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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5. 중각보왕삼매염불직지

제사(第四) 정명심불관혜 (正明心佛觀慧)

제사(第四) 정명심불관혜 (正明心佛觀慧)

심불(心佛)의 관혜(觀慧)를 바로 밝히는


대저 염불삼매(念佛三昧)라는 것은 실(實)로 하여금 군생(群生)들이 삼계(三界)를 초월(超越)하는 극락(極樂)에 왕생(往生)하는 지름길 이라 처음 축령(鷲嶺)<영취산(靈鷲山)>에서 근기(根機)의 마땅함을 따라 펼쳐서 연설(演說)함으로부터 다음 여산(廬山)에서 궤철(軌轍)을 계승(繼承)함을 지내는 동안 시방(十方)에서 칭찬(稱讚)하고 모든 조사(祖師)가 전지(傳持)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자래(自來)<유래(由來)>가 있었다


다만 그 학설(學說)이 혹(或) 능(能)이 한결같이 못하여 후학(後學)들이 이에 귀결점(歸結點)에 도달(到達)함을 얻지 못하였을 뿐이다

유독(唯獨) 천태(天台) 삼관(三觀)의 법문(法門)만이 이치(理致)가 여러 경(經)의 으뜸으로서 여러 학설(學說)을 초과(超過)하여 가르침을 받고 지취(志趣)를 얻으면 그 이익(利益)이 생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 때문에 후학(後學)들이 불가불(不可不) 이것으로 주항(舟航)을 삼았던 것이다

대저 삼관(三觀)이란 것은 일념(一念)이 즉 공(卽空) 즉 가(卽假) 즉 중(卽中) 한 것인데 우리 여래(如來)께서 널리 드날리던 법(法)이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의 오묘(奧妙)한 깨우침에 이른 것이다


이른바 공(空)은 일체(一切)가 모두 공(空)이며 가(假)는 곧 일체(一切)가 모두 거짓이며 중(中)은 곧 일체(一切)가 다 중도(中道)란 말이다

한꺼번에 타파(打破)하고 한꺼번에 수립(竪立)하며 타파(打破)와 수립(竪立)을 한꺼번에 부정(否定)하기도 하여 원만(圓滿)히 융합(融合)하고 온갖 일체(一切)의 상대(相對)가 끊긴지라 도무지 의론(議論)하거나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제부(諸部)의 현문(玄門)을 통괄(統括)하여 중생(衆生)과 부처님의 경계(境界)와 지혜(智慧)를 확연(廓然)하게 하였고 만법(萬法)의 근원(根源)을 밑바닥까지 다하여 정토(淨土)의 원만(圓滿)한 수행(修行)을 선명(鮮明)하게 나타내셨다


염불삼매(念佛三昧)는 이 법문(法門)이 아니면 곧 미진(未盡)한바가 있어 극진(極盡)히 하지 못함이라 사명대사(四明大師)가 오묘(奧妙)한 지취(旨趣)를 발양(發揚)하여 이에 후학(後學)에 가르쳤는데 이제 그의 말을 모두 인용(引用)하겠다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함을 구(求)하는 것이 비록 세간(世間)의 작은 선행(善行)이나 미치여 저들의 사상(事想)을 도외시(度外視)하지는 아니함이나 이에 대승(大乘)의 원묘(圓妙)한 삼관법문(三觀法門)으로써 저 십육관경(十六觀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오묘(奧妙)한 뜻을 해석(解釋)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智慧)가 열리고 행(行)을 발기(發起)하게 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따라 반듯이 왕생(往生)을 성취(成就)하겠는가


십육관(十六觀)이란 것은 첫 번째는 낙일(落日)을 관(觀)하는 것이다 소이(所以)로 먼저 전송(傳送)한다는 상상(想像)을 표지(標指)하며 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지향(指向)함이라 초심(初心)수행인(修行人)비록 육근(六根) 육진(六塵)모두 이 법계(法界)라는 것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러함에도 심상(心想)이 쇠약(衰弱)하고 하열(下劣)하여 수승(殊勝)한 경계(境界)가 현현(顯現)하여 나타나기 어려움이라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如來)께서 특이(特異)한 방편(方便)을 시설(施設)하였으니 곧 이에 지는 태양(太陽)으로써 경계(境界)를 삼아 그것을 상상(想像)하여 관(觀)하는 속의 해<태양(太陽)>를 일으키게 하신 것이다


