 4뤄크, 네 가지 속성을 가진 하나의 그 무엇이다. 이와 같이 말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불교의지 水 ‧火‧ 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텅 비어 버리면 그 공 소식, 텅 비어 버리면 순수에너지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광파라 광입자라고 물리학자들은 말합니다. 광파라, 광입자 말입니다. 무엇인가 모르지만 결국 광명光明이 거기에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광명이 그러면 광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거기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또는 중성자가 된다고 합니다. 중성자, 전자, 양자 모두가 다 그런 광입자가 광자가 움직이는 진동 따라서 그와 같이 변동한다고 합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주라는 것은 지금 물리학에서 본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광명이 이렇게 저렇게 진동해서 된단 말입니다.

 

이런 말씀이나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말하는 불심충만어법계佛心充滿於法界라 비로자나불이라, 법신法身이라는 말을 인도 본말로 해서 비로자나불이라 합니다. 비로자나불이 무엇인가하면 우리말로 풀이 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말입니다. 광명이 우주의 어디나 구석구석까지 충만해 있다는 뜻입니다. 광명변조라, 광명이 두루해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공에서, 바로 보는 실상관實相觀에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불안청정佛眼淸淨한 안목으로 해서 천지우주가 바로 광명이요, 불성佛性인지를 봐버렸단 말입니다.

 

허나 지금 물리학은 오랫동안 연구하고 연구해서, 분석하고 분석한 뒤에야 비로소 광명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겨우 알듯말듯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물리학의 도움으로 ‘천지우주가 불성뿐이구나.’ 이런 것을 현대인들은 보다 쉽게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광파를 알겠습니까.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런 미개한 때라서 우리 본성이 불성이다. 또는 우주에는 불성뿐이다. 우주에는 부처님 광명뿐이다. 이런 것을 옛날 사람들은 알래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아무튼 돈오頓悟라는 것은 바로 불성이 내 본성本性뿐만 아니라 일체만유의 자성自性, 일체만유의 본성이 바로 불성임을 딱 알아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선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의심하고, 무자를 의심하고, 또는 염불하고 이렇게 저렇게 공부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냥 공부하는 그걸로 해서는 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먼저 바른 지견, 바른 정견正見으로 보면 내 자성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못나고 어리석은 내가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했습니다만 제 아무리 못난 것도 역시 본체인 본바탕은 광명으로 되어있습니다.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높은 파도, 낮은 파도 거품이 천개 만개 나왔다 하더라도 물이라는 그 점은 변치가 않듯이 천지우주의 본자성本自性, 천지우주의 본성품本性品 그것이 비록 인연 따라서 사람이 되고 하늘의 별이 되고 또는 개가 되고 나무가 되고 하더라도 그 불성광명佛性光明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이렇게 못 생긴 사람도 역시 불성광명은 조금도 변치가 않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는 오직 불성광명, 사실은 부처님뿐입니다. 화신불化身佛, 법신불法身佛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겉에 나와 있는 것은 화신불이요, 속에 숨어있는 자성自性 그것이 바로 법신불입니다.

 

이러한 본래시불本來是佛, ‘시’자는 ‘이 시’자를 ‘바로’라고 쓰지 않습니까. 본래 바로 부처임을 느껴야 ‘참선參禪이다.’ ‘참선한다.’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입정入定하고 애쓰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본래시불을 모르면 그때는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즉 정견正見, 바른 견해는 이와 같이 본래 부처임을, 본래 부처이니까 무루지성본자구족無漏智性本自具足이라, 조금도 그때는 때가 없는 지혜나 자비나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부처가 공덕이 없으면 그것이 무슨 부처가 되겠습니까. 부처란 것은 일체공덕이 한계 없이 무한의 역량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믿고서 화두話頭도 의심疑心도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또는 주문呪文도 외우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그때는 모두가 참선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본체적인 문제를 소홀히 생각할 때는 꼭 자기들이 한 것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 중국 북송 때도 역시 대혜大慧 종고宗杲 선사또는 천동天童 정각正覺선사가 계셨는데 대혜 종고스님께서는 ‘꼭 화두를 들어야만이 옳은 길이다. 그래야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는다.’고 간화선을 주장하셨고, 그 당시에 같이 쌍벽을 이룬 천동정각스님은 ‘괜히 의심하면 그때는 망상이 생긴다. 본래 부처거니 의심 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본래 부처이니까 부처가 되지 않겠는가.’ 해서 묵조선黙照禪을 말씀하셨습니다.

