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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5. 중각보왕삼매염불직지

제팔(第八) 시제불이토절섭법문(示諸佛二土折攝法門)

제팔(第八) 시제불이토절섭법문(示諸佛二土折攝法門)

제불(諸佛)의 두 가지 국토(國土)를 절섭(折攝)하는 법문(法門)을 보임


 

대저 이토(二土)라는 것은 곧 모든 부처님의  절(折)과 섭(攝)하는 두 가지 법문(法門)이라 수행인(修行人)이 위에서 설(說)한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경계(境界)를 청문(聽聞)한다면 곧 능(能)이 경(經)의 지취(旨趣)와같이 이 국토(國土)는 실(實)로 괴롭고 저 국토(國土)는 실(實)로 즐겁다는 것을 깨달아 분별(分別)하게 됨이라

비록 관혜(觀慧)의 법문(法門)으로 원융(圓融)하고 미묘(微妙)함을 가르침 받을지라도 두 가지 국토(國土)가 엄존(儼存)함이 그러하여 모두 곧 실제(實際)의 경계(境界)인 것을 곧장 바로 볼 수 있다


천박(淺薄)하게 믿는 사람 들이 말하는 저 국토(國土)<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는 마음으로 있다 하면 곧 존재(存在)하고 마음으로 없다하면 곧 없는 것이라 빛의 그림자와 허깨비의 변화(變化)처럼 허망(虛妄)하여 진실(眞實)<실제(實際)>이 아니며 처처(處處)가 모두다 이에 서방(西方)등(等)이라는 이해(理解)함과는 같지 아니함이라

저 국토(國土)<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또한 이 국토(國土)와 같이 단적(端的)<명백(明白)분명(分明)>하고 확실(確實)하여 적실(的實)<틀림이 없음>함이라 그리하여 오류(誤謬)가 없음을 매우 깊게 인지(認知)해야 함이라


가령(假令) 사람이 능(能)이 이같은 지혜(智慧)를 갖추어 세간(世間)의 일체(一切) 삿된 이해(理解)<사견(邪見)>와 치우친 견해(見解)<편견(偏見)>의 모든 악지식(惡知識)에 회전(回轉)하는바 되지 않으려면 -<악지식(惡知識)에게 굴림을 당(當)하지 않으려면>-곧 응당(應當)히 두 가지 국토(國土) 괴로움과 즐거움 청정(淸淨)하여 깨끗함과 오염되어 더러움을 정확(正確)하게 관(觀)하여 저 그 경계(境界)위에  두 가지 종류(種類)의 마음을 내어 방편(方便)을 삼음이라 이 두 가지 마음이 아니면 능(能)이 저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지 못함이라 무엇을 두 가지 마음이라 하는가


첫 번째는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염리심(厭離心)>이고 두 번째는 기꺼이 좋아하는 마음이라<흔연심(欣然心)>이라

저 이곳 사바세계(裟婆世界)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 <염리(厭離)의 마음>을 내는 연고(緣故)로 곧 능(能)이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설(說)하신 절문(折門)을 수순(隨順)하며 저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함을  기뻐하여 좋아하는 까닭으로 곧 능(能)이 아미타(阿彌陀)부처님께서 보이신  섭문(攝門)<섭취(攝取)하는 문(門)>에 수순(隨順)하는것이라  이 두 가지 문(門)으로 정진(精進)하고 수행(修行)하면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반듯이 결정(決定)코 성취(成就)함이라


무엇을 절문(折門)이라 하는가 이에 위에서 설(說)한바와 같이 극락세계(極樂世界)는 수승(殊勝)하고 오묘(奧妙)하다는 것을 듣고는 곧 응당(應當)히 이치(理致)와 같이 이 사바세계(裟婆世界)는 모두 괴로움 뿐이며 즐거울 것은 하나도 없다고  관찰(觀察)해야 한다 삼악도(三惡途)와 지옥(地獄)에서는 밤낮으로 소연(燒燃)<불타고>하고 아귀(餓鬼)와 방생(傍生)<축생(畜生)짐승>은 차마 고통(苦痛)과 괴로움을 견디어 참기 어려움이라 아수라(阿修羅)는 분노(忿怒)하여 싸움이라


사람의 처소(處所)인들 무엇이 편안(便安)하고 안락(安樂)하겠는가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은 팔고(八苦) <생로병사(生老病死)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와 더불어 주고받고 하여 뜨거운 수증기(水蒸氣)에 찌는듯하며 인과(因果)는 사생(四生)과 함께 오르고 떨어짐이라 <승타(陞墮)함> 시기(時期)<계절(季節)>에는 추위와 더위가 있고<한서(寒暑)>경계(境界)는 이에 모래와 진흙 이라 주야(晝夜)는 움직이고 변천(變遷)하여 무상(無常)하여  안주(安住)하지 않음이라


또한 다시 받은 몸은 더러운 악취(惡臭)가 나며 남자(男子)와 여자(女子)는 형태(形態)를 달리하고 구(求)하여 공급(供給) 하는바 의식(衣食)은 간난(艱難)하며  추악(麤惡)하다 수명(壽命)은 영구(永久)하지 못하며 중고(衆苦)<여러가지 괴로움>가 번갈아 생(生)하며 저 천궁(天宮)에 태어남이 있어도 과보(果報)가 다하면  지극(至極)한 괴로움에 환귀(還歸)한다<되돌아감> 또 사람 가운데 즐거움이 곧 이 괴로움이고 친밀(親密)한것이 가추어 이 원수(怨讐)인지 깨닫지 못한다.