원만(圓滿)한 사람은 오묘(奧妙)하게 이해(理解)하여 주관적(主觀的)인 능상심(能想心) 에 일체(一切)의 의보(依報) 정보(正報)의 법(法)이 본래(本來) 구족(具足)해있음을 앎이라


지금 태양(太陽)을 구비(具備)한 마음으로써 마음에 상즉(相卽)한 해<태양(太陽)>를 반연(攀緣)하여 본성(本性)의 태양(太陽)<해>를 그의 앞에 선명(鮮明)하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라 이는 곧 법계(法界)의 마음으로써 법계(法界)의 경계(境界)를 반연(攀緣)하여 법계(法界)의 해<태양(太陽)>를 일으킨  것이라

이미 모두가 법계(法界)라면 어찌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에 상즉(相卽)하지 아니 하겠는가 이는 총체적(總體的)으로 보인 것이다

만일 삼관(三觀)을 따로 의론(議論)하여 일겁(日劫)을 이룬다면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공적(空寂)하기 때문에 곧 마음과 해가 걸림이 없으며 연기(緣起)는 거짓으로 성립(成立)한 것이므로 거듭거듭 상상(想像)의 해가 발생(發生)하고 그 마음과 해가 모두 법계(法界)이기 때문에 당체(當體)가 밝고 선명(鮮明)하게 나타난다


일관(日觀)이 이미 성취(成就)되면  삼관(三觀)이 동일(同一)하게 한마음에 있다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니며 하나 이면서 셋이 되어 가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 일관(日觀)이 이미 그러하다면 나머지 관(觀)도 비례(比例)하여 그러하리라 마땅히 알라 십육관(十六觀)이 모두 공가중(空假中)에 상즉(相卽)한 일심삼관(一心三觀)으로써 상상(想像)의 법(法)을 삼은 것이다

다음에는 맑은 물을 관(觀)하여 다시 상상(想像)으로 얼음을 이룬다 진실(眞實)로 저 국토(國土)는 땅이 유리(琉璃)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 지상(地上)에서는 상상(想像)하기 어렵다


때문에 또 얼음을 상상(想像)하게 한 것이니 얼음의 상상(想像)이 성취(成就)되면 보배 땅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또한 관찰(觀察)할 대상(對象)인 지는 해<태양(太陽)>와 얼음으로써 방편(方便)을 삼고 그다음에는 땅 나무 연못을 관찰(觀察)하며 나아가 전체적(全體的)으로 누각(樓閣) 연못을 관찰(觀察)함이라 이상(已上)의 육관(六觀)은 모두 저 국토(國土)의 의보(依報)를 관(觀)하기 위한 까닭이라

연화좌(蓮華坐)를 관(觀)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삼성(三聖) 이 친(親)히 의지(依支)하는 것이며 보상(寶像)을 관(觀)하는 것은 삼성(三聖)---<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진제(眞諦)와 견주어야한다 부처님을 관찰(觀察)하고자 한다면


먼저 저 연화좌대(蓮華坐臺)를 관(觀)해야 한다 진실(眞實)한 부처님은 관(觀)하기 어려움으로 요컨대 먼저 보상(寶像)을 관(觀)해야 한다

나아가 왕생(往生)함을 두루 관(觀)하거나 부처님과 보살(菩薩) 등(等) 일곱 가지 관(觀)<칠관(七觀)>을 뒤섞어 관찰(觀察)하는 것 까지는 모두 저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의 정보(正報)를 관(觀)하기 위함이다

뒤의 삼관(三觀)은 세 가지 무리 구품(九品)의 사람들이 이로부터<남염부주(南閻浮州)사바세계(裟婆世界)> 저기<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함을 밝힌 것이다 이미 그렇게 수행(修行)하는 인(因)등(等)이 동일(同一)하지 않기 때문에 과보(果報)를 감득(感得)하는 것도 차례(次例)대로 내려온다