 

북송 때에 화두를 창도하는 대혜 종고스님, 또는 묵조선을 창도하는 천동 정각스님, 부처님을 그리워할 수 있는 갈앙심을 내기 쉬운 부처님 명호를 화두로 하는 진헐청료眞歇淸了스님은 이 분이 즉 말하자면 진월청유입니다. 똑같이 천 명이상씩 제자를 거느린 분입니다. 그래서 대혜 종고스님은 화두를 의심하는 쪽으로 하는 간화선법, 천동정각스님은 그냥 의심을 배제하고서 잠자코 무념무상 하는 묵조선법, 또는 진월청유스님은 화두를 그때는 염불로 한단 말입니다.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 또는 본래 부처이거니 염불만 하고 있으면 부처가 되겠지 하는 염불선법을 주장하셨습니다.

 

염불선念佛禪의 행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가 하고 의심하는, 소위 말하는 의단疑團을 주로 하는 그런 염불선이 있고, 또 한 가지는 확신을 주로 하는 ‘본래 부처니까 확신을 하고서 부르면 되겠지.’ 하고 하는 행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은 그와 같이 의단을 품는 것을 주로 하는 임제종臨濟宗, 또는 묵조默照를, 잠자코서 무념무상을 주로 하는 그러한 조동종曹洞宗, 또는 화두를 염불로 하는 그러한 염불선을 주로 하는 황벽종黃檗宗, 이렇게 중국이나 일본은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현대는 모든 문화가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특히 한국 같은 다 종교 사회에서는 자기 종교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다른 종교인들이 승복하겠습니까. 이런 때는 될수록 남의 좋은 점을 보고서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본체는 일체를 포섭하는 것입니다. 만약 불심 가운데서 기독교가 안 들어있고 이슬람교가 안 들어있으면 그때는 불심이 못됩니다. 어떠한 것도 배제하지 않고서 모두를 포섭을 해야 비로소 그것이 불심인 것입니다. 하물며 10억 인구가 신봉하고 있는 기독교, 이슬람교를 우리는 배제하려야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핵심을 봐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네들 말로 하면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 아니 계신 곳 없고 또는 능하지 않음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의 법신불法身佛은 불심충만어법계佛心充滿於法界란 말과 약간 표현만 다른 것이지 개념적으로는 결국은 같은 말입니다. 단지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괜히 꼬투리 잡아서 말 표현을 가지고 그렇게 시시비비하는 것입니다. 요새 공부한 사람들을 보면 똑같은 표현도 자기가 하는 식은 옳고 남이 한 것은 그냥 비방한단 말입니다. 같은 선지식 가운데도 자기가 하는 식은 옳고 남이 하는 것은 그르다고 비방합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이래서는 우리 인류는 공멸하고 맙니다. 다종교 사회인지라, 우리는 꼭 종합적으로 조화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해야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불조佛祖가 말씀하신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도리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우리 불심밖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대로 본래시불本來是佛, 본래 부처요, 무루지성본자구족無漏智性本自具足이라, 일체공덕이 다 그 가운데 들어있다고 생각할 때는 가령 겉으로 하나님을 부르건 알라신을 부르건 그 본체, 정견正見만 서있으면 그때는 개시선皆是禪입니다. ‘관음보살’을 부르나 똥 마른 막대기 화두를 드나 말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나, 아버지를 부르나 뭣을 부르거나 간에 우리 마음이 불심에 입각하면 그때는 형식에 관계없이 선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란 소식, 그것으로 해서 우리 마음을 확 열어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내 마음하고 부처하고 둘이 아니라 내 마음의 자성自性 이대로 바로 부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을 미워도 하고 또는 남을 사랑도 하고 또는 남을 시비하고 또는 시기하는 이 마음의 본성이 바로 부처입니다. 내가 보면 나일망정 부처가 보면 이대로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시불이라, 본래 부처입니다. 지금은 이와 같이 본체로 들어갈 때입니다. 석가모니시대 같이 그와 같이 미혹한 때는 호흡법이다 뭐다 해서 이끌어가지만 지금은 그와 같이 점수할 때가 아닙니다. 당당하게 본래 부처임을 느끼고서 다만 오랫동안 나쁜 버릇 때문에 부처의 공덕이 발로가 안 되었기 때문에 부처의 공덕만 발휘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사 어록에 가서 구구순숙久久純熟이라, 오랫동안 공부하면 그때는 구구순숙이라, 그때는 자연내외타성일편自然內外打成一片이라, 그때는 본래가 부처인지라, 밖과 안이 하나로 돼서 그때는 부처와 하나로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이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일반 불자님들은 납득이 곤란스럽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놈의 나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니까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에는 납득을 잘못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라는 그놈, 그 앙금을 빼기 위해서 참선하고 염불하는 것입니다.