전도(顚倒)된 반연(攀緣)에서 생사를 뛰어 벗어날 출로(出路)를 구(求)하지 못하고 업(業)을 좇아 업(業)에 도달(到達)함에 펼쳐 굴음을<전전(展轉)함> 휴식(休息)하지 못함이라 이와 같은 고통(苦痛)과 번뇌(煩惱)로움은  가히 갖추어 진술(陳述)하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마땅히 싫어하여 멀리 떠나야 함이라 무엇을 포섭(包攝)하여 섭취(攝取)하는 문(門)이라 말하는가 수행인(修行人)이 사바세계(裟婆世界)의 실제(實際)의 괴로움이 이와 같음을 들으면 곧 이에 저 국토(國土)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함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라


저 극락정토(極樂淨土) 보배의 땅 보배의 연못 에는 삼악도(三惡道)가 없음이라 장엄(莊嚴)하고 오묘(奧妙)하며 수승(殊勝)함이 시방(十方)을 초과(超過)함이라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과<한서(寒暑)> 낮과 밤에<주야(晝夜)> 변천(變遷)함이 없고 생로병사(生老病死)로 결박(結縛)하는 업(業)도 없음이라

순전(純全)히 남자(男子)이며 여자(女子)는 없으며 연화(蓮華)의 화현(化現)으로 발생(發生)하며 의식(衣食)은 자연(自然)스럽게 능(能)이 법희(法喜)의 의식(衣食)을 성취(成就)하며 수명(壽命)이 무량(無量)하며 몸의  광채(光彩)는 궁진(窮盡)함이 없음이라


법음(法音)을 청문(聽聞)하면 곧 응당히 사념(思念)을 따라 귀의(歸依)할것을 깨닫고 상호(相好)를 친견(親見)함에 찰나(刹那)오도(悟道)함이라

이와 같은 가지가지  쾌락(快樂)이 무량(無量)함에 극락세계(極樂世界)라는 이름을 성취(成就)함이라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應當)히 기뻐하고 좋아하여야 함이라 이에 능(能)이 만일 이 한 가지 문(門)에서 정진(精進)수습(修習)하여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수순(隨順)한다면 이에 저 이 국토(國土)의 성색(聲色)인 모든 경계(境界)에 있어서 지옥(地獄)이라는 생각을 짓게 되며<작(作)하게 되며> 고해(苦海)라는 생각을 짓게 되며 화댁(火宅)이라는 생각을 짓게 된다 


모든 보물(寶物)에 있어서 괴로움의 도구(道具)라는 생각을 하며 음식(飮食)과 의복(衣服)은 농혈(膿血)<피고름>과 철피(鐵皮)<쇠가죽>같다고 생각하며

이에 저 모든 권속(眷屬)은 야차(夜叉)와 나찰(羅刹)처럼 사람을 뜯어먹는 귀신(鬼神)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물며 다시 생사(生死)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장겁(長劫)에 파도(波濤)처럼 다름이겠는가


실(實)로 가(可)히 염리(厭離)<싫어하여 멀리 여임>하여야 함이라 선지식(善知識)이나 경권(經卷)가운데서 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원력(願力) 국토(國土)는 장엄(莊嚴)하다는 것을 들으면 ▪생각 생각에 이에 저 이취(理趣)를 칭찬(稱讚)하고 ▪안온(安穩)하다는 생각을 내며 ▪보소(寶所)라는 생각을 내고 ▪가업(家業)이라는 생각 ▪해탈처(解脫處)라는 생각을 내어야한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와 보살(菩薩)스님들의 무리는 사랑하는 부모(父母)라는<어버이>생각▪자애(慈愛)로운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접인(接引)한다는 생각을 내며▪나루터라는 생각을 내야 한다


공포(恐怖)와 두려움의 급난(急難) 한가운데에도 명호(名號)를 칭양(稱揚)하면 바로 감응(感應)하여 공(功)을 헛되게 버리지 않고 찰나(刹那)에 문득 이르러 신속(迅速)히 구호(救護)한다는 생각 사념(思念)을 따라 생사(生死)를 벗어나게 한다는 생각을 내어야한다

이같은 공덕(功德)은 한량(限量)이 없어 실(實)로 기뻐하고 좋아할만하다

만일 이 절문(折門)에 있어서 즐겁게 수행(修行)하지 못하고 이곳 예토(穢土)<사바세계(裟婆世界)남섬부주(南贍部洲)>를 싫어하며 떠나려는 생각이 깊지 못하다면 사바세계(裟婆世界)의 업(業)에서 영원(永遠)히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리라