지금 또한 관(觀)하는 것도 수행인(修行人)이 삼품(三品)의 우등(優等)함과 열등(劣等)함을 식별(識別)하여 중품(中品) 하품(下品) 을 버리고 상품(上品)의 왕생(往生)을 수습(修習)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관(觀)은 반듯이 경전(經典)에서 보인 모양(模樣)으로 마음속에 기억(記憶)하여 가져 관(觀)하는 바의 경계(境界)로 삼아야한다 따라서 자기(自己)의 마음에 이러한 법(法)이 본래(本來)구비(具備)되어져 있음을 깨달아 경계(境界)에 의탁(依託)하여 상상(想像)이 성취(成就)되면 마음의 안목(眼目)이 발명(發明)함이라


또 경(經)의 제목(題目)을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이라 말한 것은 부처님은 이에 관(觀)하는 바의  수승(殊勝)한 경계(境界)라

정보(正報)를 들어 올려 이에 의지(依支)하는 과(果)를 거두어들임이라 교화(敎化)의 주인(主人)을 좇아 이에 도중(徒衆)을 포괄(包括)한 것이다 관찰(觀察)함은 비록 이에 십육관(十六觀)이나 부처님으로 말하자면 곧 두루 하시므로 다만 저 아미타(阿彌陀)부처님만 관찰(觀察)하면 되는 것이다


만일 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관(觀)하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저 부처님이 허공(虛空)의 량(量)과 같음을 관(觀)하여야함이라


단엄(端嚴)하고 미묘(微妙)한 광대(廣大)한 색신(色身)은 하나 하나의 몸으로 나뉘어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모습(模襲)이 되고 하나하나의 모습(模襲)가운데에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수형호(隨形好)가 있으며 하나하나의 상호(相好)에는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찬란(燦爛)한 광명(光明)이 있어 하나하나의 광명(光明)속에는 하나하나의 세계(世界)의 바다가 있으며 저 세계해(世界海)가운데에는 일체(一切)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 보살(菩薩) 성문(聲聞) 연각(緣覺) 등(等)의 스님의 무리들이 있어 다만 마땅히 기억(記憶)하고 상상(想像)하여 마음의 눈(心眼)으로 보게 할 뿐이라

 

이일<사(事)>을 본 사람은 곧 시방(十方)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을 뵈올 것이니 모든 부처님을 뵈옵기 때문에 염불삼매(念佛三昧)라 이름하고 이렇게 관(觀)함을 짓는 것을 일체(一切)부처님의 법신(法身)을 본다고 하며 부처님의 법신을 보기 때문에 또한 부처님의 마음도 또한 보게 됨이니 부처님의 마음이란 것은 곧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이것이라 조건(條件)없는 자비(慈悲)로 모든 중생(衆生)을 섭수(攝受)하시기 때문이라 이 관(觀)을 수행(修行)하는 사람이 이 세상(世上)에서 몸을 버리면 모든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성취(成就)함이라


또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말한 것은 한 가지 상호(相好)를 따라 들어가기 때문인데 다만 미간(眉間)의 백호상(白毫相)을 관찰(觀察)하여도 지극(至極)히 명료(明瞭)해진다 미간(眉間)의 백호상(白毫相)을 보는 사람은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상호(相好)가 자연(自然)히 나타나게 되며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보는 사람은 시방(十方)의 한량(限量)없는 모든 부처님을 바로 뵈옵게 됨이라 한량(限量)없는 부처님을 뵈옵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이 목전(目前)에 출현(出現)하여 수기(授記)함를 내려주신다 이것이 일체(一切) 색신(色身)의 상(相)을 두루 관찰(觀察)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십육(十六)의 오묘(奧妙)한 관(觀)은 부처님을 관(觀)<관찰(觀察)>함으로써 요점(要點)을 삼는  이다