 

수월水月스님은 지금부터 50년 전에 가신 분입니다. 수월스님은 머슴살이를 많이 했습니다. 머슴살이 하다가 29살이 되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총명해서 총기는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수경千壽慶』을 며칠 만에 외워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할 틈도 없고 매일 일만 하니까 말입니다. 그 천수경만 계속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천수경 삼매三昧에 들었단 말입니다. 똥 마른 막대기 화두를 드나 하느님 화두를 드나 말입니다. 삼매에 딱 들어서 우리 업장만 녹아지면 그때는 그만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 깨달았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빠져버리면 그때는 경을 들으나 무엇을 들으나 그때는 쭉쭉 다 외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못 빠지니까 그때는 자꾸 막힌단 말입니다. 항시 말씀합니다만 같은『반야심경般若心經』도 참선 한철 공부할 때와 두 철 공부할 때가 이해도 다릅니다. 자연내외타성일편이라, 공부를 하다보면 부처와 내가 하나로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자기는 어디로 간 곳이 없습니다.

 

요새 우리가 구병시식救病施食을 많이 합니다만 구병시식 법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무광박신여래南無廣博身如來라, ‘광박’은 문자 그대로 ‘넓을 광’자, 또는 ‘넓을 박’자 아닙니까. 부처의 몸이 광대무변해서 우주에 없는 곳이 없단 말입니다. 나무광박신여래라, ‘사육범신捨六凡身’, ‘버릴 사’ 자, ‘여섯 육’자 말입니다. 범부라, ‘무릇 범’자, ‘몸 신’자,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수라나 인간이나 그와 같이 그런 육도六道 윤회하는 범부의 몸을 버리고서, ‘오허공신悟虛空身’이라, 허공신虛空身을 깨달아버린다. 허공신을 말입니다. 우리 몸은 허공신인 것입니다. 우리 몸은 어디에 이와 같은 존재가 사실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가 잘 못 봐서 이와 같은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보면 극락세계의 몸이 어떤 몸인가 하면 무극허무신無極虛無身이라, 즉 허무한 몸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살이 있고 피가 있고 그런 몸이 아닙니다. 살이 있고 피가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입니다. 이 몸 이대로 바로 불성佛性으로 구성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서 아까 수월스님 모양으로 삼매에 들면 그때는 자기라는 존재는 없어지고 텅 비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육범신, 그런 범부의 몸을 버리고서 오허공신이라, 허공 몸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허공 신이 되어야만 비로소 공부를 조금 했다 하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이 비로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본래시불本來是佛을 ‘아, 그렇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존재가 지금 미혹하고 어리석다 하더라도 우리가 봐서 어리석은 것이지 본래 성품은 바로 청정무비淸淨無比해서 무량공덕을 갖춘 부처의 공덕신功德身인 것을 우리가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불교의 바른 신앙信仰인 동시에, 비로소 돈오頓悟입니다. 그래야 이것이 해오解悟입니다. 아직 증오證悟는 못 되었지만 이렇게 해서 해오를 한 다음, ‘아 그렇구나.’ 느꼈다하더라도 아직은 부처한테 갖추어져 있는 무량공덕을 우리가 낼 수가 없습니다. 종이 한 장 밖에도 못 봅니다. 내일도 모릅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은 귀신의 힘으로 봅니다만 우리는 못 봅니다. 그것은 이치만으로 해서는 결국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성自性은 이치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성은 그야말로 무불통지無不通知인 것입니다. 통달무애通達無碍란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이 원래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고 과거를 보고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갖추어 있는데도 우리가 증오證悟하지 못 하면 그때는 힘을 못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해오만 갖고서는 생사를 못 떠납니다. 죽을 때는 그때는 쩔쩔맵니다. 생사를 못 떠나서 죽을 때에 쩔쩔매는 그러한 포외심怖畏心, 공포심을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참다웁게 불성佛性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증명하기 위해서 애쓰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공부할 때 하다말다 하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비록 부처라 하더라도 부처의 참다운 맛을 못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소위 말하는 별시수행別時修行이라, 3일이나 일주일이나 한 달이나 그와 같이 오랫동안 우리가 계속해서 닦아간단 말입니다. 즉 다시 바꿔서 말하면 우리가 비록 천지우주가 부처일상一相임을 아는 일상삼매一相三昧를 얻었다 하더라도 역시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일상삼매 그 놈을 애쓰고 우리가 보림寶林을 해 간단 말입니다. 부처라는 경계를 이렇게 보림해 가는 행이 일행삼매입니다.

 

