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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5. 중각보왕삼매염불직지

제칠(第七) 개시선불불이법문(開示禪佛不二法門)

제칠(第七) 개시선불불이법문(開示禪佛不二法門)

  선(禪)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열어 보임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 드리우신 염불법문(念佛法門)은 법계(法界)의 군기(群機)를 통괄(統括)함에 그리하여 한계(限界)가 없는 것이라

실(實)로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증득(證得)한바 대인(大人)의 경계(境界)이며 천태(天台)와 사명(四明)이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과 더불어 동부(同部)로 교판(敎判)한 것이다  맛<미(味)>으로는 제호(醍醐)에 속(屬)함이라

 

곧 선종(禪宗)말하는바  단전직지(單傳直指)의 도(道)라 영명연수선사(永明壽禪師)의 사료간(四料間)가운데 참선(參禪)은 없어도 정토(淨土)가 있으면 만(萬)사람이 수행(修行)하여 만(萬)사람이 왕생(往生)함이니 다만 아미타(彌陀)를 친견(親見)함을 성취(成就)함에 어찌하여 개오(開悟)하지 못할까 염려(念慮)하겠는가 진실(眞實)로 향상일로(向上一路)가 됨이라고 말하였다


어찌하여 이제 사람들은 저 명리(名利)의 도모(圖謀)하는 바를 인(因)하여 이에 그 뜻하는 바를 성취(成就)하지 못하고 상심(傷心)한 얼굴빛으로 길이 장탄식(長歎息)하며  스스로 후회(後悔)하여 말하기를 슬프다

내 평생(平生)의 일체(一切)의 모든 것이 파괴(破壞) 되었구나 참선(參禪)은 내가 바라는바가 아니며 잠간(暫間)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불(念佛)한다 해도 중생(衆生)들의 고통(苦痛)스러운 세간(世間)을 제도(濟度)하는지 잘 모르겠다 진실(眞實)로 근본(根本)만 꺾어버리지 않는다면 만족(滿足)할뿐이다 하여서 이때에 도리여 그 몸을 게을리하여  해태(懈怠)하고 깊이 성찰(省察)하여 반성(反省)하지 아니하고 혹(或)조그만한 지취(志趣)를 만나면 문득 한량(限量)없는 나쁜 업(業)이 예전 그대로 일시(一時)에 현전(現前)함으로 차단(遮斷)하여 막지를 못한다


염불(念佛)을 이와 같이 한다면 무슨 이익(利益)이 있겠는가 지금 그대의 견해(見解)의 자세(仔細)히 살펴보았더니 그가 말 한 것은 참선(參禪)이 비록 오묘(奧妙)하다 해도 만(萬)칸의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어려움이 되고 염불(念佛)은 거칠고 용이(容易)하여 한 칸의 초굴(草窟)을 짓는 것과 같다 한 것이라 견지(見地)가 이와 같음에는 비유(譬喩)하여 흉년(凶年)에 대왕(大王)의 백미진선(百味珍膳)을 얻고도 초채(草菜)의 음식(飮食)으로 된 것으로 알고 여의주왕(如意珠王)을 물고기의 눈처럼 보는 것과 같음이니


어찌 애달프고 슬프다 하지 아니함이겠는가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의 두 가지 문(門)이 비록 출발(出發)하는 행(行)은 상이(相異)함이나 돌아가서 도착(到着)하는 집은 하나인 것이라 그 이치(理致)에 있어 한결같이 동일(同一)하다는 것을 인지(認知)하여 깨닫지 못하였다 

마땅히 알아야함이라  출발(出發)하는 행(行)이 상이(相異)하여 다른 까닭은 참선(參禪)의 경우(境遇)에는 고목(枯木)처럼 하여 부처님께 집착(執着)하여 구(求)하지 않는 것이라 그러나 스스로가 바른 지견(知見)을 갖추지 못하고 또한 바른 지견(知見)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하면 퇴전(退轉)하지 않는다 해도 마도(魔道)로 끌려 들어가는 경우(境遇)가 허다히 다분(多分)함이라

 

이는 부처님의 신통력(神通力)으로 구호(救護)하는 것이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가령(假令) 염불(念佛)은 일체(一切)를 취(取)하지 아니하고 오직 저 부처님만을 생각하여 모실뿐이다