팔만사천상호(八萬四千相好)를 모두 상상(想像)하여 성취(成就)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만 미간(眉間)의 백호상(白毫相)만을 오수미산(五須彌山)처럼 관찰(觀察)하게 하거니와 만약(萬若)이 상상(想像)함이 성취(成就)되면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상호(相好)가 함께 나타나 현현(顯現)하리니 이것을 요문(要門)이라함이라 만일 앞의 모든 관(觀)을 수행(修行)하여 마음으로 유리(流利)함를 얻고 관(觀)함이 굉심(宏深)해진다면 저 미간(眉間)백호(白毫)의 수량(數量)에 칭합(稱合)한 관(觀)으로써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상호(相好)가 자연(自然)히 모두 현전(現前)하게 됨이라 소(疏)가운데에서 하열(下劣)한 근기(根機)에 응(應)하는 백호(白毫)의 상(相)을 관(觀)하게한 것은 앞의 모든 관(觀)을 수행(修行)하지 못한 사람과 비록 수행(修行)을 행(行)함이라도 관(觀)을 성취(成就)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몸에서 초심(初心)이 관(觀)할만한 모양(模樣)을 보여서 삼매(三昧)의 문(門)을 삼았다 또 자운법사(慈雲法師)는다만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장육(丈六)의 금구(金軀)가 연화좌대(蓮華坐臺)위에 앉자 계시는 것 만을 곧바로 상상(想像)하게하고 또 미간(眉間)의 백호(白毫)의 한 가지 상호(相好)에만 오로지 매달리게 하였는데 그 백호(白毫)의 길이는 일장(一丈)오척(五尺) 이며 주위(周圍)는 오촌(五寸)밖으로 팔능(八稜)이 있고 중간(中間)과 곁 부분(部分)은 함께 비었다 우측(右側)으로 돌아서 완곡(緩曲)하게 구르며 눈썹의 중간(中間)에 있어서 형정(瑩淨)하고 명철(明徹)함이 이루 다 갖추어 말하지 못할 정도(程度)이며 금빛의 얼굴에 환(煥)하게 반사(反射)되어 한계(限界)가 뚜렷하다


이 상상(想像)을 할 때는 멈춘 마음으로 상상(想像)에 주의(注意)하여 견고(堅固)하게 옮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상상(想像)이 만일 성취(成就)되면 또한 염불삼매(念佛三昧)가 현전 할 것이다 그래서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이르기를 만일 사람이 지극(至極)한 마음으로 생각을 매달아서 단정(端整)히 앉아 색신(色身)을 관찰(觀察)하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과 같아 조금도 부처님과 상이(相異)함이 없음을 알 것이니 비록 진로(塵勞)에 덮어 있다 해도 온갖 진로(塵勞)에 덮혀 가리지 아니함이라

이와 같이 짓는 관(觀)을 참된 염불(念佛)이라한다


이로서 부처님을 관(觀)하는 공덕(功德)이 이에 그 일<사(事)>과 같음을 알  것이다 또 저 세존(世尊)부처님의 상호(相好)의 광명(光明)이 미묘(微妙)하고 광대(廣大)하여 중생(衆生)들의 협소(狹小)하고 하렬(下劣)한 상념(想念)으로는 성취(成就)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부처님의 이에 저 진신(眞身)은 관(觀)하기 전에 먼저 형상(形相)을 상상(想像)하게 하였으니 부처님은 반듯이 연화좌대(蓮華坐臺)에 앉자 계심으로 또한 먼저 연화좌대(蓮華坐臺)를 관(觀)하여야한다 좌(座)를 관(觀)함이 이에 성취(成就)되면 형상(形相)을 상상(想像)할 수 있는 것이다


경(經)에서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 여래(如來)는 곧 법계(法界)의 몸이라 일체중생(一切衆生)들의 심상(心想)속으로 들어 가신다 이러한 까닭으로 너희들이 부처님을 마음으로 상상(想像)할 때의 이에 그 마음이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인 것이다

이 마음이 부처가 되므로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정변지혜(正辯智慧)는 심상(心想)을 수순(隨順)하여 발생(發生)하기 때문에 응당(應當)일심(一心)으로 생각을 매달아 저 부처님을 자세(仔細)히 관찰(觀察)해야 한다함이라