『육조단경六祖檀經』에 보면 “그대들이 불타佛陀의 일체종지一切宗旨를 얻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달할지니라.”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불타 아님이 없음을 느끼는 그것이 일상삼매란 말입니다. 그런 경계를 이어가는 그것이 일행삼매입니다. 도인들의 말씀은 조금도 이론적인 모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아도 쉽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공부를 했다 말았다 하면 그때는 그와 같이 산란스러운 공부로 해서는 일행삼매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성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서 별시수행別時修行으로 해서 시행된 것이 결제結制와 해제解制를 하는 하나의 안거법安居法이 있단 말입니다. 물론 근기 따라서는 그냥 단박에 되어버리는 그런 공부도 있겠습니다만, 보통은 오랫동안 닦고 닦아야 만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증오證悟라 하는 그런 경계가 있는 것입니다. 증오가 돼야 만이 비로소 생사해탈이라 하는 불교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부처님께서 나오신 참다운 그러한 의의가 있단 말입니다. 생사해탈이 못 되면 그때는 불교의 의의는 없습니다. 따라서 바른 견해,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일체만유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바른 정견正見이 확립된 뒤에는, 그러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런 공부하는 방법은 아까도 말씀했습니다만 의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따지기 좋아하는 성격은 그때는 의심하는 화두가 무방할 것이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때는 무념무상으로 묵조默照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고, 또는 부처님을 하나의 생명으로 구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때는 화두를 염불로 해도 무방할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는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주스님한테 어느 스님이 가서 ‘조주가 무엇입니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주스님한테 가서 물은 그 사람은, 비단 조주스님이라는 사람을 물은 것이 아니라 ‘부처란 무엇인가’ 하는 그런 의미로 물었겠지요. 부처는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어디에나 천지우주가 부처뿐이거니 어디로 가나 결국은 내내야 부처한테 닿습니다. 이 컵도 바로 보면 부처 아닙니까. 바로 보면 결국은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 부처한테 가는 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문으로 가나 염불로 가나 다 있습니다. ‘하나만이 맞다.’ 그러면 벌써 그것이 법집法執이란 말입니다. 법집을 하면 우리 마음이 벌써 어두워집니다. 그때는 우리 마음을 탁 트여서 하나님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맹이는 부처님 자리에 두고서 겉으로는 하나님 부르면 되겠지요. 이슬람교인들도 역시 알맹이는 본래시불本來是佛을, 본래 부처를 느낀 다음에 알라신을 부르면 되겠지요. 