비록 정해(正解)나 사우(師友)의 개발(開發)하여 옆에서 도와줌이 없어도 불신토(佛身土)에 뜻을 발(發)하면 즉시(卽時)에 왕생(往生)할 수 있다는 것을 곧바로 믿을 뿐이다 삿<사(邪)>되고 소소(小小)한 것에 침체(沈滯)되어 막힌다 해도 또한 정도(正道)로 되돌아 복귀(復歸)하는데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이 자비(慈悲)한 홍서(弘誓)의 자비(慈悲)한 본원(本願)으로 구제(救濟)하고 보호(保護)하여 지켜서 수호(守護)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출발(出發)하는 행(行)이 상이(相異)하다 이름<지칭(指稱)함>이라 법문(法門)과 지위(地位)의 깊고 얕음<심천(深淺)>에 상이(相異)함이<차이(差異)가 남>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이라 이에 참선(參禪)곧 염불(念佛)이고 염불(念佛)이 곧 참선(參禪)임을 알아야함이라

참선(參禪)은 염불(念佛)이 아니면 왕생(往生)을 성취(成就)하지 못하고 염불(念佛)은 참선(參禪)이 아니면 관혜(觀慧)를 성취(成就)하지 못한다 염불(念佛)과 참선(參禪)에 어찌 두 이치(理致)가 있겠는가

만일 이 뜻을 인지(認知)하였다면<깨달아 알아다면> 곧 응당(應當)히 저 부귀(富貴)하고 공명(功名)함에 올라타서 뜻을 얻은 때에 한칼에 쪼개어 끊어서 곧 문득  맹렬(猛烈)한 큰대장부(大丈夫)의 마음을 발(發)하여 이 도(道)를 힘껏 행(行)하여 실천(實踐)하는  행동(行動)에 옮겨야 한다


저 세간(世間)에서 소유(所有)하고 있는 처자(妻子)▪ 보화(寶貨)▪ 두목(頭目) ▪뇌수(腦髓) 내지(乃至)신명(身命)을 스스로 탐(貪)하여 아끼고 아까워하여 인색(吝嗇)하지 말고 뜻을 단호(斷乎)하게 결정(決定)하여 왕생(往生)을 구(求)해야 함이라 어찌 가(可)이 유감스럽게도 욕심(欲心)을 부리고 시절(時節)을 망실(忘失)하여  부득이(不得已)하여 어쩔수없이 가령(假令)다만 시기(時期)를 기다렸다가 이 가장 뛰어난 최상제일(最上第一)무비(無比)<비교(比較)할 수 없는>의 정토법문(淨土法門)을 다만 초굴(草窟)과 어목(魚目)로 만들어서 소도(小道)의 견해(見解)인 구차(苟且)한 법(法)으로써 그리하여 이를 딱아 수행(修行)하고자 함인가


상심(傷心)하고 애석(哀惜)한것이 매우 심(甚)하다하겠다 가령(假令) 후회(後悔)하고 한(恨)함을 인(因)하여 공(公)변됨에 나아가서 일시(一時)에 방하(放下)해 버리고 대승보소(大乘寶所)의 견해(見解)를 굳건히 하여 결정(決定)코 퇴전(退轉)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판단(判斷)한다면 비유(譬喩)하면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배가 노와 돛대를 더하는 것과 같음이라 어떤 다행(多幸)이 이와 같음이겠는가 질문(質問)함이라 이와 같다면 선서(禪書)에서는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자 대답(對答)하기를 마른똥막대기다 삼<마(麻)>이 세근이다


내가 당시(當時)에 이를 직시(直視)했다면 한 방망이로 쳐서 죽여 개에게나 주어 천하(天下)의 태평(太平)함을 도모(圖謀)하였으리라하고 내지(乃至)는 마구니가 와도 죽이고 부처가 와도 죽인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말씀해보십시오 염불삼매(念佛三昧)에서 존경(尊敬)연모(戀慕) 하고 외애(畏愛)갈앙(渴仰) 하는 마음과 집에 도달(到達)하는 지취(旨趣)가 어떻게 동일(同一)합니까


-염불삼매(念佛三昧)에서 존경(尊敬)하고 연모(戀慕)하며

외애(畏愛)하고 갈앙(渴仰)하는 마음과 미치여 집에 도달(到達)하는 지취(旨趣)가 어떻게 동일(同一)합니까 -


답(答)이라 염불(念佛)이라는 것은 본래(本來) 저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의 보신(報身)인 아미타(阿彌陀)부처님 을 수지(受持)하여 항상(恒常) 사유(思惟)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이 부처님 보신(報身)은 무량(無量)한 상호(相好)의 광명(光明)과 화불(化佛)보살(菩薩)성문(聲聞)의 원력공덕(願力功德)이 가이 말하지 못할 정도(程度)로 갖추어 있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몸이 되었다