대저 법계(法界)의 신(身)이란 것은 보불(報佛)의 법성신(法性身)이라 시각(始覺)을 만족(滿足)하게 구족(具足)히 한 것을 보불(報佛)이라하며 그리하여 마침내 본각(本覺)을 나타내는 것을 법성신(法性身)이라 이름한다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이 서로 그윽히 합(合)하여야 응용(應用)을 일으킬 수 가 있다 그러나 중생(衆生)의 능감(能感)이 아니면 모든 부처님께서 이에 또한 어떻게 하여 능(能)히 감응(感應)하시겠는가 중생(衆生)의 능감(能感)은 물과 같고 모든 부처님이 능(能)히 감응(感應)하는 것은 해와 같다 이 때문에 시각(始覺)이 본각(本覺)에 합(合)하는 것은 밝은 달이 하늘로 떠서 오르는 것과 같고 감응(感應)이 청정(淸淨)한 상(想)에 들어가는 것은 그림자가 백천(百川)에 나타나는 것과 같음이라


능감(能感)이 있고 능응(能應)이 있는 이두가지 도(道)가 교합(交合)하는 것이 중생(衆生)의 심상(心想)에 들어가는 의미(意味)이다 또한 법계신(法界身)이라는 것은 불신(佛身)이기도하다 두루 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법계(法界)로 몸을 삼는다 이에 관불삼매(觀佛三昧) 를 깨달아 체득(體得)한다면 관(觀)을 이해(理解)하고 마음이 계합(契合)하여 불체(佛體)로 들어간다 불체(佛體)가 관혜심(觀慧心)으로 들어가면 이것이 곧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이해(理解)하는 것이다 때문에 본각(本覺)이 시각(始覺)으로 들어가면 이해(理解)도 있고 들어가는것도 있다 이 두 가지가 상응(相應)하면 이것을 중생(衆生)의 심상(心想)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마땅히 알지라 지금의 심관(心觀)은 음심(淫心)으로 본성불(本性佛)을 관(觀)했을 뿐 아니라 타불(他佛)에 의탁(依託)하여 본성(本性)을 나타낸 것이다 이 때문에 먼저 응신불(應身佛)이 나의 심상(心想)에 들어가는 것을 밝혔고 다음으로는 불심(佛心)의 전체(全體)가 본각(本覺)이 라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까닭으로 감응(感應)하는 부처님이 나타나면 본성품(本性品)이 밝아졌음을 깨달아 인식(認識)하게 된다 외부(外部)에 의탁(依託)한 의미(意味)가 성립(成立)되고 유심관(唯心觀)이 수립(竪立)되어 두 가지 의미(意味)가 서로 성립(成立) 하는데 이것이 지금의 관법(灌法)이다 또한 경(經)에서 말하기를 이 마음이 부처가 되면 이 마음이 곧 부처다 한 것은 지금의 관불(觀佛)을 보인 것으로 수행(修行)과 본성(本性)이 둘이 아닌 지취(旨趣)를 밝혔다


작불(作佛)이라 말한 것은 여기에서는 두 가지 의미(意味)가있다

첫째는 청정(淸淨)한마음으로 타방(他方)의 응불(應佛)을 능감(能感)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본래(本來)로 색상(色相)이 없는데 중생(衆生)들의 청정(淸淨)한 마음이 업식(業識)에 의지(依支)하여 부처님 의 법신(法身)을 훈습(薰習)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수승(殊勝)하게 감응(感應)하는 색(色)을 능견(能見)하는 것이다

둘째로 삼매(三昧)로 능(能)히 자기(自己)의 과불(果佛)을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생(衆生)들이 청정(淸淨)한 심상(心想)으로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성취(成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自己) 스스로가 마침내 작불(作佛)을 성취(成就)하게 된다 이 두 가지의 의미(意味)는 처음에는 타불(他佛)>을 작(作)하였고 다음에는 자기(自己)스스로의 부처님을<기불(己佛)>을 지음이라 마땅히 알아야한다

과보(果報)의 부처님은 수행(修行)하여 증(證)함을 따르고 자연(自然)이 아니라는 것을---여기에 나아가서 지음으로 하여<작(作)>전체(全體)의 본성(本性)으로 수행(修行)하여 증(證)함을 성취(成就)함에 성품(性品)의 덕(德)은 자연(自然)의 부처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이 부처님<시불(是佛)>이라 말한 것도 또한 두 가지 의미(意味)가 있다 첫째는 응불(應佛)이라 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성품(性品)은 본래(本來) 모양(模樣)이 없음이나 마음으로 감득(感得)하기 때문에 있다---한 것은 마음과 부처님 유무(有無)의 갈래가 분명(分明)하여 영원(永遠)히 상이(相異)함이라 지금은 이 견해(見解)를 민절(泯絶)하였기 때문에 중생(衆生)의 마음이 전체(全體)가 응불(應佛)이라