이와 같이 겉으로 형식이 어떻게 되었든지 본래 알맹이만 확립되면 그때는 벌써 참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계속 끙끙 앓을 필요가 없이 자기한테 맞는 법으로써 공부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 하는 과정에서 주의해야 하실 것은 삼종선三種禪을 피해야합니다. 오늘 저는 본체를 드러내는 말씀이아니라 방법계제方法階梯를 말씀드리는 것이 제 의무이니까 너무 구구합니다만 공부할 때에 막히실까봐서 노파심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삼종선을 피해야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하면 야호선野狐禪이라, 야호선은 ‘들 야’자, ‘여우 호’자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꾀 밝은, 미처 해탈하지 못하고도 했다하는 사기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야호野狐라 합니다. 여우가 꾀가 많아서 여러 가지로 해서 우리 눈을 흐리게 만드니까 말입니다. 야호선 이것은 미처 못 깨치고 깨달았다하는 이런 선이 야호선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계행청정하고 삼장 다 본 분인 선선비구, 이분도 못 깨닫고 깨달았다 하는 야호선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죽어서는 바로 지옥으로 들어갔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랬는데 현대와 같이 이러한 말법세계에 못 깨닫고 깨달았다 하는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우리 업장 중생들은 바로 성불成佛을 잘못 합니다. 즉 닦은 뒤에 오랫동안 거쳐야 한단 말입니다. 거치는 가운데는 가지가지 경계가 있습니다. 그런 경계를 잘 모르면 그때는 우리가 헤맨단 말입니다. 따라서 괜히 건방진 말로 ‘깨달았다.’ 말한단 말입니다.

 

여기 와서 한 2년도 미처 못 됩니다만 같이 공부한 분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공부가 다 되었다.’ 이래버리면 이것이 야호선입니다. 모든 번뇌가 다하는 누진통漏盡通을 통하고 또는 계행청정해서 생사를 다시 안 받고, 그런 정도가 되어야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런 아만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야호선입니다. 적어도 자기 법력이 숙명宿命으로 해서 과거를 통달 못하고 천안天眼으로 해서 미래를 통달 못하고 현재의 자기 번뇌를 다 끊고 말입니다. 이런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통해야 만이 비로소 생사를 떠나는 것입니다. 생사를 떠나면 그때는 비로소 공 해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애는 제법 쓴다고 썼지만 역시 그런 공부를 다 했다고 할 때까지는 지금도 천리만리입니다. 그런 야호선을 피해야합니다.

 

또 한 가지는 암증선暗證禪이라, 공부하는 법이라든가 그런 한계도 모르고서 헤맨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암중모색暗中摸索이라, 암중모색하는 그러한 것을 피해야합니다.

 

또는 문자선文字禪이라, 경전을 많이 보고 한계는 알지만 실제로 공부를 안 한단 말입니다. 뭐라해도 역시 앉아서 참선 또는 염불, 주문도 많이 하는 그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자로만 한단 말입니다. 문자로만, 기억력이 좋고 또는 구변이 좋아서 부처를 꾸짖고 조사어록을 외우고 말입니다. 도를 말하고 선을 말하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러한 것은 생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한 선보고 문자선이라, 오직 문자놀음, 즉 말하자면 말로만 닦는단 말입니다.