또 부처님이 의거(依據)하는바 의 경계(境界)는 존재(存在)하는 모든 ▪보지(寶池)<보배의연못> ▪금지(金地) ▪행수(行樹)▪당번(幢番)▪깃대▪보배그물▪난간(欄干) ▪누대(樓臺)▪방울▪휘장(揮帳)▪번개(幡盖)▪ 연화(蓮華)▪ 팔공덕수(八功德水)등(等) 일체(一切)의 장엄(莊嚴)으로 이것이 극락국토(極樂國土)가되었다 그리하여 저 부처님은 몸으로써 국토(國土)를 성취(成就)하고 국토(國土)로써 몸을 성취(成就)함이라 몸과 국토(國土)가 서로 장애(障礙)함이 없음이라 마음과 경계(境界)가 원만(圓滿)히 통(通)하여<원통(圓通)>혹(或)저것이나 혹(或)이것을 동일(同一)하게 수용(受用)함이라


이에 오온(五蘊) 육입(六入)십팔계(十八界)십이처(十二處)일체제법(一切諸法)에 이르기까지 곧바로 무상(無上)의 보리(菩提)에 도달(到達)함이라

미치여 능살(能殺)과 소살(所殺)의 의미(意味)인 일체(一切)의 시간(時間)과 일체(一切)의 처소(處所)에 장애(障礙)가 없다 무장무애(無障無礙)하여 결박(結縛)도 아니고 해탈(解脫)도 아님이라

종횡(縱橫)으로 역순(逆順)하여 모두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청정(淸淨)한 색신(色身)에 나아감이라 왜냐하면 마음이 곧 경계(境界)이고 경계(境界)가 곧 마음이며 몸이 국토(國土)이고 국토(國土)가 곧 몸이며 중생(衆生)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衆生)이며 이것이 곧 저것이고 저것이 곧 이것이 때문이다


또한 청(靑)황(黃)적(赤)백(白)의 색(色)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육근(六根) 과 이같은 모든 법(法)인 혹(或)은 마음 혹(或)은 몸이 또한 낱낱이 자재(自在)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해탈(解脫)하지 아니함이 없음이라


오히려 간격(間隔)을 두지 않으므로 음노치(婬怒癡)가 범행(梵行)이며 진로(塵勞)의 무리가 법려(法侶)이다 어떻게 다만 마른 똥 막대기와 삼세근 만이 부처라 하겠는가 이것이 이미 부처라면 무엇 때문에 청정(淸淨)한 땅위에서만 특별(特別)히 시현(示現) 강생(降生)하여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한다는 생각을 일으키겠는가 이같은 것은 한 방망이에 쳐 죽여 개밥이나 주어야 좋으리라 허다(許多)하게 지은 본보기를 살펴보자


육년(六年)을 고행(苦行) 수도(修道)하여 마구니를 항복(降伏)받고 정법(正法)을 말씀하시여 생멸(生滅)이 없는 평등(平等)한 법(法)가운데서 생멸(生滅)을 부르짖으셨다 천(千)가지로 희롱(戱弄)하고 세간(世間)을 휘저어 일체(一切)를 뇌란(惱亂)하며 평지(平地)상에서 죽은 사람이 헤아릴수도 없게 하였으니 어찌 천하태평(天下太平)이 아니겠는가

익(咦)!


여기에 이르러서 간절(懇切)히 잘못 이해(理解)하지 말며 요동(搖動)하지 말라 요동(搖動)했다하면 내 수중(手中)의 방망이를 맞을 분수(分數)가있으리라

만일 이 말이 조계문하(曹溪門下)의 잡다(雜多)한 무더기에 감촉(感觸)하여 얻은 것이라 말한다면 아직 꿈에서도 보지 못 한 것이다 내가 벌써 너의 여요(驢腰)의 사이를 쳐서 꺽어 버렸으나 염려(念慮)스러운 것은 그대가 이같이 계교(計較)한 것이며 또한 그렇다 해도 역시(亦是) 계교(計較)에서 벗어나진 않았다고 답변(答辯)하는 것을 용납(容納)하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또 그대는 계교(計較)가 유심(有心)이라거나 계교(計較)가 무심(無心)이라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몇 번이나 계교(計較)를 하였는가