 

이것은 이 마음을 떠난 밖에는 다시 부처님이 없는 까닭이라 둘째는 마음이 과불(果佛)이라고 한 것이다 이미 마음이 과불(果佛)이기 때문에 성불(成佛)할 인(因)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중생(衆生)의 마음속에 이미 여래(如來)가 가부좌(跏趺坐)를 결(結)하여 맺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당래(當來)에 과보(果報)의 부처님을 기다리겠는가 이 두 가지 의미(意味)는 첫 번째는 응불(應佛)이고 두 번째는 과불(果佛)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과보(果報) 의 부처님이 본래(本來)갖추어져 인연(因緣)을 따라 성립(成立)하지 않았다는 것을 ---곧 이 마음이 부처가 되며 <시심작불(是心作佛)> 이 마음이 곧 부처<시심시불(是心是佛)>로서 전체(全體)의 수행(修行)이 본성(本性)을 성취(成就)하며 덕(德)을 수행(修行)하는 인연(因緣)으로 하여 성불(成佛)한 것이 아님을 나타냈다


이에 이 마음으로 부처가 되며 이 마음이 부처인 것으로써 삼관(三觀)을 나타낸다면 공(空)을 파(破)하고 가(假)를 성립(成立)하는것을 작(作)<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한다면 이는 이변(二邊)의 관(觀)이요 타파(打破)하지도 아니하고 성립(成立)하지도 않는 것을 시<시심시불(是心是佛)>라고 이름 하는데 이것이 곧 중도(中道)의 관(觀)이다

또한 전체(全體)가 시심시불(是心是佛)로써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면 삼제(三諦)가 함께 타파(打破)되고 함께 성립(成立)하며 전체(全體)가 시심작불(是心作佛)이면서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면 삼제(三諦)의 타파(打破)함과 성립(成立)함을 함께 부정(否定) 한 것이다 중(中)에 상즉(相卽)한 공(空)과 가(假)를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고 한다면 삼혹(三惑)을 능(能)히 파(破)하고 삼법(三法)을 능(能)히 성취(成就)함이라


이러한 까닭으로 타불(他佛)의 세 가지 몸이 원만(圓滿)하게 감응(感應)하는 것을 감득(感得)하여 내 마음의 삼신(三身)과 당래(當來)의 과보(果報)를 능(能)히 성취(成就)함이라 공(空)과 가(假)에 상즉(相卽)한 중(中)을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한다면 전체(全體)의 미혹(迷惑)함이 곧 지혜(智慧)이며 전체(全體)의 장애(障礙)가 곧 덕(德)이라 때문에 마음은 응불(應佛)이며 심(心)은 과불(果佛)이라 이러한 까닭으로 알아야함이라 시심작불(是心作佛) 시심시불(是心是佛)의 의미(意味)를 한마음으로 수행(修行)하여 닦는 사람은 부사의(不思議)한 삼관(三觀)으로 십육관(十六觀)의 총체(總體)이며 일경(一經)의 오묘(奧妙)한 종지(宗旨)가 되는 것이다


문장(文章)은 이 가운데에서 나왔으나 의미(意味)는 처음과 뒤에 두루함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수행자(修行者)는 이와 같은 의도(意圖)로써 정토(淨土)의 인(因)을 수행(修行)할 것이다 어떤 이가 질문(質問)하기를 무엇 때문에 경전(經典)에서 말씀하신 사상(事想)으로써 정토(淨土)에 곧바로 왕생(往生)해야한다 한 것을 의지(依支)하지 아니하고 이에 혜관(慧觀) 의 문(門)을 나타내어 초심(初心)에는 들어가기 어렵게 하는 것인가?