가령(假令) 저 포섭(包攝)하는 문(門)에서 수행(修行)하지 못하고 기뻐하며

좋아하는 마음이 간절(懇切)하지 않다면 극락(極樂)의 수승(殊勝)하고 휼륭한 경계(境界)에 오르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수행인(修行人)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여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성취(成就)하고자 한다면 두 가지 문(門)을 일제히 수행(修行)하여 출발(出發)하는 최초(最初)의 첫 걸음으로 삼아야한다

만약 이두 문(門)을 수행(修行)하지 않는다면 비록 관혜(觀慧)의 지취(旨趣)를 알았다 해도 다만 헛된 이해(理解)만을 성취(成就)할뿐 이에 저 극락국토(極樂國土)에 왕생(往生)하고자하나 기뻐하고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생(往生)을 얻을만한 인(因)이 없게 됨이라


가령(假令) 이 두 가지 문(門)을 수행(修行)하여도 관혜(觀慧)의 뜻을 알지 못하면 저 국토(國土)에 왕생(往生)함이 가능(可能)하나 사상(事想)일뿐이기 때문에 상배(上輩)의 지위(地位)가 아니다 만일 치연(熾然)하게 기뻐하고 싫어하며 관혜(觀慧)를 원만(圓滿)하게 닦으면 왕생(往生)하고 나서 다시 상품(上品)을 성취(成就)하는 자(者)이다 학자(學者)는 어찌 가히 이 말이 모양(模樣)에 굳게 집착(執着)한 것이라 말하여 경솔(輕率)하게 버리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어째서 온갖 외연(外緣)을 방하(放下)해버리고 일념만념(一念萬念)으로써 마음과 이치(理致)가 회합(會合)하고 경계(境界)는 신지(神智)와 융합(融合)하여 자연(自然)히 법(法)에 합치(合致)되게 하지 아니함이겠는가


왜 반듯이 기뻐하고 싫어하여 취(取)하고 버리기를 이같이 깊게 하는가 대답(對答)은 이러하다 만일 모든 외연(外緣)을 방하(放下)하는 것이 도(道)라 말한다면 방하(放下)한다는 일념(一念)을 일으키는 마음도 문득 방하(放下)라 이름하지 못하리라 바로 도(道)와는 반대(反對)로 떨어져 단견(斷見)의 외도(外道)와 같은 유(類)가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아호(鵝湖)스님은 말하기를 -형체(形體)를 잊고 마음을 죽이지 말라 이것이 치료(治療)하기 어려운 병통(病痛)이 가장 깊은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일 묵묵(黙黙)히 어리석은 듯한 자세(姿勢)한 고집(固執)한다면 그대는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란 것을 알겠다하였다


또 부처님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가운데 정진(精進)은 있어도 감퇴(減退)함은 없다 또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정진(精進)을 의지(依支)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원만(圓滿)한 성취(成就)를 얻는다 또 놓아버린다는 것은 다만 세간(世間)의 업연(業緣) 을 방하(放下)하는 것 일뿐이다

어떻게 정진(精進)하여 도(道)를 체득(體得)하는 마음을 방하(放下)하는 것이겠는가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할 일없이 껍데기 속에 앉아있다 하였는데 바로 이런 무리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가령(假令) 방하(放下)하여 자유(自由)로운 것이 도(道)라 말하며 부지런히 정진(精進)을 더하여 일심(一心)으로 수행(修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이 회합(會合)하고 경계(境界)가 융합(融合)하여 한 덩어리를 이루고 도(道)와 합(合)하겠는가 만일 방하(放下)하지 않는 것이 방하(放下)인줄 알고 치연(熾然)하게 기뻐하고 싫어하여 취(取)하고 버린다면 바로 흔염(欣厭)의 취사(取捨)가 아니요 닦아도 닦음이 없으며 생각하여도 곧 생각이 없이 한다면-공용(功用)이 없는 행(行)-이라 이름하며 또는 -작위(作爲)없는 오묘(奧妙)한 마음-이라 이름하리라


어찌 중도(中道)의 이치(理致)를 속(速)히 증득(證得)하는 것이 어렵겠는가 또 수행(修行)을 하기 때문에 단견(斷見)을 떠나며 수행(修行)한다고 여기는 것이 없으므로 상견(常見)을 떠난다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떠났다면 질문(質問)한 것과 다르게 곧바로 안락세계(安樂世界)에 왕생(往生)하여 두 명의 대사(大士)<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써 수행(修行)의 동반자(同伴者)를 삼고 매일(每日)아미타(阿彌陀)부처님과 마주하리라 저 때는 어떤 법(法)을 알아도 질문(質問)하지 못하며 무슨 행(行)인들 배우지 못하며 어떤 의심(疑心)인들 제거(除去)하지 못하며 무엇을 구(求)한들 얻지 못하겠는가

이미 퇴전(退轉)함이 없다면 이에 기뻐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어찌 무상등정각(無上等正覺)을 이루는 큰 인행(因行)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