 

질문(質問)함이라

이것도 벌써 계교(計較)를 한 것 입니다

답변(答辯)함이라

내가 적연(適然)히 무엇을 말하였던가

묻는 사람이 이해(理解)하지 못하고 한참 있더니 또 질문(質問)함이라

질문(質問)함이라

만일 일체(一切)가 부처라면 ▪똥▪ 키▪ 빗자루▪로도 다 제 질문(質問)에

답변(答辯)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특별(特別)히 지극(至極)히 하열(下劣)한 똥 막대기로 답변(答辯)하였을까요

대답(對答)함이라

이미 일체(一切)가 부처라면 문창(門窓) 호달(戶闥)인 목전(目前)의 모든 경계(境界)로도 모두 다 질문(質問)이 가능(可能)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특별(特別)히 휼륭한 부처님을 취(取)하여 질문(質問)하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알아야한다


질문(質問)한사람의 심지(心地)는 본래(本來) 순박(淳朴)하였는데 그 고상(高尙)한 것만을 지나치게 취(取)하므로 답변(答辯)하는 사람이 저의 집착(執着)을 타파(打破)하고자 반대(反對)로 하열(下劣)한 것을 취(取)하였을 뿐이다 만일 똥 막대기가 하열(下劣)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부처 또한 우월(優越)한 것도 아니다 어떻게 저의 말이 동일(同一)하지 않다 말하며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이 행(行)이 상이(相異)하다고 허망(虛妄)하게 인식(認識)하겠는가


질문(質問)함이라

이 염불법문(念佛法門)이 이와 같이 기특(奇特)하다면 소실(少室)의 마음을 가리켜 바로 성불(成佛)한다는 말과 천태종(天台宗)의 관심관불(觀心觀佛)의 담론(談論)과도 애초에 다름이 없음니다

일념(一念)을 벗어나지 않고 삼천(三千)의 묘법(妙法)을 나타내어 완연(宛然)한 삼관(三觀)이 만법(萬法)을 떠나지 않았으며 일진여문(一眞如門)을 궁구(窮究)하여 일심(一心)을 홀연(忽然)히 깨달아 마쳤다 말 할 만합니다

또 저 같은 우둔(愚鈍)한 근기(根機)와 후학인(後學人)에게도 어떻게 수행(修行)하면 상응(相應)해 갈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십시오

대답(對答)함이라

다만 수행(修行)하려하면 된다 왜 성취(成就)하지 못할까 염려(念慮)하겠는가

비유(譬喩)하면 빈  골짜기에 소리가다 호응(呼應)하는것과 도같다 소리가 크면 크게 울리고 소리가 미세(微細)하면 가늘게 메아리치며 저가 내는 소리를 따라 호응(呼應)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바로 극락국(極樂國)에서 삼배(三輩)구품(九品)으로써 중생(衆生)을 섭수(攝受)하는 것과 같다


또한 그 근기(根機)의 이둔(利鈍) 심천(深淺) 사정(邪正) 지속(遲速)을 따라 인도(引導)하며 어느 품(品)이든 왕생(往生)을 따라 기틀을 빠뜨림이 없다 골짜기가 소리의 고저(高低)를 따라 함께 일어나는 것과 같으므로 이러한 까닭으로 부지런히 정진(精進)만 한다면 반듯이 버리지 않는다 또 더구나 시기(時期)와 선후(先後)가 없는데 어찌 우둔(愚鈍)한 근기(根機)라 해서 싫어하겠는가 이러한 때문에 일체(一切)의 법문(法門)이 곧 하나의 법문(法門)<一法門>이며 하나의 법문(法門)이 곧 일체(一切)의 법문(法門)<一切法門>임을 분명(分明)히 깨달아 알 것이다


어찌함에 특별(特別)히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이 불이(不二)라<두 가지가 아님이라>모든 석가(釋迦)의 일대(一代)에 교화(敎化)를 베푸신 도(道)가 염불(念佛)의 한 가지 법문(法門)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 이 법문(法門)은 한량(限量)없이 광대(廣大)하다 그러므로 근기(根機)를 포섭(包攝)하기를 가이 없이 한다 무엇 때문에 어리석고 지혜(智慧)로운 근기(根機)가 차이가 나겠는가 받들어 권(勸)하노니 후현(後賢)들이여 이 정토법문(淨土法門)에서 다른 견해(見解)를 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