대답(對答)하여 말한다

관혜(觀慧)와 사상(事想) 내지(乃至) 사람가운데의 보잘것없는 선행(善行)까지도 다만 일심(一心)만 얻어 성취(成就)한다면 모두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함이 가능(可能)함이나 다만 거칠고 오묘(奧妙)함이 동일(同一)하지 아니 할 뿐이라



거친 것은 저 사상(事想)일뿐 오묘(奧妙)하게 하고자 한다면 심관(心觀)을 전일(專一)하게 행(行)하여한다 소(疏)에서 말하되 진실(眞實)로 이에 원만(圓滿)한 이해(理解)는 소승(小乘)과는 완전(完全)히 상이(相異)함이라 소승(小乘)은 유심(惟心)에 매혹(魅惑)<미혹(迷惑)함에 홀리어>하여 부처님은 외부(外部)로 부터 좇아 있다함이라


이러한 까닭으로 마음과 부처가 이에 그 자체(自體)가 동일(同一)하지 아니함이라 대승(大乘)의 수행인(修行人)은 나의 일심(一心)에 모든 불성(佛性)이 구비(具備)되어 있음을 알고 경계(境界)에 의탁하여 관(觀)함을 수행(修行)하며  부처님의 모양(模樣)을 이에 드려냄이라 이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를 관(觀)하는 것으로써 연(緣)을 삼고 심성(心性)을 훈습(薰習)하여 심성(心性)에 구비(具備)한 극락(極樂)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훈습(薰習)을 따라 발생(發生)한다 마음에 구비(具備)하여 발생(發生)하는데 무엇 때문에 심성(心性)을 떠났겠는가 전체(全體)의 마음이 부처이며 전체(全體)의 부처가 마음이다 종일토록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 종일(終日)토록 부처를 관(觀)하는 것이라 한 그 자취(自趣)가 분명(分明)하여진다


또한 마땅히 요지(了知)할지니 법계(法界)의 원융(圓融) 부사의(不思議)한 자체(自體)가 나의 일념(一念)의 마음을 짓는 것이다 또다시 전체(全體)로 ▪중생(衆生) ▪부처 ▪의보(依報) ▪정보(正報)▪ 육근(六根)▪경계(境界)을 지어 작(作)함이니 일심(一心) 일진(一塵)으로부터 내지(乃至)는 극미(極微)에 이르기까지 법계(法界)의 전체(全體)로 지어 작(作)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음이라 이미 하나하나의 법(法)을 전체(全體)의 법계(法界)가 지음으로 하여 나아가 하나만 들어 올려도 즉시(卽時)에 원융(법계圓融法界)인 전체(全體)의 분야(分野)가 된다


이미 전체(全體)의 분야(分野)라면 어떤한 물건(物件)이라한들 온갖 여러 가지 법(法)을 구비(具備)하지 않았겠는가 일체(一切)의 법(法)에 낱낱이 일체(一切)의 법(法)을 하나하나 모두를 갖추어 구비(具備)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까닭으로 금가(今家)에서 유색(惟色) 유향(惟香) 등의 의미(意味)를 수립(竪立)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비로(毘盧)자나 부처님께서 일체(一切)의 처소(處所)에 두루하여 일체(一切)의 모든 법(法)이 모두 불법(佛法)이다

 

이르는바 중생(衆生)의 성덕(性德)인 부처님으로 자타(自他)가 아니며 인과(因果)가아닌 바로 원상(圓常) 대각(大覺) 의 근본(根本)체(體)이다 따라서 과불(果佛)의 원명(圓明) 한 본체(本體)는 우리 범부(凡夫)들에게 본래(本來)갖추고 있는 성덕(性德)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네 가지 삼매(三昧)를 총괄적(總括的)으로 염불(念佛)이라 이름한다 이 관문(觀門)으로 저 안양국(安養國)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 의 경계(境界)에 의탁(依託)하여 오묘(奧妙)한 관(觀)으로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을 밝게 나타낸 진실(眞實)한 부처님의 체(體)에 나아간다면 비록 저 경계(境界)에 의탁(依託)한다고 해도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한마음에 동일(同一)하게 거처(居處)한다는것을 꼭 깨달아 인지(認知)해야 한다


심성(心性)이 두루하여 법(法)마다 조작(造作)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법(法)마다 구비(具備)하지 아니함이 없음이라 만일(萬一) 한 터럭만큼의 법(法)이라도 마음 바깥을 따라 발생(發生)했다면 대승(大乘)의 관(觀)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하였다 또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에서말하기를 부처님이 파사익왕(波斯匿王) 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떤 모양(模樣)으로써 여래(如來)부처님 을 관(觀)하는가 말씀하시자 왕(王)은 대답(對答)하여 말하였다 몸의 실제(實際) 모양(模樣)을 관(觀)하듯이 부처님을 관(觀)하는 것도 또한 그러 합니다

오온(五蘊)에 머물려있지 아니함이나 오온(五蘊)을 떠나지도 아니하며

사대(四大)에 머물려있지 아니함이나 사대(四大)를 떠나지도 아니하며

육처(六處)에 머물려있지 아니함이나 육처(六處)를 떠나지도 아니하며

삼계(三界)에 머물려있지 아니함이나 삼계(三界)를 떠나지도 아니합니다

내지(乃至) 견문각지(見聞覺知) 도 아니며 마음의 행(行)하는 처소(處所)가 소멸(消滅)하고 언어(言語)의길이 단절(斷絶)되어 진제(眞際)와 동일(同一)하고 법성(法性)과 평등(平等)합니다


저는 이 모양(模樣)으로써 여래(如來)부처님 의 몸을 관(觀)합니다 부처님은 말씀 하시였다 마땅히 이와 같이 관(觀)해야 할 것이다 이에 상이(相異)하게 관찰(觀察) 한다면 삿된 관찰(觀察)이라 이름한다 하였는데 이 의미(意味)가 더욱 분명(分明)해진다 또 말하였다 이에 그러하다면 무엇 때문에 저 국토(國土) 의 진신(眞身)의 오묘(奧妙)함을 곧바로 관(觀)하지 아니함인가 그리고 이 경(經)에서는 사람이 먼저 상관(像觀)을 닦도록 가르침인가


대답(對答)함이라 사바세계(裟婆世界)의 교주(敎主)<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가 낙방(樂邦)<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을 칭찬(稱讚)하고 중생(衆生)들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출(出)하여 벗어나도록 힘써 인도(引導)하시며 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십육만억나유타유순(十六萬億那由他由旬)의 법신(法身)을 관(觀)하라 가르침이라 그런데 거기에 우선(優先)하여 연화(蓮華)위의 보상(寶像)으로써 하신 것은 방편(方便)을 개시(開示)하여 거친 것을 관찰(觀察)하고 오묘(奧妙)한 것을 보게 한 것이다 대체(大體)로 거친 것과 오묘(奧妙)한 것이 상상(想像)함을 상이(相異)하게함이나 모두 본성(本性)을 따라 수행(修行)함을 발기(發起)하며 작고 큰 것이 형체(形體)가 상이(相異)함이나 모두다 근본(根本)으로부터 자취(自趣)를 드리운다


능관(能觀)의 본성(本性)이 애당초에 차별(差別)이 없는 것 인데 소관(所觀)의 경계(境界)인들 어떻게 측량(測量)하고 헤아리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원돈(圓頓)의 담론(談論)은 일음(一音)으로 두루 가피(加被)함이라 그 차제(次第)를 열어서 보임이나 점(漸)이 아니며 그 근기(根機)를 수순(隨順)하나 편(偏)이아님이라 관문(觀門)을 함께 계시(啓示)하여 실상(實相)을 전체(全體)로 나타난다 상교(像敎)의 근원(根源)이 어떻게 여기에 존재(存在)하지 않겠는가

이 염불삼매(念佛三昧)는 직절(直截)한 지취(旨趣)를 단적(端的)으로 제시(提示)한 시종(始終)이 두 가지가 아닌 담론(談論)이며 대승(大乘) 원돈(圓頓)의 도(道)이다


해와 달이 천하(天下)후세(後世)를 두루 비추듯이 진망(眞妄)의 마음이 하나에 상즉(相卽)하였으나 동일(同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여 이치(理致)가 나아갈 바가 있게 하였다 일용(日用)을 떠나지 아니하고 행해(行解)의 관혜(觀慧)가 모두 구족(具足)하였다 말할만하다 배우는 자가 어찌 가(可)이 이에 그 마음을 극진(極盡)히 하지 아니함이겠는가.