 

이러한 야호선, 못 깨닫고 깨달았다 하는 그러한 야호선 또는 암중모색하는 그런 암증선 또는 문자로만 파지는 문자선, 이것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부인들은 공부가 익어진단 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급해서 ‘그냥 몇 년 내에 해치워버려야겠다.’ 이와 같이 너무나 성급합니다. 성급하면 그때는 마음이 산란스러워서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조주스님 말씀대로 10년 20년 참는 그런 끈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공부가 익어진단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보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괜히 우리 본체를 떠난 상대유한적인 개념 활동을 제 아무리 하더라도 그런 것은 우리 본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돈오頓悟해서 우리 자성自性이 본래 부처임을 안 다음에는 그때는 시비는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문제는 우리가 증명하는 문제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염불이면 염불 또는 주문이면 주문, 한 번 자기 공부하는 방법을 얻었으면 그때는 그냥 바보가 되어서 분멸시비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시비하면 괜히 우리 마음만 산란스럽고 우리 업만 더욱더 증장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잠재의식에 들어있는 그런 번뇌가 많습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 듣고 잘못 느끼고 이러한 것이 우리 잠재의식에는 꽉 차 있습니다. 과거 무수만생 동안에 우리가 흘러오면서 생사를 거듭하면서 전해온 그런 번뇌도 역시 우리 잠재의식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다 비워야 할 것인데, 비우기 위해서는 지금 분별시비를 다시 하면 다시 분별시비가 다시 채워서 그때는 더욱더 산란스럽단 말입니다. 마땅히 모두가 내 자성,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뿐이다. 오직 진리뿐이란 말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는 그 마음, 이것만 생각하고 참선하고 염불해야지 분별시비하면 그때는 업만 짓고서 공부는 안 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백년하청百年河淸입니다.

 

따라서 현대란 사회는 비단 우리같이 참선하는 그런 선객이 되어서 선방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현대라는 사회가 너무나 복잡해서 바로 본체를 모르면 현대에 바로 살 수가 없습니다. 즉 정견正見, 바른 가치관이 아니면 현대는 못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대로 바른 정견을 꼭 누구나 가져야 합니다. 정견을 갖고서 그런 밑에서 참선을 하나 또는 화두를 드나 염불을 하나 또는 주문을 외우나 그것은 모두가 선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누구나가 다 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을 하기위해서는 섣부르게 남과 나의 시비를 분별하여 나와 남을 구분하고, 이러한 상대적인 생각은 될수록 떠나서 오직 본체에 걸맞은 그런 생각만 가지고서 아까 말씀드린대로 바보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괜히 섣부른 말을 많이 해본댔자 역시 분별시비만 더욱더 늘어나고 우리 마음만 산란스럽습니다. 특히 우리 선방에 계시는 분들은 말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생활에 거의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선배한테 공부하는 길을 묻는 최소한의 말, 그 외의 말은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재가불자나 우리 출가불자나 참고하시기 위해서 한 말씀만 더 부연합니다만 이와 같이 바른 정견, 바른 가치관을 두었다 하더라도 우리 계행이 안 바르면 그런 가치관을 그대로 지속을 못하는 것입니다. 지계청정持戒淸淨이란 말입니다. 계행이 청정하지 못하면 그때는 삼매가 못나옵니다. 삼매가 못나오면 그때는 불성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바른 정견 밑에 반드시 계행청정戒行淸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자기 분수 내에서 적어도 5계나 10계는 지키는 내에서 계행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적어도 삼매에 들어가서 우리 불성을 증명한단 말입니다. 실상묘해인 정견을 가진 다음에는 계율청정戒律淸淨이라, 이렇게 해서 깊은 삼매에 들어서 우리 자성自性을 한사코 금생에 증명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

 

                                                                                